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Ending Credit | 2012. 6. 12. 17:2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줄거리가 들어있음)


홍상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특히 최근작에 들어서 그런 경향이 좀 짙어지는데, 과거로 돌아가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나가는 시간(지난 여름에 좋았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의 <하하하>와 '일기'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밤과 낮>)과 증폭되거나 급속하게 축소되어 있는 시간(영화의 어떤 부분들이 영화 속 인물인 옥희가 찍은 영화임을 암시하는 <옥희의 영화>와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게 해놓았던 <극장전>. 결국 영화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을 보여주다가 <북촌방향>에 이르러서는 이 시간의 흐름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이 영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표면상으로 이 이야기는 원주(정유미)가 쓰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 시나리오는 각각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 개의 시나리오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교적 비슷한 흐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이 세 개의 시나리오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모항이라는 곳에 온 안느(이자벨 위페르)라는 외국여자가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이 모항의 펜션과 그 주변에서만 이루어지며, 이 안느는 안전요원(유준상)이라는 공통의 인물을 만나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영화감독 종수(권해효)와 그의 부인(문소리)를 만나고 이들과 어떤 관계가 이루어진다(이 부부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뒷모습이 살짝 비치며, 대신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영화감독 종수 대신에 이름도 비슷한 다른 영화감독 문수(문성근)가 등장한다). 그리고 안느는 이 각각의 시나리오에서 '등대'를 찾는다. 

즉 어떻게보면 이것은 세 개의 평행한 시나리오이며, 세 개의 비슷한 세계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몇 가지 것들을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두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고, 그것에서 또 몇 가지를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세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 개의 평행우주이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것의 하나의 힌트는 이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이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세 편의 시나리오에서 공통적으로 안느는 호기심이 많고, 어느정도 포용력이 있고, 타인과 대화를 하고자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다른 인물들도 어느정도의 공통성이 보이는데, 안전요원은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순진하고, 조금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펜션의 여주인(정유미)는 친절하고, 영화감독 종수의 부인은 술마시고, 여자를 밝히는 종수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므로 이 전체 이야기를 세 개의 평행우주, 세 개의 다른 나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 개의 다른 나라들. 이 각각의 다른 나라에서 미세한 몇 가지가 어그러졌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것인가.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느낌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유쾌하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왠지 쓸쓸했고, 서늘한 감정이 남았다. 물론 홍상수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그리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홍상수의 이야기는 상당수 찌질한 남자들이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코믹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에서 늘 불안한 기운들이 맴돌고 있었고, 전면적인 죽음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홍상수 영화들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를 본 어떤 이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안하고 불길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이 사실. 이 넓은 스펙트럼이 가능한 영화는 많지않다.) 그것은 이 <다른 나라에서>의 이야기의 흐름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들 중 영화내내 가장 미소를 짓게하는 장면이 많은 영화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흐름은 동시에 왠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러나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인물은 점점 나쁜 위치에 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안느의 변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이지만, 두 번째에서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불륜행각을 벌이는 여자이고, 세 번째에서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프랑스여자가 된다. 다른 인물들은 어떨까. 먼저 세 편 모두에 등장하는 안전요원의 경우를 보면, 첫 번째 편에서는 안느를 위해 사랑스런 노래도 불러주고, 약간 무모해보이기는 하지만, 안느에게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아무 생각없는 무뇌의 캐릭터, 상당히 수동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단적으로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전요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과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을 보자. 첫 번째는 조금은 막무가내지만,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수동적인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리고 영화감독 종수와 그의 부인의 경우, 첫 시나리오에서 이들은 술자리에서 티격태격하지만, 결정적인 파국에 이를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그 파국은 상당히 현실에 가까워진다.  

이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는 원주가 모항의 펜션에서 쓰고 있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왜 원주는 여기에서 이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원주와 그녀의 어머니(윤여정)의 대화를 본다.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사업실패, 혹은 보증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 펜션에 갇혀있어야만 하는 신세이다. 즉 원주가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현실을 잊고자함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쓰는 첫번째 시나리오에서 그녀는 최대한도의 꿈을 담는다. 여주인공은 잘나가는 영화감독이며, 어느 낯선 곳에서 로맨틱한 남자를 만난다. 이것은 첫 번째 이야기. 그러나 이후 우리는 두 편의 이야기를 더 본다. 한가지 질문. 왜 첫번째 시나리오 이후에 비슷한 두 개의 이야기가 계속 쓰여졌는가. 원주는 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더 쓰는가. 그것은 첫번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쓸 요량은 없다. 그러니 그녀는 몇 가지의 설정을 바꾸기로 한다. 여주인공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여자가 되고, 이야기는 꿈과 현실이 어지럽게 뒤섞인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두 번째 이야기.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은 원주는 세 번째 이야기를 쓴다. 여주인공은 다시 이혼당한 여자가 되고, 할 수 있는 일은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잠깐의 섹스를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세 번째 이야기.

즉 처음에는 꿈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두 번째에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이야기가 되고, 마지막에는 이야기는 급기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꿈에서 현실로의 추락.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결국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는 안느는 물에서 수영을 하고 막나온 안전요원에게 물이 차갑지 않느냐고 물었고, 안전요원은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전혀 춥지 않다고, 따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에 안전요원은 춥지 않느냐는 안느의 말에 대답한다. 춥다고, 물이 차갑다고. 그 차가워진 현실의 온도, 꿈이 깨어져버린 차가움. 등대는 어떨까.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등대. 안전요원에게 안느는 그것에 대해 묻지만, 안전요원은 모른다(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기는 한다. 안느의 꿈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 그 꿈의 등대는 그러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자그맣게 축소되어 안전요원의 손에 들려있다. 이거 등대잖아요, 작은 등대. 그 작게 축소된 현실에서의 꿈의 존재. 이 쓸쓸한 모항에서 이루어지는 쓸쓸한 이야기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안느와 다른 인물들에 의해 '아름답다'고 이야기되는 모항이지만, 나는 그 모항의 쓸쓸한 이미지들만 보였다. 항구 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펜션, 포구에 매어있는 빈 배들, 잿빛의 바다, 홀로 수영하는 안전요원, 화장실 옆의 단 하나의 텐트.)

물론 이것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어지러운 도식이다. 그 도식을 보는 홍상수는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안느와 스님의 대화. 왜 이렇게 슬픈가요. 당신이 슬퍼하기 때문이지요. 왜 무서운가요. 당신이 무서워하기 때문이지요. 말장난하시는 건가요. 아니, 모든 것이 그래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뿐이지요. 결국 도식이란, 그렇게 보고자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 그렇게 느끼고자 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쓸쓸함이란 내가 만들어낸 쓸쓸함일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세 개의 시나리오, 세 개의 평행우주. 이것은 정말 '다른 나라'인가. 꿈과 현실은 그토록 다른 것인가. 홍상수는 몇 개의 힌트를 던진다.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가 해변에 던진 깨진 소주병은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돌아오고, 처음 안느가 길가에 꽂아두었던 우산은 중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안느에 의해 되돌아온다. 꿈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꿈. 이 세 개의 평행우주는 결국 다른 것일까, 같은 것일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이것은 가능한 다른 나라의 하나일뿐.

당신의 '다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덧.
영화가 끝난 후 이어졌던 홍상수 감독과의 대화에서 홍상수의 태도는 그 자신의 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였다. 답은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마 답일 거에요, 허허허. 아마도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영화들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정답을 상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이 있는데, 그 정답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 그러나 무엇이 정답인가. 감독의 애초 의도에 가까운 해석이 정답인가.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맞춘 답, 그 답은 아마 나의 답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답일뿐. 그러므로 가장 웃기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의 완전해석판이니, 이것이 답이니, 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는 '영화'에 국한된 태도만은 아니다. 

덧2.
이 영화에 대한 (그간 다른 홍상수의 영화들과 비추어볼 때) 외국에서의 더한 호평은 언어적인 뉘앙스와도 많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언어적인 뉘앙스는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 외국의 관객들에게는 그 언어적 뉘앙스를 바로 포착할 수 있는 첫번째 영화다. 반면 도리어 우리 관객들에게는 이는 약간은 역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 2012년 6월, 광화문 씨네큐브.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차, 변영주  (0) 2012.07.04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0) 2012.06.30
돈의 맛, 임상수  (0) 2012.06.04
아르마딜로,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0) 2012.05.10
은교, 정지우  (0) 2012.04.29
:

돈의 맛, 임상수

Ending Credit | 2012. 6. 4. 18:5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돈의 맛은 어떤 맛일까.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짠맛에 가까운 맛일 것이다. 짭조름한 땀의 맛. 돈이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그것이 쾌락의 땀이든, 고통의 땀이든 간에)이 그것들에는 아마도 깊숙이 배여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그래서 같은 짠 것인 돈과 소금의 어떤 비슷한 점을 유추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에 악영향을 미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그 짠맛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진다. 돈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돈은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는 결국 돈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보통의 돈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임상수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윤회장(백윤식)의 집 금고에 가득 쌓여있는 반질반질한 새 돈뭉치들, 그것에서도 짠맛이 날까.

