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83&GotoPage=1

 


언제나 윤리의 편에서서

- 글: 김종관 (영화감독)

프로파간다는 상업영화의 전략이 되었다. 잔혹한 살인과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한의 내장을 뜯고 눈알을 파내는 잘 생긴 남자가 나오는 영웅담이 흥행이 된 것처럼 (동시에 개봉했던 두 개의 잔혹한 액션 영화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성에도 확실한 주적이 있는 아저씨는 흥행했고 주적을 찾을 수 없는 악마를 보았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사회의 모순과 무조건적인 악의를 겨냥한 호전적인 영화들이 상업영화의 진영에서 달려들고 있다. 그들은 우라까이 액션영화처럼 단순하고 저돌적인 힘을 추구하기 위해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사회 저편의 절대적인 악을 설정해 놓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타깃화 된 이념, 그룹, 종교는 단순화되고 그 특징적인 단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움직인다. 아무도 영화에서 이성적인 균형감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고 있다. SNS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분노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 분노는 일리 있고 현명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렇지 못하다. 커다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트윗의 타임라인에서 사람들은 분노에 가장 많이 모여든다. 어떤 범죄, 어떤 진영, 어리석은 식견과 아둔한 실언들은 공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 중 누군가는 연대하기 위해, 한편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다. 또 누군가는 자기 안의 결함을 사회적인 분노로 치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노의 뇌선을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이 확보된 셈이다. 사회의 의식을 겨냥한 영화, 특히 화를 내는 방식의 영화는 대중영화로써 요소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독립영화는 그보다 현명하고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본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라는 굳건한 범주 안에서 화를 내고 논쟁하며 연대를 만들어 간다. 어찌 보면 많은 창작자들도 창작물들로 열심히 싸우고 있다. 여기까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많은 이들 그중에 창작자들이 윤리의 편에 서고 있다. 자기 혹은 자기를 지탱하는 테두리의 사람들을 선한 위치에 두고 저 건너에 비판을 둔다. 그들은 저 멀리의 괴물을 본다. 스스로의 괴물, 스스로의 모순에는 눈을 두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돼 버렸다. 상업영화는 대중을 위해 화를 내고 몇몇의 독립영화를 포함한 작가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보상을 위해 무척 단순한 방식으로 화를 낸다. 상업영화가 애초에 대중적 기호에 맞춰간다 판단을 하더라도, 균형 없는 독립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더욱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좋은 예술가는 자기 안의 모순을 응시하면서 성장하고 성취한다. 가면을 걷어내고 옷을 벗고 자기 안의 추醜를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 마쓰모토 세이초는 매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둔 소설을 쓰지만, 그가 메스를 들고 도려내는 것은 그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에서 반추한 인간의 속성들이다. 그는 악인의 범행을 차갑게 기술하지만 욕망을 자기 안에서 찾고 대입하기에 세월이 지나도 그 이해의 깊이가 훼손되지 않는다.

그처럼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예술적 가치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 대한 응시 없이 비판의 날만 휘두르는 창작자들을 많아지는 것은 하품만 나오는 일이다. 오늘날 정의롭지만 비겁한 문학과 영화들이 종종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편협한 속성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런 창작물들이 피곤하다. 창작자가 윤리의 편에 서서 악을 단순화하는 것도 재미없거니와 모든 개인의 악행 이면에 사회적인 현상이 있더라는 식의 시류 적이며 쉬운 결론도 재미없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를 자각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세월이 지나 이 재미없는 시류에 돋보이는 창작물들이,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결국은 세상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독립영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연인들>,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의 영화로 주목받았던 김종관 감독의 글. 요즘 우리 영화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분노의 유령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아니 분노보다 기이한 것은, 대부분 이 분노의 유령들은 결국 깊은 허무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자기기만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분노로 시작되어 허무로 끝나는 lose-lose 게임들. 이 글의 제목은 최근 개봉하는 어떤 영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그 영화는 정말 '분노의 윤리학'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박근혜와 정수장학회

생각거리 | 2012.10.24 15:12 | Posted by 맥거핀.



박근혜의 정수장학회에 대한 기자회견 후
한홍구 교수의 열변..

꼭 보자. 두 번 보자.



관련기사 링크 : http://hani.co.kr/arti/opinion/because/516673.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6195.html



오늘도 이 땅 어딘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불도저는 언젠가 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열사'라는 명칭과 이 문제를 핵발전소 문제와 연관짓는 것에는 어떤 불편함이 있지만, 그런 표면적인 불편함이 한 분의 죽음보다 결코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그 분의 마지막 외침이 결코 헛되이 사그라지지 않아, 그 일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글: 원승환(전직 독립영화인) [2011.10.11]

(원문 주소: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49&GotoPage=1)

 

영화를 접하는 것은 점점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영화관 같은 상영 공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영화는 TV의 등장으로 관람 공간이 확대되어 집에서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등장으로 관람 시간 마저 자유로워졌습니다.(보고 싶은 때에 재생할 수 있고, 관람 도중 중단하고 재개할 수도 있습니다.)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영화전문채널도 생겼고,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WEB으로, VOD로 영화를 접하는 것도 훨씬 편해졌습니다. 최근엔 VOD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케이블TV나 IPTV를 통해) 개봉과 동시에 영화를 접할 수도 있습니다. 독립영화를 접하는 방법도 훨씬 많아졌고 편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영화관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이 시작된 이후 개봉 상영도 많이 보편화되었고, 지상파 TV에서도 방영되며(KBS [독립영화관], EBS [독립다큐관]), 온라인 다운로드 서비스도 선보였으며(인디플러그), (아직은 많은 지역에서 서비스되고 있지 못하지만) 독립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인디필름)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만 먹으면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은 한국 전체 스크린의 1%도 되지 않으며, 예술영화전용관이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면 개봉되는 독립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란 언감생심입니다. 개봉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립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은 '영화관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외'한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영화관을 통해 관람하는 관객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워낭소리>처럼 엄청난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2011년엔 1만명 이상의 관객이 찾은 독립영화가 많아졌습니다. 독립영화인들이 영화관을 통해 상영하는 기회를 늘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하며 찾아주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존경이라는 말이 과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단한 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주류의 취향과는 다른 취향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립영화 관련 일을 그만 두고 관객으로 돌아가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봐야하는 상황이 되자,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가는 일에 대해 상상해봅시다. 대부분 이런 식이겠지요. 영화를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거나, 가기 편한 영화관을 먼저 선택하고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 볼 영화를 선택해서 봅니다. 인기 있는 주류 영화의 경우, 매진이 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도 관람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영화관들은 몇 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이기 때문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도 많고, 이에 따라 상영 시간 역시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편하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보러가는 일은 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일처럼 행동해서는 곤란합니다. 아무 영화관에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영화를 자주 상영하는 예술영화관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다고 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관을 찾더라도 상영시간이라는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상영시간과 자신의 일정이 맞지 않으면 영화를 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의 숫자에 비해 개봉하려는 영화가 많은 탓에, 대부분의 예술영화관들이 하루에 여러 편의 영화를 상영하여 영화당 1회씩 상영하는 경우가 잦아 무작정 영화관을 찾아서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사이 개봉 독립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찾는 일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주로 스크린이 하나인 예술영화관이 보다 많은 영화를 상영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멀티플렉스는 어떨까요? 유감스럽게도 멀티플렉스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개의 스크린이 있다 하더라도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스크린이 하나 뿐이라 하루에 여러 영화를 교차상영하기 때문에 상영시간에 내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관의 사정에 내 일정을 맞춰야 하는 조금은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원하는 영화를 꼭 보기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것들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찾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분들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족스럽지 않은 상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를 찾아주시는 관객 분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독립영화 관객이 된 후, 상영 시간의 아쉬움 말고 또 다른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예술영화 스크린을 찾으면서 알게된 것인데요, 다른 영화와 똑같은 관람료를 지불하고 영화관이 지정한 시간에 자신의 일정을 맞춰 영화관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를 보는 관객에 비해 '항상'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봐야합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 스크린은 해당 극장의 스크린 중에서 좌석수가 가장 적은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 처럼 넓은 스크린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주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영화관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뜻일텐데, 보러가는 영화가 시장성이 떨어지는 영화란 이유로 늘 홀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멀티플렉스들은 관객에게 대단한 혜택을 돌려주고 있는 마냥 스스로를 홍보합니다.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예술영화 스크린을 운영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예술영화스크린의 좌석수는 각 멀티플렉스 체인이 가진 전체 좌석수의 1%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무비꼴라쥬라는 브랜드로 가장 많은 9개의 스크린을 운영한다는 CGV의 무비꼴라쥬 좌석수는 9관을 다 더해도 1천석에 미치지 못하며, CGV 전체 사이트 좌석수의 1% 미만입니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관객들 역시 동등한 입장료를 내고 영화관을 찾습니다. 시장성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보다 수익이 낮을 수는 있지만, 대단히 많은 수익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이 존재에는 사업자 측의 배려도 있겠지만, 다른 영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를 감수하는 관객들의 배려 역시 중요한 근간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삐딱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공간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 독립영화가 애초에 개봉 상영을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환경이 얼마나 나아진 것인지 생각하며 행복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한국에 등장한 이후, 각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은 영화관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과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영화관객수는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이전보다 늘어났습니다. 이런 변화가 독립영화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를 선택하고 찾아보는 환경이 지금 보다 조금 더 나아진다면, 개인의 일정을 영화의 일정에 맞추지 못해 관람을 포기한 관객들이 영화를 찾게 될 것이고 보다 많은 새로운 관객들 역시 유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CJ E&M 픽쳐스의 계열사인 필라멘트 픽쳐스가 배급한 <파수꾼>은 영화관이 배려한다면 독립영화 역시 조금 더 많은 관객이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작은 스크린, 작은 상영관 크기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스크린은 관객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관을 사랑하는 관객들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이 이런 열성적인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개선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를 공짜로 보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람료 이상의 개인적 비용을 지불하고도 기꺼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쓰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때엔 지금보다 큰 상영관의 넓은 스크린에서 독립영화를 보게 되는 날이 오기를 살며시 바래봅니다.


