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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김원영 (푸른숲,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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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짦은 문구이긴 하지만, 책 표지의 소개는 꽤나 강렬하다.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되는가. (p.7)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책은 보통의 에세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휠체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저자. 그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에서 벗어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이 몇 가지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가슴아픈, 그러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승리의 이야기로구나. 장애인도 저렇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어. 우리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긍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루한 추측.

그러나 저자는 선언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고. 그리고 저자의 그 도발적인 선언답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저자가 시작하게 된 것은 분명, 자신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떤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지면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것은 저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토로도 아니고, 어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아니며, 그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는 도리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것도 아주 불투명한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통의 장애인들의 인간승리 에세이나 혹은 젊은 친구들이 수능 만점을 받고, 혹은 미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쓰는 에세이와는 거의 반대의 지점에 와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내었다는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뜨거운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인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장애인을 일단 사회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장애인들은 사회에 의해, 애써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시설을 통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호'라고 부르지만, 보호는 결국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사회와 분리시켜 가두는 것이다. 즉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애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이다. 즉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나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단순한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려고 할 때, 아무리 보조 인력이 있다해도, 여전히 주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인에 대한 시혜없이, 이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연대'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연대라니, 여기서 연대라는 용어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연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서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와 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과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마찬가지로 연대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낮은 사람들과는 연대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하고만 못 하겠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사람과도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우리와 연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여전히 어떤 벽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장애인으로서 결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저자는 지적장애가 없는 것, 그리고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비교적 나은' 몸,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 등등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과 비장애인들과의 사회적 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장애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회의 물질적 계급과의 어떤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장애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일 수도 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그 벽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각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위에서도 잠깐 썼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는 점, 즉 그는 여전히 길 앞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라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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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폭력사회'에 대한 고찰인가

The Book | 2010. 4. 15. 23:36 | Posted by 맥거핀.
폭력사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볼프강 조프스키 (푸른숲,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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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쓰여졌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은 일어나고,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세상 곳곳의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들은 거의 '폭력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전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것을 '폭력의 세기'라 불렀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악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르며, 인간들의 폭력성은 개개인의 어떤 도덕적인 타락이나,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악으로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이 폭력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무자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폭력사회>의 저자 볼프강 조프스키(Volfgang Sofsky)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왜 폭력을 행하게 되는가? 조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질서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질서로서 억압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 되살아나는 것. 이 폭력은 물론 단순하게 반질서, 혹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질서 그 자체 역시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질서가 더욱 공고화되면 공고화될수록 응축된 폭력의 강도는 조금씩 세진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 (p.13)


그러므로, 폭력의 근원은 단순히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다시 한 번 홉스로 돌아가 보자면,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것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었다. 즉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종의 규율을 가진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신체상의 안전을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든 목적이다..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고, 조프스키도 여기에 동의한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안전에 대한 희구이고, 그 안전에 대한 희구가 극대화된 것이 질서를 제일의 우선으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질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불안한 연결고리로서 이루어진, 그 안에 폭력적인 요소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그 어떤 것, 즉 타인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자라난다. 질서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에서 보듯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도 자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질서는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것에, 즉 적이건 친구이건 간에 모든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질서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명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제국주의는 단일 원칙의 보편주의에서 두드러진다. 다르다는 것, 타자는 공격을 유발한다. 타자야말로 상대화, 불확실성, 위험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초토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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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여러 양상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들만 나열하여 보아도 분명할 것이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의 양상과 그 작동방식을 이 책은 철저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1장 이후부터는 각각의 폭력적인 테마들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의 치밀함으로 인해, 때로는 욕지기가 밀려올라올 정도이다. 폭력사회의 여러 양태들, 그리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이란,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육체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가 정신적인 폭력을 간과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저자는 정신적인 폭력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인 의문으로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즉 이 사회에서 폭력의 요소는 이곳저곳에 너무 많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 그런 폭력의 요소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물론 모든 책이 어떤 해답을 던져줄 필요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문학은 어떠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고, 굳이 그것에 대한 어떤 전망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답을 내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왠지 저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알았던 어떠한 것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문화적인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적인 충동의 힘 때문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잠재력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는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문화적 형식들이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박살 내려고 한다.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갑자기 인간애나 도덕적 절제가 솟아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p.325-326)


 인간의 폭력이란 그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 인간이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인간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뿐, 문화라는 것 역시 그런 폭력에 일조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의 폭력성을 말끔히 제거해 줄 사회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문화마저 그것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여기 역자 후기에 몇몇의 힌트가 있다. 조프스키의 전 저서 <안전의 원칙>의 큰 주제는 '자유냐 안전이냐'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구호 중 하나인 자유를 안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 책 <폭력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역자의 말마따나 논의의 폭이나 깊이는 <안전의 원칙>을 훨씬 능가한다.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한다...그리고 반문화, 다중(multitudo)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에 대한 알러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잘 조직된 폭력 뿐이라는 것...우리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몇몇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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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씨네코드 선재』2010.06.29. [인디포럼 월례비행]〈호수길〉대담

인디포럼 월례비행 (네이버 카페 ‘씨네코드 선재’ 게시글 링크)
<호수길>
● 일시: 2010년 6월 29일(화) 20:00 호수길
● 장소: 씨네코드 선재
● 입장료: 6,000원

● 대담: 정성일(영화평론가)
● 진행: 변성찬(영화평론가)

언젠가부터 시작된 ‘서울시 재개발 사업’, 또 어느새 시작된 ‘4대강 개발 사업’, 바야흐로 이 나라는 ‘개발 공화국’이 되었다. 물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삽질 공화국’일 것이다. 그 ‘삽질’에 수많은 도시 영세민들이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녀야 하고, 그 보다 더 많은 자연 속의 생명들이 살 곳을 영영 잃어버리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7,80년대 ‘개발 독재’의 망령이 깃든 그 ‘삽질’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빨리’ 변하는 이 나라에, 여전히 변치 않는 것들이 많다. 지난 해 용산 참사에서 비극적으로 나타났던 ‘철거의 공식’도 그 중 하나다. 여기 그 ‘철거의 공식’에 새로운 리듬과 화법으로 저항하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 서울에서도 제일 먼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은평 지구, 이곳은 감독이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담은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고향에 대한 시적 에세이이자, 개발이라는 이름의 광폭한 ‘속력’에 맞서는 저항의 기록이다. <호수길>이 보여준 느림의 미학, 그것은 이 ‘미친 속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윤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상영작소개
정재훈 | 2009 |72min | 한국 | Color
햇빛이 가득한 산동네.
동네에는 나무도 있고,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집도 있다.
어느 밤, 동네에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인다.

