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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쾌락과 (사치의) 부엌일기

The Book | 2009. 12. 20. 22:29 | Posted by 맥거핀.
이기적 식탁
카테고리 요리
지은이 이주희 (디자인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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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파스타계의 디저트, 카르보나라 레시피


01. 끓는 물에 (늘 말하듯)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면을 삶기 시작한다. 탈리아텔레의 경우 대강 6분 정도라고 패키지에 써 있으니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서부터 소스를 준비하면 대강 시간이 맞는다. (중략)
03. 생크림과 달걀노른자 하나(달걀노른자와 무염 버터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 파르미자노 간 것, 그리고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잘 섞는다.
04. 판체타나 아주 스모키한 베이컨을 준비한다. 뭐 힘들면 그냥 마켓에서 파는 베이컨도 어쩔 수는 없지만 얇게 슬라이스한 스모키한 베이컨이 좋다. (나는 이태원의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쓴다.)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두른 팬에 베이컨을 2-3줄 익힌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익을 때쯤 면이 완성될 거다. (후략) (205-207 p)



추측하건대, 요리라는 것은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어느 정도의) 사치(돈)의 산물이다. 나같이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위의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요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면, 아주 실패할 확률이 높다. 먼저 어찌어찌해서 탈리아텔레라는 넙적한 모양의 파스타를 구해서 겨우 1번 단계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3번 단계에 이르면 역시 주춤해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무염 버터가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저자도 안 넣는다고 했으니,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근데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라니. 통 후추를 어떻게 갈아 넣지요? (지식인 검색 후) 아..갈아 넣는 도구가 있다구요? 페퍼밀이라나, 페퍼그라인더라나..뭐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X마켓에서 팔기는 파는구나. 근데, 이걸 오늘 사면 어차피 오늘 배송이 안되니 오늘은 못 해먹잖아. 마트에 나가면 팔까. 큰 마트로 나가자면 꽤 시간이 걸릴텐데..아냐, 그래도 배송이 걸리더라도 X마켓으로 사면 카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아니, 그래도 어차피 통 후추를 사야하잖아. 그럼 마트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이르는 지점은 한 곳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자괴감. 그냥 가까운 스파게티점에 들러서 까르보나라 한 그릇 주문해서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책에 가끔 보면 나오는 구절들과 우리집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를 이용하여..' '야채칸을 열어서 남아 있는 아무 야채나 넣어도 맛있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면 남아 굴러다니는 야채라고는 매우 오래되어 끝이 누렇게 변색된 양파 반 쪼가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걸 넣어도 맛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이런 집에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 같은 것이 있을 턱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충분한 돈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요리가 맛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레시피를 따라하는 도중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사소한 부분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다 만든 요리를 개수대에 부어버려야 하는 그런 댓가 말이다. 

징징 대는 것은 그만하고, 몇 가지 긍정적인 시선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아마도 3번에 이르러, 내가 귀찮음을 무릎쓰고, 대형마트에 나가 통 후추와 페퍼밀을 사왔다면(그리고 기꺼이 이태원에 들러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사왔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레시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 편이므로, 이번 요리에 성공해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어 치웠을 것이고, 우리집 부엌에는 페퍼밀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남는 판체타는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번의' 요리에서도 페퍼밀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집 냉장고 안에는 드디어 '남는 판체타'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냉장고의 남는 판체타..'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승자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냉장고로 달려가 '남는 판체타'를 꺼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피시 파피요트나 누텔라 너츠 토스트나 이태리식 오믈렛 프리타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떡볶이나 오뎅국이 나오기도 하고, 달걀비빔라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도대체 요리책들이란, 당최 해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만 소개하고 있군'이라는 불평은 때때로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재료들이 가끔 나와서 그렇지, 레시피는 꽤나 세심한 편이라, 재료들과 기구들만 잘 구비해 놓는다면, 살짝 복잡해보이는 요리라고 해먹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침 10시, 오후 3시, 오후 8시, 새벽 1시로 나누어, 그 시간에 해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말랑말랑한' 레시피는 사양하고 싶다. 즉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나같은 류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정도 소금을 넣으란 말이야라고 불평부터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저 '물 몇 ml에 소금을 2티스푼을 넣으세요'라고 하는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몇 가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를만한 재료들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판체타'가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주어도 좋지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아...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요?)  
................................

사실 이 책의 매력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각 요리의 레시피를 소개하기 전에 각 요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일종의 에세이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요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스런 어조로 전달해주고 있다. 글쎄..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친구를 가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고양이를 기르는, 그리고 가끔 낮술도 즐기는 이 저자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부분도 있고, 내가 아는 몇몇 여인네들의 삶과는 조금은 괴리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던지는 그녀의 몇몇 이야기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주로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잠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상대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대는 나같은 인간들은 이 그녀의 에세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읽을 것. 그 뒤의 소개된 요리들의 레시피는 부디 그냥 넘겨버릴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옆에 첨부된 사진들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다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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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The Book | 2009. 11. 14. 22:42 | Posted by 맥거핀.

문명전쟁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로렌스 라이트 (다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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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9․11이 있은 지,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9․11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은 9․11이후 테러를 지원한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라크, 아프간 등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고, 한편으로 미국 내에서는 이러한 보복 공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9․11 사건의 희생자의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꼽자면 9․11이 거의 그 첫손에 꼽힐 것이다. 따라서 이 9․11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2000년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단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9․11은 안개에 싸여 있기도 하다. 사건의 자세한 배후 및 내막은 물론이거니와, 9․11이 미국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한 때 사망설이 제기되었던, 배후의 중심축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하다. 여기에 이 책 <문명전쟁>은 밝고도,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세심한 불빛을 제공한다. 이 책은 5년 동안에 걸친, 11개국 6백 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알카에다의 발족 이전부터 9․11에 이르는 성실하고도 자세한 길을 추적한다. 그 길에서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길의 전체 여정을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옆으로 살짝 눈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의 중간에 머물러 발 밑에 차이는 돌부리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면서 길의 끝까지 독자를 성실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그 길은 명확한 단선주로가 아니다. 그 길은 복잡하고 군데군데 깊이 파인 러프가 있는 으슥하고 여러 갈래가 나뉘어진 오래된 길이다.

