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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평단'에 해당되는 글 44

  1. 2016.06.14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
  2. 2016.05.27 각자의 구멍, 홀, 홀, 홀, 홀
  3. 2016.05.10 당신이 '당신'이 되어라
  4. 2016.05.05 5센티미터 두께의 틈
  5. 2016.04.11 고쳐쓰는 '나'
  6. 2016.03.30 욕망의 화신
  7. 2016.03.09 긴 꿈 2
  8. 2015.06.30 기억의 힘 3
  9. 2015.06.24 그는 무엇을 보는가 2
  10. 2015.05.26 미래를 위한 시도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

The Book | 2016. 6. 14. 17:36 | Posted by 맥거핀.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 10점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렸다. 단지 이 소설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시카리오>를 보면 언뜻 영화 본편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본 줄거리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족이 영화의 본편과 상관이 있음은 물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아마도 예전의 리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격 소리에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약으로 인한) 만연한 범죄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어쩌면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는 거의 악마의 도시처럼 묘사된다. 거리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들리며, 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경찰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며, 그 모든 것에 무감해진 것일까. 그런데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표정 이면에 깔린 공포, 그 공포에 담긴 살고싶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은 척 하는 법,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고난의 10년'의 시간에서.

 

특별한 시대였어요. 그렇잖아요? 폭탄이 누구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면 다들 걱정을 하고. 자신이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디에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공중전화가 없으면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집을 알아내서 그 집 문을 두드려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에 매달리고,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매달리면서 살아야 했죠. 우리는 각자 집안에서 지냈죠. 기억해요? 공공장소는 피했어요. 친구의 집, 친구의 친구의 집,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집, 어떤 집이든 공공장소보다는 선호했죠.

- p.313~314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도망친 하마, 그러니까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만든, 이제는 쇠락한 오래된 동물원에서 도망쳤다가 죽은 하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한다. 그가 그것에서 떠올린, 그에게 고통을 준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이 서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주인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오래 전 일어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이제 그것을 되돌아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제 그 사건이 주는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에서 벗어난 이후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자신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로 읽으면 아름답고 좋으련만, 단지 그렇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이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내가 떠난 텅 비어 있는 집만 남아있다. 그것에서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안한 마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카르도 라베르데나 그의 부인 엘레나 프리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혹은 그들이 무엇을 극복했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거나, 이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 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런 일들이 발생해서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편한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결과들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손해를 벌충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연계 고리가 우리를 현재 상태의 우리로 변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면 왠지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 p.290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이 소설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이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장면인데, - 사실 이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장면도 물론 영화로 만든다면 빛을 발할 장면이리라. - 엘레나 프리츠가 장마를 맞은 집에서 갑자기 찾아온 마이크 바비에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가득한 불안감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평화를 가장하는 엘레나와 마이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총성. 이 장면은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정확히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삶은 그렇게 가득한 불안감 위에 띄워진 가장된 행복과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에서 불안감을 감지하지만, 그것에서 사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리카르도나 마이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 연계 고리 안에서 결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에게 놓여진 그 녹음이 상징하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엘레나가 그 소음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의 한 예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했던 행위가 보여주지 않을까. 즉 그것은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비록 전직조종사라도) 그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서 들으려 애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중 화자 '나'(얌마라)도 마찬가지이다. 얌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휘말렸고, 그것을 단지 불운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원했지만), 그는 사건에 숨겨진 부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것이 아마 이 소설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삶의 많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단지 그 통제력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 소설의 이야기는 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얌마라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리카르도 라베르데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이며, 마야가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기원에 있는 것, 즉 리카르도의 할아버지 훌리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부터이다.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연계 고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 그 고리의 끝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연계 고리의 반대편 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연계 고리의 다른 반대편 끝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연계 고리들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삶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공포와 그 공포를 이겨내려는 미약한 몸짓이 지닌 숭고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참 좋은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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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구멍, 홀, 홀, 홀, 홀

The Book | 2016. 5. 27. 11:53 | Posted by 맥거핀.
- 10점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홀. '짝이 없이 혼자뿐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오기는 홀로 살아남았다. 아내와 함께 떠나던 여행길. "노면은 부드러웠고 제동 거리는 짧았고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속절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p.31)" 옆자리에 탔던 아내는 죽고, 오기는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잃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 뿐이다. 오기의 엄마는 오기가 어린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선적이었던 데다가, 오기가 제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오기의 아버지 역시 오기의 결혼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아내는 죽었고, 그의 곁에서 불구의 몸이 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장모 뿐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홀'로 남았다는 것은 어떤 눈에 보이는 관계의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오기는 고립되어 있다. 편혜영은 이 소설을 거의 오기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오기가 사고 후 말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설정을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가중시키는데, 오기는 이 소설을 통해 장모를 비롯한 간병인, 물리치료사, 친구 등등 어느 누구와도 거의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목소리를 잃었다'는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소설의 중후반부 오기가 필담으로라도 소통이 가능해진 순간에서도 여전히 어떠한 대화나 소통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어긋나 있고, 그 중 어느 누구도 오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게 단지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홀. hole. 구멍.

그들은 오래전부터 대화하지 못했다. 오기와 아내. 교수로서 학교 일로 바빴던 오기는 아내가 가진 공허감이나 부재감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오기는 학교와 자신의 친구들과의 관계, 그리고 허위에 갇힌 자신만의 세계에, 아내는 글을 쓰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원을 가꾸는 또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구멍에 들어가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을 대화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목적지가 30킬로미터 정도 남았을 무렵 아내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쓰고 있던 것을 최근에 완성했다고 했다. 아내가 이런 화제로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 축하해. 뭘 썼는데?"

운전에 주의하며 오기가 물었다. 도로에는 덩치 큰 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좀 특별한 얘기야.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거든."

"지난번에 쓰고 있다던 그 고발문?"

오기가 아내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도 할 수 있어."

아내가 갑자기 웃었다. 오기는 운전에 집중했다. 아내의 말에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오기를 화나게 하는 게 아내의 목적이라면 오기는 오로지 여행지에 닿고 싶었다.