* 참고 -『씨네21』2009.12.29.735호. 이 시체를 보라, 그리고 응답하라 : 은평구 응암2동 철거 장면을 담은 <호수길>이 요구하는 것

:

바비 (BOBBY),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Ending Credit | 2010. 2. 13. 17:30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 영화다. 글쎄.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노골적인 정치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여러 리뷰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영화의 제작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들. 이 영화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마틴 쉰,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피쉬번, 헬렌 헌트, 샤론 스톤, 데미 무어, 크리스찬 슬레이터, 샤이어 라보프, 린제이 로한, 애쉬튼 커처, 헤더 그레이엄, 프레디 로드리게스 등 -역시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로서 거의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작되고 개봉한 시기는 2006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참고 견뎌야 했던 시기였던 부시의 시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정치색은 거의 명백해진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는 모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이 영화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당시의 자료화면과 실제 연설목소리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로버트 케네디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도 연기자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카메라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을 피해서 지나간다. 이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가짜의 사건이 아님을, 즉 만들어내거나 모사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건임을,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이나, 행동이 각색된 것이 아니라, 그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총격 사건에서 계속 울려퍼지는 그의 육성 연설문. 명 연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연설은 영화 속 마지막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도 상업영화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치인의 연설을 십여분 이상 직접적으로 들려주며 영화를 끝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영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의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조금은 산만하고도,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던 그날, 앰배서더 호텔에 있던 여러 인간 군상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돈 드라이스데일의 6경기 연속 완봉 투구를 보러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멕시코인 호텔 직원, 호텔의 지배인으로서 다른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남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나이든 여가수, 옛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호텔 직원, 마약에 빠져 할 일을 제쳐두고 마는 철없는 선거운동본부의 운동원들, 고압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호텔의 또다른 직원,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상류층 여자, 스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여자,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는 흑인 조리장, 베트남에 남자를 가지 않게 하려고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 로버트 케네디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따내려고 하는 체코인 여기자....이 모든 인간 군상들은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모두 별개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개로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런 얘기다. 즉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조금은 얽혀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말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들 각각의 생활은 분명히 서로서로 그다지 직접적이고 큰 관계는 없고, 직업적 관계로 얽혀있는 않는 한 대부분 앞으로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이 서로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 즉 마지막 총격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총격 세례를 받고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별개처럼 보였던 삶이 사실은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공동의 재난에 같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많은 재난 영화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인 재난에 빠져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을 묻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 그러나 이 방식은 엄밀히 따져 볼 때 여기에서는 가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총격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의, 즉 총격 이후의 그 재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총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들은 그저 시각화된 상징에 불과한 것. 

그보다 궁극적인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결국 정치란 우리 삶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의외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케네디의 연설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 연설의 주된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제 폭력을 중단시키자는 것, 미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적인 폭력, 베트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이제는 중단시키고, 이제 평화의 메시지를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그 연설에서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던 주체는 이제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라진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킹 목사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일어난 또하나의 비슷한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이 절망은 분명히 당 시대의 인간 군상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굳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일상은 이 이후에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인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 삶들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불륜이니, 직장동료니 하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당대의 시대분위기, 시대흐름이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의해서 결국 얽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양쪽에 있어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흐름을 긍정하는 것, 혹은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구조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 삶의 어떤 부분에서 심각한 불편함을 야기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사족)

1968년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았고, 그 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글쎄. 그 때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예를 들어서 그 이후에 이라크전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튼 2006년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했고, 그 이후에 2009년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에서 이 영화는 개봉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대통령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MB 정부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글쎄.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었으면 미국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다른 어떤 것은 몰라도 적어도 던지는 메시지 하나는 천지차이라는 점.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나라면 후자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2010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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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 2010.01.08

은평구 응암2동 철거 장면을 담은 <호수길>이 요구하는 것 

 

올해 일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냥 다시 저 집에 들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먼저 세편의 영화. 가장 무서운 집.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은 낯선 제천에서 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친구 부상용(공형진)을 만난다. 그리고 한밤중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이상한 아내 유신(정유미)과 살고 있다. 이 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앞과 뒤를 따지려 들어도 일시에 이 모든 시도를 와해시키면서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인지 알 수 없는 마술적 상황으로 끌고 간다. 숏 사이의 접속이라는 몽상. 말 그대로 귀신들린 집. 가장 이상한 집. 박찬욱의 <박쥐>. 신부 상현(송강호)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보았지만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일층과 이층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분수의 집은 거의 쓰러질 것만 같다. 이층은 과밀하게 우굴거리고 일층은 대부분 비어 있다. 도무지 올라갈 방법을 알 수 없는 이층. 올라온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마치 자기 증식이라도 하듯이 늘어나는 방들. 도대체 이층에는 몇개의 방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 같은 복도. 라 여사(김해숙)는 비밀을 알고 있을까? 태주(김옥빈)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음란한 집. 봉준호의 <마더>. 낮에도 거의 밤처럼 어두운 집. ‘마더’(김혜자)는 자기 집에서 이불을 펴고 아들과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이다. 도준(원빈)의 방에서 한밤중에 윗옷을 벗은 친구 진태(진구)가 걸어나와서 그녀를 껴안을 때 그녀가 정말 안아주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두명의 이중효과, 혹은 착시효과. 이때 어느 쪽이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뒤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안을 때, 도준과 ‘마더’가 몇 차례이고 그 체위를 반복하면서 이불에서 껴안을 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위반의 선을 마지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과 꿈. 무의식과 환상. 죽음과 섹스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 음란한 환상을 건너지 않고 ‘마더’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집들을 생각하다

물론 다른 집도 있다. 또 다른 세편의 영화들이 다루는 집.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 은모(서우)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중식(이선균). 그는 왜 환대받지 못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 왜 은모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혹시 그 집이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아닌가? 시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할 수 없다. 플래시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집.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집. 그런 다음 폭발시켜버린 집. 그때 정말 폭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와중에 진행되는 철거. 집을 부순다는 문제. 혹은 철거 용역에 몸담은 상훈(양익준). 내면 속의 지옥과 같은 두채의 집. 상훈과 연희(김꽃비)의 집. 집을 부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시의 변경에서 부서져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양익준의 <똥파리>. 미쳐버린 동생, 혹은 신들린 동생을 찾아서 돌아온 언니 희진(남상미)이 마주해야 하는 집. 아파트라는 집. 그 집의 수상한 이웃들. 이용주의 <불신지옥>.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올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세워진 5층 상가에서 새벽 6시45분에서 8시30분 사이, 고작 1시간45분 만에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당했다.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다. 그것은 육체이며,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고,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집은 삶의 크기이며 그것을 탈취당할 때 삶도 도둑질당할 것이다. 집의 전유와 재전유에 대한 전술을 우리는 공유해야만 한다.

