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카페 느와르, 정성일

Ending Credit | 2011. 1. 11. 22:36 | Posted by 맥거핀.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들어있지만, 스포일러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중의 하나지만, 이 장면은 낯설어 보인다. 낯설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공간과 시간, 그 자체이다. 먼저 공간의 문제. 이 장면은 피사체를 아주 가깝게 당겨 찍고 있으며, 렌즈의 사용으로 소녀와 소녀 뒤의 공간은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은, 소녀 뒤의 배경이다. 아무도 없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으세요? 소녀가 앉은 햄버거집에는 아무도 손님이 없다. 그리고 저 뒤에서 종업원들만 바쁘게 움직인다. 글쎄. 십년을 넘게 패스트푸드점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이지만, 낯설게 왜곡되어 있는 이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시간. 당신이 소녀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용을 영화에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소녀가 햄버거를 물어뜯는 단 하나의 컷만 집어넣을 수 있다. 또는 햄버거집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부감숏으로 보여주는 컷 뒤에, 바로 소녀가 휴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즉 굳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또는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6개의 쇼트로 나누어- 정성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6개의 쇼트를 나눈 어떤 영화를 말하며, 왜 아무도 그 장면의 이상함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장면의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일은 소녀가 햄버거의 종이껍데기를 벗기고, 햄버거를 꾸역꾸역 다 먹기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있다. 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시간. 이 장면의 의미는 아마도, 소녀는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고 긴 시간들을.


그러므로 이 영화 <카페 느와르>의 시작부분에 관객과 맞닥뜨리는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일종의 정성일 식 선전포고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 두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공간의 문제부터. 이 영화는 많이 알려진 대로,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일단 먼저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서울은 사대문 안의 공간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옛날 지도를 삽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도 하고, 굳이 그 지도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몇 년간 살아온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빌딩숲으로 도배되어 버린 강남의 복제된 세계는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영화 속 남산타워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남산타워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디서나 우리를 굽어보는 남산타워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한 장면. 영수(신하균)와 관계를 맺은 미연(문정희)의 남편(이성민)은 차창 밖으로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본 후 조금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고는 운전대를 꺾는다. 여기에 첨언할 수 있는 것. 남산타워는 1969년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굳건하던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다는 사소한 사실.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방법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청계천 - 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고 썼던데,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화 속 청계천은 위험한 공간으로 보여짐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다리 아래의 청계천은 선화(정유미)가 이상한 남자에게 쫓김을 당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복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등불을 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에 흐르는 청계천의 트래킹 숏으로도 말해진다. 이것은 통상적인 청계천의 역방향 트래킹이기도 하려니와, 이 장면에서 청계천 다리 아래로 끝끝내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청계천 위의 여러 오래된 상점과 건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이 때의 카메라는 청계천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된다면,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영화 속에서 청계천이 등장할 때 내뱉어지는 첫 대사는 무려 "나쁜 새끼"이다. (물론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다른 미연(김혜나)이 영수에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욱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시간은 상당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장면은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장면일 것이다. 영수가 망치를 내려치려 할 때 멈춰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층계참에 멈춰선 아이들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동시에 TV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멈춰버린 것 같으나, 사실은 멈추지 않은 시간,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영수의 주관적인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속에서 미연(문정희)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영수에게 전하는 또다른 미연(김혜나). 그러나 우리는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미연이 멀쩡하게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글쎄.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여러 개월이 지난 것으로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라져 버린 여러 개월의 시간들 - 그것 역시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장면은 어떨까. 청계천의 24시간을 빠르게 돌려서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날림으로 지어진 청계천.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물론 영화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시간들은 영수가 사경을 헤매는 며칠이다. 이 며칠은 다시 현실의 시간들과 대응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이다(이 시작은 흑백으로 시작하여, 칼라로 돌아왔다가 다시 흑백으로 끝난다). 영수는 사경 속에서 크리스마스날 선화를 만나고(그는 거기에서 동방박사들을 본다), 동지(冬至)에 선화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하며(밤이 가장 긴 날), 그것을 이룬 후에 결국 숨을 거둔다. 그리고 2009년이 오고, 보신각에서 KBS가 숨긴 사운드를 이 영화는 복원하여 보여준다. 즉 2009년을 상징하는 이 장면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이것은 현실의 시간이라는 말이며,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시간과 이 시간을 대응하여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 시간들을 현실의 시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정성일은 다른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영수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즉 그는 아마도 가능했다면, 이 며칠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관객은 3시간 18분을 앉아있는 것조차 거의 임사체험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현실의 시간과 그대로 대응함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동진 씨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다른 어떤 것들로 물화(物化)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들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숨어들어가 있지 않고, 앞에 툭 튀어 나와 자꾸만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자주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거의 시간과 공간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때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백야>에서 나온 대사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19세기에 쓰여진 말들을 21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내뱉을 때의 이 시간의 교호작용들. 이것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리듬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리듬은 때로 영화의 장면들이 거의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런 영화의 리듬은 이 영화가 다른 수많은 영화들의 일종의 메타 텍스트가 되어버린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에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올드보이> 등등의 여러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격자처럼 수놓아져 있다(정성일 감독은 시네마톡에서 혹시 이 영화의 DVD를 발매하게 되면, 영화의 중간에 영향을 받은 장면들의 본래의 영화 제목과 그 장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부가기능을 넣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많은 영화들의 특정의 장면들, 혹은 특정의 느낌을 이 영화에서 살려내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리듬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나름의 리듬이 있고, 리듬을 제거한 그 장면이란 이미 '그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만이 강조되고, 스토리와 리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대신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간과 공간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장면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햄버거를 먹게 하는가. 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고 있는가. 해답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녀 뱃속의 아기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신하균의 죽음을 어떻게든 유예시키려는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은 정성일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예를 들어 다음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할 때 실제 죽이지는 않지만, 피 대신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와인, 혹은 미연의 얼굴에 뿌려지는 붉은 피와 같은 것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영수의 죽음이 유예되어야 하지만, 그가 끝내 죽어야 하는 이유. 청계천에서 영수를 극도로 증오한 후, 차에 치일 뻔한 다른 미연(김혜나)의 모습.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를 예수의 수난극에서 묻는 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대하는 정성일의 태도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이다.

...........................................

몇 가지 잡설, 또는 의문을 덧붙인다.

1.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에서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하는 대로, 누구보다도 가장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인 것처럼 보여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대비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남성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지 못하다. 남성들은 청계천에서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따라가거나, 동물원에서 쓸데없이 말을 걸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거나(이 장면은 또한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은근슬쩍 담고 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나간 사건을 한탄하거나, 아니면..딸을 욕망한다. 반면, 여성들은 대체로 긍정적인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연대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미연의 딸과 친구의 대화, 그리고 은하(요조)와 미연(김혜나)의 멋진 오토바이 터널 씬,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소녀들의 연대.

