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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The Book | 2021. 1. 14. 11:42 | Posted by 맥거핀.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 10점
리처드 로이드 패리 지음, 조영 옮김/알마

 

 

일 때문에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본 기사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무심하게 나열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근대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리히터 규모 9.0) 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이어졌고, 한 시간 뒤 최대 높이 40.5m의 초대형 쓰나미가 연안 지역을 덮쳤다. (중략) 사고 당일 쓰나미로 이 지역 어린이 75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74명이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 마을 가마야의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학교의 재학생은 108명. 이 중 78명이 파도에 휩쓸렸고 단 4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중략)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교사 엔도 준지 뿐이다. 그는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파도가 들이닥쳤고, 모든 절차를 따랐지만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진은 오후 2시 46분에 일어났고 학교의 시곗바늘은 3시 37분에 멈췄다. 아이들에게는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200m 남짓 떨어진 대피소까지는 달려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1분 동안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일보 기사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 초등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었나' 중에서>

 

그러나 가끔은 사실의 무심한 나열이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건을 6년에 걸쳐 취재하고 그 내용을 담은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책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정서는 그 어떤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이다. 그는 <더 타임스>의 아시아 담당 특파원으로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이 책을 썼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섰다,라는 것은 내용을 부실하게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아니었고,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주민도 아니었고, 지방 공무원도 아니었고, 부모들을 위로한 승려도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려고 어떻게든 애썼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들려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 자체에서만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왜 교사들은 바로 학교 뒤에 있던 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교통섬으로 가려 했던가, 왜 시간은 지체되었고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가,와 같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빨리 찾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는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가 결국 얼굴을 안 볼 정도로 갈라서는가, 혹은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일본인의 특징이 이 사건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와 같은 사회학자적인 입장에서 흥미를 가질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심령술사를 찾는 부모들과 쓰나미에 휩쓸린 영혼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조금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도 이 책에는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한 술회들은 마음을 짓누른다. (물론 그 부모들을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도 짓눌렀을 것이다. 위에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과 아이들의 시신을 찾던 날을 회상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담은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난 후 '시간이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지진이 일어난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 공백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모들의 기억은 때로 한 가지 사물이나 사실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그날 아침 신고간 신발이나 옷, 아침에 아이들이 던졌던 싱거운 질문.

 

그렇게 연말에서 올해로 넘기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을 느릿느릿 읽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상태에서 또다른 재난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고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있다고만 말해지는 무서운 쓰나미. 그것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 재난을 겪고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매일 진흙을 퍼올리는 일일 것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아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부모들에 비길 수야 없겠지만, 우리도 크건 작건 이 재난들을 무엇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바꾸고 있는가. 내 노력 중의 하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이라고 해두자. 올해까지 읽기는 했지만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지나간 시간이 너무 짧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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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데 멋질 수 있나

The Book | 2019. 9. 10. 16:40 | Posted by 맥거핀.
너무 한낮의 연애 - 10점
김금희 지음/문학동네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 보면 꼭 술이 땡긴다. 와인에 카나페 같은 거는 말고, 술은 무조건 소주로. 안주는...조금 먹기에 번잡스러운 거, 예를 들어 뼈 있는 닭발 같은 것으로 말이다. 뼈 있는 닭발을 먹으려고 손에 비닐장갑을 끼우다보면 잘 들어가지도 안거니와, 이렇게까지 해서 닭이라는 녀석들의 발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먹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솜씨좋게 장갑을 끼우려는 내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들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김금희가 <보통의 시절>에서 그린 한 풍경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사남매는 성탄절에 모였다. "언니네 집도 아니고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도 아니고 맛집 같지도 않"은 구리의 고향삼계탕집에서. 사오십대가 훌쩍 넘은 그들은 이제 거의 망한 삼계탕집에서 남은 마지막 닭과 너무 익어서 군내가 다 나는 열무김치를 먹고, 김대춘을 만나러 갈 참이다. 김대춘이 누구인가. 김대춘은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전소시키고, 형을 살고 나온 노숙자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렸다고 믿는 그 김대춘을 만나러 간다. 그의 집 주소가 번듯한 아파트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비루하다.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는 '잔존의 파토스'라는 고급진 표현을 썼지만, 사실 나는 비루하다, 외에 더 좋은 표현을 찾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그들은 비루하다. 아니, 나는 <보통의 시절>에 등장하는 그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세실리아>에서 연말마다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허무함과 환멸을 견디는 전직 요트부원 대학친구들, <조중균의 세계>에서 출판사에 갓 입사하여 '해란씨'와 알게모르게 경쟁하는 나(영주), 두 개의 라벨을 붙인 고기를 신고하여, 이제 짤릴 위기에 처한 마트 직원의 방문을 받는 <고기>의 그녀.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필용. 아, 이 친구. 인사이동을 통보받고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에 있던 양희를 떠올린 한낮의 필용. 양희의 사랑한다는 말에 불가해한 기쁨을 느끼던 필용. 그러나...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젊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하고 살아. 애가 어떻게 된 게 이천원으로 하루를 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거 다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

양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면 질려갈수록 필용의 말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어떤 한계까지 올라 찰랑찰랑거리면서 파탄의 전조를 만들어내는데도 계속됐다. 필용은 퍼부어댔다. 아주 세상이 끝난 것처럼 퍼부어댔다.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나간 뒤로도 필용은 자기 말에 취해 마구 떠들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양희를 붙들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양희는 보이지 않았다.

