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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어 베러 월드, 수잔 비에르

Ending Credit | 2011. 6. 29. 01:1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그 성찰의 질문은 이 제목이 담고 있는대로 "과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질문이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게 보복(복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이다. 인간은 결국 본성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의 한 가지에는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어떤 공격이나 위해를 당하고, 그것에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당한대로 되갚아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것은 오랜기간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고래(古來)의 법전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곧 그러한 사적 복수에 의해 발생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방식의 제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른바 공권력에 의한 제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권력에 의한 제재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며, 그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혹은, 현재의 공권력에도 여전히 보복(복수)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공권력에 의해서 거대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이 바로 그러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안톤(엘리아스의 아버지)이 봉사활동을 벌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은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혹은 공권력이 해체되어,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이 작은 사투를 벌이는 학교는 공권력이 있지만, 그 공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또한 안톤이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공권력이 개입할 틈이 없는, 혹은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독이 인간사에서 그러한 공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권력으로의 해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영화로 행하는 '정의론' 혹은 '도덕교과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힘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드러나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문명 체계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는 것은 힘의 법칙이며, 그것은 학교짱이 오로지 힘의 법칙으로 군림하는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엮음은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른들의 싸움이건, 종족간의 싸움이건, 국가간의 싸움이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롱말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크리스티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른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보복에 기초한 공격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영화가 나아가는 것은 공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다른 방향의 모색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공권력은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악수를 시키는 교장의 태도(전혀 효과도 없는)와 같은 것이며, 안톤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안톤이 말했듯이 안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한 라스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그 폭력에 의한 방법 외에는 작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 폭력의 힘으로만 겨우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폭력의 힘이라는 가치가 사라지자, 곧 부하들에게도 버려진다. 즉 이 폭력이라는 것으로 유지되는 지배력은 아주 위태로운 것이며(학교에서 '학교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은 단한번의 '맞짱'의 패배로도 바로 승리자에게 모두 넘겨진다), 일정 정도의 자장을 벗어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시의 다음은 그런 폭력의 순환, 보복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는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가. 내가 보복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러한 폭력이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큐식의 '정신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의 몇몇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대장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이제 사라질 것인가. 다시 누군가는 그러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안톤의 경우 라스 앞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보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라스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는지. 또 만약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속임수가 아닐는지. 예를 들어 자동차 정비공인 라스와 의사라는 안톤의 지위가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판단하는 관객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 영화는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가. "공권력도 없고, 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용서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힘의 어느 정도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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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찰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뷰의 서두에 말했듯이 복수는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사회 역시 상당 부분, 복수의 원칙, 보복의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복수>이다.) 인류사의 상당수의 전쟁이 결국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만 보아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강한 복수심의 유령들이 곳곳을 떠돌고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노들을 때로는 그 당사자에게, 혹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것을 겨우 잠재운다. 최근 화제가 된, 소위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그에 으레 따라붙는 신상털기와 여러 맹렬한 비난들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떤 교육의 문제, 혹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 풍토, 혹은 정책의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어떠한 부분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겨우 그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잠재울 줄 아는 안톤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 가정을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은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이다. 타인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이건, 혹은 다른 욕구이건.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즉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한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시점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지구적인 문제에까지 폭력과 분노와 보복은 왜 그렇게 만연했는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명 사회를 건설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문명 사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문명 이전 처럼 보이는 사회(아프리카)와 문명 이후의 사회(덴마크)가 사실은 거의 같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다른 방식의 해결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성찰 말이다.

영화 중간에도 그렇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인간이 없는, 너른 자연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은 이다지도 평화로운데, 인간은 왜 그렇게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가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결국 100년도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는 점. (안톤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겨우 장막 하나로 가리워져 있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보다는 그 넓은 대지가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분노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해봐요.



- 2011년 6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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