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퍼블릭 에너미, 마이클 만

Ending Credit | 2009. 8. 15. 01: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미리니름일 수 있습니다.)



몰락해 가고 있는 영웅을 바라 보는 것은 많이 마음 아픈 일이긴 하지만, 늘 흥미롭다.  그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파멸만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임에도, 그것을 향해 조금씩 돌진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과 함께 비장한 아름다움을 준다. 동료도 모두 잃고, 주위에서도 그를 버리고, 경찰이 마지막까지 그의 숨통을 죄어 올 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한 탕 크게 하여 여기를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일을 벌이기 직전, 몇 안 남은 동료가 그에게 묻는다. "넬슨이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급해하는 사람을 쓰지 않는 것, 그가 가진 철칙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넬슨'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만다. 이 때 존 딜린저(조니 뎁)는 단호하면서도 중간중간 살짝 주저하는 빛을 보인다. 물론 그는 빠른 속도로, 단호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눈은 중간중간 초점을 잃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철칙을 무너뜨린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그는 약간 후회하는 듯도 보이지만, 살아남은 동료들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탈출한다. 여기서의 조니 뎁의 연기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건,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존 딜린저가 파멸의 길로 조금씩 들어서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기 보다는, 그 파멸의 길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라고 말해야 할 터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탈출시켜 멋지게 은행을 터는 영화의 첫머리부터 그는 이미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존 딜린저의 애인 빌리(마리안 코티아르)는 존 딜린저에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고 말이다. 잡히거나 죽거나. 그러나 그는 코웃음친다. 경찰은 너무 멍청해서 나를 잡을 수 없어. 그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허세였다. 잡히고 나서 웃으며 인터뷰를 하며, 경찰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 또는 은행을 털며, 은행여직원을 인질로 잡아, 그녀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주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허세는 아마도, 불안의 산물일 것이다. 대부분 불안한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게 마련이다. 주가가 2000선에 곧 도달할거야...2000이 뭐야, 곧 3000까지도 갈 거라고...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내기해도 좋다.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주식에 투자한 그 많은 돈이 날라가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하고 말이다. 존 딜린저도 불안했을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같은 갱들의 도시 시카고, 이 시카고에서 멋지게 한 탕 해서 어디론가 뜰 수 있을까, 그 전에 잡히거나 죽거나, 역시 둘 중의 하나로 끝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호기를 부린다.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그의 허세가 점점 커지는 것은, 역으로 그를 둘러싼 불안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다. 당신의 옆자리에 혹시 존 딜린저가 앉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른쪽을 보시고, 이번에는 왼쪽을. 이런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광고가, 불켜진 극장에서 흘러나오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옆을 차례로 돌아볼 때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이 앞을 보고 있는 존 딜린저를 수많은 관객 한 가운데서 잡는 샷이나, 경찰서에 들어가 '존 딜린저 특별수사팀'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들어가, 야구경기에 관심이 몰린 틈을 타서 사무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지금 몇 대 몇이죠?"라고 묻는 존 딜린저를 뒷 모습으로 잡는 샷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저 순간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

마이클 만 감독의 몇몇 영화들, <히트>나 <콜래트럴>, 그리고 이번 영화 <퍼블릭 에너미> 같은 작품들을 보면 멋드러진 총격전 장면들과 더불어 위의 존 딜린저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온다. 내 생각에는, 그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해듯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불안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있다. 꼭 불안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드러나는 것이 캐릭터의 매력을 가중시킨다는 말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이클 만 감독의 역량이 출중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가 대체로 그런 것과 맞닿아 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드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일종의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약한 것에는 약하게, 강한 것에는 강하게 대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대체로 커다란 위험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주변에서는 점차 고립되고, 파멸은 거의 예정되어 있다. 이 거대한 자기 확신이 예정된 파멸로 달려가 그것에 부딪힐 때, 그 파장 속에서 어떤 것들이 드러나는가. 그것을 마이클 만은 조용히 잡아낼 줄 안다. 인물의 그림자에 난사된 총알들이 박히는 것으로, 혹은 경찰에게 잡혀가는 여자를 구하러 갈까말까 망설이는 아주 짧은 멈칫거림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왠지 마이클 만은 이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꺼이 다른 캐릭터를 희생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존 딜린저의 곁에는 여러 동료들이 따르지만, 이 중에 특별히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캐릭터는 없다. 그저 동료들은 존 딜린저의 곁에서 폼나게 있다가, 한 명씩 조용히 사라져갈 뿐이다. 존 딜린저의 애인인 빌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남자를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으로서만 말이다. 아마도, 이와 관련해서 가장 큰 희생자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른 한 축인 퍼비스 형사(크리스천 베일)일 것이다.퍼비스 형사는 전체적으로 존 딜린저의 가장 큰 적수이면서, 영화의 나머지 한 축으로 보이지만(혹은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별로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부분이 없다. 존 딜린저와의 몇 번의 맞대결에서는 약간은 머뭇거린다, 혹은 우왕좌왕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래서 그랬을까. 존 딜린저의 마지막 말을 여자에게 전하는 폼나는 역할도 그의 몫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크리스천 베일의 어떤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의 스포트라이트는 그가 아닌 히스 레저의 몫이었으며,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에서도 그는 주인공이면서도 그다지 주목받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무려 '존 코너'였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다른 하나의 장점은 그 캐릭터들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거리나 의상, 자동차, 극장과 같은 물질적인 재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서 존 딜린저와 같은 사악하지 않은 반 사회적 영웅에 열광하는 것, 혹은 경찰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즉 '퍼블릭 에너미'로 정하고, 그를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시작부에 경찰이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통해서 그를 잡을 것이라고 공표하지만, 경찰이 결국 활용하는 방식은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약을 투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하는 등의 결국 '그 방식'이었다.)이 어떤 사회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존 딜린저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혹은 은행은 털어도 은행 고객의 돈은 털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민중들은 응원했다? 글쎄. 은행 돈이라는 것도 결국 고객들의 돈이고, 그는 어쨌든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는 대공황 시기 사람들의 심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를 살펴보는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만은 그런 시대 속으로 우리를 성큼 들어서게 만든다. 꼭 실감나는 총격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이클 만은 총격전에 특화된 감독이긴 하지만 말이다.





