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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CINDI

Interlude | 2011. 8. 23. 17:0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한 편, 한 편 계속 보면서, 결국 영화만의 그 어떤 결정적인 특성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만의 그 결정적인 특성' 중의 하나는 카메라다. 영화는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결국 카메라로 '촬영'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그 카메라를 든 자의 주관적인 시선 혹은 입장, 권력이 개입되며,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르게 전달된다. 하나의 경우로, 남녀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담는다고 했을 때, 같은 대화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는 매우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남녀를 각각 오른쪽 왼쪽에 배치하고 하나의 프레임안에 담으면 어떤 친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면, 남녀 각각을 따로 잡아 번갈아 배치하며 잡으면 이전 보다는 친밀성이 떨어지며 각각의 입장이 도드라질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남 녀를 동시에 잡되, 그들을 카메라를 등지게 한다면... 그 때는 어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다. 더욱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닥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발만을 잡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남녀를 동시에 잡되, 사운드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대사야 자막으로 처리하면 된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사운드를 매우 증폭시킬 수도 있다. 배경소리가 증폭되고, 남녀의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될 때의 묘한 분위기는 어떨까. 아니면, 남녀 중에 한 명만 흐릿하게 처리한다면....선택의 수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그 때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어제 본 두 편의 영화 모두 카메라의 활용이 흥미롭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각각의 독특한 촬영 방법들은 영화를 종종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즉 카메라는 이야기보다 우위에 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각도로 전달되었으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분명히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환호성 (Hurrahh!) - 정재훈 감독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이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의 활용이 독특하다. 사실, 이야기로만 봤을 때는 이 영화는 거의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이야기는 그저 이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집에서 누워있다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잔다. 이야기는 이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다양한 카메라, 사운드의 활용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일할 때는 주위의 소음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크게 증폭되어 있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에 산의 풀숲들을 찍은 화면들이 지속적으로 삽입되는데, 이 때는 웅하는 바람소리 비슷한 것들이 스며들어가 있고, 이상한 소리들이 끼어든다. 이 풀숲 장면들만 놓고 보았을 때 영화는 거의 어떤 공포물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마치 촬영을 잘못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는 이상한 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화면은 때로 핀트를 잘못 잡은 듯이 나가버리고, 때로는 일부분이 거의 깨져버리기도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을 찍었는데, 마치 이 인물이 유체이탈을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일부의 조명으로만 인물을 잡아, 인물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이러한 효과들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이것은 별 의미없는 실험같은 것의 총체가 아닐까, 아니면 만든 이의 여러 실수가 너무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그저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장난같은 것일까, 또는 어느 영화과 학생의 쓸데없이 과잉된 자의식의 치기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감독의 전작 <호수길>을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어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이 영화는 <호수길>의 연장선에 와 있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호수길>에서도 마치 실험과도 같아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 영화 전체에 의도적으로 주의깊게 삽입된 것이었다. 여러 효과들로 인하여, 그저 평범한 산길과 마을의 모습을 담은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마을 한 가운데에서 마을을 때려 부수던 포크레인이 '드디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쌓은 그 효과들로 인하여.

그러므로 이 이야기도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몇몇 효과들은 그 장면을 거의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증폭.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배경음은 늘 크게 들린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그 상황에서는 어쩌면 그 소리들은 그렇게 크고 무시무시하게 들릴 것이다. 남자의 배가 비춰지며, 이상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떨까. 배고픈 자에게 자신의 꼬르륵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자신의 꼬르륵 소리 뿐이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면의 필사적인 외침이기도 하다. 반면, 밤의 외부 화면을 찍은 화면이 일종의 공포물이 되어 있는 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외부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화면 속의 그에게도 공포이다. 그가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결국 돈을 벌지 못하고,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니까. 이 겨울에 바깥은 공포이다(겨울산의 배경). 그러므로 그 바깥에서 그는 때로 유체이탈이 되고, 화면의 깨진 픽셀은 유령처럼 서 있다. 그 유령은 깨진 화면 속에서 '으스스하게' 존재하고 있다. 돈 없고, 배고픈 자여 이리로 오려므나.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낮에 집에 누워 자신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밤에는 유령처럼 일어나 때로 티비를 본다. 때로는 밖을 어슬렁거리고 뒷산에 올라가 산길을 하염없이 느리게 바라본다 (뚝뚝 끊어지던 느린 풀숲 트래킹). 그는 살아 있지만, 때로 죽어있다. 그를 가끔 반겨주는 소리는 오로지 '밥이 다 되었습니다'라는 밥통의 소리 뿐이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고, 쌀이 떨어지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나선다. 그러나 남자의 지루한 사투도 거기까지. 어느날 밤, 남자는 밤의 산 속에서 무엇인가를 '저질렀다' 혹은 '시도했다'. 그리고 원경으로 잡은 산 속의 불빛 속에서 명멸하던 생명은 결국 꺼져버렸다. 남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남은 집은 거의 페허가 되었다. 집은 철거되었고, 그 곳에는 오래된 음식들만이 남아 있다는 그런 이야기. 다시 <호수길>의 리와인드.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제목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영화의 시작부분에 관객의 귀를 찢었던 그 환호성은 사실은 거의 비명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공포에 질린 자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물론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오독.

시종일관 절망도 희망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 것도 보여지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지금의 시대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일까.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도, 그렇다고 그 절망의 끝에서 분노하는 것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은 지금의 풍경들. 그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으스스한 공포뿐이다. 또는 남아 있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느껴지던 이상한 구멍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 있다. 기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정신을 멍하게 만들어,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몇 개의 뉴스를 들여다보니, 한 여당 고위 공직자의 친인척이 783명의 구조조정 속에서 단 한개의 정규직을 쟁취한 놀라운 인간승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한 개의 '환호성' 속에 783개의 사라져 버린 다른 <환호성>의 이야기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하다.

플라잉 피쉬 (Flying Fish) - 산지와 푸시파쿠마라 감독


이 영화의 카메라는 줄곧 등장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때로는 카메라는 몇 걸음 더 물러서서 이들을 몰래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카메라가 때로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썩어가는 생선들과 가득 붙은 날벌레들, 동물의 사체에 달라붙은 벌레들, 거의 나무 등걸처럼 되어버린 다리와 거기를 기어올라가는 벌레들, 누군가가 뱉어버린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는 카메라. 썩어가고 있는 것들, 역겹고, 더러운 것들을 때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잡는다. 어쩌면 신체의 일부를 가까이에서 잡는 것도 비슷한 것일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은 썩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안에서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지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영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 파국을 조용히 바라본다.

