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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 월례비행'에 해당되는 글 3

  1. 2010.07.02 호수길, 정재훈
  2. 2010.05.08 계몽영화, 박동훈
  3. 2009.05.28 인디포럼 월례비행에서 본 <파산의 기술(記述)>
 

호수길, 정재훈

Ending Credit | 2010. 7. 2. 00:44 | Posted by 맥거핀.

참 이상하게 진행되는 다큐멘터리라 생각했다.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늘어선 연립들을, 양 옆에 펼쳐진 집들 사이에 난 길을 고정된 카메라는 몇 분간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 전환. 길 아래로 어떤 할머니가 힘겹게 내려간다. 카메라는 그 뒷모습을 무리한 줌으로 당겨서 찍는다. 너무 당기다 못해,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다시 거칠게 화면 전환. 다시 아까 그 연립. 이번에는 밤이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연립의 5층에는 유일하게 불켜진 창문이 보인다. 카메라는 다시 말없이 그 불켜진 창문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불켜진 창문에서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화면 전환. 이번에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주 오래, 지치지 않고 뛰어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카메라는 그 아이들을 비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일이 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도 불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경사진 길을 아이들은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리고 웃으면서 쫓고 쫓긴다. 쫓겼던 아이들이, 쫓기 시작하고, 쫓았던 아이들이, 쫓기기 시작한다. 계속 웃으면서. 여전히 줌은 반복된다.


그리고, 영화는 급속히 후반부로 넘어가 버린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몇몇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 결정적인 몇몇의 차이점. 영화 후반부에는 예의 그 줌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기는 한다. 바로 조금 전의 장면에서만 해도 사람을 경계하며 움직이던 고양이의 사체. 그 줌 된 화면속에 사체 위로 날파리들만 어지럽게 움직인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양이 뿐만이 아니다.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할머니와 아이들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장면. 다시 어둠 속이다. 이제 더 이상 불켜진 창문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암흑 속에서 오로지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나 이 개 짖는 소리마저도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아니, 나의 착각인가. 암흑 속에서 개 짖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리니까 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에서 문이 쾅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일까. 그리고 계속 모든 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아니. 움직이는 것은 있다. 더 이상 줌 하지 않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계. 물론 이것은 잘못된 진술이다. 기계 같은 것이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지붕을 무너뜨리고, 건물벽을 부수는 저 기계는 실제로 이 마지막에서 '마치 산 것처럼' 움직이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질문이 생긴다. 저 기계 외에, 살아 움직이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까지가 이 영화 <호수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괴이하게 느껴졌던 이 처음의 장면들이 마지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줌들을 보고나서야 마지막에 질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다시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아마도 그 줌들은 '이 아이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아이들을, 노인들을,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감독의 필사적인 외침을, 그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이는 줌은 담고 있다. 그리고 물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

처음에는 거의 기교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을 마지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켜켜이 장면들을 쌓는 영화다. 그 줌의 활용은 물론이거니와, 사운드의 활용 역시 심상치 않다.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점을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후반부에 들어서 사운드와 화면과의 불일치가 심해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암흑 속에서 개의 짖음과 같이 특정의 사운드가 증폭되기도 하고, 화면과 전혀 상관없는 효과음이 느닷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불꽃의 이미지를 슬며시 끼워넣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에 묘한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그 공간을 매우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고, 아주머니들이 잡담을 나누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 그 공간들은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거대한 유령처럼 변하여 관객들을 습격한다. 공간은 순식간에 곧 무엇이라도 나타날 듯한 이상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 유일하게 기계는 살아 꿈틀대며, 조금씩 폐허를 확장해 나간다.

