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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 10명의 감독과 10개의 이야기

Ending Credit | 2009. 9. 9. 00:12 | Posted by 맥거핀.



조금 특이한 영화를 보았다. 10명의 감독들이 10개의 이야기를 하는, 10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황금시대>. 그리고 그 10명의 감독들에는 꽤나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포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이송희일 감독, <은하해방전선>으로 귀엽고 유쾌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윤성호 감독,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가난한 청춘의 감수성을 보여줬던(그러나 그 이후로 <보트>로 약간은 말아먹은) 김영남 감독,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로 꽤나 스트레이트한 묵직함을 보여준 양해훈 감독, 그리고 <여고괴담4>의 최익환 감독, <거울속으로>의 김성호 감독, <새드 무비>의 권종관 감독 등등..지난 몇 년간 큰 대박은 터뜨리지 못하였으나, 어느 정도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 감독들 10명이 각각 10여분 내외의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 <황금시대>의 가장 큰 장점은 10개의 단편들이 어느 정도 고른 결과물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놀랍다 정도의 작품들은 없지만, 꽤나 인상깊은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럿 있으며,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그렇게 또 아주 떨어진다 싶은 작품들도 없다.

이 10개의 작품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는 '돈'이다. 그러나 흐름을 관통한다고 해서, 이야기들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10개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의 흐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단 이 10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짧은 순간 집약되는 공포를 보여주는 김은경 감독의 <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 <담뱃값>(남다정 감독), 음악을 이용해 감수성을 잘 이끌어내는 김성호 감독의 멜로 <페니러버>, 현재 사회 이슈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미친듯이 웃어제낄 수 있는 사회 패러디물 <신자유청년>(윤성호 감독), 묘한 분위기로 관객의 마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각 10개의 이야기들은 코믹반전, 생활스릴러, 공포특급, 슬로우액션 등 비슷한 소재를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장르 속에서 각 감독들의 전작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색다르게 이 이야기들을 즐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성호 감독의 독특한 공포 스릴러 <거울 속으로>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약간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감성 멜로 <페니러버>가 흥미로울 것이고,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고 의도적으로 어설픔을 강조하고있지만, 전작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직구를 이번작 <시트콤>에서도 살짝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이라는 소재를 내세웠다는 것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소재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돈 빠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있던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돈을 소재로 한 10편의 단편을 보는 것은, 젊은 영화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간은 불행하게도, 이들이 보는 우리 사회는 뭔가 망가져가는 상당히 어둡고 불안한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자살하기 위해 유언을 작성하며(<유언>), 부부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고(<불안>), 소녀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서는 안될 일들을 저지르며(<동전 모으는 소년>), 노숙자는 지금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달린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보지도 않는다(<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농담을 표방하고 있는데도, 별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청년> 같은 것들. 이 이야기는 임경업(임원희)이라는 청년이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패러디로 계속 농담을 던지는 영화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건드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것들이 농담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중권 씨도 진중권 씨 본인에 의해 희화화된다. 그쯤 되다 보니,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묘한 물음이 생긴다. 이게 농담일까. 어쩌면, 실제로 혹시 만약 그런 일이, 즉 누군가가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계속 웃게 만들긴 하지만, 이 웃음은 언젠가 영화 속 어떤 사건과 꽤나 비슷한 신문기사를 보고 웃었던 웃음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아..50주가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구요? 무슨 소리. 이 사회가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트콤>에서 끊임없이 깔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시트콤은 전혀 웃기지 않기(혹은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의 방청객의 녹음된 가짜 웃음소리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것이 있던가. 그리고 하나 더. 어떤 시트콤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중간중간 꽤나 코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떤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버텨나가기 어려운 일만 있을까.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버텨낼 수 있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백 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지나간 후에야, 마지막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김영남 감독의 <백개의 못, 사슴의 뿔>. 모질지 못한 공장노동자 미숙(조은지)과 빈틈이 많아 보이는 사장(오달수)과의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한판 대담은 유쾌한 속에서, 꽤나 명징한 해답을 남긴다. 결국 돈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 없다는 것. 인간이 살기 위해서 돈이 만들어졌지, 돈이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명징하고도 당연한 대답을 하기 위해 영화는 꽤나 긴 시간을 달려온다. 달려온 긴 시간만큼 이 마지막은 꽤나 안도하게 만든다. 사슴의 뿔을 싣고 어디론가로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비추는 이 엔딩은 그래서 안도의 엔딩이다.



- 2009년 9월, CGV 압구정 



덧.

시사회에서 본 영화인데, 중간에 일어나는 관객이 조금 보였다. 아마 단편들의 옴니버스라는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몰랐던 관객들이 아니었나 싶다. 단편들은 시간의 제약상 아무래도, 완결된 이야기나 잘 얼개가 짜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보면, 역으로 이 단편들의 재미가 그런데서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얼개를 스스로 짜맞추고, 어떤 상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은경 감독의 <톱> 같은 작품. 톱을 사간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어쩌면 진짜 공포는 그가 꾼 악몽이 아니라, 그녀가 톱을 사가고, 그 후에 다시 찾아온 그 아침 사이에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이 아니었을지. 그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단편도 단편 나름. 잘 짜인 얼개와 짧은 이야기에서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전 영화들에 지나치게 호의적인 평가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들의 배열을 좀 달리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있다. 작품들의 수준은 고른 편이지만,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도 있고, 한편으로는 조금 실험적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초반과 마지막에 조금 친절한 작품, 중간에 조금 덜 친절한 작품들을 배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을 번갈아 배치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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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트(loft), 구로사와 기요시

