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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사라졌어도

Ending Credit | 2021. 1. 22. 10:42 | Posted by 맥거핀.

 

 

연초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지나간 <씨네21>이나 영화 블로그들을 돌아보며 작년의 베스트 영화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시간이 나면 그 중의 몇 편을 보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시간이 있어 그 중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사라진 시간>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 중의 하나다. (<씨네21>에서 뽑은 올해의 한국영화 4위, 물론 작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개봉된 영화가 적었으니 상대적으로 순위들이 인플레이션된 경향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때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같은 인상이 있었는데,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그나마 '빌미'라도 주었지만 사실은 문제인 게,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든 영화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처럼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소중한' 사라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는 관객들의 볼멘 소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마 대부분은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건의 진실 찾기 게임을 기대했던 관객의 욕망을 이 영화는 깨끗이 배반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태도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올시다,인 것 같고 이 영화의 매력도 아마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딱한 관객들은 어떻게든 황당함의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애처롭게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짜맞춰 보려는 수많은 영화 리뷰들의 시도가 아마도 그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꿈의 얼개를 맞춰보려는 아침의 시도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시도는 덧없다는 말이다.) 도리어 얼개가 맞는 꿈은 급격히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꿈의 매력은 아마도 그 불가해한 이물감이 아닐까. 아니! 아니, 나는 미스터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아무리 주장해봤자, 그런 거 애당초 없었는뎅?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화내는 이쪽만 더 화가 날 뿐이다.

 

아무튼 간에. 이 영화의 매력은 도리어 그 중반 이후에 있다. 사건을 둘러싼 마을의 비밀을 어떻게든 밝혀내려고 박형사(조진웅)가, 아니 사실은 관객들이 애쓸 때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다. (사실은 이미 방향은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박형사가 체념한 이후이다. 그가 전화번호를 지갑에 집어 넣고 수업 준비를 시작할 때, 이제 영화는 영화 자체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장르물을 내놓으라고!"라는 관객들의 화를 어르고 달래며 쉰 떡밥이라도 던져주었지만, 이제 영화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다. 아니,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거야, 보기 싫으면 관두던가요,라는 투랄까.

 

그 '영화 자체의 욕망'이라는 것을 뭐 여러 갈래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종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진영이라는 배우 출신의 영화 감독이 계속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같은 입장의 배우들을 향해서 보내는 일종의 위로. 그러나 그 위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위로는 이야기를 관통한 후 묘하게 조금 더 확장된다. 처음에는 선생 부부가 이상하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코웃음치며 듣던 박형사가 뜨개질 선생님 초희(이선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거 많이 아프다고 공감하며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할 때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 배우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위무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은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박형사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사실은 우리도 다들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되어서 살고 있으니까.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을 기꺼이 맡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은 삶일 수 있지만, 다른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면서 적당히 체념하면서 사는 것도 꽤나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처음의 "참 좋다"와 마지막 "참 좋다"는 분명히 톤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어떤 게 꿈(소설)이고, 어떤 게 현실인가. 혹은 어느 것이 망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영화는 그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보다는 영화가 묻는 질문은 조금은 핀트가 달라보인다. 시간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나, 혹은 나의 기억은 남잖아요? 영화는 되묻고 있다.

 

 

 

덧 1.

영화의 초반부 김선생(배수빈)과 그의 아내 윤이영(차수연)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다. 그 이후 등장하여 혼자말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는 박형사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랜 배우 경력을 가진 정진영 감독이 이 과장이 가져올 단점을 당연히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필요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의 영화, 극 중의 극을 보여주는 것은 촬영기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과장된 연기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배우 출신 감독이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황규덕 감독의 2007년작 <별빛 속으로>가 떠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리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은 이 영화에서 교수 역할로 출연하며, 차수연 배우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물론 꿈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 영화의 내용도 <사라진 시간>과 꽤나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교수로 나오는 정진영이 직접 낭독하기도 하는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릴케의 이 시 "파괴하는 시간이 정말 있을까?"도.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숴버릴까

끝없이 신들에게 속해있는 이 마음에게

언제 조물주는 폭력을 휘두를까

운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우린 정말로 불안에 찬, 깨어지기 쉬운 존재일까

유년 시절은

깊고도 기약에 찬 유년시절은

그 근원에서 말이 없는 것일까, 훗날에

 

출처: 영화, 별빛 속으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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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하는 것들

Interlude | 2021. 1. 14. 15:13 | Posted by 맥거핀.

 

본 사람들은 대부분 욕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콜로설>이 그런 경우인데, 네이버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만 보면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거대괴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이들(혹은 낮술먹고 덜깬 어른들)의 헛소리(아니, 로망(老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마도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lossal은 '거대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나는 살짝 비슷한 collapse(붕괴)라는 단어가 내내 연상되었는데,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대 괴수가 서울(그렇다, 우리 수도 서울)을 붕괴시키는 게 꽤 마음에 들었기도 하지만(가끔 서울을 때려 부수고 싶은 거는 나만 그런거 아니겠죠?),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자아의 '붕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새 술먹고 거짓말하다 얹혀사는 남친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영화 속에 첫등장하는 주인공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도 어떤 붕괴의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글로리아의 친구(이자 사실은 빌런) 오스카(제이슨 서디키스)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혹은 그)가 서울을 때려 부술 때 사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때려 부수고 있다. 글로리아가 뉴스를 보고 경악하며 어떻게든 서울을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사실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붕괴시키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그냥 이 영화가 어떤 은유처럼 느껴진다. B급 괴수물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사실 붕괴되어 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하필이면 아침 8시 5분에 동네 놀이터에 등장하여야만 괴수 분신 기제(개인적으로는 '로보트 태권브이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훈이의 태권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작동한다는 설정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야말로 대책없는 술꾼들이 자신의 붕괴되어가고 있는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줄줄이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각(저 아저씨는 뭐야 엄마? 아유 빨리 학교나 가!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어?), 밤새 먹은 술이 여전히 덜깬 채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노라면, 혹은 (더 최악으로는) 모래밭에 파전이라도 하나 부쳐낸다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야말로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단지 농담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쓰잘데기 없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그것은 어쩌면 결국 그 붕괴를 이겨내는 길은 누군가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타인의 자리에 서서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알코올이든 혹은 자기혐오든 무엇인가에 찌든 자신을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붕괴의 양상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오는 방법임을 영화는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헛소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각 잡고 등장하는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보다는 <신부들의 전쟁>이나 <겟 스마트> 같은 영화에서의 그 큰 눈을 굴리며 살짝 맛이 간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마음에 들거다. 또한 제이슨 서디키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멀쩡한 미친 짓' 연기는 꽤나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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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The Book | 2021. 1. 14. 11:42 | Posted by 맥거핀.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 10점
리처드 로이드 패리 지음, 조영 옮김/알마

