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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닉 카사베츠

Interlude | 2009. 9. 28. 01:32 | Posted by 맥거핀.


백혈병에 걸린 환자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안이하게 생각하면, 너무 신파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아니, 차라리 신파가 되어 눈물이라도 쏟게 만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보다 더 최악의 케이스는 눈물도 못 뽑아내고, 관객들을 졸게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어느 정도 눈물은 뽑아낸다. 그러나 그 눈물을 뽑아내는 방식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점점 쇠약해지고, 기력을 잃어가는 환자의 모습에도, 조금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끝까지 그(녀)를 지켜내려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투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눈물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 이야기는 왠지 죽어가는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언니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동생 안나(아비게일 브레슬린)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가, 그 초점이 엄마(카메론 디아즈)에게로, 다시 아빠에게로, 그리고 케이트의 오빠에게로 차례로 넘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둘러싸고 가족들이 벌이고 있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사투가 조금씩 드러난다. 백혈병으로 고통받으며, 10대 시절을 거의 병상에 누워 보냈던 케이트의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케이트에게 여러 생체조직들을 주어야 하는 안나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던(둘째 딸마저도 말이다) 엄마의 고통, 그리고 난독증이 있는 자신의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어야 했던 오빠의 고통. 그리고 여기에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여판사의 이야기나, 기꺼이 변호를 맡아주었으나 어딘지모르게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변호사의 이야기까지 겹치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변주된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가 조금씩 엮어들어가는 도중에 관객들은 서서히 이들의 입장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눈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는 것, 모두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 그들 중의 누가 더 고통받고 있다고, 혹은 어떠한 것이 옳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등등 말이다. 즉 이 눈물은 어떠한 것에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딜레마의 눈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멋드러지게 출발했던 이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며 여러 문제들을 너무 쉽게 봉합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는 초반부에 여러 많은 문제들- 즉 한 아이가 어떤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를 낳아 유전적인 도움을 받으려는 데에서 벌어지는 윤리적인 문제, 회복될 수 없는 병임에도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그리고 여기에 뒤따를 수 있는 안락사와 존엄사 같은 문제들), 자신의 몸의 권리를 찾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법률적인 문제, 환자를 둘러싼 가족 내부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 등등- 을 제시하고는 그것을 하나의 해답으로서 모두 설명하려 한다. 물론 닉 카사베츠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가족들간의 사랑의 힘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헌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의 문제들이 꽤나 멋드러졌기(혹은 흥미로웠기, 혹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던, 그러나 언젠가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대답에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한부 삶을 다루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의 새로움이라기 보다는 원작의 새로움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서점에서 잠깐 넘겨다본 이 영화의 원작인 조디 피콜트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 별>은 각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뭐 어쨌든 간에, 마지막 마무리의 상투성 혹은 불성실해보이는 해답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래도 기꺼이 눈물을 쏟아내 줄만하다.




- 2009년 9월, CGV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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