- p.181~182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모와의 관계는 어떤가. 오기의 기억 속에서 장모는 속을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사람이다. 편혜영은 여기에 흥미로운 설정을 더하는데, 장모가 사실은 일본인(혼혈)이라는 부분이다. 오기가 처음 장모의 집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가 이를 잘 말해주는데, 오기는 집안에 유골함을 두는 일본인의 습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자기로 착각한다. 오기에게 장모는 결코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어두침침한 구멍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 장모는 아내가 죽은 후 엉망이 된 정원에 다시 구멍을 판다. 아내처럼. 아니, 아내가 팠던 구멍들보다 더 깊게.

 

홀+er. 구멍을 파는 이들. holer 혹은 horror. 호러.

(아니면 '홀'이라고 발음하며 거울을 한 번 쳐다보라. 영화 <스크림>에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지 않은가?)

장모는 다시 구멍을 파고 있다. 왜 장모는 구멍을 파는가. 나무를 심기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 묻는다면 무엇을 혹은 누구를 묻는다는 말인가. 편혜영의 <홀>은 후반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점점 호러 무비가 된다. 오기는 집안에 갇혔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탈출은 쉽지 않다. 도대체 장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내, 그러니까 자신의 딸이 죽은 것에 오기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오기의 피를 말려 죽이려는 것일까. (이 문장은 전적으로 <곡성>의 영향이다.) 혹은 장모가 오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은 나이가 들어 그 모든 것이 벅차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장모가 아내가 쓴 '고발문'을 읽었기 때문인걸까. 오기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고립된 채로 갇혀 있다. 좁게는 불구라는 육체의 감옥에, 넓게는 오기가 싫어하던 덩굴로 둘러쳐진 집에. 방에서 대문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내가 지배했던, 이제 장모가 지배하는 넓은 정원을 거쳐야 하며, 이제 게다가 그 정원에는 곳곳에 장모가 파놓은 넓은 구멍들이 있다.

 

홀. whole. 전체의, 모든, 온전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오기의 오해 혹은 망상이 아닐까. 과연 장모는 그를 고의로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다스케테구다사이. 장모가 짧게 중얼거렸던 그 말. 살려주세요 혹은 도와주세요. 어쩌면 장모도 너무나 많은 삶의 짐 속에서 이제 오기라는 짐까지 떠맡고,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런 질문. 과연 소설을 읽는 우리는 오기의 이 모든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더해지는 조금 무서운 질문. 과연 아내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일까. 이 소설은 어쩌면 오기의 이름 그대로, 誤記 즉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편혜영의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을 읽는 우리는 철저히 오기의 시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홀(whole), 그러니까 전체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물론 아마도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과 유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전체상을 들여다보려고 아무리 애쓴다한들, 결코 그것을 완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오기가 전공하는 지도와 닮았다. 지도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어떤 지도도 결국 세계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지도는 오로지 세계의 불완전한 유사물일 뿐이었다. 

 

지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중략) 정확히 알 수 없고 하나로 분명하게 해석될 수 없으며 온갖 정치적 의도와 편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세계라면 지금 이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지도는 실패를 통해 나아졌다. 그 점에서는 삶보다 훨씬 나았다. 삶은 실패가 쌓일 뿐, 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 p.75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홀,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가까운 누군가라도 해독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어나갈 수 있는 지도. 그러나 그 지도는 어떤 지도라도 결코 완전한 전체상을 그려내지 못한다. 모든 지도는 왜곡된 지도이다. 각자의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왜곡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어떤 삶의 전체상에 이르지 못한다.

 

적어도 편혜영이 보는 세계는 그런 것이 더욱 심화된 세계인 것 같다. <홀>의 오기와 아내는 편혜영에게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을 안겼던 그녀의 단편 <몬순>에 등장했던 부부의 (조금 더 절망에 가까워진) 다른 버전인 것 같다. <몬순>에서 편혜영은 관계의 단절, 소통 불가능한 삶에 빠져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렸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떤 여지를 남겼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편이 아내가 있는 아파트에 들어갈까 망설이는 동안 아파트의 불은 켜지고, 다시 불이 꺼지고 켜졌다. 그러나 <홀>의 오기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는 이미 죽었고, 오기는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있다. 그리고 오기는 그제서야 운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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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당신'이 되어라

The Book | 2016. 5. 10. 02:21 | Posted by 맥거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 6점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문학수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소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이하 <떠오르는...>)은 확실히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 소설들에는 어떤 '장치'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이야기 내용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소설 내에 긴장감은 그 외에 다른 것에서 더 강하게 배어나온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호명되는 '당신'이라는 존재인데,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지난 삶을 늘어놓는 화자 파키스탄인 '찬게즈'가 아니라, 이 반대편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자 미국인 '당신'이다.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소설은 점점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 긴장감 쪽에 서서히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이 듣는 '당신' 미국인은 누구이며, 여기에 왜 왔으며, 왜 '찬게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이 소설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야 책을 읽는 '우리들'은 불현듯 깨닫게 된다. 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찬게즈'가 아니라, 이 소설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미국인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신 하미드는 이 긴장감을 주는 방식을 이번 소설에서도 써먹고 싶었던 것 같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그것이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여 그와 화자 사이에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비틀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일종의 자기계발서 같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파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한 인물의 일생이지만, 그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동력을 그 이야기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자기계발서라는 외부의 장치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소설은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형식적으로는 퀴즈쇼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자말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사실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말의 퀴즈쇼가 아니라, 그 퀴즈쇼를 통해 자말이라는 인물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떠오르는...>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계발서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한 남자의 삶의 역정이다. 사실 그것을 소설에서는 간단하게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의 '당신'은 결코 부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더럽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제목에 원래 쓰인 단어는 filthy인데, 이것을 '더럽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은 다른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럽다'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을 '대박 부자'라고 만약에 번역했다면,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어떻게 보면 이것이 도리어 풍자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사견으로는 여기에서 '더럽게'라는 것은 '쟤 드럽게(?) 돈 많어." 할 때의 '더럽게'에 조금은 더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주인공 '당신'은 결코 그 '드럽게 돈 많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각 장에 붙은 소제목들에서도 그런 면이 있는데, 소설을 처음 펼쳐들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소제목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정말 싸구려 자기계발서에 붙을 법한 그 소제목들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제목들은 그렇게 붙어 있지만, 각 소제목들에서 그 주인공 '당신'은 그 소제목들을 결코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장에서 주인공은 사실 (짝)사랑에 빠지며,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라는 장에 등장하는 것은 그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며,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장에서는 부채로 인해 거의 끝장이 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도 어느 정도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쓴 리뷰에서 그 영화에서 퀴즈쇼라는 장치를 빼면 사실 주인공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는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역시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외피를 벗겨놓고 보면 거의 쌍팔년도 스토리에 가깝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단지 자본주의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파키스탄은 과거의 우리, 그러니까 쌍팔년도 혹은 그 이전의 우리가 겪었던 발전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로 보자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다른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흔히 '쌍팔년도'라고 할 때에는 그런 뉘앙스가 거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이 책의 이야기가 어딘지모르게 익숙하다. 실제로 그런 세태를 겪어왔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 (경험으로, 혹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익숙해져 있으며,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사실은 실패 스토리)는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표현 말이다. 왜 작가는 굳이 여기에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자리에 왜 소설을 읽는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도 당신을 계속 호명하는 소설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소설에서의 '당신'은 이 소설의 '당신'과는 다르다. 그 소설의 시작은 '당신'이 미국인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에 이 당신이 누구인지 혼동하지 않도록 장치의 특성을 설명해주면서 장치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 장치를 단지 장치로서 끝내지 않고 멋지게 역이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당신'은 자기계발서의 당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이 자기계발서의 '당신'은 바로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다. 다시 말해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의 '당신'은 사실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군가, 어떤 이미지가 규정되어 있는(어떤 '전체상으로의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테크닉에 더 가까웠다면, 이 <떠오르는...>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독자는 그 '당신'의 자리에 이미지로 규정된 누군가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누군가, 그러니까 바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냉소적이면서도, 결코 냉소적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내가 그런 비슷한 발전 단계를 거쳐온, 아니 사실은 그런 발전 단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헬조선에 살고 있는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경우를 상정해보자. 예를 들어 사실 이 소설이 주 타겟으로 삼았을 미국이나 유럽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재미있는 풍자 쯤으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자는 사실 그 풍자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풍자의 현실이 현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 풍자에 사실 온전하게 웃을 수 있을까. 웃을 수 있다해도 그것은 웃프다. 

