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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년, 강이관

Ending Credit | 2013. 2. 1. 17:0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영화적 화면 구성의 측면에서 흥미로운데, 그것은 영화의 내내 인물의 곁에 카메라가 바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범죄소년>은 다른 어느 샷보다도 인물의 어깨나 가슴께에서 머리끝까지를 찍는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통상 인물의 얼굴을 드러내며 그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관객이 읽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는데, 일반적인 클로즈업샷과 다른 점은 인물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당겨서 찍는, 그럼으로써 인물의 아주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클로즈업샷과 달리 인물의 신체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드러내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인물들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되, 그 눈빛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가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의 어깨도 보아줄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어깨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그들의 표정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종종 어깨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우리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아줄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범죄소년 장지구(서영주)의 어린엄마 효승(이정현)이 노래방에서 업주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양을 떨며 "언니~"라고 부르기 전의 미세한 어깨의 멈칫거림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그 미세한 멈칫거림 앞에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음을, 그래서 그녀가 왜 아양을 떠는 목소리를 꾸며내야 하는지 대략 짐작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소년'들의 표정을 우리는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인물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들의 눈빛을 보여주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그들의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범죄로 처벌을 받았음에도 왜 다시 범죄를 반복하는가? 우리는 혹시라도 그들의 눈빛에 어떤 답이 들어있지 않은가 해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그러니까 반성하는 눈빛이라든가, 사회와 어른들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라든가,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범죄소년이 되고, 범죄소년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내몰리고, 또 내몰렸기 때문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어깨라도 보여줄 수밖에.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은 채, 움츠러들어 있는 그들의 어깨, 그리고 그 어깨가 다른 범죄에 빠져들기 전에 아주 잠깐 멈칫거리지만, 다시 새로운 범죄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물론 미디엄 클로즈업샷이 클로즈업샷, 익스트림 클로즈업샷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인물의 배경마저도 동시에 어느정도 담는다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일반적인 클로즈업과 다르게 배경을 담으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는 우리와 인물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는 범죄소년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도 함께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범죄소년들은 그 배경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놓을 수 없고,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어려운 위치에 처했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많은 소년이 있다.) 아무튼 개인적 문제이건, 사회적 문제이건 간에 범죄를 저지르면 그들은 사회와 분리되어 갇히지만, 다시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그들을 맞이할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혹 그들이 사회와 격리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변했더라도, 그들이 다시 돌아가는 사회는 예전과 그대로인 채로, 즉 예를 들어 범죄소년들에 신경쓰지 않는 어머니도 그대로이고, 범죄소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도 그대로인 그런 상태, 아니 이제 그것을 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소년원에 다녀온 자식을 외면하고,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이제 그를 멀리하는 그런 상태의 한가운데로 되돌려진다는 점이다. 그런 상태로 돌아간 범죄소년들이 어떻게 되는가, 이 영화 <범죄소년>은 그 메커니즘을 일종의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화다.

통시적 관점이라는 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장지구의 엄마 효승의 현재 모습은 장지구의 여자친구 새롬의 미래 버전 중의 하나로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즉 장지구의 아이를 가진 채 가족과 학교에서 모두 떨려나가는 새롬은 효승의 과거의 반복이며, 효승의 현재 모습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새롬의 미래의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이다. 즉 강이관은 여기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범죄소년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기까지, 즉 범죄소년이 또다른 범죄소년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 그런데 보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 나쁜 케이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는 그럴듯한 악인을 별로 찾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중간에 효승과 같이 사는 효승의 후배나 효승이 만나는 여관의 주인이나 식당의 여주인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일견 야멸차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코 나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임시로나마 효승과 지구에게 살 거처를 제공하고, 여관비를 깎아주는 모습 등을 보면 도리어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문제는 개인적 호의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오로지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개인적 호의나 범죄밖에 없도록 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구조는 상당히 단단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마 이 영화가 이렇게 툭 잘라내는듯이 끝나는, 아주 불안하고 미세한 희망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 정도인 그런 것을 애써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며 끝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하되, 그 눈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그 인물의 눈에서 어떤 미세한 반성이라도 읽어낸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을 조금은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범죄를 오로지 개인의 악의 산물로서 읽어내는 오류같은 것 말이다. 저 눈을 보니 틀려먹었어, 그들은 또 범죄를 저지를거야, 혹은 반성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잘 살게 될 것 같군, 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희망 같은 것. 그러나 그런 희망이란 없다. 우리는 어떠한 희망도 제공되지 않은 이 이야기에, 이 불안한 결말에 스스로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 어떠한 추가적인 희망도, 혹은 절망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추가적인 이야기가 좋아지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변화시켜 나갈 도리밖에 없다.


덧.
강이관은 좋은 감독이다. 보통의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한가지를 전달하는 감독이다. (물론 이런 보통의 감독도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씬은 인물의 캐릭터를 잘 설명하거나,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그려내 보여줄 수 있다. 좋은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두 가지를 전달한다. (물론 아주 좋은, 그러니까 위대한 감독들도 있다. 그런 감독들은 하나의 씬에서 서너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넣는다. 그러나 대체로 그 서너가지가 무엇인가가 생각할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동시에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숨을 못쉬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씬이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면 그 장면은 좋은 장면이고, 그러한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은 좋은 감독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처음에 지구가 보호관찰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 보호관찰이라는 것의 어떤 서늘한 방식, 그것의 기계화되고 무책임한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할아버지의 병든 숨소리를 넣고, 그 병든 숨소리를 무심히 보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그 캐릭터를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즉 적어도 관객은 이 장면에서 지구가 보호관찰을 받고 있기는 하나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미용실에서 효승이 효승의 후배의 지시를 받는 짧은 씬에서도 이것이 드러나는데 효승이 후배에게 대하는 비굴한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도 잘 드러내면서 효승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나 성격 역시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효승은 지금까지 저런 것을 얼마나 반복해왔을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견뎌내야 하나,라고 관객에게 익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 좋은 감독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생각한다.



- 2013년 1월, 시네마테크 KO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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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와서 쓰는 글

끄적거리기 | 2013. 1. 22. 17:58 | Posted by 맥거핀.



1.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국 우리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이 영화와 관련한 여러 리뷰들, 이야기들을 보면 이 '믿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믿음의 한 형태가 그 담론들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확장하여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관점들 같은 것 말이다. 이 관점들에서는 파이가 말한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이며, 파이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하게 되며, 호랑이는 단지 그의 종교적인 자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몇몇 증거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 제시된 증거로는, 식인섬이 등장하고(그러니까 실제로 이것은 식인섬의 등장 시점부터 파이가 배에서 식인을 했음을 의미하고), 그것의 형상은 사람의 형태(혹은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형태)이며, 사람의 이빨이 꽃 속에 들어 있으며, 난파되면서 갑자기 주방장이 얼룩말로 대치되며, (심지어는) 마지막 해변에서 호랑이의 발자국이 모래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을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 바깥에서 찾은 증거이다. 영화 속에서는 건너 뛰는 부분이지만,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실제로 파이의 식인행위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으며, 1884년 영국의 미뇨넷 호가 난파하여 18일만에 음식이 떨어지자 결국 한 소년 선원을 죽여 그 고기를 나눠먹고 살아남아 구조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였다는 사실 같은 것.

결국 이 관점들의 출발은 파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들려준 다른 버전의 이야기말이다. 소설을 보지는 않았지만, <파이 이야기> 소설에도 등장하고, <라이프 오브 파이>에도 등장하는 이 결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 순전히 영화의 어떤 완결적인 구조만을 놓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은 그 완결적인 구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이상한 사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마지막이 없어도 이야기의 완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그 구조 자체에도 흔들리는 부분이 없다. 아니 도리어 이 마지막은 이 구조를 스스로 흔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이상한 마지막이 영화에 슬며시 붙었을 때 흔히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러한 관점이 조금 기이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지 않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두 시간 가까이 본 파이와 리처드 파커와의 동거를 환상이라 생각하고, 영화 속에서 전혀 보여지지 않는 인간 사이의 살육에 이 관점은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영화 속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암시된 증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보는 것이다. 암시된 증거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만이 그 구조를 우리앞에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 외부의 증거들을 영화로 가져올 때의 어떤 위험한 부분에 대해 재론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상징을 다룰 때,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때 외부의 구조를 가져오는 것, 그에 더 나아가 상징과 해석을 다룰 때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야할지도 모른다.)

