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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8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까지는 나지 않지만, 좀 많이 별로다. 정치라는 것이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부분 본의 아니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움직이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물건을 사거나 혹은 사지 않거나 하는 사소한 경제 행위도 타인에게 (일종의 나비효과가 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영향은 이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MB에게 기꺼이 표를 던져준 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리고 투표장에 가지 않은 또다른 많은 사람들 덕분에,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용역에 얻어맞고, 또다른 누군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 이 한 권의 만화는 그런 것을 말한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또는 정치에 대해서 냉소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가. 그것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의 뒤통수에 POLICIA 방패를 날리는가. 이 만화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쩌면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7년 6월에 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지방 출신의 법대생,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의 공장에 다니는 그의 누나,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였다가 그 아들을 위해 앞으로 나서는 어머니,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 욕하던 그의 아버지, 부당한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직업전선의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형....아마도 여기에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발전시키면 SBS 주말특집기획류의 드라마를 하나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은 결국 법대를 졸업해 검사가 되고, 집회현장에서 만났던 여학생은 몇 년 후 조폭 두목의 정부가 되어, 우연히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고...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 그러나 이 만화는 이런 이들을 패턴화된 후일담으로 풀어내어 이들에게 비감한 느와르와 가슴아픈 멜로를 부여하여 이들을 애써 우리와 분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살아온 줄거리가 아니다. 중간에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결국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한 사람만이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이 아주 큰 관심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자신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는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말한다. 조금씩 나아간다고 해서 길거리에 나서서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면서 나아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상징적으로 설명된다.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장이었습니다. (p. 171)



모두가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작은 백지에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이들이 어떠한 희생을 감내하였는지를, 이 마지막은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여기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면, 이것을 쓰는 나도, 이를 읽는 당신도 아마 슬플 것이다. 그렇게 얻어낸 소중한 백지로 1987년 대선에서 결국 누가 정권을 잡았는지, 혹은 이 책에도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박종철 열사가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박종운이 17대 총선에서 어느 당 후보로 출마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으로 냉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다시 일깨운다. 단지 그러한 것들은 100도씨의 물에 불순물을 투여하여 비등점을 낮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언제든 100도씨가 될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두는 것.
............................

사실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이야기의 뒤에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제목으로 붙은 민주주의 학습만화이다. 후기에 작가가 밝힌 바대로, 이 책이 어떤 교재의 용도로도 사용되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본편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만화는 그림체도 엉성하고, 내용도 짧지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여러가지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인 듯 하다. 민주주의란 결국 정당성(legitimacy)를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 혹은 법의 힘으로 어떠한 것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용어로 말할 수 있지만, '평등한 배려'를 하는 것, 혹은 각자 개인이 심의된 의사를 가지고, 그 의사를 하나로 결집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짧은 만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근원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평등한 배려' 혹은 '심의된 의사'라는 것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믿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타인을 배려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 혹은 어떤 필요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 잘못된 논조들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은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들인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짧은 만화에서 정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만화 역시 현명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 더 공부해 보라는 것,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이 체제는 더 잘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나 나같은 덜떨어진 어른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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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비싼 와인을 만드는가

The Book | 2009. 7. 24. 23:38 | Posted by 맥거핀.
와인 정치학 - 4점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정치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이견의 여지는 있겠지만, 이 말은 '와인'과는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사 모든 곳에는 무엇인가의 힘이 작용하고 있고, 그 힘은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것을 뒤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와인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와인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와인이라는 것은 어떤 땅에서, 어떤 해에 얼마나 좋은 품종의 포도가 생산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고, 거기에 다른 어떤 힘이 개입될 여지는 비교적 적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와인 비평가와 평론가들은 와인이 최종적으로 병에 담기기까지의 과정에서 재배 지역과 와인 제조방식의 중요성에 대해 널리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와인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와인 정치학이 영향을 미친다. 정치학은 어디에서 어떤 와인을 재배할지와 라벨에 무엇을 쓸지, 어떤 와인을 수입하고 수출할지, 어떤 와인을 지역 상가에서 구매할 수 있을지, 와인 가격은 얼마로 정할지 결정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병 속에 담긴 와인의 품질을 절대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p. 15)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와인이란, 그저 땅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혹은 그 해의 날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일종의 복불복 상품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에는 수많은 힘들이 작용한다. 그 힘은 다양하다. 제조업자와 유통업자 간의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밀고당기기는 물론이고, 그 해의 '위원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의해서, 혹은 국가의 법안이나 시책에 의해서, 다른 여타 산업들과의 관계의 문제와 관련해서, 한 비평가가 그 와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에 의해서, 그리고 때로는 환경론자들의 압력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그 달라지는 것들이란, 앞에서 말한대로, 어떤 와인이 어느 가격으로 결정되는가, 혹은 어떤 와인이 어디에서 팔릴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와인은 왜 와인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증류처리소로 옮겨져 연료인 에탄올로 바뀌는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가 같은 것들이다. 

