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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Ending Credit | 2010. 10. 20. 20:09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
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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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 2010년 10월,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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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홍상수

Ending Credit | 2010. 9. 29. 16:39 | Posted by 맥거핀.


이 짧은 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옥희(정유미)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목소리를 덧붙인다. 나이든 남자를 보고서는 자기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그리고 젊은 남자를 보고는 언젠가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을 알았다고. 옥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어떤 무엇이 그녀에게 그것을 예감하게 했을까. 글쎄. 아마도 어떤 것을 가져다 붙인다해도 그것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옥희 자신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저 예감하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과 비슷한 하나의 형태를 우리는 때로 '우연'이라고도 부른다. 홍상수의 새 영화 <옥희의 영화>는 알려진대로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서 탄생되었다. 우연치 않게 폭설이 내린 사실은 영화의 한 이야기 '폭설후'가 되어 그대로 되살아났고, 이 영화의 세 주연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도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캐스팅되었다. 물론 사실 모든 영화들은 우연의 힘이 어느 정도는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연한 어떤 일로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홍상수의 이 영화는 그런 우연성의 힘이 어느 영화보다 크게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문성근의 경우에도 당일의 전화로 급하게 캐스팅이 되었다. 만약 문성근이 그날 어떤 다른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는 또 다른 결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주요 이야기를 당일에 작성하기로 유명하다. 우연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도가 튼 감독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그 한계에 가깝게 가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계. 우연이라는 것은 때로 그 한계를 절감케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연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애써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 그것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우연'이다. 영화 속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두번째 이야기 '키스 왕'에서 영화과 학생 진구(이선균)는 벤치에 놓인 우유곽을 보며, 치기가 살짝 섞인 생각을 한다.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하필이면 그것이 하필이면 그 시간에 하필이면 거기에 놓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이 거기에 그 시간에 놓인 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확실한 것 사이의 어떤 갭(gap). 그것에는 이유가 있으나, 우리는 그 이유를 어쨌든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한계를 절감하는 것.

이 영화를 본 며칠 후에 우연히 박성원의 단편소설 <하루>를 읽었다. 여러 사람들의 하루. 그들의 하루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여러 가지 일을 빚어낸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무엇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성원은 말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모두 알 수 없고, 세상은 여전히 그 나름의 메커니즘으로 삐그덕거리며 굴러간다. 이 진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말의 의미.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홍상수는 지금껏 여러 영화에서 말해왔다. 그런데 홍상수는 그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영화임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말한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절감은 홍상수의 말대로 여러 해석을 할 수가 있겠지만, 비슷하지만 결국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를 절감(節減)시킨다는 말로 들린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라는 특정한 영화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영화는 '옥희의 영화'의 속성을 공유한다. 모든 영화는 결국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홍상수가 결국 영화의 어떤 한계를 넌지시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우연이 빚어내는 한계와 영화가 자아내는 한계가 중첩하는 지점-. 그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하다. 더구나 그것을 이렇게 몇 마디의 글로 밝혀내는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글은 언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리고 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려는 몇몇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편 흥미로워 보였던 것은 이 영화를 다룬 몇몇 글들에서 이 영화를 어떤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공들인 리뷰 중의 하나인 <씨네 21>의 정한석의 글에는 재미있는 형태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고, 김혜리도 뭔가 그림을 삽입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스토리.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후', '옥희의 영화'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주문을 외울 날'을 '키스 왕'과 '폭설후'의 나중의 이야기로 보고, '옥희의 영화'를 극중 극의 형태로도 볼 수 있겠으나(이건 한편으로 '주문을 외울 날'이라는 흥미로운 제목과도 연관된다. '외운 날'이 아니라 '외울 날'이라는 미래형을 굳이 왜 썼을까), 그것에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점들이 존재한다. 아니 굳이 그것을 설명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폭설후'의 경우 그렇다면 이 내용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로지 영화가 스토리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거부하는 정성일의 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가지의 겹침. 우연의 한계. 영화의 한계. 그리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 그 한계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쓸쓸함은 영화의 겨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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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내포한 어떤 한계는 그러나 절망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후 몇몇 재미있는 글들을 읽었다. 개중에는 그런 글도 있었다. 이 영화는 급하게 찍은 티가 나며,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고. 글쎄, 그럴까. 우연히 우리 손에 카메라가 들린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우연은 우연 그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우연에는 직관이라는 것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이 <옥희의 영화>는 전적으로 우연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그저 우연 근처에 가깝게 가 있을 뿐이다. 그것에는 우연 외에 홍상수의 직관(直觀)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배우와 비슷한 스탭과 비슷한 시간으로 이런 내용을 찍는다 해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고, 불러일으키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그 누군가의 직관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을 아까는 '우연'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직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 직관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설명 없이 찾아오는 것이며,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홍상수는 그것을 영화 속 옥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옥희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며, 젊은 남자와는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그것은 그저 아는 것이다. 설명할 이유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옥희의 직관이다.

