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 홍상수

Ending Credit | 2008.04.01 01:49 | Posted by 맥거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또는 민망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한 켠에 숨겨 놓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구석을 홍상수는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부끄러워하는, 혹은 민망해하는 그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을 피우며, 짐짓 부러 괴이한 이미지를 살짝 끼워 넣고는 다시 우리를 의식의 이편으로 이끌고 나온다.

그것이 흔히들 말해지는 위선이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진다는 것에서 위선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것보다 더욱 지독한 위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물들의 행동들을 스크린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관객들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부러 웃음을 터뜨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2.

그러나 이번의 홍상수의 이 영화 <밤과 낮>은 그리 부러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도리어 말 그대로 상당히 재미있어서, 상당히 웃겨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웃음들이 많은 편이다. 그것은 상당부분 남자주인공 이성남(김영호)의 애 같은 행동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예전 홍상수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을 맡았던 유지태나 문성근, 혹은 김태우 등의 배우들이 어떤 지적인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면, 이 영화의 김영호는 몸만 자랐지, 표정이나 행동은 그야말로 애 다운 행동을 해보이고 있기 때문에, 귀엽다고 할까, 혹은 백치미가 풀풀 풍긴다고 해야 하나. 예전 <극장전>의 김상경보다 조금 더 퇴화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막바지 아내 성인(황수정)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사실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아들같은 느낌이 상당히 풍겨난다.)

또한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상당히 유머를 친다. 이성남의 꿈 부분에서 목욕탕 창문에 코를 들이박는 돼지라든가(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영화관에서 가장 폭소가 터진 순간이다), 도빌 해변이 연상시키는 전작 <해변의 여인>이라든가, 꿈에서 유정(박은혜)의 발가락을 빠는 성남이라든가...상당히 여러 군데, 홍상수의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묘하게 뒤틀린 재미있는 이미지들과 대사들이 많다.

 

3.

이 영화를 보기 전, 그리고 보고 난 후에 <씨네21>등의 매체라던가, 인터넷을 통해서 이 영화 <밤과 낮>을 소개한, 그리고 분석한 여러 많은 글들을 보았다. 그러한 많은 글들에서 홍상수의 이 영화는 장면 장면 조각되고, 낱낱이 해체되어 새롭게 구조화된다. 그리고 조각된 장면들과 해체된 구조물은 다시 일일이 새로운 의미의 이름표를 달아, 새로운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대구와 반복(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성남의 중요한 화법이다. 이름하여 반복화법. 상대방의 말을 받아 그대로 되뇌기)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서 이 영화의 일기체 형식을 논하는 것(밤과 낮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리고 이성남의 마음 속에서 흐르지 않는 시간들(그에게 파리에 있는 시간은 도피의 시간들이기 때문에)이 실제로는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와 이성남의 독백을 통해),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과 <세상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보다도 훨씬 자세하고 풍부하게 잘 할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 두기로 하자. 단지 나는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나의 예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는 것, 그의 전작들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물론 이 재미있는 영화의 관객들은 나를 포함해서 4명뿐이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여러 많은 평들이 지적한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절망적일 수 있다. 죽어있는 구름 그림이 상징하는 대로, 처음부터 아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남자는 아기를 살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유정과 함께 파리에 남아서 유정이 낳은 아기를 같이 키워나가는 것이 훨씬 희망적인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홍상수의 농담들은 다른 한편에서 조금은 희망적이게 만든다. 농담이라는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공간에서도 존재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03.21 14:10 | Posted by 맥거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한 낮의 명동 거리는 시끄럽고 복잡했다.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와 반면 시끄러움을 피해 들어간 한 낮의 중앙시네마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이 지나친 시끄러움과 지나친 조용함은 나를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안 맞으면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3시 20분. 영화는 136분짜리. 약속 시간은 저녁 6시. 이 보다 더 시간이 잘 맞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5000원짜리 티켓을 사고(스폰지데이라고 하더군, 이런 고마울 데가), 1000원짜리 콜라를 사고(메가박스나 롯데시네마의 1500원짜리 콜라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다.

자리는 약간 비좁고, 앞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앞사람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어디선가에서 “누가 중앙 아니랠까봐.”라는 투정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관객층은 막 대학생이 된 듯한 소년에 가까운 청년에서부터, 나란히 앉은 젊은 여성관객 몇 그룹, 머리가 백발이 된 어느 노신사, 중년의 아주머니와 딸로 보이는 듯한 젊은 여성, 그리고 띄엄띄엄, 그러나 균형을 이루고 앉아 있는 남자 몇 명, 그리고 나. 생각보다 관객은 많다. 한 30명 정도 될라나? 이상한 음색의, 마치 학교종을 연상시키는 차임벨과 함께 갑자기 광고도 하나 없이 마이클 무어의 <식코> 예고편이 흘러나온다(암튼 마이클 무어의 교묘한 편집능력은 이 짧은 예고편에서부터 드러난다. “미국의 복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라는 부시의 연설에 곧 이어, “내 남편은 의료혜택도 못 받고 죽어갔어요.”라는 한 아주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그리고 곧 이 영화가 시작한다. <새드 배케이션>.

