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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I 기록들 1

Interlude | 2012. 9. 10. 16:22 | Posted by 맥거핀.

무인지대 (No Man's Zone), 후지와라 토시, 2011
동경공원 (Tokyo Koen), 아오야마 신지, 2011



영화는 거의 완전히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쿠시마의 해변을 길고 느리게 패닝하며 시작한다. 거기에 애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시설물들, 그것은 거의 복구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부러진 목재들과 콘크리트들, 여러가지 잡동사니들, 자동차들, 부러진 잔해들, 그리고...그 밑의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를 시체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좀 흥미로운 구조다. 화면은 재앙이 일어난 후 거의 텅빈 후쿠시마를 비추고 있지만, 화면의 현장음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두 가지의 다른 음성이 깔린다. 하나는 감독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어 나레이션이다. 이 영화 <무인지대>의 감독 후지와라 토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이례적으로 영화 시작전 발언을 자청해 관객에게 이 영화를 '이런이런 식으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나레이션은 매우 직접적이고, 좀 많은 편이며, 더구나 중언부언하는 경향마저 있다. 다른 하나는 이 화면을 보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보다보면 이 목소리는 감독이 찍은 이 영상을 뒤늦게 (대피소 같은 곳에서) 보고 있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발언은 "아..저기는 이게 있었는데..", "저것은 누구의 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중간에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나레이션과 맞물려 어떤 효과를 낸다. 나레이션은 말한다. 이것을 어떤 '스펙터클', '파괴의 현장'으로 보지 말 것. 그보다는 그 파괴 전에 있었던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볼 것. 즉 우리는 재난을 대부분 어떤 거대한 파괴, 가공할만한 힘, 거대한 비극의 현장으로만 받아들인다. 아마도 후쿠시마의 해변을 패닝하는 첫 장면을 대부분의 관객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참 쓰나미란 무서운 거구나, 저런 엄청난 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란 게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구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쿠시마의 무인지대의 공간들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오버랩해서 보여주던 감독은 다시 영화의 중반부, 그러니까 굳이 나누자면 1부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처음의 그 패닝 장면을 붙인다. 이것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중간에 우리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완벽한 파괴의 공간, 깡그리 사라져버린 듯한 무의 공간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저긴 뭐가 있던 자리인데, 누군가가 살던 공간인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짧은 패닝의 과정에서, 그 엄청난 잔해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게, 상상하게 된다. 저 자리는 뭐가 있었던 자리 같은데,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2부로(영화 상에서 명확하게 1, 2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넘어가 이타야 같은 후쿠시마 주변지역, 다시 말해서 소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어디에도 갈만한 곳이 없으며, 갑자기 자신의 생활터전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에 담겨 있는 질문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직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무대책한 주장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식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곳에서 만난 한 어민은 그런 주장들이 대부분 말도 안되는 것임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정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조업을 금지했으나, 그 곳에서 불과 몇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도 된다고 허가했고, 이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당연히 우리의 입장에서도)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닷물에 어떤 구획선이 그어져 있지 않음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주장을 인간의 경우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제한되었고, 근방 몇 킬로미터의 주민들에게 모두 소거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타야 같은 곳에서는 살아도 된다? 이것은 산 자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죽은 자에게 물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통제되어 75일 만에 구조와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혹시라도 운이 좋게 살아 있었을 어떤 사람들은 무려 75일 간이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아마 두 가지 정도를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후쿠시마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은 것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혀 콘트롤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의 대응은 거의 무대책에 가까웠고, 그것은 일본 정부가 유달리 무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사고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사고 이후에 이어질 일들도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이 정말 무서운 점은 그것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떤 일을 시작해버린다, 만들어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영화(필름)의 임무 중의 하나는 기록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있었던 일이라는 점을 후세의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레이션에도 나오지만, 거의 후쿠시마와 비견될 정도의 참혹한 재해들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즉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며 때로는 조작된다. 예를 들어 어쩌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실재했었다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몇 개의 희미한 기록필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록은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진다. 하나는 그 기록된 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혹은 기록의 이면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되풀이되지 않게 할 것. 그것을 어떻게든 기록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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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 영화는 기다렸던 아오야마 신지의 <동경공원>. 사실 솔직히 말해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평범하다는 인상이 짙었지만, 사실 아오야마 신지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그의 <헬프리스>,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의 이른바 '가족 3부작'을 보고 가지게 된 것이 전부이고 그의 그 가족 3부작이 워낙 수작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흔한 일본식 청춘물의 외피를 두르고, 그 안의 과육을 보여줄듯 말듯 하다가 결국 안보여주고 끝나는 듯한 느낌인데 전체적으로는 느린 호흡으로 차분히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목에도 있는 '공원'이라는 공간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은 조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공원이란 사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거의 유일하게 출입자격을 묻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출입료를 받는 어떤 빌어먹을 공원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공간들은 사실 제각각의 출입의 자격과 지위를 규정하고 있고,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공원은 거의 유일하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며, 따라서 누구나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료한 할아버지들이 주로 드나드는 탑골공원이나, 실직자들이 공원에 가는 당연한 클리세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원이 무질서의 공간이나, 아무런 규칙도 없는 곳은 아니다. 모든 공원에는 암묵적으로 따라야할 규정들이 있으며, 그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자유롭긴 하나 어느정도 제한된 자유만을 허한다.