그리고 그런 옥희의 직관은 관객의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영화의 스토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떤 심상(心象)을 획득한다. 그 심상은 무엇으로 획득되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직관으로 부르고 싶다. 우리는 그 직관의 힘으로 우연에 맞선다. 아니 맞선다기 보다는 그 우연을 보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우연을 보충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한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도중 '우연히' 그런 말을 들었다. 행복(happiness)이라는 말의 어원은 Hap, 즉 '우연(행운)'이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찾아온 행복이 모두에게 반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이라는 행복은 물론 그것을 알아본 자에게만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알아보는 힘, 그것이 직관이다.


- 2010년 9월,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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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Ending Credit | 2010. 9. 18. 02:05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를 보았다. 김현석 감독은 야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늘 야구는 일종의 가림막에 불과했고,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의 어떤 사랑이야기, 혹은 일종의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 입은 남자들의 성장기'라고 부르고 싶다(물론 거의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성장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김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의 선비 호창(송강호)은 유일한 꿈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러던 그가, 야구를 만나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을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의 중심축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 <스카우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혹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켰던'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그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잊어버렸던, 혹은 애써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호창이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지만, 호창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대신 얻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영화 <시라노>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역할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이 맡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상처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의 '시라노'는 추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이 영화의 병훈은 그보다는 어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 여자 희중(이민정)을 놓쳐 버렸다. 그런 그에게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그 여자 희중과의 연애를 이루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병훈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그 여자 희중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짐짓 묻는 척을 한다. 글쎄.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대신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라노>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심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진심이라는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을 극의 후반 상용의 말들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고, 사랑하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시라노 에이전시'의 활동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영화의 제목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지만, 이들의 연애조작 사업은 사실 번번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연애조작은 결국 실패가 되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이름모를 커플의 연애조작 역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상용은 그들의 연애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박작가(박철민)가 그토록 싫어하던 애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한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다. 즉 이 영화에 의하면, 이들의 연애조작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진심이라는 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조금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병훈의 축이다. 젊은 병훈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고, 자신의 진심을 대면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나이든 병훈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마음이라는 녀석을, 혹은 진심이라는 녀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나 때로 그 마음은, 그 진심은 아마 무척이나 두루뭉술할 것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하나, 그것을 다른 형태로 애써 바꾸려 들지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 볼 것.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극 중의 병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지막 연애조작이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결국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혹은 그것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연애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연애조작들과는 달리, 이 연애조작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의 곁가지가 조금은 많아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타임이 필요이상으로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이 몇몇 장면들은 마지막까지 잘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기도 하다. 송새벽, 권해효, 박철민 등의 명품조연들이 벌이는 장면들은 거의 모두 잘라내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특히 권해효의 '후자'씬은 흐름상 거의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살려낼만 하다), 조금은 산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으며, 매끄럽고 무리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감독의 능력이었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생뚱맞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내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현석 감독은 꾸준히 안타를 생산해내는 타자다. 단, 장타력이 떨어지고, 개중에는 빚맞은 안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2루타가 될지도 모르겠다.




- 2010년 9월, CGV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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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Break Away), 이송희일