 

어떤 자기위안으로 이 글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의 두 가지의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는 멀티플렉스에 대한 것인데, 현재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멀티플렉스는 대부분, 독립영화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 한 개의 영화를 몇 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걸어, 멀티플렉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관객의 선택권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대부분의 멀티플렉스의 경우 독립영화나 '소위' 예술영화들을 거의 상영하지 않는다. 서울을 예로 들자면, CJ CGV의 무비꼴라쥬나 대한극장 등이 그나마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인데, 그 라인업을 보면 거의 구색맞추기에 가깝고, 또 상당수의 영화들이 1-2주의 상영으로 그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개봉 하루이틀만에 교차상영(2개 이상의 영화를 번갈아 한 관에 상영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겨우 찾아야만 알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더라도, 이미 상영관을 확인해보면, 상영이 끝난 이후인 경우가 허다하다.

보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작은 상영관, 작은 스크린, 불편한 관람 환경에서 상영되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작은 영화들은 지하 1-2층, 혹은 아주 꼭대기의 아주 작은 상영관에서 상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독립 영화들과 예술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일단 극장을 찾는 교통편에서부터 고역을 치러야 하며, 작은 스크린과 좁은 의자에, 앞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가리는 불편한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글쎄. '좋은 영화'를 보여주므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좋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관객들의 '호의'로 웃어넘겨야 하는 것일까. (요즘 왠만한 멀티플렉스에서 앞 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가린다면, 아마도 관객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작은 영화관에 갈 때는 도리어 사람이 많다면 걱정부터 되기도 한다. 평소와 같이(?) 사람이 없다면,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때로는 웃어넘길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경우도 많다. 단순히 '자리'의 불편함을 넘어, 형편없는 영사 환경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가 그런 경우인데, 예를 들어 대한극장을 관리하는 분들은 작은 영화가 주로 상영되는 지하 1층 상영관이 거의 1년 내내 핀트가 나간 상태에서 영화가 상영되며, 그래서 때로는 심할 정도로 뿌연 화면을 보여주는지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CGV 관계자들은 대학로 CGV 지하에 있는 작은 상영관인 5관의 스크린 가운데에 미세한 찢어진 틈이 있어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서울이라서, 이런 영화들이라도 볼 수 있으니 낫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작은 영화관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나마 버텨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해야하는 것일까(그간 작은 영화들을 상영하던 많은 영화관들이 사라졌으므로). 구색맞추기라도 멀티플렉스들에서 독립영화들을 (아주) 가끔 상영해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덧 1.

그래서 요즘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주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들을 상영하면서도 거의 최상의 상영환경을 자랑하는(멀티플렉스들과 비교해도 동급최강의), 건대에 있는 KU시네마테크이고, 다른 하나는 큰 영화제는 물론이고, 작은 영화관들에서 상영되는 자잘한 영화제들이나 상영 소식들을 잘 정리해서 전달해주는 여기 '알라딘 무비 어드바이저' 서재이다. 개인적으로 작은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는 편인데, 어느 사이트를 보더라도 여기 서재처럼 총망라하여 잘 전달해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담당자님의 성실한 노력에 감사를 표할 뿐이다.

덧 2.

글이 링크가 된 트위터에 다음의 추가 문구가 달려 있던데, 적극 동감한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이 나라에서 독립영화 따위를 극장에서 보려면, 우선 졸라 자유업이거나 백수거나 둘중에 하나여야 하나보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거리 | 2011.10.25 19:34 | Posted by 맥거핀.




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 2011년 10월, 인디플러스

[박노자 글방] 좌파의 종교성

생각거리 | 2010.08.09 01:50 | Posted by 맥거핀.
원문: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8145

"박노자"님의 글입니다.


100년 전의 유럽이나 미국 같았으면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을 때에 가장 자주 써먹곤 했던 수법은 그들이 "무신론자"이었다는 점을 강조해 "신의 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죠. 대다수가 아직도 교회를 충실히 따랐던 당대의 구미 사회 같으면 이와 같은 비판은 - 특히 종족/종교 집단 별로 이민자들이 조직되곤 했던 미주에서는 - 먹혀들어갈 수도 있었죠. 1914년에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이 시작됐을 때에 집총을 거부한 극소수의 열사들 중에서는 전통적 평화 교회 (안식교, 퀘이커교 등) 교인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같이 대오를 형성했을 때에 이와 같은 비판의 맹점은 사실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성서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신"을 믿었던 말던 일단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국가의 명령대로 사람 죽이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들처럼. 그러기에 1920년대부터 미국의 진보적 카톨릭이나 개신교도의 일부가 상당부분 사회당 운동과 겹치는 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1933년부터 Catholic Worker Movement 같은 사회주의적 색깔의 종교 운동 단체들도 생겼어요. 한국 같으면, 이와 같은 세계적 추세는 아주, 아주 뒤늦게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반적" 교회나 사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들을 마치 종교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있는데, 이게 아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종교성의 기저 중의 하나는 절대자와 개체의 "직접 소통"에요. 세속적인 사고 방식의 입장에서는 세속적 의미의 전체, 즉 소위 "국가"나 "사회", "회사" 등이 개인에게 원칙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교사해도 이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해요. 국가가 "적군을 살해하라"하면 전장에서 그렇게 해서 나중에 훈장이나 받아 가슴에 달아야 되고,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어록 공부", "사가 제창", "집단 극기 훈련", 그리고 동료를 짓밟으면서 무한한 "충성 경쟁"하는 것을 명령해도 이것도 "사회적 도리"라고 해여 그대로 해야 하는 것에요. 역시 가족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정조를 지키면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걸 바라고 부인이 남편에게 "크게 출세"하여 "돈 벼락" 맞을 것을 바라는 것도 세속의 당연지사에요. 그런데 진정 하나님을 면전에서 보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국가, 사회, 회사, 가정 등등은 마몬의 미혹 내지 악마파순의 시달림에 불과해요. 국가로부터 총살 당하면 당하지 국가의 지시대로 남을 죽이지 못하는 것도 종교인이고, 무푼쟁이로 살면 살지 "회장님의 어록"을 봉독하고 "성공한 도둑"의 명을 체질상 따를 수 없는 것도 종교인이고, 혼자 살면 혼자 살지 가족의 집단 이기주의 분위기에서 "출세"와 "영재 교육"에 올인할 수 없는 것도 종교인에요. 신을 볼 줄 알고 "나" 안에 내재돼 있는 불성을 감지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국가, 회사, 가정 따위의 사회적 창작물들은 방해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죠. 사유는 약간 다르지만, 사회주의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죠. 계급사회의 파생물로서의 국가, 기업, 가정의 생리를 체계적으로 알기에,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바칠 일은 없어요. 서로 사유는 조금 달라도 결론은 같아요.
 
그리고 사유는 정말 그렇게까지 다른가요? 종교인은 마몬 숭배나 만연한 "지상의 도시"가 파산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거나, 예토가 정화돼 탐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정토가 지상에서 건설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사회주의자는 물화된 노동으로서의 자본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지배와 복종, 탐욕과 타율적 규율, 경쟁과 적대심이 사라질 신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에요. 설명의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결국 양쪽에서 간트가 이야기한 "reich der zwecke" ("목적의 왕국" http://www.textlog.de/33192.html)가 실천되기를 원할 뿐이죠. 마르크스의 뛰어난 설명대로, 사람이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는, 그러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종교인도 사회주의자도 공히 염원해요. 지금 사회에서는 사람이란 도구일 뿐에요. 자본 축적의 도구, 국가적 살인의 도구, 인구 재생산의 도구 등일 뿐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에 불과하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대다수의 자칭 "신도"들이 이 지옥을 마치 "정상적 사회"로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의 수가 이 땅에서 아주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노동자들이 착취자들에 대한 충성을 거의 자발적으로 키우다 싶이 하고, 아이들이 서울대 가겠다고 앞을 다투어 스스로 공부의 지옥에 뛰어들어 서로 밟으려 하고, 다수의 학자들이 비판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순량한 "등재지 게재 논문" 생산자가 된 대한민국이라는 이 세계의 모범적 지옥을 임하면서도 "목적의 왕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보로만 보일 걸요. 그러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대로 Credo quia absurdum, 불가능하니까 믿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살아보려는 욕망으로 믿는 것에요. 신의 섭리는 불가해하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이 사회가 수많은 치명적 위기를 통과할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오늘날 그 구조의 도착성과 부조리함이 다 노출될 것이고, 그 시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이상을 결국 대중적으로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믿어요. 다수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두들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말을, 언제 누가 했나요?