카메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몇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쩌면, 그것은 관객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충격의 삼연타를 맞았을 때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물러서 있었음에도 우리는 어질어질하니까. 또 한 가지는, 그럼으로써 감독은, 우리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외면을 둘러싼 것들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등장인물들이 왜 결국 이러한 일들까지 저지르는가. 혹은, 이렇게 되도록 이들을 몰고간 것들, 이러한 극한까지 이들을 몰아붙인 것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사실, 이 영화는 영화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조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반군들을 둘러싼 정황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모든 전쟁은 사실 그 나름의 이유를 안고 시작되지만, 그 속에서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이유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던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 속 군인(타밀 반군)들은, 타밀 족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 속에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국가가 결국 보호해야 할 타밀인들이 상당수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그 세 사람을 태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전하는 사람도 없이 이 버스는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가.  아무 보호도 없이 내버려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갈 수 있을까. 이들을 보호해야 할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위태로운 운전뿐이다.

이 영화의 구성은 한편으로 독특하다. 조금은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도 보였던 이 영화는 마지막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붙여서 내보낸 후, 관객에게 어떤 수습할 틈도 주지 않은채 막을 닫아 버린다. 글쎄. 나로서는 이렇게 마지막에 강한 씬들을 잇따라 붙이(고 끝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라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이것은 어떤 너무 거짓된, 선택이 없는 속에서 영화적인 끝맺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독이 등장인물을 너무 놓아 버리고, 그저 이 비극을 관객들에게 던져버리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그을린 사랑>과 비슷한). 검게 변해버린 스크린 위에 감독이 관객에게 놓아버린 진통만이 남아 있고, 그 속에서 나름의 욕망과 희망으로 애써 살아내려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얼얼한 충격만이 남아 있다.

(모든 사진은 CINDI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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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CINDI

Interlude | 2011. 8. 19. 16:30 | Posted by 맥거핀.





불이 꺼지고, 아핏차퐁 감독의 영화제 트레일러가 시작된다. 이 트레일러는 묘하다. 기묘한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면서, 몇 겹의 커튼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크린이 드러날 듯 하다가 다시 가려진다. 멜로와 공포와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슬픔, 그 어느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런 이미지들을 조금씩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영화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멜로일 수도, 공포일 수도, 혹은 스릴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드디어 열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테러리스트들 (The Terrorists) - 툰스카 판시티보라쿤 감독

"작은 고깃배 위에서 두 소년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를 관통하는 빛을 응시하고, 바닷물 아래 헤엄치는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한다. 그 수면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고무 농장의 어둠 속에, 꺼질 듯 희미한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진실은 피에 굶주린 과거와 겹쳐진다. 과거는 태국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비난뿐이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위의 글은 영화를 조금은 오해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외곽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제대로 설명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하면 몇 명의 남자들이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성(性)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남자의 빠르고, 지속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어지러운 대화. 그리고 그 다음 한 남자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자막이 이어진다. 이 자막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내 옆에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느덧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버렸다.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몇 가지의 불친절한 독해. 이 영화에서는 자막의 독특한 활용이 도드라진다. 이 자막은 일견 화면의 내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남자의 경우 다음에는 한 남자의 세밀하게 촬영된 자위 화면 위로(이 영화는 남성 성기의 노출이 참으로 빈번하다), 1976년 태국의 대학에서 일어났던 군인들에 의한 학생들의 학살 사건에 대한 리포트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테러리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맥락.) 그것을 화면으로도 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쾌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강제로 당하는 행위(성고문을 당하던 남자)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다..는 것?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다른 독해. 어쩌면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자막들만 지워버리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포르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조금은 정적인 게이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검열관은 그저그런 포르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불편해졌을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기노출이 빈번한 이 화면인가, 아니면, 이런 화면과 함께 1976년에 일어났던 이 학살사건의 세밀한 리포트를 듣는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면과 자막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옛날 사진들과 자막으로 나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태국의 기차역과 기차역에 있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을 보여주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다음의 이야기들. "1978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잘들으면 전차를 태워주신다고 하였다. 태국에서 전차는 1976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전차를 탄 기억이 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1976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조금은 지쳐 보이는 태국인들의 모습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현재의 태국의 모습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묘한 울림이 생기며, 처음의 질문을 돌아보게 만든다. 완전히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를 들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이 테러밖에 없을 때 행하는 테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을 단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에는 다른 이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나는 테러를 반대한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금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꼭 보아 달라는 듯이 아주 충격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이 보이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 충격적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이 비슷한 화면을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서의 일들. 그러므로 영화의 질문을 되돌아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요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도 기억하는 대신에, 몇 가지를 잊고 있다. 얼마전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이 없다는 투로, 회고록을 써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평택에서, 용산에서, 명동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곳에서. 그것이 어쩌면 단지 기이한 포르노였던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이유다.

감옥과 천국 (Prison and Paradise) -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약간은 내 책임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를 하루에 연이어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202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고,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현지인들의 사망도 적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의 주범들에 대한 인터뷰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일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이 인터뷰들의 연결고리는 그 사건의 범인과 학창시절 룸메이트로 지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 이스마일이다. 그는 또한 테러를 조사하는 전문가로서 이 사건과 함께, 테러라는 것의 전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쓴다.

영화의 막바지, 이스마일은 자신이 처한 위치의 딜레마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미국의 앞잡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오해받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경찰에게는 이들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나고, 하리얀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토로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는 양쪽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격한 이슬람 지하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과격한 테러 분자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장시간 동안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이들은 한마디로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이슬람인의 관점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테러를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죽음(사형)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도 한편으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에는 한편으로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기 보다는, 동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단순이 이들의 논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발 비틀어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들 폭탄 테러범의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아이들은(이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겨진 어머니들은 몇 년이 지나 아버지들이 사형당한 후에도(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후 8년 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아마도 어쩌면 거의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해자 가족들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이들이 받은, 혹은 받게될 충격도 못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일종의 영화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펼쳐보이는 동시에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서, 이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비판은 이들의 지하드가 잘못된 지하드라는 것이다. 테러는 민간인들에게 가해졌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테러, 혹은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군대 대 군대, 무장한 자와 무장한 자 사이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민간인 관광객들과 일부 현지 민간인 무슬림에게 행한 발리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마일의 논리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일은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 다른 방식의 지하드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런 이스마일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한 가지는 이스마일이 이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려니와(그러고보니 이름도 이스마일), 영화의 마지막이 이스마일의 발언 컷으로 끝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음악의 활용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피해자나 가해자 가족의 인터뷰를 보여줄 때에는 으레 서정적인 음악이 삽입된다. 그러나 이 테러리스트들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서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과 이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차단'되어 있다. 하나는 인터뷰를 행하는 이들 앞을 가리는 감옥의 창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정의 차단. 따라서 이들의 논리는 나름 논리적이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과격 이슬람 옹호자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가 논쟁을 피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영화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이야기를 영화의 겉에 씌우는 것이다.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영화는 논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것은 지하드와 이슬람 정치 운동, 테러리즘, 인권 등에 관한 불씨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한 가지의 논점이 포함된다. 그것은 과연 가해자의 가족들을 영화라는 이유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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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민망한)능력자들, 그랜트 헤스로브