- p.31~32.*

 

아이고, 이 친구야. 그러고도 문산까지 다시 양희를 찾아가서 사과도 못한 이 친구야. 그런데 김금희의 소설에는 비루한 그들의 옆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쌓고 그들 나름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비루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이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 <세실리아>의 세실리아, <개를 기다리는 일>의 여학생,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들은 괄호가 쳐져 있어서 비루한 그들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비루한 그들 뿐인가.

 

우리들 대다수가 잘 모르지 않은가. 조중균을, 세실리아를, 여학생을, 양희를,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비루하다는 사실을. 뭐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차분하게 펼쳐지는 김금희가 그려내는 세계를 읽다말고 나는 종종 딴 생각을 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왜 나는 이때 소주가 먹고 싶어지는 것일까. 왜 이처럼 밝은 대낮에 소주를 먹으면서 무언가를 잊고 싶어지는 것일까. 나도 그렇게 <세실리아>의 왕년의 요트부원들처럼 정신이 완전 빙산이 되어, 대륙으로 이동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온갖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결국은 손해로 끝나는 인생.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며 살아왔지만, 그것을 결국 인정해야 하는 때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하면 조금이라도 덜 비루할 수 있을까. 비루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비루한 거니까 인정해 버리면 낫지 않을까,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

 

모르지. 아마도 그래서 그들에게는 조중균이나 세실리아나 양희가 필요했는지도. 비루한 그들이 나오지만 김금희의 소설에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멋진 순간들이 있다. 비루한데 멋질 수 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세실리아>에서 세실리아가 가려다말고 뒤돌아서서 나를 꼭 안아줄 때, <보통의 시절>에서 상준이 잊기는 어떻게 잊느냐고 말할 때, <반월>에서 단짝에게서 온 편지를 뜯어볼 때. 비루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비범한 순간. 어쩌면 비루한 나도,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가 잠깐 딴 생각을 하며 그런 비범한 순간을 만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주를 마시러 가기에는 쨍쨍한 이런 너무 한낮에.

 

 

* 이 장면은 드라마스페셜로 방영했던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도 나오기는 했지만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 장면을 조금 더 몰아부쳤으면 했지만, 그 장면은 소설보다도 훨씬 순화되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생 양희와 대학생 필용이 어울리지 않았다. 현재의 필용 역을 맡은 '고준'은 나쁘지않았던 것 같지만.

 

**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집이 나왔다. 친필싸인본을 준다고 해서 예약구매를 할까 싶기도 하고, 왠지 아, 너무 싸인할 책이 많아, 하고 좌절하는 작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안할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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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됐고, 그냥 맥주나 한 잔.

The Book | 2019. 9. 10. 16:30 | Posted by 맥거핀.
고독한 직업 - 10점
니시카와 미와 지음, 이지수 옮김/마음산책

 

에세이는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을 적당히 드러내거나, 혹은 적당히 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글 속에 자신을 얼마나 드러냈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그 글 속에 적당히 숨겨진 '그 사람'을 그다지 만나보고 싶지 않은(혹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글은 후자인데,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공감한 평은 책 뒤의 배우 문소리의 평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니 얼른 전화해서 밤새 맥주나 마시자고 빨리 나오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사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마도 밤새 맥주나 먹으면서 할 수 있는 시시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오디션을 진행했던 이야기, 어렸을 때 축농증을 앓았던 기억, 새벽 2시에 만난 돈을 빌려달라던 수상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처음 만나던 기억...그저 허름한 맥주집에서 맥주에 닭다리를 곁들이며, 아..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하고 맞장구를 치며 빈 술잔을 채워줄 뿐인 그런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술꾼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맥주집에서 결국 술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질 이야기에 불과할지라도, 누가 이야기하는가에 따라서 맥주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제에 참석하고는 있지만, 해외 영화감독들이 대체로 쉽사리 영어를 구사하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띠며 정기적으로 맥주만 홀짝이는 장식물로 변해서 일본의 이름을 계속 더럽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2004년의 일이다. 보스니아 분쟁의 격렬한 상흔이 남아 있는 수도 사라예보의 영화제에서도 내 추태는 폭발했다. 인구 400만 명도 안되는 그 나라에서는 일본어 통역사를 찾을 수 없었고, 나타난 사람은 고작 일본에서 고작 한 달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그 지역 청년이었다. 일단 함께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에 있던 단어를 보고 "이건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어, 음, ......잎사귀 같은 채소예요!"라고 대답했다. 아주 친절하고 호감가는 청년이었지만 그 채소가 '시금치'라는 사실이 판명된 순간 내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고, 그날 무대에서의 질의응답을 무모하게도 직접 영어로 감행했다. (하략)

-p. 154

 

이 짧은 발췌문에도 잘 드러나지만 니시카와 미와의 글들은 술맛, 아니 글맛이 살아있다. 뭐 그것을 그녀가 자잘한 유머를 적재적소에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혹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디디고 외부에서 잘 알 수 없는 여러 에피소드를 요령껏 솜씨좋게 들려주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하나의 허구로서 잘 축조된 작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그 세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인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안도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저 사람도 그다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28살에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데뷔작으로 일본 국내 영화상의 신인상을 여럿 수상했으며,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아주 긴 변명> 등의 영화로 여러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화감독일지라도 사실 별 것 없다는 것.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타인을 다그치고, 자기관리에 게으른 나와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 말이다. 누구나가 사실은 '어떤 부분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독파는 커녕 대충 훑어보지도 못한, 그저 활자로 채워진 물체(p.139)"라고 자신의 장서를 돌이켜보는 그녀에게 공감했으리라. (나만 그래요? 나만?)