2.

이 남자, 켄지(아사노 타다노부).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돈을 위해 사람을 팔아넘기는 극단의 악과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는 구해서 도망치는 극단의 선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줄곧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떠돈다. 그것은 영화 속 고토(오다기리 조)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요.” (아마도 고토는 무서운 것들을 판별하는 능력을 누구보다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도망쳐야 하니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의 이런 불안한 기운이 예전의 어떤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임이, 그리고 이런 불안하고 기묘한 동거가 사실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복수의 하나로서 이어지고 있음이 거의 모든 영화관의 관객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단지 복수인가, 그는 정말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영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내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에 너무 빠져버린 탓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러나 결코 평온하지 않은 그의 얼굴,)

사실 그가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으면 되었던 것이다(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계속 ‘미안해, 미안해’가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 무서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실상 켄지는 약한 사람이었고,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부서지지 않는 존재, 그는 그의 어머니였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욱 아득히 멀어지는 어머니라는 존재. <헬프리스>, <유레카>에 이어지는 이 3부작 <새드 베케이션>에서도 그래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켄지의 복수 아닌 복수는 도리어 그를 다치게 만들었을 뿐이며, 그는 아직 많은 것들 사이에 놓여 있다.

3.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이른바 ‘마미야 월드’에 대한 것이다. 일견 따뜻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로도 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고 기묘한 공동체이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동시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들의 집합. 서로가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그러한 일정한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런 집합. (비누 방울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퐁’하고 터지는 것처럼, 아주 불안한 그런 공동체 말이다.)

그런 공동체가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사는 회사나 학교의 많은 부분들이 그런 사람들의 조합이며, 그런 식의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어쩌면, 우리 학교나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도 카메라를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 식대로 가져다댄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는지.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함에도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중국인 소년 아춘을 납치해가고, 사람을 칼로 찔러대는 그런 무서운 세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외부에도 그보다도 몇 배는 훨씬 더 무서운 세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안한 기운을 증폭시키던, 뭔가 불안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흘러나오던 기묘하게 삐걱거리는 듯한 음악이 생각난다.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4.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한참 올라가는데도 누구하나 일어서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주연배우들의 이름이 지나가고, 스탭들의 이름이 올라갈 참이면 나도 일어설 텐데,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아 이런 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네,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영화가 끝나고 앞으로 이런 짓을 가끔 해봐야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엔딩크레딧 송을 들으며, 이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불안하고도 기묘하고도 복잡한 세계를 매끄러운 솜씨로,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려낼 줄 아는 감독이라면, 분명히 다른 영화들도 녹록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헬프리스>와 <유레카>를 구해야 할 때.








                                

Johnny Thunders- Sad Vacation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The Book | 2008.03.19 22:20 | Posted by 맥거핀.

1.

‘소설’이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그 기원에 대해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저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작은 이야기’라고 보자면, 소설은 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은 골라내어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여 점점 살을 붙여 나가 하나의 틀에 잡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라 함은 그 소설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혹은 정교하게 축조된 허구이든 간에, 그 소설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혹은 어떤 깨달음을,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을 주는 데에 그 일차원적 효용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역시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주는 데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쾌감, 이야기를 내려놓음에서 느끼는 안도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주었다는 만족감 등이 복합된 또 다른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큰 효용일지도 모른다.

2.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1990년대 초 불안한 시국에서 살던 운동권 대학생인 ‘나’의 이야기를 전반부에는 여자친구인 ‘정민’과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그가 대학생 예비대표로서 북한에 입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및 그가 겪게 되는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도 그가 비디오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실물로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정민’의 삼촌 이야기,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 ‘레이’, ‘헬무트 베르크’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과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정민’과 ‘나’는 ‘더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끊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며,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길용’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종내에는 서로 뒤엉켜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즉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할아버지가 연결되고, 또 ‘정민’의 삼촌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존재를, ‘정민’의 존재를, ‘이길용’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3.

소설이 앞에서 말한대로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줄곧 거대담론에 맞서서 사람들 각각의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거대담론 속에서는 ‘1987년 5월에 몇 만의 군중이...’라는 식으로 숫자로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몇 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거리로 나섰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또한 무수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 소설 속에 있는 ‘나’, ‘이길용’, ‘정민’도 그러한 역사의 거대담론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숫자로 밖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일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알지 못할 -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처럼 -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존재를 증명해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거대담론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모든 작중 화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맞춰’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거대한 시대에 거대한 힘에 맞서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김연수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어떤 것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나갈 것. 거대한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거대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이야기, 거대한 힘이 몰락했다고 말해지는 지금 이 세기. 이 세기에서 개인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분절되고, 개인은 자신의 존재들을 증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할 뿐, 이야기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반갑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 얘기를 해봐. 들어줄테니. 이것이 바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전략)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

1. 38300리터의 소변을 본다.