이 책은 와인에 작용하는 그러한 수많은 힘들에 대해 약간은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와인을 생산하는 거대한 두 축인 미국과 프랑스의 와인산업을 비교하면서 그 와인산업의 역사를 추적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한 와인산업에 영향을 미친 다른 영향들을 주목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너무 산업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와인 비평들이 행하는 여러가지 문제점이라든가, 와인산업에 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에도 지면을 허락하는 영민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를 칭찬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점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압축시키지 못하는 것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가장 주된 내용은 미국과 프랑스의 와인산업을 비교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있으나 비교의 기준은 명확하지 못하고, 이야기는 중심을 잃고 여기저기서 떠돈다. 와인산업의 역사를 추적하고는 있으나, 그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흔들린다.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뉘앙스는 살짝 풍기지만, 그것에 대해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배는 난파하여 침몰하는 도중에 몇몇 쓸만한 이야기들만이 침몰하는 배 주위에서 어지럽게 떠다닌다. 그것은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음주가 가진 위해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주장들과 와인 유통과의 모종의 관련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다음의 대목과 같은 것들이 그렇다.

경제학자 브루스 옌들은 금주령에는 동의하지만 경제적 이유와 윤리적 이유라는 서로 다른 이유로 협력했던 밀매업자들과 초기의 절제운동 지지자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밀매업자와 침례교도들"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지역의 밀매업자들은 자신들의 밀조 과정에서 경쟁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했고, 절제운동 지지자들은 성경의 글귀와 함께 음주가 끼치는 사회적 해악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주류 판매를 폐지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금주령 이후에 금주운동 지지자들의 연합세력은 밀매업자들이라기보다는 유통업자들이었다. 각각의 주는 해당 영토 내에서 주류 운반에 대한 자체적인 규정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주류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최종 판매업을 분리하는 규제들에서 많은 이들이 유통업자의 역할을 선택했다. 따라서 와인 양조장은 와인을 유통업자들에게 판매하고, 이들은 소매업자나 레스토랑에 납품한다. (p.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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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번역투의 엉망인 문장들에 있다. 위의 인용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잘 읽어보라. 뭔가 좀 어색하지 않은가. 전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나, 문장도 필요 이상으로 길고, 어색한 번역투와 잘못된 문장들이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말이다. "주류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최종 판매업을 분리하는 규제들에서 많은 이들이 유통업자의 역할을 선택했다." '규제들에서~선택했다'는 이상한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역할을 선택했다'는 어색한 번역투를 고수하고 있다. 그래도 이 인용한 부분은 그나마 문장들이 조금은 나은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앞 부분에서 뒤로 갈수록 번역가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지, 조금은 문장들이 나아진다. 처음에는 "파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수많은 와인 양조업자들은 그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와인을 그가 "쾌락적인 과일들의 폭탄"으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왔다."처럼 해괴한 문장들도 나온다.   

아마도 이는 책의 문장들이 원래 엉망이거나, 번역가의 번역 능력이 형편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 맘대로 추측해 보자면, 이 책의 저자인 타일러 콜만(Tyler Colman)이 박사논문을 책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책의 본래 문장 자체가 형편없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번역가의 초벌번역을 어떤 퇴고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책으로 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은 대표 번역가의 이름만 건 다른 새끼 번역가들의 번역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도 '정치적'인 어떤 것이 개입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엉망인 문장들이 책에서 시종일관 지속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아무리 흥미롭고 재밌는 내용을 담고 있어도,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가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좋은 책의 기본은 좋은 문장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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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let it rain), 아네스 자우이

Ending Credit | 2009. 7. 23.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

'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 2009년 7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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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이사벨 코이셋