Ending Credit | 2011. 7. 11.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칭 초능력 제다이인 빌 장고(제프 브리지스)와 린 캐서디(조지 클루니), 그리고 이들을 취재하는 기자인 밥 월튼(이완 맥그리거)이 낭창낭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벌이는 일련의 바보짓(?)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동들을 보니, 영화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들과 별개로 슬며시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나, 살육, 학살, 고문, 테러 등의 단어들의 반대편에 이성이라는 단어를 놓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에 전쟁이나 학살이 존재하고 있다는 흔한 믿음이다. 그 흔한 믿음의 범주 안에서 전쟁이나 학살은 광기, 반이성과 같은 단어들과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전쟁영화들을 보면, 그러한 믿음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대체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희번덕이며,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욕구로 적에게 그리고 때로는 아군에게도 총알을 날린다. 그러나 어쩌면 이 믿음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혹은 누군가가 주입한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하나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성으로 가득찬 문명의 미로 끝의 숨겨진 방에 어쩌면 전쟁이라는 괴물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나 학살과 고문 같은 것은 사실 우리의 차가운 이성으로 깔끔하게 수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린이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고, 빌이 심리고문을 당하고 있던 이라크인들을 풀어주고, 병사들이 마약에 취해 동네에서 자전거 끌고 마실가는 것처럼 신나게 탱크를 몰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갈 때 그런 생각들이 든다. 인간의 이성이란 때로는 얼마나 차갑고, 무자비한 것인가. 그 이성이 무장해제될 때 작동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뿐인가.

물론 이러한 '흔한 믿음에 대한 반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큰 반문화, 반문명 운동이 일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한 반문명의 기원은 여러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전쟁과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베트남전 등으로부터 촉발된 문명에 대한 회의(懷疑)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단적으로 말해서, 한나 아렌트 등이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의 건설과 그것의 작동에는 아주 차가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 그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던 배경에는 단지 히틀러의 광기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한 많은 이성적인 두뇌들의 의사와 행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아니 그간의 믿음에 반하게도, 악은 광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악은 도리어 차갑고 매끈한 이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반작용으로 이성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행동을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바보같은 옷을 입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LSD에 취해 바보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그에 더 나아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우거진 수풀 속에서 아주 이성적인 방법으로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영화 <초(민망한)능력자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빌 장고의 각성은 베트남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에서 신병이 조준사격을 하는 비율은 생각 이상으로 낮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에 그들은 거의 일부러 적을 맞추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으로 총알을 날려 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전쟁터에서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그들은 살인기계가 된다. 베트남전에서 환상을 본 빌 장고는 그 이후 히피 문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신지구군, 혹은 제다이 기사들을 양성할 계획을 꿈꾼다. 영화 속에 반복하여 외쳐지는 신지구군의 강령은 히피들의 강령을 닮았다. 생명의 존중, 연대, 감성의 공유를 외치는 그것은 반이성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동시에 초(超)이성적이다. 따라서 그 신지구군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초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단지 농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빌과 린 등의 어설픈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바보스럽지만,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밑바탕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질문, 또는 조롱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의 하나는 린과 마흐무드(무하마드?)가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린이 자신이 차로 칠 뻔했던 것과 미국이 이라크에 벌인 행동들에 대해 사과하자, 마흐무드는 린이 이라크인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여기에 린의 대답이 압권이다. 뭐 미국에도 납치범은 있으니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학살과 고문에는 몇 십년 전 베트남에서 그런 것처럼 가장 깔끔한 이성과 필요들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9-11 테러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를 내세웠지만, 그 전쟁의 내부에는 이성에 의한, 석유 자원에 대한 계산적인 필요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만, 초능력자이자 자칭 제다이 기사인, (우리가 볼 때에 바보같은) 린은 그것을 사과한다. 그 사과는 그 코믹스러움과 별개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린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납득한다. 그것은 어쩌면 암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래리(케빈 스페이시)에게 당한 이른바 '죽음의 터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은 염소에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한 업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린은 마지막에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나의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린의 생각에는 진정한 무도인의 길, 아니 진정한 초능력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수입사의 제목 테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원제는 그 원제에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아마도 그 함의 중에 하나는 '염소'라는 것이 가지는 이 영화(소설)에서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러나 <초(민망한)능력자들>이라는 이 제목은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 제목을 지은 분이시야말로 일단 본인부터 좀 민망해하셔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영화의 관객들과 함께) 그들의 초능력을 계속 반신반의하던 밥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초능력을 긍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갇혀 있던 심리고문당하는 이라크인을 풀어주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염소들을 풀어주는 그 행동이야말로, 바로 파괴적인 이성에 반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들이 결국 자신의 초능력을 확인하는 이 결말은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유쾌하다.


- 2011년 7월, CGV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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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어 베러 월드, 수잔 비에르

Ending Credit | 2011. 6. 29. 01:1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그 성찰의 질문은 이 제목이 담고 있는대로 "과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질문이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게 보복(복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이다. 인간은 결국 본성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의 한 가지에는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어떤 공격이나 위해를 당하고, 그것에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당한대로 되갚아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것은 오랜기간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고래(古來)의 법전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곧 그러한 사적 복수에 의해 발생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방식의 제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른바 공권력에 의한 제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권력에 의한 제재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며, 그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혹은, 현재의 공권력에도 여전히 보복(복수)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공권력에 의해서 거대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이 바로 그러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안톤(엘리아스의 아버지)이 봉사활동을 벌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은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혹은 공권력이 해체되어,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이 작은 사투를 벌이는 학교는 공권력이 있지만, 그 공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또한 안톤이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공권력이 개입할 틈이 없는, 혹은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독이 인간사에서 그러한 공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권력으로의 해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영화로 행하는 '정의론' 혹은 '도덕교과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힘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드러나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문명 체계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는 것은 힘의 법칙이며, 그것은 학교짱이 오로지 힘의 법칙으로 군림하는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엮음은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른들의 싸움이건, 종족간의 싸움이건, 국가간의 싸움이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롱말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크리스티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른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보복에 기초한 공격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영화가 나아가는 것은 공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다른 방향의 모색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공권력은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악수를 시키는 교장의 태도(전혀 효과도 없는)와 같은 것이며, 안톤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안톤이 말했듯이 안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한 라스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그 폭력에 의한 방법 외에는 작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 폭력의 힘으로만 겨우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폭력의 힘이라는 가치가 사라지자, 곧 부하들에게도 버려진다. 즉 이 폭력이라는 것으로 유지되는 지배력은 아주 위태로운 것이며(학교에서 '학교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은 단한번의 '맞짱'의 패배로도 바로 승리자에게 모두 넘겨진다), 일정 정도의 자장을 벗어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시의 다음은 그런 폭력의 순환, 보복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는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가. 내가 보복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러한 폭력이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큐식의 '정신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의 몇몇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대장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이제 사라질 것인가. 다시 누군가는 그러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안톤의 경우 라스 앞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보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라스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는지. 또 만약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속임수가 아닐는지. 예를 들어 자동차 정비공인 라스와 의사라는 안톤의 지위가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판단하는 관객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 영화는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가. "공권력도 없고, 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용서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힘의 어느 정도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찰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뷰의 서두에 말했듯이 복수는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사회 역시 상당 부분, 복수의 원칙, 보복의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복수>이다.) 인류사의 상당수의 전쟁이 결국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만 보아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강한 복수심의 유령들이 곳곳을 떠돌고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노들을 때로는 그 당사자에게, 혹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것을 겨우 잠재운다. 최근 화제가 된, 소위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그에 으레 따라붙는 신상털기와 여러 맹렬한 비난들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떤 교육의 문제, 혹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 풍토, 혹은 정책의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어떠한 부분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겨우 그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잠재울 줄 아는 안톤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 가정을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은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이다. 타인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이건, 혹은 다른 욕구이건.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즉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한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시점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지구적인 문제에까지 폭력과 분노와 보복은 왜 그렇게 만연했는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명 사회를 건설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문명 사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문명 이전 처럼 보이는 사회(아프리카)와 문명 이후의 사회(덴마크)가 사실은 거의 같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다른 방식의 해결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성찰 말이다.

