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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Ending Credit | 2010. 9. 18. 02:05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를 보았다. 김현석 감독은 야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늘 야구는 일종의 가림막에 불과했고,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의 어떤 사랑이야기, 혹은 일종의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 입은 남자들의 성장기'라고 부르고 싶다(물론 거의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성장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김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의 선비 호창(송강호)은 유일한 꿈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러던 그가, 야구를 만나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을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의 중심축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 <스카우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혹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켰던'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그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잊어버렸던, 혹은 애써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호창이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지만, 호창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대신 얻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영화 <시라노>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역할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이 맡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상처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의 '시라노'는 추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이 영화의 병훈은 그보다는 어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 여자 희중(이민정)을 놓쳐 버렸다. 그런 그에게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그 여자 희중과의 연애를 이루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병훈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그 여자 희중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짐짓 묻는 척을 한다. 글쎄.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대신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라노>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심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진심이라는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을 극의 후반 상용의 말들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고, 사랑하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시라노 에이전시'의 활동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영화의 제목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지만, 이들의 연애조작 사업은 사실 번번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연애조작은 결국 실패가 되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이름모를 커플의 연애조작 역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상용은 그들의 연애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박작가(박철민)가 그토록 싫어하던 애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한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다. 즉 이 영화에 의하면, 이들의 연애조작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진심이라는 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조금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병훈의 축이다. 젊은 병훈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고, 자신의 진심을 대면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나이든 병훈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마음이라는 녀석을, 혹은 진심이라는 녀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나 때로 그 마음은, 그 진심은 아마 무척이나 두루뭉술할 것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하나, 그것을 다른 형태로 애써 바꾸려 들지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 볼 것.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극 중의 병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지막 연애조작이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결국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혹은 그것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연애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연애조작들과는 달리, 이 연애조작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의 곁가지가 조금은 많아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타임이 필요이상으로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이 몇몇 장면들은 마지막까지 잘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기도 하다. 송새벽, 권해효, 박철민 등의 명품조연들이 벌이는 장면들은 거의 모두 잘라내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특히 권해효의 '후자'씬은 흐름상 거의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살려낼만 하다), 조금은 산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으며, 매끄럽고 무리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감독의 능력이었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생뚱맞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내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현석 감독은 꾸준히 안타를 생산해내는 타자다. 단, 장타력이 떨어지고, 개중에는 빚맞은 안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2루타가 될지도 모르겠다.




- 2010년 9월, CGV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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