그 하나의 길은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그와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한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알 지하드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길이다.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사우디에서 성장한 빈 라덴과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운 자와히리를 그 출생부터 조금씩 추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이들에게 어떤 영감을 준 사이드 쿠투브가 있다. 저자는 이들의 출생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경로,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여러 일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게 조명해 보인다. 이집트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로서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자와히리가 왜 알 지하드를 조직하고 거대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우디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사우디 왕가와도 깊숙한 관계를 맺고, 크게 사업을 일으킨 명망있는 사업가 빈 라덴은 왜 알 카에다를 만들고 동굴 속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가.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문명전쟁'이다. 즉 이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탐욕적인 향락적인 문화에서 금욕적이고 신실한 이슬람 문화를 지켜내는 것을 어떤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의 뿌리는 위에서 말했던, 사이드 쿠투브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이드 쿠투브의 저작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들이 사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란의 말씀을 그대로 체화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건설이었고,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미국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은 또한 이슬람 세력에게 눈의 가시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보면, 이들의 적은 꼭 미국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산주의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고, 그외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단이거나 이슬람의 하나의 분파인 시아파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다.

신병은 끝없는 육체적 훈련을 견뎌내야 했을 뿐 아니라 알 카에다의 세계관도 주입 받았다. 그들의 강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조직의 유토피아적 목표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1. 전 세계에 신의 지배를 확립한다.
2. 신을 위해 순교한다.
3. 모든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정화한다.

이 세 가지 목표에서 알 카에다의 매력과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알 카에다는 정치의 유일한 목적이 종교를 정화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신의 지배가 어떠한 모습일지 의문을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인의 목표인 순교는 여전히 많은 신병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p. 446-447)



그러나 저자가 이들을 어떤 악마로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또한 한편으로 자와히리와 빈 라덴의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이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또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지 자와히리나 빈 라덴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 주위에서 같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빈 라덴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빈 라덴을 신앙심이 깊고 비타협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파티마가 카세트테이프를 빌리려고 할 때였다.
"네 아빠가 못 들으시게 해야 한다."
자이나브는 빌려주는 조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빤 그런 거 던져 버릴 사람은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엄격하지 않으시거든. 남자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실 뿐이야."
"노래도 들으신단 말이야?"
자이나브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전혀 신경쓰지 않으셔."
말을 좋아한 빈 라덴은 움 칼레드의 집에 말에 관한 책들로 서재를 만들고, 말 사진이 있는 책이나 달력도 걸어두었다. 자이나브는 빈 라덴이 아주 마음이 넓다고 결론지었다. (p. 372-373)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길은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반대편에 있는, 즉 미국에서 이들을 잡기 위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FBI나 CIA, NSA(미국국가안전보장국)의 여러 인물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의 중심에 있었던 FBI의 존 오닐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미국은 사실 초창기에는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이슬람 세력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테러들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탐색은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높은 강도로 행해지지는 않은 듯 하다. 실제로 9.11 직전에도 이들의 이러한 테러를 암시하는 몇몇 징후들이 감지되었고, 9.11의 실행에 직접적으로 간여된 몇몇 인물들이 미국에 입국한 정보도 수집되었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때로는 묵살되고, 때로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에는 한편으로 CIA와 FBI의 오랜 반목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때로는 정보를 교묘히 감추어 버렸고, 그 때마다 테러 세력들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물론 큰 사건에는 공조하기는 했으나, 때로는 거의 공조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중심에는 FBI에서 이들을 꾸준히 추적한 수사관 존 오닐이 있다. 그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조직들을 이끌어 나가며, 이들을 꾸준히 추적하였고, 예멘에서 미 군함 콜호가 테러 공격을 받아 거의 침몰할 뻔한 상황에서는 직접 현지로 날아가 관련자들을 심문했고,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존 오닐이라는 인물은 또한 한편으로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미국을 대변하는 듯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여자들과 동시에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빚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는 그는 한편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여러 불안함을 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나 그는, 거의 빈 라덴에 비견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여러 지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빈 라덴을 잡거나, 혹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빈 라덴이 어떤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거의 9.11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선택 몇 가지가 빈 라덴이 9.11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존 오닐은 그러나 공교롭게도 9.11이 일어난 날 세계무역센터 안에서 죽었다. 그는 이런저런 문제가 겹쳐 그 이전에 FBI에서 사직했고,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의 사무실은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었다. 9.11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대목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상당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한 당시에 건물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건물로 돌아갔고, 그의 시신은 1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잔해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공격을 예견했고,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썼지만, 바로 그 공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

이 책 <문명전쟁>은 그 외에도 많은 흥미진진하고도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축은 자와히리와 빈 라덴, 그리고 존 오닐이라는 세 인물이지만, 그 세 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뒷 배경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 표면에서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달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서서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해 독자에게 묻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개의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자살을 금하는 이슬람의 계율을 반하는 자살 폭탄 테러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는가, 왜 테러 세력들은 미국을 주 타깃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그 공격목표로 삼았는가, 그리고 빈 라덴이 만약 없었다면, 이 테러들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등등. 그리고 이 책은 그 나름의 답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질문의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그러나 빈 라덴이 없었다면 이집트인은 단지 알 지하드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들의 목표는 민족적인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적인 지하드 연합을 창출한 것은 빈 라덴의 비전이었다. 몰락하여 사그라져 버릴 수 있었을 조직을 다시 결합한 것은 그의 지도력이었다. 수많은 살인에 뒤따르는 도덕적 논쟁에 귀를 막고 반복된 실패에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도 빈 라덴의 불굴의 의지였다. 이는 종교 지도자나 광인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얻을 뿐 아니라 목숨을 내거는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술적 수완도 한몫했을 것이다. (p. 486)


