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컷, 아미르 나데리

Ending Credit | 2012. 3. 2. 17:3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있음)


아미르 나데리의 <컷>은 사실 줄거리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영화다. 예술과 오락이 결합된 영화만들기를 꿈꾸지만, 자신의 영화를 실패하고, 불법 상영회로 꿈을 근근히 이어가던 슈지(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자신의 영화 제작비 때문에 야쿠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죽은 형을 대신하여 오로지 맞는 것으로 남은 빚을 갚아나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감독 아미르 나데리는 이야기의 핍진성 따위는 별 개의치 않는듯, 오로지 메타포와 직접적 메시지로 서사의 빈 구멍을 메워나간다. <씨네 21>에 보면, 이 영화를 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영화의 메타포를 간파하여 말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기요시에 따르면, 슈지가 매를 맞는 행위 자체는 감독의 영화 만들기의 비유이며, 그에게 장소와 돈벌 기회를 제공하는 조폭 중간 보스는 프로듀서, 옆에서 그의 맞는 행위를 돕는, 슈지가 오즈 영화들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한 노인은 촬영감독, 그의 매맞기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요코(토키와 다카코)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실 일종의 비유적 메시지가 이 영화에는 가득한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하여 살펴보면, 슈지가 돈을 손에 가득 쥔 남자들의 펀치를 받는 장면들은, 영화 제작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적인 자본의 계속적인 간섭과 요구들로 볼 수 있다(이것이 한편으로 조폭들의 폭력으로 보여지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어떻게보면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 조폭이며- 조폭들은 왜 명품수트를 입는가 -, 그런 조폭이야 말로 오로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기 때문이다). 감독 슈지는 그런 자본들의 요구에 맞서서 계속 자신의 영화, 즉 육체를 지탱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슈지가 맞으면서 계속 되뇌이는 자신이 상영회에서 상영한 영화 고전들의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또 한편으로 이는 결국 환영(幻影)으로 이 세상을 버티게 해 줄 동력을 제공한다는 영화의 근본적 가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맞는 행위 자체가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맞아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소리 없이 어떻게 환영을 지속할 것인가). 그러나 슈지에게는 지금 여기에서, 그 펀치를 맞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이어지는 펀치라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투입을 감독에게 계속 처절하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적어도 자본의 펀치를 계속 인식하는 것이고, 최소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슈지는 돈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강력한 펀치 앞에 자신의 육체를 맞서서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슈지는 호의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폭 중간보스의 제의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슈지에게는 멍들고 망가진 육체가 필요했다. 멍들고 망가진 육체라는 것은 자본의 힘에 망가지고 상처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본을 아무 댓가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머리 속의 망가진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동시에 슈지에게는 '이 장소에서' 맞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화를 믿고 아무런 간섭없이 제작비를 대준 형이 죽어간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기꺼이 지지해준 관객들에 대한 보답이며, 그 사라져간 최후의 관객에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든 지속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슈지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단 그 메타포를 무조건 긍정하기 전에 그 메타포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몇 가지의 질문들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슈지의 말대로 예전의 많은 영화들은 오락과 예술이 결합되었던 것임에 비해, 오늘의 많은 영화들은 오로지 폭력적인 자본이 투입된 오락영화들일 뿐인가. 그리고 이와 연관된 질문으로 오늘의 많은 영화들이 단지 오락영화일 뿐이라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폭력적인 자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영화들을 기꺼이 보아준 수많은 관객들의 책임인가. 혹은, 그 와중에서 진정한 영화라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곳에서는 오늘도 몇몇 논쟁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거대자본이 투자된 영화들, 그 거대한 스펙타클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이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그리고 재미없는 어떤 영화들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왜 나쁜가를 묻고 있다. 이의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 거대한 스펙타클이 사실 당신 안의 어떤 세계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 영화들이 어떠한 부분에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도리어 그 영화들에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오던 문제들이며, 여전히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슈지는 이 영화에서 예전에는 오락과 예술이 결합된 영화들이 많았고, 현재는 오락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지만, 과거의 영화들도 오락과 예술은 거의 하나가 된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일례로, 슈지가, 아니 감독 아미르 나데리가 밝히는 최고의 영화들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당대에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후일에 재평가된 영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재평가에 크게 기여를 하여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바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욕을 먹고 있는 영화비평가들이다.) 