평론가 허문영은 지아장커 감독의 말을 빌려, 다큐멘터리를 두 종류로 나눈 바 있다. 그 하나는 기다림(wa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리고 지아장커가 구축의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문영은 덧붙인다. "이 말은 적어도 지아장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 <호수길> 역시 굳이 나누자면 구축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줌들의 활용이나, 사운드와 화면의 불일치, 혹은 끼어든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픽셀이 무너질 정도의 줌으로 아이들을 잡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화면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진다. 놀이터의 노는 아이들을 잡는 장면들에서 아이들을 잡는 크기는 그대로인데, 화면은 깨끗해졌다. 좋은 카메라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카메라가 훨씬 더 대상 가까이로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카메라로 다가와서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것의 의도는 사실 명백하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의 대상이 처음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심리적으로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분명히 영화 처음의, 멀리 줌으로 잡은 장면들보다 관객들을 그 아이들에 더욱 가깝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그 다음 장면들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에 관객들이 가지게 될 감정은 거의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의 대상보다 기록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시 지아장커의 말을 상기하자.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즉,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기록하는 자의 태도, 혹은 위치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몇 번이나 '우리 동네'라는 말을 썼다. 감독은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그 동네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감독은 그 동네의 주민이었다. 은평구 응암 2동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동네. 다른 어떤 설명을 가타부타 붙일 필요 없이 이 영화는 우리 동네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동네의 모든 집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은평구 응암 2동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호수길'도 존재할 것이고, 어쩌면, 그 길 옆에는 진짜 인공호수라도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 동네를 더 이상 '호수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더 이상 '우리 동네'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밀하게 축조된 마지막의 SF적인 공포는 아마도 감독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덧붙였다. 그 마지막의 불꽃 이미지는 그냥 '악!'같은 거라고. 그 비명. 악, 악, 아악.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말했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를 찍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 우리는 어쩌면 이 기이한 낯선 다큐멘터리를 이런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한 가운데에 거대한 기계를 던져 놓고 그것을 조종해 집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서 어디론가로 보내졌고 기이한 표정없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난 집들을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곧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 좋은 영화를 보게 해주신 인디포럼 및 알라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 2010년 6월, 시네코드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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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박동훈

Ending Credit | 2010. 5. 8. 02:36 | Posted by 맥거핀.
(포스터만 봐서는 호러물이지만, 호러물은 아닙니다.-_-)



계몽영화. 아마 보통의 영화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 이런 제목이 붙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거의 사어(死語)에 가까울 뿐더러, 혹여 쓰인다고 해도 요즘에 들어서는 '계몽'이라는 말은 거의 조소나 모욕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말이다. 내가 너를 계몽해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아마 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이거나 드시죠, 라고 말할 것이다. 계몽..아니, 굳이 계몽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즘에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니까 말이다. 인터넷 시대에 게시판에서 가장 분란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어디 나에게 가르치려 들어?"인 것은 거의 주지의 사실. 그래서, 어쩌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감독의 시대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삼대(三代)는 조금씩, 조금씩 비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쌓은 1대, 그리고 군부독재의 시대에 독재에 빌붙어 폭력적이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2대, 개인주의의 시대에 이기적으로 성장한 3대. 그들이 보여주는 비틀어진 가족극의 굴레. 그러나 그들에게는 몇 번인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비틀어진 것들을 조금씩 바로잡아나갈 기회들이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들은 그 때마다 '자신을 위하는' 선택을 해나갔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신들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러한 선택들을 말이다. (이 영화의 팜플렛에는 이 영화는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사실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선택들이 단순히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에는 한국 사회의 어떤 대물림에 대한 처절한 욕구가 담겨 있다. 때때로 수많은 선택들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자신들이 가진 부, 지위, 명예...등등을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하려는 욕구, 그것들은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의 반복되는 행위들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주류사회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앨범 사진촬영에서조차 중심에 서야 한다는, 주류사회에 대한 그 처절한 발버둥질. 그러나 그 처절한 발버둥질은 주류사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하는 것과 동시에, 몇몇 대물림되지 말아야 할 것 - 폭력, 이기심, 탐욕 등등 - 까지 동시에 대물림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 아마도 그것들 역시 대물림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대물림되는 그것의 결과물들이 결국 무엇을 초래하는지 영화는 밀도 있는 서사 속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흥미롭게 읽힌다. 이 3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주류 사회의 모습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으로 말해서 한 두가지 장면들을 제외한다면, 이 가정의 모습은 60-70년대 '대한뉴우스'에 실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권장할 만한 가정의 모습이다. 즉 이 모습들은 한국의 나머지 비주류들이 그토록 원하는 부와 지위와 권력을 약간이나마 소유하고 있는 모습이며, 나머지 비주류들에게 이상적인 형태로서 '계몽의 표본이 될' 만한 가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게 계몽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이 '계몽의 표본으로서 내세울만한 가정'이 실상 그 내부적으로 전혀 '계몽의 표본'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이 정도 수준'이 계몽, 혹은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한국 사회의 수준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을 통해 물으며 조소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난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3대의 각 인물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이것이 단지 한 가정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나간 모습들과 그 때의 선택의 결과들이 초래한 현재의 모습임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그간 역사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왔는가? (예를 들자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반민특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선택에 당신은 자유로운가? 아마도...아마도, 그것에 거의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류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그 주류 사회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매달려보고자 이들과 같이 발버둥을 쳐왔으니 말이다. 즉 이 영화의 3대는 타자화된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저 '우리 사회 그 자체'일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가 묵직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다.  
............................................