영화 중간에도 그렇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인간이 없는, 너른 자연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은 이다지도 평화로운데, 인간은 왜 그렇게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가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결국 100년도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는 점. (안톤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겨우 장막 하나로 가리워져 있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보다는 그 넓은 대지가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분노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해봐요.



- 2011년 6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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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메모들

Interlude | 2011. 6. 14. 01:23 | Posted by 맥거핀.


(<적과의 동침>, <무산일기>에 대한 약간의 내용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광고에서 늘 등장하는 것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 지금까지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늘상 그렇듯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글쎄. 그 잃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듯도 하지만, 아무튼 간에 이 작은 기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찌되었던 간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 경우라면 그 안의 여러 복잡한 미로들 중에서 가장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읽는 것과 쓰는 것에 관련된 것인데, 팟캐스트와 다양한 메모 기능이 그것이다. 먼저 팟캐스트를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처음에 열심히 무료 어플들을 찾아 다니다가 부실한 업데이트 기능들에 실망하고, 결국 정착하게 된 것은 유료 어플인 Beyond Podcast인데, 이 작은 어플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동시대의 생각들을 매일 충실하게 배달해준다. 더구나 1992년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잘 때 들을 수 있게도 해준다.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달콤한 보상책들.

또 하나는 메모 기능이다. 지금 이 짤막한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것도 어지럽게 쌓여 있는 메모들을 본 이후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끄적끄적 남겨놓았던 메모들. 몇 주 전에 남겨놓았던, 이제는 왜 남겨놓았는지 이유가 알 수 없어져 버린 메모들. 아마도 그 때 그 메모들에 조금 더 쓸만한 옷들을 입혔더라면 조금은 더 읽을만한 리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무엇인가를 쓸 만한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있더라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버려질 이 메모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뭔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 물론 이것은 앙상한 기록들, 지연된 생각들에 불과하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앙상한 나무와 같은 것들이지만.

적과의 동침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2011년 4월)

이 영화가 기대 이하의 관심을 받고, 쉽게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사뭇 비슷해보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영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이 결국 어떤 판타지의 세계(예를 들어 수류탄이 폭발하여 팝콘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말해주듯이)로 달려갔다면, 이 영화는 그 보다는 훨씬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국 결말의 처리라고 할 수 있는데, <웰컴 투 동막골>은 여전히 판타지의 세계에 머물러, 남한군과 북한군과 유엔군 몇 명이 힘을 합쳐, 어떤 제3의 거대한 적에 대항한다는 식의 결말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그보다는 훨씬 비극적이며, 더욱 심각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그 질문은 결국 이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라는 점이다. 그들을 죽게 만드는 그 '명령'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 명령들(이들의 죽음에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들'이 있다)의 기원에는 국가가 있으며, 우리는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기계, 혹은 살인마를 마주하게 된다. 그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마는 당시 우리나라 곳곳을 활보하며, 때로는 유엔군의 탈을 쓰고, 혹은 인민군의 탈을 쓰고, 혹은 국군의 탈을 쓰고, 비슷한 유형의 범죄들을 자행해왔다. (이 영화 <적과의 동침>보다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디딘 버전으로는 <작은 연못>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우리나라 영화 제작자들의 '종합선물세트를 관객들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즉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지젝의 신봉자들도 아닐진대, 같은 이야기를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중간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들의 상당 부분은 거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무리 그 개인기가 출중하더라도 사족인 듯이 느껴진다. 어떤 상황적인 페이소스를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유머들은 생각해 볼만한 질문들을 거의 잡아먹는다. 메시지도 들어 있고, 유머도 들어 있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들어 있는 이 종합 과자선물세트는 관객을 먹다가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아쉬운 영화.

인사이드 잡 (CGV 대학로, 2011년 5월)

재앙은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부터였다. 이 <인사이드 잡>이라는 영화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 내부'란 지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내부이다. 이 영화는 그 내부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지극히 건조한 어조로 미세하게 헤집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어조가 건조하다고 해서, 내용마저 건조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식의 발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도덕적인 책임감을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정치적인 메시지를 마지막에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을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내부'에서 벌이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또다른 영화가 담배회사의 내부고발자를 다루었듯이, 이 영화는 그 스스로가 '내부고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여러 다양한 자료를 친절하게, 흥미롭게, 순차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이해시킨다. 아마 경제에 거의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혹은 아무리 신문기사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내부에 들어있던 것들에 대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결국 집어내는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아니라,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친절한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다른 것들에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금융규제 완화의 시작에 와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나 은행들의 통합 정책을 볼 때에 어떤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로스가 영화에서 명쾌하게 말하였듯이 유조선에서는 기름을 여러 칸에 나눠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파도에 배가 휩쓸려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칸의 벽들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오로지 더 많은 기름을 실으려는 욕심 때문에. 더 많은 이득을 보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든 생각인데, 이렇게 인터뷰 중심의, 그리고 영화 자체의 영문 자막이 많은 영화의 경우 더빙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무리 맷 데이먼의 나레이션이라도 말이다. 영화 초반에는 너무 많은 자막으로 인해 조금은 멍해지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차리고 볼 것. 곧 흥
미진진해진다.