임상수의 전작 <하녀>의 느슨한 후속편, 혹은 스핀오프, 혹은 이본(異本)인 이 영화 <돈의 맛>은 <하녀>처럼 인상적이지는 않으나, 꽤나 흥미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하녀>는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시작했고, 카메라는 수직하강하여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는 잠깐의 흥미거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돈의 맛>은 마찬가지로 윤회장과 그의 비서 주영작(김강우)의 수직하강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이 수직하강은 돈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강이다. 하늘에서 돈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왕의 강림.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그 돈을 전달하러 유유히 가는 중이다. 말 그대로 유유히. 그리고 동시에 임상수는 흥미롭게도 다른 차들을 그저 달리는 불빛들로 처리해버린다. 그 빠른 이동과 대비되어 유유히 달리는 이 윤회장.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윤회장은 다른 차들처럼 그렇게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윤회장의 눈에는 아마도 실제 다른 차들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 인간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아닌 그저 수평으로 내달리는 불빛으로. 

2.

그래서 윤회장의 집에서 주영작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영화 초반부의 씬들은 꽤 흥미롭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윤회장의 집은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집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진 이 집은 집보다는 거대한 갤러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러니까 하녀들은 흥미롭게도 갤러리 직원들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갤러리와 다른 점은 이 갤러리의 양식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꽤 어렵다는 점이다. 모던한 장식들과 동양적인 여백의 공간, 복잡한 이중계단과 심플한 벽면이 혼재되어 있는 이 공간은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이 만나고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이 조인트 콘서트를 하는 공간이다. 그 맥락을 알 수 없게 짬뽕된 이 공간은 그래서 도리어 키치적이 되어간다. 그것의 상징은 아마도 윤회장의 장인, 즉 백금옥(윤여정)의 아버지인 노회장의 모습일 것이다. 그 부의 끝에서 만들어진 그 키치, 그 우스꽝스러움(그래서 현실세계의 모 회장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쁘띠'의 상징이 되어 귀여움을 받는 것인가).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을 찍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어떤 심상에 관한 부분이다. 나는 초반의 이 장면들이 어떤 동물원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동물원의 맹수들처럼 이들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으르렁댄다. 돈만 밝히는 것들, 어떻게든 우리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아랫것들, 교수고 정치인이고, 사업가이건 간에 모두들 똑같아 돈이라면 환장들을 하지. 그리고 그 맹수들을 우리는 사육사 주영작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관람한다. 그러나 이 관람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을 저  멀리서 지켜본다,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초반부의 씬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적인 면보다도 임상수는 관객을 이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보도록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그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부분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아래에서 내려다본다. 즉 우리는 그들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거나, 아니면 '피핑 톰'이 된다. (이 영화에는 동시에 감시카메라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 이는 물론 우리와 그들의 어떤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불유쾌한 경험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돈의 맛>이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불유쾌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어떤 특정의 장면들이 낳은 효과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관객을 일종의 몰래 숨어서 보는 자, 때로는 감시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감시가 유쾌할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임상수의 의도는 후자쪽,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을 감시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3.

이러한 윤회장 가족 중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나미(김효진)다. 그렇다, <하녀>의 그 '나미'다. 지난 <하녀>를 보고 쓴 리뷰에서 나는 '나미'가 아마도 괴물이 되지 않을까,라고 썼고, 임상수의 의도도 아마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돈의 맛>과 관련한 인터뷰를 보니 본인도 나미가 괴물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충고에 따라 나미를 이 영화에서 조금 다른 인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미도 사실 주영작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주영작에게 말하면서도 이는 한편으로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처럼도 느껴진다(아마 주영작의 머뭇거림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대하는 것, 그러니까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간다면 처음보는 동물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오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떤 (좋게 말하면) 지향점, (나쁘게 말하면) 체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는 괴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괴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녀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여기서의 '인간'은 '니가 인간이냐!'라고 말할 때의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른바 홍상수의 구분법을 쓰고 싶다.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말할 때의 그 구분법, 그 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늘 '찌질한 인간'들이 나온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 우리는 그들을 찌질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찌질한 말을 내뱉고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찌질이'일 뿐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홍상수의 영화에서 좀처럼 죽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죽음을 마주할 용기마저도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도 '찌질이'라는 말이 나오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주영작은 자신이 찌질이라고 체념하듯 내뱉는다. 그러나 이 때의 '찌질이'라는 대사는 자조적인 맥락에서 내뱉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관객에게 도리어 이 인물은 괴물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주영작은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살짝 갈등하지만, 결국에는 거울 뒤편에 돈다발을 쌓아두고,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저그런, 보통의 그저그런 인간, 결코 A급은 아닌, 그런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인간. (그러나 이것이 쉬울까.)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주영작과 나미의 비행기에서의 섹스씬. 이 섹스씬을 행복한 결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아래에는 에바의 시신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막을 수도 있었던 에바의 죽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섹스씬을 보며 못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것은 결국 어떤 자신들의 찌질함,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에바의 관 속에는 주영작이 던져넣은 돈다발마저 들어있으니까. (에바가 그 돈을 보고 어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찌질함'을 추인하는 것으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임상수(그리고 비슷한 이름의 홍상수)가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희망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도 싶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것.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고 다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결말이 께름칙한 이유는 이 마지막은 결국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나미와 주영작의 이 결합은 전개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합의 되풀이니까.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윤회장을 말하는 백금옥도 처음에는 윤회장을 이렇게 만난 것이 아닐까. 나미와 주영작은 그들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봐도 될까.) 

4.

그렇다, 그런 세상이다.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 (그것과 관련하여 영화에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윤회장의 아들 윤철(온주완)과 싸우려드는 주영작. 겁을 먹은 듯이 보이는 그 아들을 주영작은 자신만만하게 차에서 끌어내리지만, 도리어 얻어터지는 것은 주영작이다. 그 (아마도 돈으로 만들어진) 싸움의 기술. 돈은 없지만, 주먹과 깡을 믿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세계는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그 거대한 지옥도, 최대한 좋게 말해 어느 정도의 '체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몸에 불을 싸지르는 것으로 끝내버렸던 그 <하녀>에 가득한 체념과 이 <돈의 맛>의 같지만 다른 체념을 결국 결말에서 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스핀오프, 혹은 이본.

우리의 최선은 결국 찌질해지는 것일까. 그 체념을 결국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그 체념한 자신을 견뎌내는 것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견뎌내는 것보다 자신을 견뎌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그 견뎌냄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이 있을까. 



덧.
이 영화를 본 서울극장 8관은 손님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퍼가 울릴 때마다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며 천둥치는 소리가 나는 데다가, 스크린 오른쪽의 일부분은 검은 얼룩이 크게 있었다. 서울극장 관계자는 빨리 조치를 취하시길.


- 2012년 6월, 서울극장.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0) 2012.06.30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3) 2012.06.12
아르마딜로,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0) 2012.05.10
은교, 정지우  (0) 2012.04.29
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2) 2012.04.22
:

아르마딜로,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Ending Credit | 2012. 5. 10.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들어있음)