마지막으로 2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한 가지 의문은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작은 기업체의 사장이자, 집안의 독재적인 가장이며, 카라얀을 사랑하는 예술 애호가이면서(이 카라얀 역시도 아내가 권해준 것) 동시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2대 정학송의 불안한 모습과 그와 대비되는 아내의 모습은 어떠한가. 뒤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라도 이 불안한 남성 캐릭터는 독재적인 군사정권에서 가정과 학교, 군대라는 폭압적인 체제 하에서의 뒤틀린 한국의 남성들을 묘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태선과 그의 남편, 김성호의 관계는 어떨까. 이를 단순하게 태선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성의 잔영으로만 이해하여야 할까. 이 영화의 주된 화자(話者)인 태선과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축인 태선의 어머니(학송의 아내)의 병실에서의 모습 등은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의문은 이 영화의 결론과 관련된 것이다. 문을 전부 뜯어고치겠다는 태선의 태도를 우리는 긍정의 예후로 읽어야 할까. 글쎄. 그러면서도 태선은 여전히 대물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예전의 세대가 직접적으로 부와 지위와 권력을 자식들에게 넘겨 주는 방식을 택했다면, 현재의 세대는 간접적으로 이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자식을 비싼 돈을 들여서 과외를 시키고, 8학군에 보내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이 방식이 더욱 효과가 크다. 그러한 교육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사회구조가 이미 공고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남들 보란듯이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는 이 세련된 방식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점점 주류사회는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선이 자식을 공항에서 홀로 보내는 이 마무리 장면은 꽤나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제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 제목 <계몽영화>를 되새겨보자. 현재의 변질된 의미와는 다르게 본래 계몽이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주체적 현실을 구축해 나감을 의미하였다. 즉 신의 거대한 치마폭에 둘러쌓여 있던 중세의 어두운 시기를 밝게 하는 것(enlightenment), 그것이 바로 계몽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이제 어쩌면 지금의 시기가 새로운 의미의 '계몽', 그리고 그에 바탕한 '계몽영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 2010년 4월, 씨네코드 선재.