 

그렇게 우리는 안도하며 살지 않던가. 오늘도 실수하여 부장에게 깨진 옆 동료의 에피소드를 맥주를 홀짝이면서, 오징어와 부장을 질겅질겅 같이 곁들여 씹으면서 듣지만, 사실은 그 순간에 몰래 안도하지 않던가. 그것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사실을, 혹은 매사 잘 나가는 듯이 보이는 저 친구도 사실은 별 게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만 그래요? 나만?) 그래서 니시카와 미와의 글이 조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그녀가 그녀의 일상보다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다. 니시카와 미와 본인의 말대로 '가짜 세계'를 만들어내는 영화감독으로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메가폰을 들고 "액션!"을 소리높여 외치는 영화감독의 이미지를 그녀는 기꺼이 배반시키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동물연기자(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쥐)가 연기를 못해 노심초사하고, 대사를 바꿔달라고 말하는 배우 앞에서 어쩌지, 어쩌지를 속으로 반복하는 다심(多心)한 아줌마(라고 이야기해도 왠지 니시카와 미와는 이해해줄 것 같다)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어쩌면 그녀의 영화가 그렇게 다심한 세계를 다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책을 덮고, 2006년작 영화 <유레루>를 봤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궁금해져서 책을 본 적은 있지만, 그 반대로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뒤늦게 찾아본 것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겉멋이 조금 들었기는 해도, <유레루>의 세계야말로 미묘한, 부서질 것 같은 세계, 사실은 너무도 우리 가까이에 있어 쉽게 뭉개버릴 수 있는, 그러니 더 조심히 다뤄야할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카가와 데루유키의 연기는 역시나 인상적이다.    

 

 

뒤늦게 다는 덧.

사실 이 책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때로는 단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기도 하는 법이다. 하기사 단지 포스터에 끌려서 영화를 본 적은 얼마나 많은가. 이 표지는 영화 <유레루>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사실 장면이라고 하기는 그런 게 이 부분은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형제가 저렇게 흔들다리 위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장면은 영화 속에는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저 장면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 컷들을 영화 밖에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나의 프로필 사진이기도 한 저 장면은 영화 <어느 가족>의 스틸컷이기는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 이 장면은 없다. 그러나 나는 스틸컷을 보고 안도했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그 안도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있다. 그것은 감독이 난간을 기대고 웃는 저 소녀의 모습을 끝내 영화 속에서 보여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 우리가 저 소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얻게 될 무언가, 혹은 잃게 될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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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씩

The Book | 2018. 1. 22. 13:36 | Posted by 맥거핀.

쇼코의 미소 - 10점
최은영 지음/문학동네

 

 

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

 

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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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L인가

The Book | 2016. 7. 7. 15:15 | Posted by 맥거핀.

 

L의 운동화 - 10점
김숨 지음/민음사

 

 

왜 L인가.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소개한 소개글을 보면서부터 의문을 가졌다. 왜 '이한열'이 아니라 L일까. 김숨의 소설 <L의 운동화>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우리가 흔히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그러나 또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 될 것이다), 대학생 이한열의 남아 있는 한짝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내용이 중심이 된 이야기이다. 사실 언뜻 보면 이 소설에서 굳이 이한열의 이름을 L이라는 이니셜로 처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고, 소설에서도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배경지식이 거의 없더라도, 소설을 조금 읽다보면 이 소설의 L이 이한열을 지칭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표현으로서 그를 'L'이라고 지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한열이 아니라, 왜 L인가.

 

소설은 크게 세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사건이다. 1987년 6월 9일 시위 현장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연세대생 이한열. 그의 왼발에 있던 운동화는 사라졌고 - 다시 말해서 집회 현장에서 한 여학생이 주인 잃은 운동화를 주워 집회 사회를 맡은 학생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끝내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날들이 흘러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운동화가 이한열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것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 그의 오른발에 있던 운동화만 남았다. 다른 하나는 복원이라는 것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이다.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복원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이한열의 운동화라면 그 운동화를 새것같이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한열의 발에서 벗겨진 그 상태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후 지금까지의 28년의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공산품의 하나인데, 굳이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방법을 써야 이 복원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해야 할 질문은 많고, 답을 찾기까지 고려하여야 하는 사항은 많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할 것 같은데, 여기에 다른 한 가지가 흥미롭게 끼어든다. 연관되는 듯, 혹은 연관되지 않은 듯한 다른 여러 사람의 이야기. 대표적인 것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주체인 '나'와 복원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양화 전문 복원가 '그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치료하는 센터에 다녀오던 날, 버스를 탈 엄두가 안나고, 택시가 잡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까지 데려오던 날의 기억. 두 시간을 꼬박 걸어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아들 운동화의 왼짝과 오른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가, 오른발에 왼짝 운동화가 신겨 있었어요. 운동화 짝이 바뀌어 발 방향이 틀어진 아들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거예요. 그늘 한 점 없는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면서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아들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걸 생각하면...... 세검정 못미처, 아들의 오른발에 신긴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새로 묶어 주면서도 운동화 짝이 바뀐 것은 몰랐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운동화 끈이 또 풀릴까 봐 세게 당겨 묶으면서도요."(p.70~71) 아들은 이제 시설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가끔 꿈을 꾼다.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 꿈에서 그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아들의 왼발에 신기고 있는 운동화가 오른짝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기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자신, 그렇게 쪼개져 있는 상태로.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말고도, 복원실 사람들, 혹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 의뢰하는 기념관장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온,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L의 운동화 기사를 보았다는, 86학번이라는 익명의 사내가 보낸 메일도 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 p.216~217 

 

이 이야기들 속에서 김숨은 묻는다. 그 운동화들,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였던 그 운동화들은 어디로 갔는가, 라고. 단지 L의, 그러니까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M의, J의, L의, K의, 그러니까 수많은 '나'들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그 운동화는 어디로 갔는지 말이다. 물론 김숨은 이때 단지 운동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6학번인 이 익명의 사내가, 하루종일 수없이 누군가를, 때로 자신을 혐오하다가도 체념하게 만드는, 각종 지긋지긋한 일들에 시달렸을 이 사내가 겨우 한숨 돌리는 마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펴들고 그 안에서 우연히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고, 주저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 긴 메일을 쓰게 만들었던, 그가 가졌던 궁극적인 의문이 이 메일에는 들어있다. 그 운동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있었던 그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지금의 M도, J도, L도, K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그런 의문.

