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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lude'에 해당되는 글 20

  1. 2021.01.14 붕괴하는 것들
  2. 2017.10.08 석연치 않음
  3. 2014.07.22 불가능한 속죄 2
  4. 2012.12.31 2012년의 영화들 2
  5. 2012.10.19 CINDI 기록들 2 2
  6. 2012.09.10 CINDI 기록들 1
  7. 2012.02.20 디센던트, 알렉산더 페인 2
  8. 2012.01.01 여전한 기대감 4
  9. 2011.12.13 르 아브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10. 2011.09.09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2
 

붕괴하는 것들

Interlude | 2021. 1. 14. 15:13 | Posted by 맥거핀.

 

본 사람들은 대부분 욕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콜로설>이 그런 경우인데, 네이버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만 보면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거대괴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이들(혹은 낮술먹고 덜깬 어른들)의 헛소리(아니, 로망(老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마도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lossal은 '거대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나는 살짝 비슷한 collapse(붕괴)라는 단어가 내내 연상되었는데,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대 괴수가 서울(그렇다, 우리 수도 서울)을 붕괴시키는 게 꽤 마음에 들었기도 하지만(가끔 서울을 때려 부수고 싶은 거는 나만 그런거 아니겠죠?),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자아의 '붕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새 술먹고 거짓말하다 얹혀사는 남친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영화 속에 첫등장하는 주인공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도 어떤 붕괴의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글로리아의 친구(이자 사실은 빌런) 오스카(제이슨 서디키스)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혹은 그)가 서울을 때려 부술 때 사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때려 부수고 있다. 글로리아가 뉴스를 보고 경악하며 어떻게든 서울을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사실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붕괴시키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그냥 이 영화가 어떤 은유처럼 느껴진다. B급 괴수물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사실 붕괴되어 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하필이면 아침 8시 5분에 동네 놀이터에 등장하여야만 괴수 분신 기제(개인적으로는 '로보트 태권브이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훈이의 태권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작동한다는 설정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야말로 대책없는 술꾼들이 자신의 붕괴되어가고 있는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줄줄이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각(저 아저씨는 뭐야 엄마? 아유 빨리 학교나 가!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어?), 밤새 먹은 술이 여전히 덜깬 채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노라면, 혹은 (더 최악으로는) 모래밭에 파전이라도 하나 부쳐낸다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야말로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단지 농담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쓰잘데기 없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그것은 어쩌면 결국 그 붕괴를 이겨내는 길은 누군가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타인의 자리에 서서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알코올이든 혹은 자기혐오든 무엇인가에 찌든 자신을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붕괴의 양상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오는 방법임을 영화는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헛소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각 잡고 등장하는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보다는 <신부들의 전쟁>이나 <겟 스마트> 같은 영화에서의 그 큰 눈을 굴리며 살짝 맛이 간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마음에 들거다. 또한 제이슨 서디키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멀쩡한 미친 짓' 연기는 꽤나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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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치 않음

Interlude | 2017. 10. 8. 14:28 | Posted by 맥거핀.

 

(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 있음)

 

 

연휴 기간 2편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았지만, 한 편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시 보았고, 한 편은 TV에서 하길래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2편의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한편으로 송강호라는 출중한 배우가 두 영화 모두 극의 중심에서 거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두 명의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실존 인물들, 그 인물들은 송강호라는 육신을 입고, 거의 다시 스크린에서 걸어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두 영화가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송강호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크게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남아있는 어떤 묘한 '석연치 않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크린 안의 두 인물, 그러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과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두 영화는 초반부, 코믹한 터치로 두 인물의 소박한 속물성, 혹은 속물성 속에 드러나는 인간미 같은 것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가벼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그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하는 동력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에게 그것이 가족, 특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변호인>의 송우석에게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끝까지 무엇인가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중반부의 큰 사건, 즉 <택시운전사>에서는 광주에서의 일들, <변호인>에서는 '부림 사건'이 그 인물들을 크게 변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변호인>의 송우석은 계속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불어 넣는다.

 

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들에서 살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두 영화의 애초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말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빌려왔다면, <변호인>은 송우석(노무현)을 말하기 위해 '부림 사건'이라는 사건을 빌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사건에서 두 인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건에 비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사복은 택시 운전사, 그것도 광주 택시 운전사가 아닌 서울 택시 운전사이고, 송우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단골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즉 어쩌면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한 걸음 비껴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인가,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지 같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약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이 지켜낼 수 있었던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지켜낼 수 없었던 무엇인가는 선명해진다.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과 독일 기자를 끝까지 도와주는 광주 택시 운전사 태술(유해진)이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김사복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었을까, 아니면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고문받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산산이 부서졌을까, 아닐까.  

 

영화는 물론 고약한 질문을 할 틈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조용히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 부여하고 있는 그 역할로서의 자세. 그렇다. 여기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택시기사나 변호사가 아닌,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단순히 직업명 그 이상의 무엇을 이 제목은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각각의 영화가 키포인트로 내세우는 장면, 혹은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에게 하는 대사, 손님을 두고왔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송우석이 국가는 국민이라고 재판정에서 일갈하는 장면. 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 장면들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는 직업인의 윤리에 가까운 것이다. 김사복은 광주에서 서울로 손님을 데려다주어야 하는 택시운전사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만 하며, 송우석은 변호인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국민이 아닌, 단지 쿠데타권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갈한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송우석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김사복에게는 더 가혹한 것 같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간 것은 단지 택시운전사의 직업윤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직업윤리 이외의 어떤 것, 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않다. 그렇다면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김사복은 왜 광주로 돌아갔을까. (사실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송우석에게도 물어볼 필요는 있다. 그는 왜 진우를 변호하기로 결심했을까. 사무장의 말대로 앞에 놓인 편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면서 말이다.) 독일기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는 죄책감? 사람들, 특히 대학생 재식(류준열)을 버려두고 나왔다는 부채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재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돌아간 직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제대로된 소식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 이 중 어떤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화 속에서 묘하게 눙쳐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김사복이 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3한강교'를 따라부르다가 울면서 핸들을 꺾는다. 혹은 송우석이 부르르 떨면서 국가권력의 하수인에게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각각 기억에 남을 한 장면, 혹은 송강호의 두 개의 명연기. 아니 나는 냉소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송강호가 복잡한 얼굴로 울 때, 나도 곧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송강호가 그렇게 법정에서 소리칠 때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 송강호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석연치않음이 여기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눙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김사복이 기어코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왜 핸들을 꺾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잡한 답이 아니라, 그가 그 순간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는 (허구적) 사실, 송강호가 그 순간 보여준 명연기이다.

