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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인력거, 이성규

Ending Credit | 2012. 1. 3. 16:55 | Posted by 맥거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 기본적으로 좋은 글이란, 좋은 리뷰란 글쓴이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일 것이다. 그리고 좋지 않은 리뷰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글쓴이의 생각이 왔다갔다하거나 백과사전적인 정보만이 가득한 리뷰일 것이다. 물론 항상 자기 눈에 눈곱은 보지 못하는 법이어서, 말은 이렇게 해도, 내 지나간 리뷰들을 보면, 뭐 이런 소리만을 잔뜩 써놨지 하는 리뷰들이 부지기수다. "지금 다시 쓰라고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텐데"라고 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질테니 더 이상의 생각은 관두기로 하자. 아무튼 글을 쓰기 전에는 대체로 한 두 가지의 생각은 정리하고 쓰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말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비슷한 장면을 붙여두고 있다. 이 영화는 인도 캘커타의 인력거꾼 샬림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취재한 다큐멘터리이다. 그 샬림은 영화의 처음 더 이상 자신을 찍지말라고 화를 낸다. 당신은 나의 친구도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찍히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저 외국인일 뿐이며, 언젠가 돌아갈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나 감독은 카메라를 뿌리치는 그를 껴안으며 말한다. 다 이해한다고, 우리는 친구이지 않냐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병든 아내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그간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을 쓰려고 결심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돈을 이렇게 써야 하다니, 어떻게 모은 이 돈을. 그리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고, 힘들어하는 나를 찍지 말라고.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이 장면들을 보는 상당수의 관객들은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을 앞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러한 마음들을 감독에게 묻는 관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의 한가지 질문. 왜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사주지 않았는가. 감독은 말한다('오래된 인력거 블로그' 제작노트 http://blog.naver.com/report25?Redirect=Log&logNo=150127999834).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샬림은 그 돈으로 고향에 집을 지었으며,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는 감성적으로 풀 수 있지만, 온정주의로 풀어서는 안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샬림 개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와 착취구조인 인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도 연관되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점이라는 것. 이와 관련하여 김영진은 <씨네 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835호). "<오래된 인력거>는 이 지점에서 솔직하다. 설령 그것조차 자신들의 윤리적 곤란을 드러냄으로써 정당화하려는 방편으로 삼는다고 비난한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았다. (중략) 대체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소비하지만 그것에 대해 별다른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정면으로 그 불편함을 드러낸다."

글쎄. 이 영화가 그 균열을 지그시 응시하고 드러내보임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불편함을 안겼다는 지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것(불편함)이 과연 충분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조금 의문이 간다. 김영진은 "이 당당함이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화하는 대다수 인습적인 텔레비전 카메라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준다. (중략) 카메라로 그의 삶은 보편적 휴머니즘이라는 틀 안에, 공감과 연민과 위로의 틀로 가장한 수직적인 시선의 압제에 굴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들은 과연 이 영화를 본 이후에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감독이 말한 '신분제와 착취구조에 대한 관심, 그것이 우리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불행한 인도의 인력거꾼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것,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 인도여행에서 그저 낯선 관광객이 되어 인력거를 타지 않는 것(그러나 영화에 따르면 이 인력거도 보기 안좋다는 이유로 인도 정부에 의해 곧 금지될 예정이다), 인도 정부에 카스트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 물론 이는 농담이면서,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영화를 도리어 그런 불편함을 사라지게 하는 진통제로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도의 카스트제도, 그리고 그와 연관이 있는 가장 원시적인 노동이자 비인간화된 노동처럼 보이는 인력거(물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때로는 상상이상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니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지독한 가난,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지독한 가난. 우리는 사실 대부분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즉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예상할 수 있는 어떤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빠짐없이 재생된다. 그것에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새로움의 차이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 영화를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그래도 이런 영화 봤으니 되었어, 왠지 마음의 짐을 조금 덜한 것 같잖아, 이런 면죄부. (<워낭소리>가 결국 어떤 식으로 관객에게 소비되었는지를 이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이 영화의 어떤 아이러니한 점은, 앞과 뒤에 샬림이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를 내는 장면을 붙이면서도, 그 모든 장면들, 즉 샬림이 찍힌 모든 장면들을 결국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찍지 말라고 항변하는 샬림의 장면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도리어 역으로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윤리적 면죄부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즉 관객을 조금 더 몰아붙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영진이 <하얀 정글>에 한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결국에는 관객을 정면으로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의지와 결기는 없는 상태"가 아닐까.  그러므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영화의 마지막 이후이다. 자신을 찍지말라고 카메라를 뿌리치는 샬림을 어떻게 설득하여 이 영화는 탄생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 샬림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러나 어떤 설명 없이 약간은 급한 봉합을 한다는 인상이 짙다. 샬림은 그 이후로도 가족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있어서 나레이션의 역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외수의 나레이션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친절하다. 그래서 때로 관객의 감정을 미리 예단한다는 느낌을 준다. 즉 내가 판단하기 전에 나레이션이 판단을 내려준다. 이것은 TV 다큐멘터리를 오래해온 감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군데에 있다. 김영진의 말대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그들을 비추려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수직적이고 타자적인 관점의 카메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면서 예를 들어, 외국인을 속여서 물건을 파는 장면을 보면서 도리어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인력거가 단순히 운송 수단이나 가난의 문제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 사회의 계층 문제와 착취구조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임을 이해하게 되며, 샬림의 영화 속 낙관적인 태도들이(감독은 샬림이 인도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넘어서려는 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영화 속 샬림의 동료이자, 샬림보다 더한 영화적 인물인,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노즈를 잡은 한 장면. (샬림이 밝음으로 결기를 보여준다면, 마노즈는 반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으로서 결기를 보여준다. 제작노트에 보면 이 장면은 마노즈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찍었다고 한다.) 마노즈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천민이었던 아버지가 카스트 전쟁 때 지주에게 맞아 죽은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그 지주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샬림의 질문에 대답한다. 도망칠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면서 카메라를 지그시 응시하는데, 카메라에 잡힌 그 눈은 공포에 질린, 그리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눈이다. 이어지는 컷은 10년 전 당시의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한 컷. 감독은 10년 전 카스트 전쟁을 촬영하면서 어린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했었고, 오랜 후에 마노즈의 이야기를 듣고 이 컷을 찾아낸 것. 마노즈의 그 눈은 온연히 바로 그 어린아이의 눈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와 분노를 오롯이 잡아낸 이 영화라는 마법. 오로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대상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기다릴 수 있는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마법.

그래서 2시간도 채 안되는 영화는 때로 그 천배, 만배의 시간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물론 그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감독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 자신이다.



- 2011년 12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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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기대감

Interlude | 2012. 1. 1. 15:15 | Posted by 맥거핀.

어쨌든, 2012년이 왔다. 2012년은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신종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좀비로 변하여, 최후의 인간 단 하나만이 살아남는 해로 그려졌었고, 동시에 각종 연이은 종말들로 지구가 남아나지 않을 것으로 기록된, 그래서 롤란드 에머리히가 발빠르게 <2012>라는 타이틀로 만들어낸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혹여 운좋게 재앙들을 피하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 2년 후에는 사도들은 지구를 점령하려 들 것이고(<신세기 에반게리온>), 그 다음 4년 후에는 인간들과 기계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터미네이터-미래 전쟁의 시작>), 다시 그 1년 후에는 데커드 형사가 복제인간들을 잡으러 다닐 것이다(<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다시 그 2년 후에는...아니 이제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집어치우자.


어쨌든, 2012년이 왔고,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볼 수도 있는 때가 왔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마도 가장 좋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은 어쩌면 가장 슬프기도 한 말일 것이다. 지나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뒤늦게 돌아보는 그 '가장 좋았던 날들', 그것이 가장 슬픈 이유는 이제 앞으로 그런 날들은, 그것과 상당히 비슷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과 동일한 어떤 날들은 이제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그 좋았던 시간들 속에서, 그것이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결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가장 좋았던 날들은 대학 시절일 텐데,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던 때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도 그 때의 우리들은 다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바보 같이 '나이 서른에 우린...'으로 시작되는 노래 같은 것을 함께 불렀겠지. 다시 돌아가라면, 그런 바보 같은 노래로 시간을 때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았던 시간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이 서른의 불안한 미래를 미리 추억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나빴던 날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은 걸까. 과거의 언젠가가 '가장 나빴던 날들'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가장 나쁜 쪽은 아닐테니까. 그러나 또 그것도 그렇게 쉽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 좋은 것과는 달리, 나쁜 것은 언제나 지금이 가장 나쁜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러니...아니 더 우울해지기 전에 이 이야기도 그만 집어치우자.

