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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메모들

Interlude | 2011. 6. 14. 01:23 | Posted by 맥거핀.


(<적과의 동침>, <무산일기>에 대한 약간의 내용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광고에서 늘 등장하는 것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 지금까지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늘상 그렇듯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글쎄. 그 잃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듯도 하지만, 아무튼 간에 이 작은 기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찌되었던 간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 경우라면 그 안의 여러 복잡한 미로들 중에서 가장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읽는 것과 쓰는 것에 관련된 것인데, 팟캐스트와 다양한 메모 기능이 그것이다. 먼저 팟캐스트를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처음에 열심히 무료 어플들을 찾아 다니다가 부실한 업데이트 기능들에 실망하고, 결국 정착하게 된 것은 유료 어플인 Beyond Podcast인데, 이 작은 어플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동시대의 생각들을 매일 충실하게 배달해준다. 더구나 1992년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잘 때 들을 수 있게도 해준다.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달콤한 보상책들.

또 하나는 메모 기능이다. 지금 이 짤막한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것도 어지럽게 쌓여 있는 메모들을 본 이후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끄적끄적 남겨놓았던 메모들. 몇 주 전에 남겨놓았던, 이제는 왜 남겨놓았는지 이유가 알 수 없어져 버린 메모들. 아마도 그 때 그 메모들에 조금 더 쓸만한 옷들을 입혔더라면 조금은 더 읽을만한 리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무엇인가를 쓸 만한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있더라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버려질 이 메모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뭔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 물론 이것은 앙상한 기록들, 지연된 생각들에 불과하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앙상한 나무와 같은 것들이지만.

적과의 동침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2011년 4월)

이 영화가 기대 이하의 관심을 받고, 쉽게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사뭇 비슷해보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영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이 결국 어떤 판타지의 세계(예를 들어 수류탄이 폭발하여 팝콘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말해주듯이)로 달려갔다면, 이 영화는 그 보다는 훨씬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국 결말의 처리라고 할 수 있는데, <웰컴 투 동막골>은 여전히 판타지의 세계에 머물러, 남한군과 북한군과 유엔군 몇 명이 힘을 합쳐, 어떤 제3의 거대한 적에 대항한다는 식의 결말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그보다는 훨씬 비극적이며, 더욱 심각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그 질문은 결국 이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라는 점이다. 그들을 죽게 만드는 그 '명령'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 명령들(이들의 죽음에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들'이 있다)의 기원에는 국가가 있으며, 우리는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기계, 혹은 살인마를 마주하게 된다. 그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마는 당시 우리나라 곳곳을 활보하며, 때로는 유엔군의 탈을 쓰고, 혹은 인민군의 탈을 쓰고, 혹은 국군의 탈을 쓰고, 비슷한 유형의 범죄들을 자행해왔다. (이 영화 <적과의 동침>보다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디딘 버전으로는 <작은 연못>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우리나라 영화 제작자들의 '종합선물세트를 관객들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즉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지젝의 신봉자들도 아닐진대, 같은 이야기를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중간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들의 상당 부분은 거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무리 그 개인기가 출중하더라도 사족인 듯이 느껴진다. 어떤 상황적인 페이소스를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유머들은 생각해 볼만한 질문들을 거의 잡아먹는다. 메시지도 들어 있고, 유머도 들어 있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들어 있는 이 종합 과자선물세트는 관객을 먹다가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아쉬운 영화.

인사이드 잡 (CGV 대학로, 2011년 5월)

재앙은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부터였다. 이 <인사이드 잡>이라는 영화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 내부'란 지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내부이다. 이 영화는 그 내부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지극히 건조한 어조로 미세하게 헤집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어조가 건조하다고 해서, 내용마저 건조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식의 발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도덕적인 책임감을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정치적인 메시지를 마지막에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을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내부'에서 벌이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또다른 영화가 담배회사의 내부고발자를 다루었듯이, 이 영화는 그 스스로가 '내부고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여러 다양한 자료를 친절하게, 흥미롭게, 순차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이해시킨다. 아마 경제에 거의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혹은 아무리 신문기사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내부에 들어있던 것들에 대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결국 집어내는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아니라,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친절한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다른 것들에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금융규제 완화의 시작에 와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나 은행들의 통합 정책을 볼 때에 어떤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로스가 영화에서 명쾌하게 말하였듯이 유조선에서는 기름을 여러 칸에 나눠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파도에 배가 휩쓸려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칸의 벽들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오로지 더 많은 기름을 실으려는 욕심 때문에. 더 많은 이득을 보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든 생각인데, 이렇게 인터뷰 중심의, 그리고 영화 자체의 영문 자막이 많은 영화의 경우 더빙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무리 맷 데이먼의 나레이션이라도 말이다. 영화 초반에는 너무 많은 자막으로 인해 조금은 멍해지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차리고 볼 것. 곧 흥
미진진해진다.

무산일기  (인디플러스, 2011년 5월)

탈북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다. 2등민, 계급사회. 125로 시작되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우리사회의 2등민이라는 낙인이다. 물론 2등민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경제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계급이 갖추어져 있으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 아래부분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급은 자꾸만 그 계급의 단계수를 증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힌트를 영화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숙영은 탈북자 승철과 어떻게든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그것의 이유는 숙영과 승철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숙영이, 승철이 처해있는 곳으로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승철과 경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철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승철과 자신은 다르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그 가장 밑바닥에 어떤 불길한 자화상으로 승철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자화상은 경철과 숙영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어쩌면 가장 미스테리한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극단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리얼리즘이 가장 망가지는 순간은 아마도 그 자신이 '내가 리얼리즘이다'라고 나설 때일 것이다. 어떤 것이 리얼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그 순간 가장 리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황해>의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마지막에도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이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과 거리가 멀, 어쩌면 승철의 꿈인것처럼도 생각되는 승철이 교회에 가서 마음을 조금 연 숙영과 같이 성가를 부르는 장면과 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이다. 희망을 보여줄 듯 하다가, 다시 그 어떤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 이 마지막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또는 절망을) 애써 찾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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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복잡한 6월이다. 잃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6월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로 인해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여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꼭 스마트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영화에서 얻은 교훈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잃어가고 있는 것들, 자꾸 말로 되뇌어지는 속에서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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