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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거리기'에 해당되는 글 9

  1. 2013.01.22 잠이 와서 쓰는 글 2
  2. 2012.04.08 잠이 안 와 쓰는 글 2
  3. 2011.10.25 몰락의 아이콘들
  4. 2011.02.07 독서 취향 테스트
  5. 2009.01.12 막장을 대하는 방법
  6. 2008.07.06 나이브한 생각
  7. 2008.06.02 MB의 세 가지 오판
  8. 2008.05.07 MB는 삼성에게 배워라
  9. 2008.05.04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잠이 와서 쓰는 글

끄적거리기 | 2013. 1. 22. 17:58 | Posted by 맥거핀.



1.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국 우리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이 영화와 관련한 여러 리뷰들, 이야기들을 보면 이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믿음의 한 형태가 그 담론들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확장하여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관점들 같은 것 말이다. 이 관점들에서는 파이가 말한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이며, 파이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하게 되며, 호랑이는 단지 그의 종교적인 자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몇몇 증거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 제시된 증거로는, 식인섬이 등장하고(그러니까 실제로 이것은 식인섬의 등장 시점부터 파이가 배에서 식인을 했음을 의미하고), 그것의 형상은 사람의 형태(혹은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형태)이며, 사람의 이빨이 꽃 속에 들어 있으며, 난파되면서 갑자기 주방장이 얼룩말로 대치되며, (심지어는) 마지막 해변에서 호랑이의 발자국이 모래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을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 바깥에서 찾은 증거이다. 영화 속에서는 건너 뛰는 부분이지만,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실제로 파이의 식인행위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으며, 1884년 영국의 미뇨넷 호가 난파하여 18일만에 음식이 떨어지자 결국 한 소년 선원을 죽여 그 고기를 나눠먹고 살아남아 구조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였다는 사실 같은 것.

결국 이 관점들의 출발은 파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다른 버전의 이야기말이다. 소설을 보지는 않았지만, <파이 이야기> 소설에도 등장하고, <라이프 오브 파이>에도 등장하는 이 결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 순전히 영화의 어떤 완결적인 구조만을 놓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은 그 완결적인 구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이상한 사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마지막이 없어도 이야기의 완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그 구조 자체에도 흔들리는 부분이 없다. 아니 도리어 이 마지막은 이 구조를 스스로 흔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이상한 마지막이 영화에 슬며시 붙었을 때 흔히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러한 관점이 조금 기이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지 않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두 시간 가까이 본 파이와 리처드 파커와의 동거를 환상이라 생각하고, 영화 속에서 전혀 보여지지 않는 인간 사이의 살육에 이 관점은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영화 속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암시된 증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다. 암시된 증거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만이 그 구조를 우리앞에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 외부의 증거들을 영화로 가져올 때의 어떤 위험한 부분에 대해 재론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상징을 다룰 때,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때 외부의 구조를 가져오는 것, 그에 더 나아가 상징과 해석을 다룰 때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야할지도 모른다.)

2.

'믿는대로 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로 하면, 내가 '본다'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한 종류가 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무엇인가의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인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를 들어 정성일 평론가의 다음의 말과도 통한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즉 여기서의 '보는 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착란 상태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회의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얘기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 기이한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했어도, 심지어 식인섬의 미어캣이 시체에 꼬이는 구더기라는 이야기까지 나아가기는 했어도,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 맹신에 대한 위험성'이라고 결론을 맺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그 맹신에서 벗어났을 때만이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 해석을 하든 간에 그 돌아오는 지점이 그렇게 크게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종교적 맹신을 경계하자'는 것은, 사실 '(제대로된) 믿음을 가지자'는 말의 다른 버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믿음'이라는 것은 맹신이 제거된 믿음, 회의라는 것이 포함된 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해 보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본 것이 아니라 보지 않은 것에 기초하여 쓴 것처럼 보이는 그런 해석의 글들보다는 그 해석 밑에 붙은 여러 기이한 댓글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화에 찜찜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해석을 읽고 의문이 풀렸다는 식의 그런 댓글들. 그것이 위험한 것은 그것은 마치 어떤 정답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 혹은 맹신을 하지 말자는 취지의 글을 맹신하는 듯한 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찜찜한 부분'이 아닐까. 영화의 어떤 찜찜한 부분이 눅진하게 남아 건드리는 것, 즉 당신에게 던지는 계속적인 질문, 당신이 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찜찜한 의문을 풀기 위해 어떤 해석을, 혹은 어떤 글들을 정답지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영화를, 그리고 그 영화에 혹시 들어있을지도 모를 어떤 질문들에 대한 사고를 정지하는 것이며, 그 영화를 자신의 안에서 내치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기이한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감독의 인터뷰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해 다루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은, 아니 (이렇게 얘기하면 니 글은 어떻고,라는 얘기가 쏟아질 것 같으므로 이렇게 바꿔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글들은 질문을 풍성하게 만드는 글이다. 즉 우리가 영화가 끝났을 때 한 두 가지의 질문 밖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질문을 두 배, 세 배로 늘려주는 글들. 다시 말해서 찜찜한 영화를 더 찜찜하게 만드는 글들. 그리고 그 찜찜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금 영화를 보게 만드는 글들.