Ending Credit | 2009. 9. 5. 00: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상당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영화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레이코(나카타니 미키)와 고고학자 요시오카(토요카와 에츠시)가 소녀의 시체가 물 속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뭔가 밋밋한, 약간 기이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기계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소녀의 참혹한 시체는 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요시오카 교수는 반대로 물에 빠진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강한 시각적 충격이 생각을 정지시킨다. 그랬다. 이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며 끝나는 마무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반복을 통한 영원한 순환. 이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마무리 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다. 관객을 절망을 통한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 그의 영화다. 아마, 이 마무리 장면이 없었다면, 뭔가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마무리 장면은 그 전의 장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편집장 기지마가 레이코를 습격해, 이상한 형태의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나무를 통해 양쪽에서 목을 매는 기이한 형태. 반대쪽에서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끌어올려지는(즉, 목이 매달리는) 구조. 이것은 이 마지막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는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땅을 파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그 전의 장면의 반복이기도 하다). 죽은 소녀가 끌어올려짐으로써 요시오카는 물에 빠진다. 한 쪽이 끌어올려지면, 다른 쪽은 반대로 하강한다. 이 끌어올려진다는 것, 끌어올려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단, 미이라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발굴 행위부터가 그렇다.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미이라를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행위. 그리고 사실 이마저도 반복이다. 사실 이 미이라의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1920년대 처음의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이 미이라를 다시 진흙 속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 미이라를 감시하는 기묘한 기록필름을 남겼다. 즉 이 미이라의 발굴 역시도 일종의 반복인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기록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총 4번의 끌어올려짐이 나오는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진흙을 토하는 레이코의 모습. 그런 것마저도 왠지 일종의 '끌어올림'을 연상시킨다. 뱃 속에 가득찬 진흙들이 식도를 타고 끌어올려진다...아니, 이것은 끌어올려짐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뭔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프트(loft). 사전을 찾아보면, 다락방, 창고 같은 의미이다. 영화 팜플렛에 소개된 대로, 이는 레이코가 요양을 하기 위해 간 시골의 창고와 같은 집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로프트'라는 말은 '리프트(lift)'를 연상시킨다. 끌어올린다는 의미의 리프트. 이 '로프트'라는 말이 '다락' 혹은 '집의 가장 높은 층'을 의미함도 생각해 볼 때, 어원학적으로도 '리프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은 로프트 혹은 리프트다. 이 반복되는 끌어올려지는 행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늘상 그랬듯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불확실한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 이는 왠지 어떤 욕구(욕망)와 관계되어 있는 것인 듯 싶다. 일단 욕구라는 것 자체가 가진, 끌어올려지는 어떤 속성. 우리는 흔히 욕구를 발산한다, 혹은 분출한다고 이야기한다. 발산한다, 분출한다는 것은 밑바닥에서 위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내 속의 아주 깊은 진흙과도 같은 늪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들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위는 어떤 욕구(욕망)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물들은 파멸의 길에 다다른다. 1000년 전에 아름다움을 유지하고자는 하는 욕구로 진흙을 먹었던 어떤 여인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었다. 그리고 편집장 기지마는 소녀를 범하려는 욕구를 채우려다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요시오카는 천년된 미이라를 자신의 학문적(그리고 학문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어이 늪에서 다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역시 소녀에 대해 어떤 욕구를 품고 있다가, 소녀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파멸에 이르렀다. 그리고 레이코는...레이코의 파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소녀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멋대로 출판했다. 그녀가 그 소설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는 그 장면은 왠지 그녀의 어떤 파멸을 예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오카가 물에 빠지고 사라진 후,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멀지 않은 그녀의 파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빠져나갈 공간이란 없다. 그녀는 또 어딘가에 가라앉을 것이고, 그 순간 또 누군가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


어느 것이 끌어올려지고, 그의 반대편에서 또 어느 것이 가라앉는 것, 그 순환성과 영원한 반복, 그것에서 비롯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로 이 영화를 잠깐 생각해 봤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해석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모호한 얼개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물론 이야기의 얼개를 전혀 짜맞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면들이 현실과 꿈, 혹은 상상의 경계 속에서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화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상당히 자주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깨어나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혹은 빙의된 상태인가. 예를 들어 요시오카가 기계를 돌리며 무언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있고, 뒤에서 레이코는 그만두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몽환적인 장면. 그 후에 바로 레이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이 장면을, 통상적인 영화 문법에 의해 관객들은 이를 꿈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장면은 꿈일까. 레이코는 실제로 이 장면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레이코는 혹시 누군가가(미이라가, 혹은 소녀가) 빙의되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이미 레이코도 죽은 상태가 아닐까. 진흙을 토한다는 장면도 그렇게 보면 심상치 않다. 이미 레이코는 죽어서 몸 속에 진흙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닐까...아무래도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렇듯 꿈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그 경계선 속에서 보는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악몽의 가장 희망적인 요소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언젠가 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가 지속된다면,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을 담아내기를 노린다." 그가 이 영화에서 그런 경계선을 그려내기 위해 활용한 방식은 독특한 카메라의 시점이다. 등장인물을 상당히 이상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은, 마치 어떤 유령의 시점을 연상시킨다. 즉 등장인물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각도,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장면 어딘가에 있는 유령, 혹은 환영 밖에는 없다. 그 유령이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순간, 그 바라보는 세계는 도리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음침하게 보인다. 마치 도리어 그 곳이 비현실이라는 것처럼. 그 경계선에 카메라는 서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건물에 난 창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지켜보는 장면(포스터에 있는 장면). 레이코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바라보는 건물 안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요시오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레이코의 모습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 경계선에 화면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거기에 같이 위치하여 그 절망을 바라본다. 창 이쪽인가, 바깥인가. 어디로 나가도 당신은 피할 곳이 없다. 경계선 이쪽이나 바깥쪽이나 다를 것은 없다.

공포감은 거기에서 밀려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한 몫을 한다. 음악의 사용을 배제하고, 사물들이 발생하는 소리, 주위의 환경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증폭시켜서, 공포감을 창출하는 방식은 영화 <불신지옥>과 조금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때로 이 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한 속에 그녀가 서 있다.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악몽을 꾼다. 아마 오늘 밤에도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다. 꾸는 것은 무섭지 않다. 문제는 깨어난 다음이다.