 

그 명연기를 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복잡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혹은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없는 복잡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말할 수 있는 다른 케이스. (뭐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같은 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광주 그 이상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자 하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겹겹이 쌓인 물음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혹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숭고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이렇게 숭고해질수도, 잔인해질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한 인간과 잔인한 인간은 분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가,라는 등의 질문들. 그것은 분명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려는 그 자세는 중요하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는 그 인간을 어쩌면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는, 혹은 영화 <변호인>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는다. 겨우 질문을 했다하더라도, 답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영화는 조용히 작은 승리로 나아간다. 그 작은 승리, 혹은 불완전한 승리는 묘하게도 직업인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택시운전사는 결국 손님을 태우고 나와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변호인은 완전한 무죄는 아니지만, 불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에게 개인적인 에필로그까지 기꺼이 부여해준다. 그것은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된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 따뜻한 택시운전사로 살고 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에게 변호사 취급도 못받던 송우석이 변호사 99명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작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작은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그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과 인물들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인간 존재 일반에 대한 어떤 물음들을 할 틈은 영화는 끝내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급격하게 주인공 개인적인 차원으로 재빨리 자리매김되며, 관객의 빈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뿐이다.

 

그것이 최근의 영화들, 특히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취하는 전략은 아닐까. 사건보다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 그 인물을 관객들로 하여금 재빨리 동일시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불완전한 승리', 혹은 '작은 승리'를 부여하는 것. (물론 관객은 승리를 더 좋아하므로,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완전할지언정 어떻게든 승리의 구조가 된다. 어떤 것을 승리의 지점으로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뿐.) 그리고 우리는 인물의 편에 서서 그 '불완전한 승리'에 안도하면서 오로지 그 불완전한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혹은 설령 패배했을지라도 스크린 속에서 장렬하게 부활한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기억해서 언젠가는 '완전한 승리'를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몇가지는 장담해도 좋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인공의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줄 때 영화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특히 송강호 같은 배우가 스크린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이다.) 그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주려고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현실에서는 애쓰는 누군가, 스크린 안에 숨겨진 누군가는 없다는 것. 그 때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덧.

영화관에서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히 좋게 보았다. 그것을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두 번째 볼 때에는 그런 감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급격한 감흥과 급격한 무감함은 무엇으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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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속죄

Interlude | 2014. 7. 22. 16:20 | Posted by 맥거핀.




속죄(贖罪), 구로사와 기요시, 2012

(작품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를 보다 보면 뇌리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 그리고 음산한 남자의 등장과 부탁, 그리고 그것에 응하는 에미리, 소녀들을 등지고 떠나는 에미리와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다시 만난 네 소녀들과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 코이즈미 쿄코), 그리고 살아남은 네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속죄의 강요. 물론 이것이 뇌리에 남는 이유는 일련의 이 장면들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며, 작품 속에서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를 포함한 이 다섯 여자들의 이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장면들인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며 일련의 질문들 -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가 데려간 학교 체육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소녀들은 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속죄의 강요는 정당한가, 등등 - 을 생각케 하는 장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이 장면들이 계속 반복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드라마의 구성으로는 약간 특이하게도 이 일련의 시퀀스는 일종의 액자로서 매회 반복이 된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는 있을 터였다. 그것은 개개의 소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매회를 이끌어 간다는 이 드라마의 구조(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도 이 드라마처럼 화자가 바뀌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조라고 알고 있다)에서 연유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니 주의 깊게 보라는 신호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반복은 이상한 다른 잔상들을 남긴다. (한 마디 더 붙여두자면 후에 이 드라마는 영화판으로 재편집되기도 했는데,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드라마와 비슷하게 중간중간 계속 반복된다. 전편의 이야기를 리마인드 시키는 것이 중요한 드라마라면 이러한 반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 이유란 무엇일까. 또 한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장면들을 반복시키기는 하지만 미묘한 변주로 중간중간 다른 느낌을 주며, 각각의 주인공들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마지막에 반복되는 속죄 강요 씬은 아사코가 말하기 직전 그녀가 묶고 있던 머리를 푸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그녀에게 효과적으로 주목하게 만든다. 즉 지금까지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듣고 있던 네 소녀들의 심정만을 생각해 왔다면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를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이 남기는 잔상 중에 하나는 바로 반복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반복되는 이 '장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반복한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반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개별적인 장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이 반복되는 시퀀스 중 남자가 에미리를 데려가는 것을 소녀들이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전 아사코(에미리의 어머니)가 벌인 일들의 반복이며, 동시에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서 다시 아사코에 의해 반복 시도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아사코가 과거에 한 것은 자살의 방조이지만 소녀들의 행위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남자가 에미리를 데리고 갈 때 소녀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우리 역시 대개 짐작한다. 에미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이다. 그것을 구로사와 기요시는 효과적인 컨트롤로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남자와 에미리가 학교 건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잡은 소녀들의 시점숏 옆에 매회 贖罪라는 제목을 띄우는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약간은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는데, 예를 들어 5편에서 아사코가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다는 진술은 1편의 사에(아오이 유우)의 이야기로 변주되며, 질투와 시기의 고백은 2편 마키(코이케 에이코)나 4편 유카(이케와키 치즈루)의 이야기에서, 누군가가 가진 중요한 것을 빼앗는 것이 복수라는 5편의 이야기는 다시 4편 유카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 상으로 볼 때 아사코가 벌인 일련의 일들은 에미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거쳐 기묘하게도 살아 남은 네 소녀들에 의해 일정부분 반복되며 이는 이 아사코가 소녀들에게 강요한, 그리고 소녀들이 수행하려고 애썼던 속죄(贖罪)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속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속죄'라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는 도리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에나 마키, 아키코에 의해 수행된 속죄는 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그 자신의 삶만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속죄라고 보기는 힘들고,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준 유카는 사실상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속죄가 아니다(그것을 마지막 "행복하게 살라"는 아사코의 대사로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아사코의 속죄 시도 역시 경찰에 의해 실패한다. 즉 이 영화의 모든 속죄는 사실상 실패한다. 아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이 소녀들이 속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묘한 것은(그리고 이 이야기가 흥미를 주는 것은) 이들이 저지른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고 그것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저지른 '갚아야 하는 죄'라는 것은 뭘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두려움에 나서지 못한 것? 혹은 에미리를 죽게 내버려 둔 것? 아니면 그의 근원에 있는 에미리에 대한 질투? 아니면 그 총체로서의 무엇? (이것이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서 보는 이에게 흥미를 가지게 하는 기이한 점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의 기묘한 변주. 사실 '속죄'를 하겠다고 나선 금자씨의 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사실 이상하게도 속죄는 늘 그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속죄라는 것이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결과물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속죄라는 것이 결국 반복이기 때문에, 즉 그 반복이 어떤 잔여물을 계속 남기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속죄'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 기묘한 것이 사전을 찾아보면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라고 되어 있다(그래서 이 속죄할 속(贖)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건을 의미하는 조개 패(貝)를 변으로 쓰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속죄는 결국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죄에 비길 만한 다른 어떤 것(공로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는 있던 죄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필연적으로 이 과정은 그 수행 과정에 있어서 다른 잔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 잔여물의 크기는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커진다. 즉 속죄는 종종 복수와 비슷한 것이 되어간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처럼,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는 다른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를 낳는다. 그것을 이 일련의 반복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은 15년 전의 에미리의 죽음을 불러왔고, 에미리의 죽음은 다시 현재의 사건들로 돌아왔다. 일련의 시퀀스는 반복되고, 이야기는 반복되며, 속죄는 다시 속죄로 돌아온다(즉 이 이야기 이후에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다른 속죄를 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시퀀스들은 이 속죄의 불가능성에 대해, 그 필연적인 반복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닐까. 완전히 끝으로서의 속죄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는 여전히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있으며 인간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반복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늘 그런 것에 능했다. 일련의 공포물로 유명해진 감독이지만, 사실 그의 공포는 귀신이나 혼령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달라붙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른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공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의 공포물은 사회 속에서 이 사회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공포의 원형,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원죄와 같은 것(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아니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속죄>에서의 색감은 보통의 구성과 반대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거의 회상 장면의 색감을 빼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 15년 에미리의 사건이 벌어질 때는 강한 색감이지만, 현재에는 도리어 물감이 빠진 듯한 화면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인가가 빠졌다기 보다는 그 총천연색의 화면에 무엇인가가 달라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속죄'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반복이다. 완전한 속죄를 꿈꾸는 순간, 속죄는 늘 실패한다. 적어도 인간이 행하는 속죄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여전히 그렇게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은 늘 그것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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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영화들