2.
이 영화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연의 남편이 한 때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장면. 변절한 사회주의자, 또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거세된 사회주의자는 때로 어떤 것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박쥐>를 오마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박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영화니까.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신하균 때문이다. <박쥐>에서 수장된 후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하균은 이 영화에서도 물에 빠지고 나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신하균이 물에 젖은 몸으로 서점을 돌아다닐때 나오는 그 음악과 그 장면의 숨막히는 공포감, 그리고 '카페느와르'라는 제목이 나타날 때의 그 압박감은 압도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견뎌야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3시간 18분의 물리성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정말 무섭다. 

4.
이 영화의 텍스트의 활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종종 소설의 텍스트가 손글씨로 등장하는데, 이 때 지속적으로 사운드가 텍스트와 불일치한다. 즉, 목소리는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음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유일하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은 마지막 한 번 뿐이다). 동시에 텍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은 그저 이해 없이,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는 안된다. 마치 이는 이 텍스트를 절대 읽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글씨를 그저 모양만으로만, 고유의 느낌으로만 이해하라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미연(김혜나)이 다른 미연(문정희)의 남편에게 보내는 육성 편지는 화면을 암전해버림으로써 주목하여 들으라는 듯이 느껴지는 반면에, 이를 이렇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좋은 반응들과 함께, 예상대로 개봉 후 몇몇 신랄한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가 물론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편으로 정성일의 위치에서 비롯된 문제가 개입된 것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정성일이 잘나가는 영화평론가이자, 이미 일종의 권력이 된 것도 그 하나의 이유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말실수 때문인가. 그는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영화에 별점 5개 만점 중 몇 개를 주겠는가라는 질문에 5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것이 왜 공격받아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리어 자신의 영화에 3개나 4개를 주는 감독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그것을 잘 알면서 5개 짜리 영화를 만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가장 좋다(물론 나도 그렇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일기조차 스스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빈정을 담아 말했다. 정성일 씨가 어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고. 글쎄. 자신만의 방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굳이 그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을까. 방의 보호벽이 없는 그 세계에 굳이 나와 이전투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정성일은 시네마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 것이 뻔하지만, 이 영화는 나와 영화적 피를 나눈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방에 들어오라고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만의 영화들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영화에는 있다. 선화가 택한 그 남자는 바로 앞에서 영수와 미연이 본 영화 속의 남자, <극장전>의 김상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성일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네마톡에서 말했다. "통상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는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극장전>을 삽입할 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즉,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 2011년 1월, CGV 대학로.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7시간, 대니 보일  (0) 2011.02.14
글러브, 강우석  (0) 2011.02.06
황해, 나홍진  (2) 2011.01.04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0) 2010.12.10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

황해, 나홍진

Ending Credit | 2011. 1. 4. 16:49 | Posted by 맥거핀.





(<황해>, <추격자>, <부당거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본 이후에 질문이 넘쳐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영화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류의 질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은 차치해 두고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객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로서 어떤 허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실 이런 류의 상당수 이야기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의 기본축을 가지고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 축의 빈틈을 이 영화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메운다. 즉 이야기의 중간에 특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앞 뒤의 이야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혼재시키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짐짓 복잡한 척 한다.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고, 그 반면에 인물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빈 틈들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관객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것은 분명 최근의 경향들이다. 그런데 이 경향에는 한편으로는 관객과 이 영화들의 어떤 '결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요즘의 관객들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본인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전체적으로 숨 고르며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식상하다' 여기고, 짐짓 복잡한 체 하는 영화들을, 사실은 거의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앞 뒤를 툭 잘라 버리고, 이야기의 결락들을 일부러 내비치는 영화들이 좋은 이야기들일까. 관객과 필요하지 않은 두뇌 게임을 벌이고, 결국에는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관을 나선 후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일까. 맥락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성일 씨도 트위터에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짧은 멘션을 남겼다. "지난 일년 동안 본 한국영화의 특징은 장르 불문하고 <본> 시리즈의 아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이 눈을 홀리기는 한다. 특징은 보고나면 뭐가 뭔지 알수가 없다는 점이다." 

<황해>를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황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황해 결말', '황해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황해>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황해>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바로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달았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알았건 간에)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치정극임을, 아주 작은 것들이 확대되어 결국 이 같은 결말을 낳았음을, 구남(하정우)의 사투는 아무 것도 다시 황해를 넘어 가져오지 못했음을 말이다. 2시간 30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이 황량한 결말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빈 껍데기들. 흘러넘치는 피와 사라져버린 육체들.

특히 아내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 결말은 조금은 이상해보인다. 구남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의 잉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결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씨네 21>의 안시환의 평(no. 786 전영객잔)에서는 이를 구남에 대한 감독 나홍진의 최대한의 배려라 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은 구남이 절대 알 수 없는, 즉 구남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이며, 구남이 혹시 그것을 바랬다고 해도, 그것은 구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결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아내의 귀환은 구남이 죽어 황해로 던져진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유골함과 같이 말이다. 이 씁쓸한 결말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사실 이 장면은 명백하게도 관객에게만 보여지기 위한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구남은 몰랐지만, 관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된 채로 영화관을 나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결말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거의 다른 장면들과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다. 즉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구남에게는 혹시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은 가혹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남이 애당초 면가(김윤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가혹함 속으로 이 결말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즉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당혹함의 늪으로, 가혹함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부당거래>에서 살인범 이동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밝혀지던 장면과도 유사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장면 역시도,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가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관객에 대한 가학(苛虐)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마지막 장면들은 구남에게 이어져 있던 관객의 심리적 정서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기능을 한다. 즉 관객은 결론적으로는 아무 것에도 동의하지 못한채로 황량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점점 구남의 처절한 사투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힘겨운 일이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에는 구남의 사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남이 목숨이나마 부지해 살아돌아가는 것이며, 아내의 유골이라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남을 황해에 수장시키고, 아내를 살려 돌아오게 함으로써, 구남의 사투는 의미가 없어진다(즉 구남의 사투와 별개로 아내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결말은 확실히 관객에게 가학적이다. 이 가학적인 결말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가학성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에 쌓은 정서를 후반부에 가서는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가 무너진다기 보다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초중반부에 쌓은 그 정서란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 남자의 비극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영화의 4개의 챕터 제목을 연결하면 된다. '조선족' '택시운전수'는 '황해'를 건너 '살인자'가 된다(그러나 사실 이 제목의 기능은 관객의 이질감을 높여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목 밑의 그 중국어 간체자 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 후부터 영화는 표정을 바꾸어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고, 텅 비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정서를 없애고, 피와 뼈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오로지 살인 장면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장면들이 가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동진의 말대로 장르적 제스처가 제거되어 있는 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예를 들어 구남이 김승현을 죽이는 시뮬레이션을 실제의 장면처럼 만들어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거의 숨돌림 틈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를 하게 만든다. <추격자>에도 몇몇 가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황해>보다 심리적 타격이 적은 것은, 호흡을 위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에서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은 김윤석과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인데, 이 <황해>에는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홍진 감독이 가지는 특유의 어떤 세련함이다. <황해> 및 <추격자>의 액션 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기 보다는, 잘 세공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며, 뜨겁다기 보다는 차가운 인상을 준다. 즉 이 장면들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딘가모르게 매끈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떤 예술가의 활동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까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장면들을 위해 나머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추격자>의 '개미슈퍼' 씬을 떠올리게 한다. 그 씬은 사실 그렇게까지 표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홍진은 기꺼이 그 장면을 스토리의 결함이 생겨나는 데도 집어넣었고, 그런 방식으로(냉소하는 지영민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느리게 뿌려지는 피들) 찍었다. 그 장면에 대한 허문영의 글을 조금 길긴 하지만 인용한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중략)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건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중략)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다섯 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중략)