2.

'믿는대로 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로 하면, 내가 '본다'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맹신이 아니라 믿음의 한 종류가 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무엇인가의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인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를 들어 정성일 평론가의 다음의 말과도 통한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즉 여기서의 '보는 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착란 상태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회의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얘기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식인을 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 기이한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했어도, 심지어 식인섬의 미어캣이 시체에 꼬이는 구더기라는 이야기까지 나아가기는 했어도,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 맹신에 대한 위험성'이라고 결론을 맺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그 맹신에서 벗어났을 때만이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 해석을 하든 간에 그 돌아오는 지점이 그렇게 크게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종교적 맹신을 경계하자'는 것은, 사실 '(제대로된) 믿음을 가지자'는 말의 다른 버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믿음'이라는 것은 맹신이 제거된 믿음, 회의라는 것이 포함된 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해 보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본 것이 아니라 보지 않은 것에 기초하여 쓴 것처럼 보이는 그런 해석의 글들보다는 그 해석 밑에 붙은 여러 기이한 댓글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화에 찜찜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해석을 읽고 의문이 풀렸다는 식의 그런 댓글들. 그것이 위험한 것은 그것은 마치 어떤 정답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 혹은 맹신을 하지 말자는 취지의 글을 맹신하는 듯한 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찜찜한 부분'이 아닐까. 영화의 어떤 찜찜한 부분이 눅진하게 남아 건드리는 것, 즉 당신에게 던지는 계속적인 질문, 당신이 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찜찜한 의문을 풀기 위해 어떤 해석을, 혹은 어떤 글들을 정답지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영화를, 그리고 그 영화에 혹시 들어있을지도 모를 어떤 질문들에 대한 사고를 정지하는 것이며, 그 영화를 자신의 안에서 내치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기이한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감독의 인터뷰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해 다루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은, 아니 (이렇게 얘기하면 니 글은 어떻고,라는 얘기가 쏟아질 것 같으므로 이렇게 바꿔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글들은 질문을 풍성하게 만드는 글이다. 즉 우리가 영화가 끝났을 때 한 두 가지의 질문 밖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질문을 두 배, 세 배로 늘려주는 글들. 다시 말해서 찜찜한 영화를 더 찜찜하게 만드는 글들. 그리고 그 찜찜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금 영화를 보게 만드는 글들.

3.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영화를 다루는 어떤 태도에 대한 것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최근에 모 영화를 다룬 글들을 보러 한 사이트에 들렀다가 가득 쏟아지는 비평가들의 별점에 대한 조롱들을 보고 기분이 아득해져 (트위터에 글을 안올리게 된지 오래지만) <씨네21>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씨네21>의 애독자로서 하나 묻습니다. 포탈의 영화 별점을 들여다보면 때로 기분이 참 안좋아집니다. 별점제도에 대한 오해,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가 난무한달까요. 이것에 대한 부분에는 여러 영화를 다루는 매체들의 책임이 있으며, 영화를 다루는 주간지로서 <씨네21>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지금이라도 <씨네21>이 영화별점을 다루는 부분을 없앨 생각은 없는지, 왜 아직도 이러한 오해를 (본의 아니게) 조장하고 있는지 생각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답멘션을 보내왔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 식별할 수 있는 한 방법 중에 하나가 별점이 아닌가 싶어요.. 주신 의견 관련부서에 전달해 드릴께요~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만 우리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끄세요'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내가 트윗에서 이야기한 '전문가평들에 대한 오해'라는 것은 전문가들, 그러니까 영화비평가들이 매기는 별점이라는 것을 재미에 대한 척도로 여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비평가들이 재미없는 영화만 좋아한다, 재미없는 영화에만 높은 평점을 준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의 영화에 대한 별점은 '재미의 척도'가 아니라 '예술성의 척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즉 비평가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 좋은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그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짧은 문장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담는다. 그것은 비평가들이라는 집단이 균일하지도 않거니와 그렇다면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재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재미''예술'을 구분해야 하는가)라는 기나긴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그저 별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즉 제대로된 비평가라면 '이 영화가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이 영화가 영화라는 예술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며, 그 기준에 따라 점수를 주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리어 이렇게 묻고 싶다. 영화비평가가 일반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그들의 눈과 일반인의 눈이 같아지는 순간, 그들은 소멸될 것, 혹은 소멸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정성일 평론가의 트윗 "인과관계_ 평론가들이 감독을 예술가 대접하며 그들의 영화를 비판하자 죽일듯이 미워하며 왜 그렇게 심각하냐고 욕을 했다. 소원대로 비평이 몰락하자 감독들은 장삿꾼들에게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다. 우리들이 당신들의 방어선이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별점이라는 것, 그리고 20자평(혹은 100자평)이라는 것의 어떤 폭력적인 부분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줄세우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批評)이라는 한자에 견줄 비()자가 들어있는 것처럼 비평이란 결국 견주어서 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왜 예술이고 어떤 것이 왜 예술이 아닌지 보여주는 것은 비평가들의 임무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이 긴 담론과 여러 의미를 고려한 견줌이 아닌, 별의 숫자와 트윗보다도 짧은 글로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의도를 넘어서 때로 폭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짧은 20자평이 때로는 촌철살인의 문구라고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는 '촌철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4.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태도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일요일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론 셰르픽 감독의 <원데이>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이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시간에 대한 태도이다. 이 영화는 1988715일 엠마(앤 해서웨이)와 덱스터(짐 스터게스)의 하루에서 시작하여 그 이후의 20년 동안의 715일을 이어붙이는 영화다. 즉 이 영화는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영화다. 물론 순간의 집적이 영화가 될 수는 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란 순간의 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집적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이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의 매년 동일한 날에는 어떤 극적인 순간들만이 집적된다. 김혜리도 이러한 것을 지적했는데, 김혜리는 "그러나 론 셰르픽은 야심이 없고 <원데이>의 매년 715일에는 우리가 기존 연애서사에서 익히 보아온 사건에 해당하는 일들이 꼬박꼬박 일어나 구태여 택한 형식의 의미를 미궁에 빠뜨린다." -<씨네21> 888-라며 이 점을 꼬집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매년의 동일한 날이라는 시간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극적인 사건의 집적들로만 채움으로써 그저 뻔한, 다시 말해서 감수성이 민감한 17세 소녀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연애 스토리를 집약함으로써, 이 영화에 대한 악평에 어떤 내용이 쓰여질 것인지조차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웨인 왕의 <스모크>에서 13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마다 같은 장면을 사진에 담는 사내의 모습과 비견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13년 동안의 그 사진에서 극적인 순간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매년이 아니라, 심지어 매일의 같은 날에서도 극적인 순간은 거의 없으며, 삶이란 그런 비()극적인 순간의 집적이다. 그리고 극적인 순간이 빛나는 것은 그런 비()극적인 순간의 집적 사이에 극적인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시간을 다루는 예술인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순간 속에서 극적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혹은 극적인 순간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묵묵히 필름을 돌린다.

5.

그런 영화의 시간에 대한 익스트림한 한 형태는 2003년 만들어진 왕빙 감독의 디지털 영화 <철서구>이다. 철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폐쇄가 결정된 중국의 도시 센양에 카메라를 한 대 가지고 들어간 왕빙 감독이 3년 반 동안 그곳에 기거하며 만들어낸 9시간 11분짜리의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도시, 사라져 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라는 예술의 대답이다. 보지도 않은 영화에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못할 짓이고,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트위터에 이 왕빙 감독의 인터뷰 몇 구절이 올라왔고, 그것이 상당히 인상깊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철서구>21세기 영화 30편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외로움_ 영화를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속물들이죠. 그들은 돈과 대중의 소란 속에서 외롭죠. 다른 하나는 예술가들이죠. 이들은 자기 혼자서 견디면서 적막하게 외롭죠. 어떤 외로움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왕빙과의 인터뷰"

"안마_ 우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게 아니라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없어요.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안마를 받으러 가면 되요. 그런데 어떤 감독들은 자기가 안마시술사인줄 알고 있어요.. 왕빙과의 인터뷰"

"조건_ 모든 것이 불리할 때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들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다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왕빙과의 인터뷰"

이런 인터뷰를 하는 감독의 영화가 궁금하지 않는가?