Interlude | 2012. 12. 31. 17:11 | Posted by 맥거핀.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이 되다보니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책을 펴들면 올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읽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이 책상에서 올해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사람의 얼굴을 보면 올해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무엇인가를 남기려 블로그에서 하얀 빈 창을 열게 되니 나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도대체 써왔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 그러므로 다른 정리는 다른 곳에서 하고 이곳 블로그에서는 그간 이야기했던 영화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올해의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싫어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늘 어느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2012년은 대선이 있었고, 거의 1년 내내 정치를 이야기하던 지극히 정치적인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정치적인 대중들과 분리되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극히 대중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1년 내내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 과연 '정치'라는 것이 있었나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대선 이후에 벌어진 몇몇 이상한 이야기들, 누군가를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한다거나, 혹은 어떤 집단을 몰아세운다거나,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는 이야기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 경기에서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을 때 그를 패배의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 것. 그러니까, 이것에는 정치는 없고 스포츠만 있다. 중대한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 승리하게 되면 누군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배했을 때에는 누군가를 희생양을 삼는 것. 왜? 그렇게 해야, 자신은 승리자로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패배자는 다른 누군가이니까.

그러나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정치가 스포츠와 가장 다른 점은 정치는 그 정치의 과정,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스포츠라고 해서 그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치를 스포츠를 응원하듯이 소비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방식으로 소비했다. 그것은 투표 이전부터 이미 강하게 드러났다. 예를 들어 TV토론 같은 것에서부터 말이다. 스포츠관람자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어떻게 이길 것인가의 문제였고, 어떻게 토론에서 상대방을 '바를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스포츠관람자들 자신도 사실은 잘 알고 있듯이 TV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가'이지, '누가 더 잘 이야기하는가'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이야기의 화제에 주로 오른 것은 누가 더 나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후 그런 스포츠관람자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은 '패배를 내 안에서 다른 곳으로 내보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누군가 때문에 졌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혜경(김정은)은 연습경기에서 진게 너 때문이라고 한 선수를 몰아세우는 코치에게 되묻는다.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럼 이겼을 때는 누구 때문에 이겼다고 할 거예요?" 승패를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승리하면 모두 때문에 승리한 것이듯이, 패배하면 모두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서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아니 굳이 패배의 원흉을 찾자면, 아마도 그 패배의 원흉을 찾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패배의 원흉일 것이다.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만큼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고 비난받는 어떤 영화제의 심사위원장과 비슷한 심정이라고 허세를 떨어보자. 아마도 나는 이 인물들이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나타났으면 이 인물들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영화가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개봉했으면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마지막에서 떠오르는 것은 이 인물들과 이 영화들이다. 영화는, 그리고 그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만이라도 이들을, 이 영화들을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표현과 형식은 S님을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데헷.)


올해의 남자 : <토리노의 말>의 마부(야노스 데르즈시)

마지막 여섯번째 날, 마부와 딸은 '소멸'된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소멸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것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것이며, 파괴라기 보다는 소멸이다. 그리고 영화는 완벽한 무(無)가 남는다. 그것의 영화적인 형태는 그러니까 검은 스크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찍는 감독의 완전한 종결의 선언인걸까, 혹은 그것을 넘어선 한 세계의 종결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러나 하느님이 육일동안 세상을 만든 후 일곱번째 날 쉬시고는 그 일곱날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나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검정색 스크린을 딱 두 번 본다. 한번은 영화가 완전히 종료될 때에, 다른 한 번은 영화가 시작하려 할 때에. 한 영화가 완전히 종료되어야만 다음 영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올해의 여자 : <화차>의 차경선(김민희)

<화차>의 세계는 부루마블 게임과 같다. 우리는 싫든 좋든 주사위를 굴려야만 하고, 우리는 싫든 좋든 그 판을 빙글빙글 돌아야만 한다. 부루마블 게임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때로는 무인도나 감옥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아, 그 영화에서 깡패도 "나도 차라리 빵이 더 편해!"라고 소리를 질렀던가. 우리가 그 게임에서 떠나려면 파산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딱 두 가지의 선택지, 하나는 어떻게든 빙글빙글 돌던가, 아니면 파산해서 영원히 게임에서 떠나든가 하는 딱 두가지의 선택지만 남아있다. 그나마 우리는 파산하게 되면 길 위에서 말을 치울 수 있지만, 불쌍한 차경선은 여전히 기차길 위에 누워 있다. 누군가는 이제 그 말을 치워주어야만 하고, 다른 많은 차경선들을 어떻게 뛰어내리지 않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두가 파산하게 되고 승자 하나만 남으면 결국 게임은 '완전히 끝난다'. 즉 다른 방식으로 모두가 '소멸'된다.