2. 127500번의 꿈을 꾼다.

3. 2700000000번 심장이 뛴다.

4. 3000번 운다.

5. 400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6. 400000000000개의 정자를 생산한다.

7. 540000번 웃는다.

8. 50톤의 음식을 먹는다.

9. 333000000번 눈을 깜빡인다.

10. 49200리터의 물을 마신다.

11. 563킬로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란다.

12. 37미터의 손톱이 자란다.

13. 331000000리터의 피를 심장에서 뿜어낸다.

할아버지는 4번과 7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수 종이에다 계산을 했어. 이번에는 곱하기 문제가 아니라 나누기 문제였어.

540000÷3000=180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하략)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상세보기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05년 겨울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한 권으로 모아 엮은 김연수 장편소설. 199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학생회의 간부로 있는 작중화자의 눈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소설에는 1990년대를 살았지만 그 주변부에 내팽겨져 있던 수많은 인물



 

TAG 김연수

악인(惡人), 요시다 슈이치

The Book | 2008.03.19 15:23 | Posted by 맥거핀.

   
   그런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폼나게 지하철에서 일본 소설을 한 권 꺼내서 읽는 것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이니,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같은 그런 일본 소설들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니, 스탕달의 <적과 흑>을 들고 있는 것도 꽤나 폼나 보이기는 하나 너무 고루해보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고 있자니 얼치기 운동권 같고, 그렇다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너무 경박해보이고. 그래서 적당히 가볍고, 또한 적당히 무게 있어 보이는 그런 조건에 충족되는 소설들로는 일본 소설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당시(1990년대 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 코너에는 은근히 사람이 붐볐고, 마음먹고 도서관에 임무 수행을 떠났다가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오는 패자들이 생겨나곤 했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내 독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조금 무겁다 싶은 것을 하나 읽은 후에는 중간중간 일본 소설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 읽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를 동정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따위의 문구들을 나우누리 자기소개란에 올려놓고 슬며시 웃는 것이다.

   그런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게 있음- 이것은 오늘 날의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설 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재미있기는 하되, 너무 무겁지 말 것, 그러면서도 너무 경박하지는 말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니, 요시모토 바나나니, 히라노 게이치로니 하는 작가들의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또 일군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추리물이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일종의 로맨스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방금 다 읽은 <악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다.

   이 소설 <악인>은 한 여자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녀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그 남자들이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추리물이나, 범인을 밝히면서 긴박함을 강조하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를 조용히 따라가며, 우리 인간에게 악의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악의란 것을 가지게 되며, 그 악의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영화를 찍듯, 그리고 등장인물이 사건의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하 듯, 조용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일단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때로는 그 묘사가 지나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가끔 어쩌다가 낮에 집에 있게 되면,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로 드라마가 방영될 때가 있다. 그 때 난감한 것은 이러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치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고 그냥 ‘느끼면’ 된다. 그러나 화면해설 방송은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봅니다’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는지,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냥 한 번 무심히 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oo이 oo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oo도 oo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이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정도만 설명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만다. 즉 묘사와 설명의 중간에서 무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한 줄타기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솔직히 ‘독자의 사유가 선과 악을 판별하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는 옮긴이의 말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도 비교적 명확할 뿐 아니라, 혹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여주는 어떤 트렌드적인 경향에 길들여진(혹은 지나치게 패턴화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며, 일견 복잡한 듯하나 너무 평면적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부터 그런 기미가 조금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부잣집 도련님과 어머니가 항구에 자기를 버리고 간 청년. 뭐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다른 많은 일본 소설들과 같이 이 소설도 같은 한계점에 머무른다.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긴 하였고, 잘 짜여진 좋은 이야기들과 좋은 대사들도 있으나, 일시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게를 주지는 않는 것. TV를 끄고 나면, 그 불우한 청년이 어쩌다 실수로 한 사람을 죽였으나 사실 그는 나쁜놈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나쁜 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산’이 노론 척신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건 말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듯이 말이다. 좋은 소설이 가지는 공통점인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나의 삶에의 어떤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이는 우리 독자들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독자들이 요구해온 일본 소설의 경향이 그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출판사도 그런 작가들의 책을 중심으로, 또 ‘아쿠타가와상’이니, ‘나오키상’이니 그런 적당히 무게감 있는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번역하고 출판해온 것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에게도 일정 부분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번역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번역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문장을 읽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레이먼드 카버’의 간결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주 좋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악인 상세보기
요시다 슈이치 지음 | 은행나무 펴냄
그 사람, 악인인거죠? <랜드마크>, <첫사랑 온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 신작소설. 일본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인간 심연의 '악의'를 날카롭게 파헤친 감성 미스터리이다. 저자는 '선과 악', '강자와 약자'라고 하는 굵직한 테마를 선명한 묘사화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내며,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