아마도 이러한 공원과 같은 것이 하나의 비유로서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중간에 한 남자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마치 이 공원과 같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오야마 신지가 보는 현대 사회가 지향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전작 <새드 배케이션>에 그려졌던 '마미야 월드'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공간, 최소한도의 규칙만 지키면 서로를 보호하며 터치하지 않는 공간으로서의 공원이자 사회의 모습이다. 즉 딱딱한 건물 안에만 있다가 넓은 공원에 가면 모두들 약간은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처럼, 사회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공원은 아니 사회는 그런 다양한 인물을 감싸 안아야만 한다. 영화 <동경공원>은 그런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환자이자 치과의사, 바를 운영하는 게이, 모든 것을 영화로 비유하는 영화광,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의붓남매, 심지어는 죽었는데도 이승에 머물고 있는 유령마저 포함된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해 힘들어하지만, 감독이 결국 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작은 카메라 뿐이다.

즉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들, 이들을 넓은 공원에서 맨눈으로 넓게 보면 좋겠지만,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으면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로 이들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가진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에는 애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드넓은 공원 속에서 모든 인물을 우리는 우리의 맨눈으로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부터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할 것. 작은 카메라는 먼 곳을 찍으라고 발명된 물건이 아니다.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데는 흐려지게 마련.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간다.



- 2012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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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배신긍정의배신바버라에런라이크의워킹푸어생존기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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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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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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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들은 진화중

The Book | 2012. 8. 26. 17:26 | Posted by 맥거핀.
뱀파이어끝나지않은이야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지은이 요아힘 나겔 (예경,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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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뱀파이어라는 것은 왜 탄생되었는가(왜 발명되었는가), 왜 특히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들은 각광받고 있는가, 뱀파이어가 마늘, 햇빛 등에 치명적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뱀파이어는 왜 하필이면 박쥐로 변신하는가, 뱀파이어는 왜 늙지 않는가(도리어 젊어지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그렇게나 마셔대는데, 왜 그렇게 늘상 창백한가. 즉 내 질문은 '뱀파이어의 양상'에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기원'이나 '이유'와 관계된 것인데, 요하임 나겔의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그리 마땅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책은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존재가치에 대해 고찰하는 책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즉 이 책은 문학, 미술, 음악,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에서 나타난 뱀파이어의 여러 다양한 존재양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일종의 '뱀파이어 백과사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 중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을 일별하여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뱀파이어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내 관심은 그런 존재의 양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나 기원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여자 악령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신생아를 잡아먹는 여자악령인 릴리트나 소년들의 피를 갈망하는 라미아,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밤중에 나타나 몰래 동침하는 수쿠부스 등이 그러한 것들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중세의 미신들과 결부하여 점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기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큘라 백작과 같은 남성 흡혈귀가 아니라, 여성형 악령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위협,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이면으로서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제시하는 남성 중심적 세계의 안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뱀에게 유혹당한 이브)을 끊임없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들에게 구원이란 남성들에게보다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남성들에게 복종하여야만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할 필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여성형 악령들의 출현이 에로스나 타나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령들은 괴상하고 혐오스럽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또한 한편으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심리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즉 위험하다고 여겨질수록 그 매혹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묘한 역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성립하게 마련이고(모든 팜므파탈의 그 위험성의 강도와 매력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여성형) 악령들은 극도로 위험해서 매혹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즉 이것에는 성적인 것에 대한 매력(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유혹(타나토스)이 비슷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남성의 경우에만 성립되는 역설은 아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가지는 위험은 최대한 제거되고, 그것의 매력만이 최대한 강조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이 그다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예전보다) 종교가 가지는 구원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고, 현세의 삶이 중시되는 현재에 이르면 죽음의 근처에 머물러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서 뱀파이어의 능력들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뱀파이어들은 거의 슈퍼히어로와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즉 중세에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예를 들어 늙지 않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날 수도 있음 등에서 그 죽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에 들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부러운 슈퍼히어로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피부마저도 창백하고 으스스한 피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에 대한 어떤 각광들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늘과 박쥐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나 성수, 햇빛에 대한 위험은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반면, 마늘이나 박쥐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늘은 그 생경한 맛과 향 때문에, 박쥐는 동굴에서 산다는 특징과 검은 색, 날카로운 이빨 등의 형상이 뱀파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부분보다도 도리어 이 책을 읽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음악과 미술, 영화, 문학 등의 예술작품들은 당대의 습속과 지식,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잉글랜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1897년이라는 당대의 지리학적 관심과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고, 또 이 소설은 흡혈귀라는 비과학적인 사실이 이야기의 원천이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에는 당대의 정신병리학과 범죄학의 최신사실들이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책에 나온 1994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는 20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의 경제호황의 쾌락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아마도 이의 상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뱀파이어 레스타(톰 크루즈)가 모는 빨간색 무스탕 컨버터블일 것이다). 그런만큼 이 책 <뱀파이어,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를 다룬 예술들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그래서 나도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간단한 뱀파이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써본다. 장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뒤를 이은 풍자시트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짧은 리뷰라 뭐 지면이 많이 남기도 하고. (...)

