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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Interlude | 2011. 9. 9. 23:5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주제로 몇 편의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 중에 두 편,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이강현 감독의 <보라>를 보았다.

꿈의 공장 Dream Factory, 김성균 감독

멍청한 질문과 당연한 대답. 왜 노동자(굳이 무식하게 구분하자면 '공장'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좌파적 성향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가. 어떤 우연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노동자가 되는 것인가, 혹시 노동자들 사이에 소위 불순분자들이 자꾸 끼어들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노동자들이란 유난히 욕심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아직까지도 일부 전근대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연대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방편이다. 여러 방법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나마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는 것이다.

2007년 3월,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콜텍사의 인천공장 근무자 55명이 집단 정리해고됐다. 다음달인 4월에는 대전공장이 '무기한 휴업'이란 성의없는 종이쪽지를 내 건채 폐쇄되었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그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생존(복직)을 건 사투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노동자들만 그려내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방식의 연대가 있다. 그것은 여러 뮤지션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흐른, 브로콜리너마저 등 수많은 뮤지션들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여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콘서트'를 했고, 이 연대는 바다건너 수많은 외국의 뮤지션들(예를 들어 '오디오슬레이브'의 톰 모렐로, 오조매틀리 등)에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사실 연대가 실제적으로 가능하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다운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한편으로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들어왔다고, 당신이 이해한 것은 아니다'라는 영화의 자막처럼(아마도 노래가사나 제목인 듯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알아본 것은 모리씨의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뿐.) 이 영화는 연대의 여러 어려움에 대해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영화 속 뮤지션들의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콜트/콜텍의 기타가 다른 기타보다 상대적으로 싼데, 내가 만약 돈이 있다면 모를까, 돈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그 기타를 사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가 기타 이외에도 이미 수많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부당하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타만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혹은, 설혹 어떤 물건이 예를 들어 아동착취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라도 사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테니까...같은 질문들.

동시에 이런 연대와 관련된 질문들 외에도 영화는 여러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외국인은 말한다. 당신(콜트/콜텍 노동자들)의 CEO가 그렇게 부당한 인물이라면, 당신들이 왜 그렇게 복직을 주장하는지? 차라리, 당신들이 나가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기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질문은 현실의 벽을 맞고 튀어나와, 혹은 악보 속의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노동자들을 감싼다. 이 많은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무슨 돈으로 투자를 하고 공장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꿈을 꾼다.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기타를 만들어내는 꿈을, 그리고 그런 기타가 여러 뮤지션들의 손에 의해서 훌륭하게 연주되는 꿈을.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이제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외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편리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에 불과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의 가증스런 의미와 '연대'란 왜 필요하며, 그 앞에 놓인 장벽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노동자들의 애타고 필사적인 호소로, 그들을 도와줄 것처럼 보였던 팬더나 깁슨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결국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다(물론 이들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콜트/콜텍의 그런 부분을 예전부터 충분히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콜트/콜텍사의 복직 문제는 여전히 우리 법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의 공장을 향한 애타는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진다.


보라 The Color of Pain, 이강현 감독

엇, 이게 뭘까. 상영시간 텀이 짧아 저녁 대용으로 구석에 앉아서 몰래 먹던 참치김밥이 목에 걸린다. 이강현 감독의 <보라>는 기이한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저 족보 없는 구도는 뭘까. 산업체에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와 업체 직원의 대화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어떤 직원의 등 뒤의 사무실 구석에서 이들을 화면 한 귀퉁이로 몰아넣고 찍고 있다. 감독이 너무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찍는 걸까, 혹은 이건 일종의 몰카인걸까.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구도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의 내용상 이 영화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모습과 노동자들과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들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영화 가운데에서 커다랗게 보여지는 법은 좀처럼 없다. 카메라는 구석에 박혀 있거나 천장 가까이에 가있고, 인물들은 화면의 구석에 밀려나 있다. 때로는 인물은 말하지 않는데, 어디선가 말소리들이 들리고, 인물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소리는 공장 소음에 묻혀 있다. 인물은 소외되어 있고, 다른 물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요즘에 말하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한 뭐 그런 단어, 그러니까 낯부끄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예를 들어 '노동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 같은 것일까.

