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일본 뉴웨이브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

Interlude | 2009.10.06 01:38 | Posted by 맥거핀.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 (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 / To Sleep so as to Dream)
1986 / 하야시 가이조


독특한 느낌의 영화이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제목처럼, 영화도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86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일종의 무성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부의 대사들은 음성으로 전달되지만, 그 예전의 무성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내용을 화면과 자막과 음악으로만 전달하고 있다.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는데, 이 영화의 독특한 내용에 이러한 형식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3개의 층으로 전달된다. 먼저 첫번째 층은 주인공 우오츠카 탐정이 조수와 함께 납치된 소녀를 찾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조금씩 답에 근접하는 일반적인 추리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중간에 슬랩스틱적인 코미디와 액션들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흥미로운 전개로 이어진다. 또한 중간에 등장하는 의문의 3인조(오래된 필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시 여기에 독특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 층은 영화 속 영화로 진행되는, 주인공 탐정과 조수가 나중에 보게되는 이야기이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적들과 맞서는 주인공 흑두건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또 하나의 (무성)영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흑두건의 이야기를 종이 그림극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다층적인 이야기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영화 속의 영화가 그대로 스크린을 부수고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와 통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영화 속 영화가 본 영화 그 자체와 이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본 영화 자체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우리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중첩적인 연결로만 가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모자란 측면이 있다. 여기에 한편으로 영화 속 회전목마나 회전하는 물체와 같은 독특한 씬들, 그리고 이 영화의 형식이 한 몫을 한다. 즉 영화 속 분리된 상태에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들(회전하는 물체들)과 그 물체들에 접근하는 카메라는 중첩되고 있는 이야기를 별 무리가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몽롱한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즉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라는 말은 꿈꾸는 것처럼(즉, 그 꿈이 완성된 상태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던 마지막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꿈꾸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관객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友よ,靜かに瞑れ / Tomo yo shizukani nemure)
1985 / 최양일


이 영화는 왠지 다른 어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는 이 영화의 어떤 부분부분이 다른 영화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장면들은 모두 이 영화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속 장면이므로, 도리어 다른 영화들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에 있었던 말처럼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튼 몇몇 장면들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에 피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떠올리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명히 이 영화를 보고 이 장면을 흉내냈을거야 하는 의심마저 든다.

아무튼 이 마지막 장면은 앞의 장면들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상한 삼각형 구도. 나쁜 놈들(경찰)과 조금 더 나쁜 놈들(건설회사 측)과 주인공 신도와 그의 곁에 있는 친구의 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거리에서의 기묘한 삼각형. 여기에 경찰이 그간 붙잡고 있던 주인공의 친구 사카구치를 풀어주면서 이 삼각구도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격씬과 떨어지는 레몬과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주인공 신도와 다시 급커브를 그리며 그 곳을 떠나는 신도와 레몬을 깨물어먹는 아이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 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즉 시스템의 붕괴는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시적인 균열만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언젠가는 저 아이도 세상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그러나 한편으로 그 승리가 가능한가(혹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장면 외에도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주변의 풍경들이 인상적이다. 외딴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을 모두 외면하는 이상하게 적막해 보이는 마을 풍경과 그에 대비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간을 균열시키는 하나의 점으로 주인공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말없는 이 캐릭터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이고, 이를 보고 있는 관객들마저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어떤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가장 무서운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적막한 마을의 풍경과 대비되는 주인공이 머무는 호텔의 자유롭고 시끌벅적한(그리고 한편으로 따뜻해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주인공의 캐릭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적들의 모습이나 추격씬, 그리고 나중에 적의 중간 보스와 벌이는 결투 등, 수많은 클리셰들이 도사리고 있고, 한편으로 그 클리셰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장르적 굳건함이 유지되는 흥미로운 영화.



- 2009년 9월, 서울아트시네마.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이사벨 코이셋

Ending Credit | 2009.07.09 22:46 | Posted by 맥거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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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 2009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스페인 영화제)

 