Ending Credit | 2010. 9. 8. 00:14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는 뚜렷한 몇 가지의 단점들이 있다. 이야기의 리듬이 일정치 않은 것도 그렇고, 주인공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서정적인 장면들이 빈번하고, 약간은 느닷없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도, 좋게 보면 이송희일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조금은 잉여의 장면들로 보인다. 인물들을 뒤에서 잡는 빈번한 시점숏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장점들도 있지만, 조금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글쎄.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몇 개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건드린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정말 어떤 영화들은 아주 촌스러운 화면들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뚜렷한 단점들이 엿보이지만, 기어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글쎄. 내가 군대에 대해 감사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어떤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 때문일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조직의 어떤 문제일까. 글쎄.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가끔 군대를 둘러싼 어이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광경을 본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 주장들을 펼치는 상당수의 남자들을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싹튼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철저하게 타의에 의해 군대라는 아주 어이없는, 비정상적인 조직을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들의 정신이 군대에 의해 망가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강제로 행해지는 아주 비이성적인, 잔인한 경험들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군대를 어떤 편법을 이용하여 가지 않는 연예인들에게 쏟아지는 지나치다 싶은 잔인한 비난들조차 때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이면에는 권력이나 금력의 문제, 이 사회의 계층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만만하고 간편하게 비난을 할 수 있는 계층이 연예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탈영을 감행한 세 청년도 그러하다. 이병 동민과 일병 재훈(이영훈), 그리고 상병 민재(진이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일면에도 아마 그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동민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재훈과 민재는 모두 가난한 청년들이다. 재훈은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가 군대에 왔고, 민재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기름밥을 먹다가 군대에 왔다. 그들의 탈영에는 각자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지만, 그들이 탈영한 이후 보여주는 분노들은 그 사연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일면에는 그러한 가난한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송희일 감독은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해 보고 싶은 것 같다. 다시 한 번 제목을 생각해보자. '탈영'이 아닌 '탈주', 그리고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박혀 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아'. 그들이 말하는 여기란 단지 군대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동민은 탈영하여 산 속을 맴돌면서 어차피 여기를 나가도 자신에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가정에 있는 아버지와 군대라는 곳에 있는 다른 아버지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최대한의 땅끝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너른 바다를 만나고, 힘없이 되뇌인다. 한국이 좁긴 좁네.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한민국은 거대한 병영 사회에 불과하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지옥이 되는 작은 병영 사회. 어디로 나갈 수 없이 3면이 바다로 막혀진, 숨막히고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거대한 감옥. 가난한 젊음들에게 출구란 있을까.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 세 청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을 돕는 소영(소유진)의 도움 없이는 아주 좁은 공간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돕는 소영 역시 비정규직인 가난한 또다른 청년에 불과할 뿐이다. 그 연대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는 아주 불안한 연대이다. 소영의 또다른 (비정규직)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군대와 경찰은 그들에게 소리친다. 영창 좀 갔다오면 끝날 일을 크게 만들지마,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마지막 기회를 줄께. 그러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없는 것은 소리치는 군대도, 그 소리를 듣는 그들도, 관객들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던 처음부터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강력하다는 것. 그들이 죽어도 며칠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강력함은 어쩌면 그들 목에서 빛나는 군번줄이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작 부분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들이 도망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그 군번줄을 계속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이 국가에 길들여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 어떤 희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재훈은 도망치다 어느 한 순간 군번줄을 던져 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이 재훈이 이곳에 대한 희망을 버린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잔혹하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잔혹한 결말이 상징한다. 최근에 이보다 더한 잔혹한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잔혹하게 피를 뿌려대는 것이 잔혹한 것만은 아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아마도 작심하고 이러한 결말을 만든 것 같다. 감독은 그만큼 이 사회에 대해 뿌리깊은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잔혹한 결말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텅빈 극장 안에서 엔딩크레딧을 지키며 앉아있을 수 있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 어디로도 탈주할 수 없기 때문에.



- 2010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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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I에서 본 두 편의 독립영화

Interlude | 2010. 8. 25. 01:56 | Posted by 맥거핀.
더운 여름날, 지나치게 서늘한 극장에서 두 편의 더 서늘해지는 영화를 보았다.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CINDI FILM FESTIVAL)에서 본 두 편의 한국 독립영화. 박수민 감독의 <간증>과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이 두 편의 영화는 몇 개의 우연이 겹쳐서 선택되었지만, 왠지 이 두 개의 영화는 조금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단락들이다. 2009년에 만들어진 <애니멀 타운>과 2010년에 만들어진 <간증>. 글쎄. 아마도 이 영화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이 영화들이 최근의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일군의 무리들이 만들어낸 실용적이고 날카로운, 그래서 잔혹한 세계, 그 이면의 바탕에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또다른 단면들을 펼쳐보인 것으로 말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그 다른 한가지는 이 영화들은 우리 인간 사회의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왠지 그 인간 사회를 자꾸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민 감독의 영화 <간증>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조금씩 그 이상(以上)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으로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하거나, 인간 이상의 어떠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전규환 감독의 영화 <애니멀 타운>은 그 제목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규환 감독이 보는 우리 사회는 인간 이하의 '애니멀 타운'이다. 즉, 이 두편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평행한 시선으로서 보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방법은 인간을 보는 방법에서는 유효할까.