 

다시 말해서 김숨은, 그녀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이야기들, 그러나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단지 끄집어냈을 뿐인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단지 역사적인 이야기로만 읽히기를 바랬던 것 같지는 않다. 즉 김숨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단지 역사적 유품, 혹은 기념물로만 보기를 원치 않아 보인다. 복원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면서, 단지 어떤 역사적인 가치로 그것을 박제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개인들이 그 '무엇인가'를 각자 끄집어내어 복원하기기를 이 소설은 바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 부서진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은 대체로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복원은 파괴 혹은 손상과 거의 동일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손상시키고 파괴한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 속 '나'가 소설의 중반이 넘도록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를 주저하는 것, 그리고 그의 운동화에서 유기물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는 것은 아마도 그것에 맞닿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복원을 결국 회피할 수 없다.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인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이한열의 운동화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명의 L의 운동화이기도 했고, M이나 J, 혹은 K의 운동화,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이제 부서진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복원이 필요한 그것은 무엇이며, 복원이 된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한 형태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L의 운동화가 복원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그것을 본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꿈을 꾼다고.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리고 그런 자신이 쪼개져 있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조금 형태가 달라져 있다. "셋이요.....아들의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를 신기는 나와......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그리고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그렇게 셋이요."(p.264)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나'들이 있지 않을까. 잘못된 무엇인가를 택하는, 혹은 잘못된 무엇인가를 행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나. 여기에 이제 또다른 '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 그 '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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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

The Book | 2016. 6. 14. 17:36 | Posted by 맥거핀.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 10점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렸다. 단지 이 소설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시카리오>를 보면 언뜻 영화 본편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본 줄거리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족이 영화의 본편과 상관이 있음은 물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아마도 예전의 리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격 소리에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약으로 인한) 만연한 범죄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어쩌면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는 거의 악마의 도시처럼 묘사된다. 거리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들리며, 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경찰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며, 그 모든 것에 무감해진 것일까. 그런데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표정 이면에 깔린 공포, 그 공포에 담긴 살고싶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은 척 하는 법,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고난의 10년'의 시간에서.

 

특별한 시대였어요. 그렇잖아요? 폭탄이 누구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면 다들 걱정을 하고. 자신이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디에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공중전화가 없으면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집을 알아내서 그 집 문을 두드려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에 매달리고,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매달리면서 살아야 했죠. 우리는 각자 집안에서 지냈죠. 기억해요? 공공장소는 피했어요. 친구의 집, 친구의 친구의 집,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집, 어떤 집이든 공공장소보다는 선호했죠.

- p.313~314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도망친 하마, 그러니까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만든, 이제는 쇠락한 오래된 동물원에서 도망쳤다가 죽은 하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한다. 그가 그것에서 떠올린, 그에게 고통을 준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이 서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주인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오래 전 일어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이제 그것을 되돌아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제 그 사건이 주는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에서 벗어난 이후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자신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로 읽으면 아름답고 좋으련만, 단지 그렇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이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내가 떠난 텅 비어 있는 집만 남아있다. 그것에서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안한 마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카르도 라베르데나 그의 부인 엘레나 프리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혹은 그들이 무엇을 극복했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거나, 이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 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런 일들이 발생해서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편한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결과들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손해를 벌충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연계 고리가 우리를 현재 상태의 우리로 변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면 왠지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 p.290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이 소설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이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장면인데, - 사실 이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장면도 물론 영화로 만든다면 빛을 발할 장면이리라. - 엘레나 프리츠가 장마를 맞은 집에서 갑자기 찾아온 마이크 바비에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가득한 불안감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평화를 가장하는 엘레나와 마이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총성. 이 장면은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정확히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삶은 그렇게 가득한 불안감 위에 띄워진 가장된 행복과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에서 불안감을 감지하지만, 그것에서 사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리카르도나 마이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 연계 고리 안에서 결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에게 놓여진 그 녹음이 상징하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엘레나가 그 소음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의 한 예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했던 행위가 보여주지 않을까. 즉 그것은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비록 전직조종사라도) 그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서 들으려 애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중 화자 '나'(얌마라)도 마찬가지이다. 얌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휘말렸고, 그것을 단지 불운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원했지만), 그는 사건에 숨겨진 부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것이 아마 이 소설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삶의 많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단지 그 통제력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 소설의 이야기는 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얌마라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리카르도 라베르데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이며, 마야가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기원에 있는 것, 즉 리카르도의 할아버지 훌리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부터이다.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연계 고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 그 고리의 끝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연계 고리의 반대편 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연계 고리의 다른 반대편 끝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연계 고리들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삶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공포와 그 공포를 이겨내려는 미약한 몸짓이 지닌 숭고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참 좋은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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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구멍, 홀, 홀, 홀, 홀

