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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김태용

Ending Credit | 2011. 3. 2. 16:33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스포 있음)



<만추>라는 제목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과 시간에 배인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만추. 늦가을. 모든 것의 수확이 끝나버린 때.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겨울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시간. 어떻게든 유예하여야 하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이제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훈(현빈)의 시간. 애나(탕웨이)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

영화 속 애나의 시간과 훈의 시간은 다르다. 애나의 시간은 그녀 자신 안에서 최대한 늦춰지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7년간의 수감 이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72시간만의 귀향을 허락받은 애나에게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잡아두어 천천히 흐르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시간들. 어떻게든 유예시키고 싶은 72시간 후의 막내림. 반면 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훈에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오늘은 이 여자를 만나, 이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고, 내일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다른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애나에게 돈을 빌렸을 때, 훈은 그 대신 기꺼이 시계를 내민다. 그에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 그것은 훈에게는 시계이며, 애나에게는 돈이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다른 시간을 공명시키기 위해 영화적 판타지를 은밀하게 작동시킨다. 서사적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연의 힘을 빌어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난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한 남녀를 만나고, 그 남녀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이 환상은 언뜻 이 두 사람의 시간을 비유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공간 안에서 두 남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앞으로 당겨지고, 다시 시작되고,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형상화되어 차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 장면을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기도 하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훈과 애나에게 반복되며, 그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간을 다시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에 따른 이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안개만큼이나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유령 투어'를 하는 사람들. 이 때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이 시간들이 환기되는 것(물론 흐릿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환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이다. 애나에게는 그녀의 예정된 귀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훈에게는 그에게 이 시간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것(빠른 시간 안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가 더 할 수 없이 흥미로워지는 것, 혹은 더 할 데 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 그 마지막에 있다. 안개 때문에 버스는 정차하고,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훈과 애나의 시간은 역전된다.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였던 훈의 시간은 급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남은 아주 짧은 시간은 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진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훈의 시간 흐름은 지금까지의 애나의 시간 흐름이 된다. 그리고 훈은 그제서야 애나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하는 시간의 의미. 그 일분 일초가 소중한 시간의 의미.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애나에게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애나에게 이번에는 훈의 시간이 전이된다. 애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되었다. 다시 훈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보내야 하는, 아니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애나는 허둥대며, 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은 잠든 애나에게 훈이 둘러주고간 시계 뿐이다. 물론 같은 행동이지만, 이 때의 시계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처음의 시계가 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애나가 훈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견뎌야할 그 많은 시간들을 이해하고 이제 나를 그 시간들에 공명한다는 것. 영화의 그 마지막은 판타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 2011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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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

The Book | 2011. 2. 28. 20:57 | Posted by 맥거핀.
리영희평전시대를밝힌사상의은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정치가/법조인
지은이 김삼웅 (책보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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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읽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읽는 것과 같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분단과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신군부와 광주, 6월 항쟁과 문민정부, 진보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오롯이 굴곡을 같이 한다. 리영희 선생은 그 숱한 현대사 굴곡의 최전선에서 가장 필요한 말들을,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해왔다. 그러나 이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은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갇힌 사고에 의해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지만, 그는 그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계사의 넓은 흐름 속에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리영희 선생을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거나,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 혹은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오해와 이분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를 그대로 평가에 투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지향하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영희 선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의 제목 <우상과 이성>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생은 이성의 힘으로 우상을 부수고자 하였다. 당시의 우리를 둘러싼 많은 우상들, 예를 들어 박정희 독재체제, 반공, 북한이라는 악마, 미국이라는 선, 중국에 대한 편협한 시각, 베트남전쟁의 당위성, 지역주의 등이 그가 원하는 파괴의 대상들 중 일부였다. 그것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러한 우상들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이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가치관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을 하찮게 보는 태도는 우리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을 사회주의에 경도 되었다거나, 혹은 너무 진보적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간의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즉 다른 말로 하면 이분법의 우상에 사로잡혀 그를 평가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의 발언이 그간 진보적 관점에 너무 치우쳤다는 것은 그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그런 우상들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우상들이 얼마나 강력함을 이 짧은 리뷰에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게시판에 가서 더도말고 딱 1시간만 '눈팅'을 한다면, (리영희 선생의 많은 노력에도) 그 강력한 힘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얼마나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이 평전의 이러한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나 스탈린 시대 소련의 지식인이었다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을 터이고, 문화혁명기 중국에 살았다면 하방下放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에 머물렀다면 아오지 탄광에 일생을 묻었을 터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출척을 당한 끝에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p.29)


그래서 아마도 리영희 선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는 휴머니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를 여러 결로 정의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하게는 인간의 생존과 삶을 제1의 가치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정확한 이론적 탐구와 정세분석의 가장 밑바닥에는 우리 민중들의 삶과 생존에 대한 분노와 걱정이 깔려 있다. 안과 밖에서 이중으로 속박당하는 민중의 삶과 생존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그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리영희 선생은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루쉰의 삶과도 맥이 닿아 있다. 루쉰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오른쪽이라고,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왼쪽이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중의 속박에서 고통당하는 중국 민중의 삶과 생존이었다. 그가 존경한 루쉰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그저 생존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고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외세에 동참하여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안겨준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 그것은 리영희 선생이 말하는 인간다운 사고이며, 삶이며, 리영희 선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 <리영희 평전>이 평전으로서의 균형감각을 잃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말하려면, 적어도 그 평균대가 놓여진 평평한 대지를 우리는 상정하여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의 유명한 말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억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가는, 기필코 넘어지고야 만다. 그리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넘어질 때는 힘을 더 가진 쪽으로 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차는 보통의 기차가 아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달리는, 아주 고르지 못한 땅을 달리는 고속의 기차이다. 그 고속의 기차 위에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든 모든 핍박받는 자들을 안전하게 기차에 앉히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사상적 어린아이들을 어떻게든 부여잡아 다독이는 억센 손이다. 그 억센 손을 세밀하게 묘사할 때도,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상정해야 할까. 그러한 무서운 고속의 기차 위의 균형이란 무엇을 위한 균형일까.

