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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 자비에 보브와

Ending Credit | 2012. 4. 8. 20:48 | Posted by 맥거핀.

 

우리는 사실,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영화 포스터 뒷면에 있는 영화 배경 설명. "1991년, 알제리 정부와 반정부 이슬람 단체 사이의 무력충돌로 시작된 알제리 내전은 무고한 언론인과 외국인은 물론 민간인들에 이르기까지, 약 20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1996년은 양 측의 대립이 최고조에 다다른 때로,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의 난무로 인해 누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팽배해져 있었고 사건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1996년 3월 27일 새벽 1시 15분, 약 20명의 무장 괴한들이 티브히린의 수도원에 침입하여 일곱명의 프랑스 수도사들을 납치했고, 두 달 뒤 메데아의 한적한 길가에서 그들의 수급만이 발견되었다. 영화 <신과 인간>은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초점을 맞출 질문은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는 아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질문은 "왜 그들이 그런 선택, 즉 피신하지 않고 수도원에 남는 선택을 하는가?"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즉 우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듣는다해도, 우리가 그 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즉 우리가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면, 2시간 동안 그들의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감독 자비에 보브와에게는 한 가지 선택이 필요했다. 그것은 이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라는 영화적인 해석의 선택이다. 먼저 그것을 위해서 감독은 몇 가지의 세부적인 곁가지들(그러나 어떻게 보면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는 것들)을 쳐낸다. 그 곁가지에 해당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알제리 정부와 반군 중 어느 쪽이 선에 가까운가, 어떻게 보면 식민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프랑스 수도사가 여기에 남는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가, 이 수도사들과 이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들. 그러나 감독은 영화에서 그런 것을 묻지도, 파고들어 그려내지도 않는다. 대신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모든 것을 그들의 내면으로 집중시킨다. 수도사들에게 이곳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의 강요나 권유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외부적인 상황에 따른 선택이 아닌, 그들의 내면이 지시하는 선택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의 제목대로 이들에게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부분이다. 영화의 제목은 '신과 인간 Of Gods And Men'이지만 영화의 방점은 내내 인간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몇몇 힌트가 될 만한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첫 시작에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한없이 엄숙하게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선택된 장면은 누군가 헛기침을 하고, 하품을 하는 장면이다. 많은 경우의 수 중에 굳이 이 장면의 선택으로 영화의 시작을 여는 것의 의미. 수도사들이 납치범에게 끌려가는 극적인 순간에도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데, 가장 나이든 수도사가 살기 위해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나, 뒤늦게 수도원에 온 수도사가 납치범들에게 나는 오늘 왔다(그러니 나는 잡아가지 말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러한 선택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가장 극적이고 대표적인 장면은 그들이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고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장면이다. 감독 자비에 보브와의 선택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에게 '백조의 호수'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어딘가에 고이 숨겨두었던 와인을 꺼내와 마시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백조들의 한맺힌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음악을 들으며, 최후의 만찬을 엹은 미소와 함께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도 인간적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꼼꼼한 장면 설계와 엄숙한 카메라워킹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절대 가벼워서는 안되는, 숭고한 양식미를 갖춘 장면이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샷의 구성도 흥미로워 보이는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얼굴 클로즈업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고뇌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관습적인 샷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부수적이면서도 중요해보이는 다른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체성을 드러내보이는 효과이다. 나이든 수도사들의 주름지고 깊게 패인 피부를 그대로 가까이에서 드러내보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매번 환기시킨다. 이러한 클로즈업은 그들이 고뇌에 빠졌을 때 자주 활용되지만, 반면 그들이 고뇌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미사를 드리거나, 신에게 경배를 표현할 때는 카메라는 늘 뒤로 빠진다. 이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그들을 뒤에서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그들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인가? 예를 들어 그들이 다가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겁을 먹고 신에게 경배를 드릴 때, 카메라는 위에서 본 (부감)샷으로 그들과 수도원을 찍는다. 물론 이는 헬리콥터에서 본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쩌면 신의 시선은 아닐까. 그리고 헬리콥터는, 아니 신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디론가로 떠나버린다. 오직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신이 아니라,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인간의 고뇌일 뿐이다.

자비에 보브와는 영화의 첫머리에 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시편 82장 6, 7절. "너희는 신이며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허나,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으리라." 이것은 사실 자비에 보브와가 이 영화를 보는 법을 미리 관객들에게 일러두는 것이기도 하며, 그가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처럼, 대관들처럼 죽는 것. 그러므로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마지막까지 그 죽음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마을 사람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의 부담감, 양심의 가책을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며, 어쩌면 어떤 수도사의 고백처럼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들이 순교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납치범의 지시대로 그들의 메시지를 순순히 녹음기에 대고 읽어줄 이유가 있을 것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순교는 신이 되려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간에 다른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아마도 파괴의 신. 영화 속에서(혹은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혹은 죽음을 강요하는) 이들, 그래서 신에 가깝게 가려는 자들을 늘 조심하여야만 했다. 이들 수도사들은 신이거나, 신에 가까운 무엇인가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죽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리더인 크리스티앙에게 "이것은 가치 없는 죽음이 아닐까요?"라고 물을 때, 크리스티앙이 아니, 이것은 가치가 있는 죽음이며, 순교라고 말하지 않고, 최후까지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죽음'이란 없다(고 믿는다). 어떤 죽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파괴의 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처음의 질문, - 두시간 동안 이들의 '이해되지 않는 선택'에 따른 고뇌를 보려 애쓸 이유가 있는가 - 에 대한 답을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이유는 '그 고뇌를 보려고 애쓰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은 아마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그리고 신에 가까워지려는 인간만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며, 무엇인가를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선택을 앞둔 고뇌를 이해할 수는 있으며,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인간으로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우리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런 죽음을 원치 않았으며, 무관심하게 버려진 자신들은, 모든 이를,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감사를 보내며, 심지어는 그들의 죽음 곁에 가까이 있었던 그들에게마저도 감사를 보낸다고. 물론 그들은 인간이니 결코 그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까지도 그들이 '사랑하기 위해 애썼다'고 믿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애쓸 수 있으므로, 신은 결코 애쓰지 않으므로.

 

 

덧.

이 영화를 보며 자주 들었던 생각은 그 근원에 있는 것들이었다.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 당신은 왜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카톨릭 사제이면서도, 코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상대방을 늘 이해하려 애쓰며, 이슬람과 카톨릭을 구분하지 않고, 말끝에 항상 아멘과 인샬라를 빠뜨리지 않는 이들을 보며, 종교의 근원에 있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이는 종교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아니 나는 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철학을 공부하고, 어떤 소설들을 읽습니까. 그 근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2012년 4월, 아트하우스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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