 

 

일 때문에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본 기사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무심하게 나열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근대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리히터 규모 9.0) 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이어졌고, 한 시간 뒤 최대 높이 40.5m의 초대형 쓰나미가 연안 지역을 덮쳤다. (중략) 사고 당일 쓰나미로 이 지역 어린이 75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74명이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 마을 가마야의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학교의 재학생은 108명. 이 중 78명이 파도에 휩쓸렸고 단 4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중략)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교사 엔도 준지 뿐이다. 그는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파도가 들이닥쳤고, 모든 절차를 따랐지만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진은 오후 2시 46분에 일어났고 학교의 시곗바늘은 3시 37분에 멈췄다. 아이들에게는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200m 남짓 떨어진 대피소까지는 달려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1분 동안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일보 기사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 초등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었나' 중에서>

 

그러나 가끔은 사실의 무심한 나열이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건을 6년에 걸쳐 취재하고 그 내용을 담은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책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정서는 그 어떤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이다. 그는 <더 타임스>의 아시아 담당 특파원으로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이 책을 썼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섰다,라는 것은 내용을 부실하게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아니었고,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주민도 아니었고, 지방 공무원도 아니었고, 부모들을 위로한 승려도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려고 어떻게든 애썼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들려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 자체에서만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왜 교사들은 바로 학교 뒤에 있던 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교통섬으로 가려 했던가, 왜 시간은 지체되었고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가,와 같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빨리 찾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는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가 결국 얼굴을 안 볼 정도로 갈라서는가, 혹은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일본인의 특징이 이 사건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와 같은 사회학자적인 입장에서 흥미를 가질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심령술사를 찾는 부모들과 쓰나미에 휩쓸린 영혼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조금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도 이 책에는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한 술회들은 마음을 짓누른다. (물론 그 부모들을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도 짓눌렀을 것이다. 위에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과 아이들의 시신을 찾던 날을 회상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담은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난 후 '시간이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지진이 일어난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 공백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모들의 기억은 때로 한 가지 사물이나 사실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그날 아침 신고간 신발이나 옷, 아침에 아이들이 던졌던 싱거운 질문.

 

그렇게 연말에서 올해로 넘기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을 느릿느릿 읽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상태에서 또다른 재난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고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있다고만 말해지는 무서운 쓰나미. 그것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 재난을 겪고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매일 진흙을 퍼올리는 일일 것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아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부모들에 비길 수야 없겠지만, 우리도 크건 작건 이 재난들을 무엇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바꾸고 있는가. 내 노력 중의 하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이라고 해두자. 올해까지 읽기는 했지만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지나간 시간이 너무 짧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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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와 <하나 그리고 둘>

Ending Credit | 2020. 8. 27. 11:46 | Posted by 맥거핀.
나보코프 문학 강의 - 10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승욱 옮김/문학동네

 

<나보코프 문학 강의>의 몇 대목.

 

그러나 기성품처럼 진부한 일반화부터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니 책을 이해할 실마리를 잡기도 전에 책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바리 부인>이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미리 품고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만큼 작가에게 지루하고 지독한 일은 없습니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새로 창조된 세상임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 p. 43

좋은 독자는 책에서 진짜 삶, 진짜 인간 등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압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 사물, 상황의 현실성은 전적으로 그 책의 세계에 달려 있습니다. 독창적인 작가는 항상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죠. 어떤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이 세계의 패턴에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예술적 진실의 기분좋은 충격을 경험합니다. 한심한 하청 문사인 비평가들이 '진짜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 인물이나 사물을 대입했을 때 그들이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천재적인 작가에게 진짜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 55

문체는 도구도 아니고 방법론도 아닙니다. 단순히 단어의 선택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인 문체는 작가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 또는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를 말할 때는, 예술가 개개인의 독특한 본질, 그리고 그것이 예술적인 작품 속에 표현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있지만, 우리가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천재적인 작가들 각각의 독특한 문체 뿐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 p. 139

문학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주로 기질이나 교육 때문에 진정한 문학의 미학적 울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어깨뼈 사이의 그 분명한 짜릿함과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몇 번이나 거듭 말하지만, 등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습니다).

- p. 143

하지만 소설이나 시에 대해 실화냐는 질문을 던지지는 마세요. 스스로를 놀리지 맙시다. 문학에 실용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하필이면 문학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특수한 경우뿐이겠죠. 에마 보바리라는 여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지만, <보바리 부인>이라는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겁니다. 책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 p. 249~250

맨 처음 이 사건들을 촉발한 사소한 요소가 무엇이든,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어떠했든, 그가 프랑스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든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에마 보바리라는 여주인공에게 사회가 객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합니다. 플로베르의 소설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섬세한 미적분을 다룬 작품이지, 사회적 조건화라는 산수를 다룬 작품이 아닙니다.