3.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영화를 다루는 어떤 태도에 대한 것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최근에 모 영화를 다룬 글들을 보러 한 사이트에 들렀다가 가득 쏟아지는 비평가들의 별점에 대한 조롱들을 보고 기분이 아득해져 (트위터에 글을 안올리게 된지 오래지만) <씨네21>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씨네21>의 애독자로서 하나 묻습니다. 포탈의 영화 별점을 들여다보면 때로 기분이 참 안좋아집니다. 별점제도에 대한 오해,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가 난무한달까요. 이것에 대한 부분에는 여러 영화를 다루는 매체들의 책임이 있으며, 영화를 다루는 주간지로서 <씨네21>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지금이라도 <씨네21>이 영화별점을 다루는 부분을 없앨 생각은 없는지, 왜 아직도 이러한 오해를 (본의 아니게) 조장하고 있는지 생각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답멘션을 보내왔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 식별할 수 있는 한 방법 중에 하나가 별점이 아닌가 싶어요.. 주신 의견 관련부서에 전달해 드릴께요~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만 우리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끄세요'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내가 트윗에서 이야기한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라는 것은 전문가들, 그러니까 영화비평가들이 매기는 별점이라는 것을 재미에 대한 척도로 여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비평가들이 재미없는 영화만 좋아한다, 재미없는 영화에만 높은 평점을 준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의 영화에 대한 별점은 '재미의 척도'가 아니라 '예술성의 척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즉 비평가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 좋은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그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짧은 문장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담는다. 그것은 비평가들이라는 집단이 균일하지도 않거니와 그렇다면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재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재미''예술'을 구분해야 하는가)라는 기나긴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그저 별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즉 제대로된 비평가라면 '이 영화가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이 영화가 영화라는 예술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며, 그 기준에 따라 점수를 주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리어 이렇게 묻고 싶다. 영화비평가가 일반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그들의 눈과 일반인의 눈이 같아지는 순간, 그들은 소멸될 것, 혹은 소멸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정성일 평론가의 트윗 "인과관계_ 평론가들이 감독을 예술가 대접하며 그들의 영화를 비판하자 죽일듯이 미워하며 왜 그렇게 심각하냐고 욕을 했다. 소원대로 비평이 몰락하자 감독들은 장삿꾼들에게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다. 우리들이 당신들의 방어선이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별점이라는 것, 그리고 20자평(혹은 100자평)이라는 것의 어떤 폭력적인 부분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줄세우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批評)이라는 한자에 견줄 비()자가 들어있는 것처럼 비평이란 결국 견주어서 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왜 예술이고 어떤 것이 왜 예술이 아닌지 보여주는 것은 비평가들의 임무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이 긴 담론과 여러 의미를 고려한 견줌이 아닌, 별의 숫자와 트윗보다도 짧은 글로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의도를 넘어서 때로 폭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짧은 20자평이 때로는 촌철살인의 문구라고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는 '촌철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4.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태도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일요일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론 셰르픽 감독의 <원데이>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이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시간에 대한 태도이다. 이 영화는 1988715일 엠마(앤 해서웨이)와 덱스터(짐 스터게스)의 하루에서 시작하여 그 이후의 20년 동안의 715일을 이어붙이는 영화다. 즉 이 영화는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영화다. 물론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는 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란 순간의 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집적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이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의 매년 동일한 날에는 어떤 극적인 순간들만이 집적된다. 김혜리도 이러한 것을 지적했는데, 김혜리는 "그러나 론 셰르픽은 야심이 없고 <원데이>의 매년 715일에는 우리가 기존 연애서사에서 익히 보아온 사건에 해당하는 일들이 꼬박꼬박 일어나 구태여 택한 형식의 의미를 미궁에 빠뜨린다." -<씨네21> 888-라며 이 점을 꼬집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극적인 사건의 집적들로만 채움으로써 그저 뻔한, 다시 말해서 감수성이 민감한 17세 소녀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연애 스토리를 집약함으로써, 이 영화에 대한 악평에 어떤 내용이 쓰여질 것인지조차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웨인 왕의 <스모크>에서 13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마다 같은 장면을 사진에 담는 사내의 모습과 비견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13년 동안의 그 사진에서 극적인 순간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매년이 아니라, 심지어 매일의 같은 날에서도 극적인 순간은 거의 없으며, 삶이란 그런 비()극적인 순간의 집적이다. 그리고 극적인 순간이 빛나는 것은 그런 비()극적인 순간의 집적 사이에 극적인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시간을 다루는 예술인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순간 속에서 극적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혹은 극적인 순간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묵묵히 필름을 돌린다.

5.

그런 영화의 시간에 대한 익스트림한 한 형태는 2003년 만들어진 왕빙 감독의 디지털 영화 <철서구>이다. 철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폐쇄가 결정된 중국의 도시 센양에 카메라를 한 대 가지고 들어간 왕빙 감독이 3년 반 동안 그곳에 기거하며 만들어낸 9시간 11분짜리의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도시, 사라져 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라는 예술의 대답이다. 보지도 않은 영화에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못할 짓이고,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트위터에 이 왕빙 감독의 인터뷰 몇 구절이 올라왔고, 그것이 상당히 인상깊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철서구>21세기 영화 30편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외로움_ 영화를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속물들이죠. 그들은 돈과 대중의 소란 속에서 외롭죠. 다른 하나는 예술가들이죠. 이들은 자기 혼자서 견디면서 적막하게 외롭죠. 어떤 외로움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왕빙과의 인터뷰"

"안마_ 우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게 아니라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없어요.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안마를 받으러 가면 되요. 그런데 어떤 감독들은 자기가 안마시술사인줄 알고 있어요.. 왕빙과의 인터뷰"

"조건_ 모든 것이 불리할 때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들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다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왕빙과의 인터뷰"

이런 인터뷰를 하는 감독의 영화가 궁금하지 않는가?

6.

그래도 알라딘이니 마지막으로 책 얘기.

이사를 하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몰랐던 오래전의 책 몇 권,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때 둔촌동의 작은 서점들에서 산, 여러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대다수는 세계문학전집들인데, 그 중의 몇 권을 어쩌다보니 조금씩 읽게 되었다. 며칠 전에 조금만 읽자고 시작해서 끝까지 다시 읽은 것은 1992년 출간된 중앙출판사의 'GOLDEN 世界文學選 31'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인데, 다시 읽어보니 어떤 구절은 새롭게 인상적이고, 어떤 구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고, 어떤 구절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조금 별로다. 아무튼 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좋은 소설이다.

새롭게 인상적인 구절의 인용. 톰이라는 가족의 차남이 어떤 폐차장에 차를 고치러 가서 그곳의 외눈을 가진 점원과 나누는 대화인데 그의 성격의 일면이 잘 드러난다.

톰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이것 봐, 친구. 당신은 과연 한 눈이 뻥 뚫렸어. 그리고 때투성이고 몸에선 구린내가 나고. 그런데 당신은 그걸 자청하고 있는 거야. 그게 좋다 이 말이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는 셈이지. 하긴 그렇게 눈구멍이 뻥 뚫려 가지고야 여자가 생길 리 없지. 그러니까 말요, 뭘로 그걸 가려 봐요. 세수도 좀 하고. 그러면 스패너로 사람을 칠 생각은 없어질 거야."

"모르는 소리지. 외눈 신세는 따분한 거요." 그 사나이가 말했다. "성한 사람처럼 보질 못하거든. 얼마나 먼 데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모조리 다 평면으로 보이니까."

톰이 말했다. "그러면 안된다니까. 내가 한때 외다리 갈보를 하나 알게 됐는데, 그게 골목에서 한 판에 25센트쯤 받고 일을 치르는 줄 알아? 천만에. 남보다 20센트 씩 더 받아내던데. 그 말이 이렇거든. ......'외다리 여자를 데리고 몇 번 자봤수? 처음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거든. '당신 오늘은 특제를 만났으니 50센트는 더 내야겠어요.' 이러거든. 아닌게아니라 손님들이 그렇게들 더 주거든. 그리고 모두들 나오면서 그날 재수가 좋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그 계집 말이 자기하고 놀면 누구나 재수가 붙는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내가 살던 고장에......꼽추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 글쎄 자기 잔등을 만지면 재수가 붙는다고 사람들에게 모두 한 번씩 그 잔등을 만져 보게 하는 거야. 그런데 당신은 기껏해야 눈알 하나만 없다뿐이잖아?"

그 사나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남이 슬슬 나한테서 물러서는걸 보면 속이 뒤집힌단 말이야."

"제길, 그럼 뭘로 덮어놓으면 되지. 암소 엉덩이처럼 그걸 드러내 놓고 있으니까 그렇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고 싶은 거지 뭐야. 당신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그래? 말쑥한 흰 바지를 한 벌 사 입어 보란 말야. 그러면 얼근히 취해서 이불 속에서 헉헉거리며 기분을 내게 될걸. 거들어 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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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 쓰는 글

끄적거리기 | 2012. 4. 8. 20:57 | Posted by 맥거핀.

* 며칠 전에 알라딘에 쓴 글, 옮겨둠.

1.