Ending Credit | 2009. 7. 9. 22:46 | Posted by 맥거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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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 2009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스페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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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제목에 촌스러운 포스터에 '<시티 오브 갓><눈먼 자들의 도시>제작진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는 없어 보이는 문구. 감독의 명성을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걸 수도 없고, 없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들먹이며 숫자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홍보 문구를 보며 썩 끌리지는 않는 영화였다. 단지 그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씨네 21>의 'Must See' 코너에 이 영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후였다. must라..must. 글쎄.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꼭..반드시 보라'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글쎄, 뭐 봐도 괜찮은 영화에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도. 무엇보다 영화란 것을 '꼭 봐야할 어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봐야할 어떤 것이란 대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때려잡는 영상, 혹은 어느날 새벽 어느 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는 영상이 될지언정,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여튼 간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잡지를 줄곧 보면서도 그 must가 꽤나 놀랍고 신기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Must See'라는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의미일까, 혹은 영화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시 한 번 뭐 어쨌든 간에. 영화는 귀엽고도 둥글둥글하며, 동시에 슬프면서, 꽤나 웃기는 영화였다. 1988년 브라질과 맞닿은 우루과이의 국경마을 멜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기로 결정되면서 작은 마을은 들끓는다. 교황님을 돈벌이로 이용해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가진 것을 팔아, 장사를 해 떼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날 엄청난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밀수로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는 이 남자 비토(세자르 트론코소)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난 머리가 참 좋아...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생각한다. 몰려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싸기도 하겠지. 그래, 유료 화장실을 차리는 거야. 그래서 아내와 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고, 집도 고치고, 나는 오토바이를 사는 거지..오토바이!

기발한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제로 비토처럼 유료 화장실을 차리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마을은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꿈으로 부풀었고,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꿈을 부추기고, 부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일확천금- 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되는 돈일 테지만 -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끝은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하기 어렵다면 다음의 영화의 홍보문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화장실>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적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간 후일 것이다. 이 아버지 비토는 신성한 교황의 말씀과 그 교황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고작 황금색의 똥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일종의 불경을 저질렀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양심과 화해하고, 하나의 작은 악을 뿌리침으로써 선의 세계에 한 발짝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실비아는 자신이 꿈꾸던 저널리스트라는 것이 어떤 허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황과 대통령과 그들을 괴롭히던 기동순찰대나 국경수비대가 삼위일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화롭고 우습고, 궁상맞게 살아갈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에 또다른 교황이나 혹은 록스타나 혹은 미국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우리들은 그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다가, 마지막 자막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고 안쓰럽게 웃어제끼면 될 것이다. 아..저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더 안쓰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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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보고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오는 나쁜 넘들이 요즘 우리 주위에 얼쩡대는 나쁜 넘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기 나오는 나쁜 넘들. 나쁘지만, 참 인간적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대놓고 나쁘기 때문이다. 고작 밀무역하는 것 좀 잡아냈다고(사실 말이 밀무역이지, 조금은 한심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딸을 바치라고 하지 않나...자기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다고 해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나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 영화 속 세상이 법보다는 폭력이 가까운 사회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 좀 덜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일종의 구멍들이 많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동시에, 그 구멍 속에서 힘없는 서민들도 그 구멍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달러의 뇌물, 혹은 위스키 한 병으로서도 뇌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 뇌물을 이용하여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지배체제가 그 지배체제의 기능들을 폭력이나 힘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춘 법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몇 달러의 뇌물은 이제 당연히 통하지 않게 된 사회, 그러나 거대한 재벌의 거대한 돈이나 이상하게 구조화된 법을 내세운 권력에는 너무나도 순응하고, 누구도 그들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제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점점 법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지배될 때, 그 지배는 얼마나 무섭고 거대하며, 페쇄되어 있으며, 차가운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영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모든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교황과 정부와, 그들이 지배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이 믿어 주기를 원하는 모습만을 앵무새처럼 떠드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며 비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TV에 병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욕하는 정치인들, 이들은 1988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을까. 우리에게도 거대한 힘과 투명한 폭력은 가까이 있는 것일까. 극장에 깔린 '대한 늬우스'들이 그런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하며,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고, 그 뉴타운 공약들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후에 무엇을 보게 될까.

사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작은 힘들이 희망이다.