그런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타계하셨다. 우리는 최근 연이어 사상의 은사를 잃고 있다. 그러나 꽃은 졌지만 향기는 남는다. 아직도 수많은 우상은 우리곁을 맴돌지만, 선생이 남겨준 우상을 없애는 이성의 무기, 사상의 무기는 여전히 벼려진 채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를 추도하고 기억하는 또다른 방법은 그가 남겨준 힘을 이용하여 우리 삶에 아직 남아있는 우상들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조금씩 더 인간다운 사고를 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리영희 선생에게 진 빚을 갚아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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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한 수탈

The Book | 2011. 2. 25. 17:04 | Posted by 맥거핀.


반자본발전사전자본주의의세계화흐름을뒤집는19가지개념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이론 > 자본론
지은이 볼프강 작스 (아카이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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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라는 것은 어느 논쟁에도 비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며, 이뤄내야 할 것이다. '김예슬 선언'에서 비슷한 표현을 가져와 본다면, 보수가 발전을 원한다면, 진보는 의식있는 발전을 원한다. 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식 발전을 원한다면,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식 발전을 원한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빈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북반구의 여러 나라들이 초일류대국을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북반구의 나라들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그러나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그러한 발전의 레이스에서 벗어날 것을, 이제 발전에 대한 헛된 희망을 버릴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아니, 권한다기 보다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책임 집필자인 볼프강 작스를 비롯한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발전 본위 사회에 경고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미의 탈식민화는 상당수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고, 경제적 의미의 탈식민화 역시 일부 국가들에서 이루어졌지만, 발전 담론이 세계를 휩쓸면서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는 오히려 강력해졌다. 발전 담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서구 유럽인, 혹은 미국인처럼 사는 것을 꿈꾼다. 그 여파로 세계 곳곳의 고유한 생활 양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즉, 문화적인 다양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 중심인 서구인들의 생활 양식이 하나의 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소비 중심의 북반구식(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 방식은 지구의 자연을 절대적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고, 동시에 이러한 생활 방식은 지구 전체의 기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이러한 발전 중심 모델은 지구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강화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발전 중심의 세계관은 오로지 경제만을 중심에 놓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1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운다. 그래서 아무도 원치 않았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1949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로, 세계의 일부 지역은 '저발전 지역'이 되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낙후되고,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경제력만이 규준이 될 때 나라안의 일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 되어버리며, 그 곳 사람들의 인간적인, 문화적인 가치는 완전히 무시된 채, 그저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되어 버린다. 동시에 이러한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제력만이 중심이 되다보니 경제력이 낮은 사람들의 기본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되고,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예를 들어 지난 용산 철거 문제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로,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탈발전 운동을 끌어올릴 것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탈발전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포괄하는데, 첫째는 화석 연료 자원에 기반을 둔 경제에서 생물다양성에 기반을 둔 경제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중시하는 미국와 유렵의 '녹색 경제', 타이의 '자급 경제', 인도의 '지구 민주주의' 요청, 페루의 '안데스 세계관' 같은 것들이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경제 체제는 현지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운영된다는 강점도 있다. 둘째는, 위에서도 말한 경제 위주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발전 위주의 경제 체제에 매몰된, 공동체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 민주주의, 정의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복구함으로써, 물질에 덜 기반한 번영을 모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행복이란 경제에 달려 있지 않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시도이다.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이러한 주제를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의 여러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올려 논파해 가는 방식이다. 즉 발전에 뒤따르는, 혹은 발전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키워드들을 각 장에서 한 가지씩 제시하며, 그 키워드들의 역사적인 기원과 현재적 의미,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뜻들을 새롭게 살펴보며, 그 키워드들을 다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총 19개의 키워드를 17명의 저자가 각각 논파하고 있는데, 이 키워드에는 우리가 예상 가능한 '시장'이나 '생산', '자원', '국가' 등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는 의외의 키워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평등'이나 '사회주의', 혹은 '도움'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평등'은 범세계적인 평등이라는 줄세우기적 사고에 기반한 것으로, 실현 불가능하며, 동시에 실현되어도 (지구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재앙에 가까운 것이며, 결국은 현실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받는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도 결국 사회주의식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레닌과 스탈린의 러시아는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어쩌면 '국가 자본주의' 혹은 그것이 너무 앞서나간 표현이라면, '권위주의 국가' 혹은 '관료주의적 집단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리고 결국 '사회주의'란 '오해와 오류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 책의 논의들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 이 책에서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지구 자원의 한계를 말하며, 지금의 소비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어떤 불평등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즉 발전이 이미 상당수 이루어진 서구 사회가 발전 과정에 놓인 국가들을 '저발전' 상태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이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인도 얼음처럼 차가운 콜라를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실 권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지 못한데, 하나는 그 질문은 이미 전체적인 발전 레이스에 기반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전지구 수탈'이라는 발전 레이스에 뛰어들어서 끝이 뻔히 보이는 파멸로 같이 달려가는 선수가 될 필요는 절대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미 그러한 생활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 콜라 꺼내 먹어 본다고 해서, 우리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다른 예상되는 질문은 조금 더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발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는,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 혹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지금보다 평균 수명도 훨씬 낮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쾌적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을 거의 포기해야 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가 지금의 발전 위주의 체제에 매몰된 시각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유지에 대한 강조, 생물과 밀착된 경제 체제, 특수한 개별의 공동체적 가치를 되살리는 삶이 어렴풋하고 흐리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가 발전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즉 이러한 생활 양식 이외의 다른 삶을 우리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상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그 대안이 미심쩍더라도 거의 가까이에 다가온 파국을 우리 모두는 알기 때문이다. 지구가 몇 백만년 동안에 차곡차곡 쌓은 자원을 우리는 거의 수십년 만에 다 썼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거짓말에 가깝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구절(이 책에는 이밖에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써먹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경제학자들의 경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회는 경제적 본성을 가진 제도와 접촉 형식을 만들어낸 다음에도, 경제를 들여앉힌 다음에도 경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경제 규칙은 현대 사회에서 만성이 된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희소성은 모든 인간 사회를 관류하는 철의 법칙이기는커녕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었기에 끝도 있을 수 있다. 희소성이 막을 내릴 때가 왔다. 지금은 주변부와 보통 사람이 나설 때다. (p.68)


그리고 이것은, 다른 책에서 본, 우리 대통령 혹은 우리 시장님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

라틴아메리카의 한 대통령이 "우리는 제1세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제1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제1세계가 되자면 범죄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통령은 투옥시켜야 마땅합니다. 요컨대 당신이 "나는 몬테비데오가 로스엔젤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몬테비데오가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중에서,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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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 대니 보일

Ending Credit | 2011. 2. 14. 21:30 | Posted by 맥거핀.