먼저 박수민 감독의 <간증>. 이 영화는 몇 개의 것들이 내용상으로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충돌. 참회하며 계속 고문하는 자와 참회하지 않으면서도 고문을 멈춘 자의 충돌. 과거의 고문 경찰 박덕준은 예전의 기억에 괴로워하지만, 여전히 청부 고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상관 임광한은 교회의 장로가 되어 간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가져다 주는 어떤 기이한 역설. 그리고 두 번째 충돌. 믿음이 부족한 자와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의 충돌.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믿음이 부족한 자는 그 살인자를 고문하며,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밝히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충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두 개의 상이한 시각 끼리의 충돌이다. 즉 '믿어야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봐야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사이의 충돌. 우리는 그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 손을 들고 답할 것인가. (물론 손을 들지 않고, 답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Confession'이다. confession? '고백' 또는 '자백'.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고해성사'. 이 영어 단어가 '간증'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지 궁금해서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간증은 'testimony'이다. 감독의 이 혼용은 아마도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confession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는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고문하는 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러나 이 고백들은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간증' 역시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해'와 '간증'의 진실함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을 가려낼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가려내려고 애쓰는 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여전히 일단 가려내는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고문이건, 혹은 종교적인 형태이건,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고백이, 혹은 간증이 그것을 행한 그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간증 그 자체, 고백을 행하였다는 그 자체만이 고백을 끌어내려는 자에게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 <간증>은 몇 가지 단점도 엿보인다. 박덕준의 상관 임광한은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지나친 도식화로 캐릭터는 조금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저 국가라는 절대자를 신이라는 절대자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거기에는 조금 더 다른 함의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임광한과 박덕준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붙인듯한 느낌도 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도식화와 상징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힘을 떨어뜨리고 있다. 감독은 도리어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대치하고 만다. 이 영화는 묵직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형상화를 해내야 하는지 명확한 중심이 서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은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마지막에 이 영화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촬영되었다는 엔딩 크레딧의 내용을 보며, 살짝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약간은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글쎄. 내가 철저하게 공무원 정신에 입각한 공무원의 입장이라면 이 영화에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곳 서울이 그저 하나의 '애니멀 타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결국 그저 '동물들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그 자조감.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는 동물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한가지 단적인 예로, 동물 중에 소아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동물이 있던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의 육체가 자주 전시된다. 아니 육체라고 말하기 보다는 거대한 고기덩어리에 가깝다. 그 고기덩어리는 땀을 흘리고, 밥을 먹고, 다른 고기 덩어리를 때리고, 교미한다. 그 육체를 불편할 정도로 스크린에 들이대는 것, 그것은 분명히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아성애자의 육체가 유독 자주 전시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의 영화적인 복수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범죄자를 보는 어떤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죄자는 영화 내내 상당히 측은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여,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도와주고 싶을 정도이다. 그는 그저 우리 사회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불쌍한 보통 사람이며, 이 절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와 보통 사람을 가르는 구분은 오로지 그의 발에 감겨진 전자 발찌밖에 없다. 그 전자 발찌를 제외하고는 그저 그는 우리의 측은한 보통 이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상업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최근 <악마를 보았다>를 필두로 몇몇 영화들은 범죄자들을 거의 악마 혹은 괴물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그저 악마 그 자체로만 보인다. 즉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나는 이 영화 <애니멀 타운>이 다른 영화와 달리 범죄자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그 가련해보이는 인간이 더 무섭다. 괴물은 그 다름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잡아내면 되지만, 그 '인간'들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그가 소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곳에 갔는지, 진짜 오줌이 마려워 그 곳에 갔는지 알 수 없다. 뛰어 다니는 멧돼지는 피하면 되지만, 안 뛰어 다니는 인간들은 진짜 피할 수 없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우리 자신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몇몇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곳은 '애니멀 타운'일까. 하지만, 적어도 '애니멀'들은 무리를 보호하는 데에는 필사적이다.

이 영화에는 뚜렷한 리듬감이 존재한다. 감독은 영화의 중반까지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영화 속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자리에 앉아있기가 심하게 불편할 정도다. 그러다가 일순간 휘몰아치며, 관객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든다. 글쎄. 이를 좋은 리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업 영화라는 관점에서는 이를 조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도 숨을 쉴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 스트레이트함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리듬,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생각들이 필요할 것 같다.