- p. 251

오스틴 폴더의 다른 메모에서 나보코프는 플롯을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로 정의한다. 테마, 테마의 가닥line은 "둔주곡에서 어떤 곡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듯이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반복되는 이미지 또는 생각"이고, 구조는 "책의 구성, 사건 전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 한 테마에서 다른 테마로의 이행, 인물들을 교묘하게 등장시키는 것, 또는 새로운 행동 묶음이 시작되거나 다양한 테마가 서로 연결되거나 소설을 진행시키는 데 이용되는 것"이며, 문체는 "저자의 특별한 어조, 어휘, 독자가 어떤 문장을 보았을 때 이건 디킨스가 아니라 오스틴의 문장이라고 외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편집자

- p. 64

 

앞의 몇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보코프는 작품의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역사적 측면은 거의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플롯, 테마, 그리고 문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보코프 문학 강의>에서 그러한 것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송 테마, 미스터리 테마, 아이 테마를 쫓거나, 작품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 보거나, 무뚝뚝한 나열이나 비유, 돈호법과 같은 디킨스의 문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나보코프가 보았더라면 아주 좋아했을 영화가 있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2000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타이완의 중산층 가정의 가족들이 겪는 소소한, 그러나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은 며칠 간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삶의 가치와 지향점에 대한 감독의 물음과 해답, 또는 과거와 현대가 묘하게 결합되며 가족이 재구성되는 타이베이라는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공간을 다룬 것이라고 소위 비평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나보코프의 관점대로라면 그것은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의 눈을 빌려서 보면,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사회나 시간, 공간이 아니라 플롯이나 테마, 그리고 문체 - 영화로 치면 촬영기법이라고 해야할까 - 와 같은 것이고, 사실 그것을 빼놓고 보는 것은 영화의 10분의 1도 채 못보는 것이기도 하다. 초반의 10분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의 시작. 짧은 암전이후 결혼식장에 서 있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보인다. 신부는 어딘지 불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리고 음악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불길하다. 이것은 물론 뒤이어 등장할 다른 여자와 그 여자와 연결되어 등장할 이야기를 슬며시 암시한다.

 

다시 짧은 암전 후 음악이 서정적으로 바뀌며, 아이들이 등장한다. 모인 하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집중하여 비추는 것은 아이들이다. 남자 아이를 둘러싼 여자 아이들. 뒤에 선 키가 큰 여자 아이들은 작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찌르는 장난을 치고 있다. 이는 나보코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의 테마를 가져온다. 하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앞으로 계속 시달림을 받게 될 남자아이의 테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도 뒤를 볼 수 없다는 보다 큰, 아마도 작품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마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앞서 등장했던 신랑 신부와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누나 부부와의 대화. 가장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하라는 매형의 말이 앞서 뭔가 불만족스러워하던 신부와 연결된다. 또한 아이들이 어디 갔는지 찾는 장면이 바로 아이들의 모습과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한다. 등장한 가족의 큰 딸인 팅팅은 할머니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앞으로 이어지게 될 내용을 다시 암시한다. 

 

그리고 다 끝난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또다른 여자 윤윤.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에게 자기가 며느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막무가내로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주 극 초반부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이는 여러가지의 효과를 불러오는데. 거침없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윤윤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며, 동시에 이 장면 이후 불편함이 한층 가중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후 이어질 사건에 대한 세심한 복선이 된다. 또한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아디(신랑)와 윤윤을 둘러싼 일종의 삼각관계 테마이기도 하다. 이 삼각관계 테마는 앞으로 여러 결로 여러 인물을 통해 반복된다. 

 

집안의 가장이자 아디의 매형 NJ와 딸 팅팅은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 뒤에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가 집에 빨리 가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하는 팅팅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며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은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물론 이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의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검은 화면에 제작사 등을 표시하는 오프닝 크레딧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오프닝 크레딧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샤오얀 어딨냐며, 나오라고 그러다 천벌받는다며 소리지르는 윤윤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사실 이 영화는 이처럼 화면과 매칭되지 않는 목소리 또는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즉 화면에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같이 붙어 나오는 소리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 혹은 대화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균질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니까. 물론 그리고 이는 앞의 주요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킨다. 우리는 누구나 뒤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서야 제목이 나온다.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어쩌면 윤윤 그리고 아디와 샤오얀. 그러나 그것은 물론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샤오얀 그리고 아디와 윤윤. 오로지 그것은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머니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이 때 카메라는 오롯이 할머니만을 비추지만, 차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팅팅이 부축한다. 아마 운전은 NJ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팅팅과 할머니가 집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CCTV가 비추고 있다. 왜 우리는 이 화면을 CCTV로 봐야 하는가. 카메라와 CCTV라는 이중의 화면, 이중의 필터를 거친 화면. 이는 카메라라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키며, 동시에 뒤를 보게 하는 카메라라는 거대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즉 불길하다. 나는 불길하다는 것을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잠겨진 문.

 

엘리베이터를 올라오니 가족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오고 있고, 옆집의 이사온 리리와 팅팅은 처음으로 만난다. 앞으로 팅팅에게 이어질 또다른 테마를 위한 시초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변주된다. 카메라는 팅팅의 집안을 느리게 비추다가 부엌을 정리하는 팅팅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화면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그리고 베란다에도 쓰레기가 하나 더 있다고 말하는 NJ의 목소리를 입힌다. 자, 이 쓰레기가 불러올 것.

 

이 말을 하는 NJ는 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인데, 그는 멍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내가 뭘 찾으러 왔더라?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팅팅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이것은 두 가지의 잊음으로 변주된다. 하나는 이 잊음의 테마의 반복. 잠시 후에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내가 왜 내려왔더라?라고 말하는 어떤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는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온 NJ의 이야기로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팅팅이 하나의 쓰레기는 버리지만 다른 하나(베란다에도 있다는 그 쓰레기)는 잊게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팅팅)은 왜 잊어버렸을까? 쓰레기를 버리러 간 주차장에서 리리와 그녀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베란다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다리 밑으로 밀회를 나누는 리리와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잊음은 다음의 이어질 일련의 사건들과 이어진다.

