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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AVATAR), 제임스 카메론

Ending Credit | 2010. 1. 1. 18:03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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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 2009년 1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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