왜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한편의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올해의 발견이자 최전선이다. 정재훈의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마치 이 모든 비밀회의에 가까운 유령들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을 수정하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건축적 구조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일 때 거의 오로지 혼자서 <호수길>은 전혀 다른 지리적 탐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수길>의 선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도 필요없다. 그냥 같은 시대에 같은 지리적 동네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의식만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허깨비가 아니다. 영화 제목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 이름이다. 영어 제목도 ‘Hosu-Gil’이다. 이게 골목 이름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는 호수가 없다. 아마도 예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 길을 따라가 보아도 호수는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없어진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은 있지만 없어져가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호수길>은 간단하지만 소개하기에 까다로운 영화이다. 그래서 시네마디지털서울 신은실씨의 소개가 조금 길긴 하지만 대신 인용할 생각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 뜬 하늘과 산이 보이는 동네에는 ‘호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사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한편, 볼일 보러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 산책하는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 텃밭을 일구는 아낙들, 마실 나온 할머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엄마가 있고, 때로는 경찰차가 동네를 오가고, 개와 고양이도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마지막 불빛이 꺼져버리고,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빈집 천지가 되어버린 동네를 부수는 굉음이 들려온다. 개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고양이는 죽음을 맞는다. 빈집에서는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불도저와 인부들은 물을 뿌려가며 동네를 계속 부순다. 햇빛은 강하게 빛나고, 새들도 동네를 떠난다.” (시네마디지털서울2009 카탈로그, 105쪽)

시적인 소개의 문장들. <호수길>에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다. 물론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는 그저 동네 어귀에서 개짓는 소리뿐이다. <호수길>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촬영은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SF영화같아보이는 이유는

<호수길>은 2년 동안 촬영한 영화이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 이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호수길>은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 영화이다. 정재훈은 취미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찍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어서 사람들이 이주하고 텅 빈 동네에 혼자 남아서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영화. 그러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방어능력도 없이 할 때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지요.”(2009년 11월7일 관객과의 대화) 물론 이 말은 비유이다. 이 영화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단 한숏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정재훈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 장르영화에서 악당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덱스.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소도구 컨벤션. 그는 왜 그런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

정재훈이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아무리 빨라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이 재개발지구로 결정된 다음일 것이다. 말하자면 행정적 결정이 난 다음에 시작된 영화. ‘포스트’로서의 영화.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결국 떠나가야 하는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이들. 물론 영화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는 동네 주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마치 낯선 혹성에 와서 탐사를 하는 듯한 카메라. 당신은 이 영화가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것처럼 시작한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꾸만 <호수길>이 SF영화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 있고 그들과 카메라의 거리는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가청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없다. 말의 바깥에 있을 때 대상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망원렌즈로 담은 사람들은 카메라의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재훈은 카메라의 거리감과 거의 동일한 마이크의 사용을 통해서 시각과 청각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영화에서 남는 것은 동사뿐이다. <호수길>은 오로지 동사들만이 존재하는 표면효과만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표면을 본 다음 그 안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야만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호수길>을 보면서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표면효과들의 예. 정재훈은 철거를 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시위에 관심이 없다.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고요하게 진행된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행정적 작동) 측량 기사들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수행적 장치). 물론 전경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사건의 변수). 먼저 첫 번째, 은평구 응암2동은 지방 시골에 있는 폐쇄된 동네가 아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종로3가에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서울 안의 거주지역이다. <호수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시작하고 난 다음 42분이 될 때까지 이 동네의 생활을 찍은 장면들에서 신기할 정도로 남편들, 혹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정재훈을 만났다. “이 동네에 출근하듯이 가서 찍은 건가요?” 말하자면 촬영을 정해놓은 시간대가 있느냐는 질문의 우회.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전 이 동네에 살면서 찍었습니다.” 정재훈은 남편들이, 혹은 아버지들이 거리에 보이는 시간대를 피해서 찍었다(또는 그것을 편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마치 이 동네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영화의 후반부, 이 동네를 때려부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배제 상태의 진행은 다큐멘터리에서 신기한 결정이다.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그 다음 두 번째. <호수길>의 자막에 따르면 영화는 “2006년 가을에서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찍었다. 이 기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모두 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은평구 응암2동은 날씨의 변화가 전혀 없는 동네처럼 보인다. 언제나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 단 한 차례의 비도 오지 않으며, 겨울 내내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니, 흐린 날씨조차 없다.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서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맑은 날씨로 설정하면 그걸 여러 날에 나누어 찍을 때 숏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호수길>은 단 하루로 설정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건도 없이 그 동네의 일상을 찍었다. 장면 사이의 극적인 연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날씨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을 뿐이다. 맑은 하늘. 구름조차 없는 날씨. 다만 가끔 바람이 분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호수길>의 첫 장면은 낮달이 보이는 하늘이다. 낮에 달을 보다니. 그런 다음 마치 카메라는 거기서 추락하는 무언가를 뒤쫓듯이 지구로 내려온다. 아니, 자신이 추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로 내려온 다음부터 카메라는 항상 멈춰 서서 찍고 있다. 우주선이 고장 난 것일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팬을 하거나 혹은 틸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은 극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뜻. 극영화는 그렇게 인물을 세워놓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정해놓고 동선을 설계했다는 뜻이다. 다른 뜻. 다큐멘터리에서 일단 카메라가 서면 그걸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물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장소의 느낌, 시간의 흐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인물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사건을 다루느라 매달리는 동안 정재훈은 응암2동을 느껴보고 있다.