뱀파이어들이 공공연하게 출몰하는 근미래의 우리나라. 뱀파이어들의 자잘한 범죄들(이 시기의 뱀파이어들이 저지르는 것은 절도 등의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인간의 피를 빨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혈색을 좋게 만드는 피 성형, 각종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있는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은 탓으로 변해버려, 뱀파이어들이 마시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특수처리된 정제된 피를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매우 비싸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뱀파이어 진압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무자격 신부들을 용역으로 투입하고, 초강력 마늘탄 등의 사용으로 진압 과정에서 뱀파이어들이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거듭되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마침 이 때 한 진압현장을 다루는 뉴스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어린 소녀 뱀파이어의 모습이 찍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소녀는 스타가 되고, 급기야 소녀의 가족들은 TV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다.  

소녀의 가족은 TV에 출연하여 그간 어렵게 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밝히는데, 쉬운 농장일이라고 찾아갔더니 알고보니 마늘농장이었던 사연, 나무막대기 두 개만 붙이면 되는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일하러 갔더니 십자가 제조 공장이었던 사연, 너희들은 원래 밤에만 일하는 종족이니 야간알바비를 주간알바비로 책정하여 지급하겠다는 악덕 편의점주의 이야기 등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또 한편으로 이들 가족이 시킨 피자에 몰래 마늘 소스를 뿌리고, "뱀파이어가 마늘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며 변명한 피자가게 알바녀가 '뱀파이어 마늘녀'로 불리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여론이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정부는 곧 태도를 바꿔서 이것도 다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뱀파이어들에 대한 진압을 멈추고 뱀파이어를 법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관심도 한 때 뿐이고, 이들 뱀파이어 가족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곧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되는데, 정부는 '뱀파이어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뱀파이어들에게만 정제된 피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뱀파이어들은 멸종 위기에 몰린 자신들을 '뱀파이어 특별 보호법'으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며 묵살당한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길거리에 나와 각종 알바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급기야는 정제된 피가 가득있다는 트럭을 습격하지만, 그 트럭에는 인기가수 싸이코가 '뱀파이어 스타일'이라는 곡을 가지고 '피 흠뻑쇼'라는 공연을 할 때 쓸 가짜 피만 가득 담겨 있었던 일 등의 각종 사건을 겪는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대통령 및 모든 정부 각료들, 국회의원들을 모두 물어 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즉 뱀파이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최후의 계획.

치밀한 계획 끝에 청와대와 국회에 잠입한 뱀파이어들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린다.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대통령의 목에 이빨을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내려는(물론 삼키지 않아야 한다) 뱀파이어 대장과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란 뱀파이어 대장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정부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아...나랏님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를 내뱉으며 긴 탄식을 내뱉는 뱀파이어 대장과 망연자실한 주위의 뱀파이어들을 비추며 시즌 1 마무리.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블랙 메탈, 데쓰 메탈 그룹인 'Cradle of Filth'의 곡 중에서 하나. 책에 어울리도록 그들의 1996년도 앨범 <Vempire Or Dark Faerytales in Phallustein>에서 뽑아봤다.

Cradle of Filth - Queen of Winter, Throned (with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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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력서

The Book | 2012. 7. 24. 23:05 | Posted by 맥거핀.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피터버거의지적모험담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피터 버거 (책세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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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물론 뭔가를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그렇듯 사회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당연하게도 지금도 잘 모른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과는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건 왠지 더 자유분방한 학생들이 가는 과라고 생각했고, 가장 무엇보다도 점수가 모잘랐다. 그래서 사회학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문학 쪽은 원래 잘하는 편이 못되었고, 사학과 같은 쪽은 재미있어 보이나 취직이 잘 안된다 그러고, 심리학 쪽은 취향이 아니고, 경제학이나 경영학 쪽은 평소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뭐 사회학이 괜찮겠네,라고 생각했다. 뭐 잘 모르지만, 사회에 대해서 일단 전반적으로 어느정도 알게되지 않겠어, 나중에 신문방송학 쪽과도 연계해서 공부할 여지도 있을테고. 그래서 점수가 커트라인에 대롱대롱 걸렸지만, 호기있게 원서접수 첫째날 '사회학과'라고 쓰여진 원서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미 첫째날 사회학과는 경쟁률 1이 넘어 있었고,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사회학과'를 벅벅 지우고는 다른 과를 적어넣었다. 아직 1이 넘지 않은 조금은 더 만만해 보이는 과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마지막날 최종 확인한 경쟁률은 사회학과는 그 숫자에서 크게 변동이 없었고, 내가 지원한 과는 6대1이 넘어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인생에서 사회학이 거론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노 사회학자의 유머스러운 지적 모험의 여정이라니. 사회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뭐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서 배우게 되겠지.