- 2009년 8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프트(loft), 구로사와 기요시  (0) 2009.09.05
불신지옥, 이용주  (0) 2009.08.24
해운대, 윤제균  (0) 2009.08.11
플라스틱 시티, 유릭와이  (2) 2009.08.04
레인 (let it rain), 아네스 자우이  (2) 2009.07.23
:

해운대, 윤제균

Ending Credit | 2009. 8. 11. 02:3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렇게 소위 '대박이 나고' 있는 영화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많은 글들과 이야기들과 곁가지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왠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보고 난 이후에는 이전에 보았던 리뷰들에 나의 감상이 영향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몇몇 부분들에는 반박을 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CG의 어설픔이라든가, 배우들의 연기의 미숙함, 특히 박중훈 연기의 미숙함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 그렇다. 글쎄..개인적으로는 CG 부분은 생각보다 의외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재난영화에서 CG는 큰 부분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CG가 얼마나 정교하고 실감나게 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타이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설혹 약간 어설프게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핵심적인 포인트를 살짝 다른 곳에 돌릴 수 있게 함으로써, CG를 영화를 받쳐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영화 <해운대>의 CG는 그것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적절히 잘 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중훈의 연기는...여러 부분에서 약간 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의 변명을 해줄 수는 있다. 먼저 첫째는, 사투리 연기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 강한 사투리의 사용은 그것의 적절한 사용만으로도 가끔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이러한 이점을 활용할 수 없는 몇몇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둘째는, 그의 이 영화에서의 역할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점. 더구나 그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처럼 몇 분간의 장황한 설명을 해야하는 방식이었다면, 좋은 연기를 보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쓰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그 몇 분간의 씬이 과연 필요한 씬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사실 하려던 이야기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 하다. 하려던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의문이었다. 먼저 자잘한 의문부터. 둘로 딱 나눠져 있는 이 영화의 이상한 구조부터 말이다. 이 영화는 관객 누구나가 느끼듯이, 딱 두 개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한 구조로 되어있다. 해운대 사람들의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이야기인 전편과 쓰나미가 몰아닥친 후편의 이야기. 물론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가 나뉘어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들도 거개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처음의 웃음 코드와 나중에 감동 코드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코드'만이 그렇다. 이 영화 <해운대>는 갈매기가 차창에 머리를 박던 그 순간부터 갑자기 '페이스 오프'한다. 그리고 몰아닥친 쓰나미 속에 앞의 모든 이야기와 캐릭터의 특징들은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영화의 이런 어색한 전후반의 연결은, 다른 영화들에서 제기될 틈이 없는 질문을 굳이 하게끔 만든다. 이것이 한 영화로 굳이 묶여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실 이 영화가 재난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재난이 초반부에 몰아닥친다. 그리고 재난이 일어난 이후에 그 중심 이야기는 그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투쟁,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애, 서로가 살겠다고 벌이는 싸움, 그리고 결국 그것에의 극복이 주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러닝타임 반이 지나가도록 재난을 숨겨놓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여러 갈등을 최대한 끌어올려놓고 쓰나미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재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나약함, 그것을 넘어선 인간목숨의 중요함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애의 고결함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나 나약함 같은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고, 쓰나미가 몰아닥치자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위대한 인간애를 발휘하고 모든 갈등은 그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난 영화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여러 다른 재난 영화의 클리셰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

아마도 그것을 여는 하나의 실마리가 윤제균 감독이 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윤제균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연의 중요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을 만들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죽일 듯이 싫어한 사람도 자기를 구해줄 수 있고, 또 싫어한 사람을 자신이 구할 수도 있으니까. -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그래서 김밥할머니는 김휘(박중훈)의 아이를 헬기에서 기꺼이 받아주고, 변기를 뚫어줬던 사내는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엄정화)를 구하고, 작은아버지(송재호)는 만식(설경구)를 구하고, 형식(이민기)은 기꺼이 자일을 끊고 떨어지는 것이다. 즉 재난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나약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애와 인연을 강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라고 했을 때 여러 갈등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전에 이미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몰아닥친 쓰나미 속에서 고귀한 휴머니즘으로 상쇄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의 일방적인 강조는 가끔 지나쳐보이기도 하며,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텔 옥상에서 헬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2차 쓰나미가 몰아닥치는 장면. 이 장면에서 노약자들이 올라타 있는 헬기구조대에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을 군인들이 통제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실제라면 가능할까. 2차 쓰나미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지금 저 헬기에 올라타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할 때, 군인들이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군인들마저도 살기 위해 매달리고 따라서 헬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실에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이 비현실적인 장면을 고수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합동분향 장면에서 유독 죽은 구조대원들의 사진만 집중적으로 비춰주는 것, 그리고 구조대원들의 고귀한 희생만 강조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다른 것에 있다. 이 휴머니즘의 강조라는 것이 진정 이 영화의 주제인지,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조금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몇몇 시퀀스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영화의 감초 캐릭터인 동춘(김인권)이 떨어지는 컨테이너 박스들을 피하는 장면. 이 장면은 마치 게임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처리되어 있으며, 뭔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팬티를 반쯤 내리고 있는 여자가 떨어지는 물에 놀라는 장면들 같은 것. 물론 몰아닥치는 쓰나미의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삶과 죽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왜 많고많은 삶과 죽음의 엇갈림 속에서 굳이 그러한 장면을 선택하여 보여줬을까. 한 인간의 생과 사가 오가는 이러한 장면들, 이러한 내용들이 왠지 하나의 유희로서 혹은 오락으로서 제공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이러한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는 감독의 인터뷰로도 뒷받침된다.