실제로 <씨네 21>이 개최한 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 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p.34-36. 부분발췌.


가학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감(無感)해지는 것이다. 즉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그 감각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예를 들어 그 하나의 전조. <황해>에서 구남이 어리숙한 조선족들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조선족 사내가 구남의 기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떨어져 죽는 씬이 있다. 그 남자가 떨어질 때의 관객의 짧은 웃음과 떨어진 그 남자를 보여줄 때 관객에게서 흘러나오는 '어'하는 소리. 그 '어'하는 소리는 왠지 TV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이 안좋은 장면이 나올 때 내는 즉각적이고도, 만들어진 놀람과 닮았다. 그 짧은 웃음과 짧고도 기계적인 놀람. 우리들은 그렇게 연이은 죽음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탄성을 보내고, 웃기도 하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종내에는 무감해진다. 그 무감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가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신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 30분 동안 감독의 가학에 시달리게 하고, 종내에는 가학에 무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불러야 할까. 글의 처음에 말한,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질문 참, 무시무시하다.

......................................................

<황해>의 시작 부분에 구남의 나레이션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병이 돌아 개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 죽여, 결국 사람들이 개들을 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땅에서 다시 꺼내 먹었다.' 그것은 <황해>의 내용을 줄여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미친 개들의 먹이가 되고(이 영화 <황해>에도 개의 먹이가 되는 인간이 있다), 개는 다시 (개에 물려서, 혹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인간들의 먹이가 된다. 미쳐버린 인간들이란, 곧 괴물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그러나 이 나레이션은 이 <황해>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왠지 요즘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이야기의 다른 무엇보다도 '무엇으로 인간을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칼(<아저씨>)이기도 하고, 총(<무적자>)이기도 하며, 초능력(<초능력자>)이기도 하고, 된장(<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장치(<악마를 보았다>)이기도 하며, 소뼈다귀(<황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을 죽이는 장치가 기발하게 진화하는 것의 반대편에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제 아까의 질문에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답을 보자. 아까의 질문.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정답: '다른 괴물'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무시무시한 대답.

2010년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대답을 해왔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부당거래>, <파괴된 사나이>, <무적자>, <초능력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황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동적으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괴물이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의 어떤 징후들일까. 2010년 풍경들은 이미 괴물이 된 자들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괴물이 되어라. 괴물이 되어서 다른 괴물들을 짓밟아라. 그 밑의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다. 이것은 2010년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하였으며(<하하하>),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으며(<하녀>), 또 괴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시를 썼다(<시>).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덧.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밑의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다. 2010년을 덮은 어떤 한국영화의 징후들에 대해.



- 2011년 1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러브, 강우석  (0) 2011.02.06
카페 느와르, 정성일  (0) 2011.01.11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0) 2010.12.10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Ending Credit | 2010. 12. 10. 23:17 | Posted by 맥거핀.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데이비드 핀처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잘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2시간의 이야기로 만드는구나, 라고 말이다. 사실 이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기업물로 보자면 흥미로운 구석은 있으나, 상당히 밋밋한 쪽에 가깝다. 어떤 하버드 천재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들어서 성공하나, 2개의 소송을 당한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한 줄로도 흥미롭기는 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나, 실제의 소셜 네트워크는 실패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이야기를 버무려내며,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킴은 물론, 관객을 어떤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끌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부당거래>의 류승완이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마법을 부린다면,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핀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고 풍성하고 철학적으로 만든달까.


그러나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어떤 기업의 성장과 위기를 보여주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 그것의 어떤 관계들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때로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비쳐지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비슷하게 닮아 있다.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 속에 있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페이스북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배타성이다. 페이스북은 처음에 하버드 아이디를 가지고 있어야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다른 대학들로 그 세력을 넓힌 후에도 이러한 성격은 비슷하게 유지된다(지금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온라인 상에서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방의 일정 정도의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수락이 또한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도 조금은 닮은 점이 있다. 싸이월드 역시 일촌 관계는 상대방의 수락이 있어야 가능하며, 특정 정보를 가까운 사람에게만 공개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즉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러한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현실의 관계와도 거의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싸이는 실명으로만 가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페이스북 역시 가명으로도 가입이 가능하지만 대체로 실명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으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가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페이스북은 현실의 관계를 대체로 반영한다. 즉 많은 경우 현실에서의 인기인이 페이스북에서도 인기인이 된다. 즉 페이스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권력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어떤 권력 관계는 흥미롭게 보여진다. 하버드대에 다니는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보스턴대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마크는 하버드 내 엘리트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는 친구 왈도(앤드류 가필드)에게 신경질적인 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윈클보스 쌍둥이 형제와 마크와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윈클보스 형제는 적어도 마크보다는 상당히 상류층으로 보이며, 잘생긴 외모에 스포츠맨으로서 교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어 보인다. 그런 반면 마크는 평소 컴퓨터만 가까이 하는, 거의 외톨이에 가깝다. 이것은 어떤 계급의 세계이고, 권력의 세계이다. 마크는 윈클보스 형제와 태생적으로 다르며, 왈도와 같이 상류층 클럽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마크가 다른 방식으로의 역전을 바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크가 이를 역전하는 방식은 분명히 온라인을 이용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은 온라인으로 평등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또 하나의 권력 구조를 만들고 그가 이를 소유하는 방식, 혹은 그 권력 구조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방식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의 세계 역시 오프라인의 권력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고 있으며, 마크는 이를 창조한 일종의 신으로서 그 세계에 군림하며 이것은 다시 역으로 오프라인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마크가 그 온라인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거의 그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표현한다.