6.

그래도 알라딘이니 마지막으로 책 얘기.

이사를 하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몰랐던 오래전의 책 몇 권,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때 둔촌동의 작은 서점들에서 산, 여러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대다수는 세계문학전집들인데, 그 중의 몇 권을 어쩌다보니 조금씩 읽게 되었다. 며칠 전에 조금만 읽자고 시작해서 끝까지 다시 읽은 것은 1992년 출간된 중앙출판사의 'GOLDEN 世界文學選 31'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인데, 다시 읽어보니 어떤 구절은 새롭게 인상적이고, 어떤 구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고, 어떤 구절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조금 별로다. 아무튼 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좋은 소설이다.

새롭게 인상적인 구절의 인용. 톰이라는 가족의 차남이 어떤 폐차장에 차를 고치러 가서 그곳의 외눈을 가진 점원과 나누는 대화인데 그의 성격의 일면이 잘 드러난다.

톰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이것 봐, 친구. 당신은 과연 한 눈이 뻥 뚫렸어. 그리고 때투성이고 몸에선 구린내가 나고. 그런데 당신은 그걸 자청하고 있는 거야. 그게 좋다 이 말이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는 셈이지. 하긴 그렇게 눈구멍이 뻥 뚫려 가지고야 여자가 생길 리 없지. 그러니까 말요, 뭘로 그걸 가려 봐요. 세수도 좀 하고. 그러면 스패너로 사람을 칠 생각은 없어질 거야."

"모르는 소리지. 외눈 신세는 따분한 거요." 그 사나이가 말했다. "성한 사람처럼 보질 못하거든. 얼마나 먼 데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모조리 다 평면으로 보이니까."

톰이 말했다. "그러면 안된다니까. 내가 한때 외다리 갈보를 하나 알게 됐는데, 그게 골목에서 한 판에 25센트쯤 받고 일을 치르는 줄 알아? 천만에. 남보다 20센트 씩 더 받아내던데. 그 말이 이렇거든. ......'외다리 여자를 데리고 몇 번 자봤수? 처음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거든. '당신 오늘은 특제를 만났으니 50센트는 더 내야겠어요.' 이러거든. 아닌게아니라 손님들이 그렇게들 더 주거든. 그리고 모두들 나오면서 그날 재수가 좋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그 계집 말이 자기하고 놀면 누구나 재수가 붙는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내가 살던 고장에......꼽추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 글쎄 자기 잔등을 만지면 재수가 붙는다고 사람들에게 모두 한 번씩 그 잔등을 만져 보게 하는 거야. 그런데 당신은 기껏해야 눈알 하나만 없다뿐이잖아?"

그 사나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남이 슬슬 나한테서 물러서는걸 보면 속이 뒤집힌단 말이야."

"제길, 그럼 뭘로 덮어놓으면 되지. 암소 엉덩이처럼 그걸 드러내 놓고 있으니까 그렇지. 자기 신세를 일부러 한탄하고 싶은 거지 뭐야. 당신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그래? 말쑥한 흰 바지를 한 벌 사 입어 보란 말야. 그러면 얼근히 취해서 이불 속에서 헉헉거리며 기분을 내게 될걸. 거들어 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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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모스타파 파루키

Ending Credit | 2013. 1. 15. 15:4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 촌장의 절대권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은 급기야 매스컴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 이상한 일이란, 이곳은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신봉자인 촌장은 영혼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우상화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체의 영혼없는 이미지를 금지시킨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영혼없는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그곳에서는 반입되는 신문의 모든 사진은 하얀 종이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시청은 금지되며, 사진찍기는 금기시되고, 컴퓨터, 노트북과 얼굴책('페이스북'을 촌장은 그렇게 부른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휴대폰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의 공습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 그리고 또한 정신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소동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영화는 그런 소동을 유쾌한 터치로 다룬다. 물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는 것. 즉 영화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혼없는 이미지에 기꺼이 영혼을 내맡긴 가련한 상태에서 이 영혼의 수호를 위한 어떤 예정된 패배의 사투를 보고 있는 것.

물론 이것 중에 가장 핵심에 놓여진 것은 영화의 제목으로도 제시된 '텔레비전'이다. 이 영혼없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텔레비전의 공습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 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해준 바부 선생의 텔레비전에 곧 온마을 사람들이 그 영혼을 기꺼이 가져다 바친다. 바부 선생의 집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수학 선생인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다른 수학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집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간다. 촌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강물에 내던지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급기야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는다. 모스타파 파루키의 영화 <텔레비전>은 이 소동극을 유쾌한 유머와 풍자를 섞어 결코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눈앞에 드러나는 사건들 이외에도 이 소동들이 어떤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마치 일종의 작동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재현 혹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총체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즉 촌장의 말대로 현재 TV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당연히 그 인물 자신이 아니고, 그 인물의 어떤 기술(技術)적인 모사물이다. 동시에 TV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재현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영화 같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그 인물은 기술(記述)되는 그 인물이 아니다. 즉 <텔레비전>에서 '촌장'역을 연기한 그 배우는 그 촌장이라는 가상의 혹은 실제의 인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인물 자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을 대체할 만한 오락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마을의 일종의 극장 - 이것의 무대는 실제의 텔레비전처럼 만들어져 있다 - 에서 이것을 지적해낸다. 즉 역사극에서 역사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엄격한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특히 마을 사람들이 환장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이중의 기술적인 시뮬라크르라는 기술(奇術)이다.
 
이 영화가 독특해지는 지점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촌장이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할 때 그 곤경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촌장과 그의 수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촌장의 쌍둥이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개발해낸다. 즉 촌장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촌장의 쌍둥이형이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이것은 이중의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와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면 촌장의 아들이 연애를 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이 연애에도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실제와 실제의 모사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술(技術)적인 것이 두 사람이 몰래 숨겨둔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그 목소리만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기술(記述)적인 것은 여기에도 두 명의 인물, 즉 촌장의 아들과 그 아들의 수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실제 연애를 하는 것은 촌장의 아들이지만, 이 연애를 작동시키는 것, 즉 두 사람을 노트북 화상채팅을 통해 몰래만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촌장아들의 매우 코믹하게 등장하는 수하의 몫이다. 이 연애에서 촌장아들의 수하는 촌장아들의 거의 모든 연애를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그가 실연했을 때 그 실연의 아픔까지도 대신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수하가 실제로 그 촌장아들의 연애 상대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촌장아들이라는 원본과 촌장아들의 수하라는 시뮬라크르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적어도 여기에서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를 조금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소동극을 마치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부 선생의 학생이 불어나는 장면을 음성과 시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나, 휴대폰 음성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때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실제의 이미지로 변하게 하는 등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정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유독 인물들을 어떤 창이나 틀 안에 배치시키는 것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즉 이 영화 <텔레비전>의 이 소동이 일어나는 폐쇄된 마을에서 이 마을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소동극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원본인지, 복제물인지 모른채, 때로는 진심을 다하여 일상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 시뮬라시옹은 때로는 너무나도 정교해 자기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다시 말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이 마을은 현대사회의 작은 축소된 복제물이다.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연기하며, 그것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즉 원본이 복제물이 되고, 복제물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혹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어쩌면 이 마지막은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사기를 당해 성지순례를 가지못한 촌장은 끙끙 앓아눕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성지순례 중계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내내 텔레비전을 배척하던 촌장은 그제서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라고 반복하며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내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촌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읽혔다. 결국 얼마나 진심을 다하여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 결국 성지순례라는 것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지 않을까. 아무리 현재의 성지를 지금 순례해도 그곳은 옛날의 성인이 있던 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과거의 성지의 일종의 모사물이다. 그러나 그곳을 정말 성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참배하는 것, 그 모사물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에 터져나오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복제물인지 원본인지를 가려내는 눈은 결국 자신의 안에 있다. 시뮬라크르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환상을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Use your illusion.