덧. <간증>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돌아온 여배우 '이화시'씨가 등장한다. 



- 2010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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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The Book | 2010. 8. 11. 02:27 | Posted by 맥거핀.
세속적영화세속적비평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영화 > 영화이야기
지은이 허문영 (강,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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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

<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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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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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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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글방] 좌파의 종교성

생각거리 | 2010. 8. 9. 01:50 | Posted by 맥거핀.
원문: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8145

"박노자"님의 글입니다.


100년 전의 유럽이나 미국 같았으면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을 때에 가장 자주 써먹곤 했던 수법은 그들이 "무신론자"이었다는 점을 강조해 "신의 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죠. 대다수가 아직도 교회를 충실히 따랐던 당대의 구미 사회 같으면 이와 같은 비판은 - 특히 종족/종교 집단 별로 이민자들이 조직되곤 했던 미주에서는 - 먹혀들어갈 수도 있었죠. 1914년에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이 시작됐을 때에 집총을 거부한 극소수의 열사들 중에서는 전통적 평화 교회 (안식교, 퀘이커교 등) 교인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같이 대오를 형성했을 때에 이와 같은 비판의 맹점은 사실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성서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신"을 믿었던 말던 일단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국가의 명령대로 사람 죽이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들처럼. 그러기에 1920년대부터 미국의 진보적 카톨릭이나 개신교도의 일부가 상당부분 사회당 운동과 겹치는 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1933년부터 Catholic Worker Movement 같은 사회주의적 색깔의 종교 운동 단체들도 생겼어요. 한국 같으면, 이와 같은 세계적 추세는 아주, 아주 뒤늦게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반적" 교회나 사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들을 마치 종교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있는데, 이게 아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종교성의 기저 중의 하나는 절대자와 개체의 "직접 소통"에요. 세속적인 사고 방식의 입장에서는 세속적 의미의 전체, 즉 소위 "국가"나 "사회", "회사" 등이 개인에게 원칙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교사해도 이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해요. 국가가 "적군을 살해하라"하면 전장에서 그렇게 해서 나중에 훈장이나 받아 가슴에 달아야 되고,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어록 공부", "사가 제창", "집단 극기 훈련", 그리고 동료를 짓밟으면서 무한한 "충성 경쟁"하는 것을 명령해도 이것도 "사회적 도리"라고 해여 그대로 해야 하는 것에요. 역시 가족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정조를 지키면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걸 바라고 부인이 남편에게 "크게 출세"하여 "돈 벼락" 맞을 것을 바라는 것도 세속의 당연지사에요. 그런데 진정 하나님을 면전에서 보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국가, 사회, 회사, 가정 등등은 마몬의 미혹 내지 악마파순의 시달림에 불과해요. 국가로부터 총살 당하면 당하지 국가의 지시대로 남을 죽이지 못하는 것도 종교인이고, 무푼쟁이로 살면 살지 "회장님의 어록"을 봉독하고 "성공한 도둑"의 명을 체질상 따를 수 없는 것도 종교인이고, 혼자 살면 혼자 살지 가족의 집단 이기주의 분위기에서 "출세"와 "영재 교육"에 올인할 수 없는 것도 종교인에요. 신을 볼 줄 알고 "나" 안에 내재돼 있는 불성을 감지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국가, 회사, 가정 따위의 사회적 창작물들은 방해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죠. 사유는 약간 다르지만, 사회주의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죠. 계급사회의 파생물로서의 국가, 기업, 가정의 생리를 체계적으로 알기에,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바칠 일은 없어요. 서로 사유는 조금 달라도 결론은 같아요.
 