무산일기  (인디플러스, 2011년 5월)

탈북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다. 2등민, 계급사회. 125로 시작되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우리사회의 2등민이라는 낙인이다. 물론 2등민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경제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계급이 갖추어져 있으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 아래부분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급은 자꾸만 그 계급의 단계수를 증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힌트를 영화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숙영은 탈북자 승철과 어떻게든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그것의 이유는 숙영과 승철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숙영이, 승철이 처해있는 곳으로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승철과 경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철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승철과 자신은 다르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그 가장 밑바닥에 어떤 불길한 자화상으로 승철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자화상은 경철과 숙영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어쩌면 가장 미스테리한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극단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리얼리즘이 가장 망가지는 순간은 아마도 그 자신이 '내가 리얼리즘이다'라고 나설 때일 것이다. 어떤 것이 리얼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그 순간 가장 리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황해>의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마지막에도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이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과 거리가 멀, 어쩌면 승철의 꿈인것처럼도 생각되는 승철이 교회에 가서 마음을 조금 연 숙영과 같이 성가를 부르는 장면과 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이다. 희망을 보여줄 듯 하다가, 다시 그 어떤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 이 마지막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또는 절망을) 애써 찾게 되는 것일까.

.........................................

여전히 복잡한 6월이다. 잃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6월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로 인해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여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꼭 스마트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영화에서 얻은 교훈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잃어가고 있는 것들, 자꾸 말로 되뇌어지는 속에서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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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곤충 스카우팅 리포트

The Book | 2011. 4. 18. 22:45 | Posted by 맥거핀.

당신은혼자가아니에요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조슈아 아바바넬 (함께읽는책, 2011년)
상세보기



아마도 키에르케고르가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지금도 당신의 아주 가까이에서, 혹은 당신의 살 속에서 멋진 성찬을 즐기고 있을 가정용 곤충들을 설명하고 있다. 빈대, 이, 진드기, 파리, 개미, 바퀴벌레, 흡혈진드기 등등의 이 가정용 곤충들은 인간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격하고, 나무를 뜯어먹고, 애완동물의 피를 빨아 마시고, 수많은 2세들을 낳고, 서로서로를 잡아먹기도 하고, 이곳저곳 쉴새없이 뛰어다니면서 소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들은 사실 그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일 때마다 그들을 때려잡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지만 후려치기도 하고, 이상한 가려움증을 느끼면서 손톱 끝으로 긁어내기도 하고, 더이상 못견디면 때로는 '벌레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극히 일부분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우리가 어떤 벌레 한 마리를 우연치 않게 발견한다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근처에는 그 개체가 분명히 한국시리즈 7차전을 관람하는 인파만큼 북적거리고 있으리라고 장담해도 좋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보다 그 부제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는 이 책의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벌레들은 가정용 곤충(Household Bugs)들이다. 그리고 그 '가정용'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사실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참 웃긴 것이, 어떠한 '가정용 동물(가축)'도 우리에게 그렇게 불러줄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정용'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우리 곁에 놓아두고, 우리 멋대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의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곤충'이라는 말 앞에 붙을 때에, 그 관계는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들은 이번에는 그들이 최대한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바퀴벌레 구이나 불개미 만두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곤충들이 철저하게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 인간들의 곁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므로 '가정용 곤충'이라는 말은 사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즉 우리 인간들이 사실은 이 곤충들의 '가정용 숙주'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경고문구를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생물학 서가에 놓일 책이 아닙니다. 당신과 한집을 쓰는 '작은 가족'에 대한 은밀한 에세이입니다.' 위 경고문구가 말하는 바대로, 이 책은 생물학적 도감이라기 보다는, 위트를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각 곤충의 소개 말미에는 이 곤충들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소개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당신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러나 이 책의 방법들을 탓할 것도 못되는 것이, 기생생물을 퇴치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숙주(바로 당신!)를 없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일종의 호러 영화(ex. 에일리언)를 보는 마음가짐으로 그저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상상하고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당장 내일 지구를 습격할 것이 명백하다면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겠는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이러한 일이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이 책을 훨씬 즐겁게 즐기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TV에서 하는 <스펀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프로그램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그 정보들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지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 속에 있는 달걀을 뒤집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의 뭔가가 달라질까.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가정용 곤충들의 아주 세부적인 생김새와 그들이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곤충들과의 동거를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덧.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요새 프로야구 스카우팅 책자를 열심히 보고 있다. 게임을 자주 볼 수 없으니, 그 대안으로 그렇다면 책이라도 사서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이 책은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특성, 습관, 그리고 상세한 사진, 그리고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와 같이) 특정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종의 백과사전적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그저 재미로 적어보는 이 책에 나온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 인간이라는 투수를 상대로 한 타자 편이다. 컨택(어떤 범위에 나타나는가), 장타력(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가), 타석에서의 끈질김(얼마나 퇴치하기 어려운가)라는 관점에서.

빈대: 전천후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이다. 장타가 좋은 편은 아니나, 경기 후반 치명적인 뜬금포를 종종 터뜨린다. 타석에서 아주 끈질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볼을 골라내어 1루로 출루할 수 있다. 발도 빠르니, 전형적인 1번타자 유형.

이: 투수가 비듬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타격이 좋은 편이라 보기 힘들고 장타력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다. 타석에서도 볼을 길게 보지 못하고 쉽게 휘두르는 스타일. 맞춰잡는 투구가 필요하다.

집먼지진드기: 이와 마찬가지로 비듬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장타력은 별로 없으나 타석에서 선구안이 아주 좋아, 낮은 타율에서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다.

모낭진드기와 옴진드기:  무시무시한 생김새로 타석에서 투수에게 위압감을 주며, 넓은 컨택 범위와 한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소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거리 타자 유형.

서양좀벌레와 집게벌레: 언더핸드와 같은 특정 유형의 투수(책)에만 강점을 가지고 있다. 타석에서도 상당히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경기 후반 대타로 사용하면 좋다.

파리: 투수의 구질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좋은 타격을 자랑하는 특이한 유형의 타자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이볼을 많이 양산하는 타자이며, 결승타를 유독 많이 쳐낸다. 실투는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

개미: 투수의 공보다는 투구시의 습관이나 버릇 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타격으로 연결해낸다. 컨택이 좋지는 않으나, 맞았다 하면 장타이다. 타석에서도 아주 끈질긴 편이며, 연습벌레, 일명 '기계'로 알려져 있다. 집안 대대로 야구를 해온 야구 가문.

바퀴벌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가정용 곤충계의 이대호(심지어 이대호와 체형도 비슷하다). 투수에게 아주 공포스러운 타자로 각인이 되어 있으며,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하며, 어떤 투수의 어떤 볼도 가리지 않는다. 컨택, 장타 모두 뛰어난 타자로 지난 수만년간 좋은 시즌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시즌도 당연히 기대된다.

흰개미: 서양좀벌레와 같이 특정 유형의 투수(나무)에만 강하다. 역시 특정 유형의 투수가 등판했을 때 기용할 수 있는 타자.

벼룩과 흡혈진드기: 넓은 컨택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구질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힘이 아주 좋아 단타보다는 주로 장타를 생산하는 유형. 벼룩의 경우 넓은 외야수비를 자랑하는데, 특기는 펜스 위로 점프하여 홈런 타구를 걷어내는 것. 일명 '홈런 도둑'.