덧.
'ACF 쇼케이스 2013' 영화제에서 관람.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 2013년 1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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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Ending Credit | 2013. 1. 11. 00:2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니, 원주율이 주소명인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만든 '3.1415926535898.com'이라는 주소를 가진 이 사이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홍보하는 사이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주소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원주율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비록 숫자라는 제한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값 만큼은 우주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종의 우주의 소통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화음'이 일종의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1977년 쏘아 올려져 하염없이 외계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여러 음악과 원주율(파이)을 포함한 수학기호들이 실려있었고, 외계의 지적인 신호를 찾는 SETI 프로젝트 같은 것에서도 원주율은 일종의 소통언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학기호 파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하게 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심지어 외계인도 알고 있는 보통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서 외계인에게 보내는 우리가 당신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원주율(파이)로 그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리처드 파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 이름은 원래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계인도 알 수 있는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한 소년과 어떤 고유의 내막을 가지고 있는 특정의 이름을 가진 호랑이가 같이 지내는 227일 간의 공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사실 이 두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이 두 개체가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랑이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사실은 '호랑이'와 같은 보통명사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는 이성에 바탕을 둔 메시지, 즉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는 메시지와 조금은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일종의 동물의 생존본능이다. 즉 호랑이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이는 종교나 인간의 감성으로 재단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아버지는 이야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라는 큰 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가 된다. 더 힘이 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대신에 약한 동물은 왕성한 번식력에 따른 많은 개체수로 보상받고, 또 먹이사슬의 구조에 의해 그 개체수는 일정하게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날치떼가 더 큰 고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바다는 곧 날치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 반례가 영화 속 미어캣으로 뒤덮인 섬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그 섬이 식인의 섬, 죽음의 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미어캣의 존재로도 설명이 된다. 그 수많은 미어캣의 존재는 그곳이 생태의 섬이 아님을, 생태계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에는 영역의 문제가 있다. 이런 수많은 힘이 다른 동물들이 이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게는 배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음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고, 크게는 바다 위에 던져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도 알 수 있다. 즉 바다라는 짠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라는 지금까지 지냈던 곳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즉 이 파이라는 인간과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의 바다 위의 227일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존의 원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에는 생태계의 균형과 영역의 확보가 들어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성적인 믿음으로 생각해보면 둘 중의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어야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성적인 일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파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했듯이 사실은 두 이야기는 형태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에는 종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한 것은 결국 두 번째 이야기이다. 즉 같은 종 사이에서 벌어진 지극히 배타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이성적인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사실은 다른 종이 다른 종을 잡아먹는, 공격하는 이 첫 번째 이야기가 실제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아주 지극히 특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므로 사실 첫 번째의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이야기는 지구에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이나 얼룩말을 공격하며, 물론 그런 하이에나는 호랑이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즉 개체가 멸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에는 위에서 말한 절묘한 생태계의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생태계는 너무나도 절묘하게 짜여져 있어 그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신을 상상하게 된다. 이 신이 정해준,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동물원, 그것이 어쩌면 배, 혹은 지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둘의 기적적인 생존에도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물에서 건져주었고, 파이는 그가 되뇌이듯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파이가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선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신은 그에게 떠다니는 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계속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존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 외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존이라는 것에는 '매우 다름' 혹은 '차이'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 우리가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이미 매우 다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공존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호랑이와 인간만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 안의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종교의 공존, 혹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와의 공존 같은 경우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흔히 공존보다는 비공존을 믿는다. 즉 서로 다른,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같은 종인 인간 끼리 비공존했다는 이야기를 결국에는 믿으며,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존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벌어지고 있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계에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러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잘짜여진 계라 가끔은 우리는 그 계 위의 어떤 것, 그 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들. 그 비가 쏟아지는 동안 노아의 방주 속 한쌍의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버텼을까,라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른 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덧.
이 영화를 3D로 감상하였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붙여둔다. 3D는 영화라는 매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실 이 3D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기술상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3D의 형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3D는 두 대의 카메라의 2D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이 붙여진 두 개의 2D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컴퓨터의 계산이 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즉 아무리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계산, 눈이 실제로 지각하는 이미지의 층을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종 3D 영화에서 인물이나 물체는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종의 포토샵에서 사용되는 레이어와 같은 것이랄까. 여기에는 몇 개의 층이 있어서 인물이나 물체는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놀랍게도 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떠 있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의 부력은 이 영화의 3D를 종래의 다른 3D와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3D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안 감독의 이 3D 영화가 가장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종종 3D임을 잊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못 만들어진 3D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란, 어쩌면 역으로 그것이 3D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영화들에서는 종종 3D의 효과를 과시하듯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그런 장면들이 3D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종종 잊게 만든다. 즉 이 장면을 3D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었군, 이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순간 관객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 처음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혹은 음악이 거슬릴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는 영화에서 소리(음성)가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다. 즉 '음..지금 배우의 목소리가 나오는군'이라고 (당연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 소리가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는 한편으로 영화에 소리를 통합하는 영화적 문법이(기술이 아니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영화에서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영화에 음악을 넣는 문법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즉 3D가 완전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아..이거 3D효과군,을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때, 당연히 3D안경도 필요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그런 면에서 이안 감독의 이 3D영화가 3D영화로서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는 지금부터 3D가 나와요, 그 효과를 만끽하세요,라는 과시의 장면이 없다. 그 3D효과는 상당부분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것이 3D영화임을 잊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전 안경을 쓸 때의 버릇처럼 코를 계속 문질렀지만 어느틈에 나는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 2013년 1월,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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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탐 후퍼

Ending Credit | 2013. 1. 2. 18:1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펙터클(spectacle), 즉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관, 혹은 볼거리라는 것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특히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쪽에 가깝지만, 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스펙터클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스펙터클이라 불릴 수 있는 장면은 특이하게도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 두 군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된 씬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 내용상으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첫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죄수들이 큰 배를 독으로 끌어당기는 장면이다. 돛이 부러지고, 거의 침몰 직전의 배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스펙터클은 광장에 드넓게 펼쳐진 바리케이트와 그 바리케이트 위와 뒤편의 군중들이다. 그 바리케이트의 재료들, 그러니까 가득 쌓아올려진 각종 가구들은 이것이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 가지의 공통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인력이다. 이 대규모의 인력이 만들어내는 어떤 거대한 힘은 분명 보는 이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이 두 장면은 반대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의 죄수들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그들의 육체는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속은 모두 어떻게든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반면 마지막 장면의 군중은 누군가 시켜서 그곳에 나와 바리케이트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이의 대비는 이것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 바닥에 끌리는 프랑스 국기와 마지막 장면의 바리케이트 위에서 나부끼는 프랑스 국기의 차이. 즉 이 두 장면은 일종의 대구이다.