이 책은 9.11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이 끝나는 시점은 9.11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추적이 막 시작되며,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어디론가로 종적을 감춰버리는 시점이다. 빈 라덴은 결국 9.11을 일으킴으로써 그가 바라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단지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목표는 여러 해외에서의 테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거대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이슬람 세력들을 공격하게 하여, 전 이슬람적인 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 전(全) 이슬람 세력을 미국에 대항시켜 미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보았을 때 빈 라덴의 계획을 완성시켜준 것은 미국이었다. 여러 이슬람 세력에 거대한 보복을 행함으로써 전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거대한 보복은 진행중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한 축에 끌려들어가 있다. 아프간 재파병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해답은 자명하지만, 그의 실행은 쉽지가 않다. 우리도 이 거대한 문명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선택은 또 앞으로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이 책 <문명전쟁>은 9.11에서 끝나지만, 9.11 이후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수십명에 달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책 뒤에 색인으로 제공하고 있고, 성실한 색인을 덧붙임으로써 이슬람 지하드 세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백과사전으로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분명히 기대만큼의 역할은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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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강탈해 가는 것은 그 자신이다

The Book | 2009. 10. 20. 09:16 | Posted by 맥거핀.
심장강탈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딘 R. 쿤츠 (제우미디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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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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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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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 6점
권진.이화정 지음/씨네21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오래전 자주 갔던 곳을 한동안 찾지 않다가, 오랜만에 거기 들렀을 때, 유달리 심한 낯설음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자주 찾던 단골집, 작은 헌책방들, 길가의 벤취, 골목 사이사이에 난 작은 길, 그런 것들이 사라졌을 때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약간 비애감을 느낀다. 이곳 서울은 그런 일이 유독 잦다. 그만큼 서울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많은 공간들이 점점 새롭게 변하고 있다. 물론, 어떤 공간이든 낡은 것들을 새롭게 바꿀 수는 있으며, 오래되고 쓸모 없어진 것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거기 있던 사람도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공간만 새롭게 변하면서 사람은 그대로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공간에 들어설 때면, 나는 반드시 묻고 싶어진다.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딘가에서 다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을까, 아님, 그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까. 30년이 넘게 서울에서 살아온 나에게 비친 서울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도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도시다.

이 책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을 말한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떨까. 여기에는 총 7명의 인터뷰이가 나오는데, 이들은 유럽, 미국, 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며, 인종이나 나이, 성별 등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왠지 이들 7명은 비슷비슷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라는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미래의 것이 공존하는 칼라풀하고 파워풀한 도시라는 것, 때로는 지나치게 빠른 변화가 어리둥절하고, 슬프게 만든다는 것,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대적이고 편리하다는 것 등등.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이 왠지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한 가지 이유는 이들이 모두 아티스트, 작가, 댄서, 미술가 등 예술적인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예술적인 창의성에 도움을 주는 어떤 역동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역동성이 획일화된 개발풍경에 의해 점점 사라져가는 도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기억에 남는,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서울 강북권에 있는 곳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홍대 근처나 북촌, 통의동, 연신내, 종로 같은 곳들 말이다. 왜냐하면 강남은 정말 획일화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는 강남 어디를 돌아보아도 대부분 비슷한 풍경이니 말이다. 늘어선 건물들과 잘 정돈되어 있는 가로수와 아파트촌들. 이제 강남의 다양성이란 그저 건물의 디자인의 다름을 가지고 말하는 수 밖에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거의 가장자리지만, 이곳에도 그야말로 '잘 정돈된' 어떤 풍경들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곳도 거의 강남권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본 서울이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하나로, 이 책의 인터뷰의 질문들이 약간은 피상적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이 책의 많은 질문들은 어떤 구조화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 보다는 그저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누면서 여러가지 것들을 편안하게 묻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 깊이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그저 느낌이나 인상들에 그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의 컨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서울의 문제점을 나열하거나, 개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책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이란 곳이 어떤 느낌인지 살펴보고,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공간들은 어디인지 가볍게 전달하는 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벼운 트랜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차 한 잔 홀짝거리며,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다시 펴고 읽으면 되는 그런 종류의 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금 더 냉소적으로 보자면, 결국 외국인이 말하는 서울이란, 이 정도가 한계인 듯 하다. 그들 눈에 비친 서울이란, 과거의 어떤 전통들이 아직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곳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스타벅스가 널리 깔려있어서 편리한 도시, 외국인에게 약간은 배타적인 면도 있지만, 또 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도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그들에게 듣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정도였을 것이다. 어떤 비판을 듣고 싶기는 하지만, 날이 선, 아프게 들려오는 비판이 아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긍정하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비판. '미수다'에서 아주 살짝 더 나간 정도의 그런 비판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개발의 문제, 사라져가는 풍경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이 옛것, 어떤 전통적인 풍경들을 서울의 참모습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지 이들에게는, 도리어 그것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풍경들이어서가 아닐까. 이들이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사라졌다'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 사라졌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카피에 나온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몰랐던 서울 이야기'를 이들에게서 듣기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p.s. 이 책의 사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공간을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공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서울의 어느 곳이나 점점 비슷비슷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남아 있는 것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하긴 이 마저도 위태위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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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8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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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까지는 나지 않지만, 좀 많이 별로다. 정치라는 것이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부분 본의 아니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움직이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물건을 사거나 혹은 사지 않거나 하는 사소한 경제 행위도 타인에게 (일종의 나비효과가 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영향은 이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MB에게 기꺼이 표를 던져준 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리고 투표장에 가지 않은 또다른 많은 사람들 덕분에,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용역에 얻어맞고, 또다른 누군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 이 한 권의 만화는 그런 것을 말한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또는 정치에 대해서 냉소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가. 그것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의 뒤통수에 POLICIA 방패를 날리는가. 이 만화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쩌면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7년 6월에 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지방 출신의 법대생,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의 공장에 다니는 그의 누나,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였다가 그 아들을 위해 앞으로 나서는 어머니,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 욕하던 그의 아버지, 부당한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직업전선의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형....아마도 여기에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발전시키면 SBS 주말특집기획류의 드라마를 하나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은 결국 법대를 졸업해 검사가 되고, 집회현장에서 만났던 여학생은 몇 년 후 조폭 두목의 정부가 되어, 우연히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고...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 그러나 이 만화는 이런 이들을 패턴화된 후일담으로 풀어내어 이들에게 비감한 느와르와 가슴아픈 멜로를 부여하여 이들을 애써 우리와 분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살아온 줄거리가 아니다. 중간에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결국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한 사람만이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이 아주 큰 관심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자신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는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말한다. 조금씩 나아간다고 해서 길거리에 나서서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면서 나아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상징적으로 설명된다.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장이었습니다. (p. 171)