사실 이 '127시간'이라는 제목은 결말을 어느 정도 담지하고 있다. (물론, 그 결말의 설명을 원치 않으시는 분도 계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은 미리 읽지 않으실 것을 부탁드린다.) 그 제목은 어찌되었건 127시간 후에 그가 살아서 다시 귀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극히 제한된 자원들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살아돌아올 것인가. 그는 물론 요행으로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를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처절한 노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이란 그렇게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런 영화이고 보면, 화면 구성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직선적이고, 결말이 거의 예상가능한 영화라면, 그 안의 이야기들을,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니 보일은 그런 부분에서 그의 장기를 적절히 구사한다. 그가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하곤 했던 화면분할이나 급속한 줌인, 줌아웃, 플래시백으로 연결 등의 잔재주들이 영화에서 적절히 스피디있게 구사됨으로써 영화의 이런 약점들을 적절히 커버한다. 다만, 나는 대니 보일의 이런 감각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은 독이 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아론(제임스 프랭코)의 고통이 더욱 처절히 묘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잔재주들이 너무 많이 구사되기 때문에 때때로 아론에게 연결된 감정의 선들을 끊어버리기도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상상을 해본다. 잔재주에도 능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것을 배제하고, 조금 더 정공법을 택하는 감독 - 예를 들어, 대런 아로노프스키 - 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연출을 맡았더라면, 관객을 조금 더 미치게 만들었겠지만, 감정은 극한으로 끌어올려졌을 것이다. 예전에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던 <레퀴엠>의 어떤 장면들을 돌이켜보면, 몸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아론의 변화는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아론은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나만을 믿고 따라오라고. 그리고 그는 계속 자신만을 찍는다. 그가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은 주위의 풍경이 아니다. 그 풍경 안에 있는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그 틈바구니에 갇혀서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두 개로 나뉘어 모의 방송을 연출하며 찍고(물론 이 때까지도 그는 자신을 완전히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이 때부터 캠코더 안의 다른 사람들만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며, 다른 이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헤어진 여자친구(그는 여자친구가 농구장에서 자신을 버리고 갈 때 결코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동생, 가족,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절정은 그가 거의 환각상태에서 결단하며 일을 실행할 때, 그를 계속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오로지 주위의 도움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어린아이. 그는 그 어린아이가 되어 그 자신을 본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캠코더 식으로 말하자면, 그 캠코더에 담겨 있는 화면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볼 때 뿐이라는 것. '찍는 것'으로만은 어떠한 의미도 담기지 못한다는 것.

이를 보여주는 대니 보일의 시작과 끝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시작 부분에 도시의 많은 사람들, 어딘가에 운집한 사람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차들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의 아론에게는,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짜증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며, 지겨운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대니 보일은 아론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127시간의 무간지옥을 압축하여 선사한 후에, 처음의 장면들을 거의 비슷하게 다시 마지막에 갖다 붙인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장면이란 이제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물결,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것은 처음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한다는 것.

누군가의 평대로 이것은 확실히 미국적인, 서양적인 인간관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제 그가 더 이상 위험한 모험은 즐기지 않기를 바랬다. 행선지를 남기건, 남기지 않건 말이다. 아니, 그런 일을 겪고 난 후에도,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지 않고, 계속 자연을 정복하러, 혹은 괴롭히러 갈 이유가 있는가. 이 모든 일은 아마도 자연이 그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계획한 것일텐데 말이다. 나는 철저히 동양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영화를 본 후 다른 교훈을 얻었다. 위험한 데는 가지 말자, 자연은 멀리서 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無爲自然이니라.



- 2011년 2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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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취향 테스트

끄적거리기 | 2011. 2. 7. 14:39 | Posted by 맥거핀.

독서 취향 테스트라는 것을 했는데, 아래의 결과가 나왔다. (현실적인 품격, "사바나" 독서 취향?) 칭찬하는 것도 같고, 빈정대는 것도 같은, 오묘한 취향이군.

해보고 싶은 분은 아래의 사이트로.
http://book.idsolution.co.kr/





취향 설명 다른취향보기

열대우림 외곽에 위치한 사바나 기후는 독특한 건기가 특징. 수개월간 비 한방울 없이 계속되는 건기 동안 사바나의 생물들은 고통스러운 생존의 분투를 거듭한다. 가뭄과 불에도 죽지 않는 강인한 초지를 기반으로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번성하는 '야생의 천국'인 동시에, 혹독한 적자생존의 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고대 인류의 원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건조한, 절제된, 강인한 생명력. 이는 당신의 책 취향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생물처럼, 치밀한 계획 하에 쓰여진 정교한 책을 선호. 책이란 무릇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이어야 함.

  • 대초원 위의 야생동물 같은:
    사바나의 고양이과 육식 동물처럼 유유자적 고상한 취향. 과격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나름 고상한 선택 기준을 갖고 있음. 아마도 경험이나 교육에 의한 분별력으로 추정됨.

  • 절제된 현실주의:
    멍청한 감상주의, 값싼 온정주의, 상투적 가족주의, 이런 것들로 장사하려는 상업주의를 배격함. 문화적인 보수 성향이 있음. 지나치게 독창적인 책보다는, 절제력과 품격을 갖춘 것을 더 선호함.

