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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ng Credit'에 해당되는 글 177

  1. 2010.08.04 이끼, 강우석 2
  2. 2010.07.15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3
  3. 2010.07.13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 2
  4. 2010.07.02 호수길, 정재훈
  5. 2010.06.15 유령 작가(Ghost Writer), 로만 폴란스키
  6. 2010.06.05 시(poetry), 이창동 4
  7. 2010.05.26 하녀, 임상수 2
  8. 2010.05.12 하하하, 홍상수 2
  9. 2010.05.08 계몽영화, 박동훈
  10. 2010.04.30 경 Viewfinder, 김 정 2
 

이끼, 강우석

Ending Credit | 2010. 8. 4. 01:18 | Posted by 맥거핀.


(이 리뷰는 영화의 중요 내용과 원작 웹툰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끼>는 재미있는 스릴러다. 그러나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몇몇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렇다. 먼저 몇 가지 사소한 장면들. 전석만(김상호)은 왜 갑자기 유해국(박해일)을 습격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날 유해국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성규(김준배)는 죽어가면서 왜 그렇게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에 집착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해국은 왜 맨 처음에 이영지(유선)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박해일 정도의 캐릭터라면, 이영지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그 사실부터 충분히 의심해보아야만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소한 장면들보다는 조금은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캐릭터의 어떤 일관성이나, 그로 야기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이 유해국이라는 캐릭터. 그의 전사(前事)는 영화 속에 매우 짤막하게 처리되며, 그와 박민욱 검사(유준상)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뉘앙스로만 짐작할 뿐인데, 이것만을 놓고보면, 사실 이야기의 중심 흐름은 약간은 의아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유해국은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그렇게까지 돕는가.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이끼>는 이야기의 힘이 캐릭터를 끌고간다기 보다는, 캐릭터의 힘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구조이기 떄문에 캐릭터의 어떤 비일관성, 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흐름을 심하게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해국의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다.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거의 유목형의 '실패의 기록'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형은 결국 아무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사실 그다지 강해보이는 캐릭터는 아니다. 극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유목형에게 감화되지만, 그 감화의 이유마저도 사실 모호하다. 그리고 유목형은 결국 천용덕 이장(정재영),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유해진)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약한 선인(善人)'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실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용덕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천용덕 이장에게 그는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 영지에게 유목형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낼(혹은 현혹될) 가치가 있었을까.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그것에 대한 어떤 불충분한 해답들.
..................................

그것들이 기어코 원작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들을 어렴풋하게 알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이 좋은 원작에 무리한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원작에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화에서 원작에 대한 메스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뒤에 나온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는 뒤에 나온 이야기는 어떤 새로운 창작을 거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내부의 것만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작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모호한 원형같은 것만이 이 영화에는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는 원형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영화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원작과 이 영화를 그저 단순하게 두 개의 이야기로만 놓고 비교해보아도, 원작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여지는 충분히 많다. 

먼저 사소한 것들은 패스. 앞에서 제시한 사소한 의문들은 사실 원작을 보면, 거의 해소가 된다. 그래서 나머지 굵직한 것 몇 가지. 먼저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앞의 이야기들을 대폭 들어내 버린 것. 이것이 야기한 문제는, 뒤의 문제들과도 연관되지만, 이 두 캐릭터의 행동에 어떤 단순함만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는, 이 앞의 이야기가 계속 뒤의 이야기, 즉 유해국이 아버지 죽음의 미스테리를 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어떤 힘의 원천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원작에 존재하는 이 앞의 이야기와 유해국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유해국의 계속된 행동에 어떤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며, 동시에 박민욱 검사의 캐릭터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원작 웹툰의 주된 메시지에 강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즉, 마을 사람들과 유해국은 종내에는 매우 비슷해진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유목형을 강하게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의 관계는 느슨하게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를 다시 연상시키며, 따라서 박민욱 검사가 유해국과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두 사람의 전사를 아예 들어내버렸기 때문에, 유해국은 마을에 들어와 쓸데없이 의심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이자 좌충우돌 돌진하는 활기찬 인물이 되어 버렸고, 박민욱 검사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박민욱 검사의 몇몇 씬들에서 감독의 전작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란 유목형이 원작과 달리 유약하지만, 너무 착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원작과의 차이. 원작과 영화와 가장 달라지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유목형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유목형은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해지고, 선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영화의 몇몇 설명되지 않은 점들이 이해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유목형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도 하필이면 왜 그 구절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유목형의 감화력. 웹툰에서 유목형의 감화력은 어떤 두려움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대상이 두려움을 주면, 그 대상을 분석하여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도리어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이른바 <미스트>의 세계. 그리고 유목형의 칼질. 영화에서는 이것은 약간은 느닷없어 보이고, 도리어 유약한 자의 어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웹툰에서는  이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 유목형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용덕 이장과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 때에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사실 명확해진다. 강우석 감독의 행위는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것이다. 즉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여, 관객들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명확하게 가려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의 스릴러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 아무래도 강력한 악이 있을 때에 스릴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히 강우석 감독의 오판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원작의 눅진한 공기에서 오는 어떤 끈끈한 긴장감과 불길한 메시지에서 오는 묵직한 뒷맛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원작의 가장 큰 긴장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것은 유해국을 다시 뒤집어 보았을 때에 생긴다. 유해국은 유목형의 모든 행위들을 다시 비슷하게 반복하였으며, 결국 천용덕 이장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쾌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어떤 불길한 뒷이야기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연상시킨다. 니콜라이가 세미온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그 묵직하고도 불길한 끝맺음. 그러나 강우석은 유해국에게 상큼한 승리를 전달해주고는 느닷없이 이영지에게 그 마지막 자리를 맡긴다. 이 이탈이 가져다주는 어리둥절함.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끼>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원작 웹툰에서는 그 제목 '이끼'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끼는 음지에서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바위를 침식해들어가며, 종내에는 그 바위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끼는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잘 씻겨내지지 않는다. 다 씻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그 바위를 조금씩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끼낀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를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아니, 이끼가 하나도 끼지 않은 바위가 있을까. 이끼는 항상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끼는 누구도, 심지어 바위 그 자신마저도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여, 어느 틈에 그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에서는 박민욱 검사의 말을 통해 그 의미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소된다.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살라고, 하찮게. 그러나 이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끼는 어느 바위에나 존재하며, 결국 바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끼가 완전히 달라붙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끼의 확산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작 웹툰의 여러 팬들이 지적한 바대로,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강우석 감독이 맡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원작의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있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지적대로(무리한 바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이 메스를 들이댔으면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는 원작의 공기를 간직하면서도, 그 내면에 더욱 묵직하고도 눅진한 이야기들을 담아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실패한 수술. 수술실에 들어간 복잡한 인간 머피는 단순하고 명쾌한 로보캅이 되어 돌아왔다.