모두가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작은 백지에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이들이 어떠한 희생을 감내하였는지를, 이 마지막은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여기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면, 이것을 쓰는 나도, 이를 읽는 당신도 아마 슬플 것이다. 그렇게 얻어낸 소중한 백지로 1987년 대선에서 결국 누가 정권을 잡았는지, 혹은 이 책에도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박종철 열사가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박종운이 17대 총선에서 어느 당 후보로 출마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으로 냉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다시 일깨운다. 단지 그러한 것들은 100도씨의 물에 불순물을 투여하여 비등점을 낮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언제든 100도씨가 될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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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이야기의 뒤에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제목으로 붙은 민주주의 학습만화이다. 후기에 작가가 밝힌 바대로, 이 책이 어떤 교재의 용도로도 사용되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본편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만화는 그림체도 엉성하고, 내용도 짧지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여러가지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인 듯 하다. 민주주의란 결국 정당성(legitimacy)를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 혹은 법의 힘으로 어떠한 것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용어로 말할 수 있지만, '평등한 배려'를 하는 것, 혹은 각자 개인이 심의된 의사를 가지고, 그 의사를 하나로 결집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짧은 만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근원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평등한 배려' 혹은 '심의된 의사'라는 것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믿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타인을 배려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 혹은 어떤 필요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 잘못된 논조들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은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들인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짧은 만화에서 정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만화 역시 현명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 더 공부해 보라는 것,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이 체제는 더 잘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나 나같은 덜떨어진 어른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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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미쳤다 - 6점
보르빈 반델로 지음, 엄양선 옮김/지안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여담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만의 특징인지, 외국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제목들이 점점 자극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저자의 책들은 뭐 그러려니 하는데, 외국 저자의 책들까지 그러는 것을 보면 딱하다. 왜냐하면 외국 저자의 책들은 그럼으로써 원제와 아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제목은 저자의 허락을 받고 다는 것일까. 혹여, 그렇지 않다면 이는 저자나 그것을 읽게 될 독자에 대한 테러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래도 '스타는 미쳤다: 성격장애와 매력에 대한 정신분석 리포트'라는 이 책은 그나마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Celebrities'. '유명인' 또는 '명사'라는 간단한 제목이 자극적이고도 뭔가 복잡한 제목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약간의 관련성이나마 있으니 그나마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보면 책의 제목이 이렇게 되어버림으로써 이 책이 마치 '모든 스타들이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오인되는 위험성이 생겨난다는 점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오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성격장애를 가진 스타들의 사례를 자극적으로 나열한 책도 아니다. 그보다는 성격장애의 여러 특징들을 나열하고, 어떠한 연유로 그런 성격장애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책에 가깝다. 물론 책에는 여러 스타들의 사례도 나오지만, 그런 스타들은 도달하기 쉬운 하나의 예에 가깝다. 즉 모든 스타들이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스타들이 그런 성격장애를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먼저 첫번째 문제는 책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어느정도의 선을 '비정상'인 성격장애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체인질링>에서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와 바뀌었다며 문제를 제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경찰에 의해 정신병원에 갖히게 된다. 여기서 만난 한 여자는 이 '정신병'이라는 것이 사실 거의 의사의 자의적 기준에 가까움을 말해준다. "당신이 정상적으로 행동하려 할수록 그들은 당신을 더 이상하게 볼거야. 당신이 많이 웃는다면 착각에 빠져있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다고 여길것이고, 만약 안 웃는다면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할거야." 저자도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상적인 '성격'에서 '성격장애'로 넘어가는 경계는 모호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뚜렷한 성격적 특성들은 정상적인 범위 내의 편차일 수도 있지만, 정상성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정상적인 행동과 병적인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p. 23)



두번째 문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와 관련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스타와 성격장애에 대해서, 그리고 성격장애와 매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음을 논하고 있다.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것이 인과관계인가, 아니면 단순한 상관관계에 불과한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매력적이다'라고 말했을때, '이는 성격장애가 있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인다'라는 인과관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매력적으로 보인다'라는 상관관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부분은 저자 역시 주의해야 할 부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어떤 과학자가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셈을 더 잘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근거로 센티미터로 표시한 키와 산수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제시한다. 이때 해당 조사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열세 살짜리가 여덟 살짜리보다 산수를 더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키가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보다 더하기와 곱하기 실력이 월등하게 높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제3의 변수, 즉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이를 밝히고 계산했더라면 상관관계는 0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즉, 키와 성적 간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별개인 두 현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높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p. 111)



이를 넘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즉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다. 즉 성격 장애와 매력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인가. 성격장애가 있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어떤 매력이 성격장애의 동인이 되는 것일까. 스타와 성격장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격장애가 스타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스타가 된 이후에 성격장애가 생겨나는 것일까.
...........................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의 관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관점이란 성격장애가 스타가 되는 것에, 그리고 스타로서 매력을 발산하는 것에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격장애가 있는 스타들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며, 그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들이 성격장애, 특히 경계성 성격장애[각주:1]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경계성 성격장애들이 타인들에게 어떤 매력을 발산하게 함으로써, 스타가 그만한 위치에 오르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격장애의 하나의 요소인 연극성이나 자아도취성 같은 것들이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위의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것이기도 하며 여러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성격장애가 매력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타가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의 어떤 외모나 특출한 능력과 관계된 것이지, 성격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또한 연극성 성격장애나 자아도취성 성격장애가 스타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는 있어도, 경계성 성격장애는 이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질문은 꼬리를 문다.

