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Ending Credit | 2009. 9. 29. 02:26 | Posted by 맥거핀.



<씨네 21>에 소개된 이 영화의 소개 중 일부분은 이렇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메시지 또한 담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세련미있게 가공되지 않은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 세상의 순정함에 대한 믿음, 영화적 스타일보다는 배우 연기의 극대화 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야 할 것 같다. 박진표 감독의 작품들은 그간 직설적이지만 약간 촌스러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노년 부부의 사랑이야기, 농촌 총각과 다방 처녀의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 유괴된 아이를 구출하기 위한 부모의 사투...이러한 약간은 신파가 섞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건 캐릭터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그 묘사를 완성시켜주는 배우들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이야기 역시 스트레이트하지만, 역시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루게릭병 환자와 그를 사랑하는 아내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정도 이야기이고 보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 영화의 요건은 어떻게 하면 신파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야말로 캐릭터에 대한 개연성 있는 구축이 어느 정도는 필수적이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래야만 눈물이 흘러도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남기지 않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박진표 감독의 이번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시작 부분의 몇몇 장면들은 당황스러웠다.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드는 이지수(하지원)와 백종우(김명민)는 몇몇 물음들을 제기할 틈도 없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물음들. 이지수는 백종우를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여기에 박진표 감독은 대답한다. "종우가 지수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해주잖나. 나는 지수가 거기서 확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이겠지.(웃음)-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글쎄. 영화를 본 한 관객의 대답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이 영화를 직접 만든 입장에서의 대답으로는 불충분(불성실)하다. 아니 단지 이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의 영향도 있지만, 이지수 캐릭터는 평면적으로, 지나칠정도로 착하게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여성 캐릭터가 감독의 입장에서는 보고 싶었는지 몰라도, 이야기의 측면에서라면 매력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평면적으로 그려진다면 말이다. 

물론 이 이지수라는 사람이 원래 천성 자체가 착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천사 같은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 캐릭터를 어느정도 그렇게 '보이도록' 설명하는 장면들이 있어야 한다. 설명 없이 시작하는 초반부부터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 이지수 캐릭터는 답답하게 정해진 동선으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틀 속에서 끝내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화는 마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이라면 이지수가 굳이 장례지도사로 나와야 했던 이유 또한 잘 알지 못하겠다. 삶과 죽음과의 대비, 타인을 고이 떠나보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백종우가 이지수에게 느껴야하는 감정들...아마도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라면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 훨씬 맛깔스럽게 잘 풀어냈다. 주인공 캐릭터를 아주 잘 성장시키면서 말이다. 성장하고 변화하지 않는 캐릭터가 그려내는 이지수의 장례지도사라는 설정은 단지 어떤 생계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예를 들어 중간에 이지수가 노인들에게 얻어맞는 장면 같은 것들. 이 장면에서도 생계를 꾸려나가려는 억척스러움만 느껴질뿐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은 말한다.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내 영화에선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 된다. (중략)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니까. 안락사나 존엄사에 관한 문제를 애초엔 좀더 하려고 했다. 시나리오에도 있고 찍기도 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방해되는 느낌이 있었다. 편집과정에서 들어낸 것이다. -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몇몇 이야기들이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두 캐릭터를 조금 더 구체화시키는 좋은 계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두 캐릭터의 사랑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두 캐릭터의 조금 더 명확한 형상화가 필요했다. 왠지 박진표 감독은 오로지 '사랑'만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웃긴 말이지만,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두 캐릭터가 '사랑'을 하는거지. 사랑하는 과정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왜 서로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이겨내고, 혹은 무엇을 극복하고 이들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 주구장창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관객들이 그 사랑에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이렇게 곁가지를 쳐내는 와중에서 잘려 나갔을 몇몇 이야기들이 그래서 아쉽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았을 때 중반 이후로는 오로지 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 김명민이 몸으로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 그렇다. 6인 병실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이지수의 아버지(강신일)와 관련된 이야기들에 조금 더 살이 붙었으면, 김명민의 점점 쇠약해져가는 몸만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몇몇 빛나는 장면들도 있지만, 덕분에 조연들 캐릭터도 조금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병문안 온 친구들에게 침을 뱉는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즉 돌변한다고 느껴지는) 착해지는 젊은 여자 환자(가인)도 그렇거니와, 왠지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담아 놓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저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한, 장애가 있는 다리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지수의 아버지('지뢰마을'을 언급하는 감독의 인터뷰로 볼 때 아마도 이 다리는 지뢰사고로 인해서일 것이다. 이 부분이 잘 설명되었으면 초반부 마을에 들어가는 장면에 나왔던 시위대의 풍경이나, 법 공부에 집착하는 백종우의 모습이 조금은 더 잘 이해되었을 것이다) 같은 캐릭터들은 그저 고정된 주변의 풍경에 머물고 만다.

아무튼 중반 이후로는 영화가 전체적으로 힘이 떨어진 와중에 김명민의 몸과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만이 영화를 지탱해 나간다. 여러 매체들에서 언급되었지만, 김명민의 몸은 형상 그 자체로서 연기를 하고 있고, 그랬기 때문에 몇몇 가능한 감정들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김명민이 알몸으로 수술대에 눕혀지고 나서 이어지는 "불편한 데 없으시죠?"와 같은 대사들. 그 짧은 장면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김명민이 만든 '몸으로서의 형상화'의 힘이다. 그 밖에도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짧은 순간에 깨어난 아내의 모습을 놓치고, 망연자실하게 복도 구석에 쭈그려앉은 남자(임하룡)의 모습이라든가 백종우의 뺨에 붙은 모기씬 같은 것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에서 다시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로 돌아오는 이 장면은,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보는 사람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 결국 영화가 할 일이라는 것과 그 만큼의 무게로 반대쪽에서 다시 저울을 가라앉히는 절망감의 무거움. 그 환상과 잔인함의 대비- 그것을 제공하는 영화라는 것의 이 아름다운 잔인성.

..............................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는 몇몇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중 가장 큰 질문은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 걸까'다. 삶과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루게릭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초점이 아니라, 그 속에서의 남녀 주인공이 벌이는 사랑, 그나마도 설명도 제대로 안해주는 사랑이 그 초점이라면 이 영화의 주무대가 굳이 병실일 이유가 있을까. 단지 어쩌면 그 무대가 병실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 곳에서의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에...가 아니었을까. 다큐멘터리 <사랑>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울렸던 이야기가 병실에서의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더불어, 영화의 어떤 윤리성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미치게 한다. 예를 들어 루게릭 환자는 이 영화를 좋아할까, 우리가 우는 사이에 그들도 울었을까, 우리의 울음들의 어떤 부분은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들.

아니 바보 같은 질문들은 하지 말자. 박진표 감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으므로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에 몇 번 '헌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헌신적이라면, 그 반대편에서는 이기적인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왠지 이 영화에서의 백종우의 모습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에서의 황정민 캐릭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정민 캐릭터를 박진표 식대로 해석한 것이 이 백종우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예전에 <행복>에 대해 별로 안 좋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행복>이 땡긴다. 그 영화가 왠지 상당히 괜찮았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 2009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주, 박찬옥  (0) 2009.11.16
호우시절, 허진호  (2) 2009.10.14
이태원 살인사건, 홍기선  (0) 2009.09.12
황금시대, 10명의 감독과 10개의 이야기  (0) 2009.09.09
로프트(loft), 구로사와 기요시  (0) 200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