주말에는 주로 밀려있는 <씨네21>과 <한겨레21>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씨네21>을 한 권 다 읽고, 다시 <한겨레21>을 한 권 다 읽고, 다시 <씨네21>을 다 읽고, 다시 <한겨레21>을 다 읽고...주간지라는 것을 그렇게 읽어야할 의무란 없을 테지만, 이상하게 집어들면 처음부터 빼놓지 않고 모든 기사를 꼼꼼이 읽어야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생겨난다. 어렸을 때 매일매일 신문을 장시간 읽었었는데, 그러고보면 예전에 신문을 읽을 때에도 나는 신문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차례차례 모든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중간에 있는 경제면들 기사는 정말 재미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모든 기사를 빠짐없이 읽고나면 이상한 만족감이 생겼고, 뭔가를 많이 알게된 듯한 착각에 휩싸이곤 했다. 뭐 글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주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해도, 그 중 기억에 남는 꼭지는 몇 개 뿐이지만, 나는 나머지 것들도 어딘가 머리 뒤쪽 잘 안보이는 틈에 조금씩은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기억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 뭔가를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게 될 때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처음 빛나게 기억했던 것들은 모두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고, 차곡차곡 쌓인 것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또 온라인 상으로 많이 글들을 읽게 되니 머리가 점점 다르게 재조직되는 것 같다. 도대체 온라인 상에 있는 글들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어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다른 색으로 강조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인지, 사진이 들어간 부분을 먼저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밑에 댓글부터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반짝반짝하는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먼저 읽어버리게 되고, 글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점점 요원해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직도 온라인 상에서의 글들을 조직하는 법에 대해 익숙치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PC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스마트폰이 나오고,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트위터가 있고, 카톡이 있고, 사진으로 말하기(카카오스토리) 같은 것이 있으니 점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질 즈음에 늘 또다른 새로운 것이 나와 그 익숙함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좋은걸까, 나쁜걸까.

2.

지나간 <씨네21>을 읽는 것은 늘 힘들게 만든다. 놓쳐버린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워 호스>에 대한 평에서 이 영화는 반드시 필름으로 보아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진가를 맛볼 기회를 (잠재적으로)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DVD나 컴퓨터 파일로 본들, 도대체 그 '진가'라는 것은 알 수가 없게 되버린 것이다. 물론 사실 조금 이해가 안되기는 한다. 필름으로만 맛볼 수 있는 진가란 게 도대체 뭐지? (뭐 예를 들어 MP3로는 절대 체험할 수 없는 극상의 경험이라든가, 수입산 냉동육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이라는 글들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 필름으로 보면 디지털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무엇인가가 도대체 무엇일까. 예를 들어 필름으로 보면 말갈기의 미세한 털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게 되고, 그 와중에 그 털들의 오묘한 물결무늬들이 뭔가 깨달음을 주는걸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말갈기의 털 같은 건 디지털로 도리어 더 잘 보일텐데. 아무튼 가까이에는 디지털밖에 없고, MP3밖에 없고, 물론 수입산 냉동육밖에 없다. '그 맛'이나 그 '극상의 경험'은 어떤 몇 사람을 거친 후, 그저그런 언어들로 마모되어 도대체 처음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거친 입자로만 나에게 전달된다.

반면 지나간 <한겨레21>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지나간 기사들은 몇 주 후의 전망을 하고 있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는 이미 그 전망이 현실이 되어 도래한 세계에 살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 주 후에 와있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몇 주 전의 <한겨레 21>에서는 불법사찰이 김종익 씨나, 남경필 전의원의 경우 등 몇몇 한정된 범위에서가 아니라 보다 큰 범위로 행해졌을 가능성에 대해 미세한 희망을 걸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불법사찰은 보다 대규모로 저질러져 왔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선거 전망도 그런 측면에서는 재미있고, 선거가 끝난 이후에 이 전망의 기사들을 보는 것도 꽤나 재밌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간에 나는 아직 어느 정당을 지지할지 정하지 못했다. 지역구 의원의 경우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정통민주당 3명의 후보 밖에 없으니 비교적 선택이 쉬운데, 정당의 경우 어느 정당에 한 표를 던질지 고민스럽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녹색당 3당을 놓고 '열린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너무 비슷비슷한 이름의 정당들이 많아 계속 헷갈리고 있다. 순전히 이름만 놓고 비슷한 계열로 묶어보면 민주통합당-정통민주당이 있고, 새누리당-한나라당이 있고, 통합진보당-진보신당이 있고, 국민생각-국민의 힘-국민행복당이 있고, 친박연합-미래연합이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가 펄쩍 뛸 일이지만, 기독자유민주당과 불교연합당도 같은 계열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뭐가뭔지 알 수가 없고, 5호16국 시대를 보는 느낌에 참 애매하고 어지럽다. 이거 뭐 애정남에 질문이라도 올려야 하나.

3.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곧 개봉하게 될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대해 보았더니 매우 흥미가 생긴다. 7년 동안 고이 잠자고 있다가 2012년 지구멸망에 맞춰 지각 개봉하게 된, 마야인이나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영화. 세 개의 스토리가 있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인데, 하나는 역시 어김없이 등장한 좀비 이야기이지만 나머지 두 개는 꽤 흥미롭다. 하나는 인터넷으로 정체모를 사이트에서 당구공을 주문했다가 전 지구를 멸망 위기에 빠뜨리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절의 가이드 로봇이었다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무려!) 설법을 하게 되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란다. 나도 매일 설법을 하시는 공자봇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어찌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있으랴. (예를 들어 트위터의 공자봇이 어느날 공자님 말씀만을 그대로 줄줄이 읊다가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새로운 말씀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어떨까.)

최근에 단기적으로 관람 1순위로 놓고 있는 영화는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마이 백 페이지>인데(츠마부키 사토시와 마츠야마 켄이치를 보는 것도 물론 당연히 중요하다. 그거 무시 못한다. 누가 소녀들의 미남 사랑을 욕하랴), 이 영화도 동등하게 올려놓아야 겠다. 이와 별개로 중기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이고, 장기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영화는 아오야마 신지의 <도쿄 공원>이다. 아오야마 신지의 모든 영화를 최대한 찾아서 봐야겠다..그래야겠다..고 한지가 3년째인데,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4.

주말에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고, 내친 김에 <하나 그리고 둘>을 보려다가 이것마저 보게 되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257분짜리 영화인 이 영화는 늘 25.7분짜리 영화로 느껴지고, 2570분 후유증이 간다. 

5.

<한겨레21>에서 본, 미 앨라모고도 폭격장에서 실시된 인류 역사상 첫 핵폭탄 실험을 참관한 토머스 프랜시스 패럴 미 육군 준장의 당시 상황 보고.

"(핵폭발의) 결과는 전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장엄하고, 아름다웠고, 엄청났으며, 두렵기도 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현상을 전에는 본 적이 없다. ...주변의 모든 봉우리와 크레바스와 산등성이에 불이 밝혀졌다. 직접 목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폭발 직후 엄청난 후폭풍이 실험 참관자들에게 불어닥쳤다. 거의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력한 천둥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심판의 날을 경고하는 듯했다. 우리 나약한 인간들이 신이 독점해온 힘을 탐하는 불경을 저지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탄식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고 말았다."

(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이어지는 기사의 한 대목.