[대화]『씨네코드 선재』2010.06.29. [인디포럼 월례비행]〈호수길〉대담

인디포럼 월례비행 (네이버 카페 ‘씨네코드 선재’ 게시글 링크)
<호수길>
● 일시: 2010년 6월 29일(화) 20:00 호수길
● 장소: 씨네코드 선재
● 입장료: 6,000원

● 대담: 정성일(영화평론가)
● 진행: 변성찬(영화평론가)

언젠가부터 시작된 ‘서울시 재개발 사업’, 또 어느새 시작된 ‘4대강 개발 사업’, 바야흐로 이 나라는 ‘개발 공화국’이 되었다. 물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삽질 공화국’일 것이다. 그 ‘삽질’에 수많은 도시 영세민들이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녀야 하고, 그 보다 더 많은 자연 속의 생명들이 살 곳을 영영 잃어버리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7,80년대 ‘개발 독재’의 망령이 깃든 그 ‘삽질’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빨리’ 변하는 이 나라에, 여전히 변치 않는 것들이 많다. 지난 해 용산 참사에서 비극적으로 나타났던 ‘철거의 공식’도 그 중 하나다. 여기 그 ‘철거의 공식’에 새로운 리듬과 화법으로 저항하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 서울에서도 제일 먼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은평 지구, 이곳은 감독이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담은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고향에 대한 시적 에세이이자, 개발이라는 이름의 광폭한 ‘속력’에 맞서는 저항의 기록이다. <호수길>이 보여준 느림의 미학, 그것은 이 ‘미친 속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윤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상영작소개
정재훈 | 2009 |72min | 한국 | Color
햇빛이 가득한 산동네.
동네에는 나무도 있고,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집도 있다.
어느 밤, 동네에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인다.

* 참고 -『씨네21』2009.12.29.735호. 이 시체를 보라, 그리고 응답하라 : 은평구 응암2동 철거 장면을 담은 <호수길>이 요구하는 것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 2010.01.08

은평구 응암2동 철거 장면을 담은 <호수길>이 요구하는 것 

 

올해 일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냥 다시 저 집에 들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먼저 세편의 영화. 가장 무서운 집.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은 낯선 제천에서 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친구 부상용(공형진)을 만난다. 그리고 한밤중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이상한 아내 유신(정유미)과 살고 있다. 이 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앞과 뒤를 따지려 들어도 일시에 이 모든 시도를 와해시키면서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인지 알 수 없는 마술적 상황으로 끌고 간다. 숏 사이의 접속이라는 몽상. 말 그대로 귀신들린 집. 가장 이상한 집. 박찬욱의 <박쥐>. 신부 상현(송강호)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보았지만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일층과 이층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분수의 집은 거의 쓰러질 것만 같다. 이층은 과밀하게 우굴거리고 일층은 대부분 비어 있다. 도무지 올라갈 방법을 알 수 없는 이층. 올라온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마치 자기 증식이라도 하듯이 늘어나는 방들. 도대체 이층에는 몇개의 방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 같은 복도. 라 여사(김해숙)는 비밀을 알고 있을까? 태주(김옥빈)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음란한 집. 봉준호의 <마더>. 낮에도 거의 밤처럼 어두운 집. ‘마더’(김혜자)는 자기 집에서 이불을 펴고 아들과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이다. 도준(원빈)의 방에서 한밤중에 윗옷을 벗은 친구 진태(진구)가 걸어나와서 그녀를 껴안을 때 그녀가 정말 안아주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두명의 이중효과, 혹은 착시효과. 이때 어느 쪽이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뒤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안을 때, 도준과 ‘마더’가 몇 차례이고 그 체위를 반복하면서 이불에서 껴안을 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위반의 선을 마지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과 꿈. 무의식과 환상. 죽음과 섹스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 음란한 환상을 건너지 않고 ‘마더’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집들을 생각하다

물론 다른 집도 있다. 또 다른 세편의 영화들이 다루는 집.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 은모(서우)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중식(이선균). 그는 왜 환대받지 못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 왜 은모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혹시 그 집이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아닌가? 시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할 수 없다. 플래시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집.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집. 그런 다음 폭발시켜버린 집. 그때 정말 폭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와중에 진행되는 철거. 집을 부순다는 문제. 혹은 철거 용역에 몸담은 상훈(양익준). 내면 속의 지옥과 같은 두채의 집. 상훈과 연희(김꽃비)의 집. 집을 부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시의 변경에서 부서져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양익준의 <똥파리>. 미쳐버린 동생, 혹은 신들린 동생을 찾아서 돌아온 언니 희진(남상미)이 마주해야 하는 집. 아파트라는 집. 그 집의 수상한 이웃들. 이용주의 <불신지옥>.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올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세워진 5층 상가에서 새벽 6시45분에서 8시30분 사이, 고작 1시간45분 만에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당했다.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다. 그것은 육체이며,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고,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집은 삶의 크기이며 그것을 탈취당할 때 삶도 도둑질당할 것이다. 집의 전유와 재전유에 대한 전술을 우리는 공유해야만 한다.

왜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한편의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올해의 발견이자 최전선이다. 정재훈의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마치 이 모든 비밀회의에 가까운 유령들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을 수정하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건축적 구조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일 때 거의 오로지 혼자서 <호수길>은 전혀 다른 지리적 탐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수길>의 선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도 필요없다. 그냥 같은 시대에 같은 지리적 동네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의식만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허깨비가 아니다. 영화 제목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 이름이다. 영어 제목도 ‘Hosu-Gil’이다. 이게 골목 이름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는 호수가 없다. 아마도 예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 길을 따라가 보아도 호수는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없어진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은 있지만 없어져가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호수길>은 간단하지만 소개하기에 까다로운 영화이다. 그래서 시네마디지털서울 신은실씨의 소개가 조금 길긴 하지만 대신 인용할 생각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 뜬 하늘과 산이 보이는 동네에는 ‘호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사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한편, 볼일 보러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 산책하는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 텃밭을 일구는 아낙들, 마실 나온 할머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엄마가 있고, 때로는 경찰차가 동네를 오가고, 개와 고양이도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마지막 불빛이 꺼져버리고,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빈집 천지가 되어버린 동네를 부수는 굉음이 들려온다. 개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고양이는 죽음을 맞는다. 빈집에서는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불도저와 인부들은 물을 뿌려가며 동네를 계속 부순다. 햇빛은 강하게 빛나고, 새들도 동네를 떠난다.” (시네마디지털서울2009 카탈로그, 105쪽)

시적인 소개의 문장들. <호수길>에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다. 물론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는 그저 동네 어귀에서 개짓는 소리뿐이다. <호수길>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촬영은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SF영화같아보이는 이유는

<호수길>은 2년 동안 촬영한 영화이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 이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호수길>은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 영화이다. 정재훈은 취미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찍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어서 사람들이 이주하고 텅 빈 동네에 혼자 남아서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영화. 그러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방어능력도 없이 할 때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지요.”(2009년 11월7일 관객과의 대화) 물론 이 말은 비유이다. 이 영화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단 한숏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정재훈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 장르영화에서 악당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덱스.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소도구 컨벤션. 그는 왜 그런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

정재훈이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아무리 빨라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이 재개발지구로 결정된 다음일 것이다. 말하자면 행정적 결정이 난 다음에 시작된 영화. ‘포스트’로서의 영화.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결국 떠나가야 하는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이들. 물론 영화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는 동네 주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마치 낯선 혹성에 와서 탐사를 하는 듯한 카메라. 당신은 이 영화가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것처럼 시작한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꾸만 <호수길>이 SF영화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 있고 그들과 카메라의 거리는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가청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없다. 말의 바깥에 있을 때 대상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망원렌즈로 담은 사람들은 카메라의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재훈은 카메라의 거리감과 거의 동일한 마이크의 사용을 통해서 시각과 청각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영화에서 남는 것은 동사뿐이다. <호수길>은 오로지 동사들만이 존재하는 표면효과만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표면을 본 다음 그 안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야만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호수길>을 보면서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표면효과들의 예. 정재훈은 철거를 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시위에 관심이 없다.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고요하게 진행된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행정적 작동) 측량 기사들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수행적 장치). 물론 전경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사건의 변수). 먼저 첫 번째, 은평구 응암2동은 지방 시골에 있는 폐쇄된 동네가 아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종로3가에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서울 안의 거주지역이다. <호수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시작하고 난 다음 42분이 될 때까지 이 동네의 생활을 찍은 장면들에서 신기할 정도로 남편들, 혹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정재훈을 만났다. “이 동네에 출근하듯이 가서 찍은 건가요?” 말하자면 촬영을 정해놓은 시간대가 있느냐는 질문의 우회.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전 이 동네에 살면서 찍었습니다.” 정재훈은 남편들이, 혹은 아버지들이 거리에 보이는 시간대를 피해서 찍었다(또는 그것을 편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마치 이 동네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영화의 후반부, 이 동네를 때려부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배제 상태의 진행은 다큐멘터리에서 신기한 결정이다.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그 다음 두 번째. <호수길>의 자막에 따르면 영화는 “2006년 가을에서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찍었다. 이 기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모두 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은평구 응암2동은 날씨의 변화가 전혀 없는 동네처럼 보인다. 언제나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 단 한 차례의 비도 오지 않으며, 겨울 내내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니, 흐린 날씨조차 없다.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서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맑은 날씨로 설정하면 그걸 여러 날에 나누어 찍을 때 숏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호수길>은 단 하루로 설정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건도 없이 그 동네의 일상을 찍었다. 장면 사이의 극적인 연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날씨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을 뿐이다. 맑은 하늘. 구름조차 없는 날씨. 다만 가끔 바람이 분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호수길>의 첫 장면은 낮달이 보이는 하늘이다. 낮에 달을 보다니. 그런 다음 마치 카메라는 거기서 추락하는 무언가를 뒤쫓듯이 지구로 내려온다. 아니, 자신이 추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로 내려온 다음부터 카메라는 항상 멈춰 서서 찍고 있다. 우주선이 고장 난 것일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팬을 하거나 혹은 틸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은 극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뜻. 극영화는 그렇게 인물을 세워놓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정해놓고 동선을 설계했다는 뜻이다. 다른 뜻. 다큐멘터리에서 일단 카메라가 서면 그걸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물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장소의 느낌, 시간의 흐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인물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사건을 다루느라 매달리는 동안 정재훈은 응암2동을 느껴보고 있다.