그러나 이것도 오판이었다. 일단 이 책에 나온 것만 보자면 사회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저자 피터 버거가 책 중간중간에 늘어놓는 사회학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들이 있다. "사회학자는 어떤 종교적인 현상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현상의 실증적인 양상은 탐구할 수 있다.(p.91)""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보면 사회학의 임무는 어떤 사회현상이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고, 그 현상만을 탐구하되, 다만 그에 대한 적용, 즉 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데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 '인간주의'라는 말이 가지는 허구성을 우리는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 '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은 대체로 어느 특정의 관점을 정당화시키는 수사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모든 대선 후보들이 내미는 '인간 중심'이라는 슬로건 말이다.) 책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는 그의 책 <현실의 사회적 구성>에 나오는 부분들과 구성주의의 영향에 대해 밝히며 자신은 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의 시대정신이나 분위기, 실제로 일어난 경향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음 집필의도를 봐줄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런 사회적 사실들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발견될 수 있는 확고한 현실성을 가진다.(p.126)" 즉,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는 중요한 것은 그의 본래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실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가 사회학자로서 그런 의도(입장)와 사실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도 당연히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가지고(그것이 설혹 '인간적'이라는 모호한 입장이라도), 모든 사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p.281)"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맞는 말은 본인은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잘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일부러 모자를 바꿔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성장의 신화(자본주의)'와 '혁명의 신화(사회주의)'를 모두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동아시아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을 바꿔 '성장의 신화'는 지지하되 '혁명의 신화'는 거부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달리 말해 성장의 신화는 대체로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은 약속을 이행하는 법이 없다.(p.176)" 반박할 수도 있는 주장이나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질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이 동아시아 사회를 정말 면밀히 관찰한 후에 나온 지적인지, 또 하나 성장의 신화가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이 '경험적으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이 과연 사회학자로서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정치적인 주장인 것일까,라는 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는 이것을 사회학적인 연구로 인해 도달한 결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가 가진 그간의 개인적 신념을 보면 그 개인적 신념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과연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로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책에 나온 논거들로는 이는 너무 재빠른 단정이 아닌가. (그가 책에서 사회학 입문 과정에서 암기한다고 말한 유명한 '토머스의 금언'이 떠오른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이 실재한다고 규정하면, 그 때문에 그 상황은 실재하게 된다.')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는 어떤 오해인지도 모르겠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그가 지은 저술을 짧게 요약하고,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 자신의 관계와 그들의 간단한 약력을 늘어놓는 것으로 채워지고, 뭔가 생각이 좀 나온다 싶으면, 그가 재미있다고 주장하는 유머들 혹은 일화들로 모호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유머들은 참 재미가 없다. 그는 심지어 유머에 관련한 책도 저술했으니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그에 따른다면, 우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나이든 사회학자가 내뱉는 유머를 재미있어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책은 피터 버거의 책으로 쓰는 긴 이력서 같다. 책을 통해서 그가 저술한 책의 목록들과 그가 여행한 나라들, 그의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그의 대학 재직이력은 자세히 알게 되지만, 그것 뿐이다. 이력서는 말 그대로 저자의 이력을 말해줄 뿐, 그의 생각까지 말해 주지는 못한다. 즉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지만, 사회학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어떤 한 사람의 이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그것이 어떤 '지적 모험'이라면 더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 모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모험을 할 마음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모험이란 무릇, 여기저기 깨질 각오를 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적도 없고, 그러므로 깨진 적도 없다. 물론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입장이 욕먹을 것은 아니며 중도 보수라는 그의 입장이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다. (보수 반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겠지만.) 다만 자신의 반대입장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계속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것이 사회학에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사회학적 당의를 씌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이 두 가지 관점, 그러니까 정치적인 관점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시종일관 흩트려 놓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과 보스턴과 미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회학자로서 유럽과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그곳의 사태를 보고 있는 것이지, 그가 말한대로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때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 중에 하나는 그가 사회학자이면서도 사회운동에 알레르기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연 운동이나 페미니즘 혹은 대중집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애정을 보내는 자본주의라는 것도 어찌 보면 거대한 사회운동 중의 하나가 아닐까. 즉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회운동과 아닌 사회운동을 구분하여 그것에 애정어린 분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이상으로 비판이 길어진 듯 하다. (날씨와 LG야구 때문이다.) 피터 버거는 자신의 책에 달린 서평을 꼼꼼이 들여다보는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어느 촌구석 인터넷서점에 달린 이 글까지 읽어볼 확률, 그리고 그것을 읽고 어떤 나이든 사회학자가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므로 조금 더 생산적인 얘기로 글을 끝내도록 하자. 사회학을 지망하고자 했으나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체육관 바닥에서 지망하는 과를 바꿔야 했던 사람, 그래서 사회학에 대해 뭔가 알고자 했던 사람, 혹은 최소한 뭔가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비추. 대신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학자라는 지식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혹은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학자인 척하고 싶은 사람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보고서는 된다. 다만, 하나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진짜 학자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짜 학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 대신에 자신의 저술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자신의 뛰어난 동료들과 자신의 훌륭한 박사과정 학생들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하며 나열하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정도면 학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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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의 <아라비안 나이트>

The Book | 2012. 7. 22. 22:28 | Posted by 맥거핀.

잘라라기도하는그손을책과혁명에관한닷새밤의기록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사사키 아타루 (자음과모음,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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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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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 김일란, 홍지유

Ending Credit | 2012. 7. 16. 19:39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것이 일주일도 더 넘었는데, 여전히 몇 개의 단상들이 머리속을 떠돌고 있다. 여전히 주저되지만,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 하다.