<미드나잇 카우보이>, 존 슐레진저

Ending Credit | 2009.02.25 01:16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영화가 끝나고 살짝 눈물이 났다. 글쎄. 왜 눈물이 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미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화 내내, 나는 살짝 웃음띤 얼굴로 영화를 지켜봤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리코(더스틴 호프만)가 죽어서?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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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슐레진저 감독의 1969년 작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은 누구나 기억하듯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였고, 베트남 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는 해였다. 그와 반대로 미국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시대이기도 했고, 전세계적으로 좌파들의 기치가 드높았던 1968년의 이듬해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선개헌이 국회를 통과한 원시적인 해이기도 했고, 얼마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추기경으로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9년은 '69'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히피(hippie)들의 해, 비틀즈와 도어스의 해이기도 했으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3일간 열렸던 해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이라고 해야하나...이 영화에서도 1969년의 이면에 있었던 끈적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조 벅(존 보이트)과 리코가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되는 파티 현장. 그 파티는 끈적하고 불온한 공기를 담고 있다.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약을 한다.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가 없다. 몽롱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남자는 답한다.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른다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이곳은 조 벅과 리코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공간이다. 단지 리코는 먹고 마시는 것에, 그리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에 열중할 뿐이고, 조 벅은 약에 취해 웃을 뿐이다.

그들은 여기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와 그의 친구. 이들은 그저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랬다. 1969년의 세상에서 이들은 그저 사회에서 밀려난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폴로 11호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대변하는 말끔하고 잘 짜여진 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음악과 춤과 마약의 끈적거리는 히피들의 세계. 그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텍사스에서 온 카우보이 복장을 한 어리숙한 청년과 간단한 사기와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2세대 이민자 청년[각주:1]일 뿐이다.

이 어리숙한 카우보이 청년 조 벅은 뉴욕에서는 돈많은 부인들이 같이 자주면 돈을 준다는 말에 뉴욕에 왔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여자랑 자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주다니. 이 왠 꿩먹고 알먹고인가. 아마도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어딘가에 나사가 하나 빠진 청년이다. 글쎄 그의 나사는 왜 도망갔을까. 조 벅은 종종 환상에 빠진다. 이 환상에서 그는 과거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 과거의 세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안긴 것 같다. 군복을 입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집 앞에 앉아있는 장면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전쟁에서의 귀환병일지 모르며, 베트남 전에서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의 환상에 종종 등장하는 여자친구와의 어떤 관계가 이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나사가 하나 빠졌기는 하지만, 착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착함은 '천사같은' 착함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날 것의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착한 청년 조 벅과 그의 친구 리코가 벌이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꽉 짜여진 두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러나 이 생존기는 결코 무겁고 우울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희극적이다. 묘하게 희극적이다. 예를 들어 조 벅의 환상이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면, 리코의 환상은 그를 미래로 데려간다. 그는 지금 조 벅의 매니저가 되어 조 벅이 멋진 부인을 꼬셔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미래의 자신과 조 벅의 모습을 상상한다. 해변가에서 수많은 수영복을 입은 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조 벅과 자신. 그러나 이 길지 않은 꿈은 조 벅이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같이 깨진다. 우스운 환상과 그것의 깨어짐. 이를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희극[각주:2], 또는 희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비극[각주:3].

조 벅과 리코는 추운 뉴욕을 떠나 넓은 해변과 뜨거운 태양이 있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아픈 리코가 마이애미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조 벅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삶이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대로는 그들 앞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따라서 마이애미로 가는 도중 조 벅이 카우보이 복장을 집어던지고,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것은 과거와의 결별, 꿈을 좇고 환상을 좇는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관객은 다시 숨을 삼킨다. 마이애미가 눈 앞에 있는데, 리코는 트로피카나 셔츠를 입고 버스 차창에 고개를 떨구기 때문이다. 친구의 고개를 받치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 벅.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죽은 리코의 모습과 망연한 표정의 조 벅과 오버랩되는 차창밖 마이애미의 풍경. 이 마지막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 벅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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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와 히피들과 마약의 세계에서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었던 두 청년 조 벅과 리코. 왠지 이 이야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되는 것 같다. 머나먼 이 곳 한국에서 말이다. 물론 이는 귀부인과 히피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실용적이다. 이른바 억대연봉과 만원짜리 커피의 세계와 용산철거민과 삼천원짜리 싸구려국밥의 세계. 그 세계는 점점 그 간극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는 '88만원 세대'의 수많은 조 벅과 리코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아니 어디로 갈 수 있을까.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1. 리코의 풀네임은 엔리코 살바토레 리조. 이 이탈리아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 볼 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구두를 닦다가 돌아가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2세대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독일영화 <나킹 온 헤븐스 도어> 또는 <주유소 습격사건> [본문으로]
  3. 이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주인공들이 바보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그들을 계속 안좋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두 가지의 혼합된 감정, 즉 우스꽝스러움 및 안타까움과 맥이 닿아 있다. 이른바 <낮술>의 세계 [본문으로]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니콜라스 레이

Ending Credit | 2009.02.15 22: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려니 마음이 설렌다. 허리우드 극장에 들어가는 초록색 엘리베이터. 물론 지금은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 또는 허리우드 클래식. 지금은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이지만, 예전부터 허리우드는 상당히 고전스러웠다. 일단 이름부터가 '헐리우드'도 아닌 '허리우드'. 그리고 극장을 둘러싼 거리들의 오래되고 낡은 풍경. 세련되지 못한 빛바랜 거리.