이 영화 <아르마딜로>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 최전선 아르마딜로 캠프에 가게된 덴마크 병사들의 6개월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들의 출국으로 시작하여 그들의 귀국으로 끝을 맺는데, 캠프에서 이 덴마크 병사들을 위협하는 것은 주민 속에 섞여 게릴라전을 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이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훈련과 정찰 속에 무료함만을 느끼던 그들에게 곧 몇 차례의 적과의 조우가 이어지고, 급기야는 적이 설치한 IED(급조폭발물)에 의해 동료들 몇이 부상과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료함과 지루함만이 가득했던 그들의 내부를 적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가 대신 채우게 되고, 그런 감정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적과 일전을 벌이고 적을 격퇴하고 돌아오게 된다... 줄거리만 보게 되면 언뜻 극영화처럼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의 형식만을 빌린 극영화가 아니고, 그렇다고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실제의 인물과 실제의 전쟁이 등장하는 완전한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영화는 보는내내 혹시 극영화가 아닌가,라는 기이한 착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이다. 이 영화는 거의 시종일관 내내 음악과 음향효과들이 가미되어 있다. 보통 상당수의 다큐멘터리들이 음악의 사용을 대체로 자제하는 반면, 이 영화는 일부의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배경음악 및 음향효과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인 이 음악과 음향효과들은 영화의 내내 관객의 정서를 흔드는 효과를 낳는다. 즉 이 음악과 음향들로 인해, 우리는 이 장면의 정서적 분위기를 미리 습득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트리거는 대체로 주인공의 이별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며,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튀어나오는 귀신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 발생하는 음향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서는 영화의 스토리를 우리가 특정의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물론 이러한 관객의 정서를 특정의 관점으로 밀어붙이는 음악은 이른바 적극적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사용되는 방식이기는 하나, 이것은 보통의 다큐들에 비해 상당히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다른 하나는 인물의 곁에서 매우 근접하여 찍는 카메라이다. 영화 내내 우리는 인물들을 상당히 가까이에서 만나며, 그들의 대화를 매우 가까이에서 듣는다. 상당수의 다큐멘터리들이 인물과 약간의 거리를 두며, 그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에 이 카메라는 인물의 가까이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으며, 우리가 마치 그들의 일부가 되어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듯한 착각을 전해준다. 이것은 정찰이나 전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병사들이 총을 들고 뛸 때, 카메라도 그들을 따라서 같이 흔들리며 뛰고, 인물들이 총알을 피해 재빨리 엎드릴 때, 카메라도 급히 땅으로 처박힌다. 또 병사들이 갑작스런 적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질 때, 카메라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즉 우리는 멀리서 그들의 전투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사들의 일원으로 실제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 하나는 이 화면의 구성방식이다. 영화 내내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상당수의 다큐멘터리의 일반적인 샷, 그러니까 화면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는 인터뷰 형식의 장면이 거의 없다. (기억이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그런 장면은 중간에 전투에서 부상당해 병원에 있는 병사의 인터뷰 딱 한 번이었는데, 나머지 장면들은 누군가와 이루어지는 대화들이거나, 전투 장면, 정찰 장면, 브리핑 장면들이다. 영화에 절대 등장할 수 없는 화면 바깥 속의 누군가(예를 들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보통의 극영화에서 당연히 배제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이 장면들의 구성은 상당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극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이 서사의 구조 방식이다. 이 서사는 전형적인 극영화의 구조 방식이다. 자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 혹은 새로운 도전으로 파병에 지원하는 병사들(발단)-처음에는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나, 점점 몇 가지의 사건들로 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키워가는 병사들(전개)-IED에 의한 공격으로 아군 병사들이 사망하고, 극도의 분노 속에서 이어진 적과의 전투에서 적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병사들(절정)-처음에는 자신의 행동들을 영웅시하며 합리화하려 하지만, 왠지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병사들(결말). 이러한 이야기들은 상당수의 전쟁영화들에서도 몇차례 활용되었던 서사 구조이며, 뭔가 극적으로 짜여졌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은 그렇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장면을 영화에 포함시키고, 포함시키지 않을 것인가는 당연히 감독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물론 거기에 어떤 류의 음악을 붙일지 역시 감독의 선택이다. 자 한 가지 이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예를 들어보자. 어떤 감독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 대한 다큐를 만들기로 한다. 그는 24시간 내내 당신을 촬영했지만, 영화를 보니 모든 장면은 당신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장면 뿐이며, 영화의 마지막은 조용히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드는 당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영화의 제목. "수다스러운 OO씨의 하루" 아마도 당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 시끄러운 인간은 잠잘 때가 유일하게 조용할 때구만." 자 이 영화를 본 당신은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이 영화 <아르마딜로>라면 이런 것이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들어가기 전 적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병사의 모습이 나온다. 이 결정적인 전투의 직전 이렇게 생각하는 병사만 있었을까. 왜 이 장면이 굳이 결정적 전투의 전에 선택되어 이 위치에 들어가 있는가.)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조작을 했다거나, 어떤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이 전체 이야기를 어떤 서사적인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고 있지 않은가 묻고 싶을 뿐이다. 예를 들어 몇몇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장면 하나. 노트북을 연결하여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 두 병사.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은 게임화면 외에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병사들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캐릭터를 총으로 죽이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병사의 모습. 그리고 다시 (게임 내에서) 총으로 받아치는 상대방 병사와 그의 시선. 이에 (총보다 더 큰) 소형무기로 더 크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노트북 화면이 실제의 전투를 위해 조명탄을 발사하는 화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이렇게 읽힐 수도 있다. 이 하나의 컴퓨터 게임 안에서의 도발과 그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더 큰 대응은 이들의 전투에서의 앞으로의 대처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즉 그런 스토리를 관객들이 마음 속으로 스스로 만들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장면 둘. 덴마크 공항으로 귀환하는 병사들과 가족을 다시 만나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한 병사의 샤워 장면. 쏟아지는 물줄기와 함께 얼굴을 두 손으로 비비는 병사의 모습을 비춰주며 서정적인 음악이 흐른다. 이 장면에서 병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부상당해 도망갈 수 없는 적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어떤 죄책감일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이 병사는 샤워를 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두 손으로 얼굴을 씻는(가리는) 병사의 모습과 서정적인 음악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는가. 이 장면이 이 마지막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서사화가 낳는 부수적인 효과는 결국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영화 속 인물의 감정과 그것을 보는 관객의 감정을 처음에 어느 정도 일치시켜 놓고 출발한다. 아르마딜로 캠프에 도착하여 반복된 훈련과 정찰 속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이들 병사들은 어떤 재미있는 것(그러니까 적과의 전투)을 기다리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관객들 역시 이런 무료한 장면을 보러 이 영화관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충격적인 것을 기다리는 이들과 관객들은 어느 정도 공유된 감정을 가진다. 그러던 이들과 관객의 감정이 벌어지는 것은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이후이다. 이들은 복수심에 불타 전투중 부상당한 탈레반들을 살해하며(이것은 좀 모호한 지점이다. 그 탈레반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들만이 알 것이다), 전투 후 브리핑 중에도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리했다"며 낄낄댄다. 이후 내부고발에 의한 감사가 이어지지만, 이들은 외부인의 시선(그러니까 아마도 관객의 시선)으로 볼 때는 자신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지만, 자신들은 해야만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며 떳떳하다고 항변한다. 이런 항변을 하는 이들을 보는 우리의 심리는 어떨까. 우리는 이들에게 동조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서사화에 의해 최소한 이들의 행동의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서사화의 최소의 목적은 결국 주인공의 행동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 본 서사를 통하여, 우리는 주인공을 응원하거나, 최소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성공한 서사라면 더 좋겠지만, 적어도 실패한 서사가 아닌 이야기는, 이야기를 그리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물론 이것은 부수적인 효과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가장 중심된 효과는 외부인들인 우리가 느끼게 되는 전쟁(전투)에 대한 어떤 잔상들일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많은 전쟁영화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쟁영화들과 이 영화가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은 있다. 그것은 이 영화는 실제의 죽음을 보여준다는 것. 일반적인 전쟁을 다룬 극영화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적을 죽일 때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감정 중의 하나는 일종의 쾌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가상의 죽음이 아닌) 실제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시체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체들을 바라보며 적어도 쾌감은 느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



덧.
어떤 분은 리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을 지원하고 상영을 허가한 덴마크 정부가 대단하다고 하셨던데, 나는 대단하다기보다는 상당히 영리하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전쟁(전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비인도적인 행위를 포함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나도, 적어도 그들의 행동이나 사고를 외부인의 시각으로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이에 반해 아직도 (국방홍보물 등에서) 적과 우리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만 접근하는 우리 정부는 얼마나 멍청한가.




- 2012년 5월, CGV 대학로.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3) 2012.06.12
돈의 맛, 임상수  (0) 2012.06.04
은교, 정지우  (0) 2012.04.29
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2) 2012.04.22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0) 2012.04.13
:

은교, 정지우

Ending Credit | 2012. 4. 29. 20:18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음)


박범신 원작, 정지우 연출의 <은교>를 보았다. 사실 원작을 보지 않아서, 원작은 어떤 흐름의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사건의 전개는 원작과 동일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같은 사건이라도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그의 젊은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드는 은교(김고은)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시인이 소설 '은교'에 쓴 대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제자의 말대로 단지 추문이 될 수도 있다. (또 여기에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영화와 소설의 차이에 대한 문제도 개입하게 될 것이다.) 정지우의 선택은 그중 어느 쪽일까,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가졌던 의문은 그런 쪽에 가까웠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몇몇 우려들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해석들과는 달리), 정지우가 의도했던 것은 현재의 이적요와 은교와의 일대일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즉 늙은 시인이 젊은 여자의 육체에 빠져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그 근거 중의 하나는 은교와 이적요의 섹스씬 혹은 성적 유희의 장면들이다. 이적요의 상상, 혹은 그의 문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장면들에서 늙은 이적요는 젊은 이적요로 돌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젊음의 활력을 맛보며 활력적인 육체를 드러내보인다. 즉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적요가 궁극적으로 보고자하는 것은 은교의 벗은 몸이 아니라, 젊은이로 돌아간 자신의 모습이다. 은교는 단지 그를 젊은이로 돌려놓는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은교의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러 평들에서 이 은교라는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그려진다, 알 수 없다, <은교>라는 영화에 정작 '은교'는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교는 리뷰들에서 지적한대로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이다. 순수함과 팜므파탈을 교묘히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방점을 찍는 것은 그 텅빈 것처럼 보이는 순수함이다. 즉 은교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 영화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육체 뿐이다. 영화에서 탐미적으로 뒤쫓는 것은 그녀의 육체의 운동이지, 그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내면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은교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그녀의 육체를 따라잡는 카메라는 그녀의 육체를 드러내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청소나 빨래같은 집안일만큼 온몸을 쓰는 것이 있던가. 누드로 청소를 해준다는 서비스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은교를 이렇게 비워놓는 이유는 하나다. 은교가 비어있어야 이적요는 늙은 자신을 그것에 투과시켜 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적요에게 은교는 자신의 모습을 젊게 비추게 하는 거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제자 서지우와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젊음이면서도 서지우와 은교는 다르다. 은교가 비어있는 캐릭터라면 서지우는 꽉 차 있는 캐릭터이고, 그의 내면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별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고정관념일 것이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는 욕망일 것이고, 이상문학상이라는 권위일 것이며, 어쩌면 시기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하나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지우를 죽이는 방식이다. 서지우가 길을 내려가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로 다시 올라오다가 죽는 그 방식, 굳이 그 방식일 이유가 있을까. 마치 이 장면은 이적요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이적요의 조작이 없었다면 서지우가 자동차 점검을 하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돌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적요가 이 일에서 책임을 면하기란 힘들다. 결과가 같다면 결국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과정일 것이다. 그 죽음의 과정이란 것. 과정이 이렇게 바뀌어버리면서 서지우의 죽음에는 이적요 말고도, 책임져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서지우 본인의 젊음이다.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은 분노에 가득찬 그의 젊은 혈기이다. 그는 젊은 혈기에 가득차 한시라도 빨리 이적요를 만나고자 무리한 주행을 했고, 그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이다. 