예전의 많은 시기에도 오락영화는 오락영화일 뿐이었고, 예술영화는 예술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는 영화들이 당대에 많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들의 감식안이 떨어진다는 반증일까.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꿔보면, 단지 오락물로서만의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영화들이 많이 양산이 되는 것일까. 자본의 입장에서도 소위 '예술적'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부분에서 관객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에서도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으며, 영화의 거의 전부에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자본의 큰 간섭 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들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루트 자체가 대자본으로 공습하는 영화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며, 많은 대중영화들의 시작에 감독이나 주연배우들의 이름보다 투자사의 이름이 먼저 오르는 것은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부분에서 관객에게 완전한 '무혐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본다. 다시 이 영화 <컷>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한다면 슈지에게 펀치를 날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그 펀치 세례를 그대로 방조한 책임을 조금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라는 것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살인의 방조, 혹은 자살의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인 것은, 영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영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 리뷰의 범위를 넘을 뿐 아니라, 내 깜냥의 범위도 넘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펀치 자체를 아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에는 자본의 펀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펀치라는 행위의 형태도 그렇지만, 그 펀치 자체로도 그렇다. 즉 영화에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제 이 영화의 끝으로 가보자. 영화의 마지막 슈지는 결국 모든 빚을 갚지만, 다시 그 조폭에게 돈을 빌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 영화를 찍는다. 자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다른 모든 예술들보다 훨씬 자본이 필요하며, 자본과 밀착하게 결합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으로부터 탄력을 받아,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하였고, 영화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를 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영화의 시작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거의 그 궤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시기의 겹침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필름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상당히 잡아먹는 물건이다. 디지털이면 달라질까. 그대신 이제는 3D라는 자본을 먹는 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초창기부터 그 자본의 펀치들을 같이 맞아온 대중들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었다. 영화가 '그들만의 예술'이었던 적은 없었다. 영화는 한번 만들어지면, 반복하여 상영이 가능했고, 대량으로 전파가 가능했다. 즉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물론 '글'은 말할 것도 없고)이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다면, 영화가 그런 예술의 지위를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슈지에게 가해지는 100대의 펀치와 크로스되어 제시되는 아미르 나데리가 관객들에게 가하는 100대의 펀치(100개의 영화 리스트)를 맞으면서,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이는 일종의 '인정 투쟁'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다른 예술들과 다르게 영화에서 만은 이런 '리스트'가 횡행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대중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자라난 영화가 어떻게든 그 대중들을 밀어내려는 몸부림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뭔가 이렇게 다른 영화를 보아왔다는 몸부림. 자신만의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대중들과 자신들의 사이에 방벽을 치려는 무의식적 자의식. 영화가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몸부림은 혹시 아닐까. (차라리 영화의 역사나 혹은 감독들의 계보를 나열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BEST 100인가. 왜 BEST 100의 형식이어야 했나라는 물음.) 그 마지막의 장면들에서 나눔과 연대, 동지적 의식보다는, (요즘의 많은 리스트들의 제시에서 느껴지듯), 경쟁과 구분의 뉘앙스가 더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미르 나데리의 영화 <컷>은 끝까지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결기(혹은 허세)로 밀어붙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가 제시된 후, 갑자기 순간 무성(無聲)이 되어 무대밖과 안을 넘나드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보인다거나,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것 등), 이야기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씨네필이 아니라면 씨네필이 아닌 사람들을 거의 아무 생각 없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고, 씨네필이라면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을 과잉하여 드러내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아미르 나데리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저 영화는 마지막에 외칠 뿐이다. 컷!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컷, 잘라낸다는 것. 잘라내고 싶은 것은 자본인가, 대중인가. 그 둘 중 어느 것도 잘라낼 수 없다면,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2012년 2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