The Book | 2016. 5. 27. 11:53 | Posted by 맥거핀.
- 10점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홀. '짝이 없이 혼자뿐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오기는 홀로 살아남았다. 아내와 함께 떠나던 여행길. "노면은 부드러웠고 제동 거리는 짧았고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속절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p.31)" 옆자리에 탔던 아내는 죽고, 오기는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잃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 뿐이다. 오기의 엄마는 오기가 어린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선적이었던 데다가, 오기가 제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오기의 아버지 역시 오기의 결혼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아내는 죽었고, 그의 곁에서 불구의 몸이 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장모 뿐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홀'로 남았다는 것은 어떤 눈에 보이는 관계의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오기는 고립되어 있다. 편혜영은 이 소설을 거의 오기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오기가 사고 후 말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설정을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가중시키는데, 오기는 이 소설을 통해 장모를 비롯한 간병인, 물리치료사, 친구 등등 어느 누구와도 거의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목소리를 잃었다'는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소설의 중후반부 오기가 필담으로라도 소통이 가능해진 순간에서도 여전히 어떠한 대화나 소통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어긋나 있고, 그 중 어느 누구도 오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게 단지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홀. hole. 구멍.

그들은 오래전부터 대화하지 못했다. 오기와 아내. 교수로서 학교 일로 바빴던 오기는 아내가 가진 공허감이나 부재감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오기는 학교와 자신의 친구들과의 관계, 그리고 허위에 갇힌 자신만의 세계에, 아내는 글을 쓰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원을 가꾸는 또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구멍에 들어가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을 대화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목적지가 30킬로미터 정도 남았을 무렵 아내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쓰고 있던 것을 최근에 완성했다고 했다. 아내가 이런 화제로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 축하해. 뭘 썼는데?"

운전에 주의하며 오기가 물었다. 도로에는 덩치 큰 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좀 특별한 얘기야.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거든."

"지난번에 쓰고 있다던 그 고발문?"

오기가 아내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도 할 수 있어."

아내가 갑자기 웃었다. 오기는 운전에 집중했다. 아내의 말에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오기를 화나게 하는 게 아내의 목적이라면 오기는 오로지 여행지에 닿고 싶었다.

- p.181~182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모와의 관계는 어떤가. 오기의 기억 속에서 장모는 속을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사람이다. 편혜영은 여기에 흥미로운 설정을 더하는데, 장모가 사실은 일본인(혼혈)이라는 부분이다. 오기가 처음 장모의 집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가 이를 잘 말해주는데, 오기는 집안에 유골함을 두는 일본인의 습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자기로 착각한다. 오기에게 장모는 결코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어두침침한 구멍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 장모는 아내가 죽은 후 엉망이 된 정원에 다시 구멍을 판다. 아내처럼. 아니, 아내가 팠던 구멍들보다 더 깊게.

 

홀+er. 구멍을 파는 이들. holer 혹은 horror. 호러.

(아니면 '홀'이라고 발음하며 거울을 한 번 쳐다보라. 영화 <스크림>에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지 않은가?)

장모는 다시 구멍을 파고 있다. 왜 장모는 구멍을 파는가. 나무를 심기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 묻는다면 무엇을 혹은 누구를 묻는다는 말인가. 편혜영의 <홀>은 후반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점점 호러 무비가 된다. 오기는 집안에 갇혔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탈출은 쉽지 않다. 도대체 장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내, 그러니까 자신의 딸이 죽은 것에 오기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오기의 피를 말려 죽이려는 것일까. (이 문장은 전적으로 <곡성>의 영향이다.) 혹은 장모가 오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은 나이가 들어 그 모든 것이 벅차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장모가 아내가 쓴 '고발문'을 읽었기 때문인걸까. 오기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고립된 채로 갇혀 있다. 좁게는 불구라는 육체의 감옥에, 넓게는 오기가 싫어하던 덩굴로 둘러쳐진 집에. 방에서 대문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내가 지배했던, 이제 장모가 지배하는 넓은 정원을 거쳐야 하며, 이제 게다가 그 정원에는 곳곳에 장모가 파놓은 넓은 구멍들이 있다.

 

홀. whole. 전체의, 모든, 온전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오기의 오해 혹은 망상이 아닐까. 과연 장모는 그를 고의로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다스케테구다사이. 장모가 짧게 중얼거렸던 그 말. 살려주세요 혹은 도와주세요. 어쩌면 장모도 너무나 많은 삶의 짐 속에서 이제 오기라는 짐까지 떠맡고,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런 질문. 과연 소설을 읽는 우리는 오기의 이 모든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더해지는 조금 무서운 질문. 과연 아내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일까. 이 소설은 어쩌면 오기의 이름 그대로, 誤記 즉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편혜영의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을 읽는 우리는 철저히 오기의 시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홀(whole), 그러니까 전체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물론 아마도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과 유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전체상을 들여다보려고 아무리 애쓴다한들, 결코 그것을 완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오기가 전공하는 지도와 닮았다. 지도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어떤 지도도 결국 세계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지도는 오로지 세계의 불완전한 유사물일 뿐이었다. 

 

지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중략) 정확히 알 수 없고 하나로 분명하게 해석될 수 없으며 온갖 정치적 의도와 편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세계라면 지금 이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지도는 실패를 통해 나아졌다. 그 점에서는 삶보다 훨씬 나았다. 삶은 실패가 쌓일 뿐, 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 p.75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홀,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가까운 누군가라도 해독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어나갈 수 있는 지도. 그러나 그 지도는 어떤 지도라도 결코 완전한 전체상을 그려내지 못한다. 모든 지도는 왜곡된 지도이다. 각자의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왜곡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어떤 삶의 전체상에 이르지 못한다.