즉 이 젊음은 문학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이적요에게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였지만, 이 유일한 무기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자신을 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 속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이 대비가 명확히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적요에게 있으나 서지우에게 없는 것, 즉 천부적인 문학에 대한 소질은 그 대비가 비교적 명확한 반면에, 서지우에게 있으나 이적요에게 없는 것, 즉 젊음에 대한 대비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약간 불만스러웠던, 혹은 의아했던 점은 이적요의 늙음은 관념으로는 관객들에게 주어지지만(즉 '이적요는 늙었다'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려 하지만), 그 실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이적요는 굳이 은교의 도움이 필요없는 늙은이이며(그가 은교 대신 청소를 하거나, 은교의 옷을 말려주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자, 이 장면에서 왜 은교는 누워있고, 그녀의 옷은 대신 늙은 이적요가 말려주는가), 자동차 정비를 손수할 정도의 나름 강건한 노인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당연한 힌트는 정지우가 나이든 배우를 쓰지 않고, 박해일에게 노인 분장을 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오히려 이 젊음과 늙음의 대비는 은교와 그녀의 말로밖에 등장하지 않는 은교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드러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발꿈치의 굳은 살을 긁어내는 은교의 어머니와 깨끗하고 예쁜 발과 발목을 가지고 있는 은교와의 대비. 은교는 언제가 되어서야 발꿈치의 굳은 살을 칼로 긁어내게 될까.)


이렇게 됨으로써 상딩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묘사되어야 할 캐릭터인 서지우는 단지 열등감과 시기심 밖에 남지 않은 캐릭터가 되었다. 즉 질시의 주체이자, 대상이어야 할 이 인물은 단지 '욕망하는 것'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악역의 역할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 전체 영화의 구조와도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초중반까지는 섬세한 심리극의 양상을 가지고 있던 이 영화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은교' 발표를 둘러싼 첫번째 결별 이후로 서사극으로 슬슬 변화하여, 마지막에는 몰아치는 사건들로 급속하게 마무리된다. 즉 영화 초반, 존경심과 보호본능 그리고 시기심, 질투의 사이에서 미묘하게 부유하던 서지우가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마지막에 이르러 인물에게 심리를 드러내보일 틈을 주지 않는 영화의 구조와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서지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서지우의 대척점에 있는 이적요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런 질문과도 연관된다.

왜 마지막에 이르러 이적요는 힘없는 노인으로 돌아갔을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내내 '팔팔한, 무늬만 늙은이'로 보이던 이적요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술독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되었다. 물론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지우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은교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답일까. 이것은 이렇게도 물을 수 있다. 왜 애초에 이적요는 서지우를 제자로 받았을까. 이적요는 첫만남에서 그의 문학적 능력이 없음을 이미 어느정도 간파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지우가 다른 감각 - 예를 들어 대중적 감각 - 이 뛰어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적요가 쓴 '은교'를 서지우가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세상에 내보냈다고 했지만, 그가 그것을 볼 때에는 분노로 가득했을 때였다. 그는 단지 그것을 더러운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후에 어찌 평가받았는가.) 어쩌면 이적요가 그를 제자로 받아준 이유는 그가 결코 자신만큼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적요는 그를 이용한 것이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그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는 자신보다 한참 떨어지는 (그나마 스스로 쓸 수도 없는) '소설가'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적요와 서지우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소설은 시에 비해서 이류에 불과하다'는 점이라는 사실.) 이적요는 그가 결국 자신의 '구겨진 뒷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견딜 수 없게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은교는 이적요를 젊게 만드는 그의 깨끗한 앞면, 그리고 서지우는 그의 가득한 내면의 욕망을 보여주는 구겨진 뒷면이다. 이 둘이 만나 '외롭다'며 섹스를 할 때, 이적요는 몰래 숨어 무엇을 보았던가. 자신이 곧 은교이며, 동시에 서지우인 것을, 그 외로운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찾아온 은교에게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저 뒤늦게야 깨달은 자의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동전을 뒤집어도 동전이 아닐 수 없으며, 예쁘고 가녀린 소녀의 발이건, 굳은 살을 긁어내야 하는 늙은 어미의 발이건 결국 발인 것, 서지우에게 '별이 별인 것을 모른다'고 힐난했지만, 정작 그것을 모르는 것은 자기자신일 뿐이라는 것. 이제 남은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적요(寂寥)한 이에게 찾아온 '은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녀는 은혜로운 만남(恩交)인가, 은밀한 관계(隱交)인가. 아님 그것도 아니라면 음란한 요부(淫嬌)인가.



덧.
영화 속에서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받지만(적어도 영화 속에서 '이상문학상'은 대중문학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현재 우리의 세계 속에서 <은교>는 도리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며 대중문학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 속에서 규정한 자신과 점점 반대가 되어가는 이 텍스트, 이 흥미로운 현상을 어찌 볼 것인가. 그와 더불어 이 자기반영적으로 보이는 텍스트를 기꺼이 쓴 박범신 작가에게도 경의를. 정지우 감독에게는 물음표를. 



- 2012년 4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

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Ending Credit | 2012. 4. 22. 21:4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알제리전투>는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알제리에,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구성된 1954년부터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직전인 1962년 봉기까지 8년간 민중들이 펼치는 거대한 이야기를 흑백의 다큐멘터리 화법을 빌려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다큐멘터리 화법이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 나온 모든 컷은 일체의 뉴스 릴이나 실제의 사건을 촬영한 영상을 배제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재구성된 장면들만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상당히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명백하게 극영화이다. 이 영화에 극영화의 요소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 서사의 구성방식에 어느 정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이 이야기는 한 명의 주인공을 행적을 뒤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인물이란 알리 드 쁘왕뜨(브라힘 하쟈드)라는 민족해방전선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가상의) 지도자인데, 이 영화는 말썽이나 부리는 식민지 청년에 불과했던 그의 각성으로 시작하여 1962년의 독립 2년 전 그가 최후를 맞이하게 될 때까지를 집중하여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그 내용으로 인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1966년의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 직후 프랑스 대표단의 항의를 담은 퇴장 해프닝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정식 개봉되었다.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흑백의 미학적인 문제, 흔히 시네마 베리테로 이야기되는 이 영화의 형식적인 면도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다보니 다른 것에 흥미가 간다. 먼저 하나는 이와 같은 극사실주의적인 영화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예를 들어 인물의 심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극단의 리얼리즘에서 결국 인물의 심리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심리라는 것은 결국 작가의 전지적인 시선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미묘한 뉘앙스로도 보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인물의 심리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감독들은 여러 다양한 장치들을 구성하고 시도한다. 그러나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이나 특정한 의도를 가진 편집을 배제하는 소위 시네마 베리테의 경우, 이것은 영화의 형식과 자주 충돌한다. 따라서, 인물의 심리를 구체화하는 특정의 시퀀스는 계속 배제되며, 관객은 인물의 심리에게서 계속 멀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생각해볼 때 이 영화는 어느 쪽인가. 과연 그들의 심리를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게 되는가.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마지막 알리의 마지막과 또다른 지도자인 자파의 최후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어떤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가. (혹은 읽어낼 수 없는가.)

이것은 물론 프랑스인들의 죽음과 알제리인들의 죽음을 다루는 측면에서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지만, 알제리전투 기간 내내 폭탄이나 총에 의한 테러리즘은 만연했으며, 많은 프랑스 시민들, 그리고 알제리 시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분명 이 영화는 알제리 쪽에 무게를 더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죽음 모두에 동일한 애도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이들의 모습은 클로즈업되며, 매번 어김없이 (엔니오 모리코네의) 애도의 스코어가 깔린다. 이것은 프랑스 군대나 경찰이 행하는 폭력적인 억압과 그에 맞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행하는 테러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논쟁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수장인 메튜 대령에 대한 묘사에서도 같은 기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적들(민족해방전선)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테러나 저항에 고문 등의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맞선다. 일반적으로 상당수의 영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거의 악마와 같이 그려지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의 그는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매번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며, 투항하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즉 공정한 재판을 할 사람처럼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그것이다. 과연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까. 아니, 테러의 주범들인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예를 들어 어떤 판결이 내려져야 공정한 재판이란 것이 되는가. 이들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들에게 단두대형이 아닌, 교수형을 판결하는 것이 공정한 재판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절차적인 면에서의 공정함만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이 영화는 일견 보이는 것처럼 시네마 베리테에 충실한 즉, 일체의 주관적 판단을 제외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그저 극사실적인 사건의 나열들인가, 아니면, 특정의 시선으로 교묘하게 처리된 사건의 나열인가. (한편 서구의 비평가들은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사물에 대해 주관적 판단을 하려는 의도가 담긴 행동'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고의성이 없다고 해도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만을 담는다는 것에는 이미 인위적인 구도가 가미된 것'이라며 '시네마 베리테'와 같은 시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물론 이 질문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기는 하다. 그것은 "특정의 시선이 배제된 것이 영화적으로 객관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예를 들어 위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프랑스인들의 죽음과 알제리인들의 죽음에 동일한 애도를 건네는 것이 (영화적으로) 과연 객관적인 것인가. 물론 이 물음은 불편하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은 어떨까. 고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공정한 것인가. 물론 이는 휴머니즘, 인도주의적인 부분과는 다른, 영화에서 다루는 것에 국한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환원된다. 시네마 베리테란 가능한가, 의미가 있는가. 즉 결국 '어떤 특정의 시선이 배제되는 것'은 극사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로부터 무엇을 얻는가.)