- 2009년 7월, 하이퍼텍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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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미쳤다 - 6점
보르빈 반델로 지음, 엄양선 옮김/지안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여담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만의 특징인지, 외국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제목들이 점점 자극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저자의 책들은 뭐 그러려니 하는데, 외국 저자의 책들까지 그러는 것을 보면 딱하다. 왜냐하면 외국 저자의 책들은 그럼으로써 원제와 아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제목은 저자의 허락을 받고 다는 것일까. 혹여, 그렇지 않다면 이는 저자나 그것을 읽게 될 독자에 대한 테러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래도 '스타는 미쳤다: 성격장애와 매력에 대한 정신분석 리포트'라는 이 책은 그나마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Celebrities'. '유명인' 또는 '명사'라는 간단한 제목이 자극적이고도 뭔가 복잡한 제목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약간의 관련성이나마 있으니 그나마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보면 책의 제목이 이렇게 되어버림으로써 이 책이 마치 '모든 스타들이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오인되는 위험성이 생겨난다는 점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오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성격장애를 가진 스타들의 사례를 자극적으로 나열한 책도 아니다. 그보다는 성격장애의 여러 특징들을 나열하고, 어떠한 연유로 그런 성격장애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책에 가깝다. 물론 책에는 여러 스타들의 사례도 나오지만, 그런 스타들은 도달하기 쉬운 하나의 예에 가깝다. 즉 모든 스타들이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스타들이 그런 성격장애를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먼저 첫번째 문제는 책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어느정도의 선을 '비정상'인 성격장애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체인질링>에서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와 바뀌었다며 문제를 제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경찰에 의해 정신병원에 갖히게 된다. 여기서 만난 한 여자는 이 '정신병'이라는 것이 사실 거의 의사의 자의적 기준에 가까움을 말해준다. "당신이 정상적으로 행동하려 할수록 그들은 당신을 더 이상하게 볼거야. 당신이 많이 웃는다면 착각에 빠져있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다고 여길것이고, 만약 안 웃는다면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할거야." 저자도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상적인 '성격'에서 '성격장애'로 넘어가는 경계는 모호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뚜렷한 성격적 특성들은 정상적인 범위 내의 편차일 수도 있지만, 정상성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정상적인 행동과 병적인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p. 23)



두번째 문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와 관련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스타와 성격장애에 대해서, 그리고 성격장애와 매력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음을 논하고 있다.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것이 인과관계인가, 아니면 단순한 상관관계에 불과한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매력적이다'라고 말했을때, '이는 성격장애가 있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인다'라는 인과관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매력적으로 보인다'라는 상관관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부분은 저자 역시 주의해야 할 부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어떤 과학자가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셈을 더 잘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근거로 센티미터로 표시한 키와 산수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제시한다. 이때 해당 조사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열세 살짜리가 여덟 살짜리보다 산수를 더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키가 큰 사람들이 작은 사람들보다 더하기와 곱하기 실력이 월등하게 높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제3의 변수, 즉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이를 밝히고 계산했더라면 상관관계는 0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즉, 키와 성적 간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별개인 두 현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높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p. 111)



이를 넘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즉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다. 즉 성격 장애와 매력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인가. 성격장애가 있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어떤 매력이 성격장애의 동인이 되는 것일까. 스타와 성격장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격장애가 스타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스타가 된 이후에 성격장애가 생겨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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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의 관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관점이란 성격장애가 스타가 되는 것에, 그리고 스타로서 매력을 발산하는 것에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격장애가 있는 스타들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며, 그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들이 성격장애, 특히 경계성 성격장애[각주:1]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경계성 성격장애들이 타인들에게 어떤 매력을 발산하게 함으로써, 스타가 그만한 위치에 오르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격장애의 하나의 요소인 연극성이나 자아도취성 같은 것들이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위의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것이기도 하며 여러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성격장애가 매력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타가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의 어떤 외모나 특출한 능력과 관계된 것이지, 성격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또한 연극성 성격장애나 자아도취성 성격장애가 스타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는 있어도, 경계성 성격장애는 이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질문은 꼬리를 문다.

또 한편으로 저자의 태도에도 약간 의문이 든다. 저자는 어떤 특정의 이유- 예를 들어, 가정 내에서의 학대, 성폭력 -만으로 성격장애가 온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성격장애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을 모두 고려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스타의 성격장애를 밝히기 위해서 쓴 방법이란,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살피는 것뿐이다. 물론 그 스타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므로 가능한 방법이란 이런 것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스타가 어린 시절의 특정의 경험으로 성격장애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듯한 이러한 태도는 본인이 말한 문제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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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가 스타들의 가정사와 매력과 성격장애를 고찰하려고 하면 할수록 읽는 독자들은 더욱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책의 매력은 점점 줄어든다. 도리어 이 책이 매력을 발산하는 부분은 그러한 스타들의 이야기가 배제되었을 때이다. 성격장애의 치료와 관련된 약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격장애의 원인들을 가정, 교육, 문화, 유전 등 여러 요소를 폭넓게 고려하며 펼치는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진진하며 읽을만하다. 따라서 이 책을 스타들의 내면을 살피는 도구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도구로서 활용할 때 이 책의 매력이 발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s. 저자는 보르빈 반델로. 책 날개에 보면 정신장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독일에서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의 문제인지, 아니면 번역가의 문제인지 책의 문장들의 구성이나 문단 연결이 어딘지모르게 깔끔하지 않은 데가 있다. 특히 책의 마무리나 에필로그는 조금 뜬금없다는 인상마저 준다. 

