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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허종호

Ending Credit | 2011. 9. 26. 15: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꽤 힘들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이 영화가 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생각을 해보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요즘의 많은 한국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상당한 '기획물'의 냄새가 난다. 물론 기획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명작으로 추앙받는 많은 영화들도 상당수는 철저한 기획의 산물이고, 감독의 힘이라기 보다는 제작자의 힘으로 탄생한 명작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한국영화들을 보면, 조금 이상한 기획들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영화들은 일단 그럴듯해 보이는 한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을 잃은 냉혹한 채권추심원이 암선고를 받고 장기이식을 받기 위해 사기꾼 여자를 만난다..아마 이 영화도 이런 그럴듯하고, 뭔가 물씬물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자 이거 돈이 될 거 같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일단 명확한 캐릭터들은 이런 기획에 필수적이다. 주조연할 것 없이 캐릭터들의 성격은 과장에 가까울정도로 선명해지고, 그들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영화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맥락을 알 수 없게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고, 붙은 이야기들은 처음의 플롯과 조금씩 겉돌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깔끔하고 차근차근히 뼈대를 만들지 않고, 일단 큰 줄기만 세운 다음에 가지를 붙여나가는 식이니까. 동시에 뭔가 새로운 입김이 여기에 계속적으로 붙는다. 액션도 붙어야 하고, 감동도 붙어야 하고, 유머도 붙어야 하고, 잔재미도 붙어야 한다. 그러므로 난데없이 신파의 코드가 등장하고, 카체이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처음에 필요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게도 뭔가를 만들어주려다 보니, 이상한 잔개그들이 붙는다. 영화는 점점 뭔가 어리둥절해진다.

