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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 손영성

Ending Credit | 2011. 11. 15. 14:4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뒤늦게 <의뢰인>을 보았다. 보고 나니, 역시 손영성 감독답군,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점은 초반의 정황증거를 거의 마지막까지 끌고간다는 점이다. 중요한 정황증거들은 영화의 초반 브로커(성동일)나 사무장(김성령), 또는 강변호사(하정우)의 입을 통해, 혹은 감독의 장면 제시로 인해 친절하게 이미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아내가 살해당했고, 남편은 살해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전혀 없고, 남편이 들어오는 것을 본 목격자의 진술도 있으며, 아내는 심지어 며칠 전 남편에 대한 심한 공포심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오로지 정황증거일 뿐이라는 것. 흉기도 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사체가 없다. 실제 증거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대부분 이런 영화, 장르물에서는 중간에 무엇인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며, 사건의 급박한 전개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사체가 발견되거나, 보다 직접적인 증언을 해줄 목격자가 나타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흉기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안검사(박희순)가 최후진술에서 이런 말로 발언을 시작한다. 인정한다고. 정황증거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음을 인정한다고 말이다. 아마 장르영화 팬이라면 여기서 "장난해?" 정도를 속으로 외쳤을 법도 하다. 도대체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 동안 무엇을 한걸까. 우리는 도대체 이 시간 동안 무엇을 보고 앉아있던 것일까.

그 빈 러닝타임을 이 영화는 맥거핀들로 채운다. 영화의 중간중간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출현한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있다. 촛불, CCTV, 교통사고 목격자, 사라진 가짜시체(더미)...그러나 이것들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면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사건의 향방을 뒤엎을 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 내내 감독이 던져주는 떡밥들에 차례로 낚여 긴 시간동안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반전이 발생한다. 범인이 아님을 눈물로서 항변하고,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오로지 정황과 인상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가 재판에서 결국 무죄판결을 받지만, 사실은 그가 진범이라는 그런 반전이. 이것을 과연 반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조금 옆으로 밀어놓고라도, 그러니까 단순히 이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떡밥들을 물다 못해, 결국은 2시간 동안 거짓말만 본 셈이다.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대담한 법정극의 전말, 신기루와 같은 성들. 우리는 이 신기루 오아시스들을 앞에 놓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허망함만을 느껴야 하는 걸까.

손영성 감독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계획했을 것이다. 일단 먼저, 그는 전작 <약탈자들>에서 전력이 있다. <약탈자들>은 여러 거짓(혹은 진실)들이 촘촘하게 얽힌 거대한 미로와도 같은 영화였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곳곳에 놓인 허방다리들을 만났고, 기꺼이 그 허방다리들을 밟고 어둡고 막막한 어지러움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결국 목적은 그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미로인지를 깨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번 영화 <의뢰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변호사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 이야기한다. 사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실외에서 일어났는가, 실내에서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번 사건과 같은) 실내 사건의 경우 증거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포인트는 '스토리'를 잘 짜맞추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랬다. 문제는 그 '스토리'였다. 스토리를 얼마나 잘 만들어 관객(배심원)들을 그 스토리 속에 빠뜨릴 수 있는가의 여부. 그것을 간파한 강변호사는 중간에 약간 위험하고 대담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한철민(장혁)을 도리어 자신이 자극하여 스토리의 결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왜냐하면 스토리에서는 결국 감동이 중요하고, 개연성이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놓고보면 사실 마지막의 반전은 반전이 아닌 셈이다. 즉 그 반전의 목적은 관객을 다른 결말로 이끌기 위함이 아니라, 이 2시간 동안 본 이야기 자체조차도 결국은 거대한 거짓말, 혹은 만들어진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반전 그 자체의 전개 과정만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남자가 있고, 그에게는 정황증거밖에 없다. 그러나 그 범죄를 입증하려는 쪽은 무엇인가 영화내내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남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계속 항변한다.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있다고 할 때 당신이 익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가 결국 범인이 아닌 것은 당연히 반전이 될 수 없다(그게 반전이라면 검사측에게 영화 내내 그렇게 뭔가 미심쩍은 뉘앙스들을 켜켜이 쌓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상가능한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예상가능한 선택지는 물론 반전으로서의 기능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예상가능한 선택지를 고의로 하나밖에 남겨두지 않은 이 이야기를 <프라이멀 피어>나 여타의 반전극과 비교하는 것 또한 조금은 민망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영화가 대중영화가 아니었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그 친절한 설명적인 결말보다는, 강변호사의 쇼가 펼쳐질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떠한 미동도 없이 살짝 미소만 짓는 한철민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끝내는 것은 어땠을까. 진실은 저 너머에...)

결국 이 영화는 진실이라는 것은, (정황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증명할 아무 실체가 없이 오로지 이야기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의 무서움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 속 강변호사는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패배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승리했다. 정황증거로만 판단하는 것이 어떤 잘못된 판단을 야기할 수 있음을 스스로의 행위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의 식대로라면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 - 범인이 아닌데, 범인으로 형을 받는 경우 - 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보다 무서운 점은 우리는 그런 속에서도 무엇인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조금 돌려 질문을 한 가지 해보면, 만약 우리가 이 영화의 배심원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배심원이라면 이 영화를 본 관객들보다 더욱 제한적으로 사건을 알 수 밖에 없다. 그 제한적인 사실만을 놓고, 배심원은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어떤 특정의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아주 작은 문제에서부터 한 사람의 생과 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떤 판단을 내린다. 그 판단들에서 생겨나는 어지러운 균열들을 전작 <약탈자들>에서부터 이 영화 <의뢰인>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흥미로운 이야기의 외피를 두르고 그려나간다. 본인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대중영화로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좋은 본보기.  




- 2011년 11월, CGV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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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쉬가르 파르하디

Ending Credit | 2011. 10. 27. 17:18 | Posted by 맥거핀.



 


사건 케이스 하나.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중산층 부부 씨민(여)과 나데르(남)는 별거를 시작한다. 별거가 시작되면서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 테르메를 돌보기 위해 가사 도우미 라지에를 집에 들이는데, 얼마 뒤 일이 벌어진다. 라지에가 아버지 손을 침대에 묶어두고 무단으로 외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더군다나 라지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이 없어진 것. 이에 화가난 나데르는 라지에와 언쟁을 벌이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라지에를 집밖으로 밀쳐내다가 그만 라지에가 계단에서 구르게 된다. 그리고 라지에는 4개월간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더 책임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아마도 주의깊은 누군가는 이 진술만 가지고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위의 진술만 놓고 보면, 몇 가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지에는 과연 무슨 일로 외출했는가, 그것이 정말 어떤 시급한 일이었는가, 라지에가 그 돈을 가져간 것이 맞는가, 나데르가 과연 심한 고의성을 가지고 라지에를 밀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등등 세부적인 확인을 요하는 사실은 많다. 그러나 과연 이 정도 사실들만 확인된다면,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이어지는 몇 가지 질문들. 라지에의 갑작스런 외출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 때 우리는 그 외출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데르가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격분하여 그 사실을 망각하고 행동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느 정도까지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등등