  1. 이를 '경계성' 성격장애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원래 외래용어임을 생각해보면 영어명이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이므로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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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Shop Boys- Vulnerable

2009. 6. 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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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Bandhobi), 신동일

Ending Credit | 2009. 6. 24. 16:59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선택이란, 이런 이야기를 별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많은 문제들, 그리고 여러 생각거리들이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에 대해서 깊숙하게 말하기는 다들 꺼려한다. 아마도 어떤 문제가 어떤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그 문제는 그만큼 곪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온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에게 어떤 지점에서의 작은 불편함을 안겨 준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 혹은 조금씩 썩어들어가고 있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으신 많은 분들은, 이 영화는 또 어떤 우리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영화로구나, 또는 괜히 무겁기나 한 영화로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무겁지가 않다.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예상외로 유쾌하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의 상당히 영리한 점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대로,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과 여고생 민서(백진희- 여담이지만 원더걸스 소희 양을 닮았다. 목소리까지도.)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물음표대로, 여기에는 어떤 물음이 따른다.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혹은 극중 자신들이 표현한대로 '반두비(방글라데시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라고 부를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뭐 어찌되었던 간에,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관계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중첩된 여러가지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여고생과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나이, 신분, 계급, 문화, 인종 등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극중 카림은 본국에서 결혼까지 한 상태이다. 이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도박이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관객은 이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어떤 상당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가 현실의 하나의 반영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현실에의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영화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현실, 혹은 반(反)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상당히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감독은 아마도 두 가지의 안전 장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이 영화의 영리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먼저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영화가 그럼에도, 계속 유쾌하고 가벼운 무게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들 두 사람의 관계를 심각하거나, 혹은 진지한 시선으로만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가볍고, 유쾌한 유머들을 지속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이것이 어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님을 상기시키려고 한다(엄마의 남자친구는 거의 웃기기 위해서 나온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가 일종의 에피소드 중심임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너무 심각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하고 유쾌하게 봉합된다. 물론 뒤에서 좀 더 말하겠지만, 이는 또 어떤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극중 여고생 민서의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는 일부러 '여고생'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거의 여고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외모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는 행동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린 행동과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행동이 결합된, 상당히 다른 캐릭터이다. 이 '다른 캐릭터'라는 것은 이 영화의 '위험한 부분'을 상당히 중화시키는 중요한 안전 장치이다. 왜냐하면, 민서가 보통의 여고생을 충실히 반영하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관객의 불편함과 비현실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대로 이주노동자 카림과 여고생 민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법 없이도 살듯이 보이는 착한 청년 카림과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소녀라고 볼 수 있는 민서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 이 영화의 약간 기이하고도 영리한 점이 드러난다. 역으로 생각해보라. 만약 이 둘의 성격을 뒤집는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아마도 이 영화는 관객의 어떤 불편한 점을 더욱 자극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관객은 이 관계를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즉 여고생 민서에게 이런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영화는 어떤 안전 장치를 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여기에서 야기되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하나는, 여고생 민서가 이러한 캐릭터가 됨으로써 이것이 민서만의 어떤 특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래 저런 여고생이니까..'라고 생각할 때, 이 말은 동시에 긍정적인 느낌도, 부정적인 느낌도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관계에 어떤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여고생 캐릭터를 부여한 점은 '위험한 선택을 중화시키기 위한 더욱 큰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좋은 친구 '반두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할 것인가. 여고생 민서가 아닌 모두가 반두비가 되는 것이 쉬운 이야기일까. 이 영화는 그런 것들까지 반영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여기에서 생각은 전진하지 못하고, 물음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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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는 일종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는 아마도 감독의 일종의 고육지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 중심이라는 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까지 흐트려버린다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감정선은 물론 카림과 민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둘의 감정은 사실 상당히 모호해보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이런 감정까지 갖게 되었는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초반의 한 두개의 에피소드가 흐른 뒤에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까지 너무나도 쉽게 도달한다. 이를 카림과 민서라는 두 캐릭터의 어떤 특수성에만 기대어 설명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또한 이 영화의 결말 역시도 조금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이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까지 도달한 것일까. 왠지 이것은 감독의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연상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던 시점에 모호하면서도 약간은 뜬금없는 마무리가 등장했다. 마치 일종의 데우스 마키나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 <반두비>의 마무리는 그와 비슷하다. 이를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감독의 노력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직접적으로 하려 한다. 사실 간단히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까지 포함하면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계, 그에서 파생되는 어떤 문화적, 인종적, 성(性)적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계급적인 관계, 백인과 그 밖의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중성, 이주노동자들의 임금 문제와 관리 문제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 형태의 이야기, 미성년자의 성과 관련된 이야기, 외국어 교육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하려하기 보다는 몇 개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어쩌면 그보다는 두 사람의 감정선에 더 주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백인 영어강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이야기이는 하나, 이 영화에서는 사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을 통하여 가끔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하려 든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와 같은 대사가 나올 때, 관객의 실소가 터지는 것은 이러한 감독의 계몽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결과라 해야할 것이다.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그러더니, 어쩌면 감독은 내용이 중요하지, 그것을 어떠한 형식으로 담는가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계몽성과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는 몇몇 필요 이상의 장면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MB를 희화화하여 다루는 몇 장면들이나, 편의점에서 아저씨가 뜬금없이 뉴타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민서가 사장 집에서 신문을 보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글쎄. 이 장면들이 꼭 필요할까. 물론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치 않은 이러한 장면들이 어떤 뉘앙스를 전달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단순한 비판이나, 희화화로 그친다는 점에서 왠지 이것은 안 나오느니만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더구나 혹 이런 몇 장면으로 이 영화를 정작 보여줄 필요가 있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아님 말구), 여러가지로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영화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외국인 불법체류와 관련된 문제들, 혹은 카림이 불법체류자가 된 후 공장에서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는 장면들 같은 부분들을 더욱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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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도 할 뿐더러, 지나치게 용감함으로써 귀여운 면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하고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 2009년 6월, 중앙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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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자기(self)와 대면하기