사실 이 여자들과 관련한 부분은 이 영화에서 조금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명백하게 이러한 페이스북 자체가 어떤 또하나의 권력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이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일종의 '전리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여자를 차지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속 여자들은 남자들의 권력 관계 속에서 아주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른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열심히 헤드셋을 끼고 사이트를 관리하는 남자들 곁에서 여자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장면들도 그러하거니와, 마크가 주위에 선 모든 남자들에게 여러 역할들을 지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를 보여준다. 남자들과 같이 있는 여자들이 이 '미션'에서 자신의 역할을 묻자, 마크는 잘라 말한다. "없어!"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질문이 요구되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탄생시키는가.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운 것 같다. 미안하게도 현실에서의 외톨이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트위터 등의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 등의 1인 미디어와 다른 페이스북만의 독특한 성격에도 기인하기도 하지만, 왠지 영화는 다른 것을 살짝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온라인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즉 현재로서는 가상 온라인에서의 체험은 실제의 체험을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상 세계에서 펼치는 게임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현실에서의 실제 체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의 축구 게임에서 아무리 골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의 축구 게임에서 골을 넣는 쾌감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세게에서 총격전 장면을 보고(하고) 일종의 스릴을 느낀다고 해도, 실제의 총격전을 보는(하는) 충격에 이를 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가상의 세계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프라인에서 그 누군가와 만나서 하는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즉 온라인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대체제이다. 우리가 실제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면, 굳이 온라인에서 관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관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체물이 살아남는 방법은 실제를 충실하게 모방하여 최대한 그 실제에 가까워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를 벗어나고 싶어해도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권력 관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마크가 온라인에서의 관계망을 꿈꾸는 것은 여자친구와의 오프라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만약 오프라인에서의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졌고, 마크가 거의 외톨이에 가깝지 않았다면, 이 '페이스북'은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체물로서(처음의 '페이스매쉬'가 여자들을 '실제로 놓고' 비교해 보고 싶은 남자들의 권력에의 욕망을 '모방'했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망이 탄생했고, 이 온라인망은 현실의 권력 관계를 다시 반영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은 현실을 모방하려 하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오프라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를 데이비드 핀처는 사실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 퍼져나가고, 마크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페이스북 그 자신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교내 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내신문에 페이스북이 보도되고, 마크가 그것의 창시자임이 알려지면서 마크는 단숨의 인기인의 경지에 오른다. 즉 이는 어떤 온라인보다 강력한 미디어 권력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핀처는 재미있는 장면을 넣기도 한다. 윈클보스 형제의 조정 경기 장면. 이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슬로우 화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약동하는 근육의 꿈틀거림과 게임에서의 극적인 승리와 패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내게는 마치 이것의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온라인에서의 조정 경기는 이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극적인 승리에의 쾌감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온라인 조정 게임은 영원히 현실의 훌륭한 근육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현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크는 처음부터 이를 의도했던 것일까. 즉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고, 그것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글쎄.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마크는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서,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일종의 온라인 상의 권력자로 만들어 준 후부터 그는 조금씩 변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냅스터(Napster)를 만든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였다. 숀 파커는 온라인이 만들어낸 현실의 권력자로서 마크에게 일종의 역할모델이 되었다. 숀 파커와 가까워진 후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어 결국 5억 명의 온라인 친구를 만들어냈지만,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왈도를 잃어버렸다.
............................................

이 영화의 제목인 <소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이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온라인의 '페이스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넓은 오프라인까지 포괄한 사회적 관계망, 조금 더 좁게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나는 묻고 싶어진다. 온라인은 그렇다면 언제가 되어서야 이 사회적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평등한 관계란, 모두가 친구되는 온라인 세계란 여전히 환상인가. 온라인은 결국 오프라인을 영원히 불완전하게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 전체를 두 개의 거대한 소송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마지막에 살짝 양념을 뿌리고 있기도 하다. 여자 변호사의 충고를 받고(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이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마크는 예전의 여자친구 에리카에게 친구 신청을 하고는 반복적으로 새로고침을 한다.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글쎄. 나는 별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조금은 희망적인 결말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가 아니라 에리카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다못해 전화를 하던가 했어야 했다. 권력자로서의 마크의 '페이스북'에서의 위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희망적인 결론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의 권력은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다음과 같은 맥락이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게 만들지만, 과연 과거의 사람, 혹은 꼭 만나고 싶던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이러브스쿨'이 망한 것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5억명의 온라인 친구, 전세계 최연소 백만장자, 하버드 천재가 창조한 소셜 네트워크 혁명!" 그러나 나는 그저 묻고 싶다. 그것은 혁명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타락입니까.


- 2010년 11월, 씨네시티.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페 느와르, 정성일  (0) 2011.01.11
황해, 나홍진  (2) 2011.01.04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부당거래, 류승완  (0) 2010.11.09
:

<엉클분미>와 정성일

Ending Credit | 2010. 12. 9. 02:55 | Posted by 맥거핀.



정성일은 언뜻 보기에도 십여 장이 넘어 보이는 일반노트 크기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넘겨다본 그 메모들에는 뭔가가 손글씨로 적혀져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러나 그 종이들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종이를 하나하나 탁자에 내려 놓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 이야기들의 진행과 관련된 메모들일 것이다. 오래전 정성일의 음성해설이 들어간 DVD를 보며, 정성일은 도대체 이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 뭔가 적어놓고 대본을 읽는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몇 개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메모를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해나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은 이상한 문장들을 썼다. 구어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그렇다고 문어체로 보기에도 적절치 않은 그런 문장들. 그가 쓴 비평들을 그대로 읽어주는 듯한 느낌. 그러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는 엄청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애써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가 있던가. 1시간이 예정되어 있는 시네마톡이었지만, 그는 1시간을 조금 넘겼고, 몇 장의 종이들은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손에 쥔 채로 이야기를 끝냈다. 정성일의 <엉클분미>에 대한 영화적 간증과 그것에 압도되어 버린 신도들. 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그런 이미지였다.

<엉클 분미> 상영과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마톡. 그 때 들었던 이야기 몇 개를 지금 뒤늦게 옮겨 본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네마톡은 11월 중순에 있었고, 이것은 여차저차첫차막차한 이유로 12월도 한참 지난 지금에야 몇 개의 단어들에 의지해 이야기를 옮기는 무리한 시도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에,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뭔가를 끄적거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몇 개의 단어들만 휴대폰 '그림메모'를 이용하여 남겨두곤 하는데, 이 글도 온전히 그 단어들의 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들은 분명히 처음에 들었을 때와는 조금은 달라져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므로 당연히, 밑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모두 정성일 평론가가 그날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밑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는 당연히 정성일이다.)

