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CINDI

Interlude | 2011.08.19 16:30 | Posted by 맥거핀.





불이 꺼지고, 아핏차퐁 감독의 영화제 트레일러가 시작된다. 이 트레일러는 묘하다. 기묘한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면서, 몇 겹의 커튼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크린이 드러날 듯 하다가 다시 가려진다. 멜로와 공포와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슬픔, 그 어느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런 이미지들을 조금씩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영화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멜로일 수도, 공포일 수도, 혹은 스릴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드디어 열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테러리스트들 (The Terrorists) - 툰스카 판시티보라쿤 감독

"작은 고깃배 위에서 두 소년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를 관통하는 빛을 응시하고, 바닷물 아래 헤엄치는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한다. 그 수면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고무 농장의 어둠 속에, 꺼질 듯 희미한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진실은 피에 굶주린 과거와 겹쳐진다. 과거는 태국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비난뿐이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위의 글은 영화를 조금은 오해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외곽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제대로 설명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하면 몇 명의 남자들이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성(性)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남자의 빠르고, 지속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어지러운 대화. 그리고 그 다음 한 남자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자막이 이어진다. 이 자막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내 옆에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느덧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버렸다.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몇 가지의 불친절한 독해. 이 영화에서는 자막의 독특한 활용이 도드라진다. 이 자막은 일견 화면의 내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남자의 경우 다음에는 한 남자의 세밀하게 촬영된 자위 화면 위로(이 영화는 남성 성기의 노출이 참으로 빈번하다), 1976년 태국의 대학에서 일어났던 군인들에 의한 학생들의 학살 사건에 대한 리포트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테러리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맥락.) 그것을 화면으로도 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쾌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강제로 당하는 행위(성고문을 당하던 남자)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다..는 것?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다른 독해. 어쩌면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자막들만 지워버리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포르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조금은 정적인 게이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검열관은 그저그런 포르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불편해졌을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기노출이 빈번한 이 화면인가, 아니면, 이런 화면과 함께 1976년에 일어났던 이 학살사건의 세밀한 리포트를 듣는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면과 자막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옛날 사진들과 자막으로 나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태국의 기차역과 기차역에 있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을 보여주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다음의 이야기들. "1978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잘들으면 전차를 태워주신다고 하였다. 태국에서 전차는 1976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전차를 탄 기억이 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1976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조금은 지쳐 보이는 태국인들의 모습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현재의 태국의 모습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묘한 울림이 생기며, 처음의 질문을 돌아보게 만든다. 완전히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를 들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이 테러밖에 없을 때 행하는 테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을 단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에는 다른 이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나는 테러를 반대한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금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꼭 보아 달라는 듯이 아주 충격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이 보이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 충격적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이 비슷한 화면을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서의 일들. 그러므로 영화의 질문을 되돌아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요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도 기억하는 대신에, 몇 가지를 잊고 있다. 얼마전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이 없다는 투로, 회고록을 써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평택에서, 용산에서, 명동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곳에서. 그것이 어쩌면 단지 기이한 포르노였던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이유다.

감옥과 천국 (Prison and Paradise) -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약간은 내 책임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를 하루에 연이어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202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고,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현지인들의 사망도 적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의 주범들에 대한 인터뷰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일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이 인터뷰들의 연결고리는 그 사건의 범인과 학창시절 룸메이트로 지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 이스마일이다. 그는 또한 테러를 조사하는 전문가로서 이 사건과 함께, 테러라는 것의 전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쓴다.

영화의 막바지, 이스마일은 자신이 처한 위치의 딜레마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미국의 앞잡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오해받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경찰에게는 이들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나고, 하리얀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토로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는 양쪽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격한 이슬람 지하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과격한 테러 분자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장시간 동안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이들은 한마디로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이슬람인의 관점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테러를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죽음(사형)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도 한편으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에는 한편으로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기 보다는, 동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단순이 이들의 논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발 비틀어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들 폭탄 테러범의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아이들은(이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겨진 어머니들은 몇 년이 지나 아버지들이 사형당한 후에도(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후 8년 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아마도 어쩌면 거의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해자 가족들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이들이 받은, 혹은 받게될 충격도 못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일종의 영화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펼쳐보이는 동시에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서, 이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비판은 이들의 지하드가 잘못된 지하드라는 것이다. 테러는 민간인들에게 가해졌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테러, 혹은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군대 대 군대, 무장한 자와 무장한 자 사이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민간인 관광객들과 일부 현지 민간인 무슬림에게 행한 발리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마일의 논리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일은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 다른 방식의 지하드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런 이스마일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한 가지는 이스마일이 이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려니와(그러고보니 이름도 이스마일), 영화의 마지막이 이스마일의 발언 컷으로 끝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음악의 활용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피해자나 가해자 가족의 인터뷰를 보여줄 때에는 으레 서정적인 음악이 삽입된다. 그러나 이 테러리스트들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서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과 이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차단'되어 있다. 하나는 인터뷰를 행하는 이들 앞을 가리는 감옥의 창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정의 차단. 따라서 이들의 논리는 나름 논리적이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과격 이슬람 옹호자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가 논쟁을 피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영화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이야기를 영화의 겉에 씌우는 것이다.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영화는 논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것은 지하드와 이슬람 정치 운동, 테러리즘, 인권 등에 관한 불씨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한 가지의 논점이 포함된다. 그것은 과연 가해자의 가족들을 영화라는 이유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Interlud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2) 2011.09.09
8월 22일, CINDI  (0) 2011.08.23
8월 18일, CINDI  (0) 2011.08.19
남겨진 메모들  (2) 2011.06.14
바흐 이전의 침묵, 페레 포르타베야  (2) 2010.10.25
CINDI에서 본 두 편의 독립영화  (0) 2010.08.25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