정재훈은 <호수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카메라가 고정해서 서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42분10초 이후, 그러니까 철거 ‘이후’부터 손으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대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못 느꼈으면, 이라고 바라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도 정재훈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멈춰 서서(fixed) 찍었을(camera) 것이다. 그런데 철거 ‘이후’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움직이는 이유, 혹은 손으로 든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미학적 근거. 앞부분의 멈추어선 카메라는 그 동네의 일부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동네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거기 서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다음 철거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자기가 의지할 데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기의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흔들린다. 표류의 상태. 자기가 살던 장소가 낯선 공간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향이라는 지평의 상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과 전혀 말을 나누지 않는 마이크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실용적 이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철거현장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를 들이댄 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촬영을 제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철거 현장은 이상하게도(당연하게도?) 마치 사건 현장처럼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혹은 그 정도라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신분을 물어본 다음 왜 여기서 촬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 못하면 신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세워놓으면 갑작스러운 충돌 혹은 압수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들고 찍을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 게다가 <호수길>은 대부분 혼자 촬영하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깨져버린 평화. 고요함 뒤의 위기감. 마치 정지된 것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손으로 들고 찍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수길>이 담고 있는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가와 신스케의 유명한 테제.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과 발은 그 영화의 세계관이다. <호수길>은 그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전’ 장면의 멈추어 선 숏에서 갑자기 인서트처럼 개입하는 줌의 사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정재훈의 첫 번째 대상. 지구로 내려온 카메라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벌레와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담기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 물론 이 영화는 자연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응암2동의 골목을 보여주는 프레임들은 마치 <스틸 라이프>의 구도에 가깝다. <호수길>은 같은 화면을 일정하게 되풀이하면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학습효과. 우리는 이 동네의 풍경을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정한 간격의 진행에는 우리가 충분히 그 풍경을 보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이 바뀐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리듬감. 동네의 소리들이 매우 작게 녹음된 화면들은 시작하고 4분4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마치 스며들듯이 분명하게 들린다. 저물어가는 여름, 혹은 이미 시작된 가을. 골목 계단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면 아줌마와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 둘의 사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지나가면서 흘낏 카메라를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재훈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는 이 계단에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를 지나갔고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기를 내버려둔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정재훈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담는 것이다. 이 순간 지나가는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동일한 세상이라는 리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호수길>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수길>에 관한 그 어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후’ 철거가 시작되는 참혹한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 영화에서 감도는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일촉즉발의 느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사건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건이 없는 서울의 풍경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호수길>은 낮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뛰어들어간다. 어떤 조명의 도움도 없는 촬영. 그저 골목에 켜진 가로등, 혹은 대부분 불이 꺼진 동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영화 혼자 깨어 있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거기 무언가 기다려서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장면들은 아주 깊은 밤, 거의 대부분이 잠든 밤까지 기다려서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불을 켠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외로운 섬처럼 불이 켜진 집.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다시 <호수길>은 낮 시간으로 옮겨간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 두 번째 낮은 이 동네의 작은 텃밭에서 (무언가를) 경작하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줌으로 다가간다. 좀 갑작스러워서 느닷없게 느껴지는 줌은 우리에게 지금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리적 확인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줌으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잘 보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텃밭에 있는 할머니와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얼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골목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밤을 맞는다. 앞에서 본 밤 장면과 똑같진 않지만 그러나 같은 태도를 갖고 밤을 지새운다. 물론 이 장면이 밤을 지새우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찍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고요한 시간대를 찍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카메라는 도리없이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 두개의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두께). 촬영한 시간(의 순간).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도 보지 못한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출현도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낮. 같은 리듬의 반복.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걸어갈 정도로 불편한 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면서도 힘겨워서 자꾸만 다른 한손으로는 벽에 기댈 만큼 힘겨운 걸음.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때 갑자기 움직이면서 할머니에게로 줌인한다. 우리는 등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줌으로 쫓아가던 카메라는 특별하게 무얼 보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더 줌인을 한다.

두번의 줌인. 지나치게 멀리서 줌을 해서 심지어 화면의 질감에 픽셀이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화면이 뭉개지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이례적인 방법. 우선 정재훈은 할머니(의 행동이나 동선)을 훔쳐볼 생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줌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줌인은 대상의 방법을 기억시키는 기호이다. 같은 말의 다른 말.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줌의 방법을 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러한 방법으로 보는 대상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거의 멈춰 서서 진행되는 숏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다. 이 줌인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화질 때문에 오히려 대상과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호수길>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잠든 할머니. 아이들의 노는 소리.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그리고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우리는 화면의 변화에 대해서 점점 민감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할아버지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나뭇잎들은 단풍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치는 밤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길한 밤이다. 밤거리에 불빛도 없이 개가 짖고 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먼저 소리칠 때, 지금 여기에 들어선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낯선 자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는 낮 장면. 우리가 이미 보았던 계단 길. 골목길을 올라오는 소녀. 아이들은 종종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눈 마주침이 영화와 인물 사이의 어떤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저 거기 있는 나무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화감. 그런 다음 <호수길>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응암2동의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숏 장면이 아이들의 얼굴과 디졸브된다. 교과서적으로만 말하면 디졸브는 추억의 입구이거나(플래시백의 시작) 두개의 장소 혹은 사건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 다음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다. 여기서는 망원렌즈로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카메라와의 접촉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차례로 다가와서 카메라를 만지기도 한다. 마치 기억의 소환과도 같은 순간.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서 함께 생각하도록 요구할 때, 나는 이 롱숏의 집들이 다름 아닌 클로즈업의 아이들이 사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롱숏과 클로즈업의 매듭. 차라리 단일한 결합. 숏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 재결합. 그러나 두개의 숏이 디졸브 형식을 가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령효과. 유령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불길함, 혹은 사태를 예견함

그리고 다시 우리가 몇번이고 보았던 그 골목길. 동일한 프레임. 멀리 떨어진 카메라(와 마이크).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이 그 길에서 뛰어논다. 저 멀리서 오던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중간에 놓인 침상에 앉아 쉰다. 6분40초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지속되는 이 장면은 앞부분, 그러니까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 장면 중에서 가장 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플랑 세캉스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줌으로 잡아당긴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평화로운 장면은 모두 끝났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저녁 장면. 몇번이고 보았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응암2동의 전경. 동네 여기저기에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밤 장면. 동네 전경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봇대의 불안정한 불빛. 다시 낮.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돌아본다. 그 할아버지를 카메라는 줌으로 당겨서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카메라를 의심하듯이 바라보던 시선은 없었다.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게 만든 것일까? 카메라도 이제까지 무심하게 지켜보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를 망원렌즈로 쫓아간다. 거의 ‘뭉개질 정도로’ 다가간 줌. 그런 다음 놀이터가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저 멀리 아파트촌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여기는 바그다드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 <호수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태를 예감하게 만든다.