씨민과 나데르의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별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수많은 문제들과 얽혀 있다. 여기에는 씨민과 나데르라는 성별의 문제가 있고, 중산층 부부인 씨민과 나데르 부부와 그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라지에와 히잣부부라는 경제계층적인 문제가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란 사회를 둘러싼 종교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거짓과 양심의 공방을 둘러싼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있다. 또 동시에 테르메와 소마예라는 양가의 딸들을 등장시켜 가족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며, 각 개인에게는 사건에 있어서의 판단 방식과 대응의 문제를 묻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계속적으로 등장인물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가치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물론 영화의 큰 축은 위에 진술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곁가지에서 등장인물들은 지속적으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것은 꽤 커다란 사건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볼 때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인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당신이 여성 가사도우미인데 치매 남성이 실수로 옷에 변을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편 외 다른 이성의 벗은 몸을 보아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영화는 거의 매순간 등장인물들을 어떤 딜레마 속에 빠뜨리며,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들이 단지 등장인물들에만 던져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우리는 이혼법정에 나와있는 씨민과 나데르를 마주하게 된다. 이 장면이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심사관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심사관의 시선과 동일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장면에는 각자의 입장을 항변하는 씨민과 나데르만 있을 뿐, 심사관은 카메라 자체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카메라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은 심사관이 된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심사관이 되어 씨민과 나데르의 진술을 듣고 판단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 입장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결국 제한된 각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명확한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진실은, 혹은 사실은, 이 두 사람의 각자의 입장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표명하는 사실은 사실 이 두 사람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은 분명 있지만,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진술을 들으며, 나름 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러한 제한된 진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자세를 영화의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의도적인 추리극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흔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를 보다보면은 결국 우리는 어떤 제한된 진술과 부정확한 사실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된다(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추리극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하다). 이 사건을 밝혀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번인가 영화를 다시 되돌려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초반의 어떤 사소해 보이는 사건과 동작들이 이 영화 속 사건의 판단을 내리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봐도 그 장면의 진실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반의 어떤 장면들에서 중요한 몇가지는 감독에 의해서 숨겨졌음을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감독의 편집장난에 놀아난 것일까. 그렇게 단정짓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그순간 영화는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것을 미리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서, 당신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질문을 바꾸어도 좋다.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당신은 그만큼 다른 어떤 것을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어떤 것들을 당신은 감수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과도 연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딸 테르메를 앞에 두고 심사관은 묻는다. 이혼을 앞둔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너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너는 누구를 잃을 준비가 되었는가.

딜레마란 결국, 무엇인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물론 모든 선택이란 게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딜레마는 그로인해 선택한 것 외에 나머지 하나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좀 다른 얘기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드 중에 <24>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의 매력을 스케일이 큰 액션, 배신과 역배신이 넘쳐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스피디한 사건 전개 등 여러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넘쳐나는 딜레마들이 그것들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의 잭 형님은 거의 매 에피소드에서 딜레마에 처하며, 그 딜레마의 강도는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국가반역자로 몰려 평생 도망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삶을 감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목숨을 다른 어떤 것과 맞바꾸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 선택들은 때로 매우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고, 해서는 안될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가 이 딜레마적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결국 지지하게 되는 것은 그 선택이 두렵고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최악의 결과 - 아마도 잭의 죽음을 포함한 - 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딜레마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무서운 점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의 마지막과도 조금은 통한다. 딸 테르메는 사실 이 영화에서 의외로 가장 정확한 관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중간에 세탁기를 놓고 하는 말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가서도 그 관찰력은 그 위력을 어느정도 발휘한다. 그 테르메가 나중에 가지는 선택의 태도. 심사관은 반복하여 확인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분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너는 답을 가지고 있느냐고. 테르메는 망설이지 않고 명확하게 대답한다. 답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답을 가지려 하는 태도 말이다. 아마도 딜레마로 가득한 하나의 영화를 놓고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선택은, 나는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다 공감하며,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그 윤리와 도덕의 질문들을 나는 피해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누가 했던 말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영화가 그냥 당신을 쑥 뚫고 지나간 것이 되므로. 아마도 좋은 영화란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얹혀있는 영화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냥 뻥뚫고 지나가는 까스활명수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100자평에 "영화로 치르는 윤리론 시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어쩌면 상당한 악평일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영화관 같은 곳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을 바란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실 어쩌면 다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거짓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는 결국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된다. 만약 우리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겨우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어떤 선택 뿐이며, 그 선택이란 그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리 각자가 가진 세계관이라는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24>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우리가 잭 형님에 열광하는 것은 물론 잭 형님이 각 딜레마에서 빠르고 화끈한 선택을 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잭 형님이 가진 대원칙, 즉 그의 세계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어 <24>의 세계라면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아야한다는 세계관이다.  배나온 중년남 잭 형님이 그래도 조금은 섹시해 보이는 것은 그 원칙을 가지고 딜레마를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애정남'이 아니지만, <24>를 보는 잭 형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이 애매한 것이 가득한 사건에 어떤 판결을 내려보려 한다(이 판결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것은, 물론 나의 윤리관이 그 정도 깜냥밖에 안되는 까닭이다). "할아버지의 치매 악화 및 부상과 원고 라지에의 유산의 경중을 놓고 봤을 때 원고 라지에의 유산이 훨씬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후 정황을 놓고 봤을 때 피고 나데르와 그의 가족들에게 아기 유산에 대한 일정 정도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고 라지에가 본인의 일부분의 과실을 인정하고 있고, 대가 없는 보상금을 원치 않으므로, 라지에에게 가사 도우미 일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맡기되, 기존 일당의 10배를 보수로 지급할 것을 명한다. 땅땅땅."



덧.
접근성도 좋고, 영사시설도 좋고, 친절한 'KU시네마테크(건국대)'에서 왜 이렇게 관객이 없는지 의아함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달랑 3명의 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그 3명의 관객 중의 한 명은 무려 홍상수 감독(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건대에 재직중이다). 영화가 끝난 후 텅빈 영화관 로비에서 마주보는 행운(?)을 누렸으나, 타고난 소심증으로 싸인도 못 받았다. 아....




- 2011년 10월, KU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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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거리 | 2011. 10. 25. 19:34 | Posted by 맥거핀.




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 2011년 10월, 인디플러스

:

몰락의 아이콘들

끄적거리기 | 2011. 10. 25. 19:28 | Posted by 맥거핀.

* 얼마전 알라딘에 썼던 글, 옮겨둠.

1.
지난주 와우북페스티벌에 들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을 들고 왔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주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그다(이 책 <빅토르 세르주 평전>에는 원제에 충실하게 <러시아 혁명의 첫 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그의 삶을 정리한 간략한 글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참 전형적이다. "러시아의 혁명 인민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르주(본명 : 빅토르 키발치치)는 열다섯 살까지 벨기에에서 살았다. 고국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1919년, 스물여덟살 되던 해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독일판 10월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 좌익반대파와 함께했다.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였던 세르주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평생을 핍박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결국 1936년 러시아에서 쫓겨나 파리와 마르세유를 전전하다가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 1947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실패하고 몰락한 자의 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세르주는 어린 시절 딱딱하게 말라붙은 빵을 커피에 적셔 먹는 끼니를 서술했으며, 그의 동생은 쫄쫄 굶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홉 살에 굶어 죽었다), 한 때 꿈을 가지고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 혁명이 그 혁명을 지지해준 자들에게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아무 조직과 힘이 없었던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고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하여 치열한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진정한 혁명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그 와중에 그는 당연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거의 지구의 반대편까지 쫓겨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이야기. 아마도 영화로 만들고자 시나리오로 잘 정리하여 제작자의 책상에 정성껏 올려둔다고 해도, 두어 줄의 간단한 시놉만 보고도 그것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의 이 때에 이런 것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라면, 성공한 혁명가의 책, 아니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낭만적으로 보이는 다른 혁명가의 평전들 -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 - 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몰락한 혁명가의 생애, 아니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라도 몰락한,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이건 무슨 이상 심리일까. 어쩌면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나의 삶에 대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으려는 당연한 심리일까. 

2.
몰락한 것은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삶 뿐만이 아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시간에도 지금 몰락한 자들의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것도 비극물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물론 그것은 김병욱의 새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야기이다. 김병욱은 이번 시트콤의 키워드를 '몰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김병욱의 전작들에서도 몰락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였으며, 몰락한 캐릭터들도 가끔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웃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몰락해 가고 있는 자들이 망가져 가는 틈에서 원래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병욱의 이야기들은 꽤나 자주,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들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러 묘한 웃음들을 끼워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그의 시트콤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이 아닐까. 김병욱의 시트콤들은 이제 웃음은 뚝!, 이라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여러번 선물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끊어버릴 때도 그랬고, 전체 이야기를 종결해 버릴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시트콤에서 상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 하기는 김병욱의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장 자주 되묻던 질문은 "이거 시트콤 맞아?" 였으니까.