정재훈은 <호수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카메라가 고정해서 서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42분10초 이후, 그러니까 철거 ‘이후’부터 손으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대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못 느꼈으면, 이라고 바라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도 정재훈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멈춰 서서(fixed) 찍었을(camera) 것이다. 그런데 철거 ‘이후’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움직이는 이유, 혹은 손으로 든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미학적 근거. 앞부분의 멈추어선 카메라는 그 동네의 일부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동네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거기 서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다음 철거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자기가 의지할 데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기의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흔들린다. 표류의 상태. 자기가 살던 장소가 낯선 공간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향이라는 지평의 상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과 전혀 말을 나누지 않는 마이크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실용적 이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철거현장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를 들이댄 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촬영을 제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철거 현장은 이상하게도(당연하게도?) 마치 사건 현장처럼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혹은 그 정도라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신분을 물어본 다음 왜 여기서 촬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 못하면 신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세워놓으면 갑작스러운 충돌 혹은 압수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들고 찍을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 게다가 <호수길>은 대부분 혼자 촬영하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깨져버린 평화. 고요함 뒤의 위기감. 마치 정지된 것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손으로 들고 찍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수길>이 담고 있는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가와 신스케의 유명한 테제.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과 발은 그 영화의 세계관이다. <호수길>은 그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전’ 장면의 멈추어 선 숏에서 갑자기 인서트처럼 개입하는 줌의 사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정재훈의 첫 번째 대상. 지구로 내려온 카메라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벌레와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담기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 물론 이 영화는 자연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응암2동의 골목을 보여주는 프레임들은 마치 <스틸 라이프>의 구도에 가깝다. <호수길>은 같은 화면을 일정하게 되풀이하면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학습효과. 우리는 이 동네의 풍경을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정한 간격의 진행에는 우리가 충분히 그 풍경을 보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이 바뀐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리듬감. 동네의 소리들이 매우 작게 녹음된 화면들은 시작하고 4분4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마치 스며들듯이 분명하게 들린다. 저물어가는 여름, 혹은 이미 시작된 가을. 골목 계단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면 아줌마와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 둘의 사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지나가면서 흘낏 카메라를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재훈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는 이 계단에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를 지나갔고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기를 내버려둔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정재훈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담는 것이다. 이 순간 지나가는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동일한 세상이라는 리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호수길>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수길>에 관한 그 어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후’ 철거가 시작되는 참혹한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 영화에서 감도는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일촉즉발의 느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사건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건이 없는 서울의 풍경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호수길>은 낮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뛰어들어간다. 어떤 조명의 도움도 없는 촬영. 그저 골목에 켜진 가로등, 혹은 대부분 불이 꺼진 동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영화 혼자 깨어 있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거기 무언가 기다려서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장면들은 아주 깊은 밤, 거의 대부분이 잠든 밤까지 기다려서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불을 켠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외로운 섬처럼 불이 켜진 집.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다시 <호수길>은 낮 시간으로 옮겨간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 두 번째 낮은 이 동네의 작은 텃밭에서 (무언가를) 경작하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줌으로 다가간다. 좀 갑작스러워서 느닷없게 느껴지는 줌은 우리에게 지금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리적 확인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줌으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잘 보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텃밭에 있는 할머니와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얼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골목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밤을 맞는다. 앞에서 본 밤 장면과 똑같진 않지만 그러나 같은 태도를 갖고 밤을 지새운다. 물론 이 장면이 밤을 지새우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찍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고요한 시간대를 찍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카메라는 도리없이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 두개의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두께). 촬영한 시간(의 순간).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도 보지 못한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출현도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낮. 같은 리듬의 반복.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걸어갈 정도로 불편한 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면서도 힘겨워서 자꾸만 다른 한손으로는 벽에 기댈 만큼 힘겨운 걸음.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때 갑자기 움직이면서 할머니에게로 줌인한다. 우리는 등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줌으로 쫓아가던 카메라는 특별하게 무얼 보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더 줌인을 한다.

두번의 줌인. 지나치게 멀리서 줌을 해서 심지어 화면의 질감에 픽셀이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화면이 뭉개지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이례적인 방법. 우선 정재훈은 할머니(의 행동이나 동선)을 훔쳐볼 생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줌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줌인은 대상의 방법을 기억시키는 기호이다. 같은 말의 다른 말.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줌의 방법을 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러한 방법으로 보는 대상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거의 멈춰 서서 진행되는 숏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다. 이 줌인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화질 때문에 오히려 대상과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호수길>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잠든 할머니. 아이들의 노는 소리.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그리고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우리는 화면의 변화에 대해서 점점 민감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할아버지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나뭇잎들은 단풍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치는 밤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길한 밤이다. 밤거리에 불빛도 없이 개가 짖고 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먼저 소리칠 때, 지금 여기에 들어선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낯선 자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는 낮 장면. 우리가 이미 보았던 계단 길. 골목길을 올라오는 소녀. 아이들은 종종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눈 마주침이 영화와 인물 사이의 어떤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저 거기 있는 나무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화감. 그런 다음 <호수길>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응암2동의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숏 장면이 아이들의 얼굴과 디졸브된다. 교과서적으로만 말하면 디졸브는 추억의 입구이거나(플래시백의 시작) 두개의 장소 혹은 사건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 다음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다. 여기서는 망원렌즈로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카메라와의 접촉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차례로 다가와서 카메라를 만지기도 한다. 마치 기억의 소환과도 같은 순간.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서 함께 생각하도록 요구할 때, 나는 이 롱숏의 집들이 다름 아닌 클로즈업의 아이들이 사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롱숏과 클로즈업의 매듭. 차라리 단일한 결합. 숏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 재결합. 그러나 두개의 숏이 디졸브 형식을 가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령효과. 유령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불길함, 혹은 사태를 예견함

그리고 다시 우리가 몇번이고 보았던 그 골목길. 동일한 프레임. 멀리 떨어진 카메라(와 마이크).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이 그 길에서 뛰어논다. 저 멀리서 오던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중간에 놓인 침상에 앉아 쉰다. 6분40초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지속되는 이 장면은 앞부분, 그러니까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 장면 중에서 가장 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플랑 세캉스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줌으로 잡아당긴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평화로운 장면은 모두 끝났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저녁 장면. 몇번이고 보았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응암2동의 전경. 동네 여기저기에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밤 장면. 동네 전경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봇대의 불안정한 불빛. 다시 낮.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돌아본다. 그 할아버지를 카메라는 줌으로 당겨서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카메라를 의심하듯이 바라보던 시선은 없었다.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게 만든 것일까? 카메라도 이제까지 무심하게 지켜보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를 망원렌즈로 쫓아간다. 거의 ‘뭉개질 정도로’ 다가간 줌. 그런 다음 놀이터가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저 멀리 아파트촌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여기는 바그다드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 <호수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태를 예감하게 만든다.

침묵. 그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회색빛 시멘트 벽을 따라 처마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을 알 수 있는 시간의 기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추위를 보게 만든다. 두 번째. 거기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누가 물을 틀어놓은 것일까?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그 물방울은 고드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적이 사라진 황폐함.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시 밤. 무시무시한 밤.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밤.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사람이, 어쩌면 모니터에 보이는 그 누군가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유령의 흔적. 그가 사람이라면 이 한밤중에 왜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그가 모니터 속의 그림자라면 지금 이 늦은 밤에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 빛은 무엇인가? 저 푸르스름한 빛만이 남았다. 저건 등대가 아니다. 불 꺼진 동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때 문득 카메라는 그리운 듯이 하늘을 본다. 어둠 속에서 관용도가 매우 낮은 저가기종의 디지털카메라로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거기 볼 게 있다는 뜻이다). 프레임을 메우는 지글거리는 그레인. 밤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내민다.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낮달이었음을 기억한다. 달은 다시 지워진다.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그 무시무시함

42분10초. 다시 여름. 다시 놀이터. 그러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적 소리이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철거 ‘이후’의 첫 장면.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오른쪽으로 느리게 팬을 하는 이 파노라마 숏은 ‘경축 응암 제8구역 관리처분 계획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보여준다. 집들은 이미 창문이 대부분 뜯겨나갔고 거리는 마치 지금 막 폭탄 테러를 당한 듯이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이 스산한 바람소리. 나뭇잎들은 그때처럼 펄럭이고 있다. 두개의 펄럭임. 플래카드와 나뭇잎. 우리가 몇번이고 본 그 골목길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게 뒤로 걸어간다.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신 걸어간다, 고 말한 이유는 명백히 이 후진 트래킹숏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뒷걸음질치면서 찍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이 동네에서 정재훈이 마주치는 건 거의 부서져버린 화단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고양이다. 이때 우리는 이 고양이를 이제까지 정재훈이 사람을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지나치게 줌으로 다가가서 픽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뭉개져버린 화면. 왜 정재훈은 사람과 고양이를 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의인화의 숏.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한계 허용치를 벗어난 줌. 정재훈은 거기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어쩌면 뛰놀던 소년 소녀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에서 느리게 줌아웃하는 카메라는 카메라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두 마리의 나비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도 이 나비는 CG가 아니다. 우연히 끼어든 나비. 정재훈은 예민하게 그 우연의 리듬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나비는 매몰차게도 금방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철거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재훈은 그 현장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오로지 흔적들뿐이다.