또 한편으로 저자의 태도에도 약간 의문이 든다. 저자는 어떤 특정의 이유- 예를 들어, 가정 내에서의 학대, 성폭력 -만으로 성격장애가 온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성격장애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을 모두 고려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스타의 성격장애를 밝히기 위해서 쓴 방법이란,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살피는 것뿐이다. 물론 그 스타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므로 가능한 방법이란 이런 것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스타가 어린 시절의 특정의 경험으로 성격장애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듯한 이러한 태도는 본인이 말한 문제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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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가 스타들의 가정사와 매력과 성격장애를 고찰하려고 하면 할수록 읽는 독자들은 더욱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책의 매력은 점점 줄어든다. 도리어 이 책이 매력을 발산하는 부분은 그러한 스타들의 이야기가 배제되었을 때이다. 성격장애의 치료와 관련된 약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격장애의 원인들을 가정, 교육, 문화, 유전 등 여러 요소를 폭넓게 고려하며 펼치는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진진하며 읽을만하다. 따라서 이 책을 스타들의 내면을 살피는 도구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도구로서 활용할 때 이 책의 매력이 발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s. 저자는 보르빈 반델로. 책 날개에 보면 정신장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독일에서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의 문제인지, 아니면 번역가의 문제인지 책의 문장들의 구성이나 문단 연결이 어딘지모르게 깔끔하지 않은 데가 있다. 특히 책의 마무리나 에필로그는 조금 뜬금없다는 인상마저 준다. 

  1. 이를 '경계성' 성격장애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원래 외래용어임을 생각해보면 영어명이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이므로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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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자기(self)와 대면하기

The Book | 2009. 6. 20. 20:51 | Posted by 맥거핀.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 6점
플로렌스 포크 지음, 최정인 옮김/푸른숲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아마도 사회학자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충분한 재력과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는지도 모른다. 혹은 전직 큐레이터라면 요즘 여성들을 타겟들을 한 기획성 전시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와 문화에 목말라하는 여성들과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의 결합에 대해 이야기할는지도 모른다. 혹은 영화사 홍보팀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최근 미술관에 점점 손님을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한 걱정과 이런 혼자인 여성들을 어떻게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하게 만들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추세에 재빠르게 발맞추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집과 현대 미술을 알기 쉽게 소개한 글들에 주목하는 기획을 내놓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청난 야구광이자, 몇 년 째 혼자 살아온 좋게 말하면 싱글남, 나쁘게 말하면 노총각인 선배 J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야, 뭐, 야구장에 혼자인 남자들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지."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의 저자 플로렌스 포크(Florence Falk)는 심리치료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종의 심리학적인 입장에 입각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녀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자기(self)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인 여성들은 그곳에서 여러 작품들을 대면하며, 그것을 감상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를 마주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평소에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고민하며, 고독을 만끽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몇몇은 물음을 제기할 것이다. 아니, 고독을 즐기러 꼭 미술관까지 가야하나. 그냥 집에서 혼자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독을 만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가 얘기하는 고독은 다른 이와 관계를 끊고 집안에 고립되어 내면에만 침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나는 고독이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여성이 나와 같이 삶이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인 것이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고립이나 소외나 실패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혼자인 것이 이런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혼자 사는 여자로서 나의 첫 번째 과제였고, 여성 내담자들과 상담을 할 때 내가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혼자임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어떤 의미로든 혼자인 여성들이라고 확신한다. (p. 60-61)