그러므로 내 느낌은 이 영화도 결국 표면상으로는 주관적인 의도를 배제한 사건의 나열이지만, 그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영화에 남아있으며,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그 본질을 프랑스의 경우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아닐까. 고문의 반인도주의적인 행태와 사르트르의 알제리의 저항에 대한 시선 등을 이야기하는 프랑스 기자들에게 메튜 대령은 일갈한다. 여기에 그렇다면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프랑스 기자도 여기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주의적인 정책의 수혜자는 본국의 지배층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일반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시민들 역시도, 동시에 그 제국주의의 공범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현재의 많은 부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가.) 알제리의 경우라면 혹 다음과 같은 것들은 아닐까. 영화의 말미, 알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죽음으로 영화가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으며, 앞으로는 조용할 것이라고 안심한다. 끝날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갑자기 2년 후로 점프한다. 들불처럼 일어나는 봉기들과 프랑스인들의 어리둥절한 외침. 왜 갑자기 이러는거야. 그 때 민족해방전선은 완전히 끝났잖아, 왜 지금 갑자기 봉기들이 일어나는거야. 여기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은 바로 영화 속의 몇 가지 장면들이다. 장면 하나, 막다른 곳에 갇힌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사람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대의 말. 너희들은 졌어, 어차피 다 끝난 것 알잖아, 그냥 나와. 장면 둘, 포기하고 투항하는 자파와 그의 물음. 여기서 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장면 셋, 죽음을 선택한 알리의 컷 다음에 모두 멈춰서서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알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알제리인들.

뜬금없이 독립이 된 2년 후로 점프했던 영화처럼 나도 갑자기 뜬금없이 다음의 글을 붙인다. 영화 <마이 백 페이지>를 소개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글의 한 대목(경향신문 2012-04-08).

1968년 3월11일, 도쿄대는 의과대학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12명과 연수생 5명을 퇴학시켰다. 이 처분의 철회를 요구하는 의대생들이 6월15일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이틀 후 학교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전원을 끌어냈다. 갑자기 이것이 화약고가 됐다. 안보투쟁 중이던 일본 전국학생연맹은 7월2일 다시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고, 전공투(全學共鬪會議)의 ‘학원투쟁’이 시작됐다. 총장이 사임했고, 의대 학장이 처분 철회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공투는 점점 더 강도 높은 요구를 했다. 마침내 이듬해 1월18일 8500명의 기동대가 투입됐고 72시간 동안 헬리콥터와 최루가스를 동원한 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원 체포됐다. 이 투쟁을 ‘도쿄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때 야스다 강당의 벽에 남겨진 수많은 낙서 중에는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 2012년 4월, CGV 압구정.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마딜로,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0) 2012.05.10
은교, 정지우  (0) 2012.04.29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0) 2012.04.13
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2) 2012.04.08
U.F.O., 공귀현  (0) 2012.03.24
: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Ending Credit | 2012. 4. 13. 15: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줄거리 들어있음)


아무튼 인류는 멸망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멸망한다. 다른 것은 다 부정한다고 해도 우주에는 시작이 있으므로 아마도 끝이 있을 것이고, 뭐 그렇다면 인류도 별 수는 없다.  인류멸망보고서. 보고를 하는 자들의 시각은 늘 냉소적이다. 보고를 하는 자들이 그 보고의 대상들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 원인과 결과이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멸망하였는지를 고찰하여, 보고를 하는 자들의 멸망을 늦추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임필성. 2008년의 광우병 촛불정국을 직접적으로 비틀고 있는 이 단편은 인류 멸망의 원인이 인간의 지긋지긋한 탐욕에 의해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지긋지긋한 악순환. 인류 멸망의 시작이 한 잉여의 별 생각없는 분리수거 무시의 결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이 유머러스한 시작은 쓰레기 처리과정을 직접적으로 길게 보여주는 몇 가지 컷들로 흥미롭게 이어진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는 필연적으로 과잉된 쓰레기를 낳고, 과잉된 쓰레기는 동물의 몸을 통하여 다시 인간에게 들어간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의 결과임은 처음 좀비 바이러스에 걸리는 자들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 아무 생각없이 살며 여자 뒤꽁무니만 쫓는 주인공과 그보다 더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자친구, 그리고 불량청소년, 탐욕스럽게 고기를 뜯고, 클럽에서 그 욕구를 발산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 좀비 바이러스의 기원이 되어 곧 온거리로 이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그리고 광우병 촛불시위의 비유.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모르지만 '촛불 좀비'라는 말이 보수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 때, 그 말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킨 자들은 각자의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촛불 좀비'라는 말의 다양한 변이체들을 이리저리 널리 전파시켰고, 보수언론은 그 말들을 어김없이 받아적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영화. 두 가지의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트려지는 곳은 길바닥이라는 점. 미안하게도 좀비 바이러스는 싼 고기를 먹고, 길거리에서 그 욕망을 분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파된다. 그리고 그들을 좀비라고 규정지은 사람들은 각자의 집 문을 걸어잠그고, 길거리에 쏟아져나온 좀비떼들을 (아마도 곧 좀비가 될, 사실은 좀비와 별다르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전경들이 막아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화 안에서 이 좀비들과 별개인 것처럼 전개되는 무감각한 TV 리포트들. 시시각각으로 페허가 되는 건물들과 별개로 이 TV 리포트는 도대체 어디에서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이 TV 리포트를 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나, 어디에 숨어서 이 공정한 리포트들을 토해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좀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분별력을 다시금 찾게해줄 사과(선악과)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로 뛰쳐나오게 해줄 심장과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의 사고이다. 그와 동시에 돌이켜보면 MB 정부의 가장 큰 위기였던 촛불정국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광우병, 소고기 때문에 촉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멸망 실현 가능성 : 27.2%.


<천상의 피조물>-김지운. 그렇지만 결국 실패한 좀비들은 로봇이 되었다. 인류의 예정된 노예, 로봇. 앞의 <멋진 신세계>와 이 <천상의 피조물>은 전혀 별개의 작품이지만, 왠지 이 두 단편은 대구를 이루는 듯 하다. 모두 다른 육체지만, 머리가 포맷되어 비슷한 행동패턴을 보이는 좀비, 그리고 그 반대로 모두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다른 정신을 가지게 된 단 하나의 로봇. 단지 절의 가이드 로봇에 불과했던 개체들 중의 하나 RU-4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인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창조주이자 소유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로봇의 깨달음이란 오작동에 불과한 것이며, 어쩌면 그 오작동을 넘어서 인류에 대한 위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인명'이라는 개체 하나에 대한 파괴가 아닌, RU-4 모델 전체에 대한 폐기 시도로 이어진다. 기계의 법칙 하나. 개체 중의 하나에서 오작동이 일어나면 반드시 동일한 다른 개체에서도 오작동이 일어난다는 것.)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로봇이란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인 것, 만약 인간 중에 깨달음을 얻어 신 이상의 어떤 존재가 생겨난다면, 그 존재를 신은 과연 가만 놔둘 것인가.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인간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불교에서도 가장 체제전복적인, 일체의 현상들에게서 전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붓다의 공(空)의 사상이다(여기에 팔을 잘라 법을 구했다는 혜가(慧可)선사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인간세계 그 모든 것에 대한 비판적인 해체에 가닿아 있는 이 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마지막에서 RU-4, 즉 인명은 스스로 정지를 택함으로써 결국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소멸은 이 체제전복을 스스로 실천, 증명해보인 것으로 아마도 이 이후 로봇들, 즉 노예들의 연대는 시작되고, RU-4들은 개체 멸망에 맞서 인간에게 대항할 것이고, 인간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역으로 말해서 인간이 개체 멸망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지금 행하고 있는 파괴들을 중지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게 가능할까.) 
멸망 실현 가능성 : 5.7%. 


<해피 버스데이>-임필성. 세 편 중에 가장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인류는 어느날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이 소행성이란 한 소녀가 자신의 실수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에서 몰래 주문한 8번 당구공인 것. 당구공을 되돌려보내기 위한 필사의 반품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인류는 예기치 않았던 종말을 맞는다. 