의류해충과 부엌해충: 타격보다는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단, 작전 수행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는데, 감독의 지시를 거의 안듣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게임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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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윤성현

Ending Credit | 2011. 4. 4. 22:28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 <파수꾼>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영화 그 자체의 어떤 것 보다는,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다른 것을 환기하게 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들, 낡고 끊어지고, 바래져 가는 기억들, 혹은 무의식적으로 밑바닥에 밀어넣어 두었던 기억들의 일부를 아주 조심스레 끄집어내게 만든다. 물론 그것들의 거의 대다수는 영화 속의 어떤 일들처럼 저런 극적인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비슷한 기억들이 있다. 다른 어떤 것들에 밀려 잊고 있었던 것들, 이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옛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의 좋았던 시간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지금 기준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옛날의 (친구와 멀어지게 된) 사건들. 예를 들어 영화 속 기태(이제훈)의 모습은 옛날 학교 가던 길에 나에게 갑자기 이단옆차기를 날렸던 어떤 친구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이 어떤 것 때문이었는지는 세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몇몇 부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상당수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어떤 것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또 어떤 것은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그리고 동시에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잊으면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어떤 심리학적인 디테일한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의미가 있다해도, 그것을 또 애써 설명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지 않을까. 기태는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설명해 보라는 동윤(서준영)의 요구에 항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잖아. 이 부분은 상황을 무마하려 넘어가려는 기태의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설명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그것 자체가 정당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기태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기본 구조가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아들이 왜 죽었을까. 반복되는 질문들 속에 답은 없다. 아니, 답은 있지만, 그 답이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동윤이나 희준(박정민)이나 알고 있다. 애써 설명한다고 해도, 그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설명과 그 설명이 결국 말해주는 것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 그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는 그것만이 가능한 관계의 전부였으니까. 그 관계들만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중요해져 버린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아니,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어도,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청소년들의 어떤 미성숙성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기태와 동윤과 희준의 이러한 관계는 청소년기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언제 어느 때에나 누구에게나 이루어질 수 있으며, 지금도 우리 주위에 살짝 가로놓여져 있다. 다만, 그것이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다른 중요해진 것들이,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파국에 이르지 못한다. 단단해져야만 깨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청소년기의 비극이란, 그러한 관계들이 필연적으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아무 것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 시기에 우리는 대부분 한두 가지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단단하게 만들려고 한다(타인이 보기에는 약해보여도, 자신들은 단단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 때의 우리에게는 '파수꾼'이 필요하다. 그것이 깨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파수꾼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벼랑 너머로 누군가 떨어지려고 하면, 붙잡아주려고 했던 것처럼. 혹은 기차가 지나가려고 할 때 지켜보며, 종소리를 울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처럼. 마지막 기차길에서의 동윤의 회한은 그래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다른 파수꾼들이란 없었으니까.
.............................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 이 어려운 작업을 가능케 하고, 이것에 힘이 느껴지는 원동력 중에 하나는 독특한 서사구조와 그것을 화면에 구현하는 방식에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져놓고, 그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이야기에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대과거와 과거, 현재를 독특하게 붙이는 리듬이 훌륭하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 동윤이 울다가 나와서 기태를 만나고, 기태와 대화를 하고(이 장면에서 기태와 동윤은 분절되어 있다. 거울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지되, 감정은 분리시킨다.), 다시 기태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잇는 것을 보거나, 기태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과 기태 아버지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을 비슷한 구도로 만들어내는 장면 등을 보면, 이는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여기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결합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 영화 <파수꾼>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아는 영화다.



- 2011년 4월,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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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대칭, 완벽하지 않은 대칭

The Book | 2011. 3. 29. 22:42 | Posted by 맥거핀.

대칭자연의패턴속으로떠나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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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마커스 드 사토이 (승산,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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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말그대로 사람없이 혼자 연주하는) 자동피아노가 나온다. 그 자동피아노는 긴 두루마리에 일련의 천공(穿孔)을 가진 악보로 연주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악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흰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인데, 그 구멍들의 놀라운 대칭적인 배열이란. 이 책 <대칭>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바흐의 음악에서 수학적인 대칭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 책 <대칭>은 그 대칭의 세계를 수학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차분히 들려준다.

우리가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수학의 세계는 일종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집합과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은 그렇게 짜여진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수학에서는 전 단계를 모르고서는 다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수분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다음의 이차방정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점핑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아주 일부의 천재에게는 허용된다). 갑자기 책의 중간을 펴서 그것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낙오자들이 생긴다.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 수학의 끈을 놓아버린다. 수학은 일종의 마라톤 랠리와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인내심을 요구한다. 수학은 지름길을 보여주지도 않고, 중간에 자동차를 타고 다음의 코스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완주의 환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논의를 보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처음 가장 기본적인 회전 대칭과 반사 대칭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알람브라 궁전의 17개의 서로 다른 대칭을 거쳐, 고차방정식의 해들과 그 속에 담겨진 대칭들,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수들과 기하와의 환상적인 연결을 지나, 마침내 가장 근본적인 대칭의 언어인 군(group)으로 대칭을 말하고, 그 대칭의 지도에 셀 수도 없는 큰 대칭을 가진 몬스터 대칭을 그려넣기까지의 여정은 일종의 작은 마라톤 게임을 닮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이 마라톤은 별로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수학 선생님의 인솔 하에 몇 명이 낙오되어도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런 서바이벌 마라톤 게임은 아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때로 잠깐 앉아서 휴식을 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뛰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위의 풍경에 집중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마지막 도착점까지 끝까지 데리고 간다. 아니, 아예 뛰고 싶지 않은 독자는 뛰지 않아도 된다. 중간중간 뛰어야만 하는 부분들을 건너 뛰고도, 즉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 풍경만 둘러보아도 볼 것은 아주 많다. 그 속에는 그간 힘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수학자들의 드라마가 있고, 수학적 논의보다 기차시간표에 열광하고, 술의 도수에서도 소수를 찾는 유머가 있고, 바흐의 음악이 있고, 에셔의 그림이 있다. 밑의 인용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몇 가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부분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재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설사 그 논문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남아 있더라도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스미스는 '증명의 신뢰성은, 증명의 많은 부분들이 극도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추리 소설 같은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나오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는 일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증명은 수많은 실들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뽑아낸다 해서 전체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p. 433)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는 그 논문이란,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칭군들을 기록한 거대한 지도가 이제 완결된 것임을 말하는 논문을 말한다. 수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지도에 새로운 대칭군들을 추가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리고 새로운 대칭군이 발견되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지도에 기록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과 닮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거대한 별의 지도에 그것을 추가하였다. 별은 거기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칭군도 거기에 이미 있었다. 수학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루한 계산들로 그것을 끄집어내기 전까지 그저 묻혀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그 지도에 이제 새롭게 더 추가할 대칭군이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이 책 <대칭>의 마지막 한 장까지 이 논의는 완결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언제 어디서 새로운 군이 추가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더 추가될 수 없음을 증명한 논문에 오류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남아 있다. 어느 순간 우주의 반대편에서 외계인이 날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책에 가장 인상을 받은 순간은, 대칭을 둘러싼 전체적인 논의보다도, 수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이다. 대칭군을 분류하는 것이 이제 거의 끝났음을, 그 분류의 지도(아틀라스)에 더 이상 기록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는 앞의 태도도 그러하지만,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의 자신의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대칭의 한 부분을 파고드는 저자의 연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점이 있다. 저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는 그 난점을 인정하고, 그대로 그 연구를 발표하려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모든 수학자들은 자신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놓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주 극소수의 수학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갈루아와 아벨 등의 많은 수학자들의 드라마에서 말해지듯이, 한 사람의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일종의 완결을 이루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완결로 가는 하나의 여정일 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완벽함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증명은, 그 증명 자체로는 완벽할 수 있어도, 수학이라는 거대한 지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그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책 <대칭>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곳에는 완벽하지 않은, 아니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것들이 숨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페르시아의 직공은 완벽한 대칭 문양을 가진 직물을 만들면서도 한 부분을 무너뜨려 그것이 완벽해지지 않도록 했다. 일본의 건축가들은 대칭된 건물을 축조하면서도, 한 곳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완벽함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대칭은 도리어 공포의 대상이 된다. 바이러스는 완전한 대칭의 모양을 가진다. 그것이 에너지를 최소화시켜 바이러스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영화 <올드보이>를 생각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오대수가 갇혀 있던 방의 벽지에는 대칭적인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비밀이 밝혀지는 마법의 상자에도 대칭적인 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인간은 완벽한 대칭을 꿈꾸지만, 완벽한 대칭은 도리어 사람을 불안하고, 무섭게 만든다. 대칭의 요소를 담으면서도, 일종의 창의적 변형을 남겨두었던 바흐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완벽한 대칭을 가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듣기에 거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 <블랙스완>에서 완벽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변형과 결여를 실행한다.

