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망한)능력자들, 그랜트 헤스로브

Ending Credit | 2011.07.11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칭 초능력 제다이인 빌 장고(제프 브리지스)와 린 캐서디(조지 클루니), 그리고 이들을 취재하는 기자인 밥 월튼(이완 맥그리거)이 낭창낭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벌이는 일련의 바보짓(?)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동들을 보니, 영화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들과 별개로 슬며시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나, 살육, 학살, 고문, 테러 등의 단어들의 반대편에 이성이라는 단어를 놓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에 전쟁이나 학살이 존재하고 있다는 흔한 믿음이다. 그 흔한 믿음의 범주 안에서 전쟁이나 학살은 광기, 반이성과 같은 단어들과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전쟁영화들을 보면, 그러한 믿음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대체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희번덕이며,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욕구로 적에게 그리고 때로는 아군에게도 총알을 날린다. 그러나 어쩌면 이 믿음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혹은 누군가가 주입한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하나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성으로 가득찬 문명의 미로 끝의 숨겨진 방에 어쩌면 전쟁이라는 괴물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나 학살과 고문 같은 것은 사실 우리의 차가운 이성으로 깔끔하게 수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린이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고, 빌이 심리고문을 당하고 있던 이라크인들을 풀어주고, 병사들이 마약에 취해 동네에서 자전거 끌고 마실가는 것처럼 신나게 탱크를 몰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갈 때 그런 생각들이 든다. 인간의 이성이란 때로는 얼마나 차갑고, 무자비한 것인가. 그 이성이 무장해제될 때 작동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뿐인가.

물론 이러한 '흔한 믿음에 대한 반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큰 반문화, 반문명 운동이 일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한 반문명의 기원은 여러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전쟁과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베트남전 등으로부터 촉발된 문명에 대한 회의(懷疑)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단적으로 말해서, 한나 아렌트 등이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의 건설과 그것의 작동에는 아주 차가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 그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던 배경에는 단지 히틀러의 광기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한 많은 이성적인 두뇌들의 의사와 행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아니 그간의 믿음에 반하게도, 악은 광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악은 도리어 차갑고 매끈한 이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반작용으로 이성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행동을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바보같은 옷을 입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LSD에 취해 바보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그에 더 나아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우거진 수풀 속에서 아주 이성적인 방법으로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영화 <초(민망한)능력자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빌 장고의 각성은 베트남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에서 신병이 조준사격을 하는 비율은 생각 이상으로 낮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에 그들은 거의 일부러 적을 맞추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으로 총알을 날려 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전쟁터에서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그들은 살인기계가 된다. 베트남전에서 환상을 본 빌 장고는 그 이후 히피 문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신지구군, 혹은 제다이 기사들을 양성할 계획을 꿈꾼다. 영화 속에 반복하여 외쳐지는 신지구군의 강령은 히피들의 강령을 닮았다. 생명의 존중, 연대, 감성의 공유를 외치는 그것은 반이성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동시에 초(超)이성적이다. 따라서 그 신지구군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초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단지 농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빌과 린 등의 어설픈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바보스럽지만,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밑바탕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질문, 또는 조롱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의 하나는 린과 마흐무드(무하마드?)가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린이 자신이 차로 칠 뻔했던 것과 미국이 이라크에 벌인 행동들에 대해 사과하자, 마흐무드는 린이 이라크인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여기에 린의 대답이 압권이다. 뭐 미국에도 납치범은 있으니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학살과 고문에는 몇 십년 전 베트남에서 그런 것처럼 가장 깔끔한 이성과 필요들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9-11 테러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를 내세웠지만, 그 전쟁의 내부에는 이성에 의한, 석유 자원에 대한 계산적인 필요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만, 초능력자이자 자칭 제다이 기사인, (우리가 볼 때에 바보같은) 린은 그것을 사과한다. 그 사과는 그 코믹스러움과 별개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린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납득한다. 그것은 어쩌면 암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래리(케빈 스페이시)에게 당한 이른바 '죽음의 터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은 염소에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한 업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린은 마지막에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나의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린의 생각에는 진정한 무도인의 길, 아니 진정한 초능력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수입사의 제목 테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원제는 그 원제에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아마도 그 함의 중에 하나는 '염소'라는 것이 가지는 이 영화(소설)에서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러나 <초(민망한)능력자들>이라는 이 제목은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 제목을 지은 분이시야말로 일단 본인부터 좀 민망해하셔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영화의 관객들과 함께) 그들의 초능력을 계속 반신반의하던 밥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초능력을 긍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갇혀 있던 심리고문당하는 이라크인을 풀어주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염소들을 풀어주는 그 행동이야말로, 바로 파괴적인 이성에 반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들이 결국 자신의 초능력을 확인하는 이 결말은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유쾌하다.


- 2011년 7월, CGV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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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국 2011.08.07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이영화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거 보면, 내내 자긴 잤나봐.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