그러니 2012년을 시작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2011년의 베스트 영화 같은 것을 돌이켜보는 것 같은 것은 그만두자.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가장 좋았던 처음의 그 감정은 아마 그 영화를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보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2011년에 보아야 했으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여전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늘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고, 먹을 수 없었던 포도는 너무나도 달콤해 보이는 법이어서, 보지 못했으나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 영화들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 그 중에 10편을 골라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골라보는 작년 극장 개봉작 중 보지 못했으나 앞으로 보고 싶은, 아마도 보아야 할 영화 10편('극장 개봉작'으로 한정하는 것은 극장에 개봉하지 못하고 영화제 상영이나 반짝상영으로 그치는 영화들까지 모두 포함시키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또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는지...우리는 비열하게도 그것을 '시장논리'라 부른다). 언젠가 보기 위해서 기록을 해둔다.


1.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편의상 번호는 붙였으나, 순서는 없음)


2. 두만강, 장률


3.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4.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5. 짐승의 끝, 조성희


6. 세상의 모든 계절, 마이크 리


7. 고백, 나카시마 테츠야


8.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



9. 종로의 기적, 이혁상


10. 웨이 백, 피터 위어

 


덧.

막상 적어놓고 나니까, 이 영화들이 딱 특정 시기가 겹치는 것이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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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정글, 송윤희

Ending Credit | 2011. 12. 29. 17:54 | Posted by 맥거핀.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좀 더 듣고 싶은 눈길을 의사에게 애타게 보냈지만, 그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투로 문을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다.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그 몇 주 전의 경험. 기침이 너무 심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고, 목은 부어 올랐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지만, 버티다 못해 종합병원에 갔다. 이비인후과 진료를 신청했더니, 진료가 가능한 의사가 특진의사뿐이라며, 그래도 괜찮으면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특진이라는 게 그 이름이 보여주는 만큼의 그런 '스페샬'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의사는 내 목구멍을 아주 잠깐 들여다보더니 감기는 이미 다 나았는데 병원에는 뭐하러 오셨냐는 투로 이야기하고는,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1분 남짓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내가 입을 잘 벌리라는 의사의 지시에 조금 더 효과적으로 따랐더라면 그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특별한 시간을 입 하나 제대로 벌리지 못해 몇 십초나 잡아먹다니, 아주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아주 효과적이고, 게다가 효율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기본진료비에 거의 준하는 특진비가 추가된 처방전과 진료권을 손에 쥔 채 병원을 나왔다. 정말 스페샬한 것은 이제 막 만들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마그네틱 진료권뿐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송윤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그 짧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중반부, 감독은 대형종합병원의 진료실에 들어가는 각각 환자의 진료 시간을 카운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러한 대형병원의 형식적이고도 짧은 진료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그 위에 작게 붙인다. 위의 인터뷰어가 몇 마디 채 끝내기도 전에 들어갔던 환자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30초도 안되는 시간. 연이은 환자들의 진료 시간은 모두 1분에 미치지 못했고, 이 5명의 환자의 평균 진료 시간이 계산되어 자막에 뜬다. 평균 31초.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여러 이야기들 중 그나마 가장 애교있는 편에 속한다. 당연히 위에 적었던 내 짧은 경험은 그런 애교축에도 못 들어간다. <하얀 정글>은 간단히 말해서 '의료판 도가니'이다. 여기에는 현재 병원들이 저지르고 있는 여러 다양한 행태들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소개된다. 나쁜 짓의 향연, 스페샬한 퍼레이드. 그것은 일일이 적기에도 지치는데, 병원 광고가 허용된 이후, 광고 회사에 의뢰해 만들어지는 각종 후기 식의 광고들, 돈을 더 벌기 위해 행해지는 과잉검진과 과잉시술, 그에 비례해서 줄어드는 환자당 진료시간들, 부당한 과다 의료비 청구, 일반실을 줄이고 특실을 늘리는 병원의 새로운 재테크, 제약회사와 의료기기회사와의 커넥션으로 이루어지는 특정약품과 특정기구들에 대한 거의 반강제적 강요... 급기야는 부당 의료비 청구를 제소하였다는 이유로, 다행히 병이 다 나아 돌아간 환자에게 "나중에 재발하였을 때 보자"는 식의 폭언, 또는 부당한 진료에 대해 항의하면 "아니 다른 가족분들도 다 우리 병원 다니시는데, 나중에 어쩌실려고 그러세요"는 식의 멘트를 날리는 경우를 보고 있으면, '아 이게 병원일까, 아니면 조폭집단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본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요즘 점점 여러 다양한 논의들이 나오는 의료 민영화가 되었을 때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현재 우리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영화 전반부에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한 후, 영화 후반부에 앞으로 우리 현실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를 의료 민영화나 건강보험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 그러므로 그것을 본 내 느낌은 의료 민영화란 "지금까지 뒷구멍으로 해오던 나쁜 일을, 이제는 대놓고 떳떳하게 하겠다"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화 속에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답변에서 말한다.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데, 서비스가 나쁘면 안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도태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정남아, 정남아, 아니 증현아, 증현아, 이거 마 궁둥이를 확 주차삐까. 당신이 이해를 잘 못하는 듯 하니, 예를 하나 들어주겠다. 당신이 지금 엄청난 설사로 집을 향해가는 매시매초마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번갈아 영접하는 중이다. 그 때 가까이에 상당히 더러워보이는 화장실이 보인다. 당신은 더럽다며 그걸 멀리하고 꼭 집에 가서 일을 치르겠는가. 괄약근의 기능이 좋은 증현 씨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라면 불가능하다. 의료 서비스는 산업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마이클 무어는 <식코>에서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지금 막 강도를 당했는데, 운좋게 바로 앞에 경관을 만났다. 그런데 그 경관이 "이봐요, 특별근무수당을 지금 내셔야, 저 범인 쫓아드릴 수 있는데요."라고 한다면? 아니면 지금 막 집에 불이 붙어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소방서에서 "일단 출동비부터 결제하세요. 그럼 출동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러나 현재 병원이 하는 행동은 어떤가. 사람이 죽어가도, 일단 원무과가서 '정산'부터 하라고 한다. 아니면, 나가세요. 이게 병원의 행태라는 것이다. 병원이라는 것이 소방서나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와 같음을 보여주는 즉, 소방서나 경찰서나 병원이나 사람의 목숨,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효과적인 비유. 

한편으로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단순히 선과 악의 대비로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부당하게 당하기만 하는 환자가 선이고, 의사들이 무조건적인 악은 아니라는 점(실제로 영화 중 좋은 의사를 만난 경험을 들려주는 환자 부모의 이야기도 있다). 의사들을 무조건적인 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 역시 압박과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이야기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의료수가(酬價) 역시 상대적으로 낮으며, 의사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환자를 상대하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것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현재시각 병원에 내원한 환자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의사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통보되며, 연속되는 회의에서는 각 과별로 수익이 비교되어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동시에 MRI를 한 번 촬영할 때마다 월급이 만원씩 올라간다고 노골적으로 의사들을 회유하기도 한다. 의료수가는 낮고 환자들을 많이 상대해야 수익이 올라가니 각 환자별 진료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과잉검사와 시술이 늘어날밖에(과잉검사는 한편으로 의료사고와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만이 악일까. 문제는 시스템이다. 그들을 둘러싼 거대한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운영하는 정부. 영화는 영리하게 그 시스템의 기원을 밟아 그것의 문제점을 파고 들어간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탄생한, 태어나기는 태어났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건강보험제도. 그것이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진보정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분'에 의해 어떠한 운명에 처했는지.