침묵. 그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회색빛 시멘트 벽을 따라 처마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을 알 수 있는 시간의 기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추위를 보게 만든다. 두 번째. 거기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누가 물을 틀어놓은 것일까?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그 물방울은 고드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적이 사라진 황폐함.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시 밤. 무시무시한 밤.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밤.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사람이, 어쩌면 모니터에 보이는 그 누군가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유령의 흔적. 그가 사람이라면 이 한밤중에 왜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그가 모니터 속의 그림자라면 지금 이 늦은 밤에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 빛은 무엇인가? 저 푸르스름한 빛만이 남았다. 저건 등대가 아니다. 불 꺼진 동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때 문득 카메라는 그리운 듯이 하늘을 본다. 어둠 속에서 관용도가 매우 낮은 저가기종의 디지털카메라로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거기 볼 게 있다는 뜻이다). 프레임을 메우는 지글거리는 그레인. 밤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내민다.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낮달이었음을 기억한다. 달은 다시 지워진다.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그 무시무시함

42분10초. 다시 여름. 다시 놀이터. 그러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적 소리이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철거 ‘이후’의 첫 장면.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오른쪽으로 느리게 팬을 하는 이 파노라마 숏은 ‘경축 응암 제8구역 관리처분 계획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보여준다. 집들은 이미 창문이 대부분 뜯겨나갔고 거리는 마치 지금 막 폭탄 테러를 당한 듯이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이 스산한 바람소리. 나뭇잎들은 그때처럼 펄럭이고 있다. 두개의 펄럭임. 플래카드와 나뭇잎. 우리가 몇번이고 본 그 골목길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게 뒤로 걸어간다.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신 걸어간다, 고 말한 이유는 명백히 이 후진 트래킹숏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뒷걸음질치면서 찍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이 동네에서 정재훈이 마주치는 건 거의 부서져버린 화단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고양이다. 이때 우리는 이 고양이를 이제까지 정재훈이 사람을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지나치게 줌으로 다가가서 픽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뭉개져버린 화면. 왜 정재훈은 사람과 고양이를 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의인화의 숏.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한계 허용치를 벗어난 줌. 정재훈은 거기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어쩌면 뛰놀던 소년 소녀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에서 느리게 줌아웃하는 카메라는 카메라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두 마리의 나비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도 이 나비는 CG가 아니다. 우연히 끼어든 나비. 정재훈은 예민하게 그 우연의 리듬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나비는 매몰차게도 금방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철거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재훈은 그 현장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오로지 흔적들뿐이다.

정재훈이 고양이 다음에 마주치는 건 골목을 떠도는 개 한 마리이다. 그리고 그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 골목, 어린아이가 뛰어놀면서 카메라를 얼핏 바라보던 그곳에서 마치 그 아이처럼 혼자 논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개는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간 이 골목에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 불쌍한 개. 그 개의 목에 묶여 있는 목걸이를 보건대 아마도 인도견이었던 것 같다. 그 개 없이 그 개의 주인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존재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재훈은 자꾸만 나무를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그 참혹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포클레인이 집을 때려부수는 소리는 쉴새없이 들려온다. 정재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 이미 우리가 보았던 계단,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를 차례로 방문한다. 거기에 감정을 담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 앞에서 쫓겨난 과거의 시간을 본다.

영화가 시작된 지 54분15초. 저 멀리서 공사하는 포클레인.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대 로봇. 부서지는 집들. 날리는 먼지가루. 거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누군가가 두고 간 빨래.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보. 그 이불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이불은 잠을 잘 때 덮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집에서 잘 때 제일 편하다.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잘 때의 불편함. 그런데 왜 이불을 두고 간 것일까. 이불이 불편한 짐이 되는 삶을 상상해보라.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전봇대의 참새들이다. 정재훈은 마치 그들을 출연이라도 시킨 것처럼 자기 카메라 안에 담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집 저편으로 새떼가 무리를 지어 이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날아갈 수 없는 카메라는 시선을 떨구듯이 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 우리가 좀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단에 버려져있다. 이 말의 방점은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버려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가? 대답은 명백하지만 끔찍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과 지금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 이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일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찮은 건 누구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 그를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협박. 가장 무서운 협박은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파리들이 들끓는 고양이의 시체. 시체가 보여주는 이 장소의 무시무시한 상황. 이때 <호수길>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이즈에 가까운 음향효과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찢는 듯한 피드백 노이즈. 시체라는 결과 안에 담긴 폭력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살아본 우리 시대의 철거에 관한 경험의 공유이다. 만일 이 시체를 그저 무심코 지나친다면 매년 전세 이사 걱정없이 사는 당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

<호수길>은 시종일관 거리에서, 골목길에서, 계단에서 진행된 영화이다. 하지만 56분30초가 되었을 때 정재훈은 집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은 이미 모두 부서졌고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없다. 정재훈은 방 안에서 거의 중얼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집 안과 바깥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게 쾅,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결에 문이 닫힌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사람 없는 집에서 문을 여닫는 바람. 카메라가 방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 뜯겨져나간 창문 바깥에서는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다. 그때 여닫히는 방문 소리와 기울어져가는 천장, 비틀리는 건축물의 기둥이 내는 사운드는 마치 사라져가는 집이 내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 비통하다.

<호수길>의 마지막 장면은 7분15초 동안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단 하나의 숏이다. 주변은 이미 다 부서져서 그 많던 집들은 사라졌고 마치 공터처럼 텅 빈 공간에 세채의 집이 서 있을 뿐이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풍경. 아니, 차라리 여기는 달 표면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중 가운데 집을 포클레인이 부수기 시작한다. 정재훈은 그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너무 짧다. 여기서 이 시간은 특별한 호소이다. 7분15초는 이층집 한채를 완전하게 다 때려부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건없는 사건. 패배가 불 보듯한 상황의 정치학.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그런 다음 그 집을 부수는 데는 고작 7분15초면 충분하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정재훈은 두번 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바라본다. 거의 다 부서져버린 동네. 그게 단지 기억의 철거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푸르른 하늘. 맑게 갠 날 떠 있는 한점 구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응암2동은 그렇게 거의 다 부서졌다. 그런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장면.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꽃. 그저 재가 되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을 온 들판에 피어오르게 할 것인가. 기다림. 기대가 와야 할 미래. 기대, 그리고 미래.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동네에 머무르면서 내가 보고 들었던 게 이야기가 되었다” 정재훈 자신의 <호수길>의 소개의 글. 그 비통한 과거완료시제. 이제 그는 더이상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오랫동안 쳐다볼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더이상 보고 들을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푸닥거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이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 요구의 정의. 응답하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함께 대답할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해피 뉴 이어!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박노자 글방] 지식인의 "태생적 비겁함?"

생각거리 | 2009.05.22 22:57 | Posted by 맥거핀.
박노자 님의 글입니다.
'박노자' 글방에서 가져왔습니다.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1038)
(허락을 받지 않아 죄송합니다. 문제가 된다면 자삭합니다.)



요즘 "황석영 개그"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듯한데,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조금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 논의는 자꾸 황석영 선생의 개인 "욕망"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그 분의 "개인"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분과 같은 "급"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분과 같은 류의 행동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멸종위기에 처해진 희귀 종류입니다. 즉,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급"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 칼 만하임 선생의 말대로 지식인을 free-wheeling, 즉 자율적 존재로 보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 정도입니다. 상사의 말을 그냥 그대로 따라야 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나 재벌의 머슴들에 비해서야 연구실에 앉아서 제 생각을 거의 여과없이 이렇게 써낼 수 있는 저 같은 인간이야 좀 free-wheeling 하겠지요.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지식계야말로 눈에 보이는, 또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외부자들에게는 당장 파악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부자 입장에세는 거의 지식인마다 딱지처럼 그 "급"이 붙어 있지요. 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급"이 꼭 지명도에 따라 정해지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문단의 경우에는 그런 측면이 강하다 해도,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등단한 잡지, 수상항 상, 내부적으로 "키워준" 후견자, 같은 "계통"에 속하는 문인들이 누구냐는 그 "줄세우기"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제가 비교적으로 잘 아는 국내 사학계 같으면 대체로 출신대학, 은사, 연령, 직장, 업적 순일 것입니다. 즉 서울대 국사학과의 유력한 분에게 배운 40-50대의 수도권대/지방거점대 교수는 어느 정도의 업적이 쌓이면 "권위"가 되기에 비교적으로 쉬운 입장에 있다는 것이지요. 출신대학/은사를 물신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국내/일본의 분위기는 좀 특이하지만 학계 안에서의 위계 질서는 구미권에서도 엄밀히 존재하지요. 예컨대 학술지 게재하기 위해 논문을 심사에 맡길 때에 "급"이 같거나 더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교수 채용 때의 심사와 같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면 그 "급"이란 더욱더 분명해지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의 "급"에 도달한 이상 또 하나의 권력, 즉 국가권력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예컨대 본인과 본인의 "문하생"들을 위해 연구비라도 따내야 하지 않습니까? 연구비, 출판보조비, 학회 보조비 등은 그나마 국가와의 "괜찮은"/"건전한" 관계일 수도 있지만, 특히 국내에서는 많은 교수들이 각종 "국책 사업" (국가 위원회들 등등)에 참여하도록 학교 측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수도 있지요. 학교로서는 이게 학교 사이에서의 "무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도이기도 합니다.  사실, "무한의 경쟁"이란 결국 경쟁 주체의 국가권력에 대한 "무한의 구애"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이 치사한 부분을 잘 이야기해주지 않더랍니다. 또 국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연구비를 받고, "국책 사업"에 자주 참여하고, 그 덕으로 많은 박사과정생들이나 젊은 박사들에게 용역을 많이 주고 그러다 보면 그게 어느덧 관습화되어서 국가와의 관계는 뗄레애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면 그 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생기는데, 일단 국가 정책 등에 대한 대외적 발언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게 기본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좀 참자"라고 하면서 이렇게 함구하면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비겁함은 어느덧 현명함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교에 옭매여 있는 교수보다 작가가 더 자유롭다고 보시는 분도 계시는데, 착각일 뿐입니다. 잘 안팔릴 소설들을 영어나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 출판케 지원해줄 주체는 과연 누구이고, 각종 작가포럼 등을 지원할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여간 "정상적인" 지식인이란 "보신", "자기 보존" 본능이 대단히 잘 발전된, 자신의 "급"이 높은 만큼 국가 관료들의 "급"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체제에 일단 순응한 지식인에게는 체제에 대한 의미 있는 "반대"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하라사막에서 물을 찾는 일과 똑같은 것이지요. 물론 각자 취향에 따라 "표현"의 순위는 다를 것이고, 적어도 "반대하는 시늉"이라도 해줄 소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오십보백보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욕심이 조금 더 크면 국가와의 "통상적" 협력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즉, 국가 정책을 명시적으로 찬양하거나, 국가에 의해서 돌연히 크게 기용되거나... 이러한 "특별한 유착"은 세인들에게 - 특히 해당 지식인은 "반대자"로서 알려졌을 경우에는 - 좀 괴이하게 보이겠지만 지식인 사회의 "통상적 협력"의 정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이상하게 안보일 것에요. 사실, "통상적 협력"보다 단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면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요.
 