 

적어도 편혜영이 보는 세계는 그런 것이 더욱 심화된 세계인 것 같다. <홀>의 오기와 아내는 편혜영에게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을 안겼던 그녀의 단편 <몬순>에 등장했던 부부의 (조금 더 절망에 가까워진) 다른 버전인 것 같다. <몬순>에서 편혜영은 관계의 단절, 소통 불가능한 삶에 빠져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렸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떤 여지를 남겼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편이 아내가 있는 아파트에 들어갈까 망설이는 동안 아파트의 불은 켜지고, 다시 불이 꺼지고 켜졌다. 그러나 <홀>의 오기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는 이미 죽었고, 오기는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있다. 그리고 오기는 그제서야 운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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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신'이 되어라

The Book | 2016. 5. 10. 02:21 | Posted by 맥거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 6점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문학수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소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이하 <떠오르는...>)은 확실히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 소설들에는 어떤 '장치'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이야기 내용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소설 내에 긴장감은 그 외에 다른 것에서 더 강하게 배어나온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호명되는 '당신'이라는 존재인데,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지난 삶을 늘어놓는 화자 파키스탄인 '찬게즈'가 아니라, 이 반대편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자 미국인 '당신'이다.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소설은 점점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 긴장감 쪽에 서서히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이 듣는 '당신' 미국인은 누구이며, 여기에 왜 왔으며, 왜 '찬게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이 소설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야 책을 읽는 '우리들'은 불현듯 깨닫게 된다. 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찬게즈'가 아니라, 이 소설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미국인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신 하미드는 이 긴장감을 주는 방식을 이번 소설에서도 써먹고 싶었던 것 같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그것이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여 그와 화자 사이에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비틀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일종의 자기계발서 같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파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한 인물의 일생이지만, 그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동력을 그 이야기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자기계발서라는 외부의 장치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소설은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형식적으로는 퀴즈쇼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자말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사실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말의 퀴즈쇼가 아니라, 그 퀴즈쇼를 통해 자말이라는 인물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떠오르는...>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계발서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한 남자의 삶의 역정이다. 사실 그것을 소설에서는 간단하게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의 '당신'은 결코 부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더럽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제목에 원래 쓰인 단어는 filthy인데, 이것을 '더럽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은 다른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럽다'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을 '대박 부자'라고 만약에 번역했다면,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어떻게 보면 이것이 도리어 풍자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사견으로는 여기에서 '더럽게'라는 것은 '쟤 드럽게(?) 돈 많어." 할 때의 '더럽게'에 조금은 더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주인공 '당신'은 결코 그 '드럽게 돈 많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각 장에 붙은 소제목들에서도 그런 면이 있는데, 소설을 처음 펼쳐들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소제목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정말 싸구려 자기계발서에 붙을 법한 그 소제목들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제목들은 그렇게 붙어 있지만, 각 소제목들에서 그 주인공 '당신'은 그 소제목들을 결코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장에서 주인공은 사실 (짝)사랑에 빠지며,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라는 장에 등장하는 것은 그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며,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장에서는 부채로 인해 거의 끝장이 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도 어느 정도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쓴 리뷰에서 그 영화에서 퀴즈쇼라는 장치를 빼면 사실 주인공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는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역시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외피를 벗겨놓고 보면 거의 쌍팔년도 스토리에 가깝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단지 자본주의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파키스탄은 과거의 우리, 그러니까 쌍팔년도 혹은 그 이전의 우리가 겪었던 발전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로 보자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다른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흔히 '쌍팔년도'라고 할 때에는 그런 뉘앙스가 거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이 책의 이야기가 어딘지모르게 익숙하다. 실제로 그런 세태를 겪어왔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 (경험으로, 혹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익숙해져 있으며,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사실은 실패 스토리)는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표현 말이다. 왜 작가는 굳이 여기에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자리에 왜 소설을 읽는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도 당신을 계속 호명하는 소설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소설에서의 '당신'은 이 소설의 '당신'과는 다르다. 그 소설의 시작은 '당신'이 미국인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에 이 당신이 누구인지 혼동하지 않도록 장치의 특성을 설명해주면서 장치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 장치를 단지 장치로서 끝내지 않고 멋지게 역이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당신'은 자기계발서의 당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이 자기계발서의 '당신'은 바로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다. 다시 말해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의 '당신'은 사실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군가, 어떤 이미지가 규정되어 있는(어떤 '전체상으로의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테크닉에 더 가까웠다면, 이 <떠오르는...>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독자는 그 '당신'의 자리에 이미지로 규정된 누군가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누군가, 그러니까 바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냉소적이면서도, 결코 냉소적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내가 그런 비슷한 발전 단계를 거쳐온, 아니 사실은 그런 발전 단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헬조선에 살고 있는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경우를 상정해보자. 예를 들어 사실 이 소설이 주 타겟으로 삼았을 미국이나 유럽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재미있는 풍자 쯤으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자는 사실 그 풍자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풍자의 현실이 현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 풍자에 사실 온전하게 웃을 수 있을까. 웃을 수 있다해도 그것은 웃프다. 

 

아니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모신 하미드가 이 소설을 단지 서구의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썼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와 동시에 모신 하미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중간자로서 미국인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내내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계속 듣는 '당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청자 '당신'은 없다. 대신에 이 소설은 당신을 지우고, 이야기하는 '나'의 위치에 당신이 서볼 것을 권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신 하미드는 이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때? 우스꽝스럽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바로 이 위치에 선다면 당신이라고 크게 다를 수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삶이고, 그냥 우리는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거야.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부끄럽지 않아, 당신이 비웃거나 무시할 권리는 더 없고 말이야. 뭐 그런 거라고 할까.