정재훈이 고양이 다음에 마주치는 건 골목을 떠도는 개 한 마리이다. 그리고 그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 골목, 어린아이가 뛰어놀면서 카메라를 얼핏 바라보던 그곳에서 마치 그 아이처럼 혼자 논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개는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간 이 골목에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 불쌍한 개. 그 개의 목에 묶여 있는 목걸이를 보건대 아마도 인도견이었던 것 같다. 그 개 없이 그 개의 주인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존재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재훈은 자꾸만 나무를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그 참혹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포클레인이 집을 때려부수는 소리는 쉴새없이 들려온다. 정재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 이미 우리가 보았던 계단,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를 차례로 방문한다. 거기에 감정을 담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 앞에서 쫓겨난 과거의 시간을 본다.

영화가 시작된 지 54분15초. 저 멀리서 공사하는 포클레인.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대 로봇. 부서지는 집들. 날리는 먼지가루. 거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누군가가 두고 간 빨래.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보. 그 이불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이불은 잠을 잘 때 덮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집에서 잘 때 제일 편하다.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잘 때의 불편함. 그런데 왜 이불을 두고 간 것일까. 이불이 불편한 짐이 되는 삶을 상상해보라.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전봇대의 참새들이다. 정재훈은 마치 그들을 출연이라도 시킨 것처럼 자기 카메라 안에 담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집 저편으로 새떼가 무리를 지어 이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날아갈 수 없는 카메라는 시선을 떨구듯이 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 우리가 좀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단에 버려져있다. 이 말의 방점은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버려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가? 대답은 명백하지만 끔찍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과 지금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 이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일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찮은 건 누구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 그를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협박. 가장 무서운 협박은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파리들이 들끓는 고양이의 시체. 시체가 보여주는 이 장소의 무시무시한 상황. 이때 <호수길>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이즈에 가까운 음향효과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찢는 듯한 피드백 노이즈. 시체라는 결과 안에 담긴 폭력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살아본 우리 시대의 철거에 관한 경험의 공유이다. 만일 이 시체를 그저 무심코 지나친다면 매년 전세 이사 걱정없이 사는 당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

<호수길>은 시종일관 거리에서, 골목길에서, 계단에서 진행된 영화이다. 하지만 56분30초가 되었을 때 정재훈은 집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은 이미 모두 부서졌고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없다. 정재훈은 방 안에서 거의 중얼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집 안과 바깥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게 쾅,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결에 문이 닫힌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사람 없는 집에서 문을 여닫는 바람. 카메라가 방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 뜯겨져나간 창문 바깥에서는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다. 그때 여닫히는 방문 소리와 기울어져가는 천장, 비틀리는 건축물의 기둥이 내는 사운드는 마치 사라져가는 집이 내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 비통하다.

<호수길>의 마지막 장면은 7분15초 동안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단 하나의 숏이다. 주변은 이미 다 부서져서 그 많던 집들은 사라졌고 마치 공터처럼 텅 빈 공간에 세채의 집이 서 있을 뿐이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풍경. 아니, 차라리 여기는 달 표면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중 가운데 집을 포클레인이 부수기 시작한다. 정재훈은 그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너무 짧다. 여기서 이 시간은 특별한 호소이다. 7분15초는 이층집 한채를 완전하게 다 때려부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건없는 사건. 패배가 불 보듯한 상황의 정치학.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그런 다음 그 집을 부수는 데는 고작 7분15초면 충분하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정재훈은 두번 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바라본다. 거의 다 부서져버린 동네. 그게 단지 기억의 철거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푸르른 하늘. 맑게 갠 날 떠 있는 한점 구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응암2동은 그렇게 거의 다 부서졌다. 그런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장면.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꽃. 그저 재가 되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을 온 들판에 피어오르게 할 것인가. 기다림. 기대가 와야 할 미래. 기대, 그리고 미래.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동네에 머무르면서 내가 보고 들었던 게 이야기가 되었다” 정재훈 자신의 <호수길>의 소개의 글. 그 비통한 과거완료시제. 이제 그는 더이상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오랫동안 쳐다볼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더이상 보고 들을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푸닥거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이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 요구의 정의. 응답하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함께 대답할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해피 뉴 이어!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

아바타(AVATAR), 제임스 카메론

Ending Credit | 2010. 1. 1. 18:03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 2009년 1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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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쾌락과 (사치의) 부엌일기

The Book | 2009. 12. 20. 22:29 | Posted by 맥거핀.
이기적 식탁
카테고리 요리
지은이 이주희 (디자인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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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파스타계의 디저트, 카르보나라 레시피


01. 끓는 물에 (늘 말하듯)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면을 삶기 시작한다. 탈리아텔레의 경우 대강 6분 정도라고 패키지에 써 있으니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서부터 소스를 준비하면 대강 시간이 맞는다. (중략)
03. 생크림과 달걀노른자 하나(달걀노른자와 무염 버터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 파르미자노 간 것, 그리고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잘 섞는다.
04. 판체타나 아주 스모키한 베이컨을 준비한다. 뭐 힘들면 그냥 마켓에서 파는 베이컨도 어쩔 수는 없지만 얇게 슬라이스한 스모키한 베이컨이 좋다. (나는 이태원의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쓴다.)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두른 팬에 베이컨을 2-3줄 익힌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익을 때쯤 면이 완성될 거다. (후략) (205-207 p)



