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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홍상수

Ending Credit | 2010. 9. 29. 16:39 | Posted by 맥거핀.


이 짧은 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옥희(정유미)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목소리를 덧붙인다. 나이든 남자를 보고서는 자기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그리고 젊은 남자를 보고는 언젠가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을 알았다고. 옥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어떤 무엇이 그녀에게 그것을 예감하게 했을까. 글쎄. 아마도 어떤 것을 가져다 붙인다해도 그것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옥희 자신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저 예감하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과 비슷한 하나의 형태를 우리는 때로 '우연'이라고도 부른다. 홍상수의 새 영화 <옥희의 영화>는 알려진대로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서 탄생되었다. 우연치 않게 폭설이 내린 사실은 영화의 한 이야기 '폭설후'가 되어 그대로 되살아났고, 이 영화의 세 주연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도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캐스팅되었다. 물론 사실 모든 영화들은 우연의 힘이 어느 정도는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연한 어떤 일로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홍상수의 이 영화는 그런 우연성의 힘이 어느 영화보다 크게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문성근의 경우에도 당일의 전화로 급하게 캐스팅이 되었다. 만약 문성근이 그날 어떤 다른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는 또 다른 결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주요 이야기를 당일에 작성하기로 유명하다. 우연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도가 튼 감독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그 한계에 가깝게 가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계. 우연이라는 것은 때로 그 한계를 절감케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연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애써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 그것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우연'이다. 영화 속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두번째 이야기 '키스 왕'에서 영화과 학생 진구(이선균)는 벤치에 놓인 우유곽을 보며, 치기가 살짝 섞인 생각을 한다.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하필이면 그것이 하필이면 그 시간에 하필이면 거기에 놓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이 거기에 그 시간에 놓인 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확실한 것 사이의 어떤 갭(gap). 그것에는 이유가 있으나, 우리는 그 이유를 어쨌든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한계를 절감하는 것.

이 영화를 본 며칠 후에 우연히 박성원의 단편소설 <하루>를 읽었다. 여러 사람들의 하루. 그들의 하루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여러 가지 일을 빚어낸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무엇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성원은 말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모두 알 수 없고, 세상은 여전히 그 나름의 메커니즘으로 삐그덕거리며 굴러간다. 이 진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말의 의미.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홍상수는 지금껏 여러 영화에서 말해왔다. 그런데 홍상수는 그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영화임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말한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절감은 홍상수의 말대로 여러 해석을 할 수가 있겠지만, 비슷하지만 결국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를 절감(節減)시킨다는 말로 들린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라는 특정한 영화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영화는 '옥희의 영화'의 속성을 공유한다. 모든 영화는 결국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홍상수가 결국 영화의 어떤 한계를 넌지시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우연이 빚어내는 한계와 영화가 자아내는 한계가 중첩하는 지점-. 그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하다. 더구나 그것을 이렇게 몇 마디의 글로 밝혀내는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글은 언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리고 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려는 몇몇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편 흥미로워 보였던 것은 이 영화를 다룬 몇몇 글들에서 이 영화를 어떤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공들인 리뷰 중의 하나인 <씨네 21>의 정한석의 글에는 재미있는 형태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고, 김혜리도 뭔가 그림을 삽입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스토리.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후', '옥희의 영화'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주문을 외울 날'을 '키스 왕'과 '폭설후'의 나중의 이야기로 보고, '옥희의 영화'를 극중 극의 형태로도 볼 수 있겠으나(이건 한편으로 '주문을 외울 날'이라는 흥미로운 제목과도 연관된다. '외운 날'이 아니라 '외울 날'이라는 미래형을 굳이 왜 썼을까), 그것에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점들이 존재한다. 아니 굳이 그것을 설명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폭설후'의 경우 그렇다면 이 내용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로지 영화가 스토리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거부하는 정성일의 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가지의 겹침. 우연의 한계. 영화의 한계. 그리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 그 한계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쓸쓸함은 영화의 겨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우연이 내포한 어떤 한계는 그러나 절망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후 몇몇 재미있는 글들을 읽었다. 개중에는 그런 글도 있었다. 이 영화는 급하게 찍은 티가 나며,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고. 글쎄, 그럴까. 우연히 우리 손에 카메라가 들린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우연은 우연 그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우연에는 직관이라는 것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이 <옥희의 영화>는 전적으로 우연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그저 우연 근처에 가깝게 가 있을 뿐이다. 그것에는 우연 외에 홍상수의 직관(直觀)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배우와 비슷한 스탭과 비슷한 시간으로 이런 내용을 찍는다 해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고, 불러일으키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그 누군가의 직관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을 아까는 '우연'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직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 직관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설명 없이 찾아오는 것이며,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홍상수는 그것을 영화 속 옥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옥희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며, 젊은 남자와는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그것은 그저 아는 것이다. 설명할 이유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옥희의 직관이다.

그리고 그런 옥희의 직관은 관객의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영화의 스토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떤 심상(心象)을 획득한다. 그 심상은 무엇으로 획득되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직관으로 부르고 싶다. 우리는 그 직관의 힘으로 우연에 맞선다. 아니 맞선다기 보다는 그 우연을 보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우연을 보충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한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도중 '우연히' 그런 말을 들었다. 행복(happiness)이라는 말의 어원은 Hap, 즉 '우연(행운)'이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찾아온 행복이 모두에게 반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이라는 행복은 물론 그것을 알아본 자에게만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알아보는 힘, 그것이 직관이다.


- 2010년 9월,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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