이 영화 <카운트다운>이 딱 그런 식이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이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 다음이다. 어차피 이런 기획류의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게 마련이고, 그 어지럽게 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이런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매끄러운 봉합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인상적으로 보이는 씬들도 많다. 그런데 그 씬과 씬들이 이상하게도 잘 붙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인상적인 영화들의 모자이크인 것도 같다. 각 씬들은 때로는 날카로운 유머를 발휘하고, 다른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시원한 액션을 보여주고,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을 만들면서 어떤 인상들을 심지만, 그 인상들이 뚝뚝 분절되다 보니, 그 인상의 힘마저도 조금은 의심하게 만든다. 즉 각각의 씬들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와 다른 어떤 좋은 영화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어떤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 혹은 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를 놓고서는 당연히 영화에서 진작 해결되어야 할 필요없는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화의 주인공 태건호(정재영)는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일종의 생존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외면적인 차가운 냉혹함은 겉과는 다르게 속에서의 부글부글 끓는듯한 살고자 하는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살고자 하는 욕구로 차하연(전도연)과 또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건 동행을 하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의 화신이 되었을까. 단지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억울해서? 아니면, 아들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아들이 이 냉혹한 세계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신만이라도 강해지려고? 냉혹해지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회에 어떤 복수를 행하려고? 이 중 어떤 것도 답일 수 있고, 몇 가지를 조합한 것이 답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 태건호가 영화의 거의 마지막까지 아들이 죽은 진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이 답변만으로는 뭔가 군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떤 답에도 모호한 입장을 내비친다. 아니, 어떻게 보면 뭔가 입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므로, 어떤 중요한 메시지처럼 보이는 '아이러니(irony)'라는 것에 그 답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뜻풀이까지 보여지듯이, 아이러니는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 '황당하다'는 말은 결국 그 이유나 의미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황당한 것은 황당한 것이지, 그 황당한 것에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저 우연이 빚은 결과일 뿐이며,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의 이야기로 가져와본다면 태건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일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다른 수많은 것에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차하연의 딸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그저 설명될 필요 없이 아이러니에 가까워질 뿐이다. (마지막 감동 코드를 넣으려면 필요해!) 영화 속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뭔가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개연성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 역시 아이러니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마지막 태건호는 조명석(이경영)과의 만남에서 차하연을 스와이(오만석)에게 인질로 맡기고, 뭔가 승부수를 띄우는 듯 하지만, 스와이가 차하연을 데리고 그 장소에 나타남으로써, 멋진 대결은 김상진씩 떼싸움이 되어버리고, 사건은 결국 태건호가 부른 경찰에 의해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이유로 스와이에게 나타나 담판을 짓는 듯한 액션을 취하는지?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 '아이러니'라는 것으로 가려진 의미를 관객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건다. 그것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가끔 숏의 빠른 분절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차하연의 사기행각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숏의 빠른 분절과 타이트한 리듬과 인상적인 대사들로 나타내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굳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을까. 차하연의 사기행각은 사실 훨씬 간단한 방식이니까. 차하연의 말대로 그런 남자들이란 이쁘고, 돈 좀 가지고 그럴듯하게 말해주면 넘어오는 단순한 존재들일 뿐이니까. 차하연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굳이 그런 다른 몇몇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설명들이 필요했을까 의문이다. 숏의 잦은 분절로 빠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복잡한 이야기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이지,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게 현혹시킬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이 영화가 캐릭터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인상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나름 중요한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장면을 소화해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고는 다시 바로 사라질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와 비슷하게 등장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캐릭터를 영화에 불러들일 때는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스크린에서 소비될 때는 어떤가.) 이들은 단지 관객에게 눈물샘을 자극할 요량으로 이 스크린에 불려나와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기획물의 맥락에서 이들은 단지 다른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 앞으로 소환된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태건호에게 추궁당한 장애를 가진 늙은 부모는 그렇게 소환된 후 곧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태건호의 부모가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인물로 표현될 이유가 있을까. 태건호의 아들이 또 장애를 가진 인물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캐릭터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비슷한 것을 차하연의 딸에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10억을 그렇게 쉽게 뿌리치는, 친부모에게 버려진 채 어렵게 살아온 10대 소녀가 단지 '쿨한 것'으로만 느껴질 수 없는 이유. 웃으면서도 어리둥절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 <카운트다운>을 보고 나오니 결국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강한 캐릭터도 있고, 재치있는 대사도 있고, 인상적인 씬들도 있다. 그 인상적인 씬들은 액션 장면에서는 충분히 쾌감을 느끼게도 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씬에서는 충분히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대중영화로서의 전부일까, 혹은 대중영화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극대치일까. 요즘의 어떤 한국영화들을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매끄러움이 유달리 눈에 띈다. 예전의 한국영화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던, 할리우드적인 매끄러움이 점점 대세가 되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영화들은 어떤 할리우드 영화들의 일부 특징들도 같이 흡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질문을 하기는 하되, 그 답을 극도로 빠른 시간에 관객들에게 되돌려줘 일종의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 따위는 하지마라, 생각은 내가 대신해준다는 식이다. 당신은 재치있는 대사 나올 때 적당히 웃어주고, 액션씬 나올 때 적당히 쾌감을 느껴주고, 감동씬 나올 때 적당히 따뜻해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 <카운트다운>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뭔가 질문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 답변은 이거다. 그건 그냥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것, 즉 황당한 일일 뿐이니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일까...생각해본다.




덧.
요즘에 개봉 전주 주말에 유료시사회를 하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말이 유료시사회지, 그저 미리 땡겨서 하는 주말개봉일 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빠른 입소문으로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 사이에서 대세를 선점하려는 배급사들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체로 입소문으로 선전할 것 같은 영화들 -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자신이 있는' 영화들 - 이 이런 전략을 쓰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 <카운트다운>은 조금 호불호가 팽팽하게 갈릴 것 같은 영화다. 이런 '불호'에 가까운 나같은 관객의 이런 리뷰가 먼저라서 죄송합니다. 컥.


- 2011년 9월, CGV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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