 

아니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모신 하미드가 이 소설을 단지 서구의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썼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와 동시에 모신 하미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중간자로서 미국인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내내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계속 듣는 '당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청자 '당신'은 없다. 대신에 이 소설은 당신을 지우고, 이야기하는 '나'의 위치에 당신이 서볼 것을 권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신 하미드는 이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때? 우스꽝스럽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바로 이 위치에 선다면 당신이라고 크게 다를 수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삶이고, 그냥 우리는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거야.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부끄럽지 않아, 당신이 비웃거나 무시할 권리는 더 없고 말이야. 뭐 그런 거라고 할까.

 

다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모신 하미드에게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그렇게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야기가 미국에서 태어난 후, 파키스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계속 이 화자와 작가를 겹쳐놓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남자는 모신 하미드와는 조금은 더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누군가는 모신 하미드가 만들어낸 누군가는 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모신 하미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신 하미드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 자꾸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당신'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자신은 그렇게 된 적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되어보라고 권하는 이것은 온당한가?

 

아..자기계발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라고요? 뭐 그렇다면 할 말은 더 없지요. 단지 자기계발서를 덮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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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센티미터 두께의 틈

The Book | 2016. 5. 5. 01:18 | Posted by 맥거핀.
지극히 내성적인 - 8점
최정화 지음/창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모두 불안한 인물들이다, 라고 첫 문장을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이 불안하지 않은 인물들이 있던가. '불안'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마 '안정' 또는 '균형'과 같은 말일 텐데,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안정적인 말과 행동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여태껏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인물들을 그려왔다.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위태위태하게 어디론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은 반대로 최정화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흔하디흔한 인물을 다시 반복하며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 어떤 인물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안정을 누구보다도 지향한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불안의 대표적인 증세인 강박증을 가진 인물들이 타인이 보기에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들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어떠한 강박행동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가 등장하는데, 단편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 등장하는 그녀는 이러한 증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강박은 계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데, 이 강박이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자기 몸에서 부족한 성분을 찾아내고', 그녀의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목 디스크, 즉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니면 '구두'나 '팜비치'에 등장하는 인물들. 두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들은 극도의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대체하고 있는, 혹은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p.26 '구두')", "그런데 아내는 파라솔 아래서 웬 남자와 마치 그의 마누라라도 되어 있는 듯이 마주 앉아 있었다.(p.49 '팜비치')". 자신이 위치하고 있던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존재. 그것이 내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면, 이 애써 겨우 균형을 잡아 놓은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종의 불안감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렇게 최정화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작가의 이름이 正和라서 그럴지도..라는 쓸데없는 드립을.) 위에 든 소설들 외에도 '틀니'의 아내는 다시 남편이 틀니를 끼고, 일상의 균형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홍로'의 그는 아내가 아닌 아내와 이상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여자(미옥)는 작가와의 어떤 균형잡힌 관계(작가가 소설을 보여주고, 그녀가 거기에 평을 하는)를 유지하고 싶어하며, '타투'의 아버지는 지나가 가진 비밀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대머리'의 나 역시도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랬던 그들이 어떤 불균형을 맞닥뜨리고 불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최정화의 소설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그들이 그렇게도 유지하려고 했던,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 했던 세계. 그 세계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강박으로 유지되는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세계를 빼고라도 그들이 유지하려 애썼던 그 세계들은 사실 이미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리고 있다. '팜비치'의 아내와 남편은 각자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의 일면만을 각자 보고 있으며, '틀니'의 세계는 아내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세계였고, '홍로'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기이한 결혼생활이다. '타투'에서 아버지와 딸은 흔히 말하는 단절의 단계에 이미 이르렀고, '대머리'와 '파란 책'의 공간 역시 허위로 유지되는 공간들이다. 아니 굳이 여러 예를 들지 않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아서 불안함을 느끼는 세계, 그 세계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균형을 해제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강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나오기 위해서. 소설에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던 '지극히 내성적인' 그들이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서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를 불러 틀니를 끼우는 걸 빼먹었다고 알려줬어야 했다. (p.95 '틀니')"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놀란 것 같았다. (p.113 '홍로')" "선생님이 새로 쓴 원고라며 프린트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p.143,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나는 그만 사촌에게 '대머리'라고 부르고 말았다. (p.206 '대머리')" 

 

그녀가 보기에 문제는 책의 두께였다. 그녀는 책들이 너무 얇다고 느꼈다. 집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의 책 밖에 없었다. 새 책장 안에는 적어도 5센티미터 정도는 되는 묵직한 책이 놓여야 마땅했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운 소품을 들일 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점에 갔을 때 그녀가 좀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나 저자, 출판사의 이름 대신 그녀는 책의 두께를 알고 있었다. 오십대의 깡마른 서점 주인이 안경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슨 책을 찾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계산대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들기며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중략)

"아까 말씀하셨던 책이 이거 맞나요?"