(글쎄. 앞의 심리와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그런 서늘한 순간들을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김병욱의 시트콤들을 어떤 시트콤을 대하는 느낌보다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많은 시청자들을 '김병욱 안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바로 전작의 꽤나 비극적인 결말도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괜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결말을 본 후 주위의 하이킥 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결말이야!, 라고 했었지만, 집에 와서는 그 마지막 회를 몇번인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몰락'은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집안의 가장인 안내상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내몰렸으며, 그 덕분에 아들 종석은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리고 딸 수정은 미국 유학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몰락의 이야기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얹혀 사는 계상의 옆집에는 청년 실업의 상태로 선배 언니에게 얹혀 살고 있는 진희가 있으며, 이 집의 집주인인 지원에게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뭔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직 캐릭터의 중심을 잡는 초반임에도 길바닥에서 누워서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툭하면 나타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 바닥 땅굴로 공습경보를 받고 대피하듯이 달려가기도 하고, 조폭들을 피해 쓰레기통에 숨기도 하고, 사기 당하여 학교 공금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간 다른 김병욱표 시트콤들보다 훨씬 더한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몰락은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 캐릭터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일종의 징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내상은 별 것 아닌 일에 집착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는 성격이 도드라지며, 백진희의 경우는 그의 삶의 피곤이 중첩된 몽유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나레이션의 등장이다. 이 나레이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이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마치 인류학적 보고서를 써내려가듯이 차분하게 분석하고 설명한다(물론 이는 미래의 이적이 과거의 어떤 때를 회상하는 식이라는 이 시트콤의 거대한 액자와도 관련이 있다). 즉 이 시트콤은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보이는 어떤 '징후적인 신호'에 관심이 있다. 이 시트콤은 이 몰락한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거대한 분석 보고서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이 몰락한 세기의 징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해 낼 것인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의 몰락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작처럼 결국 몰락의 종말인 죽음에 이르게 될까.

3.
그리고 여기 한국프로야구에도 몰락의 거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팀이 있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위업을 남긴 팀이자, 내 20년 가까이 되는 응원팀인 트윈스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고 하니, 뭔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을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리그는 수십개의 팀 중에 달랑 몇 팀 포스트시즌 진출하는 그런 리그가 아니다. 8개 팀 중에 4팀 포스트시즌 나가서 뚝딱뚝딱 아장아장한 다음 우승팀 가려내는 그런 작은 리그다. 그런 트윈스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뭐랄까, 9년 넘게 반등수 50% 안에 못들고 있는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런 트윈스는 올해는 더욱 기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시즌 초중반까지 2-4위권을 유지했고, 초반 30승도 다른 어떤 팀보다 빨리 올렸음에도 결국 6위(그것도 공동이니 사실상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트윈스 상당수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이번 야구 시즌이 빨리 끝나는 거였다. 망가져가고 있는 팀을 보면서 DTD니, 내려갈 팀이니 하는 비아냥을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도 있었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무엇인가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늘상 스토브리그에 가장 바쁜 것은 트윈스팬들이었고, 가장 설렜던 것도 트윈스 팬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여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했고, 마침 박감독의 사퇴 발표로 팬들은 올것이 왔다고 잔뜩 기대했다. 트윈스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희망적인 꿈을 가득 담은 각종 카더라와 설들이 난무하였고, 팬들은 곧 거의 예정되어 있는 김연아 금메달을 생각하며 마지막 프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발표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 것이.

팬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넘어서, 허탈과 그에 따른 이탈을 예고하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감독이 선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나은 성적을 올리고,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혹은 기대한다고 해도 다른 면에서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트윈스 팬들이라면, 몇년 동안 이어진 트윈스의 부진이 단순히 야구 실력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물론 야구 실력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구실력이란 것이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트윈스나 다른 어느 팀이나 기본 자원은 같다. 좁은 한국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부임해왔던 정치적인 인사들과 아직 프런트 및 코치진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팀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조금씩 보아왔다.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을 이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구단의 생각은 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로 따지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없고 교장의 비위만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교사를 아이들 성적이 엄청 떨어져서 해고했다고 좋아했더니, 교장의 친인척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꼴이다. 옆 명문학교의 정말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들이 몇 명씩 놀고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팬들이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우리 프로야구의 기원에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의 선전용, 혹은 귀막음 도구로 재벌들의 결합으로 시작된 우리의 프로야구. 그 프로야구는 그들이 말한대로 결국 국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은 결국 그것을 가진 기업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팬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현재 전혀 들어갈 틈이 없게 짜여진 이 구조에서, 팬들의 바람이란 결국 헛된 카더라일 뿐이라는 것. 내 소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는가, 아마도 트윈스 구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우승을 열망하지만 구단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뭐 우승...하면은 좋기야 한데, 뭐 안해도 항상 야구장에는 관객들 그득하고, 어차피 적자인 상황에서 야구단이야 일종의 홍보물일 뿐이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 트윈스 홈페이지의 회원게시판은 감독 선임 이후 며칠 째 오류를 핑계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중이다(뭐 어쩌면 엘지의 기술력이 이 수준일지도..).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수막을 들고 야구장에 갔다가 폭도로 몰리거나, 지나친 팬심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뉴스에서 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은 오늘도 여전히 멍하니 야구중계를 튼다. 

4.
자꾸 몰락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몰락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는, 장정일 작가가 <빌린 책/산 책/ 버린 책 2>(이 책 역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사왔다)에 쓴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장정일 작가는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몰각과 자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도가니>와 같은 영화가 몰각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영화 <숨>은 자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몰각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있다. 스크린과 합일하여 충만해지는 상태적인 쾌락이 몰각이라면, 아마도 영화보기는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 <숨>이 <도가니>와 가까운 이야기를 상당히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에서는 결국 장애인 여주인공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꿈이 외부의 선을 표방한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도가니>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도가니>에 대한 여러 글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도가니>의 명확한 선악 구분과 달리,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상당히 모호한 데가 있다. <도가니>가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 영화 <숨>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즉 분노가 일종의 쾌락과도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몰각에 가까울 것이고, 생각과 반성은 일종의 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나는 <도가니> 보다 <숨>이 더 영화적으로 낫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는 영화가 사람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든다면(즉 몰각을 시도한 영화가 그 몰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만큼 충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 <숨>은, <도가니>와 그로 인해 이어져가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를 둘러싼 일련의 진행들을 보면서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들, 조심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 분노가 무엇을 위한,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분노는 나의 쾌락적인 만족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광주인화학교 대책위에서 과도한 관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 학교 폐쇄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정부의 대책들을 보면 조금은 여러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 또 동시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은 더더욱 조금은 조심스럽고 최대한 피해자들을 보호해가면서 사건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도가니>의 열풍 속에서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또 조금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아무튼 이 영화 <숨>은 굳이 <도가니>와 연결짓지 않아도 그 나름의 영화적 성취 속에서 또다른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윤리의 문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영화적 성취나 윤리의 문제는 혹시라도 쓰게 될 다음 포스트에. <도가니>를 본 사람에게 추천, 곧 내려갈 것 같으니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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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 Obscura -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Turn on the Radio | 2011. 10. 23. 03:48 | Posted by 맥거핀.

He said “I’ll protect you like you are the crown jewels” yet
Said he’s feeling sorrier for me
the more I behave badly I can bet

그가 말했죠 “왕관의 보석처럼 너를 지켜줄 거야” 하지만
말했죠 내가 못된 행동을 할 수록
더 미안해 진다고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Jealousy is more than a word now I understand
You can stay a girl by holding a boy’s hand

질투는 단어 그 이상이라는 걸 이해해요
소년의 손을 잡아 소녀를 안도할 수 있어요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I’ve got my life a compilation here to sort out
I’ll take myself to an east coast city and walk about

이제 내 삶을 정리하려고 여기로 왔어요
이스트코스트 도시로 가서 돌아다닐 거에요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Hey Lloyd I’m ready to be heartbroken
I can’t see further than my own nose at the moment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그대,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어요
이 순간 나는 내 한치 앞도 볼 수 없어요 

 

.................................. 