올해의 영화 :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나는 사실 이전의 글에서 이 영화의 몇몇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고, 그 의문에 대해 마땅한 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 영화가 그다지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튼 올해의 대선에서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은 집권여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기록하여, 그들, 그러니까 최소한의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그 곳에 올라간 다섯 명의 죽은 철거민들과 어떤 사건인지도 정확히 모른채, 심지어는 그 곳에 두 개의 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곳에 올라간 한 명의 죽은 경찰 특공대원, 그리고 졸지에 범법자가 된 수많은 다른 철거민들과 이상한 기억에 시달릴 수많은 다른 경찰대원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다른 많은 매체에서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꼽은 것은 이 대선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2012년의 영화에서는 나는 적어도 9명의 사라진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이기고 짐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이 9명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놓친 영화들을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순서는 없음)

1.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2. 밍크코트, 신아가, 이상철


3. 휴고, 마틴 스콜세지


4. 크레이지 호스, 프레데릭 와이즈먼


5.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6. 어머니, 태준식


7, 도주왕, 알랭 기로디


8. 레드 마리아, 경순


9. 파우스트, 알렉산더 소쿠로프


10. 신의 소녀들, 크리스티안 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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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I 기록들 2

Interlude | 2012. 10. 19. 16:40 | Posted by 맥거핀.

심연 속으로 (Into the Abyss), 베르너 헤어조그, 2011
리스트 (LIST), 홍상수, 2011
잿가루 (Ashes),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샤크다 (Sakda),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일장춘몽 (Dream is Awakening), 궈펑 허, 위에 첸, 2011


미국의 어떤 사형수를 근접하여 보여주며 사형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여러 것들에 대해 묻는 베르너 헤어조그의 다큐 <심연 속으로>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영화에서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그 사형수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너 헤어조그와 같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그는 영화 시작 부분에 자신이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밝힌다), 보다 쉬운 방법은 조금은 논쟁이 될 수 있는 사건, 혹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사형수를 선택하여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누군가. <아귀레, 신의 분노> 등에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던 베르너 헤어조그가 아닌가. 그가 선택한 두 명의 범죄자, 이제 스무살을 갓 넘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과 그의 공모자 제이슨은 거의 구원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고작 차 한대를 훔치려고 세 사람을 죽였고, 도주하다가 잡혔다. 이들은 게다가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이 보인다. 모두가 상대방이 더 큰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단지 상대방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더 기분이 묘해진다. 이들이 그 세 사람을 죽이고, 그 멋드러진 차를 몬 시각은 고작 72시간이 채 안되었고(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3일간의 어떤 '즐거움' 을 위해서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40년 형을 선고받은 제이슨(제이슨은 마이클의 종범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형이 감형되었다. 마이클은 사형선고를 받았다)의 아버지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며, 자신이 제이슨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감옥 안에서, 자신도 예전의 어떤 범죄 때문에 아들과 동일하게 40년 형을 받아 복역하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제목에서와 같이 관객을 깊은 '심연 속으로' 빠뜨리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저와 같은 자들에게 구원이란 불가한 것이 아닌가. 저들은 그야말로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저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죽일만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질문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경우(그러니까 살려둘만한 경우)가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세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살려둘만한  여지가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도 제이슨의 경우 마이클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형대신 40년 징역형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이런 영화의 정공법은 결국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무슨 기준에 의거하여 결정하는가. 그 기준들이란 과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정당한가. 그 기준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즉 살려둘만한 사람과 죽일만한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반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이의 반대편에서의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한 인간을 죽인 인간은 이미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결정하였으므로, 그 스스로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논리.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부분은 남는다. 과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사형제'라는 제도로 인해 허용되어야 하는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닌가.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른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 모순된 질문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겠고, 동시에 사형제와 범죄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된다면, 나도 분명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죽기를 바랄 것이며, 분노에 몸서리칠 것이며 그를 내가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것을 제도로 만드는 것과는 이미 별개의 위치에 와있다. 법이라는 것은 그런 사적복수를 가능하게 하지 않기 위해 탄생된 것이며, 법은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이 법이라면 법률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법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집합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가족을 잃은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일 것이므로.)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아주 오랜기간 사형집행인으로 살아오다가 한 사형수가 죽는 것을 보고 갑자기 충격을 받아 연금을 포기하고 사형집행인의 길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케이스. 사형인을 사형집행 침대에 데려가고 그를 침대에 묶고, 약물을 주입하고, 죽은 시체를 시체보관소에 옮기는 등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이 사형집행인을 그렇다면 그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다른 하나는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한 정밀한 묘사 중 사형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실시될 수 없다는 규정에 대해서. 예를 들어 사형수의 질병과 같은 심각한 신체적 문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면 사형이 연기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살려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다.

                                                                                                 (<샤크다>의 한 장면)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몇 가지의 단편들이다. 아피찻퐁 위타세라쿨의 두 단편 <잿가루>와 <샤크다>는 형식상의 실험이 인상적이다. <잿가루>는 흔들리는 이미지들을 연속하여 이어붙임으로써 꿈을 효과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재현한다. <샤크다>는 마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의 메시지대로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육체에 혹은 기계에 갇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가난한 자가 되거나 단지 목소리가 된다. 장률 감독의 <중경>에도 나왔던 배우이자 음악가인 궈펑 허가 그의 연인(이자 역시 음악가인) 위에 첸과 만든 <일장춘몽>은 옛 카바레의 전통을 계승하는 듯한 그림자극의 형식도 인상적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 감독의 말도 인상적이다. 나와 너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내가 보는 나, 내가 보는 너, 네가 보는 나, 네가 보는 너'라는 네 가지가 늘 존재하며, 이 네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물론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상수의 단편 <리스트>이다. <리스트>에는 다시 한 모녀가 등장한다. 딸 정유미와 어머니 윤여정. 이 조합을 아마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바로 그 딸과 그 어머니다. 배경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다. 딸과 어머니는 바로 그 펜션에 갇혀 있으며, 이유도 동일하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그대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누군가의 사업실패로 이 펜션에 갇혀 있으며 무료해 미칠 것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와 차이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의 딸이 시나리오를 썼다면, 여기서의 딸은 리스트를 쓴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 그런니까 리스트를 쓰는 것과 이야기를 쓰는 것의 차이다(또 '차이'인가,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다음 문장이 기억이 났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내가 여기서 써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패스티쉬(pastiche)이다." -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p.164).