* 인디포럼 4월 월례비행으로 본 영화인데, 게으름 덕택으로 이제야 어렵게 기억력을 되살려가며 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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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지만, 알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인디스페이스의 월례비행에 다녀왔다. 이달의 영화는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記述)>. 일종의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제목은 <파산의 '기술'>이나 '기술'보다는 '이미지' 또는 '파편들'에 가깝다. 화면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떠돈다.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흐릿하게 잡은 CCTV 화면, 대한뉴스, 타이거우즈가 빙그레 웃음짓는 카드회사의 광고, 어느 담벼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 어느 시위 현장, 386들의 축제, 세계 경제 포럼....많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비정규직 노동자 몇몇의 인터뷰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와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나레이션과 조세희의 <난쏘공>, <시간여행>의 몇몇 구절이 끼어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계속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가라앉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일부러 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자가 파산한 사람의 집의 물건들을 압류하러 찾아가는 장면들, 혹은 카드회사에서 돈을 빨리 갚으라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아주 흐릿한 화면으로 제시되거나, 아예 암전된다. 그리고 그나마 음성도 조금 나오다가 말아버린다. 인터뷰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뷰 중 극적인 장면들, 예를 들어, 한 파산한 아주머니가 카드빚을 갚기위해 한 노래방 도우미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조금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금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한 사람의 인터뷰를 차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짜깁기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갑자기 끼어드는 여러 이미지들과 자막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갑자기 제시되는 조세희 소설들의 구절들, 그리고 감독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했던 상당히 문학적인 수식을 가진 나레이션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마도, 몰입은 공감과 분노, 또는 공포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파산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갖거나, 혹은 이 사회가 파산한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구조를 보고 분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파산의 구조, 이 구조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렇게 보아야만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산 그 이후(TV의 사회고발물들이 대체로 다루는 부분인)보다는 '파산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꽤나 친절하지 않다. 파산의 '기술'이라고 해서 그 파산의 구조 자체를 줄줄이 설명하기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 파산의 구조는 매우 흐릿하고 상당히 희미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파산의 구조라는 것이 그토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을 조금씩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것이 파산의 늪이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 파산의 구조라는 것은 드러나 있는 층과 그 이면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대출들과 카드회사의 친절한 광고들,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불친절한, 아니 폭력적인 전화목소리와 압류딱지를 붙이는 손길과 파산자들의 눈물과 의료보험 해지와 목소리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드러나 있는 층이라면, 그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실은 훨씬 더 폭력적인 층이 있다.

이 드러나 있지 않은 층은 이 영화에서 '집행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이다. IMF 이후 시작된 외국자본의 침공과 무너진 국내경제, 서민들의 손에 친절히 쥐어진 '카드'라는 함정 속에 숨은 카드회사를 살찌우던 정책들,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언제라도 이런 파산의 늪에 들어설 수 있는 비정규직들과 이 비정규직을 탄생시킨 사람들과 법률과 정책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온 3가지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세계 경제 포럼(혹은 그 비슷한 것)이 열리는 장면. 이 장면의 사운드는, 그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연상될 정도로, 웅얼웅얼 소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 손에 들린 와인잔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 '회사들보다는 가계에서 훨씬 상환이 잘 되니까요. 그쪽으로 자금이 몰리는 거죠.'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커다란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가끔 구제금융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지만, 개인이 무너질 때는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파산해가는 사람들과 교차되어 편집된 386들의 모습들, 그들이 축제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손을 흔드는 장면들. IMF 이후 소위 '진보정권' 10년의 시대에 양산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카드회사들과 제2금융권과 파산자들, 그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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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송희일 감독의 사회로 이강현 감독과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리고 파산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나오신 분(단체명 및 성함이 기억이 안난다...-_-)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월례비행 상영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감독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파산의 구조 그 이면의 것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든 것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위 '진보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2006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386세대에 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감독은 여러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감독 그 자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박노자 선생이 쓴 글과 같이,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혹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확실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 섞여들어가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담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질문한 다음의 부분이다. 영화 중간 파산한 분들의 인터뷰에서 한 아주머니가 돈을 어떻게해서든 꼭 다 갚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아주머니는 돈 몇 푼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에 신음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의료보험비를 못내도 카드빚은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야만 할까. 이에 시민단체에서 계신 분이 날카로운 대답을 해줬다. 이들에게 파산한 것은 하나의 '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즉, 돈을 못갚고 파산한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죄인처럼 이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산한 사람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과 폭언은 어느정도 정당화되며, 그들이 마치 신앙간증을 하는 것처럼, TV 앞에 나와 눈물로 돈을 다 갚을 것을 호소하는 사회, 그리고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결국 돈을 다 갚은 것이 미담처럼 다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이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빚을 갚는 것'이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레임'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같은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






- 2009년 5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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