이 책은 명백히 여성 독자를 타겟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나같은 남성 독자들이나 혹은 일부의 여성 독자들은 나름의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그저 독신녀들, 혹은 이혼녀들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냐고(아마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두 번이나 이혼했다는 저자의 경력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면, 지금 당장 남편 있는 모든 여자들은 이혼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오해에 가깝다. 이 책은 이혼이나 독신을 합리화하지도, 이혼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일단 간단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 간에, 실제로 독신인 여성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이혼하는 여성들은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물론 남성들도 그러하지만, 이 책의 타겟은 여성이다). 그리고 독신의 여성들(결혼적령기가 지났건 아니건 간에)이나 이혼한 여성들은 현실적인 여러 문제로, 혹은 심리적인 여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에게 일종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고독을 즐기고, 자신을 대면하는 일이 남편, 혹은 남자친구, 혹은 동성친구가 없는 여성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혼자인 것과 친해지며, 밖으로 나가, 고독을 즐기고, 마침내 자신을 찾는 것(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한편 이 책의 목차이다)은 모든 여성들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은 누구나가 혼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을 잃어버리면, 상대방(혹은 타인)에게 의지하게 되고,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하게 되고, 자존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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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러한 류의 심리학적인 문제를 다룬 책들이 늘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서점에서도 이러한 책들을 모아놓은 코너가 요즘에는 대부분 따로 있으며, 항상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 중에는 대박을 친 책들도 몇 권 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와 같은 책들이 아마도 대표적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그 책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책에 어떠한 내용이 있건, 어떤 중요한 얘기가 있건, 혹은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 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들의 많은 부분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책을 중간중간 손에서 놓고 생각을 얼마나 하게끔 하도록 하는가에 그 책의 진정한 효용이 있다. 책 안에 아주 수많은 이야기들, 혹은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읽고, 그냥 내려 놓은 후,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래 좋은 말씀들이시네."하고 넘어간다면, 이러한 책들의 효용은 아마도 거의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책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책의 저자 플로렌스 포크는 심리치료사답게 자신이 다룬 수없이 많은 사례들(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례가 포함된다)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고, 때로는 가슴아프게 하고, 때로는 어떤 깨달음도 주지만, 중요한 것은 한가지이다. 결국 이 모든 사례들은 모두 타인의 사례라는 점이다. 이 모든 사례들은 모두 타인의 각기 다양한 사례들일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혹은 내 주위의 상황과 일치할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은 일치한다해도 그 사례가 해결된 방식이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덮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 있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현재의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이러한 류의 독서가 완결되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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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아까, 농담삼아 선배 J의 이야기를 했지만, 어쩌면 그 말에 어떤 진리가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구장에 혼자인 남자들이 많은 것, 그것은 야구장이 혼자인 남성들이 주위의 비난어린, 혹은 이상한 눈초리를 피해서 혼자 숨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비해 이러한 주위의 시선에서 훨씬 자유롭다. 일례로 미술관에 간 혼자인 남성은 별로 그런 시선을 받지 않지만, 야구장에 간 혼자인 여성은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어떤 시선을 받지 않는가.(여기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자 혼자 야구장에 가면 남들이 괴롭힌다거나 집적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뭔가 그것을 어색하게 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어떤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즉 미술관 같은 공간들이 '그나마' 여성들에게 혼자인 공간으로 허용되고 있다는 것, 그것에 어떤 우리 사회의 어떤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런 물음이다. (일례로 남자 혼자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 그런 사소한 것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희화화되는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는 왠지 그러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읽혀진다.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뭔가 결점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그리고 우리 여성에게 직접 가해지는 수많은 폭력을 생각하면, 여성이 혼자 있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혼자 있는 것을 피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과제는 이런 감정과 대면하고 싸워서 고독이 주는 보상을 즐기는 것이다. (p.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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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言)들의 향연

The Book | 2009. 6. 11. 23:49 | Posted by 맥거핀.

지혜의 숲에서 고전을 만나다 - 8점
모리야 히로시 지음, 지세현 옮김/시아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여러가지 새로운 방식으로 이른바 '고전(古典)'들이 그 힘을 얻고 있는 듯 하다. 학교에서 고전을 다룬 강의도 많고, 그 외 여러 고전을 강독하는 강좌들도 많으며, 출판사들에서도 앞을 다투어 여러 고전들을 새롭게 소개하고, 조명하는 책들을 발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고전은 여전히, 어떠한 의미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경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전은 고루하고 당연한 말만 가득한 지루한 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고전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애써 외면하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이것은 고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고전을 이어받은 후세 사람들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는 그간 고전을 탐독하고, 이야기해 온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 혹은 어떤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종종 고전을 인용하며 '한 말씀' 하시기도 하고, 고전 중의 한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자랑스레 소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들이 가끔 보여주는 자신의 말들과 너무도 다른 행동들, 자신의 좌우명과 완전히 배치되는 행동들은 그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이 고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자님 말씀 하고 있네, 흥."하고 냉소적으로 내뱉을 때, 우리는 은연중 그 고전들까지도 냉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소개할 <지혜의 숲에서 고전을 만나다>의 저자 모리야 히로시는 다음과 같은 그렇게 '입만 살은 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나는 이 책을 30대 이상의 이 사회를 열심히 지탱해나가고 있는 사람들, 특히 40대 이상의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중국고전은 단순히 지식과 교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이는 어디까지나 실학實學으로,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했을 때 의미가 있으며 비로소 그 값어치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p. 5)



따라서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실용서다. 이 책은 <채근담>, <논어>, <맹자>, <삼국지>, <역경> 등 30여 개에 달하는 중국 고전 중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몇몇 구절들을 뽑아 소개하고, 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읽는 이가 실제로 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각 고전 별로 구절을 뽑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전들을 섞어 다시 재배열 하고 있다. 즉 이 책의 큰 챕터들은 다음과 같다. 인간관계의 지혜, 사람을 쓰는 지혜, 소박한 일상의 지혜,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 인생을 위한 지혜,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지혜. 

이러한 실용서들은 처음부터 독파하는 것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부분을 읽으면 그만이다.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별로 재미없다 혹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된다. 그래서 나도 고백하건대, 책을 다 읽지 못했다. 굳이 분량을 이야기하자면 한 3분의 2 가량 읽었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후, 책장 멀리에 꽂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한 번 덮은 후 다시 읽지 않아도 되는 그런 류의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까이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혹은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혹은 답답할 때마다 가끔씩 꺼내어 조금씩 읽는 것이 좋은 그런 류의 책이다. 그래서 나도 책장 가까이에 대학 때 선물로 받은 <논어> 옆에 꽂아두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당연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 당연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혹은 과거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 중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부분은 최근의 정치상황과 맞물려서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사람을 책망할 때는 함축이 필요하다
                                   責人要含蓄 <신음어呻吟語>

'함축含蓄'이란 하고 싶은 것을 전부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긴다는 뜻이다. 사람을 책망할 때는 이러한 '함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일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비록 상대방에게 100퍼센트 잘못이 있다고 해도 마구잡이로 몰아붙이면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반드시 불만과 반발이 생겨난다. 잘못하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후략) (p.80)



이 책에는 이러한 당연한 말들이 가득 들어 있다. 아마도 이러한 당연한 말들은, 당연한 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가 이러한 삶의 원칙들을 중시하는 사회라면, 이러한 말들이 더 이상 무슨 의미,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의 현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상식적인 것들이 출몰하는 시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기이다. 당연한 말을 하면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은 너무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읽히기도 했고, 파란 기와집 사시는 분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아마도 어떻게 보면, 처음에 이야기하였듯이 고전이 강조되고, 고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이런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은 일종의 위기의식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는 일종의 위기감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더 이상 이런 책이 출판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고, "뭐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나." 이러면서 사람들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이 당연한 말들의 향연이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곳, 그곳은 아득히 멀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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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법관들이 보고 싶다