당신은 출판시장에서 가장 보기 드문 취향 중 하나입니다. 분명한 취향 기준이 있음에도 워낙 점잖은 탓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취향은 다음과 같은 책들에게 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 시절부터, 인류는 줄곧 잔인한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이런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최초의 묘사 중 하나는 오비디우스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아폴론이 한 음악 경연에서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를 패배시킨 후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실러는 소름 끼치는 것에 대한 이 "자연적 성향"을 아주 잘 정의했다.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처형이 벌어질 때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구경하려고 항상 흥분해서 달려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영화관에서 유혈 낭자한 "스플래터" 영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일 텐데, 그 영화가 허구로서 제시되는 이상 관객들의 양심이 흔들릴 일은 없는 것이다.
- 추의 역사, 움베르트 에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 무진기행,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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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강우석

Ending Credit | 2011. 2. 6. 22:22 | Posted by 맥거핀.



(스포 조금)



이 영화 <글러브>에 대해서는 <씨네 21> 789호 '전영객잔'에 실린 안시환의 평에 대체로 동의한다. 안시환의 평은 이 영화가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려는 혐의가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간의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적인 감동 강조류 스포츠 영화들에 나왔던 거의 모든 클리셰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단 하나만은 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 빠져있는 것은 선수들 개개인의 개인사를 의식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선수들 개인의 여러가지 힘든 개인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에서 감동의 눈물을 짜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인사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은 투수인 명재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야수들은 그 흔한 아버지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편집과정에서의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간에 팀을 떠나는 선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이 어린 선수에게 카메라는 비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공동체를 버렸을 뿐이고, 공동체도 그를 버렸을 뿐이다. 이것에는 안시환의 평대로 확실히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우석의 최근의 다른 영화들도 (익히 분석되었듯이) 비슷한 혐의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미도>, <공공의 적> 시리즈, 최근작 <이끼>까지도.


안시환 평론가가 '전영객잔'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해버렸으므로,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그저 나름의 생각을 조금  더 붙여본다. <글러브>는 따뜻한 감동스토리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걸까..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위의 공동체주의 같은 부분들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강우석이 그려왔던 세계들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무서운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물어뜯는 무서운 사회이다. <실미도>나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의 적>의 아주 차갑거나, 아주 뜨거운 지옥의 세계, 그리고 <이끼>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글러브>는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선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의 분신같은 캐릭터인 김상남(정재영)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에게 주자가 무릎을 아작내겠다(?)라는 기세로 달려들라고 가르치는 부분 같은 것. 김상남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김상남에게 야구는 이겨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기는가는 그에게 그렇게 크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하게도, 왜 이겨야하는가, 혹은 이기는 것이 왜 필요한가는 아주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못된다(즉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는 사실). 아니면 다른 부분,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성심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라고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음악과 편집의 효과로 김상남이 매우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처리되지만, 나는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저것이 옳은 것인가. 약자를 동정하는 것, 약자를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될 일인가.

물론 이 장면은 여러 효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마치 이들을 놀리듯이 성의없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이 장면이 처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배제하고 보면, 이 장면은 확실히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지만, 약자를 조금이나마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심의 선수들은 청각장애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를 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점이라고 말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고.

강우석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손을 든다. 김상남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비장애인의 세계, 이들에게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라는 나교사(유선)의 시각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혀서 가슴 속 울분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기도 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의 무릎을 날려버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김상남은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석 감독의 태도는 다른 몇몇 곁가지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상남 본인과 관련된 부분들. 김상남이 야구계를 떠나게 된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러 사고를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야구계에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즉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한국야구의 엄청난 스타였다면 그가 버려졌을까. 어떻게든, 그는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김상남의 매니저는 항변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우석의 항변이기도 하면서 그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퇴물이 되면 버려지는 것,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길러야 한다. 마찬가지.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 세계에 뛰어들어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강우석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인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그런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야. 이 세계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 그러니 그저 중요한 것은 네가 강해지는 것 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것 뿐이야.

그러므로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일종의 '희망'에 의문이 생긴다. 그 희망은 어떻게든 이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투에 의해서밖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인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시스템으로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에 의지해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각 개인의 처절한 고투와 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안시환의 지적대로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이다. 대표적인 장면. 투수인 명재의 어머니는 명재가 성심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장애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재에게 항변한다. 너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 수 있어. 걔네들과 달라. 이렇게 말하는 명재의 어머니와 강우석 감독의 논리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장애인을 점차 비장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영화는 이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는다. 즉 이상하게도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 어머니에게는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그것은 강우석 감독이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만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강우석의 '희망'에 대한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을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의 세계는 여전하구나. 그 세계는 가장 아이러니컬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가 주어지는 세계다. 혹은 승리했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여전한 '그 세계'다.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예를 들어 <실미도>의 그들에게는 어떠한 마지막이 결국 주어졌는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끼>의 류해국은 어떤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세계에서 최소한(이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한다. 그들이 힘을 길렀을 때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의 박수는 결코 그들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궁금해진다. 시스템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스템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채 벌어지는 별개의 사투들, 유리된 희망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덧.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글이 (조금은) 길어졌다. 그러나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아무튼 강우석 감독은 스트레이트하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른 부분들까지 너무 스트레이트한 것이 (꽤나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트레이트한 것은 때로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은 거의 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야기에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즉,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던진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의 단점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2011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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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을 기대하며

The Book | 2011. 1. 26. 22:36 | Posted by 맥거핀.