다큐멘터리라는 관점으로만 보았을 때,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아주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내러티브는 산만하고, 이야기는 때로 중심축을 조금 잃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식코>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식코>만큼 재기발랄하지는 않다. 어떤 부분은 더 설명이 필요할 듯 싶은데,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컷들이 몇 번 삽입되는 것은 의료에 있어서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 쉽게 표현하면 번짐을 의미한다. 물이 번짐처럼, 어떤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여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듯 한데,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니, 조금 쌩뚱맞은 컷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다큐의 문제라고 보이는 것은, 문제의 제시와 강조에만 그칠 뿐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다큐가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결국 제시하는 결론은 '민영화 반대'인데, 그렇다면 민영화만 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병원들은 각종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중간에 그 대안으로 스치듯이 제시된 것이 '주치의 제도'인데, 그것도 설명이 상당히 빈약한 감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이 영화의 모호한 지향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결국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노와 행동이다. 그러나 분노와 행동 이전,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공포'가 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의사이고, 동시에 그 남편도 의사이다. 그런데 이들 역시도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부부 의사도 이럴진대, 그렇다면 일반 우리들은? 일반인들은 의료에 있어서는 영원한 약자이며, 병원에서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의사의 지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근원에 있는 것은 결국 공포감이다. 분노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공포감부터 제거해야 한다. 단순한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필요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분노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우리의 의료 현실이 하얀 정글임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그 정글에 놓여진, 놓여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정글의 묘사에 치중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 보아라, 무조건 보아라. 내부 고발자들의 통렬한 내부 고발이 줄줄이 이어지는 이런 이야기를 아마도 브라운관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찾아서 볼 수 밖에. 누군가는 이것은 이미 다 아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크린으로 다큐멘터리를 볼 때, 관객이 미리 지녀야 할 오로지 한 가지의 마음가짐이 있다면, 불꺼진 극장에서 넓은 스크린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상상 이상의 체험이 되며, 동시에 당신에게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을 던져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한 해, 여러 영화들에 대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잘도 떠들어댔지만, 그 영화들 모두 안 봐도 좋고, 지금 쓰는 이 리뷰도 엉망진창의 거지 같은 리뷰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보아라.

어디든 안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이름붙여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끝끝내 피하지 못할 것은 병원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얀 정글에서.


덧.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923.html
http://goo.gl/XRKV5

링크한 글은 <한겨레 21>과 <라포르시안>에 실린 송윤희 감독과 의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황진미 씨의 '자칭' 설전. 그러나 어차피 황진미 씨에게 비판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 글도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현직 의사의 글도 좋고. 그런데 의사 분들은 30초 진료로 워~낙 바쁘셔서 이런 영화는 안보시는 듯 하다. 찾아보기는 하는데 영 눈에 안 띄네. 


추가 덧(2012.1.3.).

글쓴분의 허락을 얻어, 블로그 글을 하나 링크해둔다. 의사분의 글인 것 같은데, 아마도 현직임상의이신듯한 글쓴이의 이야기가 영화의 이해에 있어 또다른 관점을 줄 수 있을 듯. (확실히 의사분들 입장에서 보는 것과 일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온도차가 있는 듯.)
http://ayako.egloos.com/4653228



                                                                                              - 2011년 12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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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니콜라스 윈딩 레픈

Ending Credit | 2011. 12. 22. 17:14 | Posted by 맥거핀.



(결말부 내용이 '약간' 있음)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봐야지 싶어서, 영화가 거의 씨가 마르려는 시점에 극장에 다녀왔다.

개봉 이후 이 영화 <드라이브>에 대한 평은 대체로 두 개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수많은 걸작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장면들과 환상적인 씬들이 가득한 영화광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평과 다른 하나는 관습적이고 뻔한 스토리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유럽 영화의 소스와 멋진 음악을 살짝 얹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영화라는 평(이러한 것은 영화 속 '버니'가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에 대해 자조적으로 냉소하면서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겹친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평들이 공유하는 지점도 역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그 하나는 그야말로 멋지고 환상적인 음악들이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는 유독 '폼'을 잡는 영화라는 점이다. 그것을 <씨네 21>의 김도훈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했다(<씨네21> 829호). "<드라이브>는 그저 개폼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영화인가. 물론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폼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다만 우리는 좋은 개폼과 나쁜 개폼을 구분해야만 한다." 과연 '좋은 개폼'이란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쳐두고라도, 이 말은 적어도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드라이브>가 그 '폼'을 영화 내내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점, 도리어 그 폼을 영화 내내 과시하면서 뻔뻔하게 (거의 일부러)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액션 영화, 누아르 영화에서 그 폼을 일부러 내보이던 것은 거의 일종의 장르적 관습과도 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과도한 '폼' 즉 허세 또는 '젠체'는 영화 전체를 너무 뒤덮고 있어, 약간은 기이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영화 <아저씨>와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설정상의 여러 부분을 <아저씨>와 공유하고 있다. 정체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한 남자가 이웃집의 여자와 어린 아이를 위해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건에 끼어든다는 것.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설정상의 부분일 뿐이고,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아저씨>와는 조금은 다른 측면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저씨>는 거대한 조직과 일인의 대결 양상이다. 사건은 처음에 커다란 무게로 몰아닥치고, 주인공은 하나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해가며 적의 심장부로 잠입해 들어간다. 반면, <드라이브>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였던 사건이 점점 혼란스럽게 꼬여간다는 인상이 짙다. 예전 숀 펜이 나왔던 영화 <유 턴>처럼, 주인공의 사건은 조금씩 비틀어지며,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고, 처음의 작은 사건은 나중에는 그야말로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커다란 사건이 되어 버린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 영화를 도대체 어떤 영화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아저씨>의 경우 전형적인 액션물이다. 즉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원빈의 머리깎기나 몸매이기도 하겠으나) 주인공의 액션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드라이브>를 액션물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따른다. 결정적이고 무자비한 액션이 몇 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액션 장면은 몇 장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거의 눈깜박할 새 지나가 버린다. 도리어 '액션 그 자체'보다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액션의 전후이다. 예를 들어 그 액션이 막 시작되기 이전의 숨막히는 긴장감, 액션이 시작되기 이전 그가 뒤집어 쓰는 가면, 적을 만나러 가면서 꺼내드는 장도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액션을 둘러싼 아우라, 다시 말해서, 액션의 '폼'이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저씨>는 대전 액션 게임, 혹은 슈팅 게임이다. 스테이지를 거쳐갈수록 적은 강해지며, 최종전에는 그 적의 보스를 무너뜨리고 '클리어'를 쟁취해야 한다. 물론 대전 액션 게임에도 스토리는 있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저 뒷 배경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스테이지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만끽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에 반해서 이 영화 <드라이브>는 전략 시뮬 게임이다. 전략 시뮬 게임 같은 것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전략적인 사고, 빠른 판단력, 민첩한 행동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폼'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시뮬성, 현실감이다. 예를 들어 전장(戰場)을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 게임에서 헤드셋을 쓰고, 분대장의 지휘를 받고, 서로 무선교환을 하며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것. 그런 게임을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겉에서 단순하게 볼 때는 그것은 그저 바보 같아 보이는 개폼일 뿐이다. 그러나 그 게임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적을 잘 조준해 총을 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실제의 전장에 있는 것 같은 시뮬성, 아우라, 폼을 느껴보는 것. (예를 들어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마치 실제의 전쟁인 것처럼 그렇게 피를 토하고, 게임에 임하는 게이머들에게 우주복처럼 생긴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옷은 도리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뮬, 아우라, 신화화를 덧붙이는 것은, 그것에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려면, 다른 말로 해서 고도로 '상품화'하려면 필수적이다.) <드라이브>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그 폼을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주입시켜, 영화 속 어떤 것들을 거의 체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의 시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내일만 사는...' 하는 유명한 대사를 하는 장면과 비교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운전하는 원빈을 정면으로 잡는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멋있는 대사를 내뱉는 원빈의 얼굴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운전하는 라이언 고슬링을 정면으로 잡는 시점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정 주: 2-3개의 정면샷은 거의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린다. 반면 원빈의 정면샷은 조명의 도움을 받고, 길게 지속된다.)) 경찰 무선과 농구 중계를 동시에 틀어놓고, 드라이버는 운전대를 잡고 5분의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의뢰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5분이 거의 다 되어, 그들이 나오고 경찰의 추격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의 모든 관객들은 드라이버와 같이 경찰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 도로에서의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전략 시뮬 게임. 자 이제 어떤 전략으로 추격을 따돌릴 것인가. 물론 드라이버는 멋지게 미션을 클리어하고, 곧이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제목이 스크린에 떠오른다.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은 여기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적인 체험', 말 그대로 영화로 느낄 수 있는 것의 극대로구나!)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한편으로 이 이후이다. 대부분의 시뮬이 그 시뮬성을 자연스럽게 중화시켜 그 시뮬을 현실에서 체험하는 데에서 느끼는 모순을 최대한 덜 인식도록 하는 데에 비해, 이 영화는 그 시뮬성을 거의 의도적으로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시뮬을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 일종의 메타 시뮬이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라디오 속 농구 중계가 현실의 농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아까 말한 처음의 장면도 그러하거니와, 주인공의 직업을 스턴트맨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가면을 쓰도록 하거나, 버니와 같은 영화제작자를 등장시키는 것이 그러하다. 영화 속에서 스턴트맨으로서 가면을 쓰고 (주인공 대역으로서) 가상 영화의 스턴트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뮬 속의 시뮬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야말로 그 시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의 최후의 액션이 그의 그림자로 보여지는 것이 이것의 일종의 상징은 아닐까. 그림자야말로 우리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뮬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이 손으로 '그림자 개'를 만든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다른 것을 연상하게끔 하도록 한다. 이 주인공의 기이한 무표정들과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들이 불러오는 이상한 SF의 뉘앙스들 말이다. 마치 우리가 시뮬로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에 오는 이상한 착각. 예를 들어 마지막 주인공이 그러한 공격을 받고도, 별 충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일종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게임의 가상 캐릭터가 죽어도 다시 돈을 넣으면, 다음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따라서 이 영화를 누아르로 보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누아르라면 주인공의 비극적인 파멸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영화 전체적으로의 보여지는 '시뮬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몇 장면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기이한 모순의 화법을 쓴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것, 즉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그 시뮬을 행하는 자들에게 최후에는 인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그것이 가진 기이한 모순성을 자꾸 끄집어내어 관객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위의 김도훈의 말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개폼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폼임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나 개폼 맞아. 그러니 이 개폼을 더 잘 보도록 해"라고 하며, 자꾸만 드러내는 개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좋은 개폼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장병원이 리뷰에서 말한(<씨네 21> 830호 전영객잔) 신화적 세계의 히어로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경계의 모순, 즉 인간에 가까운 내면과 초인에 가까운 외면이 보여주는 모순이 이 주인공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나타나고, 로맨스와 극도의 폭력이 결합된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뇌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깔리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80년대 레트로 풍의 음악과 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폭력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화면들과의 불균질한 매치로서 보여지기도 한다.   