The Book | 2009. 5. 20. 02:27 | Posted by 맥거핀.
불멸의 신성가족 - 8점
김두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불멸의 신성가족들의 이야기. 그곳에도 어떤 일종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오가는 정(情)과 다툼과 욕망이 있으며, 흥미롭고도, 약간은 황당한 사건의 뒷이야기가 있고, 이상한 음모와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마무리들이 있었다. 무슨 암흑가 이야기냐고? 음..그게 아니라면, 정계(政界)의 이야기냐고?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이렇다.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그래서 흥미롭게, 재미를 느끼며 읽기를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요즘 '패밀리'가 유행이지만, 한편으로 '패밀리'는 위험하다. '패밀리'는 '우리가 남이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패밀리 안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보호막으로 다가오지만, 그 패밀리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 때에는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장벽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말하는 사법 패밀리이다. 이 책에서 차근차근히 논증하는대로, 그 패밀리가 되는 것은 실로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로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이다. 그러나 그 장벽을 넘어 그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결혼과 도제식 선후배 관계와 술자리와 오고가는 돈을 통해 그들은 강력한 패밀리가 되어 외부를 향해 보호막을 둘러친다. 그래서 이들을 이 책에서는 신성가족(神聖家族)이라고 묘사한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신성가족은 맑스와 엥겔스의 공동저작인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맑스는 "불경스러운 대중과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투쟁을 겪어온 비판적 비판주의는 마침내 고독하고 신을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되는 데 성공했다"고 그들을 묘사합니다. (p.146)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의 신성가족인 사법 패밀리들을 이 책에서 잘게 해부하고 있다. 이 사법패밀리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만 포함되지 않는다. 변호사 사무실 실장 및 직원들 (또는 사실상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법무법인의 직원, 법원의 일반직원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경찰, 국회의원, 법과대학 교수들, 검찰이나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결혼소개업자(일명 마담뚜)들이 있다. 그리고 그 외면에 우리같은 '일반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일반인'들을 제외하고 이들 중 어디까지가 진정한 사법 패밀리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법 패밀리의 범위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 사법 패밀리가 만들어진 시스템, 작동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들 사법 패밀리는 일반 국민들과 유리되어, 그들만의 작동방식으로 작동하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리(遊離)는 완전한 유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삶의 어느 순간에서 이들 사법 패밀리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이들 사법 패밀리와 일반인들 사이에는 오해와 불신만이 가득차 있다. 특히 일반인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심각하다. 책에 나온 통계를 빌리자면, 사법 서비스에 만족하는 국민이 전체의 약 34%밖에 되지 않는다(2003년 1000명 조사).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쓰여진 이유다. 일반인들은 왜 사법부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법부의 구조 안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그런 사법부를 해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질적인 연구방법론이다. 즉, 판사에서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위에 얘기한 기자나 경찰, 마담뚜, 그리고 여러 사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총 23명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해서 이 사법부라는 시스템, 그리고 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해부하고자 하였다.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질적인 연구방법은 위험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과연 이들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즉 이들만 그런 것 아닌가, 혹은 이들이 일부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말이다. 저자도 이를 우려해서인지 시작부분에 연구방법과 과정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 연구에 어느정도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도 각 구술자들의 이야기가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우리가 '사과'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과의 겉을 살피는 것이 양적인 연구방법이라면, 질적인 연구방법은 그 사과를 바늘로 찔러 그 안의 과육을 아주 살짝이나마 맛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바늘이 여러개 꽂혀 바늘과 바늘의 끝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랄까. 질적인 연구방법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은 사법 시스템이라는 구조와 작동 방식을 어느 정도 해체하여 드러내보이기에 근접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에는 구술자들의 성실하고도 현장감 넘치는 구술과 저자의 그 구술들을 다시 해체하여 쉬운 언어로 엮어내는 글솜씨가 큰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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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나가는 글: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다. '억지로 찾아본'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나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이 구조에, 이 작동방식에 희망은 있을까..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말하는 사법 패밀리 구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패밀리 내에서의 그리고 외부와의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불러오는 구조의 폐해(이른바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판검사를 증원하고, 변호사의 숫자를 늘리고, 로스쿨 제도를 통한 선발방법의 변화나 법조일원화 같은 현실적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최종의 해결책은 다름아닌 '시민만이 희망이다'. 즉 일반인들의 인식과 사법을 대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책에서 말하는대로 사법부 불신을 낳게 한 데에는 사법부만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례로 판사 출신 변호사나 브로커가 돈만 밝힌다고 욕하면서도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것은 판사 출신 변호사(전관 변호사)가 판사와 더 잘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시민 의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보다 더 훨씬 적극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는 행위 모두를 포괄한다.

우선 시민들 입장에서는 판검사들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습관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 장벽이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용기를 내 판검사들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일단 용감하게 "판사님,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 "검사님, 제 얘기도 좀 들어주시죠"라고 말을 붙이면 의외로 판검사들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발견할 겁니다. 그렇게 했더니 판검사들이 자꾸 말을 끊고 무시한다고요? 그럴 때는 편지를 쓰십시오. (p.322)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나도 책을 덮고 나서 위와 같은 '억지로 찾아본 희망'같은 이야기보다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사법 패밀리에 전화 한 통 걸어 부탁할 수 있는 인맥이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 국민 중 14.2%'라는 책 속 통계를 떠올리며, 나는 그 14.2%에 들어가나..대학 때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인맥이라고 봐야하나..그래도 뭔 일 생기면 그 사람들에게 전화라도 해봐야 되겠지...그러고보면 나는 나쁘지 않은 편인가..등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사실 그 14.2%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립서비스나 받는 수준이니 아무 것도 아닐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구조고, 그 구조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책 속 표현대로, 선배들이 돈을 건네고, 청탁전화를 하고,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거절하고, 사법 패밀리가 되기를 거부하는 '또라이' 법관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또라이'들에게 바보같은 질문도 하고, 중언부언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하는 당찬 일반인들도 보고 싶다. 물론 (그럴 일이 없으면야 더 좋겠지만)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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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 돌아보기

