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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조, 이광국

Ending Credit | 2012. 3. 19. 18:45 | Posted by 맥거핀.

 

3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스타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감독. 이감독은 새로운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프로듀서에게 떠밀리듯 허름한 시골 여관에 머무르게 되고, 심심풀이로 부른 다방 레지에게서 '로맨스 조'의 기묘한 러브스토리를 듣게 된다.

인기 여배우 우주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그녀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로맨스 조'는 영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시골로 내려간 '로맨스 조'는 우연히 다방 레지와 마주치게 되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첫사랑 초희를 떠올린다.


이것은 영화 <로맨스조>의 포스터에 나와있는 짤막한 줄거리이다. 이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은 분들은 하나 약간 흥미로운 점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 사이의 어떤 것. 즉, 영화의 제목도 '로맨스 조'인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로맨스 조'의 이야기인 듯한데, 굳이 앞의 액자 즉,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라는 액자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이다. (그것도 조금은 더 수상쩍게 만드는 것은 이 두 문장 사이의 어떤 유사한 점이다. 앞에 나오는 '이감독'과 뒤에 나오는 '로맨스조'라는 전직 조감독이 둘다 감독인 것으로 봐서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영화가 이것은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짐짓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굳이 오랜 과거로 거슬러오르지 않더라도 최근의 작품인 손영성의 <약탈자들>은 오로지 이야기만으로만 이루어진 영화였으며, 이 영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이 영화를 만든 이광국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액자를 덧씌우거나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이미 시도되었다(<극장전>, <하하하> 등). 그러나 이 영화는 <약탈자들>이나 <하하하>의 이야기들과 같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 진술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면서도, 전자의 영화들처럼 같은 인물과 같은 사건을 보는, 인물들 사이의 기억의 혼재, 그 반복과 차이와 미로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극중인물인 다방 레지(신동미)의 표현처럼) '새로운 서사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이야기이되, 고정적인 소실점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이 이야기들은 연결되기는 하지만, 뭔가 기묘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야기들은 시간의 축이나 인물들의 연결점을 미세하게 어그러뜨리고 있으며, 다중적으로 이야기들을 연결짓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기대게 되는 본질적인 고정선이 묘하게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며,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 영화의 흥미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에서 생겨나며, 감독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과도 연결되는데, 여타의 이런 류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사실 이 결말은 어떻게보면 사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극중 로맨스조(김영필)는 한번도 이야기밖으로 나아간 적, 즉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 그 이야기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 결말은 과잉된 친절인 것처럼도 보이고, 불필요한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필요하다.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잘 요약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를 이야기 속 그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내용이 아니라, 그 전달하는 방식을 보려주려고 했던 첫번째 질문의 의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 속의 인물'이라는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끝을 내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는 굳이 그 끝을 내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끝이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그 이야기들의 시작, 기원에 있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불쑥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하는 자의 간청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영화 속 모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려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모든 이야기들은 누군가 듣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왜 이야기를 요청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이야기의 존재가 다른 이야기의 논거가 된다. 즉 그물망처럼 연결된 이 이야기들 중 어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전체 이야기에는 큰 구멍이 생기고, 다른 이야기들도 그 존재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존재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로맨스조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방 레지가 순간적으로 프레임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이는 컷은 의미심장하다. 로맨스조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녀 역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곧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 되기도 하며, 역으로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희(이채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로맨스조(이다윗)가 한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파괴되지 않고 조금은 남아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두번째는 결국 처음의 질문과도 연관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사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놓고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용보다는 그 방식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야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화가 있던가.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가,이다. 로맨스조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매개체로만 보였던 다방 레지에게도 전화 씬을 부여하며,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풀어내는 것,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 초희를 그토록 괴롭혔던 소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소문들이 단지 무가치한 소문이고, 그것이 때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유통되는 방식에 있다. 영화가 이야기를 무신경한 방법,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낼 때, 때로 영화는 뜬소문보다 훨씬 더한 공격무기가 되고, 사람들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즉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와 그 이야기를 적절한 방식, 적합한 방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영화는 그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질문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야기가 빈곤해지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마치 소문들이 소비되는 것처럼 낭비하여 소비하려고만 드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동시에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여야 하며, 노력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 영화는 다시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내용 자체로서는 사실 빈곤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손을 내밀고 싶다.  


- 2012년 3월, 미로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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