그리고 사유는 정말 그렇게까지 다른가요? 종교인은 마몬 숭배나 만연한 "지상의 도시"가 파산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거나, 예토가 정화돼 탐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정토가 지상에서 건설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사회주의자는 물화된 노동으로서의 자본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지배와 복종, 탐욕과 타율적 규율, 경쟁과 적대심이 사라질 신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에요. 설명의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결국 양쪽에서 간트가 이야기한 "reich der zwecke" ("목적의 왕국" http://www.textlog.de/33192.html)가 실천되기를 원할 뿐이죠. 마르크스의 뛰어난 설명대로, 사람이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는, 그러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종교인도 사회주의자도 공히 염원해요. 지금 사회에서는 사람이란 도구일 뿐에요. 자본 축적의 도구, 국가적 살인의 도구, 인구 재생산의 도구 등일 뿐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에 불과하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대다수의 자칭 "신도"들이 이 지옥을 마치 "정상적 사회"로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의 수가 이 땅에서 아주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노동자들이 착취자들에 대한 충성을 거의 자발적으로 키우다 싶이 하고, 아이들이 서울대 가겠다고 앞을 다투어 스스로 공부의 지옥에 뛰어들어 서로 밟으려 하고, 다수의 학자들이 비판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순량한 "등재지 게재 논문" 생산자가 된 대한민국이라는 이 세계의 모범적 지옥을 임하면서도 "목적의 왕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보로만 보일 걸요. 그러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대로 Credo quia absurdum, 불가능하니까 믿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살아보려는 욕망으로 믿는 것에요. 신의 섭리는 불가해하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이 사회가 수많은 치명적 위기를 통과할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오늘날 그 구조의 도착성과 부조리함이 다 노출될 것이고, 그 시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이상을 결국 대중적으로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믿어요. 다수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두들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말을, 언제 누가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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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강우석

Ending Credit | 2010. 8. 4. 01:18 | Posted by 맥거핀.


(이 리뷰는 영화의 중요 내용과 원작 웹툰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끼>는 재미있는 스릴러다. 그러나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몇몇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렇다. 먼저 몇 가지 사소한 장면들. 전석만(김상호)은 왜 갑자기 유해국(박해일)을 습격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날 유해국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성규(김준배)는 죽어가면서 왜 그렇게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에 집착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해국은 왜 맨 처음에 이영지(유선)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박해일 정도의 캐릭터라면, 이영지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그 사실부터 충분히 의심해보아야만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소한 장면들보다는 조금은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캐릭터의 어떤 일관성이나, 그로 야기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이 유해국이라는 캐릭터. 그의 전사(前事)는 영화 속에 매우 짤막하게 처리되며, 그와 박민욱 검사(유준상)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뉘앙스로만 짐작할 뿐인데, 이것만을 놓고보면, 사실 이야기의 중심 흐름은 약간은 의아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유해국은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그렇게까지 돕는가.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이끼>는 이야기의 힘이 캐릭터를 끌고간다기 보다는, 캐릭터의 힘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구조이기 떄문에 캐릭터의 어떤 비일관성, 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흐름을 심하게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해국의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다.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거의 유목형의 '실패의 기록'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형은 결국 아무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사실 그다지 강해보이는 캐릭터는 아니다. 극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유목형에게 감화되지만, 그 감화의 이유마저도 사실 모호하다. 그리고 유목형은 결국 천용덕 이장(정재영),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유해진)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약한 선인(善人)'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실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용덕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천용덕 이장에게 그는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 영지에게 유목형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낼(혹은 현혹될) 가치가 있었을까.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그것에 대한 어떤 불충분한 해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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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기어코 원작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들을 어렴풋하게 알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이 좋은 원작에 무리한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원작에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화에서 원작에 대한 메스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뒤에 나온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는 뒤에 나온 이야기는 어떤 새로운 창작을 거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내부의 것만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작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모호한 원형같은 것만이 이 영화에는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는 원형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영화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원작과 이 영화를 그저 단순하게 두 개의 이야기로만 놓고 비교해보아도, 원작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여지는 충분히 많다. 