뭐 아무튼 그러므로 리스트는 시나리오, 즉 이야기라는 것과 미묘하게 달라진다.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안느는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리스트는 제약이 따른다. '실현가능성'이라는 제약이 말이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서는 안느와 교수는 맛집에서 회를 먹지만, 이 리스트는 '맛집에 가서 먹는다'가 아니라 '맛집을 찾아본다'가 되며(즉 '맛집'이라는 것은 여기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드민턴을 친다'가 아니라 '배드민턴을 칠 사람을 찾아본다'가 된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는 이 리스트를 하나하나 처리하려고, 아니 사실은 정말 무료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딸과 어머니는 한 남자(유준상-그는 이 영화에서는 구조대원이 아니라 유명 영화감독으로 나온다)를 만나며 이 리스트에 있는 10가지가 넘는 모든 항목은 점차 현실이 된다. 물론 영화가 마무리로 가까워질수록 관객은 이 마지막을 대략 짐작한다. 실현되는 리스트, 그것은 분명 꿈일 것이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딸은 리스트를 쓴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며(<다른 나라에서>에서 앉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바로 그 테이블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깨워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리스트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꿈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루고 싶은 것과 그러나 이뤄지지 않는 것. 꿈이라는 말에는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그 꿈이라는 말은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주 꿈을 꾸고 있구나. 꿈 깨."할 때의 그 꿈 말이다. 이는 이 영화와 <다른 나라에서>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화려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세 층위를 거치며 점점 현실과 비슷해지며, 결국에는 희망에서 꿈을 거쳐 현실의 어떤 것과 비슷해졌다. 반면 리스트에서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리스트'가 점점 실현이 되어가는 꿈이 되었다가 그것은 중의적인 다른 꿈,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꿈으로 되돌아온다. 즉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나오는 것과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 것의 차이. 이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속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꿈은 꿈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서 존재하는 이 영화라는 것.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영화관에서는 누구나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러 영화관에 간다. 꿈을 꾸는 것은 언젠가 꿈에서 깰 것을 각오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의 꿈도, 혹은 누구의 리스트도 실현불가능하다고 욕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각오를 존중해주어여만 한다.

이번 CINDI의 주제말이 'CINDI is not Digital'이던가. 그러므로 그건 디지털이 아니다. 그건 꿈이다. 혹은 그건 누군가의 리스트다.



- 2012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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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I 기록들 1

Interlude | 2012. 9. 10. 16:22 | Posted by 맥거핀.

무인지대 (No Man's Zone), 후지와라 토시, 2011
동경공원 (Tokyo Koen), 아오야마 신지, 2011



영화는 거의 완전히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쿠시마의 해변을 길고 느리게 패닝하며 시작한다. 거기에 애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시설물들, 그것은 거의 복구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부러진 목재들과 콘크리트들, 여러가지 잡동사니들, 자동차들, 부러진 잔해들, 그리고...그 밑의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를 시체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좀 흥미로운 구조다. 화면은 재앙이 일어난 후 거의 텅빈 후쿠시마를 비추고 있지만, 화면의 현장음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두 가지의 다른 음성이 깔린다. 하나는 감독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어 나레이션이다. 이 영화 <무인지대>의 감독 후지와라 토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이례적으로 영화 시작전 발언을 자청해 관객에게 이 영화를 '이런이런 식으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나레이션은 매우 직접적이고, 좀 많은 편이며, 더구나 중언부언하는 경향마저 있다. 다른 하나는 이 화면을 보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보다보면 이 목소리는 감독이 찍은 이 영상을 뒤늦게 (대피소 같은 곳에서) 보고 있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발언은 "아..저기는 이게 있었는데..", "저것은 누구의 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중간에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나레이션과 맞물려 어떤 효과를 낸다. 나레이션은 말한다. 이것을 어떤 '스펙터클', '파괴의 현장'으로 보지 말 것. 그보다는 그 파괴 전에 있었던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볼 것. 즉 우리는 재난을 대부분 어떤 거대한 파괴, 가공할만한 힘, 거대한 비극의 현장으로만 받아들인다. 아마도 후쿠시마의 해변을 패닝하는 첫 장면을 대부분의 관객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참 쓰나미란 무서운 거구나, 저런 엄청난 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란 게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구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쿠시마의 무인지대의 공간들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오버랩해서 보여주던 감독은 다시 영화의 중반부, 그러니까 굳이 나누자면 1부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처음의 그 패닝 장면을 붙인다. 이것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중간에 우리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완벽한 파괴의 공간, 깡그리 사라져버린 듯한 무의 공간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저긴 뭐가 있던 자리인데, 누군가가 살던 공간인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짧은 패닝의 과정에서, 그 엄청난 잔해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게, 상상하게 된다. 저 자리는 뭐가 있었던 자리 같은데,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2부로(영화 상에서 명확하게 1, 2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넘어가 이타야 같은 후쿠시마 주변지역, 다시 말해서 소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어디에도 갈만한 곳이 없으며, 갑자기 자신의 생활터전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에 담겨 있는 질문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직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무대책한 주장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식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곳에서 만난 한 어민은 그런 주장들이 대부분 말도 안되는 것임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정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조업을 금지했으나, 그 곳에서 불과 몇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도 된다고 허가했고, 이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당연히 우리의 입장에서도)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닷물에 어떤 구획선이 그어져 있지 않음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주장을 인간의 경우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제한되었고, 근방 몇 킬로미터의 주민들에게 모두 소거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타야 같은 곳에서는 살아도 된다? 이것은 산 자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죽은 자에게 물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통제되어 75일 만에 구조와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혹시라도 운이 좋게 살아 있었을 어떤 사람들은 무려 75일 간이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아마 두 가지 정도를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후쿠시마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은 것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혀 콘트롤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의 대응은 거의 무대책에 가까웠고, 그것은 일본 정부가 유달리 무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사고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사고 이후에 이어질 일들도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이 정말 무서운 점은 그것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떤 일을 시작해버린다, 만들어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영화(필름)의 임무 중의 하나는 기록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있었던 일이라는 점을 후세의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레이션에도 나오지만, 거의 후쿠시마와 비견될 정도의 참혹한 재해들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즉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며 때로는 조작된다. 예를 들어 어쩌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실재했었다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몇 개의 희미한 기록필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록은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진다. 하나는 그 기록된 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혹은 기록의 이면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되풀이되지 않게 할 것. 그것을 어떻게든 기록함으로써.

........................................


다음으로 본 영화는 기다렸던 아오야마 신지의 <동경공원>. 사실 솔직히 말해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평범하다는 인상이 짙었지만, 사실 아오야마 신지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그의 <헬프리스>,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의 이른바 '가족 3부작'을 보고 가지게 된 것이 전부이고 그의 그 가족 3부작이 워낙 수작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흔한 일본식 청춘물의 외피를 두르고, 그 안의 과육을 보여줄듯 말듯 하다가 결국 안보여주고 끝나는 듯한 느낌인데 전체적으로는 느린 호흡으로 차분히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목에도 있는 '공원'이라는 공간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은 조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공원이란 사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거의 유일하게 출입자격을 묻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출입료를 받는 어떤 빌어먹을 공원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공간들은 사실 제각각의 출입의 자격과 지위를 규정하고 있고,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공원은 거의 유일하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며, 따라서 누구나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료한 할아버지들이 주로 드나드는 탑골공원이나, 실직자들이 공원에 가는 당연한 클리세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원이 무질서의 공간이나, 아무런 규칙도 없는 곳은 아니다. 모든 공원에는 암묵적으로 따라야할 규정들이 있으며, 그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자유롭긴 하나 어느정도 제한된 자유만을 허한다.