그 음악들 중 처음 주인공 드라이버와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아이가 차로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과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 다시 한 번 흐르던 'A Real Hero'라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그 반복되는 후렴구 "Real human being and a real hero". 가사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리얼의 인간과 리얼의 영웅. 진정한 인간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속 가상의 드라이버는 리얼한 'Human Being'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리얼한 'Human Being'은 아닐지라도 리얼한 'Hero'였다. 캐릭터는 떠나갔지만, 나는 다시 동전을 집어 넣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게임 속 캐릭터는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게임이라고. 아니, 이게 바로 영화라고.



덧.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드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뭐 그럴 수도...라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캐릭터가 이 영화 속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라이언 고슬링은 새로운 형태의 마초맨을 만들어냈다. 캐리 멀리건도 그 덕분에 아주 아름답게 나온다(상대역이 멋있어야 역할이 빛이 나는 법이니까). 라이언 고슬링에게 '올해의 캐릭터'를,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에게 '올해의 커플'을 내맘대로 수여.  



- 2011년 12월, KU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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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원승환(전직 독립영화인) [2011.10.11]

(원문 주소: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49&GotoPage=1)

 

영화를 접하는 것은 점점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영화관 같은 상영 공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영화는 TV의 등장으로 관람 공간이 확대되어 집에서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등장으로 관람 시간 마저 자유로워졌습니다.(보고 싶은 때에 재생할 수 있고, 관람 도중 중단하고 재개할 수도 있습니다.)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영화전문채널도 생겼고,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WEB으로, VOD로 영화를 접하는 것도 훨씬 편해졌습니다. 최근엔 VOD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케이블TV나 IPTV를 통해) 개봉과 동시에 영화를 접할 수도 있습니다. 독립영화를 접하는 방법도 훨씬 많아졌고 편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영화관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이 시작된 이후 개봉 상영도 많이 보편화되었고, 지상파 TV에서도 방영되며(KBS [독립영화관], EBS [독립다큐관]),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도 선보였으며(인디플러그), (아직은 많은 지역에서 서비스되고 있지 못하지만) 독립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인디필름)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만 먹으면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은 한국 전체 스크린의 1%도 되지 않으며, 예술영화전용관이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면 개봉되는 독립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란 언감생심입니다. 개봉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은 '영화관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외'한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영화관을 통해 관람하는 관객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워낭소리>처럼 엄청난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2011년엔 1만명 이상의 관객이 찾은 독립영화가 많아졌습니다. 독립영화인들이 영화관을 통해 상영하는 기회를 늘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하며 찾아주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존경이라는 말이 과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단한 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주류의 취향과는 다른 취향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립영화 관련 일을 그만 두고 관객으로 돌아가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봐야하는 상황이 되자,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가는 일에 대해 상상해봅시다. 대부분 이런 식이겠지요. 영화를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거나, 가기 편한 영화관을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 볼 영화를 선택해서 봅니다. 인기 있는 주류 영화의 경우, 매진이 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도 관람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영화관들은 몇 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이기 때문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도 많고, 이에 따라 상영 시간 역시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편하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보러가는 일은 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일처럼 행동해서는 곤란합니다. 아무 영화관에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영화를 자주 상영하는 예술영화관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다고 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더라도 상영시간이라는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상영시간과 자신의 일정이 맞지 않으면 영화를 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의 숫자에 비해 개봉하려는 영화가 많은 탓에, 대부분의 예술영화관들이 하루에 여러 편의 영화를 상영하여 영화당 1회씩 상영하는 경우가 잦아 무작정 영화관을 찾아서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사이 개봉 독립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찾는 일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주로 스크린이 하나인 예술영화관이 보다 많은 영화를 상영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멀티플렉스는 어떨까요? 유감스럽게도 멀티플렉스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개의 스크린이 있다 하더라도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스크린이 하나 뿐이라 하루에 여러 영화를 교차상영하기 때문에 상영시간에 내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관의 사정에 내 일정을 맞춰야 하는 조금은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원하는 영화를 꼭 보기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것들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찾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분들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족스럽지 않은 상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찾아주시는 관객 분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독립영화 관객이 된 후, 상영 시간의 아쉬움 말고 또 다른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예술영화 스크린을 찾으면서 알게된 것인데요, 다른 영화와 똑같은 관람료를 지불하고 영화관이 지정한 시간에 자신의 일정을 맞춰 영화관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를 보는 관객에 비해 '항상'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봐야합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 스크린은 해당 극장의 스크린 중에서 좌석수가 가장 적은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 처럼 넓은 스크린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주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영화관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뜻일텐데, 보러가는 영화가 시장성이 떨어지는 영화란 이유로 늘 홀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에게 대단한 혜택을 돌려주고 있는 마냥 스스로를 홍보합니다.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예술영화스크린의 좌석수는 각 멀티플렉스 체인이 가진 전체 좌석수의 1%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무비꼴라쥬라는 브랜드로 가장 많은 9개의 스크린을 운영한다는 CGV의 무비꼴라쥬 좌석수는 9관을 다 더해도 1천석에 미치지 못하며, CGV 전체 사이트 좌석수의 1% 미만입니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관객들 역시 동등한 입장료를 내고 영화관을 찾습니다. 시장성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보다 수익이 낮을 수는 있지만, 대단히 많은 수익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이 존재에는 사업자 측의 배려도 있겠지만, 다른 영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를 감수하는 관객들의 배려 역시 중요한 근간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삐딱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공간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 독립영화가 애초에 개봉 상영을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환경이 얼마나 나아진 것인지 생각하며 행복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한국에 등장한 이후, 각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은 영화관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과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영화관객수는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이전보다 늘어났습니다. 이런 변화가 독립영화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찾아보는 환경이 지금 보다 조금 더 나아진다면, 개인의 일정을 영화의 일정에 맞추지 못해 관람을 포기한 관객들이 영화를 찾게 될 것이고 보다 많은 새로운 관객들 역시 유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CJ E&M 픽쳐스의 계열사인 필라멘트 픽쳐스가 배급한 <파수꾼>은 영화관이 배려한다면 독립영화 역시 조금 더 많은 관객이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작은 스크린, 작은 상영관 크기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은 관객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관을 사랑하는 관객들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이 이런 열성적인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개선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를 공짜로 보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람료 이상의 개인적 비용을 지불하고도 기꺼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쓰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때엔 지금보다 큰 상영관의 넓은 스크린에서 독립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오기를 살며시 바래봅니다.