진보집권플랜:오연호가묻고조국이답하다다시불꽃을피우기위한신명프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각국정치 > 한국정치일반
지은이 조국 (오마이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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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때때로, 아니 의외로 꽤나 자주,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술자리에서건 어디에서건, 많은 경우 그것은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성있는 논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것은 어떠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라는 말에 이르면, 논쟁은 이미 김이 빠져 버리고 만다. 뭐..그걸 내가 꼭 신경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정치인들이 열심히 생각해야지.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런 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진보집권플랜>을 읽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는 MB정부의 실책들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주를 이루겠지, 그리고 말미에는 그래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논의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줄거리는 내가 생각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오연호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조국과 문답을 벌인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진보가 만들어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사회 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의 크게 4가지 부분에서 앞으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진보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진보 세력이 실제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짜야하는지, 실제의 인물들과 조직들을 거론해가며 논의를 펼치고 있다.  즉 이 책의 제목인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플랜'이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플랜'이 아닌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디자인)'이라는 측면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이라는 말보다는 '정의'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단, 물론 이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反 MB'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좋은 세상은 '反 MB'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좋은 세상을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것인가라는 디자인이, 플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가 흔히 공격을 받는 지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진보는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만,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되면 좋기야 한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현재의 실정들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들의 상당수는 정책의지만 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일정 부분에서는 기존에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즉 조국 교수의 말들은 과거에 무게중심이 놓여있다기 보다는 명백히 현실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다. 먼저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소위 '진보 정권'(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동안에 이루어진 몇몇의 실정(失政)들에 의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미 FTA 문제,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문제, 카드 대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등. 물론 몇몇 말들을 첨언할 수 있다. 먼저 조국 교수가 사실 이에 대한 반성을 할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실정인지 아닌지의 문제도 여전히 일종의 진행선상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진보 세력의 연합에 있어서 하나의 무게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단적인 질문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민주당 정부를 진보 세력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답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짜여진 정치지형에서 '反 MB'의 구도에 주목하면 민주당을 넣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조국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사실 '反 MB'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이 아닌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첨언하고 싶다. 하나는 전체 논의의 틀을 '진보'가 아닌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조국 교수의 단적인 선택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책의 전체 논의가 너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다(오연호 기자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이외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민노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과의 차별성의 문제, 진보신당의 비유연성 등등.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같이 그려나가야 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려면 그 좋은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한 연대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현재 진보 진영의 각 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들의 '다른 점' 그리고 연대가 어려운 점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깎아 나가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감춘 연대는 언젠가 깨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좋은 세상도 좋은 세상이지만, 그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만 자꾸 보이는 탓이다. 오연호도 뒤의 에필로그에서 말했지만,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국 교수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 진영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조건들에 부합하기로는 조국 교수만한 인물도 몇 없다.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면도 그렇거니와 (약간 농담을 섞자면) 그의 외모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꼭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치에 있어 겉보기의 중요성은 한나라당의 모 의원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은 조국 교수의 전체적인 틀을 딱히 가늠하기가 주저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의 중에는 우리나라의 아직 수준으로는 이 정도, 더 나아가고 싶지만 이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의 현 지점에 비추어 긍정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실제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정도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그에게 그가 말한 세상의 조건들이 일정정도 성립되면,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그의 앞날이 궁금할 밖에. 책의 말미에 그는 '폴리페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폴리페서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하긴, 누구에게나 정치 행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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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푸코인간의본성을말하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사상 > 사회사상일반
지은이 노엄 촘스키 (시대의창,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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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라는 이 책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미셸 푸코와 노엄 촘스키, 두 사상가의 TV토론을 기본 축으로, 인간성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토론의 사회자 폰스 엘더르스는 이들 두 사람을 소개하며 흥미로운 비유를 한다. 그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분을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보고 두 사람이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결국 동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보니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어떤 하나의 목표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두 사람이 뚫는 터널이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두 사람이 하나의 산을 서로 반대편에서 오르고 있다면 두 사람은 과연 정상에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인간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먼저 벌어진다. 뒤의 '옮긴이의 말'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촘스키는 '인간성'이라는 어떠한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또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방식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주전공인 언어철학의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는 어떠한 문명의 어떠한 어린이라도 언어를 배울 때에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는 도식 체계(schematism)를 가지고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도식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인간성의 개념은 미심쩍은 것이다. 푸코에게 인간성은 어떤 시대상과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의 틀이 반영된 인식론적 지표에 불과하다. 즉 인간성은 어떤 하나의 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며, 매우 가변적인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여 말한다면 촘스키는 관념론적 입장에 서 있으며, 푸코는 경험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내 주전공인 교육학 식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촘스키는 객관주의적 입장에 서 있고, 푸코는 구성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은 그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충돌되지만, 예를 들어 다음의 부분만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촘스키는 어떤 실체적인 정의에 입각한 긍정적인 미래 사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개혁가나 혁명가는 그 정당성에 입각하여(즉,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혁명이나 투쟁을 행한다고 보았다. 반면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은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혁가나 혁명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즉 권력을 잡기 위해 혁명이나 개혁을 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푸코는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선다"라고까지 말한다. 반면 촘스키는 인간성의 내부에 절대적인 기반이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푸코: 하지만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하는 목표가 더 큰 정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현재의 지배 계급을 축출하고 스스로 집권하게 되면 모든 계급의 권력을 억누르려 들 겁니다.
촘스키: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정당화라는 거지요.
푸코: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촘스키: 하지만 정당화는 언제나 정의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된 결과가 정당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어야 정당화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주의자든 누구든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잡을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 만약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결과라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1장. 인간의 본성_정의와 권력 中 (p.79)

이 부분은 이 토론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극명한 지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숙고해 볼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간에 계급투쟁은 정의의 문제라기 보다는 권력의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촘스키는 계급투쟁이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해도,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으로 주장되어야(즉,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인간성 내부에 있는 정의의 관점과 부합하여야) 정당화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푸코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어떤 계급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한 계급의 지배가 되고, 각 개인이 그것에 영속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의 관점에서는 계급투쟁이란 감시의 주체가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목자권력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5장과 6장을 보면). 반면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어떤 계급투쟁이 진정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그 계급투쟁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집권은 긍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정의란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지는 것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칠게라도 다음의 몇 가지를 이에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진보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기 때문인가. 혹은 그것이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 혹은 좋은 사회를 말할 때의 그 좋은 사회란 어떠한 형태의 사회인가. 그 집권한 세력이 내가 원하는 사회와 다른 모습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푸코 식대로 좋은 사회란 것은 어떤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어떠한 지배 세력이든 감시와 국가이성을 가지고 개인을 옭아맬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 <진보집권플랜> - 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보가 집권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함인가. 우리는 그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진보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모습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푸코가 암시하는 대로 진보의 집권이란 환상에 불과한가. 혹 그것이 환상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너무 1장의 두 사람의 TV토론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다른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2장은 촘스키의 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촘스키와 프랑스 언어학자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촘스키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비판을 허용하지만, 경제적 모순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모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촘스키와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계속 이어지는데 촘스키의 언어철학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1장에서 이루어졌던 푸코와의 대담을 요약하여 촘스키 자신이 정리하고 있다. 4장은 1976년 이탈리아에서 폰타나와 파스퀴노에 의해 이루어진 푸코의 대담이며, 담론의 지배(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 감시와 억압 등의 푸코의 개념들을 푸코 자신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푸코는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를 의미하는 국지적 지식인과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담지하는 저술가로서의 보편적 지식인을 구별하며, 진리와 관련된 이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5장은 1978년 푸코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으로 그는 이 강연에서 원시 기독교가 목자(牧者)권력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 기원 및 방식과 이러한 목자권력이 그리스 사상과 이질적인 것임을 밝히며, 이러한 목자권력 체제가 현재의 국가이성과 단속 이론(경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푸코의 간단한 성명으로 이 성명에서 그는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권리, 그리고 그러한 권리에 기반한 개인들의 연대를 주창한다.