The Book | 2009. 6. 20. 20:51 | Posted by 맥거핀.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 6점
플로렌스 포크 지음, 최정인 옮김/푸른숲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아마도 사회학자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충분한 재력과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는지도 모른다. 혹은 전직 큐레이터라면 요즘 여성들을 타겟들을 한 기획성 전시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와 문화에 목말라하는 여성들과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의 결합에 대해 이야기할는지도 모른다. 혹은 영화사 홍보팀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최근 미술관에 점점 손님을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한 걱정과 이런 혼자인 여성들을 어떻게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하게 만들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추세에 재빠르게 발맞추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집과 현대 미술을 알기 쉽게 소개한 글들에 주목하는 기획을 내놓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청난 야구광이자, 몇 년 째 혼자 살아온 좋게 말하면 싱글남, 나쁘게 말하면 노총각인 선배 J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야, 뭐, 야구장에 혼자인 남자들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지."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의 저자 플로렌스 포크(Florence Falk)는 심리치료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종의 심리학적인 입장에 입각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녀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자기(self)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인 여성들은 그곳에서 여러 작품들을 대면하며, 그것을 감상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를 마주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평소에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고민하며, 고독을 만끽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몇몇은 물음을 제기할 것이다. 아니, 고독을 즐기러 꼭 미술관까지 가야하나. 그냥 집에서 혼자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독을 만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가 얘기하는 고독은 다른 이와 관계를 끊고 집안에 고립되어 내면에만 침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나는 고독이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여성이 나와 같이 삶이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인 것이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고립이나 소외나 실패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혼자인 것이 이런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혼자 사는 여자로서 나의 첫 번째 과제였고, 여성 내담자들과 상담을 할 때 내가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혼자임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어떤 의미로든 혼자인 여성들이라고 확신한다. (p. 60-61)