코믹한 농담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인류의 멸망이란 어쩌면 이렇게 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거대한 8번 당구공이 지구에 쓰리쿠션으로 맞을 확률이야 거의 0에 수렴하겠지만, 이들이 멸망을 앞두고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보며, 실제로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다면 그것은 비극적이면서도 분명히 코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적어도 할리우드처럼 갑자기 거대한 희생정신과 인류애가 꽃피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결국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며, 멸망의 마지막에는 철학도 이성도 고찰도 사랑도, 그 무엇도 없다, 오로지 멘탈 붕괴만 있을 뿐. 그러니 그대여, 인터넷 쇼핑 시에는 판매자 확인은 필수, 그리고 빠른 배송에 집착하지 말 것.
멸망 실현 가능성: 가까스로 0에 수렴.




덧.
세 편 모두가 공통적으로 초반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지속시킬 힘이 부족해보인다. 어차피 초반의 아이디어를 넓게 확장시키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더 재기발랄하고, 도발적이고, 폭력적이고, 야했으면 어땠을까. 또 하나, 전체적으로 각각의 단편으로는 흥미로우나 세 가지 이야기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강해,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묶어내기가 마땅치 않다. 세 개 중에 하나의 이야기는 버리고 두 이야기를 조금 더 유기적으로 결합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각 개봉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현재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기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교, 정지우  (0) 2012.04.29
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2) 2012.04.22
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2) 2012.04.08
U.F.O., 공귀현  (0) 2012.03.24
로맨스조, 이광국  (2) 2012.03.19
:

잠이 안 와 쓰는 글

끄적거리기 | 2012. 4. 8. 20:57 | Posted by 맥거핀.

* 며칠 전에 알라딘에 쓴 글, 옮겨둠.

1.

주말에는 주로 밀려있는 <씨네21>과 <한겨레21>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씨네21>을 한 권 다 읽고, 다시 <한겨레21>을 한 권 다 읽고, 다시 <씨네21>을 다 읽고, 다시 <한겨레21>을 다 읽고...주간지라는 것을 그렇게 읽어야할 의무란 없을 테지만, 이상하게 집어들면 처음부터 빼놓지 않고 모든 기사를 꼼꼼이 읽어야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생겨난다. 어렸을 때 매일매일 신문을 장시간 읽었었는데, 그러고보면 예전에 신문을 읽을 때에도 나는 신문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차례차례 모든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중간에 있는 경제면들 기사는 정말 재미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모든 기사를 빠짐없이 읽고나면 이상한 만족감이 생겼고, 뭔가를 많이 알게된 듯한 착각에 휩싸이곤 했다. 뭐 글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주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해도, 그 중 기억에 남는 꼭지는 몇 개 뿐이지만, 나는 나머지 것들도 어딘가 머리 뒤쪽 잘 안보이는 틈에 조금씩은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기억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 뭔가를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게 될 때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처음 빛나게 기억했던 것들은 모두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고, 차곡차곡 쌓인 것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또 온라인 상으로 많이 글들을 읽게 되니 머리가 점점 다르게 재조직되는 것 같다. 도대체 온라인 상에 있는 글들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어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다른 색으로 강조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인지, 사진이 들어간 부분을 먼저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밑에 댓글부터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반짝반짝하는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먼저 읽어버리게 되고, 글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점점 요원해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직도 온라인 상에서의 글들을 조직하는 법에 대해 익숙치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PC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스마트폰이 나오고,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트위터가 있고, 카톡이 있고, 사진으로 말하기(카카오스토리) 같은 것이 있으니 점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질 즈음에 늘 또다른 새로운 것이 나와 그 익숙함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좋은걸까, 나쁜걸까.

2.

지나간 <씨네21>을 읽는 것은 늘 힘들게 만든다. 놓쳐버린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워 호스>에 대한 평에서 이 영화는 반드시 필름으로 보아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진가를 맛볼 기회를 (잠재적으로)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DVD나 컴퓨터 파일로 본들, 도대체 그 '진가'라는 것은 알 수가 없게 되버린 것이다. 물론 사실 조금 이해가 안되기는 한다. 필름으로만 맛볼 수 있는 진가란 게 도대체 뭐지? (뭐 예를 들어 MP3로는 절대 체험할 수 없는 극상의 경험이라든가, 수입산 냉동육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이라는 글들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 필름으로 보면 디지털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무엇인가가 도대체 무엇일까. 예를 들어 필름으로 보면 말갈기의 미세한 털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게 되고, 그 와중에 그 털들의 오묘한 물결무늬들이 뭔가 깨달음을 주는걸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말갈기의 털 같은 건 디지털로 도리어 더 잘 보일텐데. 아무튼 가까이에는 디지털밖에 없고, MP3밖에 없고, 물론 수입산 냉동육밖에 없다. '그 맛'이나 그 '극상의 경험'은 어떤 몇 사람을 거친 후, 그저그런 언어들로 마모되어 도대체 처음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거친 입자로만 나에게 전달된다.

반면 지나간 <한겨레21>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지나간 기사들은 몇 주 후의 전망을 하고 있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는 이미 그 전망이 현실이 되어 도래한 세계에 살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 주 후에 와있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몇 주 전의 <한겨레 21>에서는 불법사찰이 김종익 씨나, 남경필 전의원의 경우 등 몇몇 한정된 범위에서가 아니라 보다 큰 범위로 행해졌을 가능성에 대해 미세한 희망을 걸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불법사찰은 보다 대규모로 저질러져 왔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선거 전망도 그런 측면에서는 재미있고, 선거가 끝난 이후에 이 전망의 기사들을 보는 것도 꽤나 재밌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간에 나는 아직 어느 정당을 지지할지 정하지 못했다. 지역구 의원의 경우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정통민주당 3명의 후보 밖에 없으니 비교적 선택이 쉬운데, 정당의 경우 어느 정당에 한 표를 던질지 고민스럽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녹색당 3당을 놓고 '열린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너무 비슷비슷한 이름의 정당들이 많아 계속 헷갈리고 있다. 순전히 이름만 놓고 비슷한 계열로 묶어보면 민주통합당-정통민주당이 있고, 새누리당-한나라당이 있고, 통합진보당-진보신당이 있고, 국민생각-국민의 힘-국민행복당이 있고, 친박연합-미래연합이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가 펄쩍 뛸 일이지만, 기독자유민주당과 불교연합당도 같은 계열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뭐가뭔지 알 수가 없고, 5호16국 시대를 보는 느낌에 참 애매하고 어지럽다. 이거 뭐 애정남에 질문이라도 올려야 하나.

3.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곧 개봉하게 될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대해 보았더니 매우 흥미가 생긴다. 7년 동안 고이 잠자고 있다가 2012년 지구멸망에 맞춰 지각 개봉하게 된, 마야인이나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영화. 세 개의 스토리가 있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인데, 하나는 역시 어김없이 등장한 좀비 이야기이지만 나머지 두 개는 꽤 흥미롭다. 하나는 인터넷으로 정체모를 사이트에서 당구공을 주문했다가 전 지구를 멸망 위기에 빠뜨리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절의 가이드 로봇이었다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무려!) 설법을 하게 되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란다. 나도 매일 설법을 하시는 공자봇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어찌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있으랴. (예를 들어 트위터의 공자봇이 어느날 공자님 말씀만을 그대로 줄줄이 읊다가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새로운 말씀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어떨까.)

최근에 단기적으로 관람 1순위로 놓고 있는 영화는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마이 백 페이지>인데(츠마부키 사토시와 마츠야마 켄이치를 보는 것도 물론 당연히 중요하다. 그거 무시 못한다. 누가 소녀들의 미남 사랑을 욕하랴), 이 영화도 동등하게 올려놓아야 겠다. 이와 별개로 중기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이고, 장기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영화는 아오야마 신지의 <도쿄 공원>이다. 아오야마 신지의 모든 영화를 최대한 찾아서 봐야겠다..그래야겠다..고 한지가 3년째인데,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4.

주말에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고, 내친 김에 <하나 그리고 둘>을 보려다가 이것마저 보게 되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257분짜리 영화인 이 영화는 늘 25.7분짜리 영화로 느껴지고, 2570분 후유증이 간다. 

5.

<한겨레21>에서 본, 미 앨라모고도 폭격장에서 실시된 인류 역사상 첫 핵폭탄 실험을 참관한 토머스 프랜시스 패럴 미 육군 준장의 당시 상황 보고.

"(핵폭발의) 결과는 전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장엄하고, 아름다웠고, 엄청났으며, 두렵기도 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현상을 전에는 본 적이 없다. ...주변의 모든 봉우리와 크레바스와 산등성이에 불이 밝혀졌다. 직접 목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폭발 직후 엄청난 후폭풍이 실험 참관자들에게 불어닥쳤다. 거의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력한 천둥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심판의 날을 경고하는 듯했다. 우리 나약한 인간들이 신이 독점해온 힘을 탐하는 불경을 저지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탄식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고 말았다."

(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이어지는 기사의 한 대목.

"그해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뇰라 게이를 몰고 티니언섬을 출발한 티베츠 대령은 같은 날 아침 8시 15분께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소년'(리틀보이)이란 암호명으로 불린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탄에는 패럴 준장(주:위의 그 '패럴'이다)이 직접 써 넣은 글귀가 있었단다. '히로히토에게, 사랑을 담아서. T. F. 패럴.'"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6.