"그해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뇰라 게이를 몰고 티니언섬을 출발한 티베츠 대령은 같은 날 아침 8시 15분께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소년'(리틀보이)이란 암호명으로 불린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탄에는 패럴 준장(주:위의 그 '패럴'이다)이 직접 써 넣은 글귀가 있었단다. '히로히토에게, 사랑을 담아서. T. F. 패럴.'"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6.

키보드가 문자들을 씹어먹어서 더 이상 길게 쓰지 못하겠다. 특히 'ㄴ'자를 자주 잡아먹는 걸로 봐서 이게 맛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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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아이콘들

끄적거리기 | 2011. 10. 25. 19:28 | Posted by 맥거핀.

* 얼마전 알라딘에 썼던 글, 옮겨둠.

1.
지난주 와우북페스티벌에 들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을 들고 왔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주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그다(이 책 <빅토르 세르주 평전>에는 원제에 충실하게 <러시아 혁명의 첫 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그의 삶을 정리한 간략한 글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참 전형적이다. "러시아의 혁명 인민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르주(본명 : 빅토르 키발치치)는 열다섯 살까지 벨기에에서 살았다. 고국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1919년, 스물여덟살 되던 해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독일판 10월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 좌익반대파와 함께했다.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였던 세르주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평생을 핍박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결국 1936년 러시아에서 쫓겨나 파리와 마르세유를 전전하다가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 1947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실패하고 몰락한 자의 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세르주는 어린 시절 딱딱하게 말라붙은 빵을 커피에 적셔 먹는 끼니를 서술했으며, 그의 동생은 쫄쫄 굶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홉 살에 굶어 죽었다), 한 때 꿈을 가지고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 혁명이 그 혁명을 지지해준 자들에게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아무 조직과 힘이 없었던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고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하여 치열한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진정한 혁명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그 와중에 그는 당연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거의 지구의 반대편까지 쫓겨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이야기. 아마도 영화로 만들고자 시나리오로 잘 정리하여 제작자의 책상에 정성껏 올려둔다고 해도, 두어 줄의 간단한 시놉만 보고도 그것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의 이 때에 이런 것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라면, 성공한 혁명가의 책, 아니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낭만적으로 보이는 다른 혁명가의 평전들 -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 - 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몰락한 혁명가의 생애, 아니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라도 몰락한,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이건 무슨 이상 심리일까. 어쩌면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나의 삶에 대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으려는 당연한 심리일까. 

2.
몰락한 것은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삶 뿐만이 아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시간에도 지금 몰락한 자들의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것도 비극물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물론 그것은 김병욱의 새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야기이다. 김병욱은 이번 시트콤의 키워드를 '몰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김병욱의 전작들에서도 몰락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였으며, 몰락한 캐릭터들도 가끔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웃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몰락해 가고 있는 자들이 망가져 가는 틈에서 원래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병욱의 이야기들은 꽤나 자주,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들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러 묘한 웃음들을 끼워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그의 시트콤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이 아닐까. 김병욱의 시트콤들은 이제 웃음은 뚝!, 이라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여러번 선물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끊어버릴 때도 그랬고, 전체 이야기를 종결해 버릴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시트콤에서 상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 하기는 김병욱의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장 자주 되묻던 질문은 "이거 시트콤 맞아?" 였으니까.

(글쎄. 앞의 심리와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그런 서늘한 순간들을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김병욱의 시트콤들을 어떤 시트콤을 대하는 느낌보다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많은 시청자들을 '김병욱 안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바로 전작의 꽤나 비극적인 결말도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괜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결말을 본 후 주위의 하이킥 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결말이야!, 라고 했었지만, 집에 와서는 그 마지막 회를 몇번인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몰락'은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집안의 가장인 안내상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내몰렸으며, 그 덕분에 아들 종석은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리고 딸 수정은 미국 유학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몰락의 이야기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얹혀 사는 계상의 옆집에는 청년 실업의 상태로 선배 언니에게 얹혀 살고 있는 진희가 있으며, 이 집의 집주인인 지원에게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뭔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직 캐릭터의 중심을 잡는 초반임에도 길바닥에서 누워서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툭하면 나타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 바닥 땅굴로 공습경보를 받고 대피하듯이 달려가기도 하고, 조폭들을 피해 쓰레기통에 숨기도 하고, 사기 당하여 학교 공금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간 다른 김병욱표 시트콤들보다 훨씬 더한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몰락은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 캐릭터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일종의 징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내상은 별 것 아닌 일에 집착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는 성격이 도드라지며, 백진희의 경우는 그의 삶의 피곤이 중첩된 몽유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나레이션의 등장이다. 이 나레이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이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마치 인류학적 보고서를 써내려가듯이 차분하게 분석하고 설명한다(물론 이는 미래의 이적이 과거의 어떤 때를 회상하는 식이라는 이 시트콤의 거대한 액자와도 관련이 있다). 즉 이 시트콤은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보이는 어떤 '징후적인 신호'에 관심이 있다. 이 시트콤은 이 몰락한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거대한 분석 보고서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이 몰락한 세기의 징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해 낼 것인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의 몰락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작처럼 결국 몰락의 종말인 죽음에 이르게 될까.

3.
그리고 여기 한국프로야구에도 몰락의 거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팀이 있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위업을 남긴 팀이자, 내 20년 가까이 되는 응원팀인 트윈스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고 하니, 뭔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을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리그는 수십개의 팀 중에 달랑 몇 팀 포스트시즌 진출하는 그런 리그가 아니다. 8개 팀 중에 4팀 포스트시즌 나가서 뚝딱뚝딱 아장아장한 다음 우승팀 가려내는 그런 작은 리그다. 그런 트윈스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뭐랄까, 9년 넘게 반등수 50% 안에 못들고 있는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런 트윈스는 올해는 더욱 기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시즌 초중반까지 2-4위권을 유지했고, 초반 30승도 다른 어떤 팀보다 빨리 올렸음에도 결국 6위(그것도 공동이니 사실상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트윈스 상당수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이번 야구 시즌이 빨리 끝나는 거였다. 망가져가고 있는 팀을 보면서 DTD니, 내려갈 팀이니 하는 비아냥을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도 있었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무엇인가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늘상 스토브리그에 가장 바쁜 것은 트윈스팬들이었고, 가장 설렜던 것도 트윈스 팬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여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했고, 마침 박감독의 사퇴 발표로 팬들은 올것이 왔다고 잔뜩 기대했다. 트윈스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희망적인 꿈을 가득 담은 각종 카더라와 설들이 난무하였고, 팬들은 곧 거의 예정되어 있는 김연아 금메달을 생각하며 마지막 프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발표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 것이.