다른 부분들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조금은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촘스키의 여러 저술들을 보면서 그의 언어철학에 대한 생각들과 정치에 대한 발언들이 어떻게 연관될까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바탕 생각들이 그의 언어학이나 정치적 저술 모두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언어학 역시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촘스키와 푸코의 사상에 담긴 기본의 밑받침을 살펴볼 수 있는 대략적인 개론서의 역할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이 충돌하는 지점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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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 정성일

Ending Credit | 2011. 1. 11. 22:36 | Posted by 맥거핀.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들어있지만, 스포일러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중의 하나지만, 이 장면은 낯설어 보인다. 낯설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공간과 시간, 그 자체이다. 먼저 공간의 문제. 이 장면은 피사체를 아주 가깝게 당겨 찍고 있으며, 렌즈의 사용으로 소녀와 소녀 뒤의 공간은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은, 소녀 뒤의 배경이다. 아무도 없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으세요? 소녀가 앉은 햄버거집에는 아무도 손님이 없다. 그리고 저 뒤에서 종업원들만 바쁘게 움직인다. 글쎄. 십년을 넘게 패스트푸드점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이지만, 낯설게 왜곡되어 있는 이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시간. 당신이 소녀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용을 영화에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소녀가 햄버거를 물어뜯는 단 하나의 컷만 집어넣을 수 있다. 또는 햄버거집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부감숏으로 보여주는 컷 뒤에, 바로 소녀가 휴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즉 굳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또는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6개의 쇼트로 나누어- 정성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6개의 쇼트를 나눈 어떤 영화를 말하며, 왜 아무도 그 장면의 이상함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장면의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일은 소녀가 햄버거의 종이껍데기를 벗기고, 햄버거를 꾸역꾸역 다 먹기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있다. 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시간. 이 장면의 의미는 아마도, 소녀는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고 긴 시간들을.


그러므로 이 영화 <카페 느와르>의 시작부분에 관객과 맞닥뜨리는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일종의 정성일 식 선전포고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 두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공간의 문제부터. 이 영화는 많이 알려진 대로,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일단 먼저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서울은 사대문 안의 공간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옛날 지도를 삽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도 하고, 굳이 그 지도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몇 년간 살아온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빌딩숲으로 도배되어 버린 강남의 복제된 세계는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영화 속 남산타워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남산타워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디서나 우리를 굽어보는 남산타워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한 장면. 영수(신하균)와 관계를 맺은 미연(문정희)의 남편(이성민)은 차창 밖으로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본 후 조금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고는 운전대를 꺾는다. 여기에 첨언할 수 있는 것. 남산타워는 1969년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굳건하던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다는 사소한 사실.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방법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청계천 - 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고 썼던데,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화 속 청계천은 위험한 공간으로 보여짐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다리 아래의 청계천은 선화(정유미)가 이상한 남자에게 쫓김을 당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복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등불을 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에 흐르는 청계천의 트래킹 숏으로도 말해진다. 이것은 통상적인 청계천의 역방향 트래킹이기도 하려니와, 이 장면에서 청계천 다리 아래로 끝끝내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청계천 위의 여러 오래된 상점과 건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이 때의 카메라는 청계천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된다면,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영화 속에서 청계천이 등장할 때 내뱉어지는 첫 대사는 무려 "나쁜 새끼"이다. (물론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다른 미연(김혜나)이 영수에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욱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시간은 상당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장면은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장면일 것이다. 영수가 망치를 내려치려 할 때 멈춰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층계참에 멈춰선 아이들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동시에 TV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멈춰버린 것 같으나, 사실은 멈추지 않은 시간,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영수의 주관적인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속에서 미연(문정희)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영수에게 전하는 또다른 미연(김혜나). 그러나 우리는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미연이 멀쩡하게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글쎄.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여러 개월이 지난 것으로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라져 버린 여러 개월의 시간들 - 그것 역시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장면은 어떨까. 청계천의 24시간을 빠르게 돌려서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날림으로 지어진 청계천.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물론 영화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시간들은 영수가 사경을 헤매는 며칠이다. 이 며칠은 다시 현실의 시간들과 대응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이다(이 시작은 흑백으로 시작하여, 칼라로 돌아왔다가 다시 흑백으로 끝난다). 영수는 사경 속에서 크리스마스날 선화를 만나고(그는 거기에서 동방박사들을 본다), 동지(冬至)에 선화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하며(밤이 가장 긴 날), 그것을 이룬 후에 결국 숨을 거둔다. 그리고 2009년이 오고, 보신각에서 KBS가 숨긴 사운드를 이 영화는 복원하여 보여준다. 즉 2009년을 상징하는 이 장면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이것은 현실의 시간이라는 말이며,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시간과 이 시간을 대응하여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 시간들을 현실의 시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정성일은 다른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영수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즉 그는 아마도 가능했다면, 이 며칠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관객은 3시간 18분을 앉아있는 것조차 거의 임사체험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현실의 시간과 그대로 대응함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동진 씨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다른 어떤 것들로 물화(物化)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들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숨어들어가 있지 않고, 앞에 툭 튀어 나와 자꾸만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자주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거의 시간과 공간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때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백야>에서 나온 대사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19세기에 쓰여진 말들을 21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내뱉을 때의 이 시간의 교호작용들. 이것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리듬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리듬은 때로 영화의 장면들이 거의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런 영화의 리듬은 이 영화가 다른 수많은 영화들의 일종의 메타 텍스트가 되어버린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에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올드보이> 등등의 여러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격자처럼 수놓아져 있다(정성일 감독은 시네마톡에서 혹시 이 영화의 DVD를 발매하게 되면, 영화의 중간에 영향을 받은 장면들의 본래의 영화 제목과 그 장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부가기능을 넣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많은 영화들의 특정의 장면들, 혹은 특정의 느낌을 이 영화에서 살려내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리듬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나름의 리듬이 있고, 리듬을 제거한 그 장면이란 이미 '그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만이 강조되고, 스토리와 리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대신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간과 공간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장면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햄버거를 먹게 하는가. 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고 있는가. 해답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녀 뱃속의 아기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신하균의 죽음을 어떻게든 유예시키려는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은 정성일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예를 들어 다음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할 때 실제 죽이지는 않지만, 피 대신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와인, 혹은 미연의 얼굴에 뿌려지는 붉은 피와 같은 것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영수의 죽음이 유예되어야 하지만, 그가 끝내 죽어야 하는 이유. 청계천에서 영수를 극도로 증오한 후, 차에 치일 뻔한 다른 미연(김혜나)의 모습.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를 예수의 수난극에서 묻는 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대하는 정성일의 태도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이다.