이 책은 명백히 여성 독자를 타겟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나같은 남성 독자들이나 혹은 일부의 여성 독자들은 나름의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그저 독신녀들, 혹은 이혼녀들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냐고(아마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두 번이나 이혼했다는 저자의 경력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면, 지금 당장 남편 있는 모든 여자들은 이혼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오해에 가깝다. 이 책은 이혼이나 독신을 합리화하지도, 이혼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일단 간단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 간에, 실제로 독신인 여성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이혼하는 여성들은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물론 남성들도 그러하지만, 이 책의 타겟은 여성이다). 그리고 독신의 여성들(결혼적령기가 지났건 아니건 간에)이나 이혼한 여성들은 현실적인 여러 문제로, 혹은 심리적인 여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에게 일종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고독을 즐기고, 자신을 대면하는 일이 남편, 혹은 남자친구, 혹은 동성친구가 없는 여성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혼자인 것과 친해지며, 밖으로 나가, 고독을 즐기고, 마침내 자신을 찾는 것(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한편 이 책의 목차이다)은 모든 여성들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은 누구나가 혼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을 잃어버리면, 상대방(혹은 타인)에게 의지하게 되고,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하게 되고, 자존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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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러한 류의 심리학적인 문제를 다룬 책들이 늘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서점에서도 이러한 책들을 모아놓은 코너가 요즘에는 대부분 따로 있으며, 항상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 중에는 대박을 친 책들도 몇 권 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와 같은 책들이 아마도 대표적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그 책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책에 어떠한 내용이 있건, 어떤 중요한 얘기가 있건, 혹은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 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들의 많은 부분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책을 중간중간 손에서 놓고 생각을 얼마나 하게끔 하도록 하는가에 그 책의 진정한 효용이 있다. 책 안에 아주 수많은 이야기들, 혹은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읽고, 그냥 내려 놓은 후,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래 좋은 말씀들이시네."하고 넘어간다면, 이러한 책들의 효용은 아마도 거의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책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책의 저자 플로렌스 포크는 심리치료사답게 자신이 다룬 수없이 많은 사례들(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례가 포함된다)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고, 때로는 가슴아프게 하고, 때로는 어떤 깨달음도 주지만, 중요한 것은 한가지이다. 결국 이 모든 사례들은 모두 타인의 사례라는 점이다. 이 모든 사례들은 모두 타인의 각기 다양한 사례들일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혹은 내 주위의 상황과 일치할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은 일치한다해도 그 사례가 해결된 방식이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덮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 있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현재의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이러한 류의 독서가 완결되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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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아까, 농담삼아 선배 J의 이야기를 했지만, 어쩌면 그 말에 어떤 진리가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구장에 혼자인 남자들이 많은 것, 그것은 야구장이 혼자인 남성들이 주위의 비난어린, 혹은 이상한 눈초리를 피해서 혼자 숨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비해 이러한 주위의 시선에서 훨씬 자유롭다. 일례로 미술관에 간 혼자인 남성은 별로 그런 시선을 받지 않지만, 야구장에 간 혼자인 여성은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어떤 시선을 받지 않는가.(여기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자 혼자 야구장에 가면 남들이 괴롭힌다거나 집적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뭔가 그것을 어색하게 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어떤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즉 미술관 같은 공간들이 '그나마' 여성들에게 혼자인 공간으로 허용되고 있다는 것, 그것에 어떤 우리 사회의 어떤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런 물음이다. (일례로 남자 혼자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 그런 사소한 것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희화화되는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는 왠지 그러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읽혀진다.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뭔가 결점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그리고 우리 여성에게 직접 가해지는 수많은 폭력을 생각하면, 여성이 혼자 있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혼자 있는 것을 피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과제는 이런 감정과 대면하고 싸워서 고독이 주는 보상을 즐기는 것이다. (p.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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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Ending Credit | 2009. 6. 19. 00:31 | Posted by 맥거핀.



사실 샘 레이미 감독들의 전작을 거의 못 봤다. 아마도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는 그의 유명한 전작들, 그러니까 <이블 데드> 시리즈라든가,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블 데드> 시리즈 때는 영화를, 더구나 그런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때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꽤나 어릴 때라 보지 못했고,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워낙 '~맨' 시리즈들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보지 않았다. 그나마 본 것은 그가 기획에 참여한 <그루지> 시리즈지만, 그 때는 원작인 <주온>을 보고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하던 터라, 그 영화의 리메이크 작인 <그루지> 시리즈들을 씹기에 바빴을 뿐이다. 아..할리우드는 또 이 무서운 공포 영화를 이렇게 꼬아 비틀어 버리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니까 다시 조금은 알 것 같다. 샘 레이미와 <주온>은 엄청나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주온>을 비롯하여 한 때 유행했던 일본산 공포물들은 뭐랄까,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뭔가 어둡고 무거운 것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주온에서 출몰하는 토시오를 비롯한 혼령들의 그 원한 같은 것들 말이다. 한 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링> 시리즈라든가, <주온>이나 <검은 물밑에서>와 같은 시미즈 다카시, 나카다 히데오 등의 영화들을 보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들을 어딘가로 같이 데려가려 하는 혼령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거나, 주위의 따돌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받은, 사실은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여기에는 유머는 없다. 단지 엄숙한 비장미와 감추고 싶은 비밀, 몸서리쳐지토록 슬픈 이야기들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공포영화의 계보도를 그린다면 그런 일본산 공포영화들과 상당히 먼 지점에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은 위치하게 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묘한 밝음이 있다. 또한 상당한 유머가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유령이나, 악귀가 나온다. 그러나 이 유령이나 악귀는 어딘지 모르게 밝다. 예를 들어 일본산 공포영화들의 악귀들이 아주 깜깜한 밤에, 엘리베이터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 혹은 아주 깊은 오래된 우물 속에서 슬며시, 아주 조심스럽게 나타난다면, 이 영화의 악귀는 밝은 대낮에, 낄낄 웃어가면서 쩍 하고 나타나는 식이다. 물론 상당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공포물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스크림> 시리즈도 사실 얼마나 은근히 밝고 코믹적인가.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뛰노는 청춘물 같은 분위기에,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코믹한 대사들과 상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이라니.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스크림> 시리즈와도 다르다. <스크림>이 밝은 웃음이라면, 이 영화의 웃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데가 있다. 아마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샘 레이미 본인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미리니름이 시작됩니다)

