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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이 아닌 'The 발칙한 한국학'

The Book | 2009. 11. 29. 20:18 | Posted by 맥거핀.


 

더 발칙한 한국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J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 2009년)
상세보기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J.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장은 스콧 버거슨을 제외한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위트를 섞어 짤막하게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장은 스콧 버거슨과 다른 친구들의 인터뷰 형식이고, 3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각 친구들이 한국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고,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스콧 버거슨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앞의 장들도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에 조금은 생각해 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4장이다. 사실 앞의 장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책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내용들이다. 한국의 어떤 폐쇄적인 부분들, 혹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비합리적인 부분들이나,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루는 글들은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진 감마저 있다. 그래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광우병 파동의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들을 스콧 버거슨, 한국명 '왕백수'가 풀어놓고 있는 4장이다.

글쎄. MB의 충실한 지지자나, 조중동 등의 보수신문을 열심히 탐독하고, 그 논지의 정갈함에 감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4장 부분을 읽는 반응은 대체로 2가지로 나누어질 것 같다. 하나는 뭐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거지 뭐.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흥미로운걸...하면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거나 혹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반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스콧 버거슨은 전자의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본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들을 '엑스팻(expat)'이라고 부른다. 이 '엑스팻'은 약간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엑스팻'을 이렇게 정의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expatriate)을 부르는 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 이 땅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지만 결코 이곳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본인과 다른 친구들을 '엑스팻'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들을 그저 '엑스팻'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어떤 반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외국인으로 보입니까?'라는 Seoul Don(서울 돈)의 글로 시작하여, '한국말로 이야기해요'라는 스콧 버거슨의 글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내내 본인들을 단지 외국인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이 짤막한 리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외국인의 글이 아니고, 한국인의 글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글은 흥미로운 관점을 담고 있지만, 어떠한 부분은 경직되어 있고, 또한 어떠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스콧 버거슨은, 적어도 그의 글로만 놓고 판단하자면, 아직은 엑스팻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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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콧 버거슨이 4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은 4장 맨 처음의 '종로의 이방인'이라는 꽤나 긴 글 보다는, 그 뒤의 '한국에는 사랑의 여름이 없다'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글에서 1968년을 포함한 1960년대 서양(유럽)에서 일었던, 반(反) 권위주의적인 반(反) 문화적인 혁명의 기운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여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름이 여기 한국에 왔다 갔다. 2008년 여름의 짧은 순간 동안, 종로 거리는 신명나는 음악과 기묘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나는 애매하고 단순했던 소비자 권리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전면적인 혁명으로, 마술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원찮게, 다소 슬프게 끝나버렸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가?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치는 언제나 똑같았던 증오의 정치에 맞설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p.429)

 

한 마디로 말해서, 2008년 광우병 정국 속에 벌어졌던 종로에서의 시민의 쿠데타(그의 표현이다)는 권위주의인 신화에 맞서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신화화를 깨부수었던 1960년대 서양에 비하자면 여전히 촌스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2008년 종로는 그렇다. 그것은 보수진영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어떤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全) 진보진영이 결탁한 일종의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비겁한 폭력이었으며, 그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은 진보진영의 언론에 의해서 교묘하게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신화화적인 기제가 작동하였음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신화화적인 기제가 시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가로지르는 잠재적 반미감정의 암류는 유명한 '촛불 든 소녀' 로고를 살펴 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로고는 잠깐 사이에 광우병 촛불시위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는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죽음이 그 불씨가 되었다. (중략) 내가 보기에 2008년의 '촛불 든 소녀' 로고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비슷해 2002년 촛불시위를 노골적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 환기시켰다. 이로써 또 한 번 미국 헤게모니의 사악한 음모와 약탈에 맞서 지켜내야만할 한국의 '무구함'과 '순수함'을 표현한 친숙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적 원형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p.404-405)