- 2009년 9월, 스폰지하우스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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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본 3편의 영화

Interlude | 2009. 9. 3. 01:45 | Posted by 맥거핀.
어떤 영화제이건 간에, 영화제에 참여하는 것은 즐겁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제에 가면 영화제 특유의 웅성웅성하고 기대감에 찬, 관객들의 어떤 공유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어떤 영화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즐겁게 느끼고 가겠다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영화제에서는 영화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외부의 풍경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근처의 색다른 먹을거리 등등. 물론, 이번 충무로국제영화제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미는 조금 반감된다. 가끔 한 두 번 씩은 가던 극장들이기 때문에, 극장 내 외부의 풍경들이란 빤하다. 그래도 빨간 옷의 자원봉사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관객들을 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전히 마음이 좋아진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제에서 보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만 보고, 한 두가지 사소한 이유로(예를 들어, 시간이 맞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화를 색다르게 즐길 수가 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영화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보고 영화관에 가는 편이다. 영화의 내용이 어떠한 내용인지, 평은 어떠한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지 읽어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런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영화의 재미가 약간 반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뭔가를 많이 알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많이 알고 가면 갈수록 영화를 여러 겹의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이번에 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도 거의 우연적으로 선택되었다. 시간이 맞고, 약간은 나에게 흥미를 주는 요소가 있으며, 표가 남아 있던 영화들 위주로. 그리고 영화제에서 본 3편의 영화에 대한 약간의 코멘트.



레인 폴, 맥스 매닉스 감독

'씨네 아시아 액션' 섹션에 있던 영화다. 이번 영화제는 아시아 액션물에 대한 라인업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섹션에 있던 영화를 많이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2편 밖에 보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일본에서 비밀 공작 활동을 벌이는 CIA가 추적하는, 국제적 킬러 존 레인(시이나 깃페이)의 활약을 그린 영화인데, 주인공 존 레인 캐릭터의 구축이 모호하여, 영화의 전체적인 매력도 반감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명색이 액션 영화인데, 사실 그럴듯한 액션 장면도 별로 없다. 아무래도 액션 영화의 매력이란 주인공이 악당들과 맞서서, 혹은 냉혹한 운명에 맞서서 정면충돌을 벌이며,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이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존 레인은 맨날 도망만 다닌다. 그리고는 같이 도망치는 여주인공에게 '경찰을 만났을 때 들키지 않는 법' 이런 강의나 하고 앉아있다. 그나마 건진 것이라곤, CIA 도쿄 지부장(?)으로 나오는 게리 올드먼의 많이 녹슬었으나 아직은 봐줄만한 연기다. 수십개의 CCTV 화면 속에서 도망치는 존 레인을 참 어지간히도 못 잡는 CIA 요원들의 활약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연기는 꽤나 즐길만 하다. (메가박스 동대문)




야수형경, 진가상 & 임초현 감독

예전부터 매니아 층의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여러 들었던 터라, 이번 영화제의 나름 기대작이었다. 위의 <레인폴>과 같이 '씨네 아시아 액션'에 있던 영화로,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준 영화다. 홍콩의 한 구역을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새로운 리더가 오면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다룬 영화로, 전체적으로 유머가 아주 잘 살아있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여러 눈여겨 볼 만한 부분들을 던져주는 영화다. 하나는, 이 영화의 독특하고, 특이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저 코믹스럽기만 한 그저그런 유머물인듯한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갈 수록 점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 영화 시작부에는 조금 산만하게 여러 에피소드들이 툭툭 던져지는 듯 한데,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수렴되어 강렬한 액션으로 마무리 된다. 확실히 이렇게 이야기를 아우르는 능력은 그리 가볍게 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영화에 내리깔린 특유의 정서다. 처음에 주인공 동 형사(황추생)을 중심으로 한 이 경찰조직은 '뭐 이런 경찰조직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런 동 형사에게 어느덧 동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이곳에 더 필요한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가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세 번째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롯데시네마 명동)




험프데이, 린 쉘튼 감독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단지'2009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문구에 끌려 보았던, 사실은 시간이 맞아서 본 영화다. 보고 나니, 충분히 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벤과 앤드류라는 두 친구가 우연히 파티에서 아마추어 포르노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결심이란, 이성애자인 이들 두 남성이 섹스를 시도하는 과정을 포르노로 찍어보는 것.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들의 이 일들은 점점 커진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떤 아이러니한 질문을 자꾸 관객들에게 하도록 만든다. 그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이런 시도에 어떤 마초적인 경쟁 심리라는 것이 자꾸 개입된다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관객들에게 어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한다. 그것은 나도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혹은 동성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질문들에서부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 사회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성애라는 것만이 우리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개입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까지.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어떤 동성애만을 무조건 옹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한 가지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상황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발군이다. <덤 앤 더머>의 업그레이드 판. 이번 영화제의 개인적 발견작.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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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 6점
권진.이화정 지음/씨네21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오래전 자주 갔던 곳을 한동안 찾지 않다가, 오랜만에 거기 들렀을 때, 유달리 심한 낯설음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자주 찾던 단골집, 작은 헌책방들, 길가의 벤취, 골목 사이사이에 난 작은 길, 그런 것들이 사라졌을 때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약간 비애감을 느낀다. 이곳 서울은 그런 일이 유독 잦다. 그만큼 서울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많은 공간들이 점점 새롭게 변하고 있다. 물론, 어떤 공간이든 낡은 것들을 새롭게 바꿀 수는 있으며, 오래되고 쓸모 없어진 것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거기 있던 사람도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공간만 새롭게 변하면서 사람은 그대로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공간에 들어설 때면, 나는 반드시 묻고 싶어진다.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딘가에서 다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을까, 아님, 그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까. 30년이 넘게 서울에서 살아온 나에게 비친 서울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도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도시다.