"네, 파란색에 5센티미터. 맞잖아요."

"진작에 하이데거라고 했으면 대번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하, 뭐라고요?"

"하이데거. 이 책을 쓴 철학자요. 포장해드릴까?"

- p.213 '파란 책' 

 

그렇게 그들의 세계에 틈이 열린다.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틈이.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주지만, 아주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 내재된 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은 틈새로 열려진 이 불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어떤 양상이자 가능성이지, 당위나 윤리가 전제된 세계가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정화의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말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읽었지만, 그 읽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들이 등장인물 어느 한쪽의 입장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소설 전체가 어쩌면 '내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독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에는 부러 이야기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야기들이 더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따라서 마치 장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다. 예를 들어, '대머리'에서 사촌의 손에 들린 주사기는 무엇일까. 혹은 '집이 넒어지고 있어'에서 나는 과연 살인자일까, 살인자라면 어떤 살인인가.)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뭐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월요일의 출근을 믹아주지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일을 해주지도, 부모나 남편, 혹은 아내, 상사의 잔소리나 질책을 대신 들어주지도, 카드비나 은행 대출이자를 대신 내주거나, 전세금이 더 오르지 않게 해주지도, 내가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해결되도록 해주지도 않는다. 소설이 '실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든 그 모든 것들을 피해 오로지 이야기의 앞뒤를 확장시키며 상상하는 것 뿐이다. 즉 작가가 던진 아주 작은 5센티미터의 틈에 손가락을 넣어 그 안을 최대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우리에게도 한가지 틈이 생긴다. 아니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 삶에도 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틈은 지금으로서는 5센티미터,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 안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파란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소설이 가진 가능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떤 가능성? 이런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해서 나는 신기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집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그 집도 넓어지고 있었다는 걸. 집이 넓어지는 것, 그건 내 집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이제는 마음 놓고 행복해져도 될 것 같았다.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p.256 '집이 넓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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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쳐쓰는 '나'

The Book | 2016. 4. 11. 23:45 | Posted by 맥거핀.
오에 겐자부로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현대문학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나는 평생 젊은 나이에 시작해 버린 소설가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곤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자신이 쓴 것을 고쳐 쓰는 습관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왔음을 깨닫습니다. (p.744 '오에 겐자부로 후기') 중기 단편의 연작들을 제외하고라도, 묶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즉 주제를 변주하면서 어떤 세세한 것들을 고쳐서 이루어진 듯한 소설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 혹은 <남의 다리>와 <인간 양>, <사육>과 <돌연한 벙어리>, 후기 단편의 <벨락콰의 10년>과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2.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단편들은 어떤 은유들이다. 먼저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 <사자의 잘난 척>으로 이어지는 세계. 다시 말해서 개를 도살하거나, 혹은 사자(死者)를 처리하는 것. 죽음을 기다리는 미약한 존재들을 차례로 도살하는 것이나, 이미 죽은 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한 행위다. 그러나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하는 이 일을 그들은 그만둘 수 없다. 아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중요한 문제는 그 일에 그들이 '자원'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혹은 그 수치심과 죄책감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개를 도살하는 개백정이 있는 도살장에, 혹은 시체를 처리하는 관리인이 있는 시체처리실에. 

 

물론 1957년에 쓰인 이 소설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했고, (죽지 못하고 패배한 상태로 살아남았다는) 묘한 수치심과 죄책감이 지배하는 사회, 그들은 그 속에 무력하게 갇혀 있다. 남아 있는 무력한 것을 죽이거나, 혹은 이미 죽은 것들을 재확인하면서. '나'가 그곳에 자원하는 것은 어쩌면 한 켠에 물러서지 않고, 그 수치를 정면으로 봐야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래야 볼 수 있는 것들, 혹은 드러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것은 개에게 물린 상처이거나, 뱃 속의 아기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거나 지켜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소설들은 무의미해보이는 아이러니로 끝나는데, 수치심과 죄책감은 무의미한 아이러니로 남았을 때 더욱 강력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3.

<남의 다리>와 <인간 양>에서는 이것이 그래서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점액질의 두꺼운 벽, 혹은 교외로 나가는 막차 버스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퇴화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니까. 다시 말해서 다리가 없거나, 혹은 '인간 양'이 된 상태니까.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 균열은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균열이라기 보다는 그 수치심을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란 결국 비교할 수 있는 외부의 무엇인가(그 균열을 내려고 시도하는 내외부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더 맹렬하게 내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일테니 말이다.

 

이러한 초기작들에 등장하는 '나'들은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예민한 수치심의 소유자들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외부가 일으키는 균열을 민감하게 바라보며, 그 외부에 한걸음 내딛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의 '나'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 일에 자원했으며, <남의 다리>와 <인간 양>의 '나'들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마주보며, 그것의 작동방식을 지켜보는, 그 메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자신 안에서 또다른 공고한 벽을 쌓는 이들이다. 그 벽들은 <사육>이나 <돌연한 벙어리>에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폐쇄된 상태로 지속되는 공간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는 <세븐틴>처럼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세븐틴>의 소년(나)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우익'이라는 갑옷을 입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4.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나'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이 수많은 가상의 '나'들을 끼워넣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여러 적당한 가상의 '나'를 끼워넣은 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나'를 통해서 수치심이 가득한 사회, 혹은 수음(手淫)을 공유하는 사회, 거대한 점액질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쌓인 일본 사회를 은유하며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두개골 이상을 가진 장남 히카리가 태어났다. 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을 수 없는 거리, 나(오에 겐자부로)와 장남 히카리(이요) 사이의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그는 그 가까운 거리 속에서 꽤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공중 괴물 아구이>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게 만든 음악가 D는 그것의 죄책감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정지시키고, 거기에 '아구이'라는 죽은 아들의 환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겨우 자신의 거리 균형을 유지해낸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음악가 D가 '나'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소설 속 '나'가 등장해 그가 음악가 D를 지켜본다는 설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에서 자신과 '아구이' 사이에 이 음악가 D를 지켜보는 또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으려 어떻게든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음악가 D가 만들어낸 가상의 '아구이'를 실제로 경험한 다음, 그 댓가로, 그러니까 어떻게든 가상의 '나'로서 그 자리에 끼어들었던 댓가로 실명한다. 이 실명.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소설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5.