키보드가 문자들을 씹어먹어서 더 이상 길게 쓰지 못하겠다. 특히 'ㄴ'자를 자주 잡아먹는 걸로 봐서 이게 맛있나보다.    

 



'끄적거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이 와서 쓰는 글  (2) 2013.01.22
몰락의 아이콘들  (0) 2011.10.25
독서 취향 테스트  (0) 2011.02.07
막장을 대하는 방법  (0) 2009.01.12
나이브한 생각  (0) 2008.07.06
:

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Ending Credit | 2012. 4. 8. 20:48 | Posted by 맥거핀.

 

우리는 사실,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영화 포스터 뒷면에 있는 영화 배경 설명. "1991년, 알제리 정부와 반정부 이슬람 단체 사이의 무력충돌로 시작된 알제리 내전은 무고한 언론인과 외국인은 물론 민간인들에 이르기까지, 약 20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1996년은 양 측의 대립이 최고조에 다다른 때로,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의 난무로 인해 누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팽배해져 있었고 사건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1996년 3월 27일 새벽 1시 15분, 약 20명의 무장 괴한들이 티브히린의 수도원에 침입하여 일곱명의 프랑스 수도사들을 납치했고, 두 달 뒤 메데아의 한적한 길가에서 그들의 수급만이 발견되었다. 영화 <신과 인간>은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초점을 맞출 질문은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는 아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질문은 "왜 그들이 그런 선택, 즉 피신하지 않고 수도원에 남는 선택을 하는가?"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즉 우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듣는다해도, 우리가 그 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즉 우리가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면, 2시간 동안 그들의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감독 자비에 보브와에게는 한 가지 선택이 필요했다. 그것은 이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라는 영화적인 해석의 선택이다. 먼저 그것을 위해서 감독은 몇 가지의 세부적인 곁가지들(그러나 어떻게 보면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는 것들)을 쳐낸다. 그 곁가지에 해당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알제리 정부와 반군 중 어느 쪽이 선에 가까운가, 어떻게 보면 식민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프랑스 수도사가 여기에 남는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가, 이 수도사들과 이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들. 그러나 감독은 영화에서 그런 것을 묻지도, 파고들어 그려내지도 않는다. 대신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모든 것을 그들의 내면으로 집중시킨다. 수도사들에게 이곳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의 강요나 권유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외부적인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닌, 그들의 내면이 지시하는 선택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의 제목대로 이들에게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부분이다. 영화의 제목은 '신과 인간 Of Gods And Men'이지만 영화의 방점은 내내 인간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몇몇 힌트가 될 만한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첫 시작에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한없이 엄숙하게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선택된 장면은 누군가 헛기침을 하고, 하품을 하는 장면이다. 많은 경우의 수 중에 굳이 이 장면의 선택으로 영화의 시작을 여는 것의 의미. 수도사들이 납치범에게 끌려가는 극적인 순간에도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데, 가장 나이든 수도사가 살기 위해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나, 뒤늦게 수도원에 온 수도사가 납치범들에게 나는 오늘 왔다(그러니 나는 잡아가지 말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러한 선택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가장 극적이고 대표적인 장면은 그들이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고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장면이다. 감독 자비에 보브와의 선택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에게 '백조의 호수'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어딘가에 고이 숨겨두었던 와인을 꺼내와 마시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백조들의 한맺힌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음악을 들으며, 최후의 만찬을 엹은 미소와 함께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도 인간적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꼼꼼한 장면 설계와 엄숙한 카메라워킹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절대 가벼워서는 안되는, 숭고한 양식미를 갖춘 장면이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샷의 구성도 흥미로워 보이는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얼굴 클로즈업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고뇌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관습적인 샷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부수적이면서도 중요해보이는 다른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체성을 드러내보이는 효과이다. 나이든 수도사들의 주름지고 깊게 패인 피부를 그대로 가까이에서 드러내보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매번 환기시킨다. 이러한 클로즈업은 그들이 고뇌에 빠졌을 때 자주 활용되지만, 반면 그들이 고뇌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미사를 드리거나, 신에게 경배를 표현할 때는 카메라는 늘 뒤로 빠진다. 이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그들을 뒤에서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그들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인가? 예를 들어 그들이 다가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겁을 먹고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 카메라는 위에서 본 (부감)샷으로 그들과 수도원을 찍는다. 물론 이는 헬리콥터에서 본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쩌면 신의 시선은 아닐까. 그리고 헬리콥터는, 아니 신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디론가로 떠나버린다. 오직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신이 아니라,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인간의 고뇌일 뿐이다.

자비에 보브와는 영화의 첫머리에 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시편 82장 6, 7절. "너희는 신이며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허나,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으리라." 이것은 사실 자비에 보브와가 이 영화를 보는 법을 미리 관객들에게 일러두는 것이기도 하며, 그가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는 것. 그러므로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마지막까지 그 죽음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마을 사람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의 부담감, 양심의 가책을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며, 어쩌면 어떤 수도사의 고백처럼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들이 순교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납치범의 지시대로 그들의 메시지를 순순히 녹음기에 대고 읽어줄 이유가 있을 것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순교는 신이 되려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간에 다른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아마도 파괴의 신. 영화 속에서(혹은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혹은 죽음을 강요하는) 이들, 그래서 신에 가깝게 가려는 자들을 늘 조심하여야만 했다. 이들 수도사들은 신이거나, 신에 가까운 무엇인가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죽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리더인 크리스티앙에게 "이것은 가치 없는 죽음이 아닐까요?"라고 물을 때, 크리스티앙이 아니, 이것은 가치가 있는 죽음이며, 순교라고 말하지 않고, 최후까지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죽음'이란 없다(고 믿는다). 어떤 죽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파괴의 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처음의 질문, - 두시간 동안 이들의 '이해되지 않는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려 애쓸 이유가 있는가 - 에 대한 답을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이유는 '그 고뇌를 보려고 애쓰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은 아마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그리고 신에 가까워지려는 인간만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며, 무엇인가를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있으며,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인간으로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우리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런 죽음을 원치 않았으며, 무관심하게 버려진 자신들은, 모든 이를,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감사를 보내며, 심지어는 그들의 죽음 곁에 가까이 있었던 그들에게마저도 감사를 보낸다고. 물론 그들은 인간이니 결코 그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까지도 그들이 '사랑하기 위해 애썼다'고 믿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애쓸 수 있으므로, 신은 결코 애쓰지 않으므로.

 

 

덧.

이 영화를 보며 자주 들었던 생각은 그 근원에 있는 것들이었다.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 당신은 왜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카톨릭 사제이면서도, 코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상대방을 늘 이해하려 애쓰며, 이슬람과 카톨릭을 구분하지 않고, 말끝에 항상 아멘과 인샬라를 빠뜨리지 않는 이들을 보며,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이는 종교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아니 나는 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철학을 공부하고, 어떤 소설들을 읽습니까. 그 근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2012년 4월, 아트하우스 모모.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제리전투, 질로 폰테코르보  (2) 2012.04.22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0) 2012.04.13
U.F.O., 공귀현  (0) 2012.03.24
로맨스조, 이광국  (2) 2012.03.19
러브 픽션, 전계수  (0) 2012.03.12
:

U.F.O., 공귀현

Ending Credit | 2012. 3. 24. 17:17 | Posted by 맥거핀.




한 여고생이 산에서 실종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UFO 출몰지'로 잘 알려진 그 산에 UFO를 보러 갔던 한 무리의 남고생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은 UFO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그 여고생의 실종 역시 외계인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로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진 이상한 표식을 내미는데...정도면 이야기로서는 흥미로운 시작이고, 뒷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해지는 설정이다. 그런데 공귀현의 영화 <U.F.O.>는 이 흥미로운 설정을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고 평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호의적인 평들이 많은데, 글쎄...내 생각에는 고민이 조금 덜한 듯한, 왠지 만들다 만듯한 영화로 느껴진다.

호의적인 평들을 보면, 독특한 상상력, 장르의 다변화, (나름) 반전의 제시...등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일단 반전부터 생각해보면, 이 반전의 설득력은 상당히 약하다는 인상이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반전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고, 감독의 치밀한 계산들이 필수적이다. 반전은 보통 다른 기본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한 강도의 설득력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반전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야기적 믿음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반전은 그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망쳐놓은 '뻘짓'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전이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영화 중간에 계산된 치밀한 복선들을 깔아놓고, 그간 관객의 머리속에 쌓아놓은 이 치밀한 복선들 스스로가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의 머리통을 알아서 때려내기를 기대해야만 한다(물론 이 복선들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즉 반전영화에서 관객을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반전된 내용 자체의 묵직함과 쾌감이 아니라, 그 반전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관객 몰래 쌓아두었던 복선의 구조와 치밀함의 정도이다. 그러나 이 반전은 복선들이 앞에서 거의 제시되지 않은데다가, 그 자체로서의 설득력도 약하다. 즉 복선들이 충분치 않았다면, 반전 그 자체로서의 행동들에 대한 심리적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이 사건에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가 있을까. 그것이 이유라고 했을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맥이 풀리게 만들지 않는가.