아마도 이러한 공원과 같은 것이 하나의 비유로서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중간에 한 남자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마치 이 공원과 같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오야마 신지가 보는 현대 사회가 지향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전작 <새드 배케이션>에 그려졌던 '마미야 월드'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공간, 최소한도의 규칙만 지키면 서로를 보호하며 터치하지 않는 공간으로서의 공원이자 사회의 모습이다. 즉 딱딱한 건물 안에만 있다가 넓은 공원에 가면 모두들 약간은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처럼, 사회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공원은 아니 사회는 그런 다양한 인물을 감싸 안아야만 한다. 영화 <동경공원>은 그런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환자이자 치과의사, 바를 운영하는 게이, 모든 것을 영화로 비유하는 영화광,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의붓남매, 심지어는 죽었는데도 이승에 머물고 있는 유령마저 포함된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해 힘들어하지만, 감독이 결국 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작은 카메라 뿐이다.

즉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들, 이들을 넓은 공원에서 맨눈으로 넓게 보면 좋겠지만,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으면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로 이들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가진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에는 애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드넓은 공원 속에서 모든 인물을 우리는 우리의 맨눈으로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부터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할 것. 작은 카메라는 먼 곳을 찍으라고 발명된 물건이 아니다.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데는 흐려지게 마련.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간다.



- 2012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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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던트, 알렉산더 페인

Interlude | 2012. 2. 20. 15:25 | Posted by 맥거핀.




잔잔한 이야기와 무난한 결말. 아마도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가까이에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자기 몫의 인생을 살고 자기 몫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별 걱정 없이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만큼의 고통과 그만큼의 미움과 그만큼의 오해와 또 그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삶은 어떠한 결정적 분기 이후에도 다시 비슷하게 반복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지속된다는 것.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의 알렉산더 페인은 이번 영화 <디센던트>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영화에서도 하나의 메타포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하와이이다. 겉으로 간략하게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맷 킹(조지 클루니)의 삶처럼 하와이 역시 그저 알려진 평화로운 휴양지일 뿐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삶이 있고, 땅을 개발하고, 리조트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마냥 평화로운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들 비슷한 무게의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산다는 것. 물론 거기에서 알렉산더 페인이 가치를 두는 것은 '디센던트'로서의 삶이다. 그것은 작게는 맷 킹의 한 가족이 지켜내야 할 가치이기도 하고, 크게는 하와이언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가장 재미있게 보이는 부분 중의 하나는 하와이 땅을 둘러싸싼 맷 킹의 선택이다. 그는 그 까닭으로 뭔가 거창한 이유를 내세우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럴까.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는 페인의 메시지로 볼 때, 아마도 이 자체가 하나의 반농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영 따듯한 인간은 못된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따듯함이 영 마음에 와서 닿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영화 속 맷 킹은 자조를 섞어서 말한다. 자신들은 아이를 비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부유한 백인들일 뿐이라고. 내가 느낀 생각도 비슷했다. 이는 그저 어느 하와이 땅부자의 가족과 가치 재발견 프로젝트라고 밖에 느껴지지가 않으니. 하이힐을 신고 뛰는 여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칙릿 영화들과 이 영화가 특별히 다른 게 뭐가 있지? 그런 영화들이 뉴욕과 패션을 양념으로 추가했다면, 이 영화는 하와이와 두 딸들을 양념으로 추가했을 뿐이다. (물론 하이힐을 신고 뛰는 것도 나름의 힘든 삶일 것이다. 그러나 정 그렇다면 그 하이힐 꼭 신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여기에 하이힐은 커녕 운동화를 신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바일 것이다.) 즉 알렉산더 페인은 이 남자 맷 킹을 동정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연민하기를 바랬을 것 같다. 갑자기 아내를 잃고, 자신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두 딸과 함께 남겨진 데다가 땅을 둘러싼 여러 복잡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더구나 뒤늦게 그 아내의 비밀까지 알게 된 한 남자에 대한 약간의 연민을 관객이 가지기를 바랬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도 분명히 나만 그런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영화 내내 나를 지배하는 정서는 이 남자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일종의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모든 칙릿 영화들이 내세우는 최종의 정서이기도 하다. 부러움과 그 부러움으로 만들어지는 대리만족.) 엄청난 사고를 치는 것처럼 등장한 두 딸의 문제는 단지 애교일 뿐이고(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화 속 두 딸의 모습은 요새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 비하면 약과일 뿐이다. 그들은 영화내내 시종일관 아버지와 잘 대화하는 좋은 딸일 뿐이다), 하와이 땅을 둘러싼 맷 킹의 고민은 현금을 손에 쥐는 부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땅부자가 될 것이냐의 고민일 뿐이다. 물론 그리고 그 최종적인 부러움의 근원은 칙릿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근원이 '뉴욕'과 '명품'이듯이, 나에게는 '하와이'와 '살랑살랑대는 음악'이다.

물론 안다. 이것은 단지 삐딱함의 정서, 뭐 간단하게 말해서 일종의 열폭이라는 것. 어쩌면 내 무의식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는 '있는 자들'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전작들에서도 어느정도는 느꼈지만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내 취향이 아닌 것으로만 정리해두자. 아무튼 이 치유계 영화를 보며, 무의식을 억지로 내리누르려고 하는 나를 보게 되니 도리어 더 피곤해진다. 예를 들어 아주 비싼 식당에서 '그간 너무 비싸서 우리 식당을 이용해보지 못했던 당신을 위해 내놓았다'고 말하는 특별 세일 메뉴를 먹으러 갔더니, 맛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계속 먹으면서도 그 맛보다는 주머니속 얇은 지갑만 생각나는 느낌이랄까. 무난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 만들어낸 무난하고 좋은 이야기라고 말하기에는 나의 무의식과 욕망이 계속 걸린다. 아무래도 더 얘기하다간 안 좋은 얘기가 계속 나올 것 같아서 이쯤에서 마무리.


덧.

각종 수상경력과 '올해 오스카는 따놓은 당상이다'와 같은 평들로 도배된 이 영화의 포스터가 이 영화에 은연중 내재된 정체성을 묘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서점에서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의 뒷 표지가 꼭 이런 모양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뭐 아닌게 아니라 아카데미가 꽤나 좋아할 영화인 것도 같다. 조지 클루니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익숙한 그 연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 



- 2012년 2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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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기대감

Interlude | 2012. 1. 1. 15:15 | Posted by 맥거핀.

어쨌든, 2012년이 왔다. 2012년은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신종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좀비로 변하여, 최후의 인간 단 하나만이 살아남는 해로 그려졌었고, 동시에 각종 연이은 종말들로 지구가 남아나지 않을 것으로 기록된, 그래서 롤란드 에머리히가 발빠르게 <2012>라는 타이틀로 만들어낸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혹여 운좋게 재앙들을 피하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 2년 후에는 사도들은 지구를 점령하려 들 것이고(<신세기 에반게리온>), 그 다음 4년 후에는 인간들과 기계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터미네이터-미래 전쟁의 시작>), 다시 그 1년 후에는 데커드 형사가 복제인간들을 잡으러 다닐 것이다(<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다시 그 2년 후에는...아니 이제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집어치우자.