- 쓰나미가 진행된 뒤에 벌어지는 2차적인 재난에 대한 아이디어가 관건이었겠다.
= 맞다. 변압기 시퀀스는 장마 때 감전사로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사실에 기인한 거다. 호텔방에서 물이 빠지면서 아이가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도 재난영화에서 못 본 것 같아서 넣었다. 컨테이너 장면은 사실 더 재밌게 갔다. 컨테이너가 박히는 건물이 호텔이다. 그때 안에서 반라의 남녀가 피하다가 박스와 바짝 붙게 되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뭔가 해서 고개를 내밀 때, 두 번째 콘테이너 박스가 날아와 변을 당하는 거지. 다 찍었는데, 너무 장난스럽다고 해서 뺐다.

- 사실 아쿠아리움 장면을 보면서 또 다른 시퀀스가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수족관에서 빠져나온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지….
= 그 장면도 있었다. 실제 찍었다. 화장실에 가는 희미의 친구가 물을 헤치고 나오는데, 상어한테 물리는 장면이다. 역시 너무 웃기다고 해서 뺐다. 그런가 하면 건물 앞에 빽빽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면도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삭제했다. 전체적으로 10분 정도를 자른 것 같다. 다 코믹스러운 장면이다. 재난의 긴장이 몰아쳐야 하는데,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아서…. (웃음) 나중에 DVD에는 다 넣을 거다.

(<씨네 21 714호> '윤제균 인터뷰' 중 부분 발췌)




과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인간애, 인연..그런걸까. 잘 모르겠다. 위의 몇 가지 장면들을 보면서,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자꾸 아리송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을 장난스럽게 묘사하는 것과 과도한 휴머니즘의 강조. 휴머니즘의 강조는 무엇을 덮기 위한 것일까. 혹은 무엇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일까. 자꾸만 아리송해지는 그것의 상관관계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상업영화의 최대치이자, 그것의 한계에 불과하다고만 말해야하는 걸까.




- 2009년 8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p.s.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동춘(김인권)이 어머니의 사진을 붙잡고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의 옆에 놓인 '용감한 시민상'이 과연 무엇을 위한 용감한 시민이었냐고 묻고 있는 그 장면이 말이다.

:

플라스틱 시티, 유릭와이

Ending Credit | 2009. 8. 4. 01:54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습니다만...)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영화구나. 아니, 꼭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 물어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라는 의미다. 영화를 보고 와서 찾아본 몇 개의 리뷰는 대체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특유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이국적이면서 무거운, 그러면서도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어떤 것. 강렬한 색의 대비와 독특한 화면구성. 매우 불친절하고 난해한 내러티브. 오다기리 죠와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 그 뭐 그런 것들. 그러니까, 다시 정확히 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러티브가 생략된, 이미지와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이러한 영화는 아무리 줄거리를 적어내려간다고 한들,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부터 줄거리는 별로 기억나지 않고, 파편화된 몇몇의 이미지만 머리 속에서 맴돈다.
...................................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머리에 남은 것은 영화 마지막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문구이다. 바로 이 문구이다.

一物一數 作一恒河 一恒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일물일수 작일항하 일항하사 일사일계 일계지내 일진일겁 일겁지내
所積塵數 盡充爲劫 
소적진수 진충위겁 

(세상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영화에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갔고, 영화 안에 이 말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나오지 않는터라, 그 의미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불교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줄여서 <지장경>) 제1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에서 나온 말로서, 문수사리보살이 지장보살이 어떻게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였는지(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묻자, 하나의 비유로서 이야기한 것이다. 즉, 위의 시간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온 겁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왠지 이 자막의 말은 영화 속 유다(황추생)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하다는 것, 즉 어떤 고리를, 어떤 업을 끊어내는 것은 매우 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장경>에서 담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법(因果法), 선업(善業), 윤회 등을 이야기하며, 하나의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금까지 어떠한 생을 살아왔는가에 의해서 다음의 생이 결정되며, 본인이 쌓은 업은 본인이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거의 같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유다는 브라질 국경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일본인 가족이 나타났고, 그 가족의 아버지가 총에 맞는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소년 키린(오다기리 죠)을 만났다. 그리고 백호(白虎)가 나타났고,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브라질 국경지역으로 이야기는 돌아왔고, 유다와 키린은 다시 백호를 보고, 유다는 키린의 손에 들린 칼을 통해서 자살하고, 다시 그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유다는 이 질긴 고리를, 질긴 업을 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곳에서 키린의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키린의 아버지가 되어 여러 악행(업)을 저지르고, 키린마저도 그 악행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지만, 결국 키린의 손에 죽는 이 아이러니를 말이다. 이 윤회를 영화는 하나의 형식으로, 그리고 몇 개의 상징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많은 의문은 섞여 있다. 그것으로 이들의 업은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왜 다시 이곳(브라질 국경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어디이기에 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플라스틱 시티'이다. 그러고보면, 이 제목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플라스틱 시티라는 곳. 플라스틱이 상징하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소성(可塑性)의 공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 그러나 이 가소성의 공간이라는 것은, 다를 말로 하면, 거짓의 공간, 가짜의 공간이다. 플라스틱이 가지고 있는 가짜라는 본연의 속성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 플라스틱 시티 안에서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으로도 명백해진다.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이란, 가짜의 물건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아주 비슷한 가짜를 말이다. 더구나 키린은 영화 속에서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확인해 주기도 한다. 자신은 진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가짜가 진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그러나 말이다. 과연 그 돈은 진짜일까. 어쩌면 그 돈 마저도 가짜인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여기는 플라스틱 시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짜로 이루어진 곳. 진짜는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 어쩌면 그곳은 지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간으로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 마법의 정글에서 결국 얽히고, 맺힌 업의 끈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백호를 보았고, 업을 풀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다는 키린에게 말한다. 너의 삶은 이제 시작이야, 너에게 시간은 많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시간, 겁의 시간, 항하사의 시간, 무량대수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업은, 그 운명은 사라질 수 있을까. 키린의 뒷모습에서,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서, 부서지는 강렬한 파도에서 우리는 다시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 강물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라간다해도, 파도의 파고를 모두 하나하나 세어 나간다 해도...이 마지막은 꽤나 강렬하다.