...........................................

몇 가지 잡설, 또는 의문을 덧붙인다.

1.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에서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하는 대로, 누구보다도 가장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인 것처럼 보여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대비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남성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지 못하다. 남성들은 청계천에서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따라가거나, 동물원에서 쓸데없이 말을 걸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거나(이 장면은 또한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은근슬쩍 담고 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나간 사건을 한탄하거나, 아니면..딸을 욕망한다. 반면, 여성들은 대체로 긍정적인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연대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미연의 딸과 친구의 대화, 그리고 은하(요조)와 미연(김혜나)의 멋진 오토바이 터널 씬,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소녀들의 연대.

2.
이 영화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연의 남편이 한 때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장면. 변절한 사회주의자, 또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거세된 사회주의자는 때로 어떤 것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박쥐>를 오마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박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영화니까.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신하균 때문이다. <박쥐>에서 수장된 후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하균은 이 영화에서도 물에 빠지고 나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신하균이 물에 젖은 몸으로 서점을 돌아다닐때 나오는 그 음악과 그 장면의 숨막히는 공포감, 그리고 '카페느와르'라는 제목이 나타날 때의 그 압박감은 압도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견뎌야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3시간 18분의 물리성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정말 무섭다. 

4.
이 영화의 텍스트의 활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종종 소설의 텍스트가 손글씨로 등장하는데, 이 때 지속적으로 사운드가 텍스트와 불일치한다. 즉, 목소리는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음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유일하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은 마지막 한 번 뿐이다). 동시에 텍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은 그저 이해 없이,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는 안된다. 마치 이는 이 텍스트를 절대 읽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글씨를 그저 모양만으로만, 고유의 느낌으로만 이해하라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미연(김혜나)이 다른 미연(문정희)의 남편에게 보내는 육성 편지는 화면을 암전해버림으로써 주목하여 들으라는 듯이 느껴지는 반면에, 이를 이렇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좋은 반응들과 함께, 예상대로 개봉 후 몇몇 신랄한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가 물론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편으로 정성일의 위치에서 비롯된 문제가 개입된 것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정성일이 잘나가는 영화평론가이자, 이미 일종의 권력이 된 것도 그 하나의 이유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말실수 때문인가. 그는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영화에 별점 5개 만점 중 몇 개를 주겠는가라는 질문에 5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것이 왜 공격받아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리어 자신의 영화에 3개나 4개를 주는 감독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그것을 잘 알면서 5개 짜리 영화를 만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가장 좋다(물론 나도 그렇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일기조차 스스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빈정을 담아 말했다. 정성일 씨가 어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고. 글쎄. 자신만의 방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굳이 그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을까. 방의 보호벽이 없는 그 세계에 굳이 나와 이전투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정성일은 시네마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 것이 뻔하지만, 이 영화는 나와 영화적 피를 나눈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방에 들어오라고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만의 영화들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영화에는 있다. 선화가 택한 그 남자는 바로 앞에서 영수와 미연이 본 영화 속의 남자, <극장전>의 김상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성일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네마톡에서 말했다. "통상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는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극장전>을 삽입할 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즉,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 2011년 1월,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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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 나홍진

Ending Credit | 2011. 1. 4. 16:49 | Posted by 맥거핀.





(<황해>, <추격자>, <부당거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본 이후에 질문이 넘쳐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영화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류의 질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은 차치해 두고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객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로서 어떤 허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실 이런 류의 상당수 이야기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의 기본축을 가지고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 축의 빈틈을 이 영화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메운다. 즉 이야기의 중간에 특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앞 뒤의 이야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혼재시키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짐짓 복잡한 척 한다.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고, 그 반면에 인물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빈 틈들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관객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것은 분명 최근의 경향들이다. 그런데 이 경향에는 한편으로는 관객과 이 영화들의 어떤 '결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요즘의 관객들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본인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전체적으로 숨 고르며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식상하다' 여기고, 짐짓 복잡한 체 하는 영화들을, 사실은 거의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앞 뒤를 툭 잘라 버리고, 이야기의 결락들을 일부러 내비치는 영화들이 좋은 이야기들일까. 관객과 필요하지 않은 두뇌 게임을 벌이고, 결국에는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관을 나선 후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일까. 맥락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성일 씨도 트위터에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짧은 멘션을 남겼다. "지난 일년 동안 본 한국영화의 특징은 장르 불문하고 <본> 시리즈의 아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이 눈을 홀리기는 한다. 특징은 보고나면 뭐가 뭔지 알수가 없다는 점이다." 

