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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거리 | 2011. 10. 25. 19:34 | Posted by 맥거핀.




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 2011년 10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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