오에 겐자부로는 그렇게 실명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은유의 세계를 중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 즉 '나'라는 가상의 존재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거대한 은유의 세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의 비겁함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겁게 여겨지는 장남 히카리라는 실재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에서 보여지는 것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극복 시도이다. 먼저 여기에서부터 감지되는 것은 극도로 가까워진 소설 속 '나'와 실제의 오에 겐자부로라는 소설가의 거리이다. 실제와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연작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이 '레인트리'를 '나'가 보지 않거나, 혹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실재를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해지기는 한다. 그는 이 '레인트리', 그러니까 이 레인트리라는 거대한 메타포를 정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일까. 

 

그것의 의미를 이 연작들은 페니 샤오링 다카야스의 입을 통해 집요하게 캐묻는다. 금방 말라버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생명의 나무, 그 레인트리를 정말 보지 못했는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이 때 오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려놓는 이러한 방식의 서술도 정당한 방식인지, 그리고 그 생명의 나무를 진정으로 제대로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현실과 허구를 흩뜨리는 서술 방식도 여전히 이 서술들에 내재된 근원적인 의문 -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나'인가 -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레인트리를 '나'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그 장소, 바로 하와이라는 점에서, 그의 반전과 반핵에 대한 호소는 그 전에 일으킨 전쟁의 책임, 전쟁피해자가 아닌 최초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먼저 논하지 않는 한 궁극적인 의미는 획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성이 치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레인트리는 불탈 것이고, 또한 거꾸로 선 '레인트리', 그러니까 반대의 의미로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거꾸로 선 세피로트 나무'가 작동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레인트리는 불탔지만, 그 돌파구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으로 조금씩 열린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연작은 아버지 '나'와 장애를 가진 이요와의 이야기이다. 은유로서 비껴서 있는 것처럼, 아들의 문제에서도 '나'는 비껴서 있다. 이요가 태어났을 때의 일화, 이요가 물에 빠졌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 나약한 또는 비겁한  아버지로서 '나'의 모습(그가 그 순간에도 결국 하고 있는 것은 글 속에 숨은 '인용'이다.)이 극명하게 드러나있는데, 이를 두고 '나'의 어머니는 며느리(즉 '나'의 아내)에게 말한다. "저런 인간이니까, 우리는 의지할 수가 없겠구나. 네 힘(으로), 이요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p.473)

 

이 나약한 아버지에게 맴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이다. 어린 시절 강 상류 바위 사이 소(沼)에서의 죽음 충동, 다카야스의 죽음, 친구 H의 죽음...이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비탄(grief)이다. 이 비탄은 어디에서 연유하였는가. '나'는 이 비탄이 이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음을, 어쩌면 그 비탄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세상을 이미 몇 번이고 파괴한 자들은 이요의 세대가 아니라 그 전의 세대이고, 반면 이요와 그의 세대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힘을 이미 기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생명의 힘이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성적 충동이기도 하다. 

 

7.

그러므로 레인트리는 불탔을지 모르지만, 그것에게는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어떤 가능성이? 부활의 가능성이 말이다. '나'는 쇠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요에게 연결되는 것처럼, '레인트리'는 생명의 나무로서 부활한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연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가 평화의 세계, 공존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폭력으로 점철된 한 세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상을 여는 노력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비록 그 육체는 존재하지 않아도 과거 세대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자세는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이며, 동시에 이요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이요를 비롯한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과 이요에게 동시에.

 

'생명의 나무'로부터의 목소리가 모든 인류에게 격려로 고하는 말을 이윽고 노년을 맞이하여 죽음의 고난을 겪어야 할 나의 운명에 맡기고. '두려워하지 마라 앨비언,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는 살지 못한다. /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가 부활할 때 너와 함께하리라.' (p.566)

 

8.

전망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원리는 아직도 멀다. 다음의 세대는 어떠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인가? <조용한 생활> 연작에서와 <하마에게 물리다> 연작에서 드러나듯이 세계는 아직 양편의 가능성으로 나뉘어 있다. 광신자와 쾨헬번호 311 피아노 소나타가 교차하고, 이요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병존한다.

 

오에 '나'는 보다 희망쪽에 걸어보고 싶은 것 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이든 적그리스도이든 동생 마짱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이요와 오빠가 누구이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요와 함께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마짱이 있으며,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여자(라베오)가 있고(<익사>의 우나이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하마에게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물린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왓, 왓!"하고 부르짖으며 그 상황을 벗어난 젊은이가 있다. 또한 '울보' 느릅나무를 오에의 아버지-오에-이요에게 연결되는 생명의 나무 '레인트리'로 탈바꿈시킨 아이들의 노력도 있다. (<'울보' 느릅나무>)

 

이 다음의 세대들을 위해 그렇다면 오에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겨우,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도 결연한 이것 아닐까. 그것은 <익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대정신에 물든 한 세대를 기꺼이 익사시키고, 다음의 세대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에 자신에게는 안락한 삶이나 기존의 방식에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마에 물려 왓, 왓 하고 내뱉는 절규, 다른 말로 하면 <익사>에서와 같이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한 '붕괴의 양상'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것이다.

 

9.

노년의 '나' 오에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반전과 반핵, 아들 이요를 이야기하던 '나'에 그는 머물러 있지 않고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이제 오로지 읽는 '나'만이 남는다. 현실의 타인들이 와 있던 그 빈자리에는 이제 책 속의 인물들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다. <벨락콰의 10년>,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현실에 나타난 벨락콰와 마고 왕비. 책 속에서 현실의 젊은이로 나타난 그들에게는 아직 갈림길이 남아있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물론 오에 '나'는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잊지 않고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초기 단편, 중기 단편, 후기 단편의 마지막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초기 단편의 마지막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나'는 아이들이 던진 주먹만한 돌을 맞고 실명한다. 중기 단편의 마지막 <'하마 용사'와 사랑스러운 라베오>에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자신이 내부의 하마에게 물려 절규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또한 후기 단편의 마지막 <불을 두른 새>에서는 전철을 기다리다가 아들의 몸을 껴안은 채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머뭇거리는, 그 다음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자신에게 기꺼이 날리는 카운터펀치들.