예전에 어떤 블로그 이웃 분이 추천하셔서 알게 된 노래. 가끔 우울할 때 들으면서 따라 부르면 이상하게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마법을 지닌 곡. 사실 가사를 보면 '난 마음이 아플 준비가 돼 있다고' 하는 노랜데...매일 노래만 듣다 유투브 무비를 보니, 이 무비 또한 참 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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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젼 Contagion, 스티븐 소더버그

Ending Credit | 2011. 10. 14. 15:4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다보면, 이 영화는 미래의 묵시록일까, 아니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현재의 진실일까,라는 물음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구제역 파동, 밀림들의 파괴, 대형 제약사들의 농간, WHO와 CDC의 음모, 사스와 신종플루의 창궐 등에 관한 몇 개의 뉴스릴을 재주껏 조합하면 아마도 이런 영화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김혜리 씨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가 농담삼아 말했던, 이 영화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뉴스들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라는 말이 어쩌면 아주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이 영화는 드라마를 거의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드라마를 만들고자 작정하고 마음먹었다면, 몇 개의 눈물나는 드라마를 여기서 쭉쭉 뽑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양상'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작정하고 '시사매거진 2580'이나, '추적60분'에 나올 법듯한 배경음악들을 삽입하고, 수천만달러 짜리 배우를 극 초반에 죽여 기꺼이 머리가죽을 벗겨낸다. 그는 자칫 드라마에 빠져 관객이 다른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묘하게 드라마가 살아있다. 그것은 물론 이것이 결국 뉴스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소더버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처럼도 보인다. 어떤 리뷰들의 농담들처럼, 단순히 그 메시지란 '손을 철저하게 잘 씻자'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첫 희생자인 베스(기네스 펠트로)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좇는다. 그녀가 물잔을 들고, 카드를 집어들고, 어딘가를 스치듯이 만지고 하는 등의 동작들. 물론 이것의 주 목적은 그녀의 동작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들 사이로 유유히 유영하는 바이러스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여러 사람들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도 영화는 비슷하게 잡아낸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 시작은 접촉(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contagion)들을 잡아내기는 하되, 그 접촉은 대체로 사람과 사물의 접촉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반 상식이 가르쳐주는대로, 당연하게도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물이 접촉했을 때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직접 접촉, 예를 들어 악수나 포옹 등에서 바이러스는 더욱 신나게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그 장면들을 왠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해답처럼 보이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된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자신이 일하는 센터 직원의 아들에게 개발된 백신을 놓아주며, 악수를 하고, 악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다. 악수라는 것의 의미는 내 오른손에 무기가 없음을, 즉 내가 당신에게 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이 장면이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점은 소더버그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잉여를 조금도 용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필요하게도 악수의 참의미까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결국 어떤 잉여를 감수하고라도 이 위치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 의미란 결국 소더버그가 담고 싶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베스의 딸이 남자친구와 춤을 추며 유투의 노래가 깔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메시지란 결국 영화를 뒤집어보는 데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의 창궐에 의한 파국을 막는 방법은 결국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접촉이 제로가 된다면, 결국 바이러스에 인간은 패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립된 채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누가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인가. 그러므로 결국 최종적인 극복은 인간들간의 연대로 가능한 것이라는 소더버그 식의 믿음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소더버그 식의 연대는 한편으로 조금은 특이해보이는 점도 있는데, 그 연대는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소셜미디어적인 연대,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버스에서 쓰러진 남자를 구해줄 생각없이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들도 그렇고, 블로거 저널리스트(주드 로)를 영화에서 처리하는 뉘앙스에서도 느껴지지만, 소더버그는 이러한 방식의 연대, 혹은 관계에 별로 신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공포의 전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공포심 그 자체'이며, 그것은 도리어 이런 바이러스의 확대보다도 인간 자신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심각한 문제란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이러스의 근본적 퇴치 방법인 '긍정적인 연대'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연대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데, 그 이성이란 공포에 잠식되지 않았을 때만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맷 데이먼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인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블로거 저널리스트가 살아남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왠지 영화 <링>을 연상하게끔 하기도 한다. 영화 <링>에서 가장 무서운 씬은 아마도 사다코가 TV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씬이 아니라, 마지막에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여자의 굳은 얼굴일 것이다. 사다코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여 전파시키는 자에게 남은 삶이라는 상(혹은 벌)을 내려주었다. 어쩌면 이 <컨테이젼>에서의 바이러스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블로거 저널리스트는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포의 확산'의 매개체로서 그것의 전파에 큰 공헌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영화 속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그려져야만 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링>의 사다코 바이러스는 이 <컨테이젼>의 바이러스보다는 조금은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사다코 바이러스는 누구나에게 찾아간다는 점.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위를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축구로 치자면 전술과 전략에 능하기보다는 선수들의 적재적소의 배치와 교체에 능한 감독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효율적인 장면 구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는 숏의 낭비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들의 이미지의 낭비 또한 원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영화가 한편으로 뉴스릴들의 조합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왜냐하면 뉴스란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가장 필수적인 숏들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것이 뉴스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 또한 잘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한편으로는 누구나 척 하면 알 수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등장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이 영화를 거의 정말 뉴스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영화의 캐스팅된 배우들은 표정만으로도 짧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를 거의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단 한 두 장면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잘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잘 갈고닦은 장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솜씨이다. 흥행에 개의치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한 그의 결단력과 능력에 경탄을. 



덧.
아..이 영화에서의 케이트 윈슬렛은 너무 멋있다.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위 사람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아참... 나도 이제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얼굴은 그만 만지고...



                                                                                        - 2011년 10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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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허종호

Ending Credit | 2011. 9. 26. 15: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꽤 힘들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이 영화가 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생각을 해보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요즘의 많은 한국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상당한 '기획물'의 냄새가 난다. 물론 기획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명작으로 추앙받는 많은 영화들도 상당수는 철저한 기획의 산물이고, 감독의 힘이라기 보다는 제작자의 힘으로 탄생한 명작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한국영화들을 보면, 조금 이상한 기획들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영화들은 일단 그럴듯해 보이는 한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을 잃은 냉혹한 채권추심원이 암선고를 받고 장기이식을 받기 위해 사기꾼 여자를 만난다..아마 이 영화도 이런 그럴듯하고, 뭔가 물씬물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자 이거 돈이 될 거 같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일단 명확한 캐릭터들은 이런 기획에 필수적이다. 주조연할 것 없이 캐릭터들의 성격은 과장에 가까울정도로 선명해지고, 그들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영화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맥락을 알 수 없게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고, 붙은 이야기들은 처음의 플롯과 조금씩 겉돌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깔끔하고 차근차근히 뼈대를 만들지 않고, 일단 큰 줄기만 세운 다음에 가지를 붙여나가는 식이니까. 동시에 뭔가 새로운 입김이 여기에 계속적으로 붙는다. 액션도 붙어야 하고, 감동도 붙어야 하고, 유머도 붙어야 하고, 잔재미도 붙어야 한다. 그러므로 난데없이 신파의 코드가 등장하고, 카체이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처음에 필요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게도 뭔가를 만들어주려다 보니, 이상한 잔개그들이 붙는다. 영화는 점점 뭔가 어리둥절해진다.