스콧 버거슨의 주장은 몇몇 부분에서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 MB 정권이 왜 광우병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되었나를 말하는 부분이나, 386 세력의 어떤 한계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 어떤 신화화가 개입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난 2008년의 촛불시위 정국에서 어떤 광우병의 위험이 약간은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며, 시민들의 시위에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고, 시민들의 투쟁에도 어떤 신화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콧 버거슨의 말대로, 시위대 중 일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것, 그것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신화화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이다. 그는 시민들(혹은 진보진영)의 신화화를 깨부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그 반대의 진영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왜곡된 사실, 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어떤 진실인 것처럼 호도해 버린다. 어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을 그 논증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즉, 그는 신화화를 깨부수고 반 신화화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신화화를 그의 글의 주요전략으로 구사하는 셈이다. (또한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모든 부분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대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어떤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이라크 전쟁을 어떤 현대 문명,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호로 비쳐지게 했지만, 그것에 어떤 문명전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즉, 2008년 촛불시위에 어떤 신화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내내 벌어진 주요 광우별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한 번도 경찰이 시위대를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 상황은 항상 그 반대였다. 핵심은 늘 전경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보이게 자극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진보세력 미디어(및 그들과 한통속인 수많은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보도 자료로 남기는' 것이었다. (p.392-393)

   

또한 광우병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진보연대'가 이미 2008년 1월부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모의를 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저돌적 추진 과정에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리를 포착, 대중적 저항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이어진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며 공표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p.372)

  

가장 유명한 예로 촛불시위 초기 다수의 여중생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겠고, (중략) 진보적인 손위세대가 가부장적으로 제공한 더 큰 내러티브에 포섭당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386 세대가 대부분인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촛불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한 사실이 보도된 적도 있다). (p.398)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내용 중의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보수진영의 신문들이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례로, 시위대의 폭력이 있었고, 그것 또한 일부 감추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항상 시위대가 경찰을 먼저 자극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스콧 버거슨이 '엑스팻'을 넘어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그의 시각에는 여전히 엑스팻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즉, 스콧 버거슨에게는 결국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인적인 시각, 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의 원형(原形)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6월 항쟁의 경험이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시위 기간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왜 자꾸 언급되는지, 한국인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얘기한 대로, 그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2008년의 촛불 시위가 1960년대 유럽의 진보적인 기치에 비추어볼 때 권위주의적이고 촌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엑스팻의 시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현상이지, 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오랜기간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는 점,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 왜 한국의 시위 문화가 여전히 신화적인 내러티브 중심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국인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두 가지를 여기에 더 첨부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의 유럽의 물결이 그가 생각한 대로 마냥 반 문화적인, 반 권위주의적인, 반 신화적인 내러티브였는가. 그것 역시 어느정도 신화화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의 양상, 혹은 그 투쟁 조직이 왜 어찌 하여 반 민주적인가.') 그것이 가능해야만, 그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나, 2008년의 반 한나라당 기치가 단순히 헤게모니 찬탈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한나라당'의 역사성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까)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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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4장에 있는 스콧 버거슨의 글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3장 부분의 엑스팻들이 한국의 살사(salsa) 문화의 성장에 악전고투한 이야기나, 홍대 인디씬에 대한 글은 아주 재미있었고, 흥미로웠으며, 1장의 몇몇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책의 다른 부분들도 살짝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책의 중간에 자주 나오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 이 책의 대부분의 북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조롱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북한 JI 정권이 조롱할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이 리뷰를 읽고 혹시 나를 빨갱이로 단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는 얘기인데, 북한 JI 정권은, 나 역시 그 이상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절대)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끊임없는 조롱이 마냥 유쾌한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조롱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 북한과 우리가 한 나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조롱뿐인가. 그(와 친구들)가 자신을 진정 한국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이러한 조롱이 유쾌할까.

  그러니 이의 연결 선상에서 이 책이 조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는 끊임없이 그를 단지 '엑스팻'으로 보아주지 않기를 주장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나, 그의 책에서 계속 나타나는 '엑스팻'적인 시선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와 친구들)가 한국인의 어떤 편협함, 한국 사회의 어떤 폐쇄성, 또는 문화적인 이상함, 특이함에 대해 말할 때,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아픈 비판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엑스팻으로 '한국 살람 참 이상해욜..'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왜냐하면 그것에는 한국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 책 <더 발칙한 한국학>은 엑스팻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솔직하고 거침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미수다'보다는 낫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엑스팻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ps. 리뷰의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The 발칙한 한국학'이란 결국 잘못된 말,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는 잘못된 한국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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