어쨌든, 2012년이 왔고,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볼 수도 있는 때가 왔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마도 가장 좋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은 어쩌면 가장 슬프기도 한 말일 것이다. 지나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뒤늦게 돌아보는 그 '가장 좋았던 날들', 그것이 가장 슬픈 이유는 이제 앞으로 그런 날들은, 그것과 상당히 비슷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과 동일한 어떤 날들은 이제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그 좋았던 시간들 속에서, 그것이 가장 좋았던 날들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결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가장 좋았던 날들은 대학 시절일 텐데,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던 때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도 그 때의 우리들은 다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바보 같이 '나이 서른에 우린...'으로 시작되는 노래 같은 것을 함께 불렀겠지. 다시 돌아가라면, 그런 바보 같은 노래로 시간을 때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았던 시간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이 서른의 불안한 미래를 미리 추억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나빴던 날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은 걸까. 과거의 언젠가가 '가장 나빴던 날들'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가장 나쁜 쪽은 아닐테니까. 그러나 또 그것도 그렇게 쉽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 좋은 것과는 달리, 나쁜 것은 언제나 지금이 가장 나쁜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러니...아니 더 우울해지기 전에 이 이야기도 그만 집어치우자.

그러니 2012년을 시작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2011년의 베스트 영화 같은 것을 돌이켜보는 것 같은 것은 그만두자.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가장 좋았던 처음의 그 감정은 아마 그 영화를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보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2011년에 보아야 했으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여전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늘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고, 먹을 수 없었던 포도는 너무나도 달콤해 보이는 법이어서, 보지 못했으나 너무나도 괜찮아 보이는 영화들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 그 중에 10편을 골라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골라보는 작년 극장 개봉작 중 보지 못했으나 앞으로 보고 싶은, 아마도 보아야 할 영화 10편('극장 개봉작'으로 한정하는 것은 극장에 개봉하지 못하고 영화제 상영이나 반짝상영으로 그치는 영화들까지 모두 포함시키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또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는지...우리는 비열하게도 그것을 '시장논리'라 부른다). 언젠가 보기 위해서 기록을 해둔다.


1.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편의상 번호는 붙였으나, 순서는 없음)


2. 두만강, 장률


3.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4.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5. 짐승의 끝, 조성희


6. 세상의 모든 계절, 마이크 리


7. 고백, 나카시마 테츠야


8.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



9. 종로의 기적, 이혁상


10. 웨이 백, 피터 위어

 


덧.

막상 적어놓고 나니까, 이 영화들이 딱 특정 시기가 겹치는 것이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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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아브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Interlude | 2011. 12. 13. 17:12 | Posted by 맥거핀.



<르 아브르>에 대한 짧은 평.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불가능은 가능해지고, 기적은 (말그대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그 내용만 동화와 비슷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형식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동화 혹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와 비슷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는데,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뭔가 코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은 과장된 효과음으로만 제시되며, 그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크게 얻어맞아도 우리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동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우리는 결국 톰의 모든 악행이 제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그리고 결국 톰이 제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뭔가 약간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동화가 결국 아주 기괴한 이야기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아주 힘든 이야기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유럽으로의 (아마도 불법적인) 밀항(인간 거래),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 소년의 탈출. 많은 이들이 결코 상상하지 않는, 아주 먼, 뉴스에서나 나올, 아니, 뉴스에서도 잘 나오지 않을 그런 이야기. 동화적인 분위기와 이 힘든 서사가 결합하였을 때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힘든 서사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을 때마다 쉬운 선택을 한다. 이 아주 힘든 서사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이를 때마다 쉬운 동화적 데우스마키나가 출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컨테이너에서 탈출할 때의 동화적인 시퀀스들, 감옥에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때 동화적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혹은 소년의 탈출 비용으로 3000유로가 필요했을 때 남편과 아내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동화적 화해.

글쎄. 이것이 어떤 영화적 솔직함이라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늘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분리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늘 동화라는 것이 그 표면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 외에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여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의 소박한 진심이 서사적인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커다란 벽이 그저 간단한 동화적 처치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조금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찾아오는 몇 개의 작은 (거짓과 같은) 기적들 속에서 마침내 찾아온 진짜 기적, 그 기적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었겠지.



덧.

같은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의 <약속>은 소년과 아프리카 여인을 지하철 속의 출구없는 통로에 가둬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소음은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나,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기 불편한 세계가 <르 아브르>의 세계라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보이나, 기꺼이 들여다봐야할, 그리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약속>의 세계는 아닐까. 




- 2011년 12월,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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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Interlude | 2011. 9. 9. 23:5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주제로 몇 편의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 중에 두 편,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이강현 감독의 <보라>를 보았다.

꿈의 공장 Dream Factory, 김성균 감독

멍청한 질문과 당연한 대답. 왜 노동자(굳이 무식하게 구분하자면 '공장'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좌파적 성향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가. 어떤 우연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노동자가 되는 것인가, 혹시 노동자들 사이에 소위 불순분자들이 자꾸 끼어들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노동자들이란 유난히 욕심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아직까지도 일부 전근대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연대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방편이다. 여러 방법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나마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는 것이다.

2007년 3월,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콜텍사의 인천공장 근무자 55명이 집단 정리해고됐다. 다음달인 4월에는 대전공장이 '무기한 휴업'이란 성의없는 종이쪽지를 내 건채 폐쇄되었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그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생존(복직)을 건 사투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노동자들만 그려내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방식의 연대가 있다. 그것은 여러 뮤지션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흐른, 브로콜리너마저 등 수많은 뮤지션들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여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콘서트'를 했고, 이 연대는 바다건너 수많은 외국의 뮤지션들(예를 들어 '오디오슬레이브'의 톰 모렐로, 오조매틀리 등)에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사실 연대가 실제적으로 가능하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다운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한편으로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들어왔다고, 당신이 이해한 것은 아니다'라는 영화의 자막처럼(아마도 노래가사나 제목인 듯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알아본 것은 모리씨의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뿐.) 이 영화는 연대의 여러 어려움에 대해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영화 속 뮤지션들의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콜트/콜텍의 기타가 다른 기타보다 상대적으로 싼데, 내가 만약 돈이 있다면 모를까, 돈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그 기타를 사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가 기타 이외에도 이미 수많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부당하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타만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혹은, 설혹 어떤 물건이 예를 들어 아동착취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라도 사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테니까...같은 질문들.