추측하건대, 요리라는 것은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어느 정도의) 사치(돈)의 산물이다. 나같이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위의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요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면, 아주 실패할 확률이 높다. 먼저 어찌어찌해서 탈리아텔레라는 넙적한 모양의 파스타를 구해서 겨우 1번 단계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3번 단계에 이르면 역시 주춤해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무염 버터가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저자도 안 넣는다고 했으니,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근데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라니. 통 후추를 어떻게 갈아 넣지요? (지식인 검색 후) 아..갈아 넣는 도구가 있다구요? 페퍼밀이라나, 페퍼그라인더라나..뭐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X마켓에서 팔기는 파는구나. 근데, 이걸 오늘 사면 어차피 오늘 배송이 안되니 오늘은 못 해먹잖아. 마트에 나가면 팔까. 큰 마트로 나가자면 꽤 시간이 걸릴텐데..아냐, 그래도 배송이 걸리더라도 X마켓으로 사면 카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아니, 그래도 어차피 통 후추를 사야하잖아. 그럼 마트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이르는 지점은 한 곳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자괴감. 그냥 가까운 스파게티점에 들러서 까르보나라 한 그릇 주문해서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책에 가끔 보면 나오는 구절들과 우리집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를 이용하여..' '야채칸을 열어서 남아 있는 아무 야채나 넣어도 맛있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면 남아 굴러다니는 야채라고는 매우 오래되어 끝이 누렇게 변색된 양파 반 쪼가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걸 넣어도 맛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이런 집에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 같은 것이 있을 턱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충분한 돈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요리가 맛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레시피를 따라하는 도중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사소한 부분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다 만든 요리를 개수대에 부어버려야 하는 그런 댓가 말이다. 

징징 대는 것은 그만하고, 몇 가지 긍정적인 시선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아마도 3번에 이르러, 내가 귀찮음을 무릎쓰고, 대형마트에 나가 통 후추와 페퍼밀을 사왔다면(그리고 기꺼이 이태원에 들러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사왔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레시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 편이므로, 이번 요리에 성공해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어 치웠을 것이고, 우리집 부엌에는 페퍼밀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남는 판체타는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번의' 요리에서도 페퍼밀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집 냉장고 안에는 드디어 '남는 판체타'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냉장고의 남는 판체타..'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승자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냉장고로 달려가 '남는 판체타'를 꺼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피시 파피요트나 누텔라 너츠 토스트나 이태리식 오믈렛 프리타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떡볶이나 오뎅국이 나오기도 하고, 달걀비빔라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도대체 요리책들이란, 당최 해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만 소개하고 있군'이라는 불평은 때때로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재료들이 가끔 나와서 그렇지, 레시피는 꽤나 세심한 편이라, 재료들과 기구들만 잘 구비해 놓는다면, 살짝 복잡해보이는 요리라고 해먹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침 10시, 오후 3시, 오후 8시, 새벽 1시로 나누어, 그 시간에 해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말랑말랑한' 레시피는 사양하고 싶다. 즉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나같은 류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정도 소금을 넣으란 말이야라고 불평부터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저 '물 몇 ml에 소금을 2티스푼을 넣으세요'라고 하는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몇 가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를만한 재료들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판체타'가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주어도 좋지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아...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요?)  
................................

사실 이 책의 매력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각 요리의 레시피를 소개하기 전에 각 요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일종의 에세이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요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스런 어조로 전달해주고 있다. 글쎄..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친구를 가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고양이를 기르는, 그리고 가끔 낮술도 즐기는 이 저자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부분도 있고, 내가 아는 몇몇 여인네들의 삶과는 조금은 괴리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던지는 그녀의 몇몇 이야기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주로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잠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상대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대는 나같은 인간들은 이 그녀의 에세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읽을 것. 그 뒤의 소개된 요리들의 레시피는 부디 그냥 넘겨버릴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옆에 첨부된 사진들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다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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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서 '사과'란 가능한가

The Book | 2009. 12. 6. 00:56 | Posted by 맥거핀.
사과는 잘해요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기호 (현대문학,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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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죄? 난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시봉과 나(진만)는 나타나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의 사람을 살짝 밀고 빨리 올라탄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점심 시간에 동료와 밥을 먹으며, 남아있던 마지막 계란말이를 집어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엘리베이터에서 앞의 남자에게 살짝 한숨을 내쉰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회사 상사가 가끔 안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아까 바퀴벌레를 잡아 죽인 것도 죄가 되겠군..흥." 그러면, 아마도 시봉과 진만은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사과를 할 수 없기(사과를 해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에게 사과할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즉, 시봉과 진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과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에 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진만)는 어느 '시설'에 있었다. 그 시설의 남자보육사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늘 강요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고백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사과를 하면, 덜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 늘 죄를 짓고, 사과를 했고, 맞았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그런 날에는 꺼림칙해서, 맞은 이후에 꼭 해당하는 죄를 짓고는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은 원생들의 반장이 되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고백하고, 대신 사과하고, 대신 맞아주었다. 시설이 문을 닫게 되고, 그곳에서 나온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 그것은 '사과'를 하는 것, 즉 남들이 지은 죄를 대신 사과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급기야는 이른바 '사과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

이것이 이 소설의 중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적어 놓고, 읽어보니, 왠지 이 이야기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시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계속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사건들을 서술해주는 나, 진만은 어린아이, 혹은 거의 안이 텅빈 기계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절친, 시봉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사실 모호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이러한 지체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제시되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이 '시설'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설이 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고, 급기야는 그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알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자 보육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죄의 추궁과 사과,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린치. 아무튼, 이런 이유로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주인공이 전하는 이야기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겉의 의미와는 달리, 계속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모호하고도 독특한 분위기와 짧은 문장들로 이어지는(어린아이, 혹은 기계는 긴 문장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듬이 생겨난다.


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종 연극을 하자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항상 엄마 역할이었고, 원장선생님은 매 맞는 아들 역할이었다. 대사 또한 매번 같았는데, 우리는 지휘봉으로 원장선생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그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렇게밖에 못하겠냐고"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은 "엄마, 엄마, 더요, 더 때려주세요!"라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엉덩이를 우리 얼굴을 향해 높이 들어 올린 채,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이 모두 다 끝나고 난 후엔, 우리에게 초코 우유나 요구르트를 건네 주었다. (p.51)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우화(寓話)로 볼 수 있다. 본시 우화에서 즐겨 써먹는 수법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어리석은 주인공이 등장하여 벌이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전달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교훈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몇몇 설정들은 상징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두 명의 남자 복지사의 외양을 묘사하며, 키가 작은 쪽은 늘 의사들이 입는 흰 가운을 걸치고 다녔고, 키가 큰 쪽은 청바지에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묘사하는 장면들 같은 부분 말이다(게다가 키가 큰 쪽은 머리숱마저 적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흰 가운이 근대적인 문명,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화가 군대, 질서,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근대적인 문명과 체제적 질서는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없는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복지사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존재는 원장이다. 진만이 구치소에 있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간 이 장면을 잠깐 보자.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원장선생님은 말을 하곤 씨익, 짧게 웃었다. 그러곤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꾸벅,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p.215)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다...요즘에 이 말처럼 맞는 말도 없지 않을까. 자신의 죄를 모른 척하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죄는 더 이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누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의 죄임을 고백하고 나선 사람은, 그 죄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거나, 사회에서 추방되기도 한다. 히틀러가 말했던가.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쉽게 속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그에게 짧은 미소를 날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어리석거나, 혹은 변하지 않는다. 진만은 '시설'에서 늘상 했던 대로, 등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할 뿐이다. 그(원장 선생님)의 앞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모른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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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상 속에서, 나(진만)와 시봉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고, 맞는 것으로 그 죄를 사하려 한다. 자신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현대판 예수와 같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떠안아,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예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찬란한 부활로 마무리되는 성경과 달리, 이 이야기는 석연치 않은 비극성을 남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들의 이런 사과는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파국은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파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그것은 복지사들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방식이 다른 더 거대한 폭력으로 확대되어 마무리되는 양상이지만(어쩌면 여기에 작가의 진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진실이란 '죄'라는 것은 결국 근원적으로는 '사과'할 수 없다는 것) 실상은 그 폭력의 시작은 그들에게 복지사들이 폭력을 가하던 것보다 더 오래전, 아버지가 진만을 시설에 버려두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마무리.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밝게 전달되는 가벼운 이야기인 듯 했던 여기에 이 소설의 비극이 숨어있다. 여전히 병원의 십자가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시봉과 진만이 나 대신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죄를 끊임없이 묻는 사회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봉과 진만이 말한대로,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는 죄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신은, 아니 나는,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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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이 아닌 'The 발칙한 한국학'