이 책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을 말한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떨까. 여기에는 총 7명의 인터뷰이가 나오는데, 이들은 유럽, 미국, 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며, 인종이나 나이, 성별 등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왠지 이들 7명은 비슷비슷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라는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미래의 것이 공존하는 칼라풀하고 파워풀한 도시라는 것, 때로는 지나치게 빠른 변화가 어리둥절하고, 슬프게 만든다는 것,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대적이고 편리하다는 것 등등.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이 왠지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한 가지 이유는 이들이 모두 아티스트, 작가, 댄서, 미술가 등 예술적인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예술적인 창의성에 도움을 주는 어떤 역동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역동성이 획일화된 개발풍경에 의해 점점 사라져가는 도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기억에 남는,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서울 강북권에 있는 곳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홍대 근처나 북촌, 통의동, 연신내, 종로 같은 곳들 말이다. 왜냐하면 강남은 정말 획일화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는 강남 어디를 돌아보아도 대부분 비슷한 풍경이니 말이다. 늘어선 건물들과 잘 정돈되어 있는 가로수와 아파트촌들. 이제 강남의 다양성이란 그저 건물의 디자인의 다름을 가지고 말하는 수 밖에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거의 가장자리지만, 이곳에도 그야말로 '잘 정돈된' 어떤 풍경들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곳도 거의 강남권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본 서울이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하나로, 이 책의 인터뷰의 질문들이 약간은 피상적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이 책의 많은 질문들은 어떤 구조화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 보다는 그저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누면서 여러가지 것들을 편안하게 묻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 깊이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그저 느낌이나 인상들에 그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의 컨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서울의 문제점을 나열하거나, 개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책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이란 곳이 어떤 느낌인지 살펴보고,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공간들은 어디인지 가볍게 전달하는 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벼운 트랜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차 한 잔 홀짝거리며,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다시 펴고 읽으면 되는 그런 종류의 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금 더 냉소적으로 보자면, 결국 외국인이 말하는 서울이란, 이 정도가 한계인 듯 하다. 그들 눈에 비친 서울이란, 과거의 어떤 전통들이 아직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곳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스타벅스가 널리 깔려있어서 편리한 도시, 외국인에게 약간은 배타적인 면도 있지만, 또 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도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그들에게 듣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정도였을 것이다. 어떤 비판을 듣고 싶기는 하지만, 날이 선, 아프게 들려오는 비판이 아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긍정하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비판. '미수다'에서 아주 살짝 더 나간 정도의 그런 비판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개발의 문제, 사라져가는 풍경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이 옛것, 어떤 전통적인 풍경들을 서울의 참모습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지 이들에게는, 도리어 그것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풍경들이어서가 아닐까. 이들이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사라졌다'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 사라졌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카피에 나온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몰랐던 서울 이야기'를 이들에게서 듣기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p.s. 이 책의 사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공간을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공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서울의 어느 곳이나 점점 비슷비슷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남아 있는 것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하긴 이 마저도 위태위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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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이용주

Ending Credit | 2009. 8. 24. 00:2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과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불신지옥>이 꽤나 무서운 공포영화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음산한 스코어나 과도한 효과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효과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나, 공간이나 사물을 잘 활용하여- 예를 들어, 아파트 지하실 씬 같은 것 - 말 그대로, '일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여러 좋은 리뷰들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또 영화의 여러 설명되지 않는 점들을 다시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리뷰들에 보면 재미있고, 기발한 설명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설명을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몇 가지를 이 영화는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소진의 엄마(김보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아파트 현관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 주잠금장치와 몇 개의 보조잠금장치가 달려있는 현관. 엄마는 그 몇 개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열리지 않고, 도리어 잠긴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문을 당겼다가,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고, 가지고 온 물건을 떨어뜨리며 잠시 패닉에 빠질 즈음, 스르르 열리는 현관. 어떤 다른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장면은 '그들'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급하게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반대로 잠그는 것이었다는 작은 아이러니,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엄마의 작은 패닉은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주로서 읽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그 몇 개의 잠금장치들이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은 어떤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현관의 팻말 이면의 감추어진 많은 자물쇠들. 종교라는 굳건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엄마,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는 엄마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면, 그 아파트의 다른 집들도 거의 비슷한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을 달고 있으며, 대부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범창들을 설치해놓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영화의 시작 부분이 생각이 난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는 언니 희진(남상미)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알바를 꾸준히 해야하는,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 그런 희진이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어느 지방 중소도시로 내려와 거대하고, 허름하면서도,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설 때, 어떤 느껴지는 공포감. 아마도 이 공포감은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공포감일 것이다. 특별히 어떤 요행이 있지 않고서는 앞으로 그저그런 '88만원 세대'로 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그녀의 지친 삶과 그녀가 한 때 몸담았던 낡은 서민 아파트와의 조합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연민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무너지는 중산층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추락하고 있는 것, 이를 영화는 희진의 삶에 대한 몇 개의 컷과 아파트와 집안의 가재도구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빨간 전자렌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 전자렌지는 적어도 15년은 된 저가제품. 왜 아냐면 우리집도 아직 그 전자렌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무너진 중산층들은 두렵다. 무엇이? 삶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조금씩 변해가고 망가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들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진이 신들렸다고 말하는 무당(문희경)과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장영남)와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오지은)와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이창직).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왠지 이들은 각각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그 시대의 무섭고도 기이한 자화상들 말이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무속' 자체가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무당이 그렇다는 말이다)과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의 상징이라고 이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의 고통을, 그 고통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믿는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종교이든 무속 신앙이든)도 망쳐 버린다. 일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람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인 중세시대, 그 중세시대는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만이 존재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지나친 믿음은 종교의 타락을 낳았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명백하게도,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이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영화가 이의 극복을 위해, 즉 무너져가는 중산층이 탐욕이나 방관이나 혹은 맹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떤 가족주의, 그 수많은 가족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공동체의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던 엄마의 팔, 아버지를 잃은 소진,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만 늘상 바쁘기만한, 병상에 누운 아이의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아빠..아빠 언제 데릴러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속 학의 존재를 통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을 소진의 영혼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은 옛부터 어떤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무리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영화가 마지막에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가족주의, 공동체의 회복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또다른 물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이다. 이제는 제2의 소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의 딸을 (소진처럼) 잃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가능할까.