동시에 이런 연대와 관련된 질문들 외에도 영화는 여러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외국인은 말한다. 당신(콜트/콜텍 노동자들)의 CEO가 그렇게 부당한 인물이라면, 당신들이 왜 그렇게 복직을 주장하는지? 차라리, 당신들이 나가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기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질문은 현실의 벽을 맞고 튀어나와, 혹은 악보 속의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노동자들을 감싼다. 이 많은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무슨 돈으로 투자를 하고 공장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꿈을 꾼다.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기타를 만들어내는 꿈을, 그리고 그런 기타가 여러 뮤지션들의 손에 의해서 훌륭하게 연주되는 꿈을.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이제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외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편리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에 불과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의 가증스런 의미와 '연대'란 왜 필요하며, 그 앞에 놓인 장벽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노동자들의 애타고 필사적인 호소로, 그들을 도와줄 것처럼 보였던 팬더나 깁슨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결국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다(물론 이들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콜트/콜텍의 그런 부분을 예전부터 충분히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콜트/콜텍사의 복직 문제는 여전히 우리 법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의 공장을 향한 애타는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진다.


보라 The Color of Pain, 이강현 감독

엇, 이게 뭘까. 상영시간 텀이 짧아 저녁 대용으로 구석에 앉아서 몰래 먹던 참치김밥이 목에 걸린다. 이강현 감독의 <보라>는 기이한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저 족보 없는 구도는 뭘까. 산업체에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와 업체 직원의 대화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어떤 직원의 등 뒤의 사무실 구석에서 이들을 화면 한 귀퉁이로 몰아넣고 찍고 있다. 감독이 너무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찍는 걸까, 혹은 이건 일종의 몰카인걸까.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구도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의 내용상 이 영화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모습과 노동자들과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들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영화 가운데에서 커다랗게 보여지는 법은 좀처럼 없다. 카메라는 구석에 박혀 있거나 천장 가까이에 가있고, 인물들은 화면의 구석에 밀려나 있다. 때로는 인물은 말하지 않는데, 어디선가 말소리들이 들리고, 인물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소리는 공장 소음에 묻혀 있다. 인물은 소외되어 있고, 다른 물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요즘에 말하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한 뭐 그런 단어, 그러니까 낯부끄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예를 들어 '노동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 같은 것일까.

먼저 팜플렛에 나온 영화의 소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작업환경 점검, 건강 상담, 직업병 상담)를 현장에서 받도록 되어있다. 이 영화는 위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그러므로 의사와 보건관리기관의 대응은 사후적이고, 그 대응의 최대치는 단지 조사하여 표본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동시에 부조리해보이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비디오를 면밀히 체크하며 할머니가 고추밭에서 일분에 몇 번이나 쭈그려 앉는지를 세는 의사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이유는 그 의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행동이 근골격계질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밝혀낼 수 있어도, 그 할머니의 그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동시에 그런 조사가 그렇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가 왜 아픈지는 딱 하루만 일해보면 알아요). 또 한편으로 보건관리기관의 특정 약품에 대한 역학조사발표 중에 이루어지는 마이크 조작미숙으로 큰 소음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단순히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발표내용 때문이다. 이미 10명 이상이 넘는 노동자가 한 공장에서 죽어나갔음을 밝히는 그 사후성이.

또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사들은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이 그러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유리섬유를 다루는 공장의 모습과 어떤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발언의 교차편집. 예전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했다가 이제는 몸이 망가져 거의 집안에 갖혀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증언. 그리고 이제는 석면이 거의 유리섬유로 대체되었다는 공장의 설명과 유리섬유는 현재 완전히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자막. 그리고 교차되어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증언. 아..글쎄, 그 공장에서 2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갑자기 영향을 미칠 줄 알았나. 이제 대체된 유리섬유는 노동자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가 되서야 나타날 것인가.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이후이다. 영화는 이렇게 꽤나 장시간 노동현장의 보건관리를 다룬 후 갑자기 어느 인터넷 서버관리자의 밤샘근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활동(이것은 그 전의 노동조합에 계신 분이 공들여 회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겹쳐진다)과 두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의 인터뷰를 보여준 후 갑자기 망가진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는 약간 사짜 풍의 남자의 작업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조화일까. 앞의 노동현장의 모습과 뒤의 취미활동의 대비를 생각해보면, 이 중간의 인터넷 서버관리자는 일종의 브릿지이다. 그의 노동의 형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취미와 노동의 중간에 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는 감독에게 자신이 취미로 만든 홈페이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 취미의 영역에서 영화는 달라진다. 인물들은 가운데에 위치하기 시작하고,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며, 심지어는 BGM이 깔린다. 취미로 사진을 찍고, 야구를 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깔려지는 그 아름다운 BGM을 들을 때의 안도감(이는 앞의 공장의 소음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취미라는 것과 대비되는 노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시 일깨운다. 그것은 노동은 생존이라는 것. 취미로서의 행동들과 앞의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결국 생존을 걸고 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이라는 점.

그렇게 보면, 인터넷 서버 관리나 하드디스크의 복구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만은 않는다. 인터넷 서버는 결국 수많은 하드디스크가 모아져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수많은 기억의 집적인 것.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러 온 남자에게 묻는 복구의 이유. 거기에는 10년간 모아온 수많은 음악 파일이 들어있고, 사진들도 들어 있고...취미로서의 기억들의 집적. 그러나 이와 대비되어 기억되는 영화 전반부의 어떤 풍경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에게 의사가 묻는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세요. 몇 시간이나마나 하루 왠종일하지 뭐. 그럼 매일 그렇게 왠종일 하세요. 아니 매일 그렇게야 못하지. 왠종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언제부터 농사를 지으셨어요. 글쎄 얼마나 했나. 기억해 보세요. 시집올 때부터 했지 뭐. (하하 웃으며) 글쎄 시집을 언제 오셨냐구요. 18살 때 왔지....노동의 시간은 엄청나게 집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에 없는 것. 노동의 시간이란 축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고통의 축적인 것, 어떤 의미에서는 망가져버린 하드디스크와 같은 것.(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간의 연결 방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감을 아주 극도로 짧은 암전으로 처리한다. 어쩌면 노동이란 이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없는, 지나고나서 보면 극도로 짧은 암전같은 것, 남은 것은 망가진 몸뿐인 것.)

노동이 결국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이강현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보라(The Color of Pain)'인 이유가 보라색이 멍이 든 색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 영화의 촬영 대상으로서의 공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인터뷰(그러고보면 이 영화에서 한 노동자가 "사고나는 장면은 언제 찍을거냐"며 그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 아닌가 라고 물었던 컷이 있다. 또한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촬영한 화면을 보는 장면도 있는데, 지아장커의 <24시티>나 <무용>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를 했다. 그 인터뷰를 곱씹어보면 이 영화가 더욱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나마 사람들이 찍을만하다고 허락해준 공장들과 인터뷰들이 이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에는 어떤 장면들이 담길까. 전작 <파산의 기술>에 이어, 이강현 감독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2011년 9월, 서울 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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