이 스펙터클은 혁명이라는 것의 어떤 보이지 않는 것, 말로만 이야기 되는 그 실체의 어떤 실루엣을 아주 조금은 드러내보인다. 이를 이런 질문으로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여 대답하면 그것은 그러니까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다. 영화의 중간,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와 일단의 청년들이 만든 집 앞에 존재하는 바리케이트와 그 마지막 바리케이트를 비교하여 보자. 마지막 장발장(휴 잭맨)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혹은 천국에서 존재하는 그 거대한 바리케이트와 실제의 봉기 - 뭐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혁명'과 '봉기'의 용어상의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있지만, 솔직히 그 간극이 그렇게 넓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에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가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즉 혁명은 직관적으로는 크기의 문제이다. 포악한 제정, 혹은 독재 정권은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시민들의 '크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일단의 공화파 청년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계획한 영화 속 봉기 - 역사적으로는 1832년 6월의 봉기 - 는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듯이 그 크기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즉 민중들의 호응을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실패와 성공을 이 영화는 직관적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단일한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민중이란 사실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다.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 움직이는 양상을 때로는 약간 부정적으로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가 판틴(앤 헤서웨이)이 공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결국 겉으로 보여지는 판틴을 공장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들은 판틴과 공장 안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여공들, 그러니까 민중들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판틴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는 물론 동료 여공들의 시기심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이 트리거가 동료 여공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판틴이 거리의 여자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동정과 시기심과 체념과 질투와 같은 것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민중이라는 존재의 어떤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두 갈래가 나오는데, 하나는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이고, 하나는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이다.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는 이런 민중의 욕망이 극대화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주위 사람을 등쳐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물론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란 같은 민중들이다. 자베르 경감은 보다 복잡한 캐릭터인데, 자베르 경감은 이 <레미제라블>의 전체 구도 속에서 장발장의 거울상이다. 자베르 경감이 법의 영역을 상징한다면, 장발장은 그 법의 이면에 있는 휴머니즘(인간)의 영역을 상징하는데, 이 둘이 거울상임은 예를 들어 이 두 인물이 모두 영화상에서 한번의 기회를 얻지만 그 기회를 배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장발장은 신부님이 재워주고 먹을 것을 주지만 성당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며, 자베르는 장발장이 죽이지 않고 살려주지만, 다시 그런 장발장을 잡으러 나타난다. 그러나 무릇 거울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자베르 경감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자베르 경감이 자라나 결국 장발장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민중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자베르 경감은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중간관리자이고, 봉건주의적으로 말하면 마름이다. 중세의 지배계층은 이 봉건제도를 만들어 내며, 또하나 결정적인 것, 후세에도 계속 영향을 미칠 어떤 것을 발명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마름의 존재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 등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이 마름, 중간관리자는 그들 역시 지배 계층이 아니면서도 거의 대부분 지배 계층보다 훨씬 더한 잔학성을 보여주며, 이것에는 물론 마름들 자신의 지배계층을 향한 욕망, 그리고 작은 권력의 쾌감이 작용을 한다. 즉 지배계층은 결국 뒤에 멀찍이 서서 손안대고 코를 풀게 되는 것은 마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이 마름의 활용은 그 이후에도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까지 지배의 한 원리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에게 곤봉을 날리던 전경, 혹은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건물에 오르던 경찰 특공대원, 아니면 그것을 지시한 한 기업의 중간관리자 출신인 MB의 경우라면 어떨까.

그런 자베르 경감이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다시 '민중'이라는 것. 그런 자베르, 즉 민중이 민중을 괴롭히던 것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몸을 던질 때 결국은 던져지는 (낯간지럽지만) 메시지 같은 것.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리케이트의 크기와 통한다. 왜냐하면 결국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나쁜 민중일지라도, 즉 판틴을 내쫓고, 숙박자들의 몸을 털고, 설혹 자베르와 같은 민중일지라도, 그런 모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청년들 앞에서 문을 닫고 그들을 외면하는 민중들이 바로 동시에 혁명의 주역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베르 경감의 죽음이, 그리고 그 거대한 상상의 혹은 천국의 바리케이트가 보여준다. 그 거대한 가재도구의 집합이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불변성'을 거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장발장의 믿음이 있고, 그것을 장발장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런 원칙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질 때, 이는 그 원칙이 깨질 수 있음을 장발장과 동일하게 단지 믿음이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연결된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이 민중들이 변할 수 있다는 점, 그 불가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것의 불가능성을 어떻게든 믿으려 애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민중들을 믿어야만, 그들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공동으로 움직일 때에만 무엇인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금 2013년에 <레미제라블>이 필요하다면 그런 이유다. 그 '고통받는 사람들',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때로는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그 사람들을 왜 끌어안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그건 <레미제라블>이고 '장발장'이다. 새벽 5시에 투표장에 나와서 투표하고, 고엽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엽제를 뿌리는 곳으로 보낸 사람의 딸을 지지하고, 방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탑골공원에 나오면서도 그 방값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멍청해서, 혹은 콘크리트라서, 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베르 경감의 다른 버전이다. <레미제라블>의 숭고함은 그러니까 절대 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숭고함이다. 그것을 영화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바리케이트로서 말이다. 그들이 없으면 바리케이트를 만들 수 없다.


덧.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은 <레미제라블> 영화만을 본 이후에 썼으며, 원작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작과 비교해서 뭔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아직 원작을 보지 못한 내 게으름과 우둔함 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가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사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얼마나 스크린에서 잘 보이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 이야기가 2013년인 지금에 필요한가, 영화는 어떤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는가, 어떻게 재해석을 하고 있는가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가 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직접적인 메시지의 힘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 대사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나마 노래이기 때문인데 - 그 노래가사들을 직접 대사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 뮤지컬 혹은 오페라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영화화했을 때의 장점 역시도 놓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한 대규모 스펙터클은 물론이고, 여관에서 부부가 등쳐먹을 때 이어지는 그 현란한 편집은 쾌감이 느껴질 정도. 평론가 듀나 씨는 이 영화의 영화로서의 힘을 도리어 빈번한 클로즈업에서 찾던데 그건 생각해 볼만한 부분.  



- 2012년 12월,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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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영화들

Interlude | 2012. 12. 31. 17:11 | Posted by 맥거핀.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이 되다보니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책을 펴들면 올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읽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이 책상에서 올해 무엇을 해왔나를 생각하게 되고, 사람의 얼굴을 보면 올해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무엇인가를 남기려 블로그에서 하얀 빈 창을 열게 되니 나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도대체 써왔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 그러므로 다른 정리는 다른 곳에서 하고 이곳 블로그에서는 그간 이야기했던 영화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올해의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싫어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늘 어느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2012년은 대선이 있었고, 거의 1년 내내 정치를 이야기하던 지극히 정치적인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정치적인 대중들과 분리되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극히 대중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1년 내내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 과연 '정치'라는 것이 있었나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대선 이후에 벌어진 몇몇 이상한 이야기들, 누군가를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한다거나, 혹은 어떤 집단을 몰아세운다거나,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는 이야기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 경기에서 누군가의 실수가 있었을 때 그를 패배의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 것. 그러니까, 이것에는 정치는 없고 스포츠만 있다. 중대한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 승리하게 되면 누군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배했을 때에는 누군가를 희생양을 삼는 것. 왜? 그렇게 해야, 자신은 승리자로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패배자는 다른 누군가이니까.

그러나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정치가 스포츠와 가장 다른 점은 정치는 그 정치의 과정,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스포츠라고 해서 그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치를 스포츠를 응원하듯이 소비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방식으로 소비했다. 그것은 투표 이전부터 이미 강하게 드러났다. 예를 들어 TV토론 같은 것에서부터 말이다. 스포츠관람자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어떻게 이길 것인가의 문제였고, 어떻게 토론에서 상대방을 '바를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스포츠관람자들 자신도 사실은 잘 알고 있듯이 TV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가'이지, '누가 더 잘 이야기하는가'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이야기의 화제에 주로 오른 것은 누가 더 나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후 그런 스포츠관람자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은 '패배를 내 안에서 다른 곳으로 내보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누군가 때문에 졌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혜경(김정은)은 연습경기에서 진게 너 때문이라고 한 선수를 몰아세우는 코치에게 되묻는다.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럼 이겼을 때는 누구 때문에 이겼다고 할 거예요?" 승패를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승리하면 모두 때문에 승리한 것이듯이, 패배하면 모두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서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아니 굳이 패배의 원흉을 찾자면, 아마도 그 패배의 원흉을 찾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패배의 원흉일 것이다.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만큼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고 비난받는 어떤 영화제의 심사위원장과 비슷한 심정이라고 허세를 떨어보자. 아마도 나는 이 인물들이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나타났으면 이 인물들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영화가 2012년이 아니라 다른 때 개봉했으면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마지막에서 떠오르는 것은 이 인물들과 이 영화들이다. 영화는, 그리고 그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만이라도 이들을, 이 영화들을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표현과 형식은 S님을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데헷.)