그래서 아마도, 완벽한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 <대칭>은 완벽함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고, 일종의 미스테리를 남겨둔 채로 이야기를 끝맺음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1장에서 12장이라는 12면체의 구조로 목차가 이루어져 있지만, 1월에서 12월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8월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끝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해로서) 완결되지 않고, 다음의 8월 이후의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다.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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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문인/작가
지은이 E. H. 카 (열린책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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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만한 말이 용서될 수 있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도스또예프스끼에 드는 솔직한 감상은 '연민'이다. 물론 이 대작가의 삶에 내가 이러한 감상을 말한다는 것의 근저에 있는 여러가지를 모두 고려한다면, 이런 말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E. H. 카의 몇몇 문장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도리가 없다. "극단적인 쾌활함과 극단적인 침울, 익살맞은 허풍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자기 비하가 거듭되는 이러한 그의 정신적 증세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바보스러운 행위를 범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행위의 근저를 눈치채고, 그 어리석은 행위와 거의 동시에 후회를 하게 되는,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p.42)""도스또예프스끼의 비애는 자신이 자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찬가지의 명석함을 가지고 그 원인도 분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p.43)"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위의 문장들에서 보여지듯이, 일견 차가워보인다.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시종일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에 대해 공정한 기술을 하기 위해 애쓴다. 여러 자료들은 조심스럽게 취사선택되고, 몇몇 의심스러운 자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시도한다. 또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이 책의 어떤 야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평전이 가지는 야심 또는 함의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것을 넘는다. 저자의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이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에 담긴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문학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카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국인으로써)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대변하는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카는 러시아인들의 어떤 특질을 잘 나타내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라는 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나 그의 사상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나 당시의 어떤 분위기를 때로 필요 이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은 카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도스또예프스끼는 카에 있어서는 러시아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현미경이었고, 카는 그 현미경이 가지는 특징적인 왜곡에 휘둘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평전의 약간은 독특한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제목들을 살펴보면 이 책이 가지는 어떤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 평전은 크게 네 개의 구분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나누고 있다.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 제목들에 드러나듯이 이것은 그의 문학을 염두에 둔 구분이다. 즉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라는 이 제목들은 그의 삶의 성장이나 어떤 힘들었던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을 염두에 둔 구분이 아니라, 그의 문학이 성숙되는 시기, 흔들리는 시기, 꽃피우는 시기, 그리고 가장 문학적 최고의 정점에 오른 시기의 구분이다. 일례로 성장기와 격동기를 가르는 구분을 들 수 있다. 그의 삶으로 보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하는 시기는 그의 삶의 격동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의 문학을 중심에 둔 구분으로 보면, 이는 그의 문학의 기반을 성장시켜 준 성장기에 해당한다. 그의 문학적 격동기는 (카의 구분대로라면) 시베리아 유형이 끝나고 저널리즘에 몰두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했던 <죄와 벌> 집필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즉 이 네 가지의 챕터는 그의 삶의 흐름보다는 그의 문학의 어떤 흐름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문학적 삶은 초기의 급격한 문학적 성장에 뒤이어, 일종의 침체기를 겪다가 폭발적인 창조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그것의 최정점에서 그는 급작스럽게 운명을 다하였다. 이런 문학 중심적인 평전의 구조를 반영하듯이, 평전의 구성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에 대해 각각 하나의 챕터를 할애하여 거의 평론에 가까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이 평론은 한편으로는 너무 인물중심적인 비평으로 흐르고 있어, 온전한 비평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그 외의 챕터들도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기 보다는 특징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각각의 챕터들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으며, 그 중심적인 이미지들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 시기에 대한 특징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 평전을 읽고나면,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어떤 불안정하고도 복잡한 면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그에 따르는 일종의 연민 혹은 안타까움이라는 복잡한 인상을 가지게 되지만, 그의 문학과 그 기저에 깔린 것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죄와 벌>에서 윤리의 이상, 정치를 다루는 <백치>, <악령>으로의 발전, 그리고 죄와 수난이라는 종교적 도그마를 담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까지 궁극적으로 이르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사상적 흐름과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깔린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대표적인 것들이란 이 책에서 러시아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그것에서 나타날 어떤 실제적인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p. 228)""우리는 감정과 의견에는 관대하지만 행위에는 관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늦게 회개하는 탕자의 방탕이 큰아들의 질투보다 왜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며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이 죄짓지 않은 99명의 존경받는 시민들보다 더 격려받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묵상하는 마리아가 식사를 차리는 마르따보다 더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에 치중하고 행위에 냉담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며, 미쉬낀은 바로 이 정신의 체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규율에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p.253)"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에 깔린 이러한 러시아적인 것은 뚜르게네프나 똘스또이, 그리고 그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고골에서 보여지는 러시아성과 다른 그만의 특징적인 것이다. 마지막 챕터 '에필로그'에서 카는 이러한 도스또예프스끼 문학만이 갖는 특질을 소설의 등장인물이 전형을 벗어나는 것,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묘사,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그러므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천착, 그러면서도 거기에 내재된 신학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전세대나 동시대 문학들의 특징을 뛰어넘는 것이며. 그 후의 전세계의 작가들에 크게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뿌쉬낀의 생애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은 그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 표지해 주었다.(p.374)" 즉 그는 기꺼이 한 시기를 닫았고, 새로운 시기의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의 많은 소설들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인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고,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간, 혹은 이반 까라마조프 같은 인간은 일종의 원형이 되었다.