 

다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모신 하미드에게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그렇게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야기가 미국에서 태어난 후, 파키스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계속 이 화자와 작가를 겹쳐놓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남자는 모신 하미드와는 조금은 더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누군가는 모신 하미드가 만들어낸 누군가는 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모신 하미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신 하미드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 자꾸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당신'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자신은 그렇게 된 적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되어보라고 권하는 이것은 온당한가?

 

아..자기계발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라고요? 뭐 그렇다면 할 말은 더 없지요. 단지 자기계발서를 덮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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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센티미터 두께의 틈

The Book | 2016. 5. 5. 01:18 | Posted by 맥거핀.
지극히 내성적인 - 8점
최정화 지음/창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모두 불안한 인물들이다, 라고 첫 문장을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이 불안하지 않은 인물들이 있던가. '불안'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마 '안정' 또는 '균형'과 같은 말일 텐데,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안정적인 말과 행동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여태껏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인물들을 그려왔다.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위태위태하게 어디론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은 반대로 최정화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흔하디흔한 인물을 다시 반복하며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 어떤 인물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안정을 누구보다도 지향한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불안의 대표적인 증세인 강박증을 가진 인물들이 타인이 보기에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들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어떠한 강박행동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가 등장하는데, 단편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 등장하는 그녀는 이러한 증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강박은 계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데, 이 강박이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자기 몸에서 부족한 성분을 찾아내고', 그녀의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목 디스크, 즉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니면 '구두'나 '팜비치'에 등장하는 인물들. 두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들은 극도의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대체하고 있는, 혹은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p.26 '구두')", "그런데 아내는 파라솔 아래서 웬 남자와 마치 그의 마누라라도 되어 있는 듯이 마주 앉아 있었다.(p.49 '팜비치')". 자신이 위치하고 있던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존재. 그것이 내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면, 이 애써 겨우 균형을 잡아 놓은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종의 불안감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렇게 최정화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작가의 이름이 正和라서 그럴지도..라는 쓸데없는 드립을.) 위에 든 소설들 외에도 '틀니'의 아내는 다시 남편이 틀니를 끼고, 일상의 균형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홍로'의 그는 아내가 아닌 아내와 이상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여자(미옥)는 작가와의 어떤 균형잡힌 관계(작가가 소설을 보여주고, 그녀가 거기에 평을 하는)를 유지하고 싶어하며, '타투'의 아버지는 지나가 가진 비밀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대머리'의 나 역시도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랬던 그들이 어떤 불균형을 맞닥뜨리고 불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최정화의 소설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그들이 그렇게도 유지하려고 했던,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 했던 세계. 그 세계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강박으로 유지되는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세계를 빼고라도 그들이 유지하려 애썼던 그 세계들은 사실 이미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리고 있다. '팜비치'의 아내와 남편은 각자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의 일면만을 각자 보고 있으며, '틀니'의 세계는 아내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세계였고, '홍로'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기이한 결혼생활이다. '타투'에서 아버지와 딸은 흔히 말하는 단절의 단계에 이미 이르렀고, '대머리'와 '파란 책'의 공간 역시 허위로 유지되는 공간들이다. 아니 굳이 여러 예를 들지 않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아서 불안함을 느끼는 세계, 그 세계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균형을 해제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강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나오기 위해서. 소설에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던 '지극히 내성적인' 그들이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서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를 불러 틀니를 끼우는 걸 빼먹었다고 알려줬어야 했다. (p.95 '틀니')"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놀란 것 같았다. (p.113 '홍로')" "선생님이 새로 쓴 원고라며 프린트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p.143,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나는 그만 사촌에게 '대머리'라고 부르고 말았다. (p.206 '대머리')" 

 

그녀가 보기에 문제는 책의 두께였다. 그녀는 책들이 너무 얇다고 느꼈다. 집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의 책 밖에 없었다. 새 책장 안에는 적어도 5센티미터 정도는 되는 묵직한 책이 놓여야 마땅했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운 소품을 들일 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점에 갔을 때 그녀가 좀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나 저자, 출판사의 이름 대신 그녀는 책의 두께를 알고 있었다. 오십대의 깡마른 서점 주인이 안경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슨 책을 찾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계산대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들기며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중략)

"아까 말씀하셨던 책이 이거 맞나요?"

"네, 파란색에 5센티미터. 맞잖아요."

"진작에 하이데거라고 했으면 대번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하, 뭐라고요?"

"하이데거. 이 책을 쓴 철학자요. 포장해드릴까?"

- p.213 '파란 책' 

 

그렇게 그들의 세계에 틈이 열린다.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틈이.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주지만, 아주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 내재된 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은 틈새로 열려진 이 불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어떤 양상이자 가능성이지, 당위나 윤리가 전제된 세계가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정화의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말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읽었지만, 그 읽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들이 등장인물 어느 한쪽의 입장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소설 전체가 어쩌면 '내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독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에는 부러 이야기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야기들이 더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따라서 마치 장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다. 예를 들어, '대머리'에서 사촌의 손에 들린 주사기는 무엇일까. 혹은 '집이 넒어지고 있어'에서 나는 과연 살인자일까, 살인자라면 어떤 살인인가.)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뭐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월요일의 출근을 믹아주지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일을 해주지도, 부모나 남편, 혹은 아내, 상사의 잔소리나 질책을 대신 들어주지도, 카드비나 은행 대출이자를 대신 내주거나, 전세금이 더 오르지 않게 해주지도, 내가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해결되도록 해주지도 않는다. 소설이 '실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든 그 모든 것들을 피해 오로지 이야기의 앞뒤를 확장시키며 상상하는 것 뿐이다. 즉 작가가 던진 아주 작은 5센티미터의 틈에 손가락을 넣어 그 안을 최대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우리에게도 한가지 틈이 생긴다. 아니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 삶에도 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틈은 지금으로서는 5센티미터,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 안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파란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소설이 가진 가능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떤 가능성? 이런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해서 나는 신기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집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그 집도 넓어지고 있었다는 걸. 집이 넓어지는 것, 그건 내 집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이제는 마음 놓고 행복해져도 될 것 같았다.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p.256 '집이 넓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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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감과 부채감