팬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넘어서, 허탈과 그에 따른 이탈을 예고하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감독이 선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나은 성적을 올리고,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혹은 기대한다고 해도 다른 면에서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트윈스 팬들이라면, 몇년 동안 이어진 트윈스의 부진이 단순히 야구 실력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물론 야구 실력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구실력이란 것이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트윈스나 다른 어느 팀이나 기본 자원은 같다. 좁은 한국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부임해왔던 정치적인 인사들과 아직 프런트 및 코치진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팀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조금씩 보아왔다.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을 이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구단의 생각은 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로 따지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없고 교장의 비위만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교사를 아이들 성적이 엄청 떨어져서 해고했다고 좋아했더니, 교장의 친인척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꼴이다. 옆 명문학교의 정말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들이 몇 명씩 놀고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팬들이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우리 프로야구의 기원에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의 선전용, 혹은 귀막음 도구로 재벌들의 결합으로 시작된 우리의 프로야구. 그 프로야구는 그들이 말한대로 결국 국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은 결국 그것을 가진 기업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팬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현재 전혀 들어갈 틈이 없게 짜여진 이 구조에서, 팬들의 바람이란 결국 헛된 카더라일 뿐이라는 것. 내 소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는가, 아마도 트윈스 구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우승을 열망하지만 구단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뭐 우승...하면은 좋기야 한데, 뭐 안해도 항상 야구장에는 관객들 그득하고, 어차피 적자인 상황에서 야구단이야 일종의 홍보물일 뿐이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 트윈스 홈페이지의 회원게시판은 감독 선임 이후 며칠 째 오류를 핑계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중이다(뭐 어쩌면 엘지의 기술력이 이 수준일지도..).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수막을 들고 야구장에 갔다가 폭도로 몰리거나, 지나친 팬심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뉴스에서 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은 오늘도 여전히 멍하니 야구중계를 튼다. 

4.
자꾸 몰락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몰락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는, 장정일 작가가 <빌린 책/산 책/ 버린 책 2>(이 책 역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사왔다)에 쓴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장정일 작가는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몰각과 자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도가니>와 같은 영화가 몰각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영화 <숨>은 자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몰각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있다. 스크린과 합일하여 충만해지는 상태적인 쾌락이 몰각이라면, 아마도 영화보기는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 <숨>이 <도가니>와 가까운 이야기를 상당히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에서는 결국 장애인 여주인공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꿈이 외부의 선을 표방한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도가니>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도가니>에 대한 여러 글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도가니>의 명확한 선악 구분과 달리,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상당히 모호한 데가 있다. <도가니>가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 영화 <숨>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즉 분노가 일종의 쾌락과도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몰각에 가까울 것이고, 생각과 반성은 일종의 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나는 <도가니> 보다 <숨>이 더 영화적으로 낫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는 영화가 사람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든다면(즉 몰각을 시도한 영화가 그 몰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만큼 충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 <숨>은, <도가니>와 그로 인해 이어져가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를 둘러싼 일련의 진행들을 보면서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들, 조심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 분노가 무엇을 위한,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분노는 나의 쾌락적인 만족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광주인화학교 대책위에서 과도한 관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 학교 폐쇄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정부의 대책들을 보면 조금은 여러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 또 동시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은 더더욱 조금은 조심스럽고 최대한 피해자들을 보호해가면서 사건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도가니>의 열풍 속에서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또 조금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아무튼 이 영화 <숨>은 굳이 <도가니>와 연결짓지 않아도 그 나름의 영화적 성취 속에서 또다른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윤리의 문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영화적 성취나 윤리의 문제는 혹시라도 쓰게 될 다음 포스트에. <도가니>를 본 사람에게 추천, 곧 내려갈 것 같으니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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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취향 테스트

끄적거리기 | 2011. 2. 7. 14:39 | Posted by 맥거핀.

독서 취향 테스트라는 것을 했는데, 아래의 결과가 나왔다. (현실적인 품격, "사바나" 독서 취향?) 칭찬하는 것도 같고, 빈정대는 것도 같은, 오묘한 취향이군.

해보고 싶은 분은 아래의 사이트로.
http://book.idsolut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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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우림 외곽에 위치한 사바나 기후는 독특한 건기가 특징. 수개월간 비 한방울 없이 계속되는 건기 동안 사바나의 생물들은 고통스러운 생존의 분투를 거듭한다. 가뭄과 불에도 죽지 않는 강인한 초지를 기반으로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번성하는 '야생의 천국'인 동시에, 혹독한 적자생존의 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고대 인류의 원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건조한, 절제된, 강인한 생명력. 이는 당신의 책 취향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생물처럼, 치밀한 계획 하에 쓰여진 정교한 책을 선호. 책이란 무릇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이어야 함.

  • 대초원 위의 야생동물 같은:
    사바나의 고양이과 육식 동물처럼 유유자적 고상한 취향. 과격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나름 고상한 선택 기준을 갖고 있음. 아마도 경험이나 교육에 의한 분별력으로 추정됨.

  • 절제된 현실주의:
    멍청한 감상주의, 값싼 온정주의, 상투적 가족주의, 이런 것들로 장사하려는 상업주의를 배격함. 문화적인 보수 성향이 있음. 지나치게 독창적인 책보다는, 절제력과 품격을 갖춘 것을 더 선호함.

당신은 출판시장에서 가장 보기 드문 취향 중 하나입니다. 분명한 취향 기준이 있음에도 워낙 점잖은 탓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취향은 다음과 같은 책들에게 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 시절부터, 인류는 줄곧 잔인한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이런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최초의 묘사 중 하나는 오비디우스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아폴론이 한 음악 경연에서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를 패배시킨 후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실러는 소름 끼치는 것에 대한 이 "자연적 성향"을 아주 잘 정의했다.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처형이 벌어질 때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구경하려고 항상 흥분해서 달려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영화관에서 유혈 낭자한 "스플래터" 영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일 텐데, 그 영화가 허구로서 제시되는 이상 관객들의 양심이 흔들릴 일은 없는 것이다.
- 추의 역사, 움베르트 에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 무진기행,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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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을 대하는 방법

끄적거리기 | 2009. 1. 12. 20:44 | Posted by 맥거핀.

막장의 전성시대다. <아내의 유혹>, <너는 내 운명>과 같은 막장드라마들, 요즘 잘 나가는 MC 김구라, 그리고 MB. 이 셋은 왠지 공통점이 있다. 그 지나온 날들에는 구린내가 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용인해 주었다는 것. 그래서 그 결과 요즘에 엄청나게 잘 나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아마도 묶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막장의 전성시대.

<씨네 21>에서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을 했지만 사람들이 막장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왜? 재밌으니까. 얼키고설킨 인물들의 관계와 그 관계의 중심부를 헤집는 결정적인 대사,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발연기와 결정적인 순간에 딱 잘라먹는 편집의 솜씨까지. (내일 이 시간에 계속...) 그리고 <씨네 21>에서 밝힌대로 시대극, 액션활극, 정치드라마, 기업드라마, 멜로, 로맨틱코미디를 넘나드는 장르의 컨버전스함이 더해져 놓칠 수 없는 '재미'가 된다. 여기에 도덕 따위는 필요가 없다. 어설픈 계몽은 엿이나 먹으라지. 너무 착하거나 도덕적인 주인공들은 재미가 없단 말이야. 뭐 이런 태도.

왠지 시청자가 이러한 막장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김구라나 MB에 대하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요즘 잘나가는 MC 김구라가 예전에 누구에게 무슨 욕을 했던 간에, 요즘의 시청자들은 그가 웃기기 때문에, 재미를 주기 때문에 본다. 욕 좀 하면 어때. 그래도 웃기기는 하잖아. 여기에 방송사는 시청자의 마음 한 구석에 남을 일말의 죄책감조차 덜어주기 위해 예전 그가 가장 욕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문희준과 콤비를 만들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한다. 저것 보라구. 예전에 저렇게 욕을 먹었던 문희준도 용서하고 같이 저렇게 신나게 다니는데,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야. 내가 괜히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구.