 

 

결혼식장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탄 팅팅과 아빠 NJ의 대화는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관계를 보는 이들에게 간단히 정리해서 들려주며, 동시에 이제 늙었나보다,라고 말했다는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에게 일어날 사건을 다시 암시한다. 물론 팅팅이 이 말을 꺼낸 것은 단순히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이야기를 보는 이들에게 정리하여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삼각관계가 다시 팅팅 자신에게도 비슷하게 변주될 것임을 이 장면은 묘하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다시 결혼식장, 식당에서 극성맞게 축하를 받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시 처음 등장했던 작은 남자아이, 그러니까 가족의 막내 양양은 식당 밖에서 결혼식에 참석한 다른 키큰 여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신발마저 빼앗긴다. 침울하게 다시 식당 테이블에 돌아온 양양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지만, 이 때 이 화면에 붙는 대화는 양양의 엄마(민민)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어른들과의 대화이다. 임신을 한 샤오얀이 흠이 될 게 없다는 엄마의 말에 다른 남자 하나가 '여자는 그런 식으로 남자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즉 양양의 발목에 있던 신발은 이미 여자아이들에게 붙잡혔으며, 이때 양양은 슬며시 '뒤돌아본다'. 여자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즐겁게 노는 중이다.

 

 

이게 겨우 영화의 시작 후 10분이다.

그리고 버릴 단 하나의 씬도 없이 결혼식장에서 시작하여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2시간 50분이 넘는 영화이기도 하다.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을 나보코프는 볼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나보코프가 영화를 좋아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보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척추에 "틀림없이 찌릿찌릿한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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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데 멋질 수 있나

The Book | 2019. 9. 10. 16:40 | Posted by 맥거핀.
너무 한낮의 연애 - 10점
김금희 지음/문학동네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 보면 꼭 술이 땡긴다. 와인에 카나페 같은 거는 말고, 술은 무조건 소주로. 안주는...조금 먹기에 번잡스러운 거, 예를 들어 뼈 있는 닭발 같은 것으로 말이다. 뼈 있는 닭발을 먹으려고 손에 비닐장갑을 끼우다보면 잘 들어가지도 안거니와, 이렇게까지 해서 닭이라는 녀석들의 발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먹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솜씨좋게 장갑을 끼우려는 내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들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김금희가 <보통의 시절>에서 그린 한 풍경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사남매는 성탄절에 모였다. "언니네 집도 아니고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도 아니고 맛집 같지도 않"은 구리의 고향삼계탕집에서. 사오십대가 훌쩍 넘은 그들은 이제 거의 망한 삼계탕집에서 남은 마지막 닭과 너무 익어서 군내가 다 나는 열무김치를 먹고, 김대춘을 만나러 갈 참이다. 김대춘이 누구인가. 김대춘은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전소시키고, 형을 살고 나온 노숙자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렸다고 믿는 그 김대춘을 만나러 간다. 그의 집 주소가 번듯한 아파트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비루하다.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는 '잔존의 파토스'라는 고급진 표현을 썼지만, 사실 나는 비루하다, 외에 더 좋은 표현을 찾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그들은 비루하다. 아니, 나는 <보통의 시절>에 등장하는 그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세실리아>에서 연말마다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허무함과 환멸을 견디는 전직 요트부원 대학친구들, <조중균의 세계>에서 출판사에 갓 입사하여 '해란씨'와 알게모르게 경쟁하는 나(영주), 두 개의 라벨을 붙인 고기를 신고하여, 이제 짤릴 위기에 처한 마트 직원의 방문을 받는 <고기>의 그녀.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필용. 아, 이 친구. 인사이동을 통보받고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에 있던 양희를 떠올린 한낮의 필용. 양희의 사랑한다는 말에 불가해한 기쁨을 느끼던 필용. 그러나...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젊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하고 살아. 애가 어떻게 된 게 이천원으로 하루를 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거 다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

양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면 질려갈수록 필용의 말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어떤 한계까지 올라 찰랑찰랑거리면서 파탄의 전조를 만들어내는데도 계속됐다. 필용은 퍼부어댔다. 아주 세상이 끝난 것처럼 퍼부어댔다.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나간 뒤로도 필용은 자기 말에 취해 마구 떠들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양희를 붙들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양희는 보이지 않았다.

- p.31~32.*

 

아이고, 이 친구야. 그러고도 문산까지 다시 양희를 찾아가서 사과도 못한 이 친구야. 그런데 김금희의 소설에는 비루한 그들의 옆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쌓고 그들 나름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비루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이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 <세실리아>의 세실리아, <개를 기다리는 일>의 여학생,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들은 괄호가 쳐져 있어서 비루한 그들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비루한 그들 뿐인가.

 

우리들 대다수가 잘 모르지 않은가. 조중균을, 세실리아를, 여학생을, 양희를,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비루하다는 사실을. 뭐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차분하게 펼쳐지는 김금희가 그려내는 세계를 읽다말고 나는 종종 딴 생각을 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왜 나는 이때 소주가 먹고 싶어지는 것일까. 왜 이처럼 밝은 대낮에 소주를 먹으면서 무언가를 잊고 싶어지는 것일까. 나도 그렇게 <세실리아>의 왕년의 요트부원들처럼 정신이 완전 빙산이 되어, 대륙으로 이동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온갖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결국은 손해로 끝나는 인생.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며 살아왔지만, 그것을 결국 인정해야 하는 때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하면 조금이라도 덜 비루할 수 있을까. 비루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비루한 거니까 인정해 버리면 낫지 않을까,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

 

모르지. 아마도 그래서 그들에게는 조중균이나 세실리아나 양희가 필요했는지도. 비루한 그들이 나오지만 김금희의 소설에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멋진 순간들이 있다. 비루한데 멋질 수 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세실리아>에서 세실리아가 가려다말고 뒤돌아서서 나를 꼭 안아줄 때, <보통의 시절>에서 상준이 잊기는 어떻게 잊느냐고 말할 때, <반월>에서 단짝에게서 온 편지를 뜯어볼 때. 비루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비범한 순간. 어쩌면 비루한 나도,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가 잠깐 딴 생각을 하며 그런 비범한 순간을 만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주를 마시러 가기에는 쨍쨍한 이런 너무 한낮에.