먼저 사소한 것들은 패스. 앞에서 제시한 사소한 의문들은 사실 원작을 보면, 거의 해소가 된다. 그래서 나머지 굵직한 것 몇 가지. 먼저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앞의 이야기들을 대폭 들어내 버린 것. 이것이 야기한 문제는, 뒤의 문제들과도 연관되지만, 이 두 캐릭터의 행동에 어떤 단순함만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는, 이 앞의 이야기가 계속 뒤의 이야기, 즉 유해국이 아버지 죽음의 미스테리를 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어떤 힘의 원천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원작에 존재하는 이 앞의 이야기와 유해국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유해국의 계속된 행동에 어떤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며, 동시에 박민욱 검사의 캐릭터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원작 웹툰의 주된 메시지에 강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즉, 마을 사람들과 유해국은 종내에는 매우 비슷해진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유목형을 강하게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의 관계는 느슨하게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를 다시 연상시키며, 따라서 박민욱 검사가 유해국과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두 사람의 전사를 아예 들어내버렸기 때문에, 유해국은 마을에 들어와 쓸데없이 의심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이자 좌충우돌 돌진하는 활기찬 인물이 되어 버렸고, 박민욱 검사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박민욱 검사의 몇몇 씬들에서 감독의 전작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란 유목형이 원작과 달리 유약하지만, 너무 착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원작과의 차이. 원작과 영화와 가장 달라지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유목형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유목형은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해지고, 선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영화의 몇몇 설명되지 않은 점들이 이해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유목형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도 하필이면 왜 그 구절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유목형의 감화력. 웹툰에서 유목형의 감화력은 어떤 두려움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대상이 두려움을 주면, 그 대상을 분석하여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도리어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이른바 <미스트>의 세계. 그리고 유목형의 칼질. 영화에서는 이것은 약간은 느닷없어 보이고, 도리어 유약한 자의 어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웹툰에서는  이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 유목형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용덕 이장과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 때에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사실 명확해진다. 강우석 감독의 행위는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것이다. 즉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여, 관객들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명확하게 가려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의 스릴러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 아무래도 강력한 악이 있을 때에 스릴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히 강우석 감독의 오판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원작의 눅진한 공기에서 오는 어떤 끈끈한 긴장감과 불길한 메시지에서 오는 묵직한 뒷맛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원작의 가장 큰 긴장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것은 유해국을 다시 뒤집어 보았을 때에 생긴다. 유해국은 유목형의 모든 행위들을 다시 비슷하게 반복하였으며, 결국 천용덕 이장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쾌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어떤 불길한 뒷이야기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연상시킨다. 니콜라이가 세미온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그 묵직하고도 불길한 끝맺음. 그러나 강우석은 유해국에게 상큼한 승리를 전달해주고는 느닷없이 이영지에게 그 마지막 자리를 맡긴다. 이 이탈이 가져다주는 어리둥절함.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끼>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원작 웹툰에서는 그 제목 '이끼'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끼는 음지에서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바위를 침식해들어가며, 종내에는 그 바위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끼는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잘 씻겨내지지 않는다. 다 씻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그 바위를 조금씩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끼낀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를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아니, 이끼가 하나도 끼지 않은 바위가 있을까. 이끼는 항상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끼는 누구도, 심지어 바위 그 자신마저도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여, 어느 틈에 그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에서는 박민욱 검사의 말을 통해 그 의미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소된다.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살라고, 하찮게. 그러나 이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끼는 어느 바위에나 존재하며, 결국 바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끼가 완전히 달라붙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끼의 확산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작 웹툰의 여러 팬들이 지적한 바대로,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강우석 감독이 맡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원작의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있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지적대로(무리한 바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이 메스를 들이댔으면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는 원작의 공기를 간직하면서도, 그 내면에 더욱 묵직하고도 눅진한 이야기들을 담아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실패한 수술. 수술실에 들어간 복잡한 인간 머피는 단순하고 명쾌한 로보캅이 되어 돌아왔다.



- 2010년 8월, 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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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PiFan.

Interlude | 2010. 7. 27. 01:32 | Posted by 맥거핀.




지난 주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 늘상 그렇듯이, 기대하고 본 영화는 기대감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별 기대감 없이 본 영화는 꽤나 의외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본 영화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 묘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마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기는 한데, 모두들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술 퍼마시고, 여자를 때리거나, 도박에 미쳐 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신주에 도끼질을 해댄다. 사실 여자들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람만 피우는 남편을 응징하는 마사코도 그렇고,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여러 남자들을 계속 만나오는 토모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져 보인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 나오코뿐.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지고 보면) 제일 이상했던 것은 여왕도, 토끼도, 쌍둥이도 아닌, 앨리스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감독은 다시 숨겨진 이야기를 슬며시 드러내보이며, 영화에 또다른 색채를 덧씌운다. 묘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단점이라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은 모호하다는 것. (부천시청)