<황해>를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황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황해 결말', '황해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황해>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황해>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바로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달았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알았건 간에)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치정극임을, 아주 작은 것들이 확대되어 결국 이 같은 결말을 낳았음을, 구남(하정우)의 사투는 아무 것도 다시 황해를 넘어 가져오지 못했음을 말이다. 2시간 30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이 황량한 결말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빈 껍데기들. 흘러넘치는 피와 사라져버린 육체들.

특히 아내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 결말은 조금은 이상해보인다. 구남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의 잉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결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씨네 21>의 안시환의 평(no. 786 전영객잔)에서는 이를 구남에 대한 감독 나홍진의 최대한의 배려라 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은 구남이 절대 알 수 없는, 즉 구남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이며, 구남이 혹시 그것을 바랬다고 해도, 그것은 구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결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아내의 귀환은 구남이 죽어 황해로 던져진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유골함과 같이 말이다. 이 씁쓸한 결말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사실 이 장면은 명백하게도 관객에게만 보여지기 위한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구남은 몰랐지만, 관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된 채로 영화관을 나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결말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거의 다른 장면들과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다. 즉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구남에게는 혹시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은 가혹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남이 애당초 면가(김윤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가혹함 속으로 이 결말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즉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당혹함의 늪으로, 가혹함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부당거래>에서 살인범 이동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밝혀지던 장면과도 유사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장면 역시도,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가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관객에 대한 가학(苛虐)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마지막 장면들은 구남에게 이어져 있던 관객의 심리적 정서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기능을 한다. 즉 관객은 결론적으로는 아무 것에도 동의하지 못한채로 황량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점점 구남의 처절한 사투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힘겨운 일이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에는 구남의 사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남이 목숨이나마 부지해 살아돌아가는 것이며, 아내의 유골이라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남을 황해에 수장시키고, 아내를 살려 돌아오게 함으로써, 구남의 사투는 의미가 없어진다(즉 구남의 사투와 별개로 아내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결말은 확실히 관객에게 가학적이다. 이 가학적인 결말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가학성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에 쌓은 정서를 후반부에 가서는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가 무너진다기 보다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초중반부에 쌓은 그 정서란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 남자의 비극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영화의 4개의 챕터 제목을 연결하면 된다. '조선족' '택시운전수'는 '황해'를 건너 '살인자'가 된다(그러나 사실 이 제목의 기능은 관객의 이질감을 높여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목 밑의 그 중국어 간체자 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 후부터 영화는 표정을 바꾸어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고, 텅 비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정서를 없애고, 피와 뼈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오로지 살인 장면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장면들이 가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동진의 말대로 장르적 제스처가 제거되어 있는 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예를 들어 구남이 김승현을 죽이는 시뮬레이션을 실제의 장면처럼 만들어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거의 숨돌림 틈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를 하게 만든다. <추격자>에도 몇몇 가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황해>보다 심리적 타격이 적은 것은, 호흡을 위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에서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은 김윤석과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인데, 이 <황해>에는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홍진 감독이 가지는 특유의 어떤 세련함이다. <황해> 및 <추격자>의 액션 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기 보다는, 잘 세공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며, 뜨겁다기 보다는 차가운 인상을 준다. 즉 이 장면들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딘가모르게 매끈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떤 예술가의 활동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까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장면들을 위해 나머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추격자>의 '개미슈퍼' 씬을 떠올리게 한다. 그 씬은 사실 그렇게까지 표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홍진은 기꺼이 그 장면을 스토리의 결함이 생겨나는 데도 집어넣었고, 그런 방식으로(냉소하는 지영민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느리게 뿌려지는 피들) 찍었다. 그 장면에 대한 허문영의 글을 조금 길긴 하지만 인용한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중략)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건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중략)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다섯 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중략)

실제로 <씨네 21>이 개최한 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 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p.34-36. 부분발췌.


가학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감(無感)해지는 것이다. 즉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그 감각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예를 들어 그 하나의 전조. <황해>에서 구남이 어리숙한 조선족들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조선족 사내가 구남의 기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떨어져 죽는 씬이 있다. 그 남자가 떨어질 때의 관객의 짧은 웃음과 떨어진 그 남자를 보여줄 때 관객에게서 흘러나오는 '어'하는 소리. 그 '어'하는 소리는 왠지 TV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이 안좋은 장면이 나올 때 내는 즉각적이고도, 만들어진 놀람과 닮았다. 그 짧은 웃음과 짧고도 기계적인 놀람. 우리들은 그렇게 연이은 죽음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탄성을 보내고, 웃기도 하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종내에는 무감해진다. 그 무감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가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신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 30분 동안 감독의 가학에 시달리게 하고, 종내에는 가학에 무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불러야 할까. 글의 처음에 말한,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질문 참,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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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시작 부분에 구남의 나레이션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병이 돌아 개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 죽여, 결국 사람들이 개들을 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땅에서 다시 꺼내 먹었다.' 그것은 <황해>의 내용을 줄여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미친 개들의 먹이가 되고(이 영화 <황해>에도 개의 먹이가 되는 인간이 있다), 개는 다시 (개에 물려서, 혹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인간들의 먹이가 된다. 미쳐버린 인간들이란, 곧 괴물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그러나 이 나레이션은 이 <황해>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왠지 요즘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이야기의 다른 무엇보다도 '무엇으로 인간을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칼(<아저씨>)이기도 하고, 총(<무적자>)이기도 하며, 초능력(<초능력자>)이기도 하고, 된장(<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장치(<악마를 보았다>)이기도 하며, 소뼈다귀(<황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을 죽이는 장치가 기발하게 진화하는 것의 반대편에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제 아까의 질문에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답을 보자. 아까의 질문.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정답: '다른 괴물'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무시무시한 대답.

2010년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대답을 해왔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부당거래>, <파괴된 사나이>, <무적자>, <초능력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황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동적으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괴물이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의 어떤 징후들일까. 2010년 풍경들은 이미 괴물이 된 자들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괴물이 되어라. 괴물이 되어서 다른 괴물들을 짓밟아라. 그 밑의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다. 이것은 2010년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하였으며(<하하하>),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으며(<하녀>), 또 괴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시를 썼다(<시>).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덧.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밑의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다. 2010년을 덮은 어떤 한국영화의 징후들에 대해.



- 2011년 1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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