카는 마지막에 어떤 예언을 덧붙인다. 앞으로 백년 후(이 책의 출간년도는 1931년이다)가 되어서만이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20세기 초의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후세대만이 그 예술의 전모를 생각할 것이라는 점. 이 예언은 맞을까. 20세기의 혼돈을 넘어, 21세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세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카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제는 받아들였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하였다(혹은 거부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마지막에 러시아정교의 세계로 달려갔지만, 우리가 달려갈 곳은 없다. 거의 모든 종교는 해체되거나, 혹은 자체의 모순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고, 현대인은 내재된 분열과 이중성을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견딘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위안은 우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일종의 심리적 치유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카의 예언은 이어진다. "현대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도와준다기보다 오히려 훼방한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예술적으로는 부적절한 쪽으로 기울게 하고, 흔히 우리의 예술적 인식을 왜곡시킨다.(p.385)"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을 새롭게 읽어봐야겠다. 분열을 견디며. 예술적으로 생각하도록 애쓰면서.

리뷰에 인용한 부분 외에 흥미를 끈 문장들.

안티테제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진테제에 도달할 수 없다. 죄악감을 없애 버리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p.307)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든다>라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한 인물은 말한다.(p.77)

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 불모성, 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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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Ending Credit | 2011. 3. 9. 17:59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가끔씩,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마다, 어떤 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주인공의 대사에 맞장구만 쳐주던 조연들, 인상적인 한 장면을 보여줬던 엑스트라, 악인이 죽고난 후, 그 악인의 나름 충성스러웠던 부하들. 이른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증후군. 영화 <블랙스완>을 본 후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이야기를 찾아보고서 정작 궁금해진 것은 백조 오데트보다는 흑조 오딜이다. 비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호수에 뛰어들어 죽고난 후, 그리고 희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하늘로 승천한 이후, 오딜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오딜의 그 뒷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오데트와 오딜을 한 무용수가 공연한다는 이유가 그것. 마지막에 오데트의 장엄한 최후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오딜 같은 것을 보여줄 틈이 있겠나.

사실 여기에는, 묘한 모순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는 오딜과 오데트가 겹쳐서 등장하는 장면이 없다. 물론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 무용수가 두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일종의 거울상이다. 한쪽이 선하다면, 한쪽은 악하다. 한쪽이 욕망을 제어당한다면, 한쪽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한다. 거울 이편과 거울 저편의 존재. 그러므로 두 존재가 한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 둘이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상정하려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거울을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관례적인지 아니면 특정의 공연에서만 그러는지는 발레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오데트와 오딜을 한 명의 무용수가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분열, 혹은 일종의 착란 증세는 거의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거울 속 이편의 존재와 저편의 존재를 모두 완벽하게 담아내려고 하는 거울은, 아니 자아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가 왜곡을 피하는 방법은, 그 둘을 느슨하게 병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필요에 따라 그 둘 중의 한 가지를 적당하게 억압하는 것이다. 혹은 강제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다. 영화 속 니나의 경우라면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작동한다기 보다는, 어머니(바바라 허쉬)에 의해 수행된다. 어머니는 니나의 욕망하는 자아를 억압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니나를 어린아이로 묶어두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백조 안에 묶어둔다는 <백조의 호수>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로 니나의 욕망은 제어되어, 니나는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어린아이에 머문다. 니나의 방안에는 인형이 가득하고, 방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니나의 그림 속에 니나 자신은 박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니나가 그림을 찢고, 인형을 내버리는 것으로 그 억압을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감시의 체제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니나에게는 이미 내면화되어 있으며,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것으로 추동된다. 예를 들어, 니나가 자신의 몸(어깨)을 긁어대는 것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체 변형 서사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려는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날개(욕망)가 자라나는 것을 막는 것, 어른이 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의 종착점과도 관련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전작 <더 레슬러>에서도 그러했듯이 나이들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발레단에서 스타는 한 명 뿐이고, 그 스타는 나이가 들고, 아름다움의 강도가 덜해지면, 다른 스타로 대체된다. 발레단의 외부에서 보여지는 공연은 화려하지만, 그 내부에는 위험하고 필사적인 사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한편으로는 백조를 닮았다. 물 위에서는 화려하지만, 물 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야 하는 백조의 숙명.) 이것은 물론 권력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투라고 볼 수도 있다. 발레단의 스타였던, 이제는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병실에 찾아간 니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다"라는 베스의 고백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러므로 니나는 완벽해지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완벽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며, 완벽의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다시는 복제되지 않을, 단 한 번의 최고의 공연. 그러므로 마지막에 니나는 "완벽함을 느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니나가 마지막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가들은 죽어가는 순간에 최고로 아름다운,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는 어떤 '결여'를 그들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점들이 그 이야기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어떤 얼굴이 매혹적이라고 말할 때, 그 얼굴은 완벽한 좌우 대칭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아니, 인간의 얼굴에 완벽한 좌우대칭이 있을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완벽한 좌우대칭에 가까운' 얼굴이다. 도리어 우리는 완벽한 대칭(로봇의 얼굴)에 때로는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완벽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때로 그것에 매혹당하기 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우리가 매혹당하는 것은 도리어 결여의 순간이다.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결여가 내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의 미스테리한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레슬러>에서 랜디 램(미키 루크)이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지고 날아오를 때, 그 결여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혹당한다. 그리고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죽어가면서 공연을 펼칠 때 그 공연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 된다. 더구나 이제 그 공연은 다시는 재생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이상 완벽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덧.
이 영화 <블랙스완>이 꿈꾸는 것은, 영화에서 니나가 꿈꾸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영화로서 완벽해지는 것.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조탁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영화의 관점을 완전히 흩뜨려 놓고, 관객에게 니나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사실 이 영화에서 니나가 실제로 본 것과 그녀의 환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력은 독보적인 것이다. 예전에 <레퀴엠>을 보러갔다가, 영화를 도저히 끝까지 견뎌서 보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못 본 부분이 궁금하여 나머지를 찾아서, 참아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꽤나 무시무시하다. 다만, 나는 이 영화 <블랙스완>을 보다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심리적 타격의 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아니 오히려 이번이 더 강력해진 것 같은데, 나는 견딜만해졌다. 견딜만해졌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졌다는 뜻일게다.



- 2011년 3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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