- 2009년 7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

레인 (let it rain), 아네스 자우이

Ending Credit | 2009. 7. 23.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

'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 2009년 7월, 광화문 씨네큐브.
: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이사벨 코이셋

Ending Credit | 2009. 7. 9. 22:46 | Posted by 맥거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

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 2009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스페인 영화제)

 
:



촌스러운 제목에 촌스러운 포스터에 '<시티 오브 갓><눈먼 자들의 도시>제작진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는 없어 보이는 문구. 감독의 명성을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걸 수도 없고, 없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들먹이며 숫자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홍보 문구를 보며 썩 끌리지는 않는 영화였다. 단지 그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씨네 21>의 'Must See' 코너에 이 영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후였다. must라..must. 글쎄.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꼭..반드시 보라'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글쎄, 뭐 봐도 괜찮은 영화에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도. 무엇보다 영화란 것을 '꼭 봐야할 어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봐야할 어떤 것이란 대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때려잡는 영상, 혹은 어느날 새벽 어느 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는 영상이 될지언정,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여튼 간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잡지를 줄곧 보면서도 그 must가 꽤나 놀랍고 신기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Must See'라는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의미일까, 혹은 영화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시 한 번 뭐 어쨌든 간에. 영화는 귀엽고도 둥글둥글하며, 동시에 슬프면서, 꽤나 웃기는 영화였다. 1988년 브라질과 맞닿은 우루과이의 국경마을 멜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기로 결정되면서 작은 마을은 들끓는다. 교황님을 돈벌이로 이용해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가진 것을 팔아, 장사를 해 떼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날 엄청난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밀수로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는 이 남자 비토(세자르 트론코소)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난 머리가 참 좋아...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생각한다. 몰려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싸기도 하겠지. 그래, 유료 화장실을 차리는 거야. 그래서 아내와 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고, 집도 고치고, 나는 오토바이를 사는 거지..오토바이!

기발한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제로 비토처럼 유료 화장실을 차리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마을은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꿈으로 부풀었고,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꿈을 부추기고, 부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일확천금- 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되는 돈일 테지만 -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끝은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하기 어렵다면 다음의 영화의 홍보문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화장실>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적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간 후일 것이다. 이 아버지 비토는 신성한 교황의 말씀과 그 교황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고작 황금색의 똥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일종의 불경을 저질렀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양심과 화해하고, 하나의 작은 악을 뿌리침으로써 선의 세계에 한 발짝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실비아는 자신이 꿈꾸던 저널리스트라는 것이 어떤 허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황과 대통령과 그들을 괴롭히던 기동순찰대나 국경수비대가 삼위일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화롭고 우습고, 궁상맞게 살아갈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에 또다른 교황이나 혹은 록스타나 혹은 미국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우리들은 그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다가, 마지막 자막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고 안쓰럽게 웃어제끼면 될 것이다. 아..저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더 안쓰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사실 영화를 보고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오는 나쁜 넘들이 요즘 우리 주위에 얼쩡대는 나쁜 넘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기 나오는 나쁜 넘들. 나쁘지만, 참 인간적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대놓고 나쁘기 때문이다. 고작 밀무역하는 것 좀 잡아냈다고(사실 말이 밀무역이지, 조금은 한심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딸을 바치라고 하지 않나...자기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다고 해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나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 영화 속 세상이 법보다는 폭력이 가까운 사회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 좀 덜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일종의 구멍들이 많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동시에, 그 구멍 속에서 힘없는 서민들도 그 구멍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달러의 뇌물, 혹은 위스키 한 병으로서도 뇌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 뇌물을 이용하여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지배체제가 그 지배체제의 기능들을 폭력이나 힘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춘 법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몇 달러의 뇌물은 이제 당연히 통하지 않게 된 사회, 그러나 거대한 재벌의 거대한 돈이나 이상하게 구조화된 법을 내세운 권력에는 너무나도 순응하고, 누구도 그들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제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점점 법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지배될 때, 그 지배는 얼마나 무섭고 거대하며, 페쇄되어 있으며, 차가운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영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모든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교황과 정부와, 그들이 지배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이 믿어 주기를 원하는 모습만을 앵무새처럼 떠드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며 비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TV에 병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욕하는 정치인들, 이들은 1988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을까. 우리에게도 거대한 힘과 투명한 폭력은 가까이 있는 것일까. 극장에 깔린 '대한 늬우스'들이 그런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하며,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고, 그 뉴타운 공약들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후에 무엇을 보게 될까.

사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작은 힘들이 희망이다.