지식인들을 좀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거나 특별한 후광을 부여한다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식인 본인들도 대체로 매우 냉소적으로 처신하기에 그들을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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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칼럼] 신나는 미네르바 사육제

생각거리 | 2009.01.13 01:48 | Posted by 맥거핀.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 하는가"

출처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53717

법치의 위기

MB호의 한국. 여기서 현실은 초현실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해괴한 일도 버젓이 벌어지는 게 이 나라 현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사건에 대한 외신의 반응이 전해졌다. <로이터 통신>은 이 소식을 '이상한 소식'(oddly enough)란에 실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한 '웹 커뮤니케이터의 체포는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 아메리카 미디어>는 '미디어의 비판을 매장시키는 한국 불도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네르바를 체포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터넷 인프라를 보유한 나라의 정부가 정보의 유통을 장악하기 위해 내놓은 조치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법치주의에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법의 적용이 해괴할 정도로 자의적이다 보니, 시민들은 어디까지 불법이고, 어디까지 합법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됐다. 조중동에 대한 광고중단 운동을 처벌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맥락이 다른 미국의 판례를 찾아다 들이대고, 유모차 시위하던 주부들에게는 엉뚱하게 '아동학대법'을 들이대겠다는 개그를 늘어놓는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으려고 83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법을 부활시켰다. 심지어 군사정권도 쓰지 않아서 25년 동안 미라가 됐던 5공 시절의 악법이 느닷없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관 뚜껑을 열고 다시 나온 것이다.

법 적용이 이렇게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살 수가 있을까? 이렇게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몇몇 논객들은 자신이 올린 글을 미리 삭제하고 침묵으로 돌아섰다. 이른바 '칠링 이펙트'가 일어난 것이다. 법의 해석과 적용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을 경우 법은 이리저리 늘려 아무나 엮어 넣는 폭력의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태의 본질을 보수주의자인 이회창 씨가 정확하게 지적했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바로 봐야 한다. 실정법에 위반하기만 하면 무조건 처벌대상으로 보는 이른바 형식적 법치주의는 합법주의를 무기로 삼아 국민을 억압하던 국가독재시대의 유물이다."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도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혐의 자체가 황당한데다가 도주나 증거인멸의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 영장이 기각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심지어 한나라당의 공성진 최고위원도 "미네르바 구속수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정두언 의원조차 "구속은 도주 우려가 있는 사람들이 대상인데, 그 사람은 자기가 글 쓴 것을 다 인정했기 때문에 구속까지 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명색이 한나라당의 '국민소통위원장'으로서 입장이 난처했던 모양이다.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유일한 기관은 검찰과 법원이다.

허위사실 유포?

허위사실 유포로 남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은 이상, 그것을 이유로 처벌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해괴한 것이다. 그런 법이 어느 나라에 있던가? 아마 5공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괴한 법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문제가 된 전기통신법은 헌재에서 위헌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백번 양보하여 그것을 실정법으로 인정한다 하자. 만약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칠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유포한 대부분의 글이 허위여야 한다. 하지만 그의 글의 대부분은 허위가 아니었고, 그 중의 사소한 일부만이 허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이것이 "법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검찰에서 혐의를 두었다는 그 두 가지 허위사실을 보자. 하나는 작년 7월에 올린 것으로, "외환ㆍ예산ㆍ환전업무 8월1일부터 전면 중단"이라는 내용. 하지만 당시 검찰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었다. 체포의 이유가 된 것은 역시 두 번째 것으로, "주요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는 긴급공문을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 그런데 민주당 이석현 의원에 따르면, 정부에서 7대 시중 은행 간부들을 모아놓고 외환매입 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 요청의 형태가 '공문'이라는 문서였냐, '회의' 혹은 '전화'였냐는 아주 지엽적인 사실뿐이다.

뉴스를 보니 재경부에서도 외환매입의 자제를 요청한 사실은 인정한 모양이다. 다만,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협조였단다. 하지만 그것을 '협조'라 부르느냐, '명령'이라 부르느냐는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다. 결국, 외환매입의 자제를 요청한 형식이 '문서'였느냐 '구두'였느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영장'을 받는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린 셈. 그런데 그게 심지어 국가신인도씩이나 떨어뜨렸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가? 인터넷에 글 올리는 데에 이제 국가신인도까지 고려해야 할 모양이다. 국가신인도에 영향을 끼친 게 죄가 된다면, 대통령과 강만수 경제팀은 감옥에서 대체 몇 년을 살아야 할까?

차라리 네티즌교육헌장을 제정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사이버에 태어났다"고 가르치는 게 좋겠다. '중대한 사안'이라 구속했다는 얘기도 우습다. 구속을 피하려면 이제 인터넷 글질하면서 '이 글이 중대한 사안이 될지, 안 될지' 예측해야 한다. 글이 재수 없게 중대한 사안이 되거나,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되면, 바로 구속이다. 듣자 하니 검찰에서는 미네르바 가족친지의 계좌를 뒤진단다. 5공 시절의 공안수사를 보는 듯하다. 네티즌들은 "차라리 강만수 씨 경제팀의 가족과 친지들의 계좌를 뒤지는 게" 더 성과가 있을 것 같다고 비아냥댄다.

검찰에서는 정부 측 사람들 만나 구체적인 피해액수까지 산정했단다. 미네르바의 글과 환율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슨 수로 확정한단 말인가? 그날 달러 사고판 사람들 만나서, 그 글 읽고 매매를 결심했다는 자술서를 받을 것인가? 외환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달랑 인터넷 글 하나란 말인가? 12월 평균치보다 거래량이 많았다느니 적었다느니 하는 얘기는 유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러다가는 한강물이 예년보다 며칠 빨리 언 것도 증거가 되겠다. 소설을 써서 조중동의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나? 응모만 하면 조선일보 동인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다.

미네르바는 왜 떴는가?

아마추어에게 농락당한 게 사무쳤던 모양이다. 조중동에서는 미네르바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봤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미네르바의 칼럼이 적어도 대통령의 발언이나 강만수 경제팀의 예측보다는 나았다는 점이다. 그의 선풍적 인기의 배경에는 정부 여당의 무지와 무능이 있다. 그 점은 심지어 조선일보에서도 인정을 한다.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가 화제다. 이 역시 도참의 일종으로서 사회 불안과 정부의 무능이 겹칠 때 발생하는 전형적 현상이다. 무능한 정부란 민심과 맞서 싸우는 정부를 뜻한다." (조선일보 이덕일 사랑 <도참과 미네르바> 2008.11.26)

그러는 조선일보는 얼마나 유능할까? 무명의 인터넷 논객이었던 미네르바를 일거에 '경제대통령'으로 끌어올린 사건이 있었다. 그 발단이 된 것은 조선일보였다. 산업은행에서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위한 협상을 하고 있던 시절, 조선일보는 칼럼과 사설을 이용해 이렇게 주장했었다.

"금융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가다 보면 사기꾼에게 속기도 하고 시장이 나빠져 깡통 차는 사례도 생기겠지만 수업료를 치르는 셈 쳐야 한다."(조선일보 송희영 칼럼 <누가 월스트리트를 두려워하랴> 2008.08.08)

"그만큼 메릴린치·리먼과 같은 초대형 빅딜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투자자의 결단(決斷)을 필요로 한다. 만년 금융 후진국인 우리가 요즘과 같은 가격에 세계 일류를 인수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리먼의 위험만큼 기회가 커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 데스크칼럼 <월스트리트 울리고 웃긴 산은(産銀)> 2008.08.27)

"산은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는 철저한 손익계산 위에서 하라. 중요한 건 산은의 마음가짐이다. 철저하게 득실을 따져 인수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면 해볼 만한 투자다." (조선일보 사설 <산은(産銀)의 리먼브라더스 인수는 철저한 손익(損益)계산 위에서> 2008.09.03)


한 마디로, "위험만큼 기회가 커" 보인다고 "해볼 만한 투자"를 했다가 "깡통 차는 사례"를 만들어 놓고는 "수업료를 치르는 셈"으로 치자는 얘기다. 하지만 자기들의 모자라는 머리에 대한 수업료를 왜 국민이 치러야 하는가? 그러니 그 수업료는 나중에 미네르바에게 개인적으로 지불하는 게 좋겠다. 조선일보가 이러고 있을 때, 미네르바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정확히 예측했다. 이 사건으로 미네르바는 일약 '경제대통령'으로 떠오르게 된다. 미네르바를 영웅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바로 조선일보였다.