1.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 용산참사의 본질이 국가폭력이며, 일종의 '본보기'로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제시되는 몇 개의 근거들이 있다. 이 용산 사건의 경우 다른 시위나 농성의 경우와 다르게 점거 25시간만에 경찰, 그것도 특공대의 투입이 실시되었고, 이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나중에 경찰의 주장대로라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화염병을 사용하는 등의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특공대 투입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점거 현장에 화염병이 등장하기 2시간 전에 이미 전화로 특공대의 투입이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러한 폭력을 유도한 정황에 대해서도 영화는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그토록 신속하고 위험한 작전이었음에도, 경찰은 건물에 몇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기는 커녕, 건물의 내부구조도 모르는 상황에서 투입이 결정되고 시행되었다는 점, 즉 건물안 사람들의 안전은 둘째치고, 그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기이한 작전이었다는 점. (이는 이 영화의 제목 '두 개의 문'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의 배경에는 MB의 '불관용 원칙'이 있다. 폭력시위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던 그 이야기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MB 정부는 이 사건을 하나의 본보기로 쓰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부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일종의 '경고'선일 것이다. 즉 원했던 것은 신속한 진압으로 앞으로 이어질 다른 수많은 (재개발 등의) 사례에서 일종의 겁을 주려던 것이지, 수많은 죽음들까지 원했던 것일 리는 없다. 물론 그러한 죽음들을 결코 원치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MB 정부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는 정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가 그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할 경우 정권 유지에 큰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법부의 태도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보여진 대로 결국 중요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사건에 대한 진술들도 한쪽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만약 최소한도의 상식이 있는 사법부라면 백번양보하여, 경찰과 철거민의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떻게 결론이 지어졌는가.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부여되었으며, 당시 경찰 책임자는 그 이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고, 판단을 내려준 사법부는 영전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2.
다만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조금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있다. 먼저 영화의 감독이 새롭게 찍은 어떤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화면들을 재구성하는 이 다큐의 방식에 대해 논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씨네 21> 859호에서 한국 다큐씬에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홍형숙 감독과 김동원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놓고 벌이는 논쟁들도 그러한 부분과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동원 감독은 "기록의 힘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개의 문>은 노력을 안 하고 만든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발가락으로 찍었어도 찍어야 할 장면을 찍었다면 거기서 엄청난 가치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원 감독의 지적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힘이 도리어 거기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화면보다 도리어 화질이 나쁘고 흐릿하고 흔들리는 화면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TV 뉴스를 믿는가, 몰카를 믿는가. 요즘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편집으로 만들어진 몰카에 대해서 단박에 알아차린다. 이거 홍보네.) 이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찍히는 피사체가 이것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촬영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자꾸 일종의 '만들어진 이미지' 그러니까 '거짓에 가까운 이미지'라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의도를 가지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다른 의도로 촬영된 화면(예를 들어 이 영화라면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요즘 관객들의 정보수집의 자세와 더 비슷한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즉 요즘은 어떻게 보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중요한 결정적인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여러 정보의 재배열이다. 즉 최근의 관객들은 하나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열하려 하고, 그 어딘가에 진실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 <두 개의 문>은 그런 관객들의 정보배열 형식을 닮아 있다. 칼라TV, 사자후TV 등 인터넷 매체에서 촬영한 화면, 경찰의 채증 영상, 법정진술, 인터뷰, 재연 화면 등이 어지러이 얽혀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중 어느 하나의 '결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정보의 재배열'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조심할 점 중의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판단의 권한, 정보의 재배열의 권한을 관객에게 넘겨준다는 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화를 봄으로써 정보를 재배열하는 누군가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3.
그보다는 도리어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쪽이다.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이 영화의 어떤 비어있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시사인> 248호에서 김세윤은 이 영화가 다른 여러 다큐들처럼 피해자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간극장'이 아니라 진실을 쫓는 '그것이 알고싶다'라고 말하며 "냉정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범죄의 재구성'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의아한 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형식을 취하기에는 이 영화가 한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몇 가지가 이 사건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영화도 끝내 그것을 찾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라진 3천쪽에 달하는 초동 수사 기록(후반에 부분적으로 나오기는 한다)과 사라진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이 영화는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중요한 순간에 다다라서는 한 불친절한 메시지와 만나게 된다. 'No Signal',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채증 영상. 이는 과연 정말 촬영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주장을 설혹 인정한다고 해도,  이 순간을 알지 못하고도 우리는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씨네 21> 862호에서 정한석이 훌륭한 글로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덧붙일 말은 특별히 없다. 정한석에 따르면, <두 개의 문>이 원했던 것 혹은 그것의 운명은 결국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였다. 이는 정한석이 글에서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다시 재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즉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사건의 경우로 말하자면, 결정적인 증거가 그것을 가졌던 측(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용산에서 국가폭력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를 사법부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된다. 여러 정황 증거들, 그리고 여러 경찰의 증언들이 이 참사가 모두 철거민이 잘못임을 증거하지 않는데, 왜 모든 책임이 철거민들에게만 부여되었는가. 그 정황 증거들과 경찰 증언들과 최종적인 사법부의 판단 사이에 있는 빈공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빈공간, 그 초반의 여러 증거들에서 최종의 판단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연결고리가 비어있음을 보여주는 '이 공백들'은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미하고 있는가.