- 2009년 7월, 하이퍼텍 나다
:

반두비(Bandhobi), 신동일

Ending Credit | 2009. 6. 24. 16:59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선택이란, 이런 이야기를 별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많은 문제들, 그리고 여러 생각거리들이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에 대해서 깊숙하게 말하기는 다들 꺼려한다. 아마도 어떤 문제가 어떤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그 문제는 그만큼 곪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온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에게 어떤 지점에서의 작은 불편함을 안겨 준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 혹은 조금씩 썩어들어가고 있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으신 많은 분들은, 이 영화는 또 어떤 우리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영화로구나, 또는 괜히 무겁기나 한 영화로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무겁지가 않다.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예상외로 유쾌하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의 상당히 영리한 점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대로,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과 여고생 민서(백진희- 여담이지만 원더걸스 소희 양을 닮았다. 목소리까지도.)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물음표대로, 여기에는 어떤 물음이 따른다.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혹은 극중 자신들이 표현한대로 '반두비(방글라데시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라고 부를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뭐 어찌되었던 간에,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관계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중첩된 여러가지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여고생과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나이, 신분, 계급, 문화, 인종 등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극중 카림은 본국에서 결혼까지 한 상태이다. 이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도박이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관객은 이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어떤 상당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가 현실의 하나의 반영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현실에의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영화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현실, 혹은 반(反)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상당히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감독은 아마도 두 가지의 안전 장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이 영화의 영리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먼저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영화가 그럼에도, 계속 유쾌하고 가벼운 무게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들 두 사람의 관계를 심각하거나, 혹은 진지한 시선으로만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가볍고, 유쾌한 유머들을 지속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이것이 어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님을 상기시키려고 한다(엄마의 남자친구는 거의 웃기기 위해서 나온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가 일종의 에피소드 중심임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너무 심각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하고 유쾌하게 봉합된다. 물론 뒤에서 좀 더 말하겠지만, 이는 또 어떤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극중 여고생 민서의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는 일부러 '여고생'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거의 여고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외모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는 행동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린 행동과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행동이 결합된, 상당히 다른 캐릭터이다. 이 '다른 캐릭터'라는 것은 이 영화의 '위험한 부분'을 상당히 중화시키는 중요한 안전 장치이다. 왜냐하면, 민서가 보통의 여고생을 충실히 반영하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관객의 불편함과 비현실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대로 이주노동자 카림과 여고생 민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법 없이도 살듯이 보이는 착한 청년 카림과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소녀라고 볼 수 있는 민서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 이 영화의 약간 기이하고도 영리한 점이 드러난다. 역으로 생각해보라. 만약 이 둘의 성격을 뒤집는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아마도 이 영화는 관객의 어떤 불편한 점을 더욱 자극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관객은 이 관계를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즉 여고생 민서에게 이런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영화는 어떤 안전 장치를 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여기에서 야기되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하나는, 여고생 민서가 이러한 캐릭터가 됨으로써 이것이 민서만의 어떤 특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래 저런 여고생이니까..'라고 생각할 때, 이 말은 동시에 긍정적인 느낌도, 부정적인 느낌도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관계에 어떤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여고생 캐릭터를 부여한 점은 '위험한 선택을 중화시키기 위한 더욱 큰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좋은 친구 '반두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할 것인가. 여고생 민서가 아닌 모두가 반두비가 되는 것이 쉬운 이야기일까. 이 영화는 그런 것들까지 반영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여기에서 생각은 전진하지 못하고, 물음만 맴돈다.
..................................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는 일종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는 아마도 감독의 일종의 고육지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 중심이라는 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까지 흐트려버린다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감정선은 물론 카림과 민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둘의 감정은 사실 상당히 모호해보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이런 감정까지 갖게 되었는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초반의 한 두개의 에피소드가 흐른 뒤에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까지 너무나도 쉽게 도달한다. 이를 카림과 민서라는 두 캐릭터의 어떤 특수성에만 기대어 설명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또한 이 영화의 결말 역시도 조금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이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까지 도달한 것일까. 왠지 이것은 감독의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연상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던 시점에 모호하면서도 약간은 뜬금없는 마무리가 등장했다. 마치 일종의 데우스 마키나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 <반두비>의 마무리는 그와 비슷하다. 이를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감독의 노력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직접적으로 하려 한다. 사실 간단히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까지 포함하면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계, 그에서 파생되는 어떤 문화적, 인종적, 성(性)적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계급적인 관계, 백인과 그 밖의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중성, 이주노동자들의 임금 문제와 관리 문제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 형태의 이야기, 미성년자의 성과 관련된 이야기, 외국어 교육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하려하기 보다는 몇 개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어쩌면 그보다는 두 사람의 감정선에 더 주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백인 영어강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이야기이는 하나, 이 영화에서는 사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을 통하여 가끔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하려 든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와 같은 대사가 나올 때, 관객의 실소가 터지는 것은 이러한 감독의 계몽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결과라 해야할 것이다.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그러더니, 어쩌면 감독은 내용이 중요하지, 그것을 어떠한 형식으로 담는가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계몽성과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는 몇몇 필요 이상의 장면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MB를 희화화하여 다루는 몇 장면들이나, 편의점에서 아저씨가 뜬금없이 뉴타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민서가 사장 집에서 신문을 보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글쎄. 이 장면들이 꼭 필요할까. 물론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치 않은 이러한 장면들이 어떤 뉘앙스를 전달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단순한 비판이나, 희화화로 그친다는 점에서 왠지 이것은 안 나오느니만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더구나 혹 이런 몇 장면으로 이 영화를 정작 보여줄 필요가 있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아님 말구), 여러가지로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영화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외국인 불법체류와 관련된 문제들, 혹은 카림이 불법체류자가 된 후 공장에서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는 장면들 같은 부분들을 더욱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

어쨌든 간에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도 할 뿐더러, 지나치게 용감함으로써 귀여운 면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하고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 2009년 6월, 중앙시네마.
:

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Ending Credit | 2009. 6. 19. 00:31 | Posted by 맥거핀.