생각해 보면, 종로에 나와 극장을 갈 때면, 서울극장이나 단성사보다는 허리우드나 씨네코아를 가곤 했다. 이제는 허리우드도 씨네코아도 없지만, 종로에 있는 극장을 간 기억을 떠올리면, 그 두 극장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 조금 더 좋아했던 극장은 허리우드였던 것 같다. 허리우드는 앞에서도 말했듯, 관 이름도 '레드'니 '그린'이니 하는 약간은 촌스러운 극장이었고, 거기를 가기 위해서는 약간은 역한 돼지 삶는 냄새가 풍기던 더러운 골목을 지나가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극장 앞 툭 트인 옥상이었다. 지금은 끊어서 그럴 수 없지만, 그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우는 담배 맛은 꽤나 좋았다. 그저 지금은 하릴 없이 휴대폰을 꺼내 아래의 풍경을 찰칵 찍으며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릴 분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기서 교생 때 가르쳤던 학생들을 만난 기억도 있다. 아마 지금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을 그 학생들도 그 때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오며 불안해하던 소심한 학생들이었을 뿐이다.

날씨는 흐려서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 회색빛의 풍경이 남아 있는 기억과 비슷해서 그런지, 어쩐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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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선택한 건 단지 시간이 맞아서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시네마스코프 영화미학을 최고조에 올려놓았던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대표작'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시네마스코프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와이드스크린 방식에 의한 대형영화' 와이드스크린이라..그러고보니 이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실물보다 훨씬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하는 와이드스크린, 그리고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는 주인공 에드(제임스 메이슨)의 심리상태.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과대망상.

에드를 이렇게 만든 것은 코티존이라는 약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을 끊을 수 없다. 그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가 가진 병으로 인해 1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점점 약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약의 복용-과대망상 작용의 증가-과대망상 작용으로 약을 더욱 복용-그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과대망상의 악순환. 그는 이 악순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그러나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런 과대망상에 빠지는지, 이 약을 어느정도나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 정말 그가 정신병이 생긴 것은 이 약 때문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 낫고 있는 것인지. 의사는 고작 약의 복용량을 조절해보자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이 악순환에 빠져 들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악순환 고리의 크기가 문제일 뿐.

한편으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가 과대망상에 빠진 후 가지게 되는 교육관에 흥미가 생긴다. 잘 못하는 학생들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던 인자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후 아이들을 나약하고 악한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이는 한편으로 중세적 아동관을 닮았다. 기독교적 원죄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고 본 중세에는 강한 체벌과 훈육을 중요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사탄이나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성서의 아브라함의 일화를 인용하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다.

이 영화에는 이 장면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욕실에서 깨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의 여러 갈래로 분열된 거울상. 이는 한편으로는 분열되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속과 앞으로의 그의 삶이 갈래갈래 조각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 하다. 또 아들에게 수학 문제를 내며 의자 뒤에서 손을 짚고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가. 앞에 놓여진 전등으로 인해 그의 그림자는 벽 면에 커다랗게 비친다. 이는 왠지 사탄이나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그토록 아들에게서 멀리 떼놓으려고 했던 사탄은 그의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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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생생한 질문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정신병이란, 혹은 과대망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정신병, 과대망상으로 보아야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미국정신의학회가 발행하는 DSM(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매뉴얼)이 개정될 때마다 정신장애의 개념은 한 없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급기야는 '일상적인 행동의 질병화'라는 수준까지 왔는데, 예를 들어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은 "우울성 장애"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망상성 인격장애"이며, '근심하는 것'은 "전반성 불안장애"라는 식이다(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에서). 이 영화에서도 에드가 코티존을 복용하던 초반, 갑자기 활달해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아주 비싼 옷가게에 데려가 옷을 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는 조금 불안해하지만, 또 행복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그의 과대망상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쩌면 이런 약간의 과대망상은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고, 미래에의 희망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조금 불안해하고, 반대로 그 조금의 불안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은 현대인들의 특질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조금의 과대망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욱 큰 과대망상의 시작인가, 아닌가. 그것은 앞으로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p.s. 할리우드 여배우는 옛날 여배우들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에드의 아내로 나오는 바바라 러쉬(Barbara Rush). 출처는 (nnd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