미네르바 띄우기

중앙일보는 어떤가? '진보진영의 미네르바 영웅 만들기' 운운하며, 아주 앙증맞게도 기사 속에 슬쩍 내 사진과 이름을 끼워 넣는다. "미네르바 신드롬의 본질인 발언의 자유를 제치고, 그의 예측이 얼마나 맞았는지 채점하는 식의 방송을 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 미네르바 영웅 만들기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측'이라는 놀이에 별 관심이 없기에, 내게 이 사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표현의 자유'의 문제다. '영웅 만들기'라 부르려면, 적어도 이 정도 얘기는 한 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네르바에게선 이처럼 '환율 프로'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취재팀은 460여 쪽에 이르는 '미네르바 글모음' 파일과 기고문 등을 조목조목 짚어봤다. 그는 시장을 비교적 잘 보고 '엔캐리 크로스 거래, 투신의 다이내믹 헤지, 수출업체 리딩·래깅 전략' 같은 전문용어를 술술 구사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도 비슷한 케이스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예언'의 허와 실> 2008.11.23)

동아일보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썼다. 재미있는 것은, 미네르바 띄우기의 또 다른 공신이 동아일보였다는 사실. 동아일보의 자매지 <신동아>는 미네르바의 글을 실으며, "10월 이후의 환율 급등과 경기 변동을 정확히 예측해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던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가 17일 발행된 월간 신동아 12월호에 장문의 글을 투고했다"며 자랑을 했다. <신동아> 편집장의 말이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여러 글에서 예민하게 다뤘다는 측면에서 보도할 가치가 있어 글을 실었다." / "그가 바라보는 한국 경제 메커니즘과 경제구조를 보는 시각이 충분히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기자협회보 2008 11.20)

이러던 조중동이 이제 와서 미네르바가 '전문대 출신의 백수'라고 강조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대인 논증의 오류'의 학벌주의 버전이다. 그런데 그 좋은 학벌 갖고 조선일보는 뭘 했던가? 파산할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자고 했다. 그 좋은 학벌 갖고 중앙일보는 뭐 했던가? 그 백수를 "시장을 비교적 잘 보고" "전문용어를 술술 구사"하는 "환율프로"라 추켜세웠다. 그 좋은 학벌 갖고 동아일보는 뭐 했던가? '전문대 출신의 백수'에게 기고를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의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한나라당의 정책통으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으로부터 객관적 평을 들어 보자.

"이번에 체포된 사람이 진짜 미네르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진짜 미네르바고 독학을 해서 그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면 대단한 실력파다." (연합뉴스 <이한구 "미네르바 맞다면 대단한 실력파"> 2009.01.09)

"인터넷은 가면무도회"

조중동이 이렇게 헤매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전여옥 의원만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다. (쿠키뉴스 <전여옥 "미네르바와 신정아는 오버했다"> 2009.01.09) 역시 이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다. 근데 그거 아는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이상하게도 늘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야 적중한다는 것. 전 의원의 기동은 <타짜>에 나오는 정마담의 그 유명한 대사를 연상케 한다. 그는 슬쩍 '미네르바=신정아'로 등치시키려 하나, 사실 둘은 경우가 많이 다르다. 신정아는 현실의 학벌을 위조하여 교수의 지위를 얻은 반면, 미네르바는 가상의 정체성을 구축한 대가로 현실에서 직위를 얻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검찰에서 당장 사기죄를 적용했을 게다.

전 의원은 인터넷을 "가면무도회"라고 부른다. 멋진 표현인데, 아마 그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상세계에서 또 다른 자아(alter ego)를 구축하는 것은 인터넷의 잠재성에 속한다. 가령 현실의 무대리가 인터넷 게임의 세계에서는 10만의 추종자를 거느린 영주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늘 타박하는 과장님도 그 추종자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무대리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이 "대단한 실력파"라고 평가한 미네르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가면무도회'를 통해 'myself'는 이제 'myselves'가 된다. 미디어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한 가지 가능성에만 묶어놓는 정체성(identity)에서 해방되어 자아를 복수화(multiply)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터넷의 능력이다. 가상적 아이디의 정체를 까는 것, 그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인터넷 실명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을 법적으로 무시하겠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디지털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적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인터넷은 가면무도회다. 그런데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만 하는가?


라비 쿠퍼(Robbie Cooper)라는 사람은 이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현실의 인물과, '세컨드라이프'에서 그의 아바타를 병치시킨다. 첫 번째 작품에서처럼 현실과 가상의 정체성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는 가녀린 아이가 가상에서는 막강한 로보캅이 될 수도 있고, 30~40대로 보이는 뚱뚱한 아저씨가 가상세계에서는 날씬한 10대 소녀의 행세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이버 공간의 논리다. 그런데 굳이 실명을 까고 정체를 밝혀 놓은 다음 저 아이를 사기꾼이라 부르고, 저 남자를 변태라 부르는 게 과연 온당하겠는가?

두 개의 대통령

미네르바도 사이버 공간에서 저렇게 놀 수 있었고, 본인도 그러기를 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인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중앙일보는 그 이유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미네르바 열기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예언'의 허와 실> 2008.11.23) 나아가 이 신문은 "정부의 과민 대응도 미네르바를 키웠다"고 지적하며(중앙일보 <`미네르바` 한마디에 술렁대는 대한민국> 2008.11.23), "미네르바를 한 단계 더 키워준 것은 한동안 그와 전쟁을 벌이다시피 한 기획재정부였다"고 말한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소동 거품 키운 조연들> 2009 01.12)

비판에 과민한 정권은 '가상의 열광'을 '현실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이버 공간의 '인터넷 대통령'과 현실공간의 '이명박 대통령'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질서에 속하나, 대통령은 둘일 수 없다는 걸까? 현실의 권력은 가상의 대통령을 자신의 도전자로 여겼다. 은유를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청와대 임삼진 시민사회비서관은 "미네르바는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요구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미네르바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언급했다. 재정부에서 뒤늦게 부인하고 나섰지만,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강만수 장관이 최근 TV 토론에서 "공개적으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상황에서 미네르바가 뜻밖의 경력 소유자로 드러나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누가 이런 결과를 상상했겠느냐. 처지가 참 난처해졌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경제 스승' '시민 지성' 치켜세웠던 지식인들 "…"> 2009.01.10)

인터넷은 가상현실. 거기에 떠도는 얘기들은 일단 존재론적으로 가상의 지위를 가지며, 또 그렇게 수용되어야 한다. 미네르바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내놓는 보고서가 아니라, 일개 네티즌의 주관적 분석에 불과하다. 미네르바의 불행은 그의 예측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부 여당이나 보수언론보다 정확한 것으로 드러난 데서 시작했다. 가상공간의 경제분석이 공신력 있는 정부와 언론의 경제예측을 능가해 버리자, 무능한 정권에서 당혹감을 느껴 액션에 들어가고, 그 결과 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긴급체포'와 '구속영장'의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그나마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과 자율성에 대한 인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공성진 최고위원이다. 그는 "이번 수사는 (…) 현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 대응"이라고 비판하며, "사이버 세계가 현실 세계와 병용ㆍ혼융될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제도도 보완해야지만 지나친 과잉대응은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21세기 초엽이긴 하지만 지식정보화 시대가 이뤄지면 현실세계와 사이버 세계 사이에 긴장 관계가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해럴드경제 <공성진 "미네르바 수사, 지나친 대응"> 2009.01.12))

사이버 윤리

미네르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게다. 실제로 그는 "온라인에서 작성한 글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주관적 소신으로 직접 썼다> 2009.01.12) 서울대의 윤석민 교수는 이를 비판한다. "미네르바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 이렇게 파장이 커질지 몰랐다'고 말했다면 그건 아주 순진한 것이다. 온라인에 글을 쓰는 순간 오프라인의 사회적 파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미네르바구속, 전문가 진단> 2009.01.13) 하지만 "순진한 것"은 죄가 아니고, 온라인 글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확률은 로또 당첨확률과 비슷하다. 로또 하나 샀다고 당첨을 "전제"하고 돈을 쓰는가? (그리고 윤 교수가 아무리 온라인에 글을 올려도 사회적 파장은 아마 못 일으킬 게다.)

사이버 공간의 글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는 '판단중지'(epoche)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은 당연히 실명으로 올리는 글보다 책임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거기서 '그러므로 익명으로 올린 글이 더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은 실명으로 올린 글과 익명으로 올린 글에 동일한 크레딧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익명으로 올린 글은 실명으로 올린 글보다 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로이터가 지적했듯이 "경제상황에 대한 부정적 의견들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 한국 정부의 태도. 그것이 그냥 놔뒀으면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 현상을 졸지에 "사회적 파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물론 가상이 졸지에 현실이 되는 어느 시점에선가 미네르바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여지는 있다. 즉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그가 쓴 글은 이미 가상의 공간에서 나와 졸지에 오프라인에서 사회적 파장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인지했다면, 늦게라도 자신의 현실적 정체성에 대해 정직하게 해명을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즉 자신이 연출하고 언론에서 추측하는 것은 그저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처럼 가상의 정체성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공고와 전문대를 나와, 독학으로 경제를 공부했고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취미로 경제를 분석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랬다면 일이 훨씬 깔끔할 뻔 했다.