이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유머들은 영화 곳곳에서 은근히 빛난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일단 첫번째, 이 여자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이 혹염소 악귀(물론 여기서부터 유머다)에 시달리게 되는 이유부터 홀딱 깬다. 혹 일본산 공포영화였으면, 어린시절의 학대 혹은 주위의 왕따 같은 무거운 얘기들이 들어갔을 거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노파에게 저주를 받게 되는 이유는 너무 현실적이라 픽 웃음이 난다. 바로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이 노파의 대출 상환 기한 연장을 거부했던 것. 그후에도 이 현실성은 악귀에게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 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계속 나타나며, 하나의 유머 코드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나중 크리스틴과 만나게 되는 영매는 예전 다른 영혼을 흑염소 악귀에게 빼앗긴 사연을 처음에 보여주며 나름 비장하게 등장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만 달러라는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어처구니 없게도 꽤나 잘나가는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은 그 만 달러도 구하지 못해, 전당포에 가재도구를 넘기며 받은 부족한 돈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스크림이나 꾸역꾸역 먹고 있다(전직 뚱녀였던 크리스틴은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극복해왔던 것). 아니,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데,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해야지, 지금 아이스크림이 넘어가니. 하. 

(미리니름이 강해집니다)


유머는 계속되니, 영화의 처음에 '악귀에게 복수할거야'를 외치며, 비장하게 등장한 이 영매는 어처구니 없게도 허망하게 죽어버리고(그것도 일종의 심장마비인 듯 하다), 그 영매를 소개해준 심령술사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영매는 악귀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사실은 그 저주받은 물건을 다른사람 주면 되는 방법이 있었노라고 뒤늦게야 고백한다.(하..고객 데리고 장난하니?) 옳거니, 그럼 되었구나, 그 물건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 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은 내가 <링>에 너무 빠진 까닭.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산 공포물이 아니고, 그런 윤리적인 문제를 슬며시 제기할 만한 심각한 영화가 아니다. 이건 그냥 샘 레이미의 유머 공포물이다. 물론 이후에도 이 유머는 여전히 계속되니, 공동묘지에서 하필이면 십자가에 머리를 맞고,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아마도 그 정점이라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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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이 영화를 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거나, 무섭지는 않고 웃기기만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샘 레이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아주 약한 공포와 아주 약한 유머, 그리고 그 이후에 약간은 센 공포와 조금은 더 센 유머, 그리고 마지막에는 커다란 공포와 그 이후에 터지는 허탈한 유머를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샘 레이미의 작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어느정도 꽤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씨네 21>에서도 지적했던 이 영화의 리듬, 그 리듬의 훌륭함인지도 모른다. 관객을 쥐었다가 놨다가, 다시 조금 쥐었다가, 놨다가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소리와 장면전환으로 리듬을 부여하는 것 말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샘 레이미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뭐야 괜히 소리로 놀래키기나 하고, 소리없으면 하나도 안 무섭겠네."라고 푸념하는 것은 소리를 그만큼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는 은근히 재미있다. 그리고 꽤나 무섭고, 꽤나 웃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기분이 찜찜하다거나 이상야릇하거나, 무겁게 만들지 않고(사실 나는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 그저 사우나에서 땀 뺀 기분으로 상쾌하게 나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 2009년 6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p.s.
며칠 전에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자의 찌질함에 대해 썼었는데, 거기에 하나의 경우를 추가해야 할 듯하다. 바로 남자 둘이서 공포영화 보면서 조잘조잘 떠드는 것. 내 옆자리에 한 칸 띄어 앉았던 어떤 두 녀석 이야기다. 나는 니들이 왜 떠드는지 잘 알지. 입 꼭 다물고 보면 너무 무서워서잖아. 물론 혼자서 보러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그런데 나가면서 "별로 무섭지도 않네."하고 허세는 왜 부리실까. 에라 이넘들아. 아까 영화관에서 니들이 양 주먹 꼭 쥐고, 팔걸이 움켜쥐는 팔에 힘줄 나오는 거 다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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