 

 

* 이 장면은 드라마스페셜로 방영했던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도 나오기는 했지만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 장면을 조금 더 몰아부쳤으면 했지만, 그 장면은 소설보다도 훨씬 순화되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생 양희와 대학생 필용이 어울리지 않았다. 현재의 필용 역을 맡은 '고준'은 나쁘지않았던 것 같지만.

 

**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집이 나왔다. 친필싸인본을 준다고 해서 예약구매를 할까 싶기도 하고, 왠지 아, 너무 싸인할 책이 많아, 하고 좌절하는 작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안할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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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됐고, 그냥 맥주나 한 잔.

The Book | 2019. 9. 10. 16:30 | Posted by 맥거핀.
고독한 직업 - 10점
니시카와 미와 지음, 이지수 옮김/마음산책

 

에세이는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을 적당히 드러내거나, 혹은 적당히 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글 속에 자신을 얼마나 드러냈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그 글 속에 적당히 숨겨진 '그 사람'을 그다지 만나보고 싶지 않은(혹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글은 후자인데,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공감한 평은 책 뒤의 배우 문소리의 평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니 얼른 전화해서 밤새 맥주나 마시자고 빨리 나오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사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마도 밤새 맥주나 먹으면서 할 수 있는 시시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오디션을 진행했던 이야기, 어렸을 때 축농증을 앓았던 기억, 새벽 2시에 만난 돈을 빌려달라던 수상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처음 만나던 기억...그저 허름한 맥주집에서 맥주에 닭다리를 곁들이며, 아..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하고 맞장구를 치며 빈 술잔을 채워줄 뿐인 그런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술꾼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맥주집에서 결국 술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질 이야기에 불과할지라도, 누가 이야기하는가에 따라서 맥주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제에 참석하고는 있지만, 해외 영화감독들이 대체로 쉽사리 영어를 구사하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띠며 정기적으로 맥주만 홀짝이는 장식물로 변해서 일본의 이름을 계속 더럽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2004년의 일이다. 보스니아 분쟁의 격렬한 상흔이 남아 있는 수도 사라예보의 영화제에서도 내 추태는 폭발했다. 인구 400만 명도 안되는 그 나라에서는 일본어 통역사를 찾을 수 없었고, 나타난 사람은 고작 일본에서 고작 한 달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그 지역 청년이었다. 일단 함께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에 있던 단어를 보고 "이건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어, 음, ......잎사귀 같은 채소예요!"라고 대답했다. 아주 친절하고 호감가는 청년이었지만 그 채소가 '시금치'라는 사실이 판명된 순간 내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고, 그날 무대에서의 질의응답을 무모하게도 직접 영어로 감행했다. (하략)

-p. 154

 

이 짧은 발췌문에도 잘 드러나지만 니시카와 미와의 글들은 술맛, 아니 글맛이 살아있다. 뭐 그것을 그녀가 자잘한 유머를 적재적소에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혹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디디고 외부에서 잘 알 수 없는 여러 에피소드를 요령껏 솜씨좋게 들려주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하나의 허구로서 잘 축조된 작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그 세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인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안도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저 사람도 그다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28살에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데뷔작으로 일본 국내 영화상의 신인상을 여럿 수상했으며,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아주 긴 변명> 등의 영화로 여러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화감독일지라도 사실 별 것 없다는 것.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타인을 다그치고, 자기관리에 게으른 나와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 말이다. 누구나가 사실은 '어떤 부분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독파는 커녕 대충 훑어보지도 못한, 그저 활자로 채워진 물체(p.139)"라고 자신의 장서를 돌이켜보는 그녀에게 공감했으리라. (나만 그래요? 나만?)

 

그렇게 우리는 안도하며 살지 않던가. 오늘도 실수하여 부장에게 깨진 옆 동료의 에피소드를 맥주를 홀짝이면서, 오징어와 부장을 질겅질겅 같이 곁들여 씹으면서 듣지만, 사실은 그 순간에 몰래 안도하지 않던가. 그것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사실을, 혹은 매사 잘 나가는 듯이 보이는 저 친구도 사실은 별 게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만 그래요? 나만?) 그래서 니시카와 미와의 글이 조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그녀가 그녀의 일상보다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다. 니시카와 미와 본인의 말대로 '가짜 세계'를 만들어내는 영화감독으로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메가폰을 들고 "액션!"을 소리높여 외치는 영화감독의 이미지를 그녀는 기꺼이 배반시키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동물연기자(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쥐)가 연기를 못해 노심초사하고, 대사를 바꿔달라고 말하는 배우 앞에서 어쩌지, 어쩌지를 속으로 반복하는 다심(多心)한 아줌마(라고 이야기해도 왠지 니시카와 미와는 이해해줄 것 같다)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어쩌면 그녀의 영화가 그렇게 다심한 세계를 다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책을 덮고, 2006년작 영화 <유레루>를 봤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궁금해져서 책을 본 적은 있지만, 그 반대로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뒤늦게 찾아본 것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겉멋이 조금 들었기는 해도, <유레루>의 세계야말로 미묘한, 부서질 것 같은 세계, 사실은 너무도 우리 가까이에 있어 쉽게 뭉개버릴 수 있는, 그러니 더 조심히 다뤄야할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카가와 데루유키의 연기는 역시나 인상적이다.    