먼저 팜플렛에 나온 영화의 소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작업환경 점검, 건강 상담, 직업병 상담)를 현장에서 받도록 되어있다. 이 영화는 위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그러므로 의사와 보건관리기관의 대응은 사후적이고, 그 대응의 최대치는 단지 조사하여 표본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동시에 부조리해보이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비디오를 면밀히 체크하며 할머니가 고추밭에서 일분에 몇 번이나 쭈그려 앉는지를 세는 의사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이유는 그 의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행동이 근골격계질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밝혀낼 수 있어도, 그 할머니의 그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동시에 그런 조사가 그렇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가 왜 아픈지는 딱 하루만 일해보면 알아요). 또 한편으로 보건관리기관의 특정 약품에 대한 역학조사발표 중에 이루어지는 마이크 조작미숙으로 큰 소음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단순히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발표내용 때문이다. 이미 10명 이상이 넘는 노동자가 한 공장에서 죽어나갔음을 밝히는 그 사후성이.

또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사들은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이 그러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유리섬유를 다루는 공장의 모습과 어떤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발언의 교차편집. 예전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했다가 이제는 몸이 망가져 거의 집안에 갖혀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증언. 그리고 이제는 석면이 거의 유리섬유로 대체되었다는 공장의 설명과 유리섬유는 현재 완전히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자막. 그리고 교차되어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증언. 아..글쎄, 그 공장에서 2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갑자기 영향을 미칠 줄 알았나. 이제 대체된 유리섬유는 노동자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가 되서야 나타날 것인가.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이후이다. 영화는 이렇게 꽤나 장시간 노동현장의 보건관리를 다룬 후 갑자기 어느 인터넷 서버관리자의 밤샘근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활동(이것은 그 전의 노동조합에 계신 분이 공들여 회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겹쳐진다)과 두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의 인터뷰를 보여준 후 갑자기 망가진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는 약간 사짜 풍의 남자의 작업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조화일까. 앞의 노동현장의 모습과 뒤의 취미활동의 대비를 생각해보면, 이 중간의 인터넷 서버관리자는 일종의 브릿지이다. 그의 노동의 형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취미와 노동의 중간에 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는 감독에게 자신이 취미로 만든 홈페이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 취미의 영역에서 영화는 달라진다. 인물들은 가운데에 위치하기 시작하고,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며, 심지어는 BGM이 깔린다. 취미로 사진을 찍고, 야구를 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깔려지는 그 아름다운 BGM을 들을 때의 안도감(이는 앞의 공장의 소음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취미라는 것과 대비되는 노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시 일깨운다. 그것은 노동은 생존이라는 것. 취미로서의 행동들과 앞의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결국 생존을 걸고 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이라는 점.

그렇게 보면, 인터넷 서버 관리나 하드디스크의 복구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만은 않는다. 인터넷 서버는 결국 수많은 하드디스크가 모아져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수많은 기억의 집적인 것.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러 온 남자에게 묻는 복구의 이유. 거기에는 10년간 모아온 수많은 음악 파일이 들어있고, 사진들도 들어 있고...취미로서의 기억들의 집적. 그러나 이와 대비되어 기억되는 영화 전반부의 어떤 풍경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에게 의사가 묻는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세요. 몇 시간이나마나 하루 왠종일하지 뭐. 그럼 매일 그렇게 왠종일 하세요. 아니 매일 그렇게야 못하지. 왠종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언제부터 농사를 지으셨어요. 글쎄 얼마나 했나. 기억해 보세요. 시집올 때부터 했지 뭐. (하하 웃으며) 글쎄 시집을 언제 오셨냐구요. 18살 때 왔지....노동의 시간은 엄청나게 집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에 없는 것. 노동의 시간이란 축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고통의 축적인 것, 어떤 의미에서는 망가져버린 하드디스크와 같은 것.(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간의 연결 방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감을 아주 극도로 짧은 암전으로 처리한다. 어쩌면 노동이란 이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없는, 지나고나서 보면 극도로 짧은 암전같은 것, 남은 것은 망가진 몸뿐인 것.)

노동이 결국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이강현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보라(The Color of Pain)'인 이유가 보라색이 멍이 든 색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 영화의 촬영 대상으로서의 공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인터뷰(그러고보면 이 영화에서 한 노동자가 "사고나는 장면은 언제 찍을거냐"며 그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 아닌가 라고 물었던 컷이 있다. 또한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촬영한 화면을 보는 장면도 있는데, 지아장커의 <24시티>나 <무용>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를 했다. 그 인터뷰를 곱씹어보면 이 영화가 더욱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나마 사람들이 찍을만하다고 허락해준 공장들과 인터뷰들이 이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에는 어떤 장면들이 담길까. 전작 <파산의 기술>에 이어, 이강현 감독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2011년 9월, 서울 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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