4.
다른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금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을 느낀다. 위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인간극장'이 아니라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화의 주제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TV에서 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경우 상당수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시작부분에 가장 충격적인 영상을 제시하고, 보는 이에게 그 이유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배경에서부터 차례로 그 뒤를 밟아나가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초반부의 그 영상, 그러니까 보는 이가 기다리고 있던 결정적인 사건에 이른다. 이 영화도 비슷한 형식이다. 처음에 우리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즉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아침과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MB 정부의 불관용 선언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화는 점증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영화는 배경에서 시작하여 그 전날, 그 밤, 그 새벽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가 일어났던 아침에 이르며, 우리는 그것을 스릴러 영화에서 많이 활용되는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보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화재 발생 2분전'이라는 자막과 만나 그 2분이라는 시간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즉 처음의 그 사건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 구조. 그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두근두근 버텨야하는 시간들과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사건. (여기에 효과를 더하는 것은 그 재연이다. 방송에서 사건사고를 다루는 다큐들이 가장 흔히 활용하는 부분인 바로 그 재연말이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경찰들의 증언을 바로 영상으로 눈앞에서 리플레이하며 보게 된다. 이는 물론 관객들에게 사건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들을 낳게 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윤리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남는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쾌감을 (때로는) 느낀다. 그러나 이 다큐에서마저 뭔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예를 들어 이것을 이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큐 <아르마딜로> 같은 것에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 그러니까 전투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이다. <두 개의 문>이 이와 다른 점은 <두 개의 문>은 그 결정적인 영상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정한석이 위의 글에서 영화 <쇼아>를 놓고 말한 대로 이를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르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경찰의 'No Signal' 때문에, 혹은 파란 슬레이트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과연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는 그 영상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가 그런 구조, 일종의 점증의 구조를 택했을까, 택하지 않았을까.)

5.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를 소비하는 방식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를 둘러싼 어떤 기이한 현상을 보며 느끼는 우려에 대해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물음이 올라오는 경우들이 있다. 가장 레전드 편이 뭔가요? 여기에서 레전드라는 것은 자극적인 측면, 미스테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가장 재미있게, 혹은 공포스럽게 볼 수 있는 편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이 프로그램은 그 요구들에 발맞추듯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보다는 특정의 사건, 예를 들어 자극적인 살인사건들로 소재가 미묘하게 달라져가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는 실제의 사건, 누군가의 죽음을 일종의 자극, 재미, 미스테리적인 일종의 장르물로서 소비하게 되는 것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되는가,라는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가지게 되는 것은 공포 혹은 분노에 가깝지 않을까. 즉 우리도 저런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다시 말해서 하나의 '본보기'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위의 '본보기'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와 그 사건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양산되게 된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그 '분노'를 어느정도 즐긴다.

<두 개의 문>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용산의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이었으며, 바로 지금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이며, 아들이었다. (실제로 그 건물 안에는 한 부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수감되었다. 즉 경찰의 논리대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그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영화에서 말한대로 철거민과 경찰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분노일까. 예를 들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것처럼 괴물을 점점 걸러내게 하는 것, 그에 대한 분노에 매주 에너지를 쏟아붓게 만드는 것만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왜냐하면 이 용산 사건에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두 가지의 문제, 즉 욕망과 폭력의 구조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먼저 발전과 재개발의 욕망,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욕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무엇인가를 부수고, 새롭게 지으려는 욕망, 그것이 국가의 발전이고, 개인의 발전이라고 믿었고, 그 발전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 정부에 표를 주었고(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재개발을 내심 반겼고), 그 욕망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재개발의 욕망, 철거의 문화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국가폭력을 방조해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폭력에 깊숙이 동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폭력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에 둔감해진 사회에서 작은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것, 혹은 그 작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결국에는 국가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 사태에서의 진압을 보며, 쌍용차는 회생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게시판에서 말하는 것, 그것과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의 방패는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쉽게 대응하는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방식대로 자꾸만 괴물을 양산하는 것이다. 혹은 무엇인가를 자꾸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위 진보정권 때도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자. 실제로 대추리나 기륭전자의 예에서 보듯이 진보정권에도 국가폭력의 양상들이 있었다. 여기에 쉽게 말하는 것은 그 정권이 가짜 진보, 잘못된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진보의 탈을 쓴 다른 무엇인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있다고 해도, 이 대답이 무엇인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여기에는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아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들을 가짜라고 규정지음으로서 남게 되는 '진짜 나, 선한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선한 나는 여기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해자, 즉 현장에 투입된 경찰도 또 하나의 피해자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넘어선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넘어섰는지는 의문이 든다. 영화 속에서 여전히 적은 어딘가(예를 들어 출동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전화기 바깥)에 있다고 믿어지며,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을 영화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포와 분노보다는, (자기반성과 맞닿아 있는) 성찰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재미와 자극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해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공포와 분노의 지점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국가폭력의 역사성을 파고들었던 문정현의 <용산>이나, 현장의 자료화면이나 사진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관련자들의 회상만으로 영화를 이끌며 관객을 결국 현재라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김응수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 등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또 한편으로는 철거의 문제를 오랜시간 그 철거의 공간에 살아온 사람들을 비추는(그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정재훈의 <호수길>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성찰이란 결국은 관객의 몫이며, 강제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저절로, 혹은 영화적 처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최종의 판단은 결국 관객이 하는 것이며, 영화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두 개의 문일뿐. 그 문으로 한걸음 들어설 수 있게 하는 자는 문을 만든 자가 아니라, 그 문 앞에 선 오로지 자신일 뿐이다.
 



덧.
몇 개의 단상들과 몇 개의 질문들이 어지러이 떠도는 탓에 하나의 글이 되지 못하고, 조각보같은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몇 개의 질문들은 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특히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저 잘 기억해둔다.




- 2012년 7월, 씨네코드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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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변영주

Ending Credit | 2012. 7. 4. 18:18 | Posted by 맥거핀.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Helpless>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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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Ending Credit | 2012. 6. 30. 12:12 | Posted by 맥거핀.