 

 

뒤늦게 다는 덧.

사실 이 책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때로는 단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기도 하는 법이다. 하기사 단지 포스터에 끌려서 영화를 본 적은 얼마나 많은가. 이 표지는 영화 <유레루>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사실 장면이라고 하기는 그런 게 이 부분은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형제가 저렇게 흔들다리 위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장면은 영화 속에는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저 장면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 컷들을 영화 밖에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나의 프로필 사진이기도 한 저 장면은 영화 <어느 가족>의 스틸컷이기는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 이 장면은 없다. 그러나 나는 스틸컷을 보고 안도했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그 안도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있다. 그것은 감독이 난간을 기대고 웃는 저 소녀의 모습을 끝내 영화 속에서 보여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 우리가 저 소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얻게 될 무언가, 혹은 잃게 될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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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봉준호

Ending Credit | 2019. 6. 9. 15:27 | Posted by 맥거핀.

 

(영화 <기생충>, <설국열차>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반응 중에 흥미로웠던 것은 찜찜하다, 씁쓸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일종의 성취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눅진하고 불길한 무엇인가를 영화 속에 남겨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길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은 결국 봉준호가 원했던 부분이 아닐까. 영화 속 등장했던 수석처럼 말이다. 영화 속 기우(최우식)는 수석을 껴안고 누워있으면서 중얼거렸었다. 떼어내고 싶은데 떼어내지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가 언제 상쾌한 무엇인가를 준 적이 있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빗속에서 DNA 분석 결과를 뜯어 보았을 때, <마더>에서 진범이라고 잡혀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뭔가 맥이 풀리는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봉준호의 말대로 그가 즐겨 의도한 거대한 '삑사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에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이나,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터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순간에서도 모종의 쾌감보다는 어떤 씁쓸함이나 맥풀림이 더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은 그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돌고돌아 처음 위치에 와 있는 것들.  <살인의 추억>의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논바닥 옆 어두운 배수로와 다시 돌고돌아 영화 마무리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배수로, 아니면 <괴물>에서 한강 둔치에 서 있던 컨테이너 건물과 다시 어두운 한강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 <마더>에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되는 마더의 춤과 영화의 끝 고속버스 안에서의 망각의 춤. 이것은 <기생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 반지하 방의 창에서 시작하여 걸려 있는 양말들을 비추며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대로 반복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 반지하 방에는 여전히 기우(최우식)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어두운 배수로 안에는 여자가 죽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위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괴물>의 마지막에서는 컨테이너에 원래 있었던 아이는 죽었지만, 대신 다른 아이가 살아남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지하방 그 이전에 환상이 이어졌다. 혹시 사실인가 싶은, 믿기지 않는 환상이.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 있고,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는 참이다. 돌고돌아서 얻은 근본적인 계획.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있는 한, (아니 사실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지라도 돌고돌아야만 한다. <설국열차>에서 결국 같은 곳으로 되돌아올지라도 열차가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설국열차>. 영화가 봉준호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중에서 굳이 가장 가까운 영화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 영화 <설국열차>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 그 마지막의 그로테스크한 활극은 설국열차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혁명을 꾀하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열차의 머리칸으로 들어가고, 뒤에 남은 남궁민수(송강호)가 일군의 약에 취한 무리들과 대결을 펼치던 장면. 크로놀에 취한, 아니 사실은 크로놀로 상징되는 다른 무엇에 취한 그들은 기꺼이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처단할 참이다. 그들은 열차를 멈추게 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니까.(예전에 <설국열차>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커티스는 처음부터 열차를 멈추게 할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차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떻게든 돌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 윌포드의 뜻대로.      

 

커티스의 반란이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인 것은 결국 그의 시도가 열차를 계속 돌아가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스템의 설계자 윌포드는 기꺼이 그를 머리칸으로 오도록 안내한다. 위험한 것은 커티스가 아니라 열차를 멈춰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남궁민수였고, 그래서 그는 광기에 가진 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로놀에 취한 그들은 윌포드를 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을 위해서 남궁민수를 기꺼이 처치할 것이고, 그것은 <기생충>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버전으로 변주된다.

 

지하실에 있던 남자가 기택(송강호)과 기우 가족에게 달려드는 것은 언뜻 보면 아내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가 했던 몇 개의 말들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말이다. 존경합니다, 박사장님! 리스펙!! 아니,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는 이를 방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박사장(이선균) 내외도 피해자이며, 그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고 기꺼이 변호를 해주는 수많은 글들. 아니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그 존경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주되고 있다. 이미 잡스와 빌 게이츠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용이라고 여기에 올라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 이미 올라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들은 바로 지금 지하철 내 옆자리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낯선 남자다. 아무나 밀치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러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들, 크게 음악을 들으며, 백팩으로 쿡쿡 찔러대는 젊은 남성들에게 나는 냄새를 혐오하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재벌들의 기사를 애써 읽으며 감탄한다. 리스펙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와를 연발하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이미 <설국열차>의 윌포드에 혹한 바가 있다. 열차는 돌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좁은 구석 그 안에서 열차를 돌리기 위한 부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열차는 돌아가지 않나요? 그것을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간단하게 말한 바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머리칸은 머리칸, 꼬리칸은 꼬리칸. 자, 그렇게 그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러, 아니 사실은 별도리가 없어서 '내려간다'. 빗줄기는 쏟아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 후, 그들은 겨우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침몰하는 중이다. 모든 곳은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변기는 계속 오물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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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씩

The Book | 2018. 1. 22. 13:36 | Posted by 맥거핀.

쇼코의 미소 - 10점
최은영 지음/문학동네

 

 

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

 

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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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치 않음

Interlude | 2017. 10. 8. 14:28 | Posted by 맥거핀.

