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기대감

Interlude | 2012.01.01 15:15 | Posted by 맥거핀.

어쨌든, 2012년이 왔다. 2012년은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신종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좀비로 변하여, 최후의 인간 단 하나만이 살아남는 해로 그려졌었고, 동시에 각종 연이은 종말들로 지구가 남아나지 않을 것으로 기록된, 그래서 롤란드 에머리히가 발빠르게 <2012>라는 타이틀로 만들어낸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혹여 운좋게 재앙들을 피하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 2년 후에는 사도들은 지구를 점령하려 들 것이고(<신세기 에반게리온>), 그 다음 4년 후에는 인간들과 기계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터미네이터-미래 전쟁의 시작>), 다시 그 1년 후에는 데커드 형사가 복제인간들을 잡으러 다닐 것이다(<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다시 그 2년 후에는...아니 이제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집어치우자.


어쨌든, 2012년이 왔고,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볼 수도 있는 때가 왔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마도 가장 좋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은 어쩌면 가장 슬프기도 한 말일 것이다. 지나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뒤늦게 돌아보는 그 '가장 좋았던 날들', 그것이 가장 슬픈 이유는 이제 앞으로 그런 날들은, 그것과 상당히 비슷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과 동일한 어떤 날들은 이제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그 좋았던 시간들 속에서, 그것이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결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가장 좋았던 날들은 대학 시절일 텐데,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던 때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도 그 때의 우리들은 다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바보 같이 '나이 서른에 우린...'으로 시작되는 노래 같은 것을 함께 불렀겠지. 다시 돌아가라면, 그런 바보 같은 노래로 시간을 때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았던 시간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이 서른의 불안한 미래를 미리 추억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나빴던 날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은 걸까. 과거의 언젠가가 '가장 나빴던 날들'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가장 나쁜 쪽은 아닐테니까. 그러나 또 그것도 그렇게 쉽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 좋은 것과는 달리, 나쁜 것은 언제나 지금이 가장 나쁜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러니...아니 더 우울해지기 전에 이 이야기도 그만 집어치우자.

그러니 2012년을 시작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2011년의 베스트 영화 같은 것을 돌이켜보는 것 같은 것은 그만두자.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가장 좋았던 처음의 그 감정은 아마 그 영화를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보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2011년에 보아야 했으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여전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늘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고, 먹을 수 없었던 포도는 너무나도 달콤해 보이는 법이어서, 보지 못했으나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 영화들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 그 중에 10편을 골라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골라보는 작년 극장 개봉작 중 보지 못했으나 앞으로 보고 싶은, 아마도 보아야 할 영화 10편('극장 개봉작'으로 한정하는 것은 극장에 개봉하지 못하고 영화제 상영이나 반짝상영으로 그치는 영화들까지 모두 포함시키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또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는지...우리는 비열하게도 그것을 '시장논리'라 부른다). 언젠가 보기 위해서 기록을 해둔다.


1.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편의상 번호는 붙였으나, 순서는 없음)


2. 두만강, 장률


3.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4.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5. 짐승의 끝, 조성희


6. 세상의 모든 계절, 마이크 리


7. 고백, 나카시마 테츠야


8.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



9. 종로의 기적, 이혁상


10. 웨이 백, 피터 위어

 


덧.

막상 적어놓고 나니까, 이 영화들이 딱 특정 시기가 겹치는 것이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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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2.01.01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1년에도 보고싶지만 보기어려운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제 게으름탓도 있었고 애써 예매까지 알아봤지만 시간과 접근성이 너무 벅차서 포기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구요. 2012년엔 그런 부분들이 좀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카피하다' '고백' '히어에프터''종로의 기적'은 저도 갈무리해두려고 합니다. 이정향감독의'오늘', '비우티풀'도 같이요. (제목 기억 안나는 몇 편의 영화도.. ^^;)

    * 2012년 새해가 밝았으니 인사 꾸벅하고 갑니다. 좋은 일, 웃는 일 많은 한 해 되시길 바래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2.01.02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되어간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영화도 일종의 빈익빈부익부랄까, 어떤 영화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에게 (거의 강제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어떤 영화들은 애써 찾아서 보려고 해도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쩌다가, (심지어는) 영화마저도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찾아보려 한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야 할텐데..그죠? 님도 좋은 새해, 복된 새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잊지 않고 늘 들러주셔서 다시한번 감사한 마음도 전합니다.^^

  2. Favicon of https://007donghwa.tistory.com BlogIcon 동화김 2012.01.03 0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엉클분미에 관한 글을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후로 꽤 오랜 기간 빠짐없이 다녀가는 블로그가 되었는데 매번 좋은 글들 소리 소문 없이 읽고만 가다가 이제라도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짧게나마 몇자 남기고 갑니다.

    훌륭한 글 매번 정말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2.01.03 1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그간 제 글들을 읽어주셨다니 저야말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리 글의 최종독자는 자기자신이라 해도 (제 블로그 보셨었으면 아시겠지만^^;) 여기는 참 썰렁한 편이라 제 글이 확실히 뭔가 문제들이 있군..하는 생각들을 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또 이렇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데에서 큰 힘을 얻습니다.

      인사 감사합니다. (저도 아무말 없이 몰래보는 글들이 있기에 갑자기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어느정도는 이해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