이 영화 <카운트다운>이 딱 그런 식이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이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 다음이다. 어차피 이런 기획류의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게 마련이고, 그 어지럽게 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이런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매끄러운 봉합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인상적으로 보이는 씬들도 많다. 그런데 그 씬과 씬들이 이상하게도 잘 붙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인상적인 영화들의 모자이크인 것도 같다. 각 씬들은 때로는 날카로운 유머를 발휘하고, 다른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시원한 액션을 보여주고,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을 만들면서 어떤 인상들을 심지만, 그 인상들이 뚝뚝 분절되다 보니, 그 인상의 힘마저도 조금은 의심하게 만든다. 즉 각각의 씬들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와 다른 어떤 좋은 영화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어떤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 혹은 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를 놓고서는 당연히 영화에서 진작 해결되어야 할 필요없는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화의 주인공 태건호(정재영)는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일종의 생존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외면적인 차가운 냉혹함은 겉과는 다르게 속에서의 부글부글 끓는듯한 살고자 하는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살고자 하는 욕구로 차하연(전도연)과 또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건 동행을 하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의 화신이 되었을까. 단지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억울해서? 아니면, 아들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아들이 이 냉혹한 세계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신만이라도 강해지려고? 냉혹해지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회에 어떤 복수를 행하려고? 이 중 어떤 것도 답일 수 있고, 몇 가지를 조합한 것이 답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 태건호가 영화의 거의 마지막까지 아들이 죽은 진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이 답변만으로는 뭔가 군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떤 답에도 모호한 입장을 내비친다. 아니, 어떻게 보면 뭔가 입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므로, 어떤 중요한 메시지처럼 보이는 '아이러니(irony)'라는 것에 그 답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뜻풀이까지 보여지듯이, 아이러니는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 '황당하다'는 말은 결국 그 이유나 의미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황당한 것은 황당한 것이지, 그 황당한 것에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저 우연이 빚은 결과일 뿐이며,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의 이야기로 가져와본다면 태건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일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다른 수많은 것에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차하연의 딸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그저 설명될 필요 없이 아이러니에 가까워질 뿐이다. (마지막 감동 코드를 넣으려면 필요해!) 영화 속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뭔가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개연성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 역시 아이러니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마지막 태건호는 조명석(이경영)과의 만남에서 차하연을 스와이(오만석)에게 인질로 맡기고, 뭔가 승부수를 띄우는 듯 하지만, 스와이가 차하연을 데리고 그 장소에 나타남으로써, 멋진 대결은 김상진씩 떼싸움이 되어버리고, 사건은 결국 태건호가 부른 경찰에 의해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이유로 스와이에게 나타나 담판을 짓는 듯한 액션을 취하는지?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 '아이러니'라는 것으로 가려진 의미를 관객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건다. 그것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가끔 숏의 빠른 분절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차하연의 사기행각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숏의 빠른 분절과 타이트한 리듬과 인상적인 대사들로 나타내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굳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을까. 차하연의 사기행각은 사실 훨씬 간단한 방식이니까. 차하연의 말대로 그런 남자들이란 이쁘고, 돈 좀 가지고 그럴듯하게 말해주면 넘어오는 단순한 존재들일 뿐이니까. 차하연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굳이 그런 다른 몇몇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설명들이 필요했을까 의문이다. 숏의 잦은 분절로 빠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복잡한 이야기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이지,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게 현혹시킬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이 영화가 캐릭터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인상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나름 중요한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장면을 소화해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고는 다시 바로 사라질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와 비슷하게 등장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캐릭터를 영화에 불러들일 때는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스크린에서 소비될 때는 어떤가.) 이들은 단지 관객에게 눈물샘을 자극할 요량으로 이 스크린에 불려나와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기획물의 맥락에서 이들은 단지 다른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 앞으로 소환된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태건호에게 추궁당한 장애를 가진 늙은 부모는 그렇게 소환된 후 곧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태건호의 부모가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인물로 표현될 이유가 있을까. 태건호의 아들이 또 장애를 가진 인물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캐릭터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비슷한 것을 차하연의 딸에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10억을 그렇게 쉽게 뿌리치는, 친부모에게 버려진 채 어렵게 살아온 10대 소녀가 단지 '쿨한 것'으로만 느껴질 수 없는 이유. 웃으면서도 어리둥절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 <카운트다운>을 보고 나오니 결국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강한 캐릭터도 있고, 재치있는 대사도 있고, 인상적인 씬들도 있다. 그 인상적인 씬들은 액션 장면에서는 충분히 쾌감을 느끼게도 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씬에서는 충분히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대중영화로서의 전부일까, 혹은 대중영화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극대치일까. 요즘의 어떤 한국영화들을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매끄러움이 유달리 눈에 띈다. 예전의 한국영화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던, 할리우드적인 매끄러움이 점점 대세가 되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영화들은 어떤 할리우드 영화들의 일부 특징들도 같이 흡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질문을 하기는 하되, 그 답을 극도로 빠른 시간에 관객들에게 되돌려줘 일종의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 따위는 하지마라, 생각은 내가 대신해준다는 식이다. 당신은 재치있는 대사 나올 때 적당히 웃어주고, 액션씬 나올 때 적당히 쾌감을 느껴주고, 감동씬 나올 때 적당히 따뜻해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 <카운트다운>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뭔가 질문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 답변은 이거다. 그건 그냥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것, 즉 황당한 일일 뿐이니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일까...생각해본다.




덧.
요즘에 개봉 전주 주말에 유료시사회를 하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말이 유료시사회지, 그저 미리 땡겨서 하는 주말개봉일 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빠른 입소문으로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 사이에서 대세를 선점하려는 배급사들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체로 입소문으로 선전할 것 같은 영화들 -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자신이 있는' 영화들 - 이 이런 전략을 쓰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 <카운트다운>은 조금 호불호가 팽팽하게 갈릴 것 같은 영화다. 이런 '불호'에 가까운 나같은 관객의 이런 리뷰가 먼저라서 죄송합니다. 컥.


- 2011년 9월, CGV 왕십리.
:

북촌방향, 홍상수

Ending Credit | 2011. 9. 19. 23:4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북촌방향>이라는 제목은 절묘하다. 그 제목은 북촌이라는 마법의 공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방향이라는 시간성을 담고 있다.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이동한다는 것이며, 이동이란 그 안에 시간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에서 '이동하는 행위'가 보여지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어디론가의 공간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다시 어디론가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그 이동하는 행위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 이동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이동은 번번이 지연된다. 다만 영화의 처음 부분에 그가 북촌의 밖인 고덕동으로 향할 때에는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이 보인다. 북촌 안에서의 이동과 북촌 밖의 이동의 이 차이. 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싶다. 그는 북촌 밖으로 정말 나갔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의 시간이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부분이므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연속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시간은 가끔 이상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성준(유준상)이 중간에 술집여주인 예전(김보경) - '예전'이라니! 이 유머는 도대체. -  과 키스를 하며 나누는 대화를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도 있지만, 마치 과거로 돌아가 경진(김보경)과 하는 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에는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 영화의 시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밤씬 다음에 낮씬이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히 하루(혹은 며칠)가 흘렀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러한 짐작이 의미가 없어진다. 아니, 어떤 부분에 이르면, 낮씬과 밤씬을 구별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홍상수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 그것이 또 한몫을 한다). 이들은 도대체 낮술을 먹고 있을까, 아니면 밤술을 먹고 있을까. 왜 이 영화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파괴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많은 영화에서 독특한 시간들이 보여지는 것은 그렇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결국 시간의 예술이므로, 그 시간들은 대개의 영화 속에서 나름 의미를 가지고 변주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은 대체로 정방향으로 흐른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시간이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았다. 거꾸로 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몸이었지, 그것을 결코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일종의 착시와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영화에서 시간은 앞으로도 당겨지고, 뒤로도 보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보내진 공간에서 그 시간은 다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북촌방향>과 시간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비교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도 시간은 감겨지기는 했지만, 감겨진 상태에서는 정확히 다시 24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레이는 매번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주인공을 깨우기 위해 울려대는 알람이라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북촌방향>에서 성준이 잠을 자는 장면은 없다. 일반적으로 말했을 때 '잠을 잔다'는 의미는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북촌방향>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 모호한 의미만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그것의 이유가 있을까. 시간을 제거해버리면, 같이 제거되는 것, 혹은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디어 보이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영화의 독특한 예고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이 영화의 예고편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예고편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눈발 날리는 거리에 나와 서 있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예고편이 독특해 지는 것은 음악과 음성을 그대로 두되, 화면을 거꾸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떤 별 의미없는 동작들의 합인 것처럼도 느껴지며, 일종의 약간 우스꽝스러운 무용인 듯도 느껴진다. 즉 그들의 동작은 처음 의도인 '택시 잡기'를 의미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여기에 뭔가 생각할 부분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보람(송선미)이 길을 건너 뛰어가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뒤이어 영호(김상중)가 그 뒤를 따라가 프레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영호가 보람을 바래다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어떤 '맥락'에 따라, 영호가 보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의도'와 이 장면을 연결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우리는 그 장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저 조금 우스꽝스러운 프레임으로의 뛰어듬(거꾸로 돌렸으므로)일 뿐이다.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곧 그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즉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은, 곧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점.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의도가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기억나는 홍상수의 전작 <옥희의 영화> 진구(이선균)의 대사.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던 말. 그러나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을 것이고, 그 이유, 즉 우연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어 우유곽이 거기에 날려왔다고 해도, 그 바람이 분 것에는 결국 어떤 이유가 있다. 과학적 이유라고 해도 좋고, 신의 어떤 커다란 계획이라고 해도 좋다. 어찌되었던 간에 뭔가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진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일종의 신이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복잡한 메커니즘의 이유를 아는 자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자는 아마 신일 것이고, 신은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미리 커다란 '의도'를 가지고 계획했을 것이므로. (저번에도 이야기했던 박성원의 단편 <하루>. 누군가의 하루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북촌방향>의 변주인 것도 같다. 성준의 하루를 알면 아마 모든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홍상수는 그 의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보람은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영화 관계자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성준은 그것은 우연이며, 우리는 그 우연에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일종의 필연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연의 중첩은 그 우연이 일어난 후 사후적으로만 어떤 의미망으로 들어온다. 어떤 일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 이유에 대해 바로 깊이 생각하는 것(<옥희의 영화>의 진구처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우연들에 담겼던 의미에 대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될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결코 그 전체를 볼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아주 일부의 이유만 나중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는 그조차도 알지 못한다. '필연'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 우연에 일종의 통제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며,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우리는 툭하면, 영화의 의도가 어떻고, 작품의 의도가 어떻고를 이야기하니까. 그러나 사실 그 우리가 말했던 '의도'가 그 '의도'였던가.)