두 번째 본 영화는 도미닉 제임스 감독의 <다이>. 글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힘들다. 정신과 병동에서 깨어난 6명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범인에 맞서서 생사를 건 게임을 해야한다는 설정인데,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참신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매끄럽거나.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채 낯선 곳에 갇히는 사람들이 어떤 범인 또는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은 이미 <쏘우>, <큐브> 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인 데다가, 그것에 참신함을 부여해야 할 범인 캐릭터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하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왜 그렇게 구멍이 많은지.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각 사람들에게 죽이는 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계속 헛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런 방식의 지겨운 설명으로 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게임 규칙의 치밀함이나 죽음의 스릴 강도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해도(그래서 어쩌면 <쏘우>가 단지 그 죽음의 스케일만을 키우는 속편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세우는 메시지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인 '죽음을 어떤 우연에 맡긴다'는 것. 글쎄. 완벽한 우연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한가지로, 왜 주사위는 꼭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쓰인 것만을 사용해야 하지? 2부터 7이 쓰이면 안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12면체 주사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주사위를 '선택'했다는 그 아주 작은 한 가지의 사실도 '우연'이라는 것의 존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연'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감독으로서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쏘우>처럼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던가, 끝까지 그 '우연'에 대해 항변하는 건 뭥미?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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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Ending Credit | 2010. 7. 15. 02:23 | Posted by 맥거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부터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이 떠나간 사람들과 이별하여야 하며, 남은 자들이 되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떠나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음일 것이지만, 죽음만이 떠나감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의 부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영화란 '모든 남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위치의 일부분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어떤 특유의 세계관이 한 몫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왠지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 유미코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남편이 거의 자살과 같은 죽음으로 떠나간 이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에는 한편으로는 단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막연한 답답함도 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즉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는 듯 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함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관련되어 있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막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어디론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 유미코는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 내가 그 때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새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된 그 후의 어느날, 그가 죽던 날처럼 어디선가 자전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해녀 할머니는 궂은 날씨에도 물질을 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할머니는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할머니도 남편과 어린 시절의 할머니처럼, 자신이 막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그 할머니, 불사신이라니까. 이 장면에는 묘한 감흥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책감을 느끼거나, 그것 때문에 남은 삶을 괴로워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거의 별개의 문제와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유미코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았어도, 할머니는 기어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남편도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유미코가 아무리 어떤 저주를 내렸어도,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기적이나, 미신이나, 노력의 부족이나, 불사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이 그런 것이다. 삶은 그런 불가해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아픈 기억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떼어내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유미코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자전거 열쇠에서 방울만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 방울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방울을 떼어내어도 그 자전거 열쇠에서는 방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숭고하다.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는 모두들 어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들을 품어 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의 후속작 <원더풀 라이프>에서와 같이,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만이 남으면 남은 삶은 과연 행복할까. 혹여 행복할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숭고한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 장터의 할머니는 유미코에게 넌지시 말한다. 남은 아들은 아주 어릴 때에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애초의 부재(不在)는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즉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유미코가 남편의 기억을 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새 남편이 내놓은 답이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가 괴로워하자, 남편은 유미코에게 말한다. 환상의 빛이 있다고. 죽은 사람들은 가끔 그 환상의 빛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간다고 말이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내고, 그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유미코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의 빛은 아마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떠나간 사람들을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 보내는 하나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제의들은 떠나간(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든 우리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

고레에다 감독은 이 담담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감독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마음 속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나 이 화면 구성들은 단지 어떤 스크린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빛이 쏟아지는 외부와 어두운 실내를 분리하고, 창이나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어두운 실내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동진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설명한 대로 고레에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이기는 하지만,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갖혀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그대로 표상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주인공은 관객의 마음마저도 괴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이들이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가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빛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또한 한편으로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유미코는 처음에는 계속 어두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옷들만 입고 나오다가, 중간에 새 남편과의 안정을 통해 조금은 옷의 톤이 밝아지다가, 다시 괴로움에 빠진 후, 옷이 검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미친 듯이 따라가는 누군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녀의 옷의 괴기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나중 작품들의 원형과 같은 장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미코의 친정 엄마는 왠지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머니들이란 사실 어찌나 그렇게 무섭고, 강인할 수 있는지. 사위의 죽음을 맞고도, 태연하게 딸의 곁에서 딸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그 태평스럽고도, 무심하게 보이는 말투. 그것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소소한 솔직함과 따뜻함,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왠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숭고함의 다른 형태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미코도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코의 엄마도, 언젠가 그렇게 남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유미코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내면서 그녀는 가슴 속에 아마도 굳은 살들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앞날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환상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상의 빛은, 떠나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환각의 빛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어떻게든 그곳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그 곳에 있는 그 환상의 빛, 유미코가 앉아있던 어두운 방 바깥에 있던 그 환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시사회를 보게 해주신 시사회 주관 출판사와 알라딘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10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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