 

그 카운터펀치를 맞고 어질어질한 속에서도 오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니 '나'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다른 방식의 희망을 끌어내고자 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깨닫지만 그 영혼과의 공생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휘파람새, 그러니까 불을 두른 새와의.

 

10.

오에는 그렇게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소설의 내용면에서도,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그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하나의 작가를 읽고 다음의 작가로 나아가며, 과거의 어떤 것을 반추하여, 그것에 얻은 것을 통해 익숙해진 것을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아마 그의 소설 쓰는 습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습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여 말할 수밖에 없다.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덧-1.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번호를 붙여서 글을 쓰는 것을 조금 '편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생각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연결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글도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버렸는데...언젠가는 이 리뷰를 '고쳐 써' 보고 싶다. 현재로서는 그럴 여력도 안되고, 너무 늦기도 해서...

 

덧-2.

작품의 발표년도를 제목 옆에 병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책의 말미에 리스트의 형식으로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단편집이라면 어떤 년도라는 것도 의미가 꽤 있는 법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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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화신

The Book | 2016. 3. 30. 15:01 | Posted by 맥거핀.
시스터 캐리 (반양장) - 8점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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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

The Book | 2016. 3. 9. 03:04 | Posted by 맥거핀.
그들 - 10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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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The Book | 2015. 6. 30. 14:24 | Posted by 맥거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 6점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미셸 게나시아의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장소설에서 담는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때로는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많은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여러가지를 조금씩 통과해 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때로는 다정한, 또 때로는 엄격한 부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아나가며, 조금씩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고, 짝사랑과 동경의 경계에 서며, 예기치 못한 사랑을 만난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미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달랐던 부모가 결국 이혼하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까운 친구(니콜라)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잘 하는 것(사진찍기)을 찾아나가고, 못하는 것(수학)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 나갔다. 짝사랑이었는지, 어떤 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세실)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으며(형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 설정은 또 얼마나 전형적인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카미유)을 대하는 법을 알아나간다.

 

물론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것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평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우연치 않게 미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있으니까. 게나시아의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미셸의 성장담이며, 다른 하나는 미셸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체스클럽 회원들의 이야기이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일종의 망명자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망명은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므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피해 이곳, 프랑스로 도망쳐 왔다. 그 '무엇인가'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 그리스 등지에서 온 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말살의 위협에 피해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곳, 프랑스로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비슷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한편에는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 혹은 의도치 않게 미셸의 삶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성장소설에 꼭 필요한 역할모델들, 혹은 (이 표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멘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필수불가결하다. 소년이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들(그리고 물론 소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성장소설들에서는 상당수 그것은 부모가 아닐 경우가 많은데, 많은 성장소설들에서 부모는 그대신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외부의 누군가를 등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인데, 미셸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 예를 들어 부모님들, 형 프랑크, 형의 친구이자 미셸의 친구이기도 한 피에르, 세실과 같은 인물들은 미셸의 성장을 이끈다기보다는 결국에는 그에게 어떤 문제를 안기는 입장에 더 가까우며(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성장하는 이들이 그렇듯 깨지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곁에서 떠나가버린다. 물론 대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셸이 수없이 읽고 보는 책과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셸은 책과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이고, 책과 영화는 물론 멘토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책과 영화가 단지 제목만 빈번하게 등장할 뿐, 그 내용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책과 영화보다 더 거짓말 같고,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책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부터 점점 이야기를 교차하여 배열하기 시작한다. 미셸의 이야기와 회원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은 기구한 삶의 경험일 뿐만아니라, 삶의 여러문제에서 좌충우돌하는 미셸에게 들려주는 조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같이 성장이 멀어보이는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들려주는 작가의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들이 겪은 삶의 진실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하지만,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교훈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고, 각자 다른 의미에서 가혹했으며, 보다 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뭉뚱그려서 기억의 진실, 혹은 기억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산물들이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지만, 그들을 지탱시키는 것은 그 모든 수많은 기억이 아니고, 단지 몇 개에 불과한 작은 기억들이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기억의 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온,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믿는 디아스포라들은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들은 몇 개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하고, 여자가 늘 타고 왔던 프랑스 우체국의 DC-3 쌍발 프로펠러기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무대에서의 환희를 기억하며,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사람을 기억하고, 몇 개의 시덥잖은 사회주의 농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기억을 잃고 길에 부랑자처럼 버려졌다가 이고르를 만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기억을 보태고 삶을 되찾은 베르네르의 경우에도, 하다못해 단지 체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요하다. 수많은 명국의 기보를 외우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샤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가 소련을 떠나오기 전에 임했던 일로부터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했던 일은 당을 위해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조작하려 한다는 것은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며,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자료일 뿐이지, 결코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진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사진에 찍힌 자나 사진을 찍은 자, 혹은 사진을 조작한자의 기억은 조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억한다. 자신이 지워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워버린 작가의 시를 통째로 기억한다. 미셸도 세실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그녀를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녀를 남기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남겨진 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미셸과 카미유가 결국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성공했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는지, 체스클럽의 회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기억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장례식은 결국 이들을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다른 형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덧.

다만 이 성장소설에 대한 (아마도 부당한) 궁얼거림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은 민감한 문제들을 눙치고 지나가기에 좋은 구조이다. 특히 그런 민감한 문제들이 어떤 사회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이 소설도 알제리 전쟁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 비해 이 소설이 알제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소설이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셸이 알제리 문제가 당시의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어떤 내적인 허위들을 감지해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동시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모든 성장소설은 성장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성장한 자가 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짐짓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과연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을 다루는 만큼 국내의 내적인 문제, 그러니까 알제리 전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몇몇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나 프랑크 같은 청년들의 자원입대나 그들의 치기어린 사상과 그것이 깨어지는 방식에 대한 묘사, 혹은 프랑크의 도피를 이고르가 돕는 것에서 오는 어떤 순진한 시선(물론 이것은 미셸의 시선이므로 그렇기도 하다), 미셸 집안의 부유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미셸이 알제리에서 온 프랑스인들을 보는 불편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알제리에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랑스 국내인들도 알제리와 같은 식민지에서 오는 혜택을 같이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반감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이 그렇다. 미셸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 수 없으며, 그것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의 어떤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봐도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틀렸다. 낙천주의적으로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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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을 보는가

The Book | 2015. 6. 24. 14:04 | Posted by 맥거핀.