1.
그는 이 영화 <엉클분미>가 끝나고 났을 때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경험하는 '멍~'해지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것이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감독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형식적인 시도와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많은 다른 매체들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이 영화는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설치미술 작업과 크게 연관이 있다. 아핏차퐁 감독은 설치미술에서 멀티스크린을 사용하여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동시에 체험하게끔 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영화에 가져왔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영화의 스크린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쓸 수 있는 설치미술과 다르게,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핏차퐁 감독은 개의치 않고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해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분미의 아들이자, 오래전 집을 나가 원숭이 인간이 된 분쏭과 오래전 죽은 분미의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분미 및 통, 젠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점은 원숭이 인간 분쏭과 죽은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오랫만에 만나고서도, 분쏭과 죽은 아내는 서로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별개의 이야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즉 원숭이 인간 분쏭이 나타나는 것과 죽은 아내가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이들 두 사람이 말을 섞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아핏차퐁 감독은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 그냥 풀어놓는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관객이 멍해지는 것은 단지 두 개 이상의 스크린을 동시에 하나의 스크린에 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핏차퐁의 형식상의 일종의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이란 영화의 고정선(線)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영화의 중심에 어떤 고정선이 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고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이 고정선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부러 고정선을 여러개 두는 경우도 있고, 그 중 고정선 하나를 갑자기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 고정선을 비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반전(反轉)이라 부르는 것).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관객이 어떤 고정선을 따라가다가 그것이 아닌 것 같아 그 고정선을 버리면, 영화가 한참 진행되다가 어느샌가 그 고정선이 다시 나타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변태와 환생(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환생(전생)이 A가 A'가 되는 것이라면 변태는 A가 B가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분미의 경우가 환생(전생)이라면, 통이 스님이 되는 것은 변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아핏차퐁의 영화도 변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엉클분미>라는 영화는 A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B가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C가 되기도 하고 다시 A로 문득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멍해지는 것이다.

3.
이 밖에도 이 영화에는 내용상의 대구(對句)가 있다. 공주가 물(수분)로 들어가는 꿈(혹은 전생)의 내용과 분미와 젠, 통이 아내 유령을 따라 건조한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은 내용상으로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분미는 건조한 동굴에서 수분이 빠져나온 채로 죽음에 이른다. 이 장면들은 왜 대구를 이루는가.

4.
영화의 중간에 갑자기 메기와 공주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를 누구의 꿈 혹은 전생으로 보아야 할까. 분미의 전생일까, 통의 전생일까, 아니면 젠의 전생일까. 아핏차퐁 감독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메기와 공주 에피소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분미가 모기를 전자모기채로 잡는 장면임을 상기시키며(이 장면은 또한 이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죽은 모기들과 죽은 공산주의자들), 왜 모기의 전생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전제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상하게 찍혔다. 즉 대부분 모기를 잡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을 잡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면에,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잡히는 모기들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5.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이 영화의 래디컬한 정치성에 대해서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영화를 본 평론가 및 기자들은 이 영화의 급진적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석에서 아핏차퐁 감독 역시 자신이 죽을 때까지 태국은 국왕 및 군부 독재에 둘러싸여, 민주화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분미가 젊은 날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자신의 업보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미래 이야기라고 하면서 보여지는 사진들도 있다. 이 사진들에서 원숭이 인간 분쏭과 총을 든 사람들(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찍은 사진들도 있고, 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마치 이 사진들은 이 영화 촬영 현장을 스케치한 사진들 같기도 하다. 즉, 이 영화 속에서 '미래'라고 소개된 사진들은 현재에 가깝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이 <엉클분미>라는 전체 영화의 내용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라는 대과거 및 이 미래 사진 사이에 있는 전과거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미래 사진 속의 현재는 희망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사진 속에는 쓸쓸한 공기가 감돈다. 그가 이 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80년 광주가 아니라,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서 찍힌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볼 때, 이 사진들에는 절망 속에서의 한 때의 휴식과도 같은 것들이 비춰진다.)

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에서 스님이 된 통은 사원이 무섭다면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젠의 숙소로 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젠과 함깨 TV를 보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이 때, 익히 알려졌듯이 두 가지 행동으로 그들은 분리된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왜 통은 스님이 되었으면서도 사원이 무서운가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장면을 아핏차퐁이 매우 공들여 찍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 4가지 구도로만 찍혔고, 그 중 2가지 각도만을 마지막에 번갈아 보여주며, 그들을 두 가지로 분리시킨다. 하나는 TV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젠과 통이고, 다른 하나는 TV 앞을 떠나 세븐 일레븐으로 무엇인가를 먹으러간 젠과 통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서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TV를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외면하고 떠날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TV에는 태국 시민들의 시위와 그것을 제압하는 정치가와 군부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할 것인가,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강조해서 말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아핏차퐁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쉬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쉬워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의 정치적인 단호한 질문을 하는 이 영화를 단지 형식적인 문법이 조금 쉬워졌다고 해서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덧.
그는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설치미술가로서의 아핏차퐁 감독의 면모에 대해 이야기했고(그러면서 한국에서 그 당시 전시되고 있던 아핏차퐁의 설치미술들을 꼭 관람하기를 권했다), <엉클 분미>가 가진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핏차퐁 감독의 정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정글이 가지는 원시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홍상수 감독과 아핏차퐁 감독이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인연과 더불어 지난 CINDI에서 이들 두 감독 사이에 짧게 이어졌던 기이한 대화에 대해 전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세세하게 전하기에는 내 기억력이 모자르다. 나는 그리고 멍해졌던 것이다. <엉클분미>로 멍해졌고, 그리고 이어지는 정성일의 이야기들로 다시 한 번 멍해졌던 것이다.



- 2010년 11월, CGV 대학로.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해, 나홍진  (2) 2011.01.04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0) 2010.12.10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부당거래, 류승완  (0) 2010.11.09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3) 2010.10.20
:

초능력자, 김민석

Ending Credit | 2010. 12. 5. 23:5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초능력자>가 며칠 전 2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탄력있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일에 최다관객수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도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그 때까지 극장에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초능력자>는 그대로 묻히기에는 사실 의외로 진중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강동원, 고수라는 꽃미남 배우들을 앞세운 그저그런 슈퍼히어로 영화로만 보기에는 그 질문들이 던지고 있는 깊이가 아쉽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로 보기에는 질문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들이 아쉽다. 그저 이래저래 아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초능력자>는 상당히 도식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초인(강동원)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규남(고수)의 세계는 정확히 갈라져 있다. 초인이 사는 호텔방의 샤프한 세계와 규남이 사는 공간인 뒷골목의 허름한 세계는 그 자체로 대립적이다. 그리고 초인은 혼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대항하지만, 규남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대를 통해 초인에게 맞선다. 이를 한편으로는 초인은 자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규남은 자꾸 사회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초인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면 규남은 "나 유토피아 임 대리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여 설명한다. 즉 규남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토피아의 임 대리로서, 즉 이 사회 안의 관계망의 일원으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왠지 우리사회의 일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초인의 초능력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굳이 초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대부분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혹은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도는 아주 어렴풋하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다. 초인과 규남의 지하철 대결 장면에서 초인의 초능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규남은 쓰러진 후 겨우 기어서 지하철 벤치까지 오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바쁘게 갈 뿐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왠지 이 장면은 초인의 초능력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초인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CCTV가 자꾸 활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 설치된 CCTV는 물론, 규남과 친구들은 CCTV를 찾아 초인의 자취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규남과 초인의 경찰서 씬에서도 CCTV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물로서의 감시의 눈으로 CCTV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규남이 CCTV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CCTV는 기본적으로 권력 가까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규남의 친구들이 외국인들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어떤 우연의 산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유토피아의 사장인 정식(변희봉)의 부인 역시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혼혈인) 딸 영숙과 규남을 굳이 영화에서 묶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며, 굳이 그 이름이 '유토피아'인 것이 또다른 증거이다. 즉 초인의 초능력에 맞서는 일종의 글로벌한 긍정적인 연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우리사회의 어떤 일면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규남 곁에 끝까지 남는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이 장면들은 <괴물>에서 송강호와 외국인이 같이 괴물에 맞서던 초반 장면들을 생각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이 장면들에 흐르는 특유의 어떤 정서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이어지는 몇 개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대를 공고히 하고, 끝내는 그 공감을 관객에게까지 넓힌다. 즉 규남과 그 외국인 친구들이 만드는 연대는 물질적인 관계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우리네 보통 동네친구들이 보여주는 연대이고, 이들이 만드는 정서는 영화의 전체톤을 지배한다.