사실 샘 레이미 감독들의 전작을 거의 못 봤다. 아마도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는 그의 유명한 전작들, 그러니까 <이블 데드> 시리즈라든가,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블 데드> 시리즈 때는 영화를, 더구나 그런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때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꽤나 어릴 때라 보지 못했고,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워낙 '~맨' 시리즈들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보지 않았다. 그나마 본 것은 그가 기획에 참여한 <그루지> 시리즈지만, 그 때는 원작인 <주온>을 보고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하던 터라, 그 영화의 리메이크 작인 <그루지> 시리즈들을 씹기에 바빴을 뿐이다. 아..할리우드는 또 이 무서운 공포 영화를 이렇게 꼬아 비틀어 버리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니까 다시 조금은 알 것 같다. 샘 레이미와 <주온>은 엄청나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주온>을 비롯하여 한 때 유행했던 일본산 공포물들은 뭐랄까,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뭔가 어둡고 무거운 것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주온에서 출몰하는 토시오를 비롯한 혼령들의 그 원한 같은 것들 말이다. 한 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링> 시리즈라든가, <주온>이나 <검은 물밑에서>와 같은 시미즈 다카시, 나카다 히데오 등의 영화들을 보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들을 어딘가로 같이 데려가려 하는 혼령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거나, 주위의 따돌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받은, 사실은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여기에는 유머는 없다. 단지 엄숙한 비장미와 감추고 싶은 비밀, 몸서리쳐지토록 슬픈 이야기들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공포영화의 계보도를 그린다면 그런 일본산 공포영화들과 상당히 먼 지점에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은 위치하게 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묘한 밝음이 있다. 또한 상당한 유머가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유령이나, 악귀가 나온다. 그러나 이 유령이나 악귀는 어딘지 모르게 밝다. 예를 들어 일본산 공포영화들의 악귀들이 아주 깜깜한 밤에, 엘리베이터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 혹은 아주 깊은 오래된 우물 속에서 슬며시, 아주 조심스럽게 나타난다면, 이 영화의 악귀는 밝은 대낮에, 낄낄 웃어가면서 쩍 하고 나타나는 식이다. 물론 상당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공포물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스크림> 시리즈도 사실 얼마나 은근히 밝고 코믹적인가.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뛰노는 청춘물 같은 분위기에,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코믹한 대사들과 상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이라니.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스크림> 시리즈와도 다르다. <스크림>이 밝은 웃음이라면, 이 영화의 웃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데가 있다. 아마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샘 레이미 본인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미리니름이 시작됩니다)

이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유머들은 영화 곳곳에서 은근히 빛난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일단 첫번째, 이 여자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이 혹염소 악귀(물론 여기서부터 유머다)에 시달리게 되는 이유부터 홀딱 깬다. 혹 일본산 공포영화였으면, 어린시절의 학대 혹은 주위의 왕따 같은 무거운 얘기들이 들어갔을 거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노파에게 저주를 받게 되는 이유는 너무 현실적이라 픽 웃음이 난다. 바로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이 노파의 대출 상환 기한 연장을 거부했던 것. 그후에도 이 현실성은 악귀에게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 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계속 나타나며, 하나의 유머 코드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나중 크리스틴과 만나게 되는 영매는 예전 다른 영혼을 흑염소 악귀에게 빼앗긴 사연을 처음에 보여주며 나름 비장하게 등장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만 달러라는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어처구니 없게도 꽤나 잘나가는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은 그 만 달러도 구하지 못해, 전당포에 가재도구를 넘기며 받은 부족한 돈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스크림이나 꾸역꾸역 먹고 있다(전직 뚱녀였던 크리스틴은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극복해왔던 것). 아니,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데,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해야지, 지금 아이스크림이 넘어가니. 하. 

(미리니름이 강해집니다)


유머는 계속되니, 영화의 처음에 '악귀에게 복수할거야'를 외치며, 비장하게 등장한 이 영매는 어처구니 없게도 허망하게 죽어버리고(그것도 일종의 심장마비인 듯 하다), 그 영매를 소개해준 심령술사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영매는 악귀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사실은 그 저주받은 물건을 다른사람 주면 되는 방법이 있었노라고 뒤늦게야 고백한다.(하..고객 데리고 장난하니?) 옳거니, 그럼 되었구나, 그 물건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 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은 내가 <링>에 너무 빠진 까닭.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산 공포물이 아니고, 그런 윤리적인 문제를 슬며시 제기할 만한 심각한 영화가 아니다. 이건 그냥 샘 레이미의 유머 공포물이다. 물론 이후에도 이 유머는 여전히 계속되니, 공동묘지에서 하필이면 십자가에 머리를 맞고,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아마도 그 정점이라 해야할 것이다.  
............................................