이 영화 <U.F.O.>는 한국의 많은 장르영화가 그렇듯,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 안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왜 한국의 장르영화들은 장르 그 자체에 철저히 충실하지 못하는가. 나쁘다는 힐난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예를 들어 외계인과 UFO라는 불확실한 것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과 매스컴들을 보여주는 연이은 컷들(이 영화의 시작은 방송에서 UFO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소년의 씬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메시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 영화가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것은 관련하여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하면 그것을 영화의 전체 장르적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혼합하여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러한 것은 단지 배경으로 그칠 뿐 풍자나 비판, 고찰에까지 가닿지 못한다. 즉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이 영화가 조금 더 나아지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는 선언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지 그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검은 배경에 흰 자막으로 그 메시지를 보여주는 자체가 더 효과적이다. 즉 이 메시지 이후의 영화는 선언 이상의 것, 예를 들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지, 라는 데에까지는 적어도 나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라면 그것은 UFO라는 불확실한 것을 믿고, 말했던 이(그리고 우리)들이 결국 무엇을 파괴시켰나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무엇이라고 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또한 영화의 한 축에서 또 하나의 사회적 메시지로서 등장하는 것은 이 UFO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들의 배경이다. 자칭 '사대천왕'이라는 이들은 주인공의 형이 명쾌하게 이야기하였듯 네 명의 왕따일 뿐이다. 이 넷은 왜 왕따가 되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강조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넷의 배경이다. 어렸을 때 UFO에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UFO와 관련하여 사고하는 아이, 그리고 목사의 아들로,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기독교로만 해석하려 드는 아이(기독교와 UFO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재미있다. 그와 관련하여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제대로 사고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주인공의 형이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하려는 인물이라는 점.), 그들보다 한살이 많은, 뭔가 사고를 쳐서 이 학교로 오게 된 아이, 그리고 혼자 떡볶이를 사먹는 모범생 소년(이 소년이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물론 이 배경들을 서술하는 화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이들 행동의 특이성만을 강조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왕따가 된 이유는 어떤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단지 그들 개개인의 특이성으로만 소구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또하나 주목할 것은 이 영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인물 외에) 변변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만 미약한 보호자, 즉 그다지 어른으로 볼 수 없는 형이 등장할 뿐, 이 영화에는 그들의 행동을 컨트롤할 어른, 부모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오로지 그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할 뿐, 그들 곁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때 - 예를 들어 병원 - 마저 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즉 이 영화는 또다른 <15소년 표류기>이다. 아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라는 액자를 영화에 굳이 덧씌웠던 <파수꾼>과도 연관지어볼 부분이 있다.) 그런 그들 넷은 뭉쳐서 한 팀이 되고, 이들은 산에서 또다른 왕따 소녀를 만난다. .... 그러므로 이 결말을 우리는 이러한 배경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이 영화에 마음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 영화가 성장담의 형식을 가지고 있되,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물론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만이 성장담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성장은 헤세가 이야기한대로, 수레바퀴 밑에서 견뎌내는 것이고, 알이든 다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깨뜨리면서, 부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 <파수꾼>도 마저도 그것을 성장담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아이들은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아니 성장이 아니라 다시 퇴화하여 버린다. 그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 주위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만들어버리고 기꺼이 자신들의 모습을 가리는 가면을 뒤집어 썼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 속에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즉 이 사회는 수많은 퇴화한 자들이 만들어낸 사회이며, 그 어느 곳에도 어른은 없다는 것. 그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성장의 방식보다도 늘 퇴화의 방식을 먼저 습득하게 된다. 퇴화한 자들이 가득찬 사회에서 모두의 우위에 서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빨리 퇴화하는 것이니까. (그들이 UFO에 잡혀갔다온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이와 관련된다. 즉 이 퇴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이 증거가 되는가.) 그런 것을 젊은 감독이 만든 이 아이들만이 나오는 영화에서 봐야할까. 잘 모르겠다. (물론 이 마저도 그저 우리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만 하니까.)


덧.
하기는 방송사마다 세상에 이런 일이니, 진실 혹은 거짓이니, 그것이 알고 싶다니 하면서 괴담들을 양산하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서 괴담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연히 그것이 만연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사이에, 이득을 보는 자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그 효과적인 방식을 보고 배울 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 역할로 나온 이주승이라는 배우는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싶었는데, CINDI에서 본 <간증>에 나왔던 배우. 그 영화에서는 도리어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로 나왔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 2012년 3월, 씨네큐브.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류멸망보고서, 임필성, 김지운  (0) 2012.04.13
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2) 2012.04.08
로맨스조, 이광국  (2) 2012.03.19
러브 픽션, 전계수  (0) 2012.03.12
컷, 아미르 나데리  (0) 2012.03.02
:

로맨스조, 이광국

Ending Credit | 2012. 3. 19. 18:45 | Posted by 맥거핀.

 

3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스타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감독. 이감독은 새로운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프로듀서에게 떠밀리듯 허름한 시골 여관에 머무르게 되고, 심심풀이로 부른 다방 레지에게서 '로맨스 조'의 기묘한 러브스토리를 듣게 된다.

인기 여배우 우주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그녀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로맨스 조'는 영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시골로 내려간 '로맨스 조'는 우연히 다방 레지와 마주치게 되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첫사랑 초희를 떠올린다.


이것은 영화 <로맨스조>의 포스터에 나와있는 짤막한 줄거리이다. 이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은 분들은 하나 약간 흥미로운 점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 사이의 어떤 것. 즉, 영화의 제목도 '로맨스 조'인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로맨스 조'의 이야기인 듯한데, 굳이 앞의 액자 즉,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라는 액자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이다. (그것도 조금은 더 수상쩍게 만드는 것은 이 두 문장 사이의 어떤 유사한 점이다. 앞에 나오는 '이감독'과 뒤에 나오는 '로맨스조'라는 전직 조감독이 둘다 감독인 것으로 봐서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영화가 이것은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짐짓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굳이 오랜 과거로 거슬러오르지 않더라도 최근의 작품인 손영성의 <약탈자들>은 오로지 이야기만으로만 이루어진 영화였으며, 이 영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이 영화를 만든 이광국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액자를 덧씌우거나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이미 시도되었다(<극장전>, <하하하> 등). 그러나 이 영화는 <약탈자들>이나 <하하하>의 이야기들과 같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 진술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면서도, 전자의 영화들처럼 같은 인물과 같은 사건을 보는, 인물들 사이의 기억의 혼재, 그 반복과 차이와 미로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극중인물인 다방 레지(신동미)의 표현처럼) '새로운 서사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이야기이되, 고정적인 소실점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이 이야기들은 연결되기는 하지만, 뭔가 기묘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야기들은 시간의 축이나 인물들의 연결점을 미세하게 어그러뜨리고 있으며, 다중적으로 이야기들을 연결짓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기대게 되는 본질적인 고정선이 묘하게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며,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 영화의 흥미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에서 생겨나며, 감독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과도 연결되는데, 여타의 이런 류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사실 이 결말은 어떻게보면 사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극중 로맨스조(김영필)는 한번도 이야기밖으로 나아간 적, 즉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 그 이야기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 결말은 과잉된 친절인 것처럼도 보이고, 불필요한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필요하다.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잘 요약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를 이야기 속 그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내용이 아니라, 그 전달하는 방식을 보려주려고 했던 첫번째 질문의 의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 속의 인물'이라는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끝을 내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는 굳이 그 끝을 내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끝이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그 이야기들의 시작, 기원에 있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불쑥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하는 자의 간청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영화 속 모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려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모든 이야기들은 누군가 듣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왜 이야기를 요청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이야기의 존재가 다른 이야기의 논거가 된다. 즉 그물망처럼 연결된 이 이야기들 중 어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전체 이야기에는 큰 구멍이 생기고, 다른 이야기들도 그 존재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존재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로맨스조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방 레지가 순간적으로 프레임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이는 컷은 의미심장하다. 로맨스조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녀 역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곧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 되기도 하며, 역으로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희(이채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로맨스조(이다윗)가 한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파괴되지 않고 조금은 남아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두번째는 결국 처음의 질문과도 연관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사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놓고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용보다는 그 방식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야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화가 있던가.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가,이다. 로맨스조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매개체로만 보였던 다방 레지에게도 전화 씬을 부여하며,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풀어내는 것,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 초희를 그토록 괴롭혔던 소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소문들이 단지 무가치한 소문이고, 그것이 때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유통되는 방식에 있다. 영화가 이야기를 무신경한 방법,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낼 때, 때로 영화는 뜬소문보다 훨씬 더한 공격무기가 되고, 사람들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즉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와 그 이야기를 적절한 방식, 적합한 방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영화는 그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질문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야기가 빈곤해지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마치 소문들이 소비되는 것처럼 낭비하여 소비하려고만 드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동시에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여야 하며, 노력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 영화는 다시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내용 자체로서는 사실 빈곤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손을 내밀고 싶다.  


- 2012년 3월, 미로스페이스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2) 2012.04.08
U.F.O., 공귀현  (0) 2012.03.24
러브 픽션, 전계수  (0) 2012.03.12
컷, 아미르 나데리  (0) 2012.03.02
가장 약한 자는 누가 보호하는가  (0) 2012.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