그러므로 시간을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의도를 무너뜨린 홍상수는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 우연들(어쩌면 신의 '의도'들)의 오묘한 조화에 겸손할 것. 신이 되려고 하지말고, 찰나를 겸손하게 잡아나갈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찰나적 순간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어찌되었던 전체를 영원히(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볼 수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찰나적 순간을 잡아챌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 속 성준이 제시한대로 '일기쓰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 일기쓰기는 분명 보통의 일기쓰기는 아니다. 홍상수는 말한다. (<씨네21> 819호 김혜리에 의해 이루어진 홍상수 인터뷰. 질문(김혜리):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답변(홍상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는 것이 아닌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매일 쳐다보는 것. 그것이 홍상수가 말한 찰나적 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채는 일기쓰기이다. 

이러한 말은 영화 처음의 성준의 대사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깨끗하게 통과해가는 것.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미세한 구멍들이 몇 개 뚫린 커다란 구를 하나의 직선의 화살표가 관통하는 그림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그 직선을 따라 그 커다란 구를 조심스레 통과하고 있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통과하다가 그 뚫린 구멍으로 구의 바깥을 찰나적 순간에 들여다 볼 수 있다(홍상수식 일기를 오래 쓰다 보면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 바깥에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하지만, 우리는 그 바깥의 전체 메커니즘을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들여다본 것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일 뿐이니까. 구의 바깥은 결국 완전히 그 구를 빠져나왔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여러가지를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다가, 때로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순간 귀 뒤가 서늘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우리는 그 구멍을 찰나적으로 지나쳐갈 뿐이므로 곧 잊어버린다. 그 전체를 보는 것은 그것을 다 통과한 마지막 이후이다. 삶이라는 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통과한다는 것, 관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성준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통과해나간다고 했지만, 곧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경진을 만났다. 어쩌면 그에게 처음부터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북촌이라는 공간안에서 붙들렸다. 그가 붙들린 것은 사람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고, 바로 시간이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관통하려는 자가 시간에 붙들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영화 속에서 마지막 찬스를 만났다. 바로 사진 찍히기. 이것이 찬스인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진 찍히기란 다른 말로 하자면, 찰나적 시간을 잡아채는 것, 즉 찰나적 시간을 순간적으로 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일그러지거나, 나쁘게 보이는 얼굴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찬스에서 그는 탈출의 기회를 잡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고 어두운 기운을 남긴다. 그것 역시 두 가지의 이유. 하나는 그가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 저승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저승의 물건을 먹으면 안된다는 신화 속 경고. 비슷하게 말하자면, 그는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진 속에서 북촌 안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준의 표정. 그는 그 찰나적 순간에 무엇을 보았을까. 구의 바깥을 작은 구멍을 통해 운좋게 들여다본 자가 짓는 두려워하는, 혹은 놀란 듯한 표정. 그는 구의 바깥에 있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가 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물론 대부분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인간들이란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지연시키려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로는 깨끗하게 통과하여 집으로 슝슝 가겠다고 하지만, 우리도 그것을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소설'로 달려가 술을 마신다.

덧.
홍상수의 영화는 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3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북촌방향>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써보라고 하면 가능할까. 아마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가깝게는 어떤 평자들(대표적으로 <씨네21>의 정한석)이 영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자꾸 뭔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멀게는 홍상수의 영화를 '영화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어떤 영화가 글로 쉽게 설명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 영화가 영화라는 고유의 속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글은 분명히 영화와는 다른 나름의 고유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 이루어지는 영화 비평이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어떤 영화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비평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방법은 영화로 비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김혜리 씨의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음악이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는 말, 모든 예술은 결국 음악을 닮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음악은 결코 글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말할 때 결국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홍상수의 영화들은 결국 그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를 가지고 화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글쓰기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덧2.
<북촌방향> 트레일러.



- 2011년 9월, 씨네큐브.
: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Interlude | 2011. 9. 9. 23:5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주제로 몇 편의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 중에 두 편,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이강현 감독의 <보라>를 보았다.

꿈의 공장 Dream Factory, 김성균 감독

멍청한 질문과 당연한 대답. 왜 노동자(굳이 무식하게 구분하자면 '공장'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좌파적 성향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가. 어떤 우연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노동자가 되는 것인가, 혹시 노동자들 사이에 소위 불순분자들이 자꾸 끼어들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노동자들이란 유난히 욕심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아직까지도 일부 전근대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연대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방편이다. 여러 방법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나마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는 것이다.

2007년 3월,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콜텍사의 인천공장 근무자 55명이 집단 정리해고됐다. 다음달인 4월에는 대전공장이 '무기한 휴업'이란 성의없는 종이쪽지를 내 건채 폐쇄되었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그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생존(복직)을 건 사투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노동자들만 그려내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방식의 연대가 있다. 그것은 여러 뮤지션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흐른, 브로콜리너마저 등 수많은 뮤지션들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여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콘서트'를 했고, 이 연대는 바다건너 수많은 외국의 뮤지션들(예를 들어 '오디오슬레이브'의 톰 모렐로, 오조매틀리 등)에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사실 연대가 실제적으로 가능하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다운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한편으로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들어왔다고, 당신이 이해한 것은 아니다'라는 영화의 자막처럼(아마도 노래가사나 제목인 듯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알아본 것은 모리씨의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뿐.) 이 영화는 연대의 여러 어려움에 대해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영화 속 뮤지션들의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콜트/콜텍의 기타가 다른 기타보다 상대적으로 싼데, 내가 만약 돈이 있다면 모를까, 돈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그 기타를 사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가 기타 이외에도 이미 수많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부당하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타만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혹은, 설혹 어떤 물건이 예를 들어 아동착취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라도 사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테니까...같은 질문들.