 

(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 있음)

 

 

연휴 기간 2편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았지만, 한 편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시 보았고, 한 편은 TV에서 하길래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2편의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한편으로 송강호라는 출중한 배우가 두 영화 모두 극의 중심에서 거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두 명의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실존 인물들, 그 인물들은 송강호라는 육신을 입고, 거의 다시 스크린에서 걸어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두 영화가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송강호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크게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남아있는 어떤 묘한 '석연치 않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크린 안의 두 인물, 그러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과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두 영화는 초반부, 코믹한 터치로 두 인물의 소박한 속물성, 혹은 속물성 속에 드러나는 인간미 같은 것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가벼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그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하는 동력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에게 그것이 가족, 특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변호인>의 송우석에게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끝까지 무엇인가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중반부의 큰 사건, 즉 <택시운전사>에서는 광주에서의 일들, <변호인>에서는 '부림 사건'이 그 인물들을 크게 변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변호인>의 송우석은 계속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불어 넣는다.

 

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들에서 살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두 영화의 애초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말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빌려왔다면, <변호인>은 송우석(노무현)을 말하기 위해 '부림 사건'이라는 사건을 빌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사건에서 두 인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건에 비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사복은 택시 운전사, 그것도 광주 택시 운전사가 아닌 서울 택시 운전사이고, 송우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단골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즉 어쩌면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한 걸음 비껴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인가,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지 같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약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이 지켜낼 수 있었던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지켜낼 수 없었던 무엇인가는 선명해진다.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과 독일 기자를 끝까지 도와주는 광주 택시 운전사 태술(유해진)이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김사복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었을까, 아니면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고문받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산산이 부서졌을까, 아닐까.  

 

영화는 물론 고약한 질문을 할 틈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조용히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 부여하고 있는 그 역할로서의 자세. 그렇다. 여기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택시기사나 변호사가 아닌,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단순히 직업명 그 이상의 무엇을 이 제목은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각각의 영화가 키포인트로 내세우는 장면, 혹은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에게 하는 대사, 손님을 두고왔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송우석이 국가는 국민이라고 재판정에서 일갈하는 장면. 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 장면들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는 직업인의 윤리에 가까운 것이다. 김사복은 광주에서 서울로 손님을 데려다주어야 하는 택시운전사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만 하며, 송우석은 변호인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국민이 아닌, 단지 쿠데타권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갈한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송우석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김사복에게는 더 가혹한 것 같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간 것은 단지 택시운전사의 직업윤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직업윤리 이외의 어떤 것, 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않다. 그렇다면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김사복은 왜 광주로 돌아갔을까. (사실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송우석에게도 물어볼 필요는 있다. 그는 왜 진우를 변호하기로 결심했을까. 사무장의 말대로 앞에 놓인 편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면서 말이다.) 독일기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는 죄책감? 사람들, 특히 대학생 재식(류준열)을 버려두고 나왔다는 부채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재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돌아간 직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제대로된 소식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 이 중 어떤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화 속에서 묘하게 눙쳐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김사복이 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3한강교'를 따라부르다가 울면서 핸들을 꺾는다. 혹은 송우석이 부르르 떨면서 국가권력의 하수인에게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각각 기억에 남을 한 장면, 혹은 송강호의 두 개의 명연기. 아니 나는 냉소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송강호가 복잡한 얼굴로 울 때, 나도 곧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송강호가 그렇게 법정에서 소리칠 때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 송강호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석연치않음이 여기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눙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김사복이 기어코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왜 핸들을 꺾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잡한 답이 아니라, 그가 그 순간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는 (허구적) 사실, 송강호가 그 순간 보여준 명연기이다.

 

그 명연기를 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복잡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혹은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없는 복잡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말할 수 있는 다른 케이스. (뭐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같은 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광주 그 이상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자 하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겹겹이 쌓인 물음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혹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숭고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이렇게 숭고해질수도, 잔인해질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한 인간과 잔인한 인간은 분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가,라는 등의 질문들. 그것은 분명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려는 그 자세는 중요하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는 그 인간을 어쩌면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는, 혹은 영화 <변호인>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는다. 겨우 질문을 했다하더라도, 답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영화는 조용히 작은 승리로 나아간다. 그 작은 승리, 혹은 불완전한 승리는 묘하게도 직업인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택시운전사는 결국 손님을 태우고 나와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변호인은 완전한 무죄는 아니지만, 불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에게 개인적인 에필로그까지 기꺼이 부여해준다. 그것은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된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 따뜻한 택시운전사로 살고 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에게 변호사 취급도 못받던 송우석이 변호사 99명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작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작은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그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과 인물들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인간 존재 일반에 대한 어떤 물음들을 할 틈은 영화는 끝내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급격하게 주인공 개인적인 차원으로 재빨리 자리매김되며, 관객의 빈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뿐이다.

 

그것이 최근의 영화들, 특히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취하는 전략은 아닐까. 사건보다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 그 인물을 관객들로 하여금 재빨리 동일시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불완전한 승리', 혹은 '작은 승리'를 부여하는 것. (물론 관객은 승리를 더 좋아하므로,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완전할지언정 어떻게든 승리의 구조가 된다. 어떤 것을 승리의 지점으로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뿐.) 그리고 우리는 인물의 편에 서서 그 '불완전한 승리'에 안도하면서 오로지 그 불완전한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혹은 설령 패배했을지라도 스크린 속에서 장렬하게 부활한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기억해서 언젠가는 '완전한 승리'를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몇가지는 장담해도 좋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인공의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줄 때 영화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특히 송강호 같은 배우가 스크린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이다.) 그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주려고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현실에서는 애쓰는 누군가, 스크린 안에 숨겨진 누군가는 없다는 것. 그 때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덧.