맹신(盲信)의 반대말은 불신(不信)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종교이든 무속이든 코웃음을 쳤던, 엄마에 의해서 사탄이라고 불렸던 형사 역시 이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만 해도 형사 역시 단순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종교이든 무속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다우트>에서 찾고 싶다. 올해의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고 싶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의심이 들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마지막 장면.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는 그것을 '회의(懷疑)'라고 불렀다. 아마도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p.s. <불신지옥>...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이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소 오십만은 더 들었을 듯 싶다.




- 2009년 8월, 씨너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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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시작하라

The Book | 2009. 8. 19. 00:43 | Posted by 맥거핀.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여전히 위기는 지속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위기가 지속된다기 보다는 위기라는 것이 이제 일상화의 단계로 접어든 것 같다. 이것은 단지 MB 정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MB 정부는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하던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위기라는 것을 전적으로 MB 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난 그들이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부가 이 위기들을 헤쳐나가는 어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이 위기들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 위기들이 이렇게 계속되는 것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여기서 위기라고 해서, 어떤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경제적인 위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생각의 위기, 사상의 위기다. 물론, 언제 어느 시대에나 사상의 위기라는 것은 늘상 말해져왔고, 어떤 측면에서는 과장되게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요즘의 이 위기는 심상치 않은 면이 있다. 그래서,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묻는다. 이 위기를 그래, 도대체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시사IN>에서 마련된 6개의 강좌는 그런 것을 묻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묻는다.''세계 공황의 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가 갈 길은 어디인가.''상상력은 어떻게 해서 생기나?''위기의 경제, 위기의 사회. 그 대안과 해법을 상상한다.''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때로 에돌아갈 뿐이다.' 그 6개의 주제를 <녹생평론>의 창간인 김종철이, 칼럼니스트이자 심리학자인 정혜신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이, 여성문화와 청소년문화에 대해 늘 날카로운 담론을 생성해온 조한혜정이,  시민운동가 1세대 박원순이, 역사를 보는 따스하고도 날카로운 시선 서중석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6개의 강좌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었다. 책은 어떤 커다란 수정이나 가필을 거치지 않고 강의를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순간, 우리는 그 강의실 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은 수강생이 되어 그 강의를 함께 한다. 그리고 몇몇 순간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살짝 졸기도 하고, 어떤 의문을 품기도 한다.

강의를 다 듣고나니, 2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하나는 이 강의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은 앞에서 말한대로, <시사IN>에 의해 기획된 6개의 강의를 담고 있다. <시사IN>에서 이 6개의 강의를 시작할 때, 잡은 테마는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것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상황, 자고 일어나면 문제가 터지는 사회,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가치관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들 때에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도움이란, 대가(大家)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다. 여기 6개의 강좌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생태학, 심리학, 경제학, 시민운동, 여성학, 역사학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연구 및 활동을 해온 분들이지만, 모두 그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혹은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들을 생성하고 있는, 나름 그 분야에서는 일종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약간은 놀랍게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인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지금의 시기가 위기라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했을 때 이 위기라는 것이 결국 기회라는 것이다. 어떤 기회?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어떤 하나의 사회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나아갈 때, 사람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사회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제서야 사람들은 달리던 발을 멈추고, 자신의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뭔가 대단한 답을, 엄청난 대안을 기대하셨던 분들은 맥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높은 최정점에서 밑을 돌아보는 이 대가들의 해답은 결국 그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좀 더 자신과 밀착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

더 이상 증거가 따로 필요 없다 할 만큼 아주 분명한 사례를 들려드릴게요. 아우슈비츠 생존자를 연구한 결과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수감자는 일주일에 생수 한 병 정도의 식수를 배급받았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주 고된 노동을 하면서 지냈던 거죠. 그걸 다 마셔도 목숨을 연명하기가 어려운데, 반을 남겨서 얼굴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같이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고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겠죠. 그런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얼굴을 씼었던 사람들의 생존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존재를 배려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게 목숨을 연명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는 거죠.   

- 정혜신에게 김어준이 '위기의 심리'를 묻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묻는다.' p. 120-121 
 

다른 하나는 이 책, 그 내용 이상의 것에서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위기가 일상화가 된 시기, 이 시기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고리타분한 학문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즉 녹색의 생태학에서, 따분한 심리학에서, 철지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혹은 해방 전후 시기를 다룬 역사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듣고, 그것에서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또 의외로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준다. 여기서 강의를 하고 있는 6명의 학자들과 그 학자들 곁에서 강의를 진행한 또다른 6명의 학자들과, 그 강의를 듣고자 강의실을 가득 메운 수많은 청중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결국 그 해답이란, 무엇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에 모두들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학문의 힘에서 모든 해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해답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강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자와 강연자와의 짧은 대담으로 시작하여, 강연자의 강연을 거쳐,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끝맺고 있다. 강연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는 이 책의 원칙에 따라, 청중들과의 질의응답도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는데, 이 질의응답들을 보면 재미있다. 대부분 청중들은 강연자의 어떤 기본적인 취지나 사상에는 공감하면서도, 약간은 주저하는 빛(?)들을 보인다. 즉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 혹은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러 제약들이 따른다는 항변이다. 물론 약간의 말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강연자들이 말하는 결론은 하나인 듯 하다. 그것은 이것이다. "거창하게 시작하려 들지 마라. 항상 중요한 것은 처음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시작하라." 
:

El Lado Oscuro De Mi Compadre

Turn on the Radio | 2009. 8. 17. 20:46 | Posted by 맥거핀.


Nortec Collective- The Tijuana Sessions Vol. 1 (2001)

1. Bostich- Polaris
2. Fussible- Casino Soul
3. Panoptica- And L
4. Bostich- El Vergel
5. Plankton Man- Elemento N
6. Terrestre- Norteno De Janeiro
7. Clorofila- Cantamar '72
8. Fussible- Trip To Ensenada
9. T
errestre- El Lado Oscuro De Mi Compadre
10. Bostich- Synthakon
11. Hiperboreal- Tijuana For Dummies
12. Fussible- Ventilador
13. Plankton Man- No Liazi Jaz
14.
Terrestre- Tepache Jam


Plastic City 엔딩곡.