동시에 이런 연대와 관련된 질문들 외에도 영화는 여러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외국인은 말한다. 당신(콜트/콜텍 노동자들)의 CEO가 그렇게 부당한 인물이라면, 당신들이 왜 그렇게 복직을 주장하는지? 차라리, 당신들이 나가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기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질문은 현실의 벽을 맞고 튀어나와, 혹은 악보 속의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노동자들을 감싼다. 이 많은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무슨 돈으로 투자를 하고 공장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꿈을 꾼다.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기타를 만들어내는 꿈을, 그리고 그런 기타가 여러 뮤지션들의 손에 의해서 훌륭하게 연주되는 꿈을.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이제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외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편리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에 불과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의 가증스런 의미와 '연대'란 왜 필요하며, 그 앞에 놓인 장벽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노동자들의 애타고 필사적인 호소로, 그들을 도와줄 것처럼 보였던 팬더나 깁슨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결국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다(물론 이들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콜트/콜텍의 그런 부분을 예전부터 충분히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콜트/콜텍사의 복직 문제는 여전히 우리 법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의 공장을 향한 애타는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진다.


보라 The Color of Pain, 이강현 감독

엇, 이게 뭘까. 상영시간 텀이 짧아 저녁 대용으로 구석에 앉아서 몰래 먹던 참치김밥이 목에 걸린다. 이강현 감독의 <보라>는 기이한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저 족보 없는 구도는 뭘까. 산업체에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와 업체 직원의 대화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어떤 직원의 등 뒤의 사무실 구석에서 이들을 화면 한 귀퉁이로 몰아넣고 찍고 있다. 감독이 너무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찍는 걸까, 혹은 이건 일종의 몰카인걸까.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구도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의 내용상 이 영화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모습과 노동자들과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들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영화 가운데에서 커다랗게 보여지는 법은 좀처럼 없다. 카메라는 구석에 박혀 있거나 천장 가까이에 가있고, 인물들은 화면의 구석에 밀려나 있다. 때로는 인물은 말하지 않는데, 어디선가 말소리들이 들리고, 인물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소리는 공장 소음에 묻혀 있다. 인물은 소외되어 있고, 다른 물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요즘에 말하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한 뭐 그런 단어, 그러니까 낯부끄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예를 들어 '노동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 같은 것일까.

먼저 팜플렛에 나온 영화의 소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작업환경 점검, 건강 상담, 직업병 상담)를 현장에서 받도록 되어있다. 이 영화는 위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그러므로 의사와 보건관리기관의 대응은 사후적이고, 그 대응의 최대치는 단지 조사하여 표본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동시에 부조리해보이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비디오를 면밀히 체크하며 할머니가 고추밭에서 일분에 몇 번이나 쭈그려 앉는지를 세는 의사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이유는 그 의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행동이 근골격계질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밝혀낼 수 있어도, 그 할머니의 그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동시에 그런 조사가 그렇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가 왜 아픈지는 딱 하루만 일해보면 알아요). 또 한편으로 보건관리기관의 특정 약품에 대한 역학조사발표 중에 이루어지는 마이크 조작미숙으로 큰 소음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단순히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발표내용 때문이다. 이미 10명 이상이 넘는 노동자가 한 공장에서 죽어나갔음을 밝히는 그 사후성이.

또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사들은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이 그러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유리섬유를 다루는 공장의 모습과 어떤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발언의 교차편집. 예전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했다가 이제는 몸이 망가져 거의 집안에 갖혀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증언. 그리고 이제는 석면이 거의 유리섬유로 대체되었다는 공장의 설명과 유리섬유는 현재 완전히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자막. 그리고 교차되어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증언. 아..글쎄, 그 공장에서 2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갑자기 영향을 미칠 줄 알았나. 이제 대체된 유리섬유는 노동자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가 되서야 나타날 것인가.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이후이다. 영화는 이렇게 꽤나 장시간 노동현장의 보건관리를 다룬 후 갑자기 어느 인터넷 서버관리자의 밤샘근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활동(이것은 그 전의 노동조합에 계신 분이 공들여 회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겹쳐진다)과 두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의 인터뷰를 보여준 후 갑자기 망가진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는 약간 사짜 풍의 남자의 작업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조화일까. 앞의 노동현장의 모습과 뒤의 취미활동의 대비를 생각해보면, 이 중간의 인터넷 서버관리자는 일종의 브릿지이다. 그의 노동의 형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취미와 노동의 중간에 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는 감독에게 자신이 취미로 만든 홈페이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 취미의 영역에서 영화는 달라진다. 인물들은 가운데에 위치하기 시작하고,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며, 심지어는 BGM이 깔린다. 취미로 사진을 찍고, 야구를 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깔려지는 그 아름다운 BGM을 들을 때의 안도감(이는 앞의 공장의 소음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취미라는 것과 대비되는 노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시 일깨운다. 그것은 노동은 생존이라는 것. 취미로서의 행동들과 앞의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결국 생존을 걸고 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이라는 점.

그렇게 보면, 인터넷 서버 관리나 하드디스크의 복구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만은 않는다. 인터넷 서버는 결국 수많은 하드디스크가 모아져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수많은 기억의 집적인 것.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러 온 남자에게 묻는 복구의 이유. 거기에는 10년간 모아온 수많은 음악 파일이 들어있고, 사진들도 들어 있고...취미로서의 기억들의 집적. 그러나 이와 대비되어 기억되는 영화 전반부의 어떤 풍경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에게 의사가 묻는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세요. 몇 시간이나마나 하루 왠종일하지 뭐. 그럼 매일 그렇게 왠종일 하세요. 아니 매일 그렇게야 못하지. 왠종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언제부터 농사를 지으셨어요. 글쎄 얼마나 했나. 기억해 보세요. 시집올 때부터 했지 뭐. (하하 웃으며) 글쎄 시집을 언제 오셨냐구요. 18살 때 왔지....노동의 시간은 엄청나게 집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에 없는 것. 노동의 시간이란 축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고통의 축적인 것, 어떤 의미에서는 망가져버린 하드디스크와 같은 것.(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간의 연결 방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감을 아주 극도로 짧은 암전으로 처리한다. 어쩌면 노동이란 이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없는, 지나고나서 보면 극도로 짧은 암전같은 것, 남은 것은 망가진 몸뿐인 것.)

노동이 결국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이강현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보라(The Color of Pain)'인 이유가 보라색이 멍이 든 색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 영화의 촬영 대상으로서의 공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인터뷰(그러고보면 이 영화에서 한 노동자가 "사고나는 장면은 언제 찍을거냐"며 그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 아닌가 라고 물었던 컷이 있다. 또한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촬영한 화면을 보는 장면도 있는데, 지아장커의 <24시티>나 <무용>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를 했다. 그 인터뷰를 곱씹어보면 이 영화가 더욱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나마 사람들이 찍을만하다고 허락해준 공장들과 인터뷰들이 이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에는 어떤 장면들이 담길까. 전작 <파산의 기술>에 이어, 이강현 감독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2011년 9월, 서울 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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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

Ending Credit | 2011. 9. 1. 16:29 | Posted by 맥거핀.


 


(작품의 내용을 꽤 담고 있습니다.)



