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북촌방향, 홍상수

Ending Credit | 2011. 9. 19. 23:4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북촌방향>이라는 제목은 절묘하다. 그 제목은 북촌이라는 마법의 공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방향이라는 시간성을 담고 있다.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이동한다는 것이며, 이동이란 그 안에 시간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에서 '이동하는 행위'가 보여지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어디론가의 공간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다시 어디론가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그 이동하는 행위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 이동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이동은 번번이 지연된다. 다만 영화의 처음 부분에 그가 북촌의 밖인 고덕동으로 향할 때에는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이 보인다. 북촌 안에서의 이동과 북촌 밖의 이동의 이 차이. 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싶다. 그는 북촌 밖으로 정말 나갔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의 시간이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부분이므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연속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시간은 가끔 이상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성준(유준상)이 중간에 술집여주인 예전(김보경) - '예전'이라니! 이 유머는 도대체. -  과 키스를 하며 나누는 대화를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도 있지만, 마치 과거로 돌아가 경진(김보경)과 하는 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에는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 영화의 시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밤씬 다음에 낮씬이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히 하루(혹은 며칠)가 흘렀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러한 짐작이 의미가 없어진다. 아니, 어떤 부분에 이르면, 낮씬과 밤씬을 구별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홍상수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 그것이 또 한몫을 한다). 이들은 도대체 낮술을 먹고 있을까, 아니면 밤술을 먹고 있을까. 왜 이 영화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파괴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많은 영화에서 독특한 시간들이 보여지는 것은 그렇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결국 시간의 예술이므로, 그 시간들은 대개의 영화 속에서 나름 의미를 가지고 변주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은 대체로 정방향으로 흐른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시간이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았다. 거꾸로 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몸이었지, 그것을 결코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일종의 착시와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영화에서 시간은 앞으로도 당겨지고, 뒤로도 보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보내진 공간에서 그 시간은 다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북촌방향>과 시간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비교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도 시간은 감겨지기는 했지만, 감겨진 상태에서는 정확히 다시 24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레이는 매번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주인공을 깨우기 위해 울려대는 알람이라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북촌방향>에서 성준이 잠을 자는 장면은 없다. 일반적으로 말했을 때 '잠을 잔다'는 의미는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북촌방향>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 모호한 의미만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그것의 이유가 있을까. 시간을 제거해버리면, 같이 제거되는 것, 혹은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디어 보이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영화의 독특한 예고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이 영화의 예고편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예고편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눈발 날리는 거리에 나와 서 있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예고편이 독특해 지는 것은 음악과 음성을 그대로 두되, 화면을 거꾸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떤 별 의미없는 동작들의 합인 것처럼도 느껴지며, 일종의 약간 우스꽝스러운 무용인 듯도 느껴진다. 즉 그들의 동작은 처음 의도인 '택시 잡기'를 의미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여기에 뭔가 생각할 부분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보람(송선미)이 길을 건너 뛰어가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뒤이어 영호(김상중)가 그 뒤를 따라가 프레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영호가 보람을 바래다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어떤 '맥락'에 따라, 영호가 보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의도'와 이 장면을 연결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우리는 그 장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저 조금 우스꽝스러운 프레임으로의 뛰어듬(거꾸로 돌렸으므로)일 뿐이다.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곧 그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즉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은, 곧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점.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의도가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기억나는 홍상수의 전작 <옥희의 영화> 진구(이선균)의 대사.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던 말. 그러나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을 것이고, 그 이유, 즉 우연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어 우유곽이 거기에 날려왔다고 해도, 그 바람이 분 것에는 결국 어떤 이유가 있다. 과학적 이유라고 해도 좋고, 신의 어떤 커다란 계획이라고 해도 좋다. 어찌되었던 간에 뭔가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진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일종의 신이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복잡한 메커니즘의 이유를 아는 자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자는 아마 신일 것이고, 신은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미리 커다란 '의도'를 가지고 계획했을 것이므로. (저번에도 이야기했던 박성원의 단편 <하루>. 누군가의 하루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북촌방향>의 변주인 것도 같다. 성준의 하루를 알면 아마 모든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홍상수는 그 의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보람은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영화 관계자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성준은 그것은 우연이며, 우리는 그 우연에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일종의 필연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연의 중첩은 그 우연이 일어난 후 사후적으로만 어떤 의미망으로 들어온다. 어떤 일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 이유에 대해 바로 깊이 생각하는 것(<옥희의 영화>의 진구처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우연들에 담겼던 의미에 대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될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결코 그 전체를 볼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아주 일부의 이유만 나중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는 그조차도 알지 못한다. '필연'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 우연에 일종의 통제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며,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우리는 툭하면, 영화의 의도가 어떻고, 작품의 의도가 어떻고를 이야기하니까. 그러나 사실 그 우리가 말했던 '의도'가 그 '의도'였던가.)