이건 MB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런 걸 쓰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에 더럭 겁이 난다. 아마도 나도 잡혀가면 '30대 무직 백수'라고, '사회에 불만을 가진..' 이런 수식어를 달고 나오겠지?) 지난 대선 때, 온갖 비리와 의혹의 중심에 있었던 MB를 사람들은 기꺼이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 음..BBK니 친인척들의 비리니, 소망교회니 어쩌니 해도 말이야...뭐 그러면 어때. 경제를 살린다잖아. 저 백수 청년도 국밥집할머니도 지지한다는데, 그깟 돈 얼마 해먹은 게 요새 세상에 무슨 큰 오점이라도 돼나. 경제를 살린다는데. 얼쑤.

그리고 딱 1년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See the Unseen~.

....................................

이번 주 <씨네 21>, 즉 no.687은 막장드라마들을 특집기사로 다루고 있다.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재 막장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소재의 자극성과 억지스러운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시청률과 결부된다.' 이 말에 전체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일부분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막장드라마가 막장인 이유를 소재의 자극성과 비현실적인 스토리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의 소재를 다뤘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다. 이른바 이 드라마들은 현실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의 문제.

불륜, 치정, 살인, 독설, 계약결혼, 밀고, 배신, 복수..이 모두는 한편으로 '자극적인 소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자극적인 소재들은 이들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재들은 여타의 드라마에, 그리고 많은 영화들의 소재이기도 하다. 막장드라마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써서 그렇다고만 한다면, 훨씬 더 강도높은 불륜과 살인과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다른 영화들은 그보다도 더욱 지독한 '막장'인건가.

문제는 이들 드라마들이 이런 소재들을 활용하는 방식, 즉 이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에 있다. 이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고민과 사유(思惟) 없이 불륜하고 치정하고 살인하고 밀고하고 배신한다. 이는 마치 몇 개의 분기점을 가진 게임과 닮았다. 불륜을 저지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분기점에서 시청자들은 당연히 'yes' 버튼을 누르고, 이로써 게임은 필연적으로 다음 스테이지 '발각'과 '분노', '복수'로 넘어가게 되며, 게임의 캐릭터들은 기계적으로 반복된 패턴을 보여주게 된다. 이로써 문제는 '왜' 터뜨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화끈하게' 터뜨리는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최고조로 높아진 갈등의 벽 앞에서 최종의 분기점의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시청자들은 당연히 'yes'를 클릭하고 게임을 끝낸다. 그래서 바로 전회까지도 사시미칼을 쥐어주면 서로 회라도 뜰듯한 두 주인공이 감동의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지막회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요즘의 '리얼'을 표방하는 많은 예능프로그램들에서 이와 비슷한 변주를 보기도 한다. 그 프로그램들에는 '리얼'을 표방하며 등장인물들의 여러 복잡한 관계도가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10분 단위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급변한다. 10분전만 해도 어색해하던 어떤 인물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간이라도 빼줄 듯 친해지기도 하고, 금방 다시 사이가 소원해지도 한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 이번 주 토요일에 이 두 청춘스타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며 급속하게 친해지는 듯 하지만, 바로 다음 주 토요일에 '파경'을 맞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패턴화된 호감과 패턴화된 파경을.)

............................................

<씨네 21>의 이번 주 기사는 한 마디로 실망스러웠다. 글쎄.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시청자들이 왜 이런 드라마를 보는가'인듯 싶지만, 그 기사의 내용들은 '재미있기 때문에 본다' 그 한마디를 길게 늘인 것에 불과했다. 드라마 제작환경의 측면에서 이러한 드라마의 출현을 분석하는 기사는 나쁘지 않았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명장면 베스트 7, 클리셰 인물들과 대사들 같은 기사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명장면들과 명확한 캐릭터들이 있으니, 이 드라마들을 꼭 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욕하면서 보라는 것인가. 이번 주 기사의 컨셉은 아마도 '빈정대기'인가.

시청자들이 이러한 드라마를 보는 이유를 별로 알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러한 드라마가 왜 나오고 있는 것인지 드라마 제작환경의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측면에서 분석해주는 기사가 더 좋을 뻔 했다. 이러한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곁들이거나, 사회학자나 비평가 혹은 평론가들의 시각을 덧붙여서 말이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앞으로 필요로 하는 드라마는 어떤 것인지, <씨네 21>이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들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빈정대는 것보다는 말이다.

막장들은 그들의 막장 행태에 빈정댈수록 신나서 더 막장질을 한다. 욕먹는 것이 인기있는 것인줄 알고 말이다. (그래서 막장이다.) 그런 막장들에게 막장질을 못하게 하려면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막장질을 용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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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한 생각

끄적거리기 | 2008. 7. 6. 16:01 | Posted by 맥거핀.

어느 것이나 대개가 그렇지만, 논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처음의 논쟁의 주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 논쟁의 부산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촛불집회 정국도 그렇다. 처음에 이것은 광우병 위험이 높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과의 협상이 잘 진행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대체로 다른 쪽으로 논점이 이탈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의 광우병 논란은 이제는 ‘광우병 위험은 어느 정도 있으며, 미국과의 협상도 잘 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재협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촛불집회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신문사들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대한 대처 문제, 다음 아고라로 대표되는 네티즌들의 의견 표출과 그것의 여론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촛불집회에서 발생한 경찰들의 과잉진압과 시민들의 대응에 대한 문제 등 여러 다양한 쪽으로 문제들이 발산되어 나가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나 같은 경우는 점점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일어나면서 논지를 정리하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점점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평소에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스포츠, 음악, 컴퓨터, 친목 동호회들 말이다)에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침묵하거나, 아니면 ‘반 MB와 조중동, 친 촛불집회’라는 암묵적인 기류 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모를까, 후자의 경우라면 요즘에 내가 느끼는 것은 무언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양상이 복잡해질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간의 얘기들은 사라진다. 대부분 극단적인 이야기들이 힘을 얻고, 자극적인 사실일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복잡한 진실보다는 단순한 겉 표면만이 금방 부각되고, 널리 퍼져나간다. 예를 들어 요즘에 이슈가 되는 문제 중에 하나인 이른바 조중동 신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심각한 양상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부각되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조중동 편이라는 지나친 단순화와 흑백논리이다.