이런 대결의 장 속에 또다른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다크 나이트>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초인은 계속하여 같은 논리로 규남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규남이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보수신문들이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시위(점거)를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정부가(혹은 회사가) 강경대응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어쩌면 초인의 말대로 규남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사람들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초인은 그저 돈이나 훔쳐가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고, 굳이 사람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대응하는 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은 계속해서 커진다. 이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계속 배트맨을 압박하는 논리와 닮아 있고, 배트맨이 계속 고민하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존재가 도리어 조커를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커가 사회의 괴물이고, 도려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배트맨 역시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괴물이고, 언젠가 사라져야할 존재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의 일종의 자포자기적인 삶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해도, 그가 사회 속으로 스며든 순간 그의 괴물성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는 사회에서 괴물로 축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스스로 격리되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초인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초능력자>가 흥미로워 보였던 이유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던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규남이 초인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사회 속의 다른 개체들로,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 본다는 것처럼 보였고, 초인이 머뭇거리는 순간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규남은 어느덧 배트맨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도 배트맨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 딜레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해야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물론 후자의 질문이 훨씬 답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전자의 질문을 답하고만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덧. 3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기란 상당히 힘들다...



- 2010년 11월, CGV 왕십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0) 2010.12.10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부당거래, 류승완  (0) 2010.11.09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3) 2010.10.20
옥희의 영화, 홍상수  (2) 2010.09.29
:

부당거래, 류승완

Ending Credit | 2010. 11. 9. 23:23 | Posted by 맥거핀.


(어쩔 수 없는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제목에서 말하는 '부당거래'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어떤 거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커넥션'들은 불법과 범죄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아울러야만 그 거대한 부당거래의 끄트머리라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차가운 관객이 되어 이들을 들여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부당거래를 하는 자들은,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건설회사 사장의 손에서 검사의 손에서 넘어간 시계가, 다시 기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의 역방향으로 검사는 사장을 위해 적당히 누군가를 '손봐주고', 기자는 검사를 위해 기사를 써준다. 그들은 그저 어떤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를 한다. 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그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스크린에서 밀려나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외곽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에서 밀려난 자들(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위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은 부당거래가 된다.

아니, 여기서 다시 복잡한 스토리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보다는 그저 다른 얘기 몇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이 영화의 뚜렷한 장점들. 스토리를 죽 써내려가는 것으로 200자 원고지를 몇 장이나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꽤나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복잡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마법을 부린다. 그 마법은 몇 가지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한 가지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토리를 캐릭터들의 관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써 스토리를 최대한 캐릭터에 밀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각 캐릭터를 정지 화면으로 잡고, 간단한 캐릭터 설명을 자막으로 붙이는 것은 이 영화를 캐릭터 중심으로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는 것이나, 각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 가지의 아주 인상적인 숏이나, 대사로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팜플렛에 나온 다음의 대사들. 주양 검사(류승범)의 "한번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아시겄어?!!" 나, 장석구(유해진)의 "절대 나 혼자 못 죽는거 알죠?"같은 것들을 보면, 그 캐릭터의 어떤 특징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즉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나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건 절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영화는 초반에 상당한 리듬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의 힘이고, 처음에 구축한 리듬의 덕이다. 즉 이 영화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들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부여하지만, 그것이 너절하게 이어져있다거나, 혹은 뭔가 불안하게 엮어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웰메이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껏 어떤 불균질하게 넘쳐나는 에너지로 승부하는 것들이었지, 이 영화처럼 매끄러움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세공술사 같은 느낌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 감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 작가의 공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내에는 관객이 어느 캐릭터도 좋아할 수 없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몇몇 캐릭터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관객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끼워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이 온전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에필로그와 같은 영화의 마지막 씬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류승완 감독이 <무비위크>와 한 인터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대호 형사(마동석)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덜 환영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와 같은 캐릭터들의 집합이라면, 마지막의 친절하게 정리하는 장면들은 대중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마지막의 몇몇 씬들은 대중적인 결점에 발라주는 일종의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은 과잉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도 관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류승완 감독이 전작들에 보여줬던 어떤 여러 단점 중의 하나는 작위적인 구성이 자꾸 엿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란 (어느 정도는) 작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작위성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기어나와보려고 버둥대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이것을 어떤 핍진성이라고 부른다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핍진성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는 자들에게 에라 엿먹어라 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니었겠는가.)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이 최대한 자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질문들. 살인범 이동석의 아내는 왜 그런 캐릭터로 설정되었는가(물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 최철기(황정민)는 왜 그런 이동석을 '찜'하는가), 대호 형사의 장례식 장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는 왜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황정민이 마지막에 울부짖는 씬에서 굳이 그런 음악을 깔아야만 했을까....등등. 이 첨가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것은 <PD수첩>도 아니고, <시사매거진 2580>도 아니고, <뉴스 후>도 아니다. 그저 잘짜인 대중영화이다. 아니, 그저 이 모든 내용이 단지 영화에 불과하다는 닭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대중영화에는 대중영화에 맞는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잉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럴까. 그러한 과잉은 다른 어떤 것을 약간은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떤 묘한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 같은 것들과 연관된 부분이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결말은 사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냉소적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깃털들만 다 부러지고, 몸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나의 대답은 그저 위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PD수첩>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우리 모두는 공범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몇몇 선택들이 있다. 처음 장면의 지하철 역과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들의 조합. 살인범 이동석을 다시 비틀어버리기. 주양 검사와 장인과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  