올해의 남자 : <토리노의 말>의 마부(야노스 데르즈시)

마지막 여섯번째 날, 마부와 딸은 '소멸'된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소멸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것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것이며, 파괴라기 보다는 소멸이다. 그리고 영화는 완벽한 무(無)가 남는다. 그것의 영화적인 형태는 그러니까 검은 스크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찍는 감독의 완전한 종결의 선언인걸까, 혹은 그것을 넘어선 한 세계의 종결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러나 하느님이 육일동안 세상을 만든 후 일곱번째 날 쉬시고는 그 일곱날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나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검정색 스크린을 딱 두 번 본다. 한번은 영화가 완전히 종료될 때에, 다른 한 번은 영화가 시작하려 할 때에. 한 영화가 완전히 종료되어야만 다음 영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올해의 여자 : <화차>의 차경선(김민희)

<화차>의 세계는 부루마블 게임과 같다. 우리는 싫든 좋든 주사위를 굴려야만 하고, 우리는 싫든 좋든 그 판을 빙글빙글 돌아야만 한다. 부루마블 게임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때로는 무인도나 감옥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아, 그 영화에서 깡패도 "나도 차라리 빵이 더 편해!"라고 소리를 질렀던가. 우리가 그 게임에서 떠나려면 파산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딱 두 가지의 선택지, 하나는 어떻게든 빙글빙글 돌던가, 아니면 파산해서 영원히 게임에서 떠나든가 하는 딱 두가지의 선택지만 남아있다. 그나마 우리는 파산하게 되면 길 위에서 말을 치울 수 있지만, 불쌍한 차경선은 여전히 기차길 위에 누워 있다. 누군가는 이제 그 말을 치워주어야만 하고, 다른 많은 차경선들을 어떻게 뛰어내리지 않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두가 파산하게 되고 승자 하나만 남으면 결국 게임은 '완전히 끝난다'. 즉 다른 방식으로 모두가 '소멸'된다.


올해의 영화 :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나는 사실 이전의 글에서 이 영화의 몇몇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고, 그 의문에 대해 마땅한 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 영화가 그다지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튼 올해의 대선에서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은 집권여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기록하여, 그들, 그러니까 최소한의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그 곳에 올라간 다섯 명의 죽은 철거민들과 어떤 사건인지도 정확히 모른채, 심지어는 그 곳에 두 개의 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곳에 올라간 한 명의 죽은 경찰 특공대원, 그리고 졸지에 범법자가 된 수많은 다른 철거민들과 이상한 기억에 시달릴 수많은 다른 경찰대원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다른 많은 매체에서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꼽은 것은 이 대선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2012년의 영화에서는 나는 적어도 9명의 사라진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나, 이기고 짐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이 9명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놓친 영화들을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순서는 없음)

1.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2. 밍크코트, 신아가, 이상철


3. 휴고, 마틴 스콜세지


4. 크레이지 호스, 프레데릭 와이즈먼


5.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6. 어머니, 태준식


7, 도주왕, 알랭 기로디


8. 레드 마리아, 경순


9. 파우스트, 알렉산더 소쿠로프


10. 신의 소녀들, 크리스티안 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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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 조성희

Ending Credit | 2012. 12. 11. 16: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적 내용이 들어있음)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다. 조성희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동화'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며, 조성희 감독은 그 컨셉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플롯이 아니라, 단선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와 캐릭터들의 활용이 그런 부분일텐데, 예를 들어 엄마(장영남)나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 악역인 지태(유연석) 등을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활용에 머물러 있으며, 적시적소에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활용이 제한되어 있다. 즉 외로운 산골 마을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엄마의 어려움이나, 지태의 내면적 갈등 같은 것은 이 영화가 동화를 표방하고 있는 한, 이 영화에는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모자>에서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을까, 말까 내적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이미 동화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를 한편으로는 순이(박보영)와 철수(송중기), 이 두 메인 캐릭터에게 덧씌워진 어떤 적절한 한계와 같은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이 두 메인 캐릭터는 사랑을 하되, 그것은 동화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즉 이 영화는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혹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두 메인 캐릭터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데에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혹 사랑을 이루어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왜? 동화니까. 동화는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야지, '그 후에 섹스도 하고, 애도 낳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소년>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앞과 뒤에 액자를 씌워 놓고, 여기에 할머니가 된 순이를 등장시킨다는 것. 이게 명백히 동화를 표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동화 <백설공주>가 다 늙은 백설공주가 나와 과거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를 상상하는 그 이질감 말이다. 즉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은 그 판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이든 혹은 제작사이든 이것이 판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판타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일단 하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마지막 씬들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골집도, 카라멜도, 심지어는 철수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보존된 공간이 순이에게 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전과 완전히 똑같아, 라고 말해줄 때, 이것이 어떤 판타지를 강화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꿈이 깼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꿈속의 인물이 나타나, 아니야 너는 아직 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꿈을 억지로라도 지속시킨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 어떤 영화의 잠재된 핵심, 그러니까 여기에 영화의, 혹은 감독의 무의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 앞과 뒤의 액자들은 영화의 주플롯과 분리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동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모든 영화제작사들은 1분이라도 영화에서 줄어들기를 바라므로, 이 액자가 사라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리뷰들을 보면 상당수의 관객들도 이 액자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필요치 않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이 사실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늑대소년>을 다룬 글(씨네21)에서 철수를 '어정쩡한 타자'로 규정한다. 즉 철수는 '10대 소녀의 백일몽(김혜리)'이라는 견해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선다(이용철)' 라는 견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0대 소녀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는 미소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철수라는 늑대와 인간 사이에 위치한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철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지태나 군인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이므로 -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서 -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박사나 순이의 가족, 마을사람들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곳 인간세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자를 만났을 때 제기되는 즉각적인 질문, 이 타자는 나에게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순이의 편, 그러니까 철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철수의 '길들여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철수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순이의 조련으로 인해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철수는 기다리라는 순이의 간절한 외침에도 다시 야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철수의 인간세상에로의 편입은 실패한다.

즉 이 영화 <늑대소년>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간단하게 말해 '괴물'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길들이려다 결국에는 실패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긴다. 인간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십 년 후 순이가 돌아왔을 때, 그 괴물은 스스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길들여짐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것도 조련사의 도움이 없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괴물은 조련사가 길들이는 데 실패하였지만, 기어이 스스로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조련사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다. 즉 조련사는 늙고, 괴물이 되었지만, - 영화의 첫 대사를 기억해보라.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이런 괴물을 봤나..." - 괴물은 잘생기고, 뽀송뽀송한 예전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 깔린 어떤 전제이다. 즉 철수는 길들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괴물인 적은 없지 않았나,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는 철수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집어넣고 시작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이다. 즉 순이의 길들이기는 어쩌면 '가짜 길들이기', 아장아장 소꿉장난과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의 힌트들이 있다. 철수와 순이의 첫 조우. 예를 들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철수는 왜 순이를 공격하여 잡아먹지 않았나. 그가 늑대라면 도리어 인간인 순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철수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구요. 그래서 철수는 순이와 엄마가 내민 감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감자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사실 철수의 먹이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철수를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고 있던 양동이에 가득담긴 생고기 조각들. 그런데 이제 와서 감자와 밥과 국과 잡채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뭐 좋다, 늑대인간은 잡식성일 수 있으니까. 다음의 장면. 김혜리는 짤막한 글(씨네21)에서 예리하게 다음의 장면을 집어낸다. 철수가 마을의 염소를 해쳤다는 누명을 쓰자 순이가 "네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캐묻는 장면. 그러면서 설명을 단다. '그녀도 영화도, 늑대소년을 슬픈 인간으로 볼 뿐, 그의 수성(獸性)까지 받아들이진 못한다.' 김혜리의 지적대로 늑대소년이 염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데도, 그녀도 영화도,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지태가 저지르는 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농담으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부터 감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괴물이라는 가능성은 순이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송중기니까.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정쩡한 타자 늑대소년을 보며, 그의 밝은 면만 들여다본다. 늑대소년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사에게 엄마가 "아..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요."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관객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진 탓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늑대소년'이라는 사실 이 복잡한 타자는 무엇인가가 제거되어 있고, 소녀도, 영화도, 관객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타자가 가지는 불온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 가 제거된 늑대소년, 혹은 송중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심지어는 당연히 변해야 할 늑대소년마저도 그대로 보존된 공간을 본다. 그래서 이를 과거로의 타임머신, 혹은 과거의 박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를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만들고,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의 동물 박제이건, 북한의 김일성 박제이건 간에 그 박제물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굳이 액자로 만들어낸 과거의 박제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혹시 시간의 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 박제가 시간을 망각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부 "이런 괴물을 봤나...'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그것은 어떤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늙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자신과 늑대소년을 둘러싼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욱 완벽히 제거되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 괴물, 아니 그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름답고 뽀송뽀송하게 스스로 정화된 과거의 어떤 박제물이다. 즉 이 과거에는 과거 그 시간 이후로 사십 여년이 넘게 흐른 그간의 세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깨끗하게 보존된 김일성의 박제에 몇십 년 간의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늑대소년은 김일성이 아니라 송중기다. 과거의 괴물에게는 이미 어느정도 이 수성이 제거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시 퇴행하여 돌아간 이 현재적 과거에서는 그 수성의 흔적조차 이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담도 아니고, 철수의 성장담도 아니고, 그저 박제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액자의 시작부분에서 그녀의 대사 "이런 괴물을 봤나...'에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싸이보그지만 (예쁘니까) 괜찮아. 괴물이라도 잘생겼으면 괜찮아. 인간이라도 늙었으면 괴물인걸. 늙음, 그 늙음이 보여주는 시간은 그렇게 망각되어 다시 타자들을 분리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정상성'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작동된다. 아름다운 아리아인, 아름다운 육체, 아름다운 인간성. 