나? 글쎄, 나의 경우라면 분명히 이는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중동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반대하는 것과 조중동을 지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확실히 이것은 MBC <뉴스 후>에서 말했듯이 2005년 황우석 박사 사태 때 <PD수첩>에 대한 광고 중단 압력을 넣었던 문제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PD수첩>이 조중동으로 바뀌었을 뿐 사태는 비슷하다. <PD수첩>의 내용이 옳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조중동의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 역시 조중동은 언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그에 더 나아가 쓰레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약 한 달 동안의 조중동의 논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지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조중동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그것을 꾸준히 알리고 그 신문을 더 이상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의 문제를 내세우기 전에 그에 대한 선택의 기회마저 없애는 것은 아주 특수적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에 대한 문제가 있다. 시민들의 폭력적인 행동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경찰이 그런 대응을 한 것인가, 아니면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어떤 폭력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인가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여기에서 불법집회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했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양쪽에서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에 대해 저번 <100분 토론>에 나왔던 김민웅 교수가 지극히 온당한 얘기를 했다. 시민들에게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버스를 끌어낸다거나, 경찰들에게 돌을 던진다거나 하는 행동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행동들은 당연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법의 제재를 받아야 옳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비폭력적인 집회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 역시 당연히 법의 제재가 있어야 한다. 아무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방패로 내려찍고, 시민들에게 돌과 이상한 물건을 던지고, 소화기를 뿌려대고, 심지어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행위는 어떤 진압수칙에도 있지 않고,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그에 마땅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 (혹 진압수칙에 있다고 해도 아무 보호 장구도 갖추지 않은 시위대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자명하다) 시민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시민의 폭력 역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나이브(naive)한,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나이브하고 당연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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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세 가지 오판

끄적거리기 | 2008. 6. 2. 18:11 | Posted by 맥거핀.

조선, 중앙, 동아가 조금씩 그 논조를 바꾸고 있다. 며칠 전까지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을 애써 외면하며, 광우병 괴담이니, 배후의 음모니 하고 떠들어대더니 오늘부터는 유언비어에 휩쓸린 국민들도 잘못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나 대응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 돌아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그간 그들이 꾸준히 보여줬던 일련의 기만술의 연장선이며, 그 내저의 심리에는 여전히 국민들을 얕잡아보고 속이려는 자세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는 어느 정도는 진심(?)도 들어있는 것 같다. 즉 이명박 정부 때문에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나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어떻게 되찾은 정권인데’ 심리.

그들은 어쩌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었더라면...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해서 MB는 박근혜보다 교묘하지 못하다. 앞에서는 이것저것 챙기는 척 하면서 뒤에서 몰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하다. 더구나 MB는 이미지 메이킹 능력이 형편없다. 반면 박근혜는 꽤나 오랫동안 박정희의 교묘한 이미지 메이킹을 배워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 능숙하다. 게다가 MB는 천민 배경의 자수성가형 노복(마름) 유형(박노자 교수님이 노무현에게 지적한 것과 같이)이다. 이런 사람들은 체제에 대해 대단히 충성을 보이지만, 단순하고 일을 크게 벌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꼼꼼함은 떨어진다.

아마도 박근혜가 현재의 대통령이었다면, 혹은 이회창이나 다른 한나라당 인사였다면, 일을 이렇게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방식, 그리고 조중동에서도 즐겨 써먹는 방식을 다시 가동하여, 일단 재협상을 추진해보겠다고 하고 시간을 벌고, 장관 몇 명, 수석 몇 명 경질하고,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미국에게 한두 가지 양보를 이끌어냈다(실제로는 이끌어내지 않았더라도)고 하면서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자만심이 넘치면서도 세심함은 떨어지는 현재 MB의 방식은 무엇인가. 고시 강행, 집회 참여자 연행, 그리고 물대포와 폭력과 소화기. (그리고 그 이후는 무엇이 될까.)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사태를 더욱 확대시킬 뿐 아니라 MB 그 자신에게 독이 될 뿐이다. 그의 오판이 계속되는 한 말이다.

 

첫 번째 오판은, 과연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묶고 있는 유일한 끈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라는 것이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념을 공유하여서도 아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지도부도 없고, 조직화도 안 되어 있다. 아니 도리어 조직화되는 것에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프락치를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물론 상당히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큰 강점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그들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지도부 연행하여 구속시키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MB가 여전히 촛불집회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상, 그가 이길 방법은 없다. 더구나 ‘촛불집회’라는 말이 상징하는 대로 이 집회는 비폭력이 기반이 되어 있다. 비폭력은 종국에는 언제나 폭력을 이긴다.

두 번째 오판은, 인터넷의 위력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간 컴퓨터를 켜지 못해서 업무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사람 아니랄까봐, 2MB로 16년간 부팅을 해오신 ‘컴맹’ 이명박 선생님은 아마도 아직도 인터넷을 유언비어의 집합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가 어떤 시대인가. ‘스타’가 중계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역시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굳이 동영상이 아니더라도,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서 현장의 속보가 속속 들어온다. 즉 한 명의 경찰이 한 사람을 때리면, 예전에는 그 주위에 10사람이 보는 것으로 그쳤다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10만명이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이고, 그 10만명은 100만명에게 그것을 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처럼 경찰이 계속 맞드라이브로 나가는 것은 집회 현장으로 사람을 더 불러 모으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오판은, 이 일련의 사태는 국민에게, 특히 10대와 20대에게 일종의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다. 수구 보수 정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일련의 사태는 정치에 무관심한 10대와 20대들에게 정치라는 것이 먼 곳의 문제가 아님을, 바로 자신의 안전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임을 상기시켰다.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현재의 일들은 조중동이 지금까지 어떻게 사람들을 속여 가며 어떤 짓들을 저질러왔는지, 한나라당이 어떤 집단인지를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좋은 교재가 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여론의 주역이 되는 십 수년 후,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지금의 이 일들이 가져온 효과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MB가 이 오판들을 빨리 멈추게 되기를 바란다. 혹 본인이 할 능력이 없다면, 주위의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에서나마 약삭빠르게 사태 파악을 좀 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밑의 분이 글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으므로. 그리고 블로그에 영화평이나 쓰며 조용히 지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그 시작은 쇠고기 재협상과 경찰책임자 문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http://enterre.egloos.com/418365 촛불집회 그 이후에 대한 ‘테라포밍’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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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삼성에게 배워라

끄적거리기 | 2008. 5. 7. 01:54 | Posted by 맥거핀.

광우병에 관련된 정부 기자회견을 보다보니 문득 거기 앉아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농수산부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을 비롯한 몇몇 공무원들이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먼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은 ‘왜 우리끼리 이러나’하는 점이다. 지금 횡성한우에서 광우병이 발견된 것이 아니다. 혹은 제주도에서 쇠고기를 수입(?)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미국소이고, 미국소를 수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공무원들이 저기에 줄줄이 앉아서 “미국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미국소가 실제로 안전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 자리에는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이 앉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라고 말하고, 여러 우리나라 기자들이 이에 반박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을 받아 드시는 우리나라 공무원이 저 자리에 앉아서 미국소의 안전함을 항변하는 모양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도대체 저 모양새를 보고, 정작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은 뭐라고 할까? 우리나라 소의 안전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무한홍보(?)해주시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아니면 비웃고 있을까?