The Book | 2016. 4. 18. 01:32 | Posted by 맥거핀.
천국의 문 - 8점
김경욱 외 지음/문학사상사

 

 

죽음들이 떠돈다. 일단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죽음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이고,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미래에 예정된 죽음을 보는 남자가 나오며,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여행기(이것을 '여행기'라고 해도 될까?)이다. 그 뿐인가. 정찬의 <등불>은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치숙痴叔은 쓰는 인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 이 "...이었다"라는 과거형. 그러니까 소설은 이제 그런 인간'이었던' 치숙의 부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소설들이 어떤 죽음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들이 떠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야기되고 있는 죽음들이 아니라, 이야기되지 않고 이미 부재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 내 머리 속이 만들어낸 이상한 상상, 그러니까 그것은 아마도 오독(誤讀)일텐데, 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 오독의 질문들 몇 가지를 해보자.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아마 다음의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 남자, 즉 여자가 병원에서 만난 사내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버지를 여자에게서 데려간 사내, 여자에게 위안을 주고, 영혼과 천국의 문을 이야기하는 사내, 그는 어쩌면 여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 다시 말해서 여자가 만들어낸 어떤 유령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곧이어 등장하는 다른 유령, 김이설의 <빈집>에 등장하는 수정. 소설 속에서 수정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완전한 새 아파트에 방해되지 않는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 소설은 다음의 문장들로 끝난다. "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수정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소파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방으로 들어갔다. (p.133)"

 

유령들의 향연은 계속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유령들의 여행기이다. 유럽을 여행하던 부부는 한 식당에서 화성에 당도한 우주선에 대한 기사를 본다. 이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미국이 간 거지. 아무도 없어, 저기엔. 무인無人이었으니까. 저기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어. (p.295)" 이 비유는 중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여행을 간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간 이들, 그들이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보다 복잡하다. 나의 아이를 구해 준, 미래를 보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는 정말 아직도 건너편 빌라 202호 살짝 열어진 창문이 있는 방에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자꾸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건너편 빌라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며 "길을 건너 계단을 오르고, 초인종을 누른 다음 기다리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할 수가 없"는가. 어쩌면 그가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라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부채감에 못이기는 동화작가 '나'가 만들어낸 환상의 유령 이야기는 아닐까. 아니, 조금 더 오독의 늪으로 빠져 보자면, 이 '동화작가 나'는 존재하고 있는 인물일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이(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즉 유령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유령들, 아니 갈 곳을 잃은 영혼들은 떠돈다. 왜 이 소설들에서는 이렇게도 영혼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상문학상은 "당해년도 1월부터 12월 말 사이에 발표된 작품을 모두 심사와 수상의 대상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작품집에 실린 2015년에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소설들이 쓰여지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고(아니 사건이라고 하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은 위의 첫 문장에서 보여지듯이 세월호 사건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도 이런 언급이 등장한다.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고만 말해두죠. 이런 나라에서 계속 터질 법한,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하지만 정말로 또 터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이, 그래요, 계속 터지는 겁니다. 지금부터 몇십 년 후에도요.(p.250)" 그리고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부부는 아이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잃는다.) 그러니 그 수많은 영혼들이 계속 이 소설들에는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혹은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갈 곳이 없는 영혼이 된 채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사건을 같이 지켜본 많은 이들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절규를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자신 한구석에 숨어 있는 영혼의 존재도 살짝 들여다보지 않았겠는가.

 

아니, 나는 어떤 애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이 소설들이 단지 상처의 확인과 애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여자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는 오래전 시구를 떠올린 다음, 경찰서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숙의 모습을 보여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는 기억으로 겨우 유지되는 선한 마음의 부채감, 그 위태로움을 느끼는 바보스러운 기우들을 애써 믿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도 그 마지막에는 남자의 외침이 있다.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로스트......즉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도 모종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의 마지막도 있다.

 

달빛이 한층 밝아지고 있었다. 달 주위에 엷게 끼어 있던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 팽목항으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p.283)

 

빛처럼 흰 손을 가진 이가 이끄는 길. 그 길은 그녀를 만나는 길이면서, 동시에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죽음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애도하며, 이제부터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이 결말은 전혀 반대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가 아마도 이 소설의 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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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는 조금 되었는데, 어제 세월호 사건을 다룬 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후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난 후 TV를 끄고 조금은 멍한 상태에서 다시 읽었다. 그렇게 읽다보니 이상하게도 소설 속의 거의 모든 문장들이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의미심장해졌다. (김이설의 <빈집>을 읽으며, 부모들이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아이들이 없는 그 빈방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 다큐에서 무엇보다도 계속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영상들이다.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메시지가 사건이 감추고 있는 것들에 조금씩 다가가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부채감, 그러니까 윤이형 식대로 표현하자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슬포슬하고 따스한 이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눈물겹고, 우리를 제외한 세상 전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부채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영상들은 그 부채감을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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