 

어떤 자기위안으로 이 글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의 두 가지의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는 멀티플렉스에 대한 것인데, 현재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멀티플렉스는 대부분, 독립영화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 한 개의 영화를 몇 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걸어, 멀티플렉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관객의 선택권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대부분의 멀티플렉스의 경우 독립영화나 '소위' 예술영화들을 거의 상영하지 않는다. 서울을 예로 들자면, CJ CGV의 무비꼴라쥬나 대한극장 등이 그나마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인데, 그 라인업을 보면 거의 구색맞추기에 가깝고, 또 상당수의 영화들이 1-2주의 상영으로 그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개봉 하루이틀만에 교차상영(2개 이상의 영화를 번갈아 한 관에 상영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겨우 찾아야만 알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더라도, 이미 상영관을 확인해보면, 상영이 끝난 이후인 경우가 허다하다.

보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작은 상영관, 작은 스크린, 불편한 관람 환경에서 상영되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작은 영화들은 지하 1-2층, 혹은 아주 꼭대기의 아주 작은 상영관에서 상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독립 영화들과 예술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일단 극장을 찾는 교통편에서부터 고역을 치러야 하며, 작은 스크린과 좁은 의자에, 앞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가리는 불편한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글쎄. '좋은 영화'를 보여주므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좋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관객들의 '호의'로 웃어넘겨야 하는 것일까. (요즘 왠만한 멀티플렉스에서 앞 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가린다면, 아마도 관객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작은 영화관에 갈 때는 도리어 사람이 많다면 걱정부터 되기도 한다. 평소와 같이(?) 사람이 없다면,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때로는 웃어넘길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경우도 많다. 단순히 '자리'의 불편함을 넘어, 형편없는 영사 환경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가 그런 경우인데, 예를 들어 대한극장을 관리하는 분들은 작은 영화가 주로 상영되는 지하 1층 상영관이 거의 1년 내내 핀트가 나간 상태에서 영화가 상영되며, 그래서 때로는 심할 정도로 뿌연 화면을 보여주는지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CGV 관계자들은 대학로 CGV 지하에 있는 작은 상영관인 5관의 스크린 가운데에 미세한 찢어진 틈이 있어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서울이라서, 이런 영화들이라도 볼 수 있으니 낫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작은 영화관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나마 버텨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해야하는 것일까(그간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던 많은 영화관들이 사라졌으므로). 구색맞추기라도 멀티플렉스들에서 독립영화들을 (아주) 가끔 상영해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덧 1.

그래서 요즘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주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들을 상영하면서도 거의 최상의 상영환경을 자랑하는(멀티플렉스들과 비교해도 동급최강의), 건대에 있는 KU시네마테크이고, 다른 하나는 큰 영화제는 물론이고, 작은 영화관들에서 상영되는 자잘한 영화제들이나 상영 소식들을 잘 정리해서 전달해주는 여기 '알라딘 무비 어드바이저' 서재이다. 개인적으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는 편인데, 어느 사이트를 보더라도 여기 서재처럼 총망라하여 잘 전달해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담당자님의 성실한 노력에 감사를 표할 뿐이다.

덧 2.

글이 링크가 된 트위터에 다음의 추가 문구가 달려 있던데, 적극 동감한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이 나라에서 독립영화 따위를 극장에서 보려면, 우선 졸라 자유업이거나 백수거나 둘중에 하나여야 하나보다."



:

르 아브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Interlude | 2011. 12. 13. 17:12 | Posted by 맥거핀.



<르 아브르>에 대한 짧은 평.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불가능은 가능해지고, 기적은 (말그대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그 내용만 동화와 비슷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형식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동화 혹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와 비슷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는데,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뭔가 코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은 과장된 효과음으로만 제시되며, 그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크게 얻어맞아도 우리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동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우리는 결국 톰의 모든 악행이 제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그리고 결국 톰이 제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뭔가 약간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동화가 결국 아주 기괴한 이야기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아주 힘든 이야기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유럽으로의 (아마도 불법적인) 밀항(인간 거래),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 소년의 탈출. 많은 이들이 결코 상상하지 않는, 아주 먼, 뉴스에서나 나올, 아니, 뉴스에서도 잘 나오지 않을 그런 이야기. 동화적인 분위기와 이 힘든 서사가 결합하였을 때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힘든 서사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을 때마다 쉬운 선택을 한다. 이 아주 힘든 서사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이를 때마다 쉬운 동화적 데우스마키나가 출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컨테이너에서 탈출할 때의 동화적인 시퀀스들, 감옥에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때 동화적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혹은 소년의 탈출 비용으로 3000유로가 필요했을 때 남편과 아내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동화적 화해.

글쎄. 이것이 어떤 영화적 솔직함이라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늘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분리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늘 동화라는 것이 그 표면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 외에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여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의 소박한 진심이 서사적인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커다란 벽이 그저 간단한 동화적 처치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조금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찾아오는 몇 개의 작은 (거짓과 같은) 기적들 속에서 마침내 찾아온 진짜 기적, 그 기적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었겠지.



덧.

같은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의 <약속>은 소년과 아프리카 여인을 지하철 속의 출구없는 통로에 가둬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소음은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나,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기 불편한 세계가 <르 아브르>의 세계라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보이나, 기꺼이 들여다봐야할, 그리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약속>의 세계는 아닐까. 




- 2011년 12월,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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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김기덕

Ending Credit | 2011. 12. 10. 22:1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 2011년 12월,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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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로버트 알트만

Ending Credit | 2011. 12. 5. 16:34 | Posted by 맥거핀.




상영시간이 짧아도 매우 지루한 영화가 있고, 상영시간이 길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있다. 영화 <숏 컷(Short Cuts)>이 바로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여러개를 오려붙인, 미국 LA의 아홉 커플(여덟 쌍의 부부와 한 쌍의 모녀)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는 3시간 7분 짜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무수한 숏 컷들의 끊임없는 이어붙이기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고유의 리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동시에 그 모든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별 특이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떠한 플래시백이나 과도한 점프를 사용하지 않으며(즉 영화는 이 아홉 커플의 현재의 시간을 무심히 쫓아간다. 다만, 회상씬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대화로서 이루어지는 회상은 있다. 뒤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 대화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도한 카메라워크를 허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이들에 대한 차가운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놀라운 리듬감은 그 숏 컷과 숏 컷들이 붙여지는 순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니건 부부의 어린아들 케이시를 차로 친다. 아이는 별로 다친 것 같지 않지만,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도린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 돌아와 갑자기 급격한 이상 증세를 보이며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를 마시지 않고 긴 잠에 빠진다. 컵에 가득 따라져 있는 우유를 클로즈업하며 컷의 마무리. 컷의 연결은 TV속 재난에 대한 위험을 이야기하는 공익(보험?)광고로 이어진다. 화면 속 우유컵이 탁자에서 쓰러지며 우유가 바닥에 쏟아진다. 이 화면은 도린의 집에서 도린의 남편 얼이 보고 있는 것인데, 얼은 아이에게 큰 사고를 입힐 뻔했다는 도린의 말을 시큰둥하게 들으며, 오로지 그것을 경찰이나 누군가가 보지 않았다는 것에만 안도한다. 또다른 장면. 첼리스트 여자가 농구를 한참 한 다음 옷을 모두 벗더니 갑자기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마치 죽은 듯이 물에 떠 있다. 그것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딸(첼리스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재즈여가수 어머니는 그녀에게 뻔한 수법(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수영장 청소부 제리가 있다. 그리고 컷의 연결. 한 여자가 나체로 물 속에 죽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계곡에 낚시를 하러간 스튜어트 일행이 발견한다. 이 장면들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연결 장면들이다. 