 

(글 중간중간에 영화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상당수의 다른 프랜차이즈 시리즈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편의 성공과 그보다 나은 2편, 그리고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유산들을 모아 가까스로 선방을 해낸 3편, 그리고 만들지 않았던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는 4편, 그리고 시리즈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감독들이 시리즈를 이끌어나갔을 때 그나마 적용되는 것이다. 2편부터 망가진 시리즈들이 얼마나 많던가.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하는데, 1편은 리들리 스콧, 2편은 제임스 카메론, 3편은 데이빗 핀처, 4편은 장 피에르 주네이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올해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 즉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종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나왔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이야기하였듯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프리퀄이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프로메테우스>의 느슨한 서사, 빈공간이 뻥뻥 뚫린듯한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 논쟁들을 낳고 있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혹은 <인셉션>)나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제시하는 꽉 짜여진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데터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제외하더라도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 자체가 이미 헐거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게시판들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서로가 자신이 맞는 답이고, 다른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어지게 될 몇 개의 이야기를 놓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이는 낚인 물고기들이 바구니에 담겨서는 내 떡밥이 더 맛있었다, 혹은 네 떡밥이 더 맛있었다며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는 구멍이 많은 서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만큼은 사실이고, 설혹 프리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괴하고 끈적끈적하고 음울한 분위기만은 잘 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나 미술적인 부분, 혹은 캐릭터의 활용(아마도 많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들은 이 <프로메테우스>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당할지 쉽게 예상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의 큰 줄기를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왔다. 그 하나는 여전사 리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숍으로 상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화론의 세계와 창조론의 세계. 진화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생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창조에는 그러한 생식의 과정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생식 혹은 임신(수태)에 대한 상징 혹은 이미지들인데, 여성 전사 리플리, 인간(숙주)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형상, 2편에서 리플리와 소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생물체 에이리언 역시도 그러한 번식과 관련된 부분들이 계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이리언도 번식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프랜차이즈인 영화 <주라기공원>에서 가장 섬뜩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섬의 공룡들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창조된 안드로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흔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생식과 관계된 부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이라는 것은 생식 혹은 번식과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가장 비통한 괴성이 터져나왔던 장면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퀸 에이리언이 자신의 알을 불지르는 리플리를 보고 내뱉은 괴성이었다.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파스빈더)이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꾸는 꿈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왜 그는 이 꿈을 보는가.)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는 외부의 괴물말고도 이 창조된 안드로이드를 보는 (생식하는) 인간의 섬뜩한 감정이 내내 지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한편으로는 밖의 괴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안드로이드에게도 해당된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장점은 마이클 파스빈더가 이 섬뜩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식은 아비가 죽기를 바란다."고 대사를 할 때를 보라.) 그리고 그 섬뜩한 기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안드로이드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결국은 진화론 쪽이었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여전사 리플리였으니까.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단지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밖에는 여전히 에이리언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이리언은 그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니까.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일종의 헤테로, 그것이 에이리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그것을 조금 더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에이리언이라는 괴물은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쇼 박사의 임신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다시 그것이 엔지니어(스페이스 자키)와 결합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최초의 에이리언은 인간의 정자, 그리고 불임의 수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이한 역설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창조되었지만, 생식의 과정으로 이 세상에 기어나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의 탄생에도 단지 진화만이 아닌 창조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창조에는 외부의 손길, 외계인들의 어떤 작용이 개입되었다는 것. 즉 이는 일종의 변형된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론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어떤 외부의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놓고보면 인간은 에이리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에이리언이 처음 엔지니어들의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가, 우연히 진화의 과정(영화 속 쇼 박사의 임신의 형태)을 거쳐 탄생된 것처럼, 인간도 결국 엔지니어들이 먼 옛날 뿌려둔 씨앗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 무엇이 된다. 즉 그 태생적 뿌리는 인간이나 에이리언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에이리언이 괴물이라면 인간도 괴물이 아닌가. 에이리언의 행동들은 결국 번식을 향한 본능이고 생존본능이다. 'Alien'이라는 것은 '외계의', '이질적인'이라는 뜻일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이 에이리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이리언과 같은 지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발버둥이 생기며 창조론의 오래된 믿음 저편에 있는 것, 그러니까 신이 등장하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창조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론에는 한 가지 뿌리깊은 믿음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에 의해 자신과 닮은 어떠한 것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믿음이다. 즉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겨우 원숭이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적어도 완벽의 시작지점에 있는 어떠한 것, 그것이 인간이 되려면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그 창조의 시점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러한 믿음에 몇 가지 불길한 가설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을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하지 못한, 자신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불사(不死)를 향한 웨이랜드 회장의 믿음과 그것의 깨어짐은 이미 엔지니어들의 죽음이 발견된 처음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야 말로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들여다보고 있는 쇼 박사의 꿈을 생각해보라. 그 장례식 장면. 생과 사에 대한 동경.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은하철도 999>에서 <블레이드 러너>까지.) 아니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어떤 형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간을 독수리에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듯이, 처음 지구에 남겨진 엔지니어는 마치 사약을 받는 죄수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의 반대편에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영화 초반부 데이빗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몇 번 따라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불을 잡을 수 있지?" "뜨겁지 않다고 믿으면 되지." 영국인으로서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이 영화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대사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 이는 마치 인간에 대한 데이빗의 조롱처럼 보인다. 웨이랜드 회장은 데이빗을 인간들에게 소개하며 말한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그러나 데이빗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편으로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이 보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불을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내 데이빗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섬뜩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단지 잘못 창조된 존재로 점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박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쇼 박사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이 이 와중에 그것을 하고 싶냐고 조롱하지만) 데이빗이 벗겨낸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 목걸이는 인간이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창조주)과 닮은 형상의 어떤 것이라는 믿음. 