꼭 이것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능력이 여전히 의심스럽다. 사실 박훈정 작가라는 시나리오 블루칩에(이 매끄러움은 분명히 류승완의 공이라기 보다는 박훈정의 공이다), 주연배우들로 한 연기하기로 소문난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쓰리 콤보 조합에, 요즘 충무로에 연기 좀 한다 싶은 명품 조연들은 거의 모아놓은(한국영화들을 좀 보아온 분들이라면 얼굴들 찾기가 재미가 쏠쏠할 거다. 심지어 안길강은 대사 한 마디 없다) 이 영화이고 보면, 거의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오랜만에 평론가도 관객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 영화가 구리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



- 2010년 11월, 서울극장.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3) 2010.10.20
옥희의 영화, 홍상수  (2) 2010.09.29
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4) 2010.09.18
: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Ending Credit | 2010. 10. 20. 20:09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
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

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 2010년 10월, 대한극장.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부당거래, 류승완  (0) 2010.11.09
옥희의 영화, 홍상수  (2) 2010.09.29
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4) 2010.09.18
탈주(Break Away), 이송희일  (0) 2010.09.08
:

옥희의 영화, 홍상수

Ending Credit | 2010. 9. 29. 16:39 | Posted by 맥거핀.


이 짧은 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옥희(정유미)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목소리를 덧붙인다. 나이든 남자를 보고서는 자기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그리고 젊은 남자를 보고는 언젠가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을 알았다고. 옥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어떤 무엇이 그녀에게 그것을 예감하게 했을까. 글쎄. 아마도 어떤 것을 가져다 붙인다해도 그것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옥희 자신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저 예감하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과 비슷한 하나의 형태를 우리는 때로 '우연'이라고도 부른다. 홍상수의 새 영화 <옥희의 영화>는 알려진대로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서 탄생되었다. 우연치 않게 폭설이 내린 사실은 영화의 한 이야기 '폭설후'가 되어 그대로 되살아났고, 이 영화의 세 주연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도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캐스팅되었다. 물론 사실 모든 영화들은 우연의 힘이 어느 정도는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연한 어떤 일로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홍상수의 이 영화는 그런 우연성의 힘이 어느 영화보다 크게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문성근의 경우에도 당일의 전화로 급하게 캐스팅이 되었다. 만약 문성근이 그날 어떤 다른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는 또 다른 결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주요 이야기를 당일에 작성하기로 유명하다. 우연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도가 튼 감독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그 한계에 가깝게 가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계. 우연이라는 것은 때로 그 한계를 절감케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연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애써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 그것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우연'이다. 영화 속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두번째 이야기 '키스 왕'에서 영화과 학생 진구(이선균)는 벤치에 놓인 우유곽을 보며, 치기가 살짝 섞인 생각을 한다.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하필이면 그것이 하필이면 그 시간에 하필이면 거기에 놓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이 거기에 그 시간에 놓인 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확실한 것 사이의 어떤 갭(gap). 그것에는 이유가 있으나, 우리는 그 이유를 어쨌든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한계를 절감하는 것.

이 영화를 본 며칠 후에 우연히 박성원의 단편소설 <하루>를 읽었다. 여러 사람들의 하루. 그들의 하루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여러 가지 일을 빚어낸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무엇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성원은 말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모두 알 수 없고, 세상은 여전히 그 나름의 메커니즘으로 삐그덕거리며 굴러간다. 이 진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말의 의미.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홍상수는 지금껏 여러 영화에서 말해왔다. 그런데 홍상수는 그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영화임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말한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절감은 홍상수의 말대로 여러 해석을 할 수가 있겠지만, 비슷하지만 결국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를 절감(節減)시킨다는 말로 들린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라는 특정한 영화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영화는 '옥희의 영화'의 속성을 공유한다. 모든 영화는 결국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홍상수가 결국 영화의 어떤 한계를 넌지시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우연이 빚어내는 한계와 영화가 자아내는 한계가 중첩하는 지점-. 그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하다. 더구나 그것을 이렇게 몇 마디의 글로 밝혀내는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글은 언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리고 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려는 몇몇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편 흥미로워 보였던 것은 이 영화를 다룬 몇몇 글들에서 이 영화를 어떤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공들인 리뷰 중의 하나인 <씨네 21>의 정한석의 글에는 재미있는 형태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고, 김혜리도 뭔가 그림을 삽입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스토리.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후', '옥희의 영화'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주문을 외울 날'을 '키스 왕'과 '폭설후'의 나중의 이야기로 보고, '옥희의 영화'를 극중 극의 형태로도 볼 수 있겠으나(이건 한편으로 '주문을 외울 날'이라는 흥미로운 제목과도 연관된다. '외운 날'이 아니라 '외울 날'이라는 미래형을 굳이 왜 썼을까), 그것에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점들이 존재한다. 아니 굳이 그것을 설명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폭설후'의 경우 그렇다면 이 내용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로지 영화가 스토리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거부하는 정성일의 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가지의 겹침. 우연의 한계. 영화의 한계. 그리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 그 한계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쓸쓸함은 영화의 겨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우연이 내포한 어떤 한계는 그러나 절망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후 몇몇 재미있는 글들을 읽었다. 개중에는 그런 글도 있었다. 이 영화는 급하게 찍은 티가 나며,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고. 글쎄, 그럴까. 우연히 우리 손에 카메라가 들린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우연은 우연 그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우연에는 직관이라는 것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이 <옥희의 영화>는 전적으로 우연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그저 우연 근처에 가깝게 가 있을 뿐이다. 그것에는 우연 외에 홍상수의 직관(直觀)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배우와 비슷한 스탭과 비슷한 시간으로 이런 내용을 찍는다 해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고, 불러일으키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그 누군가의 직관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을 아까는 '우연'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직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 직관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설명 없이 찾아오는 것이며,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홍상수는 그것을 영화 속 옥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옥희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며, 젊은 남자와는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그것은 그저 아는 것이다. 설명할 이유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옥희의 직관이다.

그리고 그런 옥희의 직관은 관객의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영화의 스토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떤 심상(心象)을 획득한다. 그 심상은 무엇으로 획득되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직관으로 부르고 싶다. 우리는 그 직관의 힘으로 우연에 맞선다. 아니 맞선다기 보다는 그 우연을 보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우연을 보충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한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도중 '우연히' 그런 말을 들었다. 행복(happiness)이라는 말의 어원은 Hap, 즉 '우연(행운)'이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찾아온 행복이 모두에게 반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이라는 행복은 물론 그것을 알아본 자에게만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알아보는 힘, 그것이 직관이다.