The Book | 2009. 5. 9. 22:33 | Posted by 맥거핀.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6점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가벼운 여행기다. 글쎄. 가볍다는 말이 조금 부정적인 느낌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다. 가볍고 깔끔한 여행기다. 이 책에는 모두 18개의 소위 '문화도시'가 소개되어 있다. 각 도시마다의 소개글은 천천히 읽는다해도 약 5-7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짤막한 분량. TV에서 하는 짤막한 스팟 형식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다. 도시의 주요 관광 장소 몇 군데 소개하고, "와우~정말 멋있네요~"하는 성우의 기분좋은 감탄사 몇 개 붙이고, 거리 먹거리 한두 가지 소개한 후, 야경을 배경으로 끝맺는 '~따라 세계여행'같은 프로그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이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 책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나, 유재현의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와 같은 인문학적인 또는 역사서술적인 글쓰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저자는 가끔 도시의 역사적인, 혹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잘 모를 용어들에 대해 친절한 주석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문화도시를 잠깐 둘러 본다는 가벼운 느낌으로 보면, 또는 가벼운 교양서적을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어느 정도 기대감은 충족시켜 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도 저자의 능력이다. 가벼운 교양서적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도 꽤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중해라는 '문명의 호수'를 끼고 인류가 일구어 낸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크레타 섬은, 그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Ceasar Augustus, 기원전 63-14)는 로마의 대권을 장악하고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그 뒤 로마가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리자 크레타 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곳에는 초기 바실리카가 많이 세워졌다. 그런가 하면 9세기에는 아랍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 모스크가 난립하기도 했다. 결국 크레타 섬은 1670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뒤이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침략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인지 크레타 섬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오스만 제국 시대의 성채와 유적은 물론 고대와 현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마치 '문명의 종합 전시장'에라도 온 느낌이다. (p.91-92)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꽤나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느낌의 도시들을 엮어서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책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체코 프라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등 그간 다른 여행기나 매체에서 자주 소개된 도시들도 있는가 하면, 파키스탄 라호르, 러시아 이르쿠츠크,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접하기 어려운, 잘 소개되지 않았던 도시들도 있다. 이 외에도 알제리의 알제나 이집트 룩소르 같은 여러 다양한 문화들의 다양한 도시들을 폭넓게 소개하려고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러시아 이르쿠츠크가 러시아 혁명가들의 유배지로서 시작되어 발전된 도시임을, 파키스탄 라호르가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로 번성했던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하기사 어느 여행기가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까지 그 발길이 가 닿겠는가. 저자의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다문화적이고 잡식적인 발걸음이 빛나는 순간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여러 다양한 도시들이 조금 더 체계를 가지고, 혹은 주제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시작해, 미국 시애틀에 다다르는 이 책의 구성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넘나들며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어떤 역사적인 흐름이라던가, 각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을 따라 이동한다던가 하는 유기적인 흐름을 이 책의 구성에 도입하였으면 조금 더 체계적이고 독자들도 덜 혼란스러운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하나는 어떠한 문화권의 어떤 도시이건, 도시의 문화(즉, 음식이나 건축물 등)는 그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여러 두오모(대성당)들과 거리, 그리고 도서관과 극장 등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르네상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즉 이 건축물들 각각이 별개로서 여겨지지 않고, 그 전체가 거대한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여겨질 때 그 가치는 위대한 것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문화들, 혹은 그 문화를 구축시켜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종교'라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구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당과 신전 혹은 오벨리스크 같은 명백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건축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일반건물 벽면의 벽화에서부터 크노소스 유적지의 뱀 모양의 대형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의 문화유산들은 종교적 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도시들의 문화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즉 하나의 폐쇄된 체제로서 구축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건, 혹은 무역이건 간에 대부분의 문화는 주변의 영향을 받고, 이러한 주변으로부터 도래된 문화와 그들 자신의 문화가 섞여 또다른 제3의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제3의 문화는 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것이 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역사이다.

카르나크 신전과 열주의 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1000년이나 앞서 세워진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로마와 그리스에 두고 검은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명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유럽 인들의 오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에 준 영향은 단순히 형태나 양식에 그치지 않는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 부활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하였다. 그러나 흰 것만이 선이고 최고라고 믿었던 유럽 인들은 자신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이집트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p.134-135)


글쎄. 누군가는 '뭐 또 이런 당연한 소리를...'이라고 할 것 같다. 문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느니,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너무나도 '교과서스러운' 말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다,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 그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교과서에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소위 '문화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문화란 어떻게 구축되고, 발전하는가를 아주 살짝 생각해보게 하지만, 결코 그 이상, 깊숙한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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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한 가지 생각은 들었다. 이러한 문화도시들에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백제시대로부터 이어진 '문화도시'로서의 고도(古都) 서울은 어떤가하고 말이다. 글쎄. 엔고 현상으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일본인들이 '명동' 이외에는 갈 곳이 없어서 한 번 방문한 후 발길을 끊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다. 명동에서 화장품 사고, 쇼핑하고, 명동칼국수 먹고 청계천 살짝 보는 것 이외에는 그들이 할 일은 정말 별로 없는 건지, 몇 천년을 이어온 거대한 문화의 총합으로서의 서울은 어디에 숨어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밀라노 또는 라호르인가, 계획된 성채로서의 두바이인가. 있는 남대문마저 홀랑 태워드신 분들, 그리고 멀쩡한 4대강 파헤쳐 운하 만드신다는 분들께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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