예를 든 첫번째 장면과 두번째 장면은 모두 시각적으로 장면이 연결된다.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컵과 광고 속 가득담긴 우유컵, 그리고 수영장에 죽은 듯이 떠있는 나신의 여자와 죽어서 계곡에 떠있는 나신의 여자 시체. 그러나 이 연결들이 단순한 시각적인 연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 이 장면들은 이 등장인물들의 망가진 영혼들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사고를 당한 케이시의 컷 이후에 곧바로 그에게 해를 입힌 도린과 얼의 컷을 붙임으로써, 이들, 특히 얼의 추악한 진짜 속내를 드러내보인다. 두번째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영장에 들어간 여자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에 이어지는 컷은 계곡에서 나신의 시체를 발견한 낚시꾼들이다. 이들의 행동은 어떨까. 그것은 익히 예상이 가능하다. 이들은 이 시체를 물에서 꺼낸다거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그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즉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놀라운 편집의 예술은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의미망 아래 층위에서 작동하며 일종의 복선의 구실을 함으로써 표층의 의미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첫번째 장면에서 우유는 광고 속에서 모두 바닥에 쏟아진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케이시가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한다. 두번째 장면에서 수영장에서 나신으로 시체처럼 떠 있는 여자 첼리스트, 그리고 이것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제리. 이것은 이 여자 첼리스트가 닥치게 될 앞으로의 일을 말해줌과 동시에, 제리의 미래까지도 보여준다. 동시에 그 계곡 속의 여자에게 닥쳤던 범죄(성폭행)가 무엇이었는지 관객이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두 가지 장면을 예로 들었지만, 이 영화에서의 무수한 컷과 컷의 연결에는 이러한 장면들이 많다. 즉 이 컷의 연결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을 하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하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逆)의 의미망 발생이 하나고, 그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와 미래의 운명을 암시하는 연결이 하나다. 이 영화 <숏 컷>의 지속적인 리듬과 의미의 발생에는 바로 이 컷과 컷의 연결, 즉 로버트 알트만의 놀라운 편집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정교한 기술이며, 놀라운 감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렇게 짧은 컷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교과서같은 편집이며, 전범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에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해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도 결코 도달하지 못한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유사성은 마지막의 예기치못한 재난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마지막 예기치 않은 개구리비가 쏟아졌듯이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 예기치 않은 지진이 발생한다. 어쩌면 예기된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중경>과 같이 폭발 직전의 욕망들이 끊임없이 누적된다는 인상이 있다. 아무튼 예기되었건, 예기치 않았건 간에 재난 그 자체보다는 재난 이후의 모습이 더 흥미롭다. 처음 이 지진이 발생할 때는, 시작부터 성적타락과 도덕적 해이가 가득한 추악하고 위선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에게 일종의 징벌로서 이 지진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지진은 그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진은 진도 7인지, 진도 8인지에 대해 논쟁하게 하는 한낱 흥미거리일 뿐이며, 도리어 어떤 범죄를 덮어주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진에 대한 리포팅을 영화 내내 가장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헬기조종사 스토미가 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들의 존재가 재앙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영화의 시작은 유럽 파리떼의 습격을 리포팅하는 TV뉴스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뿌려지는 살충제들이다.  이 TV뉴스는 과장되어 있으며, 이들(파리)의 박멸을 일종의 전쟁과 거의 같은 급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파리와의 전쟁을 영화 시작부분에 이야기하면서도, 영화 중간에 파리 코빼기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멸하여야 될 파리는 무엇일까. 이 등장인물들의 집 지붕으로 쏟아지는 살충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 자체가 박멸되어야 할, 즉 유럽에서 온 재앙(미국인들)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 살충제를 뿌리고 차례로 내려앉은 헬리콥터들이 마치 파리처럼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내 수많은 대사를 지껄인다. 때로는 너무 많이 지껄여대 이제 그만 좀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아무 의미가 없거나 음담패설이거나, 누군가를 욕하는 말들일 뿐이다. 발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주 보는 TV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유달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TV를 보는 씬들이 자주 배당된다. 그들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대사를 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지를 때면 어김없이 TV가 틀어져 있다. TV는 과장되어 있고(파리에 대한 리포팅처럼),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들이다. 앞에서도 말한 컷과 컷의 연결에서 등장인물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 이후 연결되는 컷들이 TV 속 만화(코믹스)인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플래시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회상이 있는데, 이 회상은 반드시 말하는 자의 숨김이나 듣는 자의 외면으로 끝난다. 즉 회상은 결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불가해했던 과거를 애써 외면함으로서 현재의 추악한 자신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영화 속 가장 불가해한 일은 파리떼의 습격도 지진도 아닌, 케이시의 죽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케이시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죽음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불가해한 일로 가득차 있고 역설적인 일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역(逆)의 컷으로 계속 이어진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면이 있는데, 영화 속 위선으로 가득한 병든 영혼들 속에서도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사람을 찾자면, 웨이트리스 도린이다. 그러나 이 도린은 결국 영화 속에서 가장 중대한 잘못(케이시의 죽음)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불가해한 역설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각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동시에 위선과 위악을 가득 담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만을 보고, 현재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을 이 영화 <숏 컷>은 어떠한 회상도 없이 느리게 그들을 관찰하면서 붙여나간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숏 컷'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붙여질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 2011년 11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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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베넷 밀러

Ending Credit | 2011. 11. 21. 18:0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 있습니다.)



1.
'머니볼(Money Ball)'이라는 말은 언뜻 야구에 대한 조롱처럼 들린다. '베이스볼'은 물론이고, '빅볼', '스몰볼'은 있었지만, '머니볼'이라는 말은 없었다. 돈 야구라니, 야구 앞에 기껏 가져다가 붙일 수 있는 말이 고작(혹은 무려) 돈이라니.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야구광'들은 그 용어에서부터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야구에 있어서는, 그리고 적어도 MLB(Major League Baseball)에 있어서는 그 용어에 거부감을 느끼든, 아니든간에 이미 돈이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야구에 있어서 돈은 중요한 요소였고, 애써 아닌척 해왔을 뿐이다. '머니볼'을 정확히 정의하기란 힘들다. 아주 간단하게만 말하면, 스몰 마켓의 구단이 적은 돈으로 최대한의 효율(승리)를 이끌어내는 야구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빅 마켓의 구단도 원하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적은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것은 야구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도 그러하다. 

방법상으로 따지면, 그것은 선수의 보여지는 면보다 기록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이버매트릭스(sabermetrics)'라는 용어로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결국 야구란 기록의 스포츠이며, 통계의 과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수를 선발하거나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간의 통계, 기록에 입각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확률에 거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간 2할 5푼에 꾸준히 머물렀던 타자가 올해 3할을 칠 확률에 거는 것보다는, 당연히 그간 3할을 꾸준히 쳐왔던 타자가 올해도 3할을 칠 확률에 거는 것이 승산이 높다. 이것을 머니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나 단지 기록의 중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머니볼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방법에 숨어 있던 빈 구석을 발견해내는 것에 달려 있다. 즉 모든 구단들이 이렇게 기록(스탯)만을 중시했다면, 당연히 좋은 기록을 가진 타자가 더 높은 몸값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머니볼에서 발견한 것은 그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괜찮은 기록을 가졌지만, 저평가되던 선수들이 있다. 머니볼은 그런 선수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2.
물론 이것에는 맹점이 있다. 야구에서는 기록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게임 중에 '베이스볼 모굴(Baseball Mogul)'이라는 게임이 있다. 영화 <머니볼>의 빌리 빈처럼 MLB 구단 단장이 되어 야구단을 경영하는 게임이다(비슷한 게임으로는 OOTP 같은 것이 있는데, OOTP가 Mogul보다는 훨씬 세밀하다. 그러나 물론 너무 세밀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게 만든다는 단점도 있다). 아무튼 이 게임의 목적은 실제의 현실과 같이 팀을 우승시키는 것인데, 처음에는 난이도가 꽤 높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금방 요령이 생긴다.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많은 돈을 들여 좋은 선수를 영입하면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돈은 바닥나고, 팀은 파산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낮은 돈으로도 점차 높은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유망주들을 많이 영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팀 페이롤(payroll: 연봉 총액)을 낮추고, 또 남는 돈으로는 FA 시장에서 알짜배기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으니, 당연히 팀의 성적은 올라가게 된다. 또 조금 더 악독한 방법으로는 팀의 유망주들을 빨리 장기계약으로 묶어, 오랫동안 싼 값에 활용하는 방법도 있고, 여러 다른 팀에게 약간 사기성있는 트레이드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방법들이 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변수가 그리 높지 않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모굴 같은 게임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수들의 능력치가 우리가 충분히 예상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게임에서의 유망주는 필시 몇 년이 지나면 스타플레이어가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정확한 그간의 기록에 의거해 어떤 선수를 스카우트했더라도, 그 선수가 팀에 와서 잘할지는 그다지 확신할 수 없는 문제다(예를 들어 책 <머니볼>에서 그야말로 '스페셜'하게 소개되었던 오클랜드의 유망주 포수 제레미 브라운은 메이저리그에서 몇 타석만을 소화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반면 비슷하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닉 스위셔는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커리어를 기록중이다). 마이너 기록을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신인의 경우라도 그렇고, 바로 전년도까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던 선수가 FA 영입 후 갑자기 기량이 엄청나게 저하되는 것은 흔한 경우다. 즉 현실에는 게임보다 엄청나게 많은 변수가 있고, 그 변수들이 기록의 신뢰를 급격하게 저하시킨다. 물론 이러한 기량의 저하 문제는 많은 변수 중 단 한가지일 뿐이다.