영화관에서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히 좋게 보았다. 그것을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두 번째 볼 때에는 그런 감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급격한 감흥과 급격한 무감함은 무엇으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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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Ending Credit | 2017. 1. 19. 17:1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걷는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었고, 나이가 들어 예전보다는 보폭이 줄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목표지점을 향해서 정확히 나아가는,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다.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다시 돌아와 만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영화가 끝난 후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의 걸음이다.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많이 걷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벗겨진 머리에 비니를 쓰고, 늘 입는 점퍼를 입고 그는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고(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를 돌리기 위해 돌아다니고),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간다. 그는 그렇게 움직여야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목수로 살아온 오랜세월,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그의 몸에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관공서의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들이다. 전화로 이루어지는 수급 자격심사,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 꼼짝없이 앉아서 들어야하는 의미없는 이력서 작성 강의.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다니엘이 관공서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항의문구를 쓰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감동을 준다. 그것은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흥미롭다. 영화는 암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전화 통화로 시작하는데, 이 통화는 꽤 길게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이루어지는 이 암전 속의 통화는 꼼짝없이 어둠속에서 그 내용에 귀기울여야하는 관객에게 그 통화의 내용을 주목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떤 답답하다는 느낌을 시각적으로도 제공하는데, 이는 그 통화의 당사자인 다니엘이 느꼈던 심정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효과를 낳는다. 다니엘과 관공서 직원의 통화, 그러니까 심장병을 앓아서 일을 쉬고 있는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을 대상이 되는지, 혹은 일을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지를 평가하는 이 통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상당히 부조리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 심사가 단순히 행정편의를 우선하여 전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 질문들 역시도 매우 부조리하다. (심장병을 앓았던 다니엘에게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방식에 다니엘이 항의하자, 직원은 그런 식으로 항의하면 수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부조리한 질문들을 반복할 뿐이다. 일을 한동안 하지 말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은 다니엘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희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부조리한 코믹극은 영화의 내내 이어진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사람은 너무 기가 차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물론 가장 희극적인 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산업의학전문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가 소재인 이강현의 다큐 <보라>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전의 리뷰에서 나는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이 장면에서 이 의사들이 권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지 바보같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지극히 부조리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이런 다니엘의 움직임을 그대로 묵묵히 따라가는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희극적인(그래서 비극적인) 부조리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연대들이다. 그러나 연대라고 해서 어떤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켄 로치가 예전부터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옆에서 한 마디 거들어주거나, 낡고 부서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인터넷으로 대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해주는 것. 이러한 작은 연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켄 로치가 영화적인 트릭을 쓰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이어야 한다는 점. 영화 속 다니엘과 관계를 맺는 이들은 나이나 인종 면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와 가장 큰 도움을 주고 받는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북아프리카 쪽에서 온 이민자 출신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 케이티의 딸이 이민자들의 음식인 쿠스쿠스를 들고 와서 다니엘에게 같이 먹자,고 하는 장면도 있다. 그 대사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식으로만 자막번역이 되었는데, 맥락은 이해되지만 조금 아쉬운 번역이다.), 그와 관계를 주고 받는 옆집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밖에 작은 도움을 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직원이나 도서관에서 그를 도와주는 흑인 청년, 혹은 다니엘이 관공서 바깥에서 스프레이로 글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그를 찬양하는 노숙자도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의 이 보편적인 연대에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선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관공서의 말단 직원들도 여기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여직원 같은 캐릭터도 영화 속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연대와 복지의 어떤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복지도 결국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선별적 복지'라는 말은 누군가가 말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영화 속에서도 케이티의 딸이 식료품 지원을 받는다고 놀림을 받았다며 케이티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두 가지, 그러니까 관공서의 고압적인 부조리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위 사람들과의 작은 연대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로 상징되는 한 인간)은 이 일련의 부조리함을 통해 자존감을 조금씩 침범당하고 잃기도 하지만, 대신 작은 연대들을 통해 그 침해된 자존감을 조금씩 보충해(회복해)나가며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한명의 시민으로 남는다. 그것은 다니엘의 마지막 선언으로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그 선언은 아마도 켄 로치 자신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개도, 보험번호 숫자도, 하나의 화면 속 점도 아닌, 정당한 권리를 지닌 한명의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선언. 다시 말해서 이 선언은 영화의 제목에 있는, 다니엘이 스프레이로 관공서 벽면에 썼던 문구의 서두에 있는 그 말 'I, Daniel Blake'와도 맞닿아 있다. 

 

켄 로치가 영화 속에서 말해오던 것은 늘 그런 것이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심플하다. 켄 로치의 영화는 다니엘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가야할 곳을 알고, 그곳에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심플한 걸음걸이. 이 영화에서도 켄 로치는 그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장면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컴퓨터 좌석이 다 찼다는 말을 다니엘이 듣는 씬이 있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장면 전환하여 잠시 후 다니엘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장면만 보여줘도 될 듯 하지만, 켄 로치는 굳이 이 사이에 다니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리 상점가를 배회하는 장면을 끼워넣는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늘 그러듯이, 이 영화에서 그 쌓인 장면들은 마지막에 힘을 발휘한다. 그의 그 선언이 단지 말뿐인 공허한 선언이 아님을, 그가 차곡차곡 쌓은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예전부터 그랬듯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낙관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어떤 낙관적인 현실이 있는가? 영화 속 결말에 어떤 낙관이 있는가? 하지만, 낙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닐까. 나는 그 마지막에서 어떤 낙관을 읽어내고 싶다. 다니엘의 글을 케이티가 읽고, 그곳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면면을 차례대로 비추는 그 마지막. 다니엘과 작고 사소한 관계들을 주고 받았던 여러 사람들, 다니엘이 변화시킨 작은 세계. 켄 로치가 그리던 세계는 거대한 투쟁만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작고 사소한 관계들, 갈등들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영화는 후기에 들어올수록 점점 도리어 낙관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체로 영웅을 요구하거나 어렵고 힘든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한 명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은 어떤 결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이것을 영화 속 포스터에 있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범위내에서의 점핑 말이다.

 

 

 

 

- 2017년 1월, CGV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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