용감한 친구들 1 - 8점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다산책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조지'이다. 아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셜록 홈스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이고, 조지는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인물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이 생겨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소개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아서가 조지를 도와, 그가 혐의를 벗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줄로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치 않은 점들이 있다. 아서가 단지 선의에 의해 조지를 도왔다고 보기에는, 그 자신에게도 조지의 사건에 뛰어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조지가 그렇다고 그로 인해 완전히 혐의를 벗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두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다지 충분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소설의 원제,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서와 조지. 이 소설은 그 두 사람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초점을 두는 것은 조지가 누명을 쓰게 된 이 사건 자체나, 아서와 조지가 잘못된 판결을 뒤집어내는 쾌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서와 조지라는 이 인물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내 그려내는 것이다. 단지 분량으로 보았을 때도, 이 중요한 두 인물이 비로소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되는 거의 중반부가 훨씬 넘어간 시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큰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풀려났으며, 아서는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 투이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된 진을 이미 만나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큰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미 결말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아서와 조지가 만나기 시작하는 3장의 제목은 '시작이 있는 결말'이다).

 

이로 인해 가지게 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의 가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정'이란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조지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고 있다고 독자를 믿게 하면서, 동시에 범인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비슷한 전략.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를 추적하여,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줄리언 반스의 인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님을 안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증거가 가진 허술함이나 그와 관련된 진술들의 빈약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단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조지라는 인물에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묘사들과 일화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서가 조지를 만났을 때 그가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아서 경, 제가...... 간단히 말해서...... 제가 무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지로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스포츠로 다져진 커다란 운동선수의 손을 내민다.

- 2권 p.30~31

 

물론 이는 독자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것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세심한 기술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기사를 읽고, 단지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책에서도 어떤 힌트가 나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셜록 홈스의 추리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셜록 홈스의 추리법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홈스는 단지 몇 분의 보는 것, 그러니까 주의깊은 관찰로부터도 어떤 이가 범인이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는 했다. 다시 말해서 아서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비슷한 것이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은 몸을 지켜보았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어떤 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서가 심령학을 믿고, 그것에 큰 관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에 기술된 아서라는 인물로 짐작해 볼 때) 아서가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것에는 허점이 없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설혹 영매가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광경을 보아도, 바로 이를 믿는다, 혹은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구축된 어떤 다른 믿음들(이성적인 믿음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믿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강한 자기확신으로 보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심령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전의 이성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믿음이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즉 조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지와 아서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자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 그리고 인도(파르시) 혼혈인으로서 단지 지방의 평범한 사무변호사라는 외적인 면에서 물론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역설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서는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그 보는 것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멍은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경험과 선의에서 우러난 자기확실성이 메워준다. 반면 조지에게는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서와 같은 자기확신이 없었고, 보이는 것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만 했다그래서 그는 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법은 일종의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체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그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두 사람의 어떤 좋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되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아서는 보되, 그것에는 선입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조지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보는 과정에는 주의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에게 부당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켐벨 경위나 앤슨 지서장과 같은 인물은 조지의 외양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졌으며, 이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이런 마무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지가, 아서가 죽은 후에 그를 불러내려는 심령추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이 마무리 말이다. 즉 아서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조지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조지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아서가 믿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이것은 조지가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 던지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과연 반스가 범인을 숨기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지가 범인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적어도 '명확하게는' 이를 밝혀놓지는 않는다...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그는 무죄라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반스가 만약 전략을 썼다면 그 전략은 '페어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며, 그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페어함'을 믿으니까. 아..이거 선입견인가.) 

 

 

덧.

그리고 이 소설은 현재형의 문장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점점 옮아 온다. 1권에서는 거의 현재형의 문장들인데, 이는 2권에 이르러 점점 과거형의 문장,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읽게되는 익숙한 문장들로 바뀐다. 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라면 이는 과거형의 문장이 가지는 어떤 무게를 중화시키려는(그러니까 독자가 조지의 결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다시 말해서 과거형은 어떤 것이 '확정적 사실'이라는 인식을 주니까)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글쎄....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어떤 명확한 구분이 있지는 않고 과거형과 현재형의 문장이 혼재된 부분도 있으니..(다만 비율로 보자면 2권에 와서 과거형의 문장이 주가 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형의 문장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초반에 진도를 빼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혹시 단지 번역상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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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시도

The Book | 2015. 5. 26. 16:04 | Posted by 맥거핀.

 

익사 (반양장)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다 밑 조류가

소곤대며 그의 뼈를 주워올렸다.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다.

- T. S. 엘리엇, 후카세 모토히로 번역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 p.28

 