아..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는 물론 동화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동화는 동화 이면의 기담을 담고 있음이 또 사실이 아니던가. 한 잉여의 늑대소년 기담, 쯤이라 해두자.



- 2012년 12월, CGV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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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쿠스쿠스, 압델 케시시

Ending Credit | 2012. 12. 6. 18:0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영화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의 마지막, 이제 새롭게 선상(船上)식당을 시작하려는 늙은 슬리만의 배 위에서 시범 운영 겸 개업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대접하여야 할 전처가 만들어준 생선 쿠스쿠스는 자식들 간에 벌어진 소동 끝에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리고, 슬리만은 그것을 찾으러 나가지만,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생선 쿠스쿠스가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의 부서질듯한 관계와 자신의 오토바이를 몰고 달아나는 어떤 아이들이다. 손님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고, 그녀의 새 딸, 그러니까 새로 만나고 있는 여자의 딸인 림은 그런 손님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갑자기 밸리댄스를 춘다. 그런 밸리댄스는 손님들의 열광 속에 농밀하고 아슬아슬하게 하염없이 이어지고, 슬리만은 자신을 거의 데리고 노는 듯한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그런 쓰러진 슬리만의 모습과 이국적이고도 이질적인 밸리댄스의 음악이 겹치며 엔딩크레딧이 오른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슬리만 가족을 비롯한 아랍계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문화가 들어 있으며, 예전 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의 문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합의 문제가 들어 있고, 구성된 가족과 가족의 해체, 분열,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결합과 그런 가족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가 나타나며, 동시에 계층과 계급의 문제, 즉 그 선상식당의 수많은 손님들의 다양한 동상이몽이 드러난다. 이것을 감독 압델 케시시는 거의 마법과 같은 솜씨로 마지막에 압축시키며,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감춘다. 즉 이 수많은 문제들은 수면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수면 위에는 오직 두 가지만을 드러내 보인다. 그 하나는 밸리댄스, 그 중에서도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 아니 이 표현으로는 사실 다 담기 어렵지만 - 배이며, 다른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와서 가져가보라고 조롱하는 아이들의 뒤를 쫓는 슬리만의 달리기이다. 이 두 가지가 교차하며, 여기에 밸리댄스의 흥겹고도 농밀한 음악이 겹쳐질 때, 그것은 어떤 이상한 축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축제가 아닌 축제, 그럼으로써 더 축제가 된 어떤 마법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마지막은 산적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활력과 축제의 힘이 만들어내는 희망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힘, 여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힘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아들, 그리고 결국 길에 쓰러지는 아버지와 달리, 이 축제를 지속시키는 것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를 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곤경을 누그러뜨리는 림의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새 딸인 림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림의 밸리댄스로 약간은 해소되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 사이에 슬리만의 새 여자는 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가져온다. 그리고 동시에 슬리만의 전처는 남은 생선 쿠스쿠스를 어느 노숙자에게 전해준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생선 쿠스쿠스를 유일하게 맛보게 되는 것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물론 이것이 수렴되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배이다. 이는 어떤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다산성이나 모성과 같은 느낌인데, 이 림의 배와 슬리만의 달리기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슬리만의 아이들을 뒤쫓는 달리기는 마치 그의 생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닿을듯이 닿을듯이 오토바이에는 닿을 수 없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오토바이는 그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족들을 건사한다는 목표로 한평생 공장에서 일했지만, 공장에서는 버려졌고, 성적으로는 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선상식당을 시작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만, 그 목표는 이제 위기에 처해있고, 그는 그 목표가 가장 가까이에 와 있을 때 달리기의 끝에서 예정된 쓰러짐을 맞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길한 마지막이고, 안타까운 결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여전히 슬리만의 다음 세대, 그러니까 그의 자식들과 그들이 만들어낼 세계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상식당의 밸리댄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딸 림이 축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추는 춤, 그것으로 조금은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가족들간의 화해, 그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나갈 발걸음을 이 마지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곳 프랑스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 살아야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중반부 슬리만은 선상식당을 하기 위해 낡은 배를 구입하고, 그것을 고쳐나간다. 그리고 선상식당을 열기 위해 여러 복잡한 절차, 그러니까 식당허가를 받고, 투자를 받고, 위생에 대한 감독을 받는 등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이 배는 그러니까 어쩌면 슬리만이라는 사람의 재현일지도 모른다. 그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이 이민자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느라 점점 낡아졌으며, 그 마지막에서 그는 새롭게 수리되어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려는 배처럼,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배와 달리 완전히 고쳐질 수 없는 것. 대신 사람은 배와 달리 다음의 세대를 낳고, 그들에게로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새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들어온 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기잡이 배가 식당용 배가 되려면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과거의 습관, 과거의 문화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들은 새로운 땅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부는 또 새로운 세계로 긍정적으로 수렴되어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이 영화에서의 '생선 쿠스쿠스'와 같은 것이다. 쿠스쿠스(couscous)는 파스타의 일종으로 그것에 채소를 곁들이면 채소 쿠스쿠스, 생선을 곁들이면 생선 쿠스쿠스 등이 되는 음식이다. 이는 슬리만 가족과 같은 튀니지 이민자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음식이지만, 그것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 선상식당의 손님과 같은 프랑스 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이질적인 음식이며, 따라서 그 선상식당에서 처음으로 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음식은 한편으로는 이민자 사회의 상징, 즉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규칙의 습득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긴장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긴장들은 다음의 세대들로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 압델 케시시는 이러한 것을 그들의 육체로서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음식, 그 음식을 소비하는 육체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음식이면서, 그 음식을 소비하고 활동하는 육체이기도 하다. 압델 케시시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물의 곁을 바싹 따라붙는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들의 교차로 채우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간의 갈등과 그들의 미묘한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며, 이는 마치 세대들의 육체성의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여성들의 가슴이나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씬이 많고, 이것과 연관한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이는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어떤 세대간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있다. 예를 들어 뚱뚱하고 축 늘어진 전처의 몸매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슬리만의 여러 자녀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림이 그 몸매를 흉보는 것은 그 자식들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슬리만의 자녀들 세대 역시도 이미 그 다음 세대의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하는 아기들이나, 더 나아가 그 림의 풍만한 배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싫든 좋든 이민자 사회는 새로운 세대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슬리만이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도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규칙들을 배우고, 또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축제가 아닌 축제를 보여주며, 그리 쉽게 해결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따스함을 읽지만, 누군가는 폭력을 읽고, 또 누군가는 밸리댄스에 흥겨워할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사라진 생선 쿠스쿠스에 답답해 할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쉽게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단지 이어나갈 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의심하고, 험담하고, 애정을 보여주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렇게 별다른 도리 없이 다음 세대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슬리만을 위해 연주를 해주는 노인들의 대화가 이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전세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다.