그녀는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두 명의 생식기능이 없는 존재, 즉 불임의 쇼 박사(그리고 이를 전시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이제 생겨났다)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주들의 별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SF 영화의 팬들은 어떤 장면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장면. "내가 네 아버지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 2012년 6월, CGV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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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살수없는것들무엇이가치를결정하는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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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샌델은 여러 가지 풍성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가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1장에서는 이른바 '새치기 할 수 있는 권리'다. 우선 탑승권, 진료 예약권, 무료로 배부되는 방청권들을 돈으로 구매하려는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항목들이다.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상금으로서 어떤 좋은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벌금이 그 행위를 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요금으로 변질되는 것들이 이야기된다. 3장에서는 시장이 점차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의 판매, 현금으로 선물을 하는 것,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돈의 문제가 개입되는 것 등이다. 4장에서는 삶과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타인의 생명보험 증서를 거래하는 '말기환금'의 문제, 유명인사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내기인 '데스풀', 시장에서 테러를 예측하고자하는 테러리즘 선물시장 등이 도마에 오른다. 마지막 5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명명권'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경기장에 차별적인 자리들이 생겨나는 것, 모든 것으로 가능한, 심지어는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광고들, 특정의 지명이나 명명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좋은 얘기다. 이 이야기들을 놓고 어떤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옳음이나 좋음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스, 칸트 등이 이야기했던 공동체와 개인의 정의의 문제, 공화주의인가 공동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새치기의 권리, 생명보험, 명명권 등은 시장과 시장주의의 공세가 어느정도 위세를 떨치게 된 이후에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현재에는 가장 거래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권리가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세계(예를 들어 노예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말하는 시장지상주의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인간의 기본권리와 연관된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권신장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것들은 시장지상주의에서 새롭게 생겨난 거래항목들이다. 예전에 돈(재화)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새롭게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때,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이클 샌델의 이 세심한 논의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내 질문의 몇 가지는 이와는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다. 바로 지금 미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가치들의 거래. 즉 그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는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시장이 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설 수도 있고, 그것은 샌델 외의 다른 논의자들의 몫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전후 맥락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본의 아니게) 특정의 한계들을 이 논의를 읽는 사람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즉 이 시장은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상수이고,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책의 관심영역이 아니다. 즉 시장에서 '거래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을 거래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뿐, 그 시장에는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문제가 그 시장 자체라면?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그러한 거래행위를 권장하고, 부추기고 있으며 그러한 거래행위 자체를 막는 것이, 그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샌델은 인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 대놓고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시장, 재화,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지만, 은근히 출현하고 있는 단어들은 회복, 훼손, 변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시장의 회복, 공공선의 훼손, 가치의 변질. 즉 좋은 시장이 있고, 좋은 공공선이 있고, 좋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일부 정신나간 경제학자들이고, 정치인이며, 시장지상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러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비판을 할 때 주로 제시되는 두 가지의 중심축과도 연관된다. 그 하나는 공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이다. 즉 어떤 특정의 가치가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구매할(혹은 판매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가치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기,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가 이러한 특정가치들의 거래를 막았을 때, 우리는 공정한 우리로, 부패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본래의 우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샌델이 그래도 여전히 시장에 어느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시장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시장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누군가가 문제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돌아가 공공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인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못된다. 이렇게 시장지상주의의 늪에 깊게 빠져있는 미국과 FTA를 하며 신자유주의의 넘실대는 파고에 흥겹게 올라타고 있는 우리사회에 샌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그리고 경제지 '한국경제신문'에서 '왜 도덕인가'라는 샌델의 책이 출판되고, 보수적인 신문들에서마저 샌델의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며, MB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정사회'를 제창했다는 해프닝을 보며 가졌던 어떤 의심이 이렇게 꼬리를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마이클 샌델은 그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은 잘 지켜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설혹 샌델의 주장이 실현된 세계가 되어도 그것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굳건하고, 시장은 여전히 이 사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을 다시한번 일깨울 것이므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은 없다.) 실패해도, 하버드 교수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이미지는 남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샌델은 2장에서 도덕적 가치들에 적용되는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장인 나는, 그 폐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이런 것에도 인센티브를 주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주어야할 다른 과업과 관련한 인센티브마저도 떼먹는 우리의 회사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런 인센티브도 없는데 무슨 도덕적 가치에 따른 인센티브.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센티브를 논하는 사이에, (과업에 따른) 정당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이때다 싶은 이 회사의 CEO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그래서 인센티브를 안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농담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주어야하는 인센티브마저도 당연한 듯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덕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인센티브랴. 핵폐기장도 '유치'되고 당연히 주어야 하는 보상금도 떼먹는 사회에서, 무슨 '핵폐기장이라는 폭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선택에 반하는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의 부도덕성'인가.

어쩌면 이 책의 비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What Money Can't Buy'라는 이 책의 제목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아보입니까. 막장인 나는 그런 것보다도, 그저 이번에 내한한 마이클 샌델의 강의의 방청권은 얼마에 거래되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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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The Book | 2012. 6. 16. 02:23 | Posted by 맥거핀.



김수영을위하여우리인문학의자긍심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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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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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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