지난 G20 전후에 이루어진 일명 '쥐그림' 공판을 보면서, 뱅크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공판에서 검사는 쥐그림이 뱅크시의 작품에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작가이자 피고의 항변에, 뱅크시의 권위에 기대지 말라며 일갈한다. 한국 검사님이 '뱅크시의 권위' 운운해 주시는 뱅크시는 어떤 사람인가. 뱅크시는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자신의 작품을 게릴라 전시했고, 체포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쌓은 거대한 장벽에 평화의 염원을 담은 벽화를 그리는 등 저항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는 세계적인 그래피티(거리미술) 아티스트(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 뱅크시가 직접 감독한 영화가 개봉되었다길래 시간을 내어 보러 갔다왔다. 제목은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와중에 여러 생각해볼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다. 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뱅크시가 얼굴을 숨긴 채로(그래피티 작업이 일종의 불법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뱅크시의 얼굴은 끝내 가려진다) 이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뱅크시는 먼저 티에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티에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이유로 주위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있는 괴짜로 그는 자신의 사촌의 작업을 계기로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여러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담았던 티에리는 그래피티계의 거목 뱅크시에게 집착하고 결국 그의 작업에도 참여하며,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상업화되는 그래피티에 불편함을 느끼던 뱅크시는 티에리에게 그래피티의 진실함을 보여줄 다큐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만, 티에리가 가져온 것은 참담한 수준의 결과물. 결국 뱅크시는 생각을 바꿔 그동안 간간이 그래피티 작업도 했던 티에리에게 그의 그래피티를 전시해 볼 것을 권유하고, 그것을 도리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결국 티에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MBW(Mr.BrainWash -세뇌)가 되어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사실 이렇게 줄거리를 적으면, 조금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뱅크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영화를 시작했는데, 줄거리를 보니까 온통 티에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얘기잖아. 사실 그렇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상당수가 조금은 의문을 가졌을 법도 하다.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티에리의 지난 배경이나, 그의 기록벽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영화는 결국 티에리의 전시와 그 전시의 예기치못한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뱅크시의 영화라고 했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티에리의 영화에 가깝다. 왜 그럴까. 왜 뱅크시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시작했던 이 영화는 티에리의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뱅크시에 대해서는 거의 지나가는 조연 수준으로만 다루고 영화를 끝맺는 것일까. 의문과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티에리의 위치의 시작은 '기록하는 자'이다. 기록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기록은 보존의 욕구이며, 수집의 욕구이다. 동시에 일종의 감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의 복합적인 의미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티에리를 대하는 복합적인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티에리를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래피티는 감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기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몰래 그림을 그리거나, 붙이는 그래피티의 특성상 그래피티는 여러 불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감시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그래피티라는 것 자체가 권위의 감시에 저항하며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래피티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작업이 기록될 필요가 있다. 그래피티는 언젠가는, 혹은 빠른 시간안에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제거된다. 따라서 그래피티 예술가들은 티에리를 조금은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그의 기록을 반기기도 하고, 때로는 작업에 깊숙이 동참시키기도 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티에리의 기록으로 작업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입장의 반대로, 티에리의 입장은 어떨까. 티에리의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티에리의 욕구가 기록을 넘어서서 일종의 수집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듯이 티에리의 기록은 그것의 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티에리는 수많은 테이프에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창고 어딘가로 깊숙이 던져 버린다. 즉 이것은 일종의 수집벽에 가까워진다. 수집은 어느 순간, 오로지 창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어떤 수집가들은 한 번 수집한 이후에는 그것을 결코 쳐다보지 않는다. 그가 쾌락을 느끼는 것은, 수집의 순간이다. 이미 손에 들어온 수집품은 더 이상 그에게 쾌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집은 '희소'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수집가들이 가장 쾌감을 느낄 때에는 아마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일 것이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예를 들어 명품에 대한 일종의 집착에도 관련이 있다. 명품이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의 희소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하듯이, 개나 소나 매고 다니는 것은 더이상 명품이 아니다. 즉 명품은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가지되, 희소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는 티에리의 뱅크시를 향한 집착으로 설명이 된다. 티에리가 뱅크시를 찍을 것을 열망하고, 그의 연락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은 이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뱅크시는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면서(확실히 그의 작업은 영화 속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업보다 작업의 퀄리티나 전달하는 메시지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 그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대상이다. 티에리에게는 즉, 명품이다.


자,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뱅크시가 티에리에게만 명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뱅크시는 그의 희소한 가치로 미술계의 주목을 끌게 되고, 그의 작품들은 점차 미술 경매 시장에서 고가의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거리에 재빨리 그려지고, 사라졌던 그의 작품들은 이제 어느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 비유가 용서된다면) 뱅크시는 아주 맛있으나 거의 파는 곳을 찾아보기 어려운 불량식품이 되었다. 뱅크시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거리미술이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거리미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미술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거기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했던 낙원(휴양지)의 그림은 그것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격리한 장벽에 그려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대저택의 벽면에 그려진 휴양지의 그림이 가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관타나모 구금자의 모형이 바로 디즈니랜드에 세워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미국의 대표적인 꿈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디즈니랜드에 세워진 주황색 옷을 입은 구금자를 수많은 관광객이 볼 때의 그 이질감.

그러므로 여기에서 뱅크시에게 티에리라는 상(象)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티에리의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모방과 조잡한 아이디어와 수많은 다른 예술가들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 티에리의 전시가 여러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좋은 비평을 받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여주는 것. 즉 당신들의 소비하는 수준이 딱 이 정도라는 것. 당신들은 어떠한 것이 왜 가치가 있는지를 깊숙이 따져보기도 전에 그것이 단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티에리의 전시는 이를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티에리는 자신의 전시를 성공시킬 아이디어 중의 하나로 선착순 관객명 200명에게 각각의 다른 '하나밖에 없는' 포스터를 나눠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열광할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는 티에리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뱅크시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티에리는 결국 뱅크시의 일종의 왜곡된 허상을 일부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티에리의 작업이란 잡지를 넘겨다보다가 괜찮은 이미지가 있으면, 여러가지를 적당히 조합하는 것이다. 물론, 그 조합도 자신의 손이 아니라 다른 장인의 손을 빌려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티에리는 자신이 대단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소위 예술가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물론 뱅크시의 작업은 이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래피티는 다른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거리예술의 특성상, 동시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빠르게 얻으려면 알려진 이미지들을 -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 버락 오바마, 스페이스 인베이더(게임), 혹은 쥐 - 활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티에리는 뱅크시의 왜곡된 일부분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희소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일부분(수집에 가까운 기록벽)도 동시에 담고 있다.

티에리는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뱅크시가 딱 활용하기 좋은 대상이다. 그의 수집벽과 얼토당토 않은 작업과 그것의 성공을 보여주면서, 뱅크시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즉 영화 속에서 티에리의 작업이 상찬을 받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뱅크시 자신이 놓여진 상황과 같지만, 그 상업적 성공 속에는 결국 무엇이 놓여져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희소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점을 티에리를 통해서 보여준다(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속에서 뱅크시는 티에리의 작업에 엄청난 칭찬을 보탠다. 즉 칭찬 속에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 이상의 수준이 된다). 따라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의 만들어진 허상을 반영하고, 뱅크시는 그런 티에리를 조롱함으로써 이 상황을 풍자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뱅크시의 조롱은 자신을 향해 있지만, 그는 그 조롱을 통해 자신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영화를 일종의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티에리를 실재하는 인물이라 생각한다면, 그가 뱅크시가 활용하기에 너무도 딱 맞춘 사람임이 의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티에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일종의 거리예술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를 면밀히 따지는 것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뱅크시가 어떤 인물인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씨네21>에 나온 이야기를 보니, 뱅크시는 한 번도 그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뱅크시는 한 명이 아닐수도 있고, 일종의 창작집단의 대명사일수도 있으며, 어쩌면, 여기나온 티에리일지도 모른다(즉 그가 티에리 역할을 연기했을 것이라는)...고 하니까.)

그러므로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사실 마지막에는 거의 웃지 못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인디밴드 팬들의 딜레마. 일부 팬들의 경우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밴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아는 가수가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일종의 수집벽과 닮았다. 그 수집이 가치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조금은 그 수집과 다른 점은 음악은 결국 일종의 공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팬이 적은 것은 좋지만, 그 음악을 정말 나혼자 밖에 모른다면, 그 음악의 향유로서의 가치는 반감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종의 딜레마가 생긴다. 이 인디밴드는 어느 정도 알려질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것. 웃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를 잘 보지 않고, 작은 영화들, 때로는 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나의 심리도 결국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아이스 커피는 다 마시고 없는데,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며, 한 입 깨문 남은 얼음이 쓰다.

미술관을 나오게 되면, 출입구 앞에는 늘 선물가게가 있다. 그 선물가게를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들르게 되는 것에도 결국 이 수집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내 휴대폰 고리에 걸려있는 나만의 미술작품을 가지고 싶은 욕구. 이 제목은 그 욕구를 버릴 것을 충고한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다. 그 출구를 벗어나면, 아마도 다른 예술을 보는 새로운 입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나는 그래피티가.



- 2011년 8월,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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