:

퍼블릭 에너미, 마이클 만

Ending Credit | 2009. 8. 15. 01: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미리니름일 수 있습니다.)



몰락해 가고 있는 영웅을 바라 보는 것은 많이 마음 아픈 일이긴 하지만, 늘 흥미롭다.  그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파멸만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에도, 그것을 향해 조금씩 돌진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과 함께 비장한 아름다움을 준다. 동료도 모두 잃고, 주위에서도 그를 버리고, 경찰이 마지막까지 그의 숨통을 죄어 올 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한 탕 크게 하여 여기를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일을 벌이기 직전, 몇 안 남은 동료가 그에게 묻는다. "넬슨이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급해하는 사람을 쓰지 않는 것, 그가 가진 철칙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넬슨'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만다. 이 때 존 딜린저(조니 뎁)는 단호하면서도 중간중간 살짝 주저하는 빛을 보인다. 물론 그는 빠른 속도로, 단호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눈은 중간중간 초점을 잃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철칙을 무너뜨린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그는 약간 후회하는 듯도 보이지만, 살아남은 동료들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탈출한다. 여기서의 조니 뎁의 연기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건,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존 딜린저가 파멸의 길로 조금씩 들어서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기 보다는, 그 파멸의 길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라고 말해야 할 터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탈출시켜 멋지게 은행을 터는 영화의 첫머리부터 그는 이미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존 딜린저의 애인 빌리(마리안 코티아르)는 존 딜린저에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고 말이다. 잡히거나 죽거나. 그러나 그는 코웃음친다. 경찰은 너무 멍청해서 나를 잡을 수 없어. 그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허세였다. 잡히고 나서 웃으며 인터뷰를 하며, 경찰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 또는 은행을 털며, 은행여직원을 인질로 잡아, 그녀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주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허세는 아마도, 불안의 산물일 것이다. 대부분 불안한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게 마련이다. 주가가 2000선에 곧 도달할거야...2000이 뭐야, 곧 3000까지도 갈 거라고...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내기해도 좋다.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주식에 투자한 그 많은 돈이 날라가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하고 말이다. 존 딜린저도 불안했을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같은 갱들의 도시 시카고, 이 시카고에서 멋지게 한 탕 해서 어디론가 뜰 수 있을까, 그 전에 잡히거나 죽거나, 역시 둘 중의 하나로 끝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호기를 부린다.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그의 허세가 점점 커지는 것은, 역으로 그를 둘러싼 불안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다. 당신의 옆자리에 혹시 존 딜린저가 앉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른쪽을 보시고, 이번에는 왼쪽을. 이런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광고가, 불켜진 극장에서 흘러나오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옆을 차례로 돌아볼 때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이 앞을 보고 있는 존 딜린저를 수많은 관객 한 가운데서 잡는 샷이나, 경찰서에 들어가 '존 딜린저 특별수사팀'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들어가, 야구경기에 관심이 몰린 틈을 타서 사무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지금 몇 대 몇이죠?"라고 묻는 존 딜린저를 뒷 모습으로 잡는 샷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저 순간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

마이클 만 감독의 몇몇 영화들, <히트>나 <콜래트럴>, 그리고 이번 영화 <퍼블릭 에너미> 같은 작품들을 보면 멋드러진 총격전 장면들과 더불어 위의 존 딜린저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온다. 내 생각에는, 그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해듯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불안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있다. 꼭 불안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드러나는 것이 캐릭터의 매력을 가중시킨다는 말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이클 만 감독의 역량이 출중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대체로 그런 것과 맞닿아 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드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일종의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약한 것에는 약하게, 강한 것에는 강하게 대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대체로 커다란 위험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주변에서는 점차 고립되고, 파멸은 거의 예정되어 있다. 이 거대한 자기 확신이 예정된 파멸로 달려가 그것에 부딪힐 때, 그 파장 속에서 어떤 것들이 드러나는가. 그것을 마이클 만은 조용히 잡아낼 줄 안다. 인물의 그림자에 난사된 총알들이 박히는 것으로, 혹은 경찰에게 잡혀가는 여자를 구하러 갈까말까 망설이는 아주 짧은 멈칫거림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왠지 마이클 만은 이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꺼이 다른 캐릭터를 희생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존 딜린저의 곁에는 여러 동료들이 따르지만, 이 중에 특별히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캐릭터는 없다. 그저 동료들은 존 딜린저의 곁에서 폼나게 있다가, 한 명씩 조용히 사라져갈 뿐이다. 존 딜린저의 애인인 빌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남자를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으로서만 말이다. 아마도, 이와 관련해서 가장 큰 희생자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른 한 축인 퍼비스 형사(크리스천 베일)일 것이다.퍼비스 형사는 전체적으로 존 딜린저의 가장 큰 적수이면서, 영화의 나머지 한 축으로 보이지만(혹은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별로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부분이 없다. 존 딜린저와의 몇 번의 맞대결에서는 약간은 머뭇거린다, 혹은 우왕좌왕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래서 그랬을까. 존 딜린저의 마지막 말을 여자에게 전하는 폼나는 역할도 그의 몫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크리스천 베일의 어떤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의 스포트라이트는 그가 아닌 히스 레저의 몫이었으며,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에서도 그는 주인공이면서도 그다지 주목받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무려 '존 코너'였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다른 하나의 장점은 그 캐릭터들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거리나 의상, 자동차, 극장과 같은 물질적인 재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서 존 딜린저와 같은 사악하지 않은 반 사회적 영웅에 열광하는 것, 혹은 경찰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즉 '퍼블릭 에너미'로 정하고, 그를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시작부에 경찰이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통해서 그를 잡을 것이라고 공표하지만, 경찰이 결국 활용하는 방식은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약을 투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하는 등의 결국 '그 방식'이었다.)이 어떤 사회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존 딜린저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혹은 은행은 털어도 은행 고객의 돈은 털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민중들은 응원했다? 글쎄. 은행 돈이라는 것도 결국 고객들의 돈이고, 그는 어쨌든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는 대공황 시기 사람들의 심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를 살펴보는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만은 그런 시대 속으로 우리를 성큼 들어서게 만든다. 꼭 실감나는 총격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이클 만은 총격전에 특화된 감독이긴 하지만 말이다.