-  2012년 11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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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The Book | 2012. 12. 3. 16:19 | Posted by 맥거핀.
얽힘의시대대화로재구성한20세기양자물리학의역사
카테고리 과학 > 물리학
지은이 루이자 길더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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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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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는 것보다 미친 것이 낫다

The Book | 2012. 11. 25. 22:37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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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대리언 리더 (까치,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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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미친 것(being psychotic)'과 '미치는 것(going psychotic)'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간단히 말해보면 '미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quiet madness)'의 상태이다. 즉 정신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정신병이 눈에 보이는 현상,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이상행동으로 촉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한편에 있는 '미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병의 상태이다. 어떤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특이하고 반복된 행동을 보여주거나, 이상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렇게 나눌 수도 있다. 미친 것은 일상 생활과 완전히 양립이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더한 일반성을 보여주지만, 미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광기가 촉발되므로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예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을 하나의 시계라고 생각해보면 '미친 것'은 예를 들어 정확하게 항상 5분이 늦는 시계이다. 항상 5분이 늦는 시계를 보며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시계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그것은 매순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분명히 커다란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반면 '미치는 것'은 가끔 10분이 늦어지다가, 갑자기 5분이 빨라지다가, 혹은 바늘이 하루에 20바퀴를 돌기도 하는 그런 시계다. 즉 우리는 그 시계를 보고는 도저히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시계 역시 앞의 시계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즉 분명한 것은 두 시계 모두 무엇인가가 고장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 '미친 것'과 '미치는 것'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그와 연관하여 이 사람이 미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망상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망상은 그가 정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도리어 그것은 정상으로 돌아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미친 것'을 일상생활과 양립이 가능하며, 그들 대부분의 경우 정상인에 거의 완전하게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들이 '미친 것'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책에 나온 에른스트 바그너의 사례를 보면 그는 1913년 9월 4일 밤에 자식 4명과 아내의 경동맥을 끊고, 뮐하우젠 마을로 가 9명을 사살하고, 12명에게 상해를 입히기 전까지 모범시민이자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 전혀 광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는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즉 그가 광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이전부터 미쳐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시계로 돌아가본다면 '그'라는 시계는 매시 매순간 정확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시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의 저자 대리언 리더가 비판하는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대리언 리더는 환자 한명 한명의 세세한 사례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세밀한 정신분석을 실시하고,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정신병적인 구조가 생겨나게 된 이유와 그것이 촉발하게 된 과정에 대해 분석하는 1950년대 이전 과거의 방식을 긍정하며, 현재와 같은 정신병의 진단과 치료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신병의 눈에 보이는 증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해 약이나 수술 같은 것으로 치료하려는 현재의 흐름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은 환자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정신병이라는 진단의 가짓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만을 약물로서 치료하려 하다보니 도리어 약에 반응할 것으로 예상되는 증상만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는 어떠한 눈에 보이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점점 정신의학계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대로 보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에른스트 바그너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친 것'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상에만 대증적인 처방을 하는 것은 정신병을 더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와 주위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시도하는 방식은 일단 정신병과 신경증을 구분하고(즉 '미친 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규명하고), 정신병을 큰 세 가지 줄기, 즉 정신분열과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나누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누는 것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나누는 방식 중에 하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경증자에게 외상은 억압된다. 대표적인 억압의 방식은 기억상실이나 대체이다. 즉 신경증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히스테리나 강박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폐제(forclusion)한다. 즉 그런 생각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각 속에 어떻게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망각되거나 대체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폐제는 그것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상은 폐제로 인해 완전히 없었던 것 같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촉발되면 나중에 실물로서 실재계로서 정신병자에게 돌아온다. 이를 위해서는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도 없고, 논할 능력도 없지만) 간단하게 상징계는 언어와 법의 세계, 상상계는 몸의 이미지의 세계, 실재계는 몸의 리비도, 즉 흥분이나 자극으로 볼 수 있고, 상징계가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상징계에 무엇인가(예를 들어 외상)를 통합할 수 없을 때, 정신병이 생겨난다. (상징적 질서의 큰 부분은 '말(언어)'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신병자의 말과 논리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라캉이 새롭게 해석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fus complex)와 연관지어 살펴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남근에 대한 거세 위협으로 남자아이가 엄마를 오이디푸스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반명 여자아이는 남근 덕분에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라캉에 의해 조금 변형되었다. 즉 라캉은 이를, 아이가 상상계의 수준에서 엄마를 위한 팔루스(phallus, 남근상)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상징계의 수준에서 팔루스를 가지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의 수준에 남아있지 않고, 상징계의 수준으로 통합됨으로써 아이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상징계에 위치함으로 인하여 의미를 새로 세우고, 몸의 리비도가 활동할 영역을 제한하며, 타자(the Other)와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상징계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나 실재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론 그것은 근친상간으로 금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정신병적인 형태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병은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우울증의 크게 3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 3가지를 나누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상당히 복잡하다. 정신분열증자에게 의미는 불안정하며 분명하지 않다. 박해자(정신병자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여기는 무엇)는 몸의 내부에 있거나 외부에 있을 수 있으며, 때로 신체감각의 통일성을 잃으며, 리비도는 몸에 집중된다. 반면 편집증자에게는 의미는 좀더 명확하며, 리비도는 박해자에게 집중된다. 즉 박해자는 편집증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외부에 있다. 예를 들어 위에 논한 에른스트 바그너의 경우에 편집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자신이 죽인 뮐하우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박해하는 잘못된 무엇인가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반면 우울증자는 편집증자의 거울상이다. 우울증자의 경우 리비도는 자신의 이미지 안에 있다.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하한다. 즉 편집증자에게는 잘못은 타자에게 있지만, 우울증자에게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가장 간단하고 획일적으로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우울증과 정신분열과 편집증의 차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랜시간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진단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정신병의 원인과 증상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맞게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함이며, 정신병자와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함이다. 즉 문제는 그들을 치료한다, 정상인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정신병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었을 때 모든 스승들이 "정신병을 완전히 낫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즉 저자가 긍정하는 예전의 정신의학 전통으로 돌아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신병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신분석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의 상태, 그러니까 정신병이 있기는 하지만 정상생활이 가능한, 거의 보통인과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정신병자 스스로가 정신병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힌트를 찾을 수도 있다. 정신병자는 자신의 정신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몇 가지 기제를 쓰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가 안정화와 창작이다. 안정화(동일시)는 예를 들어 자신을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이다. 일례로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소설가라던가, 외로운 등반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작은 어떤 상징적 질서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정신병자는 어떤 특정 신조어를 창작해냄으로써 어떤 예외의 공간, 자신만이 도피할 수 있는 빈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정신병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 그를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대로 정신병자가 자신을 어떻게든 다스리려 하는 것, 정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신병의 문제는 실로 복잡하고, 수많은 사례와 수많은 분석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이 대리언 리더가 원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을 쓸 때 저자의 목적 중에 큰 하나는 정신병이 약이나 수술로서 처방이 가능하다는 현재 정신병을 다루는 주류적인 시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일 것이며, 환자 각각의 사례와 그의 정신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병을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신병이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전대의 경험, 그러니까 대리언 리더가 칭송하는 이 예전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이 정신분석들 역시도 어떤 위험을 여전히 내포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두 번째 사례연구로 든 판케예프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인데, 그가 정신분석가들의 어떤 분석이나 치료로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정신분석가의 동료로서의 위치를 점해서 좋아졌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의 위험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즉 정신병자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의 경우,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한다는 사실.) 다만 나와 같은 일반독자의 입장으로 보면 너무 논의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또 너무 어려워지는 경향도 있다. 일반서와 전문서의 경계에 서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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