또 동시에 보이는 기록이 이야기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 기록은 팀 캐미스트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임에서는 연봉이 높고, 좋은 능력치의 선수들만 잔뜩 수집해놓으면 팀의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야구는 결국 팀 스포츠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조합이 팀 전체에게 좋은 영향으로 작용하는가, 나쁜 영향으로 작용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게임에서는 1+1이 2가 되거나, 최소한 1.5는 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1이나 
-10이 될 수도 있다. 스포츠의 역사에서 한 팀에 모인 여러 스타플레이어들이 팀 캐미('융화력'?)를 저하시켜 팀에 마이너스의 영향을 끼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들 수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보여지는데, 빌리 빈은 스탯만 생각하고 데려온 제레미 지암비를 결국 팀 캐미를 해친다는 이유로 내보내야만 했다. 이 부분은 도리어 머니볼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3.
그러므로 사실 <머니볼>은 따뜻한 이야기는 아니다. 딸과의 여러 에피소드나 선수들과의 관계, 빌리 빈(브래드 피트)과 피터 브랜드(요나 힐 - 사실 실제로는 '폴 디포데스타'라는 인물)와의 이야기 등으로 왠지 따뜻한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심지만, 그저 야구 이야기로 보면, 조금 더 잔혹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서 최소 투자에 최대 효율을 이끌어내는 경제학, 경영학의 법칙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실 인간은 조금 밀려나 있다. 즉 이러한 경영은 거의 게임과 비슷하게 되어간다. 게임에서는 오로지 한 가지만 집중하면 된다. 그것은 팀의 우승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런가. 예를 들어 게임에서라면 왕년에 스타였지만, 이제는 기량이 저하된 선수에게 고액연봉을 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어떠한 이유에서 - 예를 들어 팀의 프랜차이즈로 팬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면 - 고액연봉을 주고라도 데리고 있을 필요가 있다. 또 인기가 조금 없더라도, 선수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다면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게임에서는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거나 방출할 때 오로지 할 고민은 돈에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라면 그 외에 그 선수의 기량 외적인 부분도 볼 필요가 있다. 야구는 기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보면 <머니볼>의 경영학과 경제학은 조금 특이한 경영학이고, 경제학이다. 예를 들어 머니볼 이론에서는 오로지 기록에 의거해 신인선수를 선발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오로지 대학에서의 학점과 자격증으로만 사원을 선발한다면 어떨까. - 나는 이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각본가로 <소셜 네트워크>의 아론 소킨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라 하겠다. 사실은 잔혹한 이야기를 뭔가 잔혹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삶의 성찰이 있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꾸며내는 것은 이미 그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으니까. 그리고 그런 면에서 아론 소킨은 <소셜 네트워크>와 비슷한 전략을 쓴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그의 발자취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마치 한 사람의 성장담인 것처럼 이야기를 교묘하게 뒤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성공이 아니라, 그의 실패를 먼저 이야기하며 관객에게 어떤 동정심을 심는다. 예를 들어 <소셜 네트워크>가 친구와의 소송 문제에 휘말려 있는 마크 주커버그로 영화를 시작하고, <머니볼>이 2001년 양키스에게 패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애슬레틱스, 그리고 주축선수의 팀 이탈을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의 제목들은 <마크 주커버그>나 <빌리 빈>이 아니고, 그렇다고 <페이스북>이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도 아니고,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이라는 사실이다.


4.
빌리 빈의 오클랜드는 왜 포스트시즌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까. 뭐 여러 설명들이 있다. 예를 들어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 시즌보다 득점보다는 실점, 공격보다는 수비가 중시되기 때문에 빌리 빈의 방식이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는 분석이 있다. 즉 일정 정도 이상의 강한 투수력을 갖춘 팀들만이 오르는 포스트시즌에서는 낮은 점수에서, 그리고 적은 점수차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실점을 막아주는 수비가 중시되지만, 빌리 빈은 이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도 당시 오클랜드의 아트 하우 감독은 1루 수비가 엉망이기 때문에 빌리 빈이 높은 출루율 때문에 선호하는 스캇 해티버그를 1루에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빌리 빈은 그것(수비)은 중요하지 않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사실 스캇 해티버그는 당시 론 워싱턴 수비코치의 헌신 하에 상당한 정도로 수비력을 끌어 올렸고, 또한 당시의 오클랜드는 팀 허드슨, 배리 지토, 마크 멀더 등의 강력한 투수진을 갖춘 팀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이것을 결국 머니볼의 한계로 볼 수도 있다. 단기전인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시즌보다 변수의 통제가 훨씬 어려워진다. 포스트시즌에서는 감독과 선수들 모두가 정규시즌보다 높은 중압감에 시달리며, 기록보다는 경험이 더욱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포스트시즌의 경우 한 두 가지의 돌발변수가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으며, 한 게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게임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즉 변수의 출현과 그 변수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확률에 대한 통제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머니볼'이라는 것은 결국 확률 게임이므로).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주사위를 100번을 던진다면, 1에서 6까지의 각 숫자가 나올 확률(1/6)을 예측할 수 있지만, 단 3번을 던져야 한다면, 1이 나올지 4가 나올지, 6이 나올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포스트시즌의 경우 정규시즌 이후이므로 체력의 저하가 심각한 문제로 작용할 수 있는데, 신인 선수 또는 노장 선수가 중심이었던 오클랜드의 경우(왜냐하면 신인이거나 노장이라야 싸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욱 문제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머니볼이 먹혀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많은 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머니볼 야구가 인간적이지는 않아도, 혁신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빌리 빈은 아직도 오클랜드의 단장이지만, 오클랜드가 요즘에는 예전과 다르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많은 팀들이 머니볼을 활용하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빌리 빈은 예전에는 저평가된 선수를 싼값에 데려올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빌리 빈이 높게 평가한 선수를 다른 팀도 높게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머니볼 이론은 그 이론의 내용보다도, 도리어 그 혁신성과 그것의 쇠퇴라는 사실 자체가 더한 시사성을 줄 것이다. 야구에 빅볼도, 스몰볼도, 머니볼도 아닌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5.
마지막 빌리 빈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직 제안을 결국 거부한다. 그는 영화 내내 구단주에게 선수 영입 예산을 더 줄 것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며 골머리를 썩는데, 그렇다면 빅 마켓인 보스턴의 영입이 꽤나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그가 결국 보스턴의 제안을 거부하는 이유는 영화 안에서도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사실 실제로도 조금은 모호한 측면이 있다. 그는 오클랜드를 그만큼 사랑했을 수도 있고, 적은 예산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을 도리어 매력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보스턴의 경우 빅 마켓이고, 오클랜드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팬을 가진 팀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훨씬 더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당시 딸과 멀리 떨어질 수 없어서 오클랜드에 결국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영화 속 마지막에 보스턴이 머니볼 이론의 도입으로 2004년 결국 수십 년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조금은 모호한 구석도 있다. 당시 새로 부임한 보스턴의 테오 엡스타인 단장이 머니볼 이론의 신봉자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경영이 빌리 빈의 머니볼과 그다지 유사하지만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보스턴의 2004년 페이롤은 2003년보다 도리어 증가하였고, 이는 다른 팀의 페이롤 증가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2003년 개막 페이롤 : $ 99,946,500 -> 2004년 개막 페이롤 : $ 125,208,542). 이를 머니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온 아트 하우 감독(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빌리 빈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고집쟁이 영감처럼 그려졌지만, 그가 그렇게 실제로 대립각을 세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책 <머니볼>에서는 도리어 약간 허수아비처럼 그려지는 측면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트 하우 감독은 오클랜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재계약에 실패하였고, 그 뒤 뉴욕 메츠의 감독을 맡았지만,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 뒤에는 변변한 감독 자리에 앉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하나 덧붙이자면, 빌리 빈은 오클랜드에서 처음부터 단장직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고, 스카우터와 부단장을 거쳐 단장이 되었다. 그의 전임자는 샌디 엘더슨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머니볼 이론의 많은 부분을 먼저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빌리 빈이 그토록 부르짖는 '출루율 중시'는 사실 샌디 엘더슨이 먼저 세운 원칙이었으며, 빌리 빈은 다만 그것을 충실하게 계승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빌리 빈이 이 머니볼 이론의 모든 것을 고안한 것처럼 그려지는 것은 조금 지나친 부분이 있다.