아니, 나는 이 영화를 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거나, 무섭지는 않고 웃기기만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샘 레이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아주 약한 공포와 아주 약한 유머, 그리고 그 이후에 약간은 센 공포와 조금은 더 센 유머, 그리고 마지막에는 커다란 공포와 그 이후에 터지는 허탈한 유머를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샘 레이미의 작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어느정도 꽤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씨네 21>에서도 지적했던 이 영화의 리듬, 그 리듬의 훌륭함인지도 모른다. 관객을 쥐었다가 놨다가, 다시 조금 쥐었다가, 놨다가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소리와 장면전환으로 리듬을 부여하는 것 말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샘 레이미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뭐야 괜히 소리로 놀래키기나 하고, 소리없으면 하나도 안 무섭겠네."라고 푸념하는 것은 소리를 그만큼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는 은근히 재미있다. 그리고 꽤나 무섭고, 꽤나 웃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기분이 찜찜하다거나 이상야릇하거나, 무겁게 만들지 않고(사실 나는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 그저 사우나에서 땀 뺀 기분으로 상쾌하게 나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 2009년 6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p.s.
며칠 전에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자의 찌질함에 대해 썼었는데, 거기에 하나의 경우를 추가해야 할 듯하다. 바로 남자 둘이서 공포영화 보면서 조잘조잘 떠드는 것. 내 옆자리에 한 칸 띄어 앉았던 어떤 두 녀석 이야기다. 나는 니들이 왜 떠드는지 잘 알지. 입 꼭 다물고 보면 너무 무서워서잖아. 물론 혼자서 보러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그런데 나가면서 "별로 무섭지도 않네."하고 허세는 왜 부리실까. 에라 이넘들아. 아까 영화관에서 니들이 양 주먹 꼭 쥐고, 팔걸이 움켜쥐는 팔에 힘줄 나오는 거 다 봤어요.
: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Ending Credit | 2009. 6. 9. 23:42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에는 명백하게도 그 뒷부분이 숨어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을 하세요?) 그래서 이 말은 영화 속 고순(고현정)의 대사와 사실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라고 했던 그 대사 말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한다....간단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려면, 우리 자신이 어느만큼 아는지를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매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자주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잘 아는 것들이라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은 대체로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기준에 따르게 된다. 어떤 새로운 것, 혹은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을 때, 과거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때 이렇게 말한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거 본 적 있어." 그것은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즉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반복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슷하다'라는 것에 있다. 즉 비슷한 것이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상황이란 실험실이 아닌, 실제의 경우에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로 이 반복은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예전의 어떤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는 않은 상황. 이 상황에서 과거 행동의 반복은 성공할 때도 있으나, 실패할 때도 많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기는 왜 나서. 

그래서 이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제,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는 그간 감독의 전작들이 가진 공통의 형식적 특징, '반복과 차이'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즉 주인공에게 어떤 상황을 반복해서 만나게 하며, 그 반복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비슷한, 그러나 또 약간은 다른 행동을 살펴보면서, 소위 '인간성'을 탐구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전작 <극장전>이나 <생활의 발견>과 유사하게,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1, 2부로 나뉘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작들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주인공은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사태와 유사한 사람에 직면하며, 비슷한 패턴으로, 그러나 또 동시에 약간은 다른 패턴으로 행동한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영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진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은 이 영화는 왠지 주인공들에게만 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를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관객들에게도 '너는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사실 니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지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의 상당수의 사건들이 상당히 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사건인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이 제천에서 후배 부부 부상용(공형진)과 유신(정유미)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만 해도 그러하다. 과연, 구경남은 왜 부상용에게 그렇게 인간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거기서 도망쳐야 했을까. 과연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길래 말이다. 이는 비단 이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경우, 예를 들어 제천에서 공현희(엄지원)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며, 구경남에게 화를 내는 장면. 과연 실제로 이 사건은 일어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도 의심스럽다. 더구나 공현희 자신도 본인이 술에 매우 취했었다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일은 이 영화에서 비일비재하다. 또다른 경우로 구경남은 아침에 여배우가 흥행감독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것이 구경남이 생각하는 그런 일일까.  

이 영화에는 이러한 이른바 '모호한 상황과 모호한 사건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구경하는 남자인 구경남은, 아니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판단은 따라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당신은 어느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말이 뒤따를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 마디 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다. 이번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의 숨겨진 뒷부분인 (왜 아는 척을 하세요?)에 살짝 주목해서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상 그렇듯이 '찌질남'이 등장한다. 물론 '찌질녀'도 나온다. 그러나 대체로 이 '찌질남'들의 포쓰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찌질녀'들은 묻히는 경우가 많다. 이 찌질남들은 왜 이렇게도 찌질해 보이는 걸까. 글쎄. 내 생각에는 그 포인트가 이 '아는 척'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척'에 있다. 사람이 가장 찌질해 보일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무언가 '척'을 하고자 할 때, 그러나 이 '척'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그 의도가 빤히 보일 때일 것이다. 이 '척'은 '아는 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센 척, 고상한 척, 깨끗한 척, 배려심 많은 척, 여자 안 밝히는 척, 모르는 척, 안 졸리는 척, 재미있는 척....여기 영화를 통한 몇 개의 경우를 보자.

[경우 1] 센 척

제주에서 선배(유준상)의 학생들과 만난 구경남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학생 하나가 다가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구경남은 자유가 어떻고 하는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이 학생은 그에게 팔씨름을 청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센 척).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경남이 양천수에게도 나중에 이 팔씨름을 청하는 것을 그대로 써먹는다는 점이다. 양천수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양천수의 성 기능을 운운하는 것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려 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경쟁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를 다른 방식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장면.

[경우 2] 고상한 척 또는 여자 안 밝히는 척

제주에서 만난 구경남의 선배(유준상)는 밤의 술자리에서 여학생과 양천수와의 어떤 불확실한 관계가 일어난(났다고 추측되는) 다음날, 구경남에게 전화로 그 여학생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는 그 여학생의 평소의 부도덕한 행실을 말하며 선배를 걱정하는 방식이지만, 아마도 이의 내면에는 자신은 왜 그 여학생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구경남은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으로 대응하지만, 사실 이에도 구경남 역시 그 여학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구경남이 그 전날 술자리에서 떠나온 방식은 그 전 제천의 술자리에서 흥행감독이 사용한 방식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잘께.")

[경우 3] 깨끗한 척

제주에서 조씨(하정우)는 구경남과 고순의 관계를 적발한 후, 양천수에게 전화로 울면서 말한다. 더럽습니다, 억울합니다...글쎄. 더러운 건 그렇다치고, 억울하다는 것은 도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는 예술계의 위대한 선배에 대한 애정심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나, 아마도 그보다는 조씨의 욕망과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씨는 아마도 고순에 대한 어떤 욕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혹은 권위에 짓눌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고순은 저렇게 처음 만난 남자와도 자는 그런 여자였다니(조씨는 구경남과 고순의 예전의 관계를 모르므로). 지금까지 괜히 참고 살아왔지 않은가...나도 한 번 자달라고 할 것을, 그깟 선배가 뭐라고. 혹 이런 억울함은 아니었는지.
..........................................................