그러므로 시간을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의도를 무너뜨린 홍상수는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 우연들(어쩌면 신의 '의도'들)의 오묘한 조화에 겸손할 것. 신이 되려고 하지말고, 찰나를 겸손하게 잡아나갈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찰나적 순간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어찌되었던 전체를 영원히(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볼 수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찰나적 순간을 잡아챌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 속 성준이 제시한대로 '일기쓰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 일기쓰기는 분명 보통의 일기쓰기는 아니다. 홍상수는 말한다. (<씨네21> 819호 김혜리에 의해 이루어진 홍상수 인터뷰. 질문(김혜리):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답변(홍상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는 것이 아닌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매일 쳐다보는 것. 그것이 홍상수가 말한 찰나적 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채는 일기쓰기이다. 

이러한 말은 영화 처음의 성준의 대사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깨끗하게 통과해가는 것.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미세한 구멍들이 몇 개 뚫린 커다란 구를 하나의 직선의 화살표가 관통하는 그림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그 직선을 따라 그 커다란 구를 조심스레 통과하고 있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통과하다가 그 뚫린 구멍으로 구의 바깥을 찰나적 순간에 들여다 볼 수 있다(홍상수식 일기를 오래 쓰다 보면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 바깥에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하지만, 우리는 그 바깥의 전체 메커니즘을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들여다본 것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일 뿐이니까. 구의 바깥은 결국 완전히 그 구를 빠져나왔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여러가지를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다가, 때로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순간 귀 뒤가 서늘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우리는 그 구멍을 찰나적으로 지나쳐갈 뿐이므로 곧 잊어버린다. 그 전체를 보는 것은 그것을 다 통과한 마지막 이후이다. 삶이라는 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통과한다는 것, 관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성준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통과해나간다고 했지만, 곧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경진을 만났다. 어쩌면 그에게 처음부터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북촌이라는 공간안에서 붙들렸다. 그가 붙들린 것은 사람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고, 바로 시간이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관통하려는 자가 시간에 붙들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영화 속에서 마지막 찬스를 만났다. 바로 사진 찍히기. 이것이 찬스인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진 찍히기란 다른 말로 하자면, 찰나적 시간을 잡아채는 것, 즉 찰나적 시간을 순간적으로 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일그러지거나, 나쁘게 보이는 얼굴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찬스에서 그는 탈출의 기회를 잡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고 어두운 기운을 남긴다. 그것 역시 두 가지의 이유. 하나는 그가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 저승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저승의 물건을 먹으면 안된다는 신화 속 경고. 비슷하게 말하자면, 그는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진 속에서 북촌 안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준의 표정. 그는 그 찰나적 순간에 무엇을 보았을까. 구의 바깥을 작은 구멍을 통해 운좋게 들여다본 자가 짓는 두려워하는, 혹은 놀란 듯한 표정. 그는 구의 바깥에 있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가 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물론 대부분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인간들이란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지연시키려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로는 깨끗하게 통과하여 집으로 슝슝 가겠다고 하지만, 우리도 그것을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소설'로 달려가 술을 마신다.

덧.
홍상수의 영화는 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3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북촌방향>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써보라고 하면 가능할까. 아마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가깝게는 어떤 평자들(대표적으로 <씨네21>의 정한석)이 영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자꾸 뭔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멀게는 홍상수의 영화를 '영화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어떤 영화가 글로 쉽게 설명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 영화가 영화라는 고유의 속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글은 분명히 영화와는 다른 나름의 고유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 이루어지는 영화 비평이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어떤 영화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비평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방법은 영화로 비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김혜리 씨의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음악이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는 말, 모든 예술은 결국 음악을 닮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음악은 결코 글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말할 때 결국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홍상수의 영화들은 결국 그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를 가지고 화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글쓰기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덧2.
<북촌방향> 트레일러.



- 2011년 9월, 씨네큐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