- 2009년 8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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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윤제균

Ending Credit | 2009. 8. 11. 02:3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렇게 소위 '대박이 나고' 있는 영화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많은 글들과 이야기들과 곁가지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왠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보고 난 이후에는 이전에 보았던 리뷰들에 나의 감상이 영향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몇몇 부분들에는 반박을 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CG의 어설픔이라든가, 배우들의 연기의 미숙함, 특히 박중훈 연기의 미숙함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 그렇다. 글쎄..개인적으로는 CG 부분은 생각보다 의외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재난영화에서 CG는 큰 부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CG가 얼마나 정교하고 실감나게 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타이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설혹 약간 어설프게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핵심적인 포인트를 살짝 다른 곳에 돌릴 수 있게 함으로써, CG를 영화를 받쳐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영화 <해운대>의 CG는 그것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적절히 잘 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중훈의 연기는...여러 부분에서 약간 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의 변명을 해줄 수는 있다. 먼저 첫째는, 사투리 연기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 강한 사투리의 사용은 그것의 적절한 사용만으로도 가끔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이러한 이점을 활용할 수 없는 몇몇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둘째는, 그의 이 영화에서의 역할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점. 더구나 그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처럼 몇 분간의 장황한 설명을 해야하는 방식이었다면, 좋은 연기를 보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쓰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그 몇 분간의 씬이 과연 필요한 씬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사실 하려던 이야기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 하다. 하려던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의문이었다. 먼저 자잘한 의문부터. 둘로 딱 나눠져 있는 이 영화의 이상한 구조부터 말이다. 이 영화는 관객 누구나가 느끼듯이, 딱 두 개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한 구조로 되어있다. 해운대 사람들의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이야기인 전편과 쓰나미가 몰아닥친 후편의 이야기. 물론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가 나뉘어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들도 거개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처음의 웃음 코드와 나중에 감동 코드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코드'만이 그렇다. 이 영화 <해운대>는 갈매기가 차창에 머리를 박던 그 순간부터 갑자기 '페이스 오프'한다. 그리고 몰아닥친 쓰나미 속에 앞의 모든 이야기와 캐릭터의 특징들은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영화의 이런 어색한 전후반의 연결은, 다른 영화들에서 제기될 틈이 없는 질문을 굳이 하게끔 만든다. 이것이 한 영화로 굳이 묶여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실 이 영화가 재난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재난이 초반부에 몰아닥친다. 그리고 재난이 일어난 이후에 그 중심 이야기는 그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투쟁,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애, 서로가 살겠다고 벌이는 싸움, 그리고 결국 그것에의 극복이 주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러닝타임 반이 지나가도록 재난을 숨겨놓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여러 갈등을 최대한 끌어올려놓고 쓰나미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재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나약함, 그것을 넘어선 인간목숨의 중요함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애의 고결함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나 나약함 같은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고, 쓰나미가 몰아닥치자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위대한 인간애를 발휘하고 모든 갈등은 그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난 영화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여러 다른 재난 영화의 클리셰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

아마도 그것을 여는 하나의 실마리가 윤제균 감독이 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윤제균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연의 중요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을 만들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죽일 듯이 싫어한 사람도 자기를 구해줄 수 있고, 또 싫어한 사람을 자신이 구할 수도 있으니까. -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그래서 김밥할머니는 김휘(박중훈)의 아이를 헬기에서 기꺼이 받아주고, 변기를 뚫어줬던 사내는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엄정화)를 구하고, 작은아버지(송재호)는 만식(설경구)를 구하고, 형식(이민기)은 기꺼이 자일을 끊고 떨어지는 것이다. 즉 재난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나약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애와 인연을 강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라고 했을 때 여러 갈등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전에 이미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몰아닥친 쓰나미 속에서 고귀한 휴머니즘으로 상쇄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의 일방적인 강조는 가끔 지나쳐보이기도 하며,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텔 옥상에서 헬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2차 쓰나미가 몰아닥치는 장면. 이 장면에서 노약자들이 올라타 있는 헬기구조대에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을 군인들이 통제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실제라면 가능할까. 2차 쓰나미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지금 저 헬기에 올라타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할 때, 군인들이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군인들마저도 살기 위해 매달리고 따라서 헬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실에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이 비현실적인 장면을 고수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합동분향 장면에서 유독 죽은 구조대원들의 사진만 집중적으로 비춰주는 것, 그리고 구조대원들의 고귀한 희생만 강조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다른 것에 있다. 이 휴머니즘의 강조라는 것이 진정 이 영화의 주제인지,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조금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몇몇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영화의 감초 캐릭터인 동춘(김인권)이 떨어지는 컨테이너 박스들을 피하는 장면. 이 장면은 마치 게임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처리되어 있으며, 뭔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팬티를 반쯤 내리고 있는 여자가 떨어지는 물에 놀라는 장면들 같은 것. 물론 몰아닥치는 쓰나미의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삶과 죽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왜 많고많은 삶과 죽음의 엇갈림 속에서 굳이 그러한 장면을 선택하여 보여줬을까. 한 인간의 생과 사가 오가는 이러한 장면들, 이러한 내용들이 왠지 하나의 유희로서 혹은 오락으로서 제공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이러한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는 감독의 인터뷰로도 뒷받침된다.