- 2010년 9월, CGV 대학로.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당거래, 류승완  (0) 2010.11.09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3) 2010.10.20
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4) 2010.09.18
탈주(Break Away), 이송희일  (0) 2010.09.08
이끼, 강우석  (2) 2010.08.04
:

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Ending Credit | 2010. 9. 18. 02:05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를 보았다. 김현석 감독은 야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늘 야구는 일종의 가림막에 불과했고,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의 어떤 사랑이야기, 혹은 일종의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 입은 남자들의 성장기'라고 부르고 싶다(물론 거의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성장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김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의 선비 호창(송강호)은 유일한 꿈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러던 그가, 야구를 만나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을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의 중심축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 <스카우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혹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켰던'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그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잊어버렸던, 혹은 애써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호창이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지만, 호창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대신 얻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영화 <시라노>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역할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이 맡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상처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의 '시라노'는 추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이 영화의 병훈은 그보다는 어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 여자 희중(이민정)을 놓쳐 버렸다. 그런 그에게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그 여자 희중과의 연애를 이루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병훈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그 여자 희중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짐짓 묻는 척을 한다. 글쎄.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대신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라노>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심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진심이라는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을 극의 후반 상용의 말들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고, 사랑하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시라노 에이전시'의 활동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영화의 제목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지만, 이들의 연애조작 사업은 사실 번번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연애조작은 결국 실패가 되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이름모를 커플의 연애조작 역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상용은 그들의 연애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박작가(박철민)가 그토록 싫어하던 애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한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다. 즉 이 영화에 의하면, 이들의 연애조작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진심이라는 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조금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병훈의 축이다. 젊은 병훈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고, 자신의 진심을 대면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나이든 병훈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마음이라는 녀석을, 혹은 진심이라는 녀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나 때로 그 마음은, 그 진심은 아마 무척이나 두루뭉술할 것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하나, 그것을 다른 형태로 애써 바꾸려 들지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 볼 것.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극 중의 병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지막 연애조작이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결국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혹은 그것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연애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연애조작들과는 달리, 이 연애조작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의 곁가지가 조금은 많아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타임이 필요이상으로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이 몇몇 장면들은 마지막까지 잘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기도 하다. 송새벽, 권해효, 박철민 등의 명품조연들이 벌이는 장면들은 거의 모두 잘라내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특히 권해효의 '후자'씬은 흐름상 거의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살려낼만 하다), 조금은 산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으며, 매끄럽고 무리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감독의 능력이었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생뚱맞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내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현석 감독은 꾸준히 안타를 생산해내는 타자다. 단, 장타력이 떨어지고, 개중에는 빚맞은 안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2루타가 될지도 모르겠다.




- 2010년 9월, CGV 왕십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올리버 스톤  (3) 2010.10.20
옥희의 영화, 홍상수  (2) 2010.09.29
탈주(Break Away), 이송희일  (0) 2010.09.08
이끼, 강우석  (2) 2010.08.04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3) 2010.07.15
:

탈주(Break Away), 이송희일

Ending Credit | 2010. 9. 8. 00:14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는 뚜렷한 몇 가지의 단점들이 있다. 이야기의 리듬이 일정치 않은 것도 그렇고, 주인공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서정적인 장면들이 빈번하고, 약간은 느닷없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도, 좋게 보면 이송희일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조금은 잉여의 장면들로 보인다. 인물들을 뒤에서 잡는 빈번한 시점숏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장점들도 있지만, 조금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글쎄.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몇 개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건드린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정말 어떤 영화들은 아주 촌스러운 화면들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뚜렷한 단점들이 엿보이지만, 기어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글쎄. 내가 군대에 대해 감사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어떤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 때문일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조직의 어떤 문제일까. 글쎄.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가끔 군대를 둘러싼 어이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광경을 본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 주장들을 펼치는 상당수의 남자들을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싹튼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철저하게 타의에 의해 군대라는 아주 어이없는, 비정상적인 조직을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들의 정신이 군대에 의해 망가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강제로 행해지는 아주 비이성적인, 잔인한 경험들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군대를 어떤 편법을 이용하여 가지 않는 연예인들에게 쏟아지는 지나치다 싶은 잔인한 비난들조차 때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이면에는 권력이나 금력의 문제, 이 사회의 계층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만만하고 간편하게 비난을 할 수 있는 계층이 연예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탈영을 감행한 세 청년도 그러하다. 이병 동민과 일병 재훈(이영훈), 그리고 상병 민재(진이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일면에도 아마 그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동민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재훈과 민재는 모두 가난한 청년들이다. 재훈은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가 군대에 왔고, 민재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기름밥을 먹다가 군대에 왔다. 그들의 탈영에는 각자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지만, 그들이 탈영한 이후 보여주는 분노들은 그 사연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일면에는 그러한 가난한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송희일 감독은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해 보고 싶은 것 같다. 다시 한 번 제목을 생각해보자. '탈영'이 아닌 '탈주', 그리고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박혀 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아'. 그들이 말하는 여기란 단지 군대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동민은 탈영하여 산 속을 맴돌면서 어차피 여기를 나가도 자신에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가정에 있는 아버지와 군대라는 곳에 있는 다른 아버지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최대한의 땅끝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너른 바다를 만나고, 힘없이 되뇌인다. 한국이 좁긴 좁네.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한민국은 거대한 병영 사회에 불과하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지옥이 되는 작은 병영 사회. 어디로 나갈 수 없이 3면이 바다로 막혀진, 숨막히고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거대한 감옥. 가난한 젊음들에게 출구란 있을까.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 세 청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을 돕는 소영(소유진)의 도움 없이는 아주 좁은 공간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돕는 소영 역시 비정규직인 가난한 또다른 청년에 불과할 뿐이다. 그 연대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는 아주 불안한 연대이다. 소영의 또다른 (비정규직)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군대와 경찰은 그들에게 소리친다. 영창 좀 갔다오면 끝날 일을 크게 만들지마,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마지막 기회를 줄께. 그러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없는 것은 소리치는 군대도, 그 소리를 듣는 그들도, 관객들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던 처음부터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강력하다는 것. 그들이 죽어도 며칠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강력함은 어쩌면 그들 목에서 빛나는 군번줄이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작 부분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들이 도망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그 군번줄을 계속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이 국가에 길들여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 어떤 희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재훈은 도망치다 어느 한 순간 군번줄을 던져 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이 재훈이 이곳에 대한 희망을 버린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잔혹하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잔혹한 결말이 상징한다. 최근에 이보다 더한 잔혹한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잔혹하게 피를 뿌려대는 것이 잔혹한 것만은 아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아마도 작심하고 이러한 결말을 만든 것 같다. 감독은 그만큼 이 사회에 대해 뿌리깊은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잔혹한 결말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텅빈 극장 안에서 엔딩크레딧을 지키며 앉아있을 수 있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 어디로도 탈주할 수 없기 때문에.



- 2010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희의 영화, 홍상수  (2) 2010.09.29
시라노;연애조작단, 김현석  (4) 2010.09.18
이끼, 강우석  (2) 2010.08.04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3) 2010.07.15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  (2) 2010.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