6.
영화 속 과장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지만, 야구 중계를 껐다 틀었다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빌리 빈의 모습을 보며 사실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적어도 저 동네에서는 저렇게 이기는 것에 목말라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런 반면 한국프로야구는 어떨까. 물론 이런 비교는 여러 논쟁을 낳을 수 있다. 수십개의 팀을 가진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프로야구와 이제 고작 삼십 년을 조금 넘긴 이제 9개팀뿐인 한국프로야구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일 수 있다. 또한 미국프로야구에서도 여러 생각을 가진 구단들과 구단주들이 있으며, 한국프로야구에도 반대로 여러 생각을 가진 구단들과 구단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프로야구를 보면 여전히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 투성이다. 그것은 굳이 비교를 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 현재 굴러가는 여러 일들만 보아도 그러하다. 선수협의회를 구성하였다는 이유, 혹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보복 트레이드를 당하고, 팀에서 방출당하는 선수. 상식적인 기준, 그리고 팀을 강화한다는 이유만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트레이드와 영입들(왜 '오캄의 면도날'을 한국프로야구에 적용할 수 없는가). 팀의 승리에 가장 필요한 조직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자체의 존망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프런트. 팬들이 뭔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망가져 기능을 하지 않는 팀의 온라인 게시판들. 툭하면 팀의 운영을 그만두겠다, 야구판에서 떠나겠다고 협박조로 말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팀이 생기는 것을 은근히(때로는 대놓고) 방해하는 구단주들. 그리고 예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거의 분명한 자신들의 자리보전에만 힘쓰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여러 인사들.

이들은 이기는 것에 관심이 있을까. <머니볼>에서 결코 이야기되지도 않고, 이야기될 필요도 없는 것 - 즉 누구나가 이기는 것을 바란다는 사실 - 을 이야기해야만,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이 한국프로야구의 어떤 숨겨진 초상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가. 책 <머니볼>에는 이런 부제가 달려있다.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 빌리 빈의 머니볼의 방점은 뒤편 "승리로 이끄는 과학"에 달려있는 데 반해, 우리의 머니볼은 여전히 그 앞에만 방점이 놓여져 있다. 




- 2011년 11월, CGV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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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춤, 윤기형

Ending Credit | 2011. 11. 19. 23:52 | Posted by 맥거핀.

(왠지 이 사진은 작가들이 '저자 소개'에 걸어놓기 좋아하는 사진 같다.)



이 영화 <고양이춤>은 마하트마 간디의 말로 시작을 연다.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수준은 그 나라에서 동물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간디의 동물에 대한 이런 말은 일견 색달라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의 배경에는 아마도 낮은 곳을 늘 뒤돌아보는 간디의 인식이 배어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사회는 불평등한 계급의 사회이고, 그 가장 밑바닥의 인간보다 더 낮은 곳에 아마도 동물들이 위치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러니까 간디의 그 말은 결국 한 국가의 수준이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들을 그 국가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일 것이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간디의 이 말에는 거의 동물과 같이 취급받았던 인도 사회의 천민들에 대한 오랜 인식이 스며들어 있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아주 오랫동안 동물은 적어도 국가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소모되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 철저하게 활용된 후 폐기되어야 할 자원에 불과하였고,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길고양이들은 그나마의 취급도 받지 못하고 우리 인식 속의 동물 계급에서마저 거의 가장 아래편에 위치하였다. <고양이 대학살>이나 <검은 고양이> 등에서 나타나는 고양이들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적 인식이나 늘상 악당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로 묘사되었던(가가멜의 오랜 충복인 '아즈라엘'이 대표적..) 오랜 편견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는 단지 쓰레기봉투를 뜯어낸다는 이유만으로 '도둑고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하사받아 왔다는 것이 가장 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고양이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야기를 전해가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언뜻 내비치기는 한다. 특히 길고양이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죽는) 가장 주된 이유인 로드킬(Road Kill)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나, 쓰레기봉투를 뜯는다는 이유만으로 매질을 당하고, 모든 고양이는 죽여버려야 한다,는 발언 등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그러하다. (길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뜯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뜯는다고 증오하면서도, 그런 길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시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아마도 그런 것이 가장 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길 위의 사람들과 길고양이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죽는다. 그런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교차하여 길 위에서 물건을 주워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러므로 묘한 성찰을 낳고, 처음 간디의 말을 되새기게 만든다. 길 위의 고양이들과 길 위의 사람들. 그들은 오랫동안 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그런 국가관에 길들여진 우리들에 의해서 어떠한 취급을 받아왔는가.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의 전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결국 '관계 맺기'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화자들이 보여주는대로 길고양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관계의 시작은 길고양이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음을 깨닫고 그들을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예기치않은 마주침이 이어진 후 그들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들 각자의 마른 모습, 병든 모습, 먹을 것을 구하려다 여러 고초를 처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먹을 것을 챙겨주게 되었다. 결국 이 영화는 '관계의 시작'이란 것이 어떠한 것으로부터 비롯되는가를 짧은 영상과 사진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 영화의 홍보문구들에서, 이 영화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관객들보다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던 관객들이 보기를 바란다, 고 했었던 것은 이 관계의 시작을 쉽게 받아들여 영화를 보는 우리가 길고양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바랬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관계란 결국 응시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그것이 스크린을 통한 응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맺었을 때만이 우리는 그들과의 이별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로드킬에 대한 사회적 관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온 말을 돌이켜보면, 집고양이는 일반적으로 15-20년의 수명이 보통인 반면에, 길고양이는 평균 3년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길고양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잦은 이별을 감당할 각오를 조금은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기는 굳이 길고양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관계를 조금씩 맺어 나간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이별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 그것을 감당한 내성을 조금씩 쌓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리고 길고양이의 경우에는 때로는 그 내성을 쌓을 틈도 없이 급속하게 이별이란 것이 찾아와 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 속 길고양이 '바람이'와의 갑작스런 이별이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공들여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무심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도, 이 '바람이'와의 이별 장면은 이상하게 울컥하게 만든다. 영화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아주 어렵게 정의하기 위해서 노력해왔지만, 그저 최대한 간단하게만 말한다면, 영화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울컥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예술일 것이다. 단언하건대, 어떤 사람에게든간에 단 한 순간씩만이라도 울컥한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영화는 좋은 영화일 것이다. 물론 그 울컥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 누군가는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에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그 영화가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울컥한다. 누군가는 정밀하게 구성된 숏과 숏의 연결, 씬과 씬의 환상적 접붙임으로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단지 카메라가 어떤 순간 그것을 그 각도에서 찍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울컥한다. 누군가는 어떤 배우가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그 배우가 단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울컥한다. 그렇다면 이 '바람이'와의 마지막이 만들어낸 울컥거림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 전까지 만들어낸 여러 길고양이들과의 관계의 시작을 그것이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처음의 응시를. 단지 잠깐의 호기심이 전부였던 그 응시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길고양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의 마지막에서 결국은 그 처음의 시작을 되돌아 응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됨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 <고양이춤>은 쉬운 다큐멘터리이다. 굳이 문법이라 이야기할 것도 없지만, 아주 쉬운 이야기 방법을 가지고 있고, 산뜻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고 간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것은 TV에서 하는 자연 다큐멘터리들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며,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극장에서 보아야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바람이', '희봉이, '깜냥이', '예삐' 등 수많은 길고양이들 중에서의 몇몇의 길 위에서의 단편적인 삶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길거리를 나서게 되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반수 이상은 그간 있었으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길 위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딘가에 숨어서 먹이를 먹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차를 피해 조심스럽게 도로 가장자리에 숨어 있는 길고양이들이다. 그것을 응시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들과의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영화는 묻는다.


- 2011년 11월, KU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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