- 쓰나미가 진행된 뒤에 벌어지는 2차적인 재난에 대한 아이디어가 관건이었겠다.
= 맞다. 변압기 시퀀스는 장마 때 감전사로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사실에 기인한 거다. 호텔방에서 물이 빠지면서 아이가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도 재난영화에서 못 본 것 같아서 넣었다. 컨테이너 장면은 사실 더 재밌게 갔다. 컨테이너가 박히는 건물이 호텔이다. 그때 안에서 반라의 남녀가 피하다가 박스와 바짝 붙게 되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뭔가 해서 고개를 내밀 때, 두 번째 콘테이너 박스가 날아와 변을 당하는 거지. 다 찍었는데, 너무 장난스럽다고 해서 뺐다.

- 사실 아쿠아리움 장면을 보면서 또 다른 시퀀스가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수족관에서 빠져나온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지….
= 그 장면도 있었다. 실제 찍었다. 화장실에 가는 희미의 친구가 물을 헤치고 나오는데, 상어한테 물리는 장면이다. 역시 너무 웃기다고 해서 뺐다. 그런가 하면 건물 앞에 빽빽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면도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삭제했다. 전체적으로 10분 정도를 자른 것 같다. 다 코믹스러운 장면이다. 재난의 긴장이 몰아쳐야 하는데,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아서…. (웃음) 나중에 DVD에는 다 넣을 거다.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중 부분 발췌)




과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인간애, 인연..그런걸까. 잘 모르겠다. 위의 몇 가지 장면들을 보면서,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자꾸 아리송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을 장난스럽게 묘사하는 것과 과도한 휴머니즘의 강조. 휴머니즘의 강조는 무엇을 덮기 위한 것일까. 혹은 무엇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일까. 자꾸만 아리송해지는 그것의 상관관계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상업영화의 최대치이자, 그것의 한계에 불과하다고만 말해야하는 걸까.




- 2009년 8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p.s.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동춘(김인권)이 어머니의 사진을 붙잡고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의 옆에 놓인 '용감한 시민상'이 과연 무엇을 위한 용감한 시민이었냐고 묻고 있는 그 장면이 말이다.

:

플라스틱 시티, 유릭와이

Ending Credit | 2009. 8. 4. 01:54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습니다만...)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영화구나. 아니, 꼭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 물어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라는 의미다. 영화를 보고 와서 찾아본 몇 개의 리뷰는 대체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특유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이국적이면서 무거운, 그러면서도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어떤 것. 강렬한 색의 대비와 독특한 화면구성. 매우 불친절하고 난해한 내러티브. 오다기리 죠와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 그 뭐 그런 것들. 그러니까, 다시 정확히 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러티브가 생략된, 이미지와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이러한 영화는 아무리 줄거리를 적어내려간다고 한들,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부터 줄거리는 별로 기억나지 않고, 파편화된 몇몇의 이미지만 머리 속에서 맴돈다.
...................................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머리에 남은 것은 영화 마지막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문구이다. 바로 이 문구이다.

一物一數 作一恒河 一恒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일물일수 작일항하 일항하사 일사일계 일계지내 일진일겁 일겁지내
所積塵數 盡充爲劫 
소적진수 진충위겁 

(세상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영화에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갔고, 영화 안에 이 말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나오지 않는터라, 그 의미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불교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줄여서 <지장경>) 제1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에서 나온 말로서, 문수사리보살이 지장보살이 어떻게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였는지(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묻자, 하나의 비유로서 이야기한 것이다. 즉, 위의 시간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온 겁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왠지 이 자막의 말은 영화 속 유다(황추생)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하다는 것, 즉 어떤 고리를, 어떤 업을 끊어내는 것은 매우 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장경>에서 담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법(因果法), 선업(善業), 윤회 등을 이야기하며, 하나의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금까지 어떠한 생을 살아왔는가에 의해서 다음의 생이 결정되며, 본인이 쌓은 업은 본인이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거의 같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유다는 브라질 국경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일본인 가족이 나타났고, 그 가족의 아버지가 총에 맞는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소년 키린(오다기리 죠)을 만났다. 그리고 백호(白虎)가 나타났고,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브라질 국경지역으로 이야기는 돌아왔고, 유다와 키린은 다시 백호를 보고, 유다는 키린의 손에 들린 칼을 통해서 자살하고, 다시 그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유다는 이 질긴 고리를, 질긴 업을 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곳에서 키린의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키린의 아버지가 되어 여러 악행(업)을 저지르고, 키린마저도 그 악행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지만, 결국 키린의 손에 죽는 이 아이러니를 말이다. 이 윤회를 영화는 하나의 형식으로, 그리고 몇 개의 상징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많은 의문은 섞여 있다. 그것으로 이들의 업은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왜 다시 이곳(브라질 국경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어디이기에 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플라스틱 시티'이다. 그러고보면, 이 제목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플라스틱 시티라는 곳. 플라스틱이 상징하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소성(可塑性)의 공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 그러나 이 가소성의 공간이라는 것은, 다를 말로 하면, 거짓의 공간, 가짜의 공간이다. 플라스틱이 가지고 있는 가짜라는 본연의 속성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 플라스틱 시티 안에서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으로도 명백해진다.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이란, 가짜의 물건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아주 비슷한 가짜를 말이다. 더구나 키린은 영화 속에서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확인해 주기도 한다. 자신은 진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가짜가 진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그러나 말이다. 과연 그 돈은 진짜일까. 어쩌면 그 돈 마저도 가짜인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여기는 플라스틱 시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짜로 이루어진 곳. 진짜는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 어쩌면 그곳은 지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간으로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 마법의 정글에서 결국 얽히고, 맺힌 업의 끈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백호를 보았고, 업을 풀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다는 키린에게 말한다. 너의 삶은 이제 시작이야, 너에게 시간은 많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시간, 겁의 시간, 항하사의 시간, 무량대수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업은, 그 운명은 사라질 수 있을까. 키린의 뒷모습에서,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서, 부서지는 강렬한 파도에서 우리는 다시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 강물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라간다해도, 파도의 파고를 모두 하나하나 세어 나간다 해도...이 마지막은 꽤나 강렬하다.




- 2009년 7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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