The Book | 2009. 11. 29. 20:18 | Posted by 맥거핀.


 

더 발칙한 한국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J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 2009년)
상세보기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J.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장은 스콧 버거슨을 제외한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위트를 섞어 짤막하게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장은 스콧 버거슨과 다른 친구들의 인터뷰 형식이고, 3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각 친구들이 한국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고,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스콧 버거슨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앞의 장들도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에 조금은 생각해 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4장이다. 사실 앞의 장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책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내용들이다. 한국의 어떤 폐쇄적인 부분들, 혹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비합리적인 부분들이나,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루는 글들은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진 감마저 있다. 그래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광우병 파동의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들을 스콧 버거슨, 한국명 '왕백수'가 풀어놓고 있는 4장이다.

글쎄. MB의 충실한 지지자나, 조중동 등의 보수신문을 열심히 탐독하고, 그 논지의 정갈함에 감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4장 부분을 읽는 반응은 대체로 2가지로 나누어질 것 같다. 하나는 뭐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거지 뭐.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흥미로운걸...하면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거나 혹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반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스콧 버거슨은 전자의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본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들을 '엑스팻(expat)'이라고 부른다. 이 '엑스팻'은 약간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엑스팻'을 이렇게 정의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expatriate)을 부르는 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 이 땅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지만 결코 이곳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본인과 다른 친구들을 '엑스팻'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들을 그저 '엑스팻'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어떤 반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외국인으로 보입니까?'라는 Seoul Don(서울 돈)의 글로 시작하여, '한국말로 이야기해요'라는 스콧 버거슨의 글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내내 본인들을 단지 외국인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이 짤막한 리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외국인의 글이 아니고, 한국인의 글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글은 흥미로운 관점을 담고 있지만, 어떠한 부분은 경직되어 있고, 또한 어떠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스콧 버거슨은, 적어도 그의 글로만 놓고 판단하자면, 아직은 엑스팻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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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콧 버거슨이 4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은 4장 맨 처음의 '종로의 이방인'이라는 꽤나 긴 글 보다는, 그 뒤의 '한국에는 사랑의 여름이 없다'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글에서 1968년을 포함한 1960년대 서양(유럽)에서 일었던, 반(反) 권위주의적인 반(反) 문화적인 혁명의 기운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여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름이 여기 한국에 왔다 갔다. 2008년 여름의 짧은 순간 동안, 종로 거리는 신명나는 음악과 기묘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나는 애매하고 단순했던 소비자 권리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전면적인 혁명으로, 마술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원찮게, 다소 슬프게 끝나버렸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가?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치는 언제나 똑같았던 증오의 정치에 맞설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p.429)

 

한 마디로 말해서, 2008년 광우병 정국 속에 벌어졌던 종로에서의 시민의 쿠데타(그의 표현이다)는 권위주의인 신화에 맞서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신화화를 깨부수었던 1960년대 서양에 비하자면 여전히 촌스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2008년 종로는 그렇다. 그것은 보수진영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어떤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全) 진보진영이 결탁한 일종의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비겁한 폭력이었으며, 그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은 진보진영의 언론에 의해서 교묘하게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신화화적인 기제가 작동하였음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신화화적인 기제가 시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가로지르는 잠재적 반미감정의 암류는 유명한 '촛불 든 소녀' 로고를 살펴 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로고는 잠깐 사이에 광우병 촛불시위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는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죽음이 그 불씨가 되었다. (중략) 내가 보기에 2008년의 '촛불 든 소녀' 로고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비슷해 2002년 촛불시위를 노골적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 환기시켰다. 이로써 또 한 번 미국 헤게모니의 사악한 음모와 약탈에 맞서 지켜내야만할 한국의 '무구함'과 '순수함'을 표현한 친숙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적 원형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p.404-405)


스콧 버거슨의 주장은 몇몇 부분에서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 MB 정권이 왜 광우병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되었나를 말하는 부분이나, 386 세력의 어떤 한계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 어떤 신화화가 개입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난 2008년의 촛불시위 정국에서 어떤 광우병의 위험이 약간은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며, 시민들의 시위에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고, 시민들의 투쟁에도 어떤 신화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콧 버거슨의 말대로, 시위대 중 일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것, 그것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신화화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이다. 그는 시민들(혹은 진보진영)의 신화화를 깨부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그 반대의 진영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왜곡된 사실, 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어떤 진실인 것처럼 호도해 버린다. 어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을 그 논증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즉, 그는 신화화를 깨부수고 반 신화화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신화화를 그의 글의 주요전략으로 구사하는 셈이다. (또한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모든 부분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대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어떤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이라크 전쟁을 어떤 현대 문명,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호로 비쳐지게 했지만, 그것에 어떤 문명전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즉, 2008년 촛불시위에 어떤 신화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내내 벌어진 주요 광우별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한 번도 경찰이 시위대를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 상황은 항상 그 반대였다. 핵심은 늘 전경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보이게 자극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진보세력 미디어(및 그들과 한통속인 수많은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보도 자료로 남기는' 것이었다. (p.392-393)

   

또한 광우병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진보연대'가 이미 2008년 1월부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모의를 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저돌적 추진 과정에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리를 포착, 대중적 저항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이어진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며 공표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p.372)

  