어떤가. 위의 3 경우 모두 참 찌질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척' 하지 말자. 그게 조금이나마 덜 찌질해 보이는 길이다. (왜 '덜' 찌질해 보이는 거냐고?  아예 찌질하지 않는 법은 없냐고? 어차피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찌질해 보이기 마련이다.)





- 2009년 6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McG

Ending Credit | 2009. 6. 6. 01:45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절대 있음)





시작부터 어쩔 수 없이 니름질을 상당히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미리 내용을 알고 보았을 때의 느낄 수 있는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허나,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다른 재미'를 별로 원하지 않을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되도록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영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T4로 지칭)'을 비롯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는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그러하고, 각 편의 이야기를 따로 떼놓고 보아도, 각각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결정론적 세계관, 즉 '이미 정해진 미래(혹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 3'의 경우에도 결국 존 코너는 스카이넷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 못한다. 존 코너는 마지막에야 벙커 안에서 깨닫는다. 터미네이터의 임무는 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는 점을. 전쟁을 막는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영화 T4는 어떠한가. T4에서는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가 아니라 마커스(샘 워싱턴)가 마지막에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그가 카일 리스를 만나고, 저항군 본부에 찾아가며, 탈출하고, 존 코너를 스카이넷 본부에 오도록 만드는 이 모든 것이 사실 이미 스카이넷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점, 그는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침투형 로봇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대로 안 된다면, 그건 일종의 프로그래밍 오류인 셈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의 반대편에 존 코너를 비롯한 저항군 세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존 코너와 저항군 세력은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의 존 코너의 마지막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설명해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 중간에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예를 들어 존 코너가 다른 저항군 세력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명령에 불복종하라는 것, 우리가 정해진 명령에만 무조건 따른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것 말이다. 존 코너의 이 말들은 비정결론적인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 그것은 기계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보일 때는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일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 실수가 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는 거야, 거참 얼마나 인간적이니.

그러나 이 존 코너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점이 있다. 그것이 내가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한 이유다. 시리즈 전체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존 코너를 살리려고 하는 인간들과 죽이려고 하는 기계들간의 대결이다. 그래서 기계들은 존 코너를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어머니 새라 코너를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그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새라 코너와 만나기 이전에 죽이려고 하며, 어린 존 코너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서 2018년 현재의 존 코너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을 태어나도록 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 새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내야 한다[각주:1]. 이렇게 보면, 앞의 이야기들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기계들은 현재의 존 코너가 있는 이 저항군의 세력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뒤바꾸어야 하며, 존 코너는 결정되어 있는 과거를 확고히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카일 리스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새라 코너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과거, 결정되어 있는 이 과거가 있어야 결정되어 있는 이 미래의 저항군 세력 및 자신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존 코너가 존재하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인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오도록 하기 위해(존 코너를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기계들이 미래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반해 인간들이 정해진 미래를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기계와 인간은 뒤섞이고 역전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이 시리즈의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

영화를 보면서 이와 연관지어 재미있던 것은 기계가 인간을 닮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T4의 현재 시점(2018년 시점)에서 가장 발달된 터미네이터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맡았던)은 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할까. 그것도 근육이 아주 우락부락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형상으로 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T-800의 이전 모델인 T-600은 마치 골격이 전부 드러난(인체해부도에 등장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더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전의 모델들은 더욱 인간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스카이넷과 기계들이 그렇게 인간을 잡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용해서 더욱 인간에 가까운 터미네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또, T4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을 공격하는 기계들의 형상을 보면 왠지 이것이 인류의 어떤 진화과정, 혹은 자연세계를 연상시킨다. 마커스 일행을 공격했던 거대한 기계(아마도 '하베스터'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는 과거의 시기에 있었던 거대한 맘모스나 공룡들을 연상시키고, 물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그 기계는 큰 벌레나 피라니아를 연상시킨다. 즉 이것들은 자연의 어떤 세계와 그 형태와 발달 모습이 비슷하게 조응한다. 왜 이것들은 기계이면서도 인간이 존재하는 이 자연세계와 그 형태와 기능을 닮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단지 그 형태와 간단한 기능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스카이넷 본부의 그 구조. 밑에는 총을 든 T-600 감시병들이 포로들을 지키고, 위에는 작전실과 실험실(?) 등이 존재하는 그 구조 말이다. T-800이 생산되는 그 밑의 공장의 검고, 뜨겁고, 약간은 더럽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이미지와 그 위의 작전실의 깨끗하고 하얗고 샤프한 이미지의 대립. 이것이 보통의 인간 사회의 이미지와 거의 같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스카이넷의 본부가 꼭 이렇게 생겨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음이 생긴다. 왜 이렇게 그 형태나 기능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마저 인간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우문(愚問)일지도 모르겠다. 기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 따라서 그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믿는 인간들이, 한편으로는 신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각주:2].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인간들을 아무리 닮으려고 애써도, 하나 결코 닮을 수 없는 게 있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커다란 실패가 될지라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기계들이 존 코너를 결국 죽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기계들은 존 코너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게 성공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를 결코 고려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마커스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 궁금해졌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그 인간이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점이란 어떤 걸까. 





- 2009년 6월, 씨너스 단성사.

 
  1. 이와 관련하여 영화 속에서는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다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 코너가 그 자신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과거로 보내야 하는 것 말이다. [본문으로]
  2.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가 흥미롭다. T-800의 다음 모델인 T-1000이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3편의 T-X가 처음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도 재미있다. 신은 아마도 여자? ^^; [본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