디지털 리터러시

검찰에서는 미네르바의 글에 대해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를 짜깁기한 것"이라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의 말을 빌려 미네르바가 "인터넷 정보 재가공에 탁월"(동아일보 2009.01.12)하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를 그들은 부정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그것이 바로 인터넷 글쓰기의 본령이다. 미디어 이론에서는 전자매체 글쓰기의 특성을 '반제품'으로 규정한다. 즉 활자매체의 글쓰기가 독자들에게 완제품으로 제공되어 일방적으로 수용되는 반면, 전자매체의 글쓰기는 언제라도 복제, 인용, 편집, 가공이 가능한 반제품의 상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네티즌들은 정보를 완성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운드든, 이미지든, 텍스트든, 그들은 정보를 반제품의 상태로 다운로드 받은 후, 인용, 수정, 가공, 편집을 통해 그것을 새로운 정보로 조직하여 다시 업로드한다. 사운드의 짜깁기는 리믹스, 이미지의 짜깁기는 합성, 텍스트의 짜깁기는 몽타주라 부른다. 전자적 글쓰기의 격률은 이것이다. "새로움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에 있다." 전자시대에 지식은 머리에 내장되는 게 아니라, 하드와 서버에 외장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검색술, 정보의 바다를 서핑하는 항해술이다. 이를 '디지털 리터러시'라 부른다.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을 보자. "인터넷 재가공에 탁월" 동아일보도 미네르바의 몽타주 능력은 인정한다. 기사에는 이런 언급도 나온다. "박 씨는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경제 관련 사이트나 블로그를 수시로 드나들며 인용할 만한 문구를 찾은 뒤..." 한 마디로 검색능력도 남다르다는 얘기. "박 씨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 이상의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활자문화의 도서관은 전자문화의 인터넷으로 바뀐지 오래. 기자의 눈에는 도서관에서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이상의 집착을 보이는 사람도 이상해 보일까? 여기서 우리는 검찰과 기자들에게 디지털 마인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박 씨의 글이 생소한 경제용어를 곳곳에 섞어놓은 탓에 전문적인 식견을 갖췄거나, 남들이 모르는 대단한 정보를 갖고 쓴 글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터넷에 떠다니는 공개정보와 전문가들이 내놓은 전망을 재가공했을 뿐이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공개정보나 전문가가 내놓은 전망이 어디 한둘인가? 네트 위에 홍수처럼 차고 넘치는 게 정보와 전망이다. 그 중 어느 것을 인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가공하여 어떤 맥락에 배치시키느냐, 그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의 능력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정부 여당과 조중동은 왜 그것조차 못했을까?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기자의 디지털 문맹을 보여주는 대목이 또 있다. "박 씨에게는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하는 일이 표절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기자가 한탄하는 그 기법은 '패스티쉬'라 하여 이미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 잡지에 실린 먼로의 사진을 베꼈다고 앤디 워홀의 표절을 탓하는 격이다. 인용문의 짜깁기로 이루어진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오늘날 고전이 되었다. 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를 선취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중권의 <놀이,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그 기법을 사용해 쓴 것이다.

맛보기로 실례를 하나 제시하자면, 위에 이탤릭으로 표기된 부분은 동아일보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나는 저 구절이 나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구절이 들어간 문단은 분명히 나의 것이다. 사실 이 글 전체가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해 쓴 것이다. 물론 내게도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 하는 일이 표절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다. 왜? 그래도 이 글은 분명히 내 글이니까. 이 글마저 "표절"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한글자모를 사용했다 해서 모든 글을 표절이라 부르는 것과 다름없을 게다.

미네르바를 비판하려면

미네르바를 제대로 비판하려면, 그가 제대로 인용을 했는지, 그가 올바로 짜깁기 했는지, 그리고 그 글을 사회적 맥락에 적절히 배치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디지털 문맹의 기자에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미네르바의 예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가 아니다.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은 가끔 점쟁이들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슨 자료를 인용해서, 그 예측을 무슨 논리적 추론으로 정당화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과학에서도 그렇듯이 경제학의 영역에서도 예측이라는 것은 그저 확률론적 정확성만을 가질 뿐이다.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올 확률은 1/6, 안 나올 확률은 5/6이지만, 가끔은 1/6의 확률도 실현되는 법. 1/6의 확률에 베팅을 하여 맞히면 '용하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것은 과학적 태도는 아니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측이 적중했느냐가 아니라, 그 예측의 근거가 얼마나 건전한지(sound)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몇 개나 맞았는지 채점하는 식의 보도가 내 눈에 한심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중동에서는 전문가/아마추어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놓는 모양이다. 전문적 능력은 존중해야 하나, 타이틀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이란 어제 한 예측이 오늘 틀렸다는 것을 내일 확인하는 학문"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일보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자고 했을 때, 그 무모한 용기의 배후에도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견해가 있었을 것이다. 작년 초 정부에서 환율을 올려야 한다고 했을 때, 그 가공할 근시안도 소위 전문가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학벌도 아니고, 직위도 아니고, 미네르바의 글이 제대로 근거 잡혔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애초에 그렇게 처리가 되어야 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근거들을 무너뜨리며, 그 예측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이견을 해결하는 정상적인 방법이며, 민주적인 절차다. 문제는 정부 여당도, 보수언론도 공고와 전문대 출신 백수가 쓴 글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주제가 못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원한 방법이 고작 '긴급체포'와 '구속영장'. 그 많은 전문가들은 다 어디 가시고, 이 얼마나 해괴하고 한심한 일인가?

물론 정부의 입장이 곤혹스럽긴 했을 게다. 일단, 일개 네티즌과 일국의 부처가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괜히 상대해주었다가는 그의 공신력만 높여주는 꼴이 된다. 게다가 미네르바는 결정적인 순간에 두 번 예측을 적중시켰지만, 정부 여당은 번번이 예측에 실패했다. 그 바람에 보수언론으로부터도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평을 듣는 처지. 논리보다 더 강력한 것은 현실이기에, 현실에서 두 번의 적중한 예측을 무기로 가진 상대와 논쟁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게다.

표현의 자유

미네르바는 영웅도 아니고, 범인도 아니다. 그저 일개 네티즌일 뿐이다. 그는 고학을 통해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으로부터 "대단한 실력파"라 불릴 정도로 경제학 지식을 습득했고, 검찰과 동아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인정하듯이 뛰어난 수준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구사한다. 그는 경제상황을 조선일보나 정부 여당과 다르게 보았고, 현실에서는 그의 예측이 올바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 맞는다"는 속담으로 표현해야 할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인용과 추론을 통해 이루어진 과학적 적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적중한 예측은 정부 여당과 보수언론의 무지와 무능과 현격한 대비를 이루면서, 그는 졸지에 인터넷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차라리 멈춘 시계라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맞지, 한 번도 맞지 않는 강만수와 조중동의 불량시계는 도대체 어느 나라 제품이란 말인가.)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신드롬은 인터넷의 일상이니까. 인터넷에는 허경영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고,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전여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심지어 이명박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네르바가 졸지에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리자, 정부 여당에서는 그를 체포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경제에 대한 불안이 아고라를 통해 결집해 '제2의 촛불'로 번지는 것을 사전에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네르바를 범죄자로 만들어 놓고 이를 빌미로 인터넷을 옥죄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체포가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지하벙커 상황실 해프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정부여당이 지금 심리적 패닉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1년을 허비하고, 제대로 통치할 기간이라고는 1년 밖에 안 남았잖은가.

미네르바가 올린 글이 대부분이 허위였다면, 혹은 그의 예측이 대부분 틀렸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올린 글 중에서 허위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의 예측은 상당 부분이 맞아 들어갔다. 그가 한국의 경제를 망가뜨릴 악의를 갖고 글을 썼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전망과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네티즌들은 미네르바에게서 '한국 경제를 살릴 선의'(인터넷 경제 대통령)를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바로 그 때문에 체포되고 구속된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역설인가.

미네르바는 일개 네티즌일 뿐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는 그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고? 누가 인터넷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는가. 그저 경제를 부정적으로 전망해도 체포되지 않을 자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해도 구속되지 않을 자유, 내가 쓴 글이 네티즌들의 폭발적 반응을 받았다고 국사범으로 몰리지 않을 자유, 내가 사이버 공간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고 파렴치범으로 몰리지 않을 자유. 이것은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전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만 못 누리는 '최소한의 자유'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이렇게 말하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모자라는 기자들-놀랍게도 대학을 나왔다고 한다-은 진중권이 또 다시 미네르바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거품은 자기들 입에 물고 있는 그것이지. 거품을 부풀리건, 가라앉히건, 그건 이해가 걸린 사람들끼리 하시라. 내 유일한 관심은 미네르바라는 한 개인의 권리. 일개 네티즌을 검찰이 체포하고, 법원이 구속하고, 거대언론들 떼를 지어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이 잔인한 카니발리즘. 대체 뭣들 하는 짓인가? 근데 조영남까지 나서서 그 짓을 응원한다. 철딱서니하고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