가장 유명한 예로 촛불시위 초기 다수의 여중생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겠고, (중략) 진보적인 손위세대가 가부장적으로 제공한 더 큰 내러티브에 포섭당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386 세대가 대부분인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촛불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한 사실이 보도된 적도 있다). (p.398)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내용 중의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보수진영의 신문들이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례로, 시위대의 폭력이 있었고, 그것 또한 일부 감추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항상 시위대가 경찰을 먼저 자극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스콧 버거슨이 '엑스팻'을 넘어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그의 시각에는 여전히 엑스팻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즉, 스콧 버거슨에게는 결국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인적인 시각, 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의 원형(原形)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6월 항쟁의 경험이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시위 기간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왜 자꾸 언급되는지, 한국인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얘기한 대로, 그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2008년의 촛불 시위가 1960년대 유럽의 진보적인 기치에 비추어볼 때 권위주의적이고 촌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엑스팻의 시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현상이지, 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오랜기간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는 점,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 왜 한국의 시위 문화가 여전히 신화적인 내러티브 중심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국인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두 가지를 여기에 더 첨부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의 유럽의 물결이 그가 생각한 대로 마냥 반 문화적인, 반 권위주의적인, 반 신화적인 내러티브였는가. 그것 역시 어느정도 신화화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의 양상, 혹은 그 투쟁 조직이 왜 어찌 하여 반 민주적인가.') 그것이 가능해야만, 그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나, 2008년의 반 한나라당 기치가 단순히 헤게모니 찬탈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한나라당'의 역사성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까)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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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4장에 있는 스콧 버거슨의 글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3장 부분의 엑스팻들이 한국의 살사(salsa) 문화의 성장에 악전고투한 이야기나, 홍대 인디씬에 대한 글은 아주 재미있었고, 흥미로웠으며, 1장의 몇몇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책의 다른 부분들도 살짝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책의 중간에 자주 나오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 이 책의 대부분의 북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조롱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북한 JI 정권이 조롱할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이 리뷰를 읽고 혹시 나를 빨갱이로 단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는 얘기인데, 북한 JI 정권은, 나 역시 그 이상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절대)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끊임없는 조롱이 마냥 유쾌한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조롱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 북한과 우리가 한 나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조롱뿐인가. 그(와 친구들)가 자신을 진정 한국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이러한 조롱이 유쾌할까.

  그러니 이의 연결 선상에서 이 책이 조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는 끊임없이 그를 단지 '엑스팻'으로 보아주지 않기를 주장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나, 그의 책에서 계속 나타나는 '엑스팻'적인 시선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와 친구들)가 한국인의 어떤 편협함, 한국 사회의 어떤 폐쇄성, 또는 문화적인 이상함, 특이함에 대해 말할 때,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아픈 비판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엑스팻으로 '한국 살람 참 이상해욜..'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왜냐하면 그것에는 한국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 책 <더 발칙한 한국학>은 엑스팻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솔직하고 거침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미수다'보다는 낫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엑스팻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ps. 리뷰의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The 발칙한 한국학'이란 결국 잘못된 말,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는 잘못된 한국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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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우니 르콩트

Ending Credit | 2009. 11. 23. 22:04 | Posted by 맥거핀.



가끔씩 리뷰를 쓰기가 난감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구성의 특이점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내가 잘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탐구해보는 내용을 적어도 되고, 그 부분에 담긴 숨은 의미를 읽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영화의 어떤 사적인, 공적인 의미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가 난감해진다.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영화, 그렇다고 복잡하거나 난해한 구성도 아닌 영화, 거의 심심할 정도로, 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에 있어서는, 내가 그런 류의 리뷰들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틸컷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스틸컷만을 줄줄이 늘어놓고, 그 밑에 그
스틸컷 장면의 간단한 설명을 적는 것을 리뷰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리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에서 또 어떤 영화들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가기란 여간해서는 힘들다. 의외로 드물지 않은 경우지만, 그런 영화들에서 도리어 어떤 '진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하게도, 영화들에게서 읽혀지는 진정성이란 그 영화적인 기교와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때로는 현란한 기교가 적시에 터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도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여행자>가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적인 기교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트'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일부러 배제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거의 평면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들어오는 소녀 '진희'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그 소녀 진희가 입양되어,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끝난다. 그 안의 이야기들도 그리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건들은 거의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다.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녀, 그 안에서 싹트는 우정, 그리고 소녀들간의 다툼,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소녀, 반복되는 이별, 입양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어디론가를 한없이 건드린다. 수차례의 반복되는 이별을 경험하고, 진희가 드디어 새로운 곳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단호하지만, 불안한 발걸음을 보여줄 때, 상당수의 관객들은 그 소녀의 앞날을, 앞날에 계속될 여행을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슷한 무게의 무거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우리는 또 저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게 했는가. 그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이 영화의 어떤 영화적인 기교, 혹은 낯설은 문법이 드러나는 순간은 영화의 처음 부분이 거의 유일하다. 영화의 처음, 이 영화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케익을 사들고 보육원에 들어가, 보육원에 진희를 두고 나오기까지 영화는 대부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감추며 세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얼굴이 영원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두 장면, 영화는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비춘다. 아마, 그것이 성장한 후에도 진희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처음 장면들은 결국 진희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처음이다. 실제로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자주 그 상황동안 진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얼굴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진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겨우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적 기교는 마지막에,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플래시백 장면으로 등장한다. 공항에 내딛기 직전에 끼워넣어져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며 뒷좌석에서 꼭 껴안았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 말이다. 즉 이 영화의 영화적인 어떤 기교(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그저 영화적인 문법)는 오로지 진희의 기억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보여지는 셈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희의 기억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와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을 보면, 이 영화는 진희, 즉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르콩트 감독 자신이 입양아였고, 영화 속 진희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들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때의 모두의 기억이 결합된 결과라고 감독은 밝히고 있다. 즉 스트레이트하게 아무 기교도 없이 전달되는 이 가슴아픈 만남과 이별의 반복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가슴 아픈 케이스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이고, 공적 기억임을 이 영화는 들려준다. 그래서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전달되는 듯 했던 이 영화는 개인의 사적 기억을 넘어서, 모두의 공공의 기억, 우리 역사 속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 놓았던 은밀하고 부끄러운 역사적 기억에까지 그 발걸음이 전달된다. 그것을 영화는 타자화된 시선을 통해, 객관적이고, 무덤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은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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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Best 3을 꼽자면, 이 영화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진희가 공항을 벗어나 새로운 부모에게 걸어가는 그 마지막 장면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이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삶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본 여행자.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아이에게는 결국 하나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라는 것 말이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라는 말이 가진 하나의 비극적인(혹은 무한한) 속성이다. 결국 '여행자'라는 것의 말의 안에는 '영원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여행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여행자로 불리는 그 동안은 그(녀)는 결국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영원히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로 계속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 즉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Camel의 노래대로 'stationary traveller'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마지막 노래인 '작별'과 '고향의 봄'은 참 서글프고, 인상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단 한 곳, 고향에서만은 아마도 불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오로지 타향에서만이 그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부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상당히 잔인해보이기도 한다.

그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의 여행자일까. 이 영화의 영문제목이 <A Brand New Life>던가. 거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 2009년 11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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