하기는 우리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들이 비록 ‘한 자리’씩 해먹고 있으나, 결국은 그들도 공무원이고, 거대한 조직사회의 일부분인 것을. 한 때 공무원 사회를 가까이에서(?) 봐온 나이기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잘 안다. 그들이라고 이 미스터리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었겠는가. 손에 든 자료는 부실하고, 기자들은 오늘도 어디선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서 들고 왔을 것이고, 오늘 내가 내뱉은 말들은 인터넷에 토씨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옮겨져, 그 밑에는 어김없이 악플들이 달릴 것이고....다른 사람이 누군가 이 자리를 대신해 줬으면, 차라리 어딘가 도망쳐 버렸으면...그러나 안하면 장관님한테 깨질 것이고, 장관은 대통령한테 깨질 것이고...어떡하지...어쩌면 좋단 말이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6180013

나도 위의 강양구 기자처럼 말하고 싶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그랬으리라고 믿고 싶다. 적어도 이번 협상이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MB도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도장을 꾹 찍어줬다고 믿고 싶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아무런 압박이 없이 MB가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이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사실 이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정부가 취할 태도는 하나다. 위 기자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이 협상이 진행되었음을 시인하고,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으니, 국민들 스스로 조심하시는 수밖에 없다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최대한 관리하겠다고. 그리고 너무 죄송하다고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협상의 실무자들, 관련 장관들, 관련 수석들은 물론이고, MB의 거취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나 MB,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안전하다-아니다의 상황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은 이쪽에도 위험하지만, 저쪽에도 위험하다.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로 계속 싸우는 것은 사태를 점점 커지게 만들뿐이다.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한다면(혹 스스로 나서서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냥 몇몇 수석들, 몇몇 장관들 인력시장에 보내는 선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저번 박미석 수석 때도 그러더니 MB는 아랫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다. 왜 그리 모두 한꺼번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안달인가. 이 점에서 MB는 ‘삼성’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도마뱀 꼬리자르기 전략. 도마뱀이라고 제 꼬리를 자르고 싶겠는가. 다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회장 살리려고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사장 등이 발 벗고 나서고, 결국은 아들 살리려고 회장까지 나서지 않는가. MB가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차마 말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들은 다 뭘 하는가. 그리고 조선, 중앙, 동아 등 MB의 충실한 벗들은 모두 뭘 하는가. 그래도 밑의 이 늙은이는 비록 노망 섞인 말이긴 하나, 이리 충심을 보이는데.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10530&sc=naver&kind=menu_code&keys=1



그리고 우리가 도마뱀을 잡기 위해선?
그 머리를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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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끄적거리기 | 2008. 5. 4. 01:15 | Posted by 맥거핀.

시끄러운 세상이다. 말들은 넘쳐나고, 주장은 상반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인터넷 세상을 떠돈다. 같은 사실을 놓고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광우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글쎄, 본질적으로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책의 문제거나,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라든가, 대통령 측근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거나, 의료보험 민영화를 한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이는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 즉 결정에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회색분자들은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TV를 틀면 우리가 수입하는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의 위험성이 높으며, 한국인들은 특별히 그런 광우병에 잘 걸리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시 신문을 펴면, 그것은 잘못 알려진 정보이며,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며,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식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한우라고 그렇게 안전하지도 않으며, 광우병의 위험은 어떤 소에나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반된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는 아직 상당히 미스터리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암의 메커니즘을 아직 완벽히 밝혀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떻게 광우병에 걸리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불확실한 확률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확률은 적어도 0%는 아니라는 것. 0.00000......1%가 될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떤 확률은 있다는 것.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이것을 놓고 싸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가능성을 놓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미궁 속에 놓여 있는 한, 그리고 현재처럼 광우병의 위험성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있는 한, 이 싸움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싸움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 우리 모두가 광우병 전문가가 아닌 상황에서 이러한 것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싸움이 자칫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까 경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황우석 박사의 복제논란을 둘러싼 황빠와 황까들의 싸움, 그 대리전의 재판(再版)처럼 보인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일종의 과학적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황빠와 황까들은 꽉 막힌 과학적 캡슐을 둘러싸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왠지 지금은 그의 재방송 같지 않은가?

 

나는 그보다는 현 정부가 훨씬 더 공격을 받아야 할 사항은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하여 국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고 진행되어야 할 이 일련의 일들을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렸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는 정확히 말하면 기습이 아니다. 총선 전에 이미 시나리오가 적혀 있던 일들을 그대로 시행한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현 정부는 미국 비자 면제 등의 몇 가지 사탕만 던져주면 국민들이 그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쇠고기를 싸게 먹게 해준다니까 국민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너무 단선적인 사고였다. 복잡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MB를 1위로 만들어 준 것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잘 살게 될 것’의 기본은 ‘산다’는 것이다. 일단 살고 난 다음에야, 잘 살고 못 살고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광우병의 위험이 있다고 알려진 순간 어느 누구도 광우병의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먹고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는 현 정부가 발목을 잡히고 있는(아직 잡힐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현재의 지점이 흥미롭게 보여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대운하도 아니고 의료보험 민영화도 아니고, 장관이나 수석들의 비리도 아니고, 미국과의 협상 때문이라니. 그것도 한우 농가들이 무너져서도 아니고, 식량주권을 내주어서도 아니고, 광우병 때문이라니. 현재의 사람들이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얼마나 가치비중을 두고 있는지, 이 사회가 얼마나 물질 기반으로 돌아서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광우병으로 뇌에 구멍이 뚫리는 사진에 분노하는 것과 지난 총선에서 강북에 ‘뉴타운’ 공약이 먹혀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연장선상에 와 있다. 이를 현 정부는 정말 간과했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어차피 바보들이니까. 또 적당히 구슬러 주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하기는 그들이 국민을 상병신으로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상병신’으로 불릴 만큼 이미 바보짓을 저질렀으니까. 각종 비리에 얼룩져 있던, 그리고 단견적인 공약들을 남발했던 MB를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줬고, 그들의 연이은 코믹스러운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행동들을, 마치 어린아이에게 볼펜을 집어주고 벽에 낙서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다시 총선에서 그들을 밀어주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현재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는 없다. 동일한 내용을 6개월 전과 지금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 같은 팩트를 전혀 다르게 전달하는 능력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한가 아닌가,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가 아닌가는 미스터리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이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느낀다면, (정부에서 흔히 하는 말대로 ‘오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공포는 누가 만들어내었는가. 바로 정부, 조선, 중앙, 동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몇 개월 전만해도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 먹으면 안된다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지금 정부의 누군가가 그러더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의 위험성을 논하는 것은 다리가 무너질까봐 건너지 않는 것과 같다고.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백주대낮에 다리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해봤다. 왜 안 무섭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이 촛불집회를 비롯한 국민들의 분노는 너무 늦거나 혹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고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은 이것이 대선도 총선도 다 끝난 시점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고,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는 것은 대운하, 삼성 문제, 여러 측근들의 비리,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의료보험 민영화 문제, 여러 자립형 사립고를 비롯한 교육정책들 그리고 FTA 등 건드릴 것은 많은데, 이러한 분노가 잠깐의 분노로 그치지 않을 것인지, 작은 모닥불로 끝나지 않을지, 그래서 도리어 현 정부의 기를 살려주는 꼴을 낳지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늦었다거나, 빠르다거나 하는 말을 이미 시작된 일에 첨언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촛불집회 같은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불확실한, 또 하나의 캡슐을 둘러싸는 싸움이 될지 모르는 위험성을 안고 촉발된 일이지만, 지금은 대안이 없다. 소는 집을 나갔지만, 외양간은 언젠가는 고쳐야 한다. 다른 소를 키우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논어(論語)’를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어 여기에 첨언하고자 한다.

자하가 거보(莒父)의 읍재(邑宰)가 되어, 정치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속효(速效)를 보려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마라. 속효를 보려들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큰 일을 이룩하지 못한다.”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速效, 無見小利. 速效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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