두 편의 시가 있다. 작가 조코 코기토가 이른바 '익사 소설'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T. S. 엘리엇의 시와 조코 코기토와 그의 어머니가 같이 쓴 시. 이 시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일종의 화두와 같은 시다. 이 시들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 엘리엇의 시와 코기토 모자가 쓴 시가 모두 다루는 것은 '익사'이다.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라는 시구는 조코의 어머니가 쓴 것인데, 이는 조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로,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나 살아났다 해도 한번 홍수에 떠내려갔던 사람들을 강물결이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연결되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이 두개의 익사는 모두 특이하다. 엘리엇의 익사자는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고 있고, 코기토 모자의 익사자는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노년기부터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익사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과거에 있는 것은 익사와 '익사 소설'이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는 익사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난 날, 그는 어린 조코와 함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싣고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조코를 돌려보내고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가 있다. 그는 왜 어린 조코를 데리고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실은 채로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익사 소설'은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고 이제 나이든 작가 조코가 쓰려고 하는 소설이며, 이 소설 <익사>는 결국 그 '익사 소설'이 소설이 아닌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완수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보이던 시기, 조코의 아버지는 일단의 군인들과 연루되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이른바 '궐기', 그러니까 전쟁에 진 천황과 함께 폭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익사이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은 빈 군데가 많고, 그 '익사'는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망인이 된 조코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겁이나 도망치려다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의 좋은 리뷰대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며, 결국 천황과의 폭사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정치 교재로서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와 그 속에 등장하는 '숲의 왕'의 신화. 숲의 오크 나무를 지키는 인간신(人間神)이 늙고 쇠약해져 생명력이 다하면 세계 또한 같이 멸망하기 때문에 그 인간신의 생명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면 강건한 후계자가 그 전에 그 인간신을 죽여 영혼을 옮겨받아, 세계의 쇠퇴와 파괴를 막는다는 이야기. 이를 어떤 정치적 텍스트로 읽으면, 당시의 군인들과 아버지가 벌이려던 일을 이에 연관지을 수 있다. 즉 전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국가의 위기, 혹은 세계의 쇠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쇠퇴한 인간신, 즉 전쟁이 패배했음에도 죽지 않은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만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연관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친구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가지고 자살하며 그 유서를 화자인 '나'라는 청년에게 남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이것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 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럼 순사(殉死)라도 하지 그래요, 하면서 놀렸습니다. (......) 나는 아내를 향해, 만약 내가 순사를 한다면 메이지 정신을 따라 순사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익사> P.183~184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 불어난 강에 배를 띄운 것은 단지 농담에 그친 군인들과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인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멸되려고 하는 일본 제국과 같이 순사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음>의 '선생님'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버지나 '선생님'은 당 시대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당 시대의 소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새 시대를 이끌 강건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기도 했다. <마음>의 '선생님'은 청년에게 '기억해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한편 아버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이오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가 코기를 배에 태운 순사 시도는,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후계자로 조코를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즉 <마음>의 청년이 원령을 이어받는 빙의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면, <익사>의 코기토는, 혹은 결국 익사를 시도하는 다이오는 아버지의 원령을 이어받는(혹은 이어받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빙의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더욱 거대한 시대정신과 연관이 되는데, 메이지 시대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소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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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미심쩍음이 남는다. 원령과 빙의자라는 이 기이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혹은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한다는 어떤 극우적인 껄끄러움 말이다. 그것은 이런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빙의자들은, 즉 <마음>의 청년이나, <익사>의 조코 코기토나 다이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가? 사실 다이오나 그의 스승, 즉 조코의 아버지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조코의 아버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정치적 텍스트로 읽도록 권유받았지만, 그것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인물이었으며, 천황과 같이 폭사하자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그 폭사를 위해서 마을의 오래된 숲을 훼손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것은 '다이오'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인데, 그 자신이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지만, 극우적인 청년을 기르는 훈련도장을 이끌기도 하며, 또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조코와 아사 등의 무리와도 관계를 맺고 그를 이해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코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아버지의 익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군국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찬가에 눈물을 흘리거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가 가지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에 겐자부로가 보기에)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바로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반성된 것은 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는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종의 붕괴의 지속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를 조코는 지금까지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즉 붕괴되지 않도록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하여 버텨왔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조코는 깨닫는다. 사실 정확한 해석은 지금도 나는 붕괴 위기에 처해있고, 그 '붕괴라는 양상'이 '글 조각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코는 생각한다(아마도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 거대한 현기증은 그를 엄습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일본의 '현재'이기도 하다. 다가올 붕괴를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바로 그 '붕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즉 붕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위안부 문제), 그리고 지금도 강간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에는 희망이 없을까.

 

소설 속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조코의 여동생 아사라든가, 그의 아내 치카시, 그의 딸 마키, 조코의 이 '익사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알게 된 우나이코와 릿짱과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연극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죽은 개를 던지다' 방식의 연극은 일방통행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실제로 연극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의 일종의 토론극이며, 새로운 형식일 뿐더러 더욱 많은 지지를 얻은 쪽이 승리하는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어떤 특유의 소통방식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연극, 편지, 독백 등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의 소통과 공동체 결성은 위의 남자들의 시도와 대비되는데, 예를 들어 원령과 빙의자라는 으스스하고도 폭력적인 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이 남성 중심의 관계들은 단절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코기토는 익사라는 형식을 통해 단절되어 있으며, 코기토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는 직접적인 소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체의 시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 구체제의 '번'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군'에서 파견된 군대에 대항하여 '메이스케 어머니'와 '환생한 메이스케'가 벌이는 여자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이 봉기(여기에도 다시 이 원령과 빙의자가 등장한다. '메이스케'와 '환생한 메이스케'). 이것은 이 아사, 우나이코, 릿짱, 마키, 치카시 등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여성 공동체의 원형이며, 남성 중심의 부계 사회에 맞선 모계 사회로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는데, 과거에서는 '메이스케 어머니'가 과거 '번'의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면, 현재에서는 우나이코가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남성들은 시대정신이니 시대의 종언이니, 후계자를 세우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번'이 '국가'로 바뀌거나, '쇼와'가 '헤이세이'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국가는 여전히 강간하고 있고, 약자들(물론 이 약자들에 남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카리'와 같은 인물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은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로 바뀌는 정도는 되어야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반복되는 익사를 통해 다이오 혹은 조코의 아버지와 같은 모순적인 중간자적 인물(전쟁에서 패배했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 반성은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과거의 향수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은 시대에서 퇴장하지만(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분신인 코기토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에는 결국 오에 겐자부로 자신과, 더욱 철저한 비판이 기반이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대인 모두를 향한 일종의 자기반성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내용보다 이 소설 <익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치지 않는 묘사이며, 그러한 묘사를 표현하는 이 소설의 특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논픽션 형태로서의 소설 형식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자신의 예전 소설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조코 코기토라고 하는 식의 시도 말이다), 편지글이나 대화글을 어떤 설명 없이 연결짓는 낯선 시도이기도 하며,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적극적인 크로스를 그대로 글에 풀어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은 그 내용을 과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것은 우나이코 등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중학생과 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에 계속 반대를 하고,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이 교육에 관계된 인물(예를 들어 우나이코의 큰아버지가 교육 행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소설의 1부의 제목은 '익사 소설'이며, 그 익사 소설은 결국 소설 속에서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익사 소설'이라는 과거가 결국 다시 쓰여지지 않아야 함을, 그것은 코기토 세대의 종말로 인해 끝나야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여자들이 우위에 서며 가능성이 모색되고(2부의 제목 '여자들이 우위에 서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른다. 그것은 우나이코의 강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와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붕괴가 지속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시로 돌아간다면 조코의 어머니는 조코에게 물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기토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 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아카리와 같은 약한 자들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가 그런 세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작가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러고는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에 고여 생긴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선 채로 익사할 따름(p. 427)"이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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