- 2010년 8월, 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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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Ending Credit | 2010. 7. 15. 02:23 | Posted by 맥거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부터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이 떠나간 사람들과 이별하여야 하며, 남은 자들이 되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떠나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음일 것이지만, 죽음만이 떠나감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의 부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영화란 '모든 남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위치의 일부분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어떤 특유의 세계관이 한 몫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왠지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 유미코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남편이 거의 자살과 같은 죽음으로 떠나간 이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에는 한편으로는 단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막연한 답답함도 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즉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는 듯 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함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관련되어 있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막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어디론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 유미코는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 내가 그 때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새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된 그 후의 어느날, 그가 죽던 날처럼 어디선가 자전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해녀 할머니는 궂은 날씨에도 물질을 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할머니는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할머니도 남편과 어린 시절의 할머니처럼, 자신이 막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그 할머니, 불사신이라니까. 이 장면에는 묘한 감흥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책감을 느끼거나, 그것 때문에 남은 삶을 괴로워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거의 별개의 문제와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유미코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았어도, 할머니는 기어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남편도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유미코가 아무리 어떤 저주를 내렸어도,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기적이나, 미신이나, 노력의 부족이나, 불사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이 그런 것이다. 삶은 그런 불가해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아픈 기억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떼어내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유미코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자전거 열쇠에서 방울만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 방울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방울을 떼어내어도 그 자전거 열쇠에서는 방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숭고하다.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는 모두들 어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들을 품어 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의 후속작 <원더풀 라이프>에서와 같이,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만이 남으면 남은 삶은 과연 행복할까. 혹여 행복할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숭고한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 장터의 할머니는 유미코에게 넌지시 말한다. 남은 아들은 아주 어릴 때에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애초의 부재(不在)는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즉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유미코가 남편의 기억을 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새 남편이 내놓은 답이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가 괴로워하자, 남편은 유미코에게 말한다. 환상의 빛이 있다고. 죽은 사람들은 가끔 그 환상의 빛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간다고 말이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내고, 그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유미코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의 빛은 아마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떠나간 사람들을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 보내는 하나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제의들은 떠나간(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든 우리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

고레에다 감독은 이 담담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감독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마음 속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나 이 화면 구성들은 단지 어떤 스크린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빛이 쏟아지는 외부와 어두운 실내를 분리하고, 창이나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어두운 실내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동진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설명한 대로 고레에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이기는 하지만,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갖혀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그대로 표상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주인공은 관객의 마음마저도 괴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이들이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가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빛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또한 한편으로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유미코는 처음에는 계속 어두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옷들만 입고 나오다가, 중간에 새 남편과의 안정을 통해 조금은 옷의 톤이 밝아지다가, 다시 괴로움에 빠진 후, 옷이 검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미친 듯이 따라가는 누군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녀의 옷의 괴기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나중 작품들의 원형과 같은 장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미코의 친정 엄마는 왠지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머니들이란 사실 어찌나 그렇게 무섭고, 강인할 수 있는지. 사위의 죽음을 맞고도, 태연하게 딸의 곁에서 딸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그 태평스럽고도, 무심하게 보이는 말투. 그것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소소한 솔직함과 따뜻함,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왠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숭고함의 다른 형태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미코도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코의 엄마도, 언젠가 그렇게 남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유미코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내면서 그녀는 가슴 속에 아마도 굳은 살들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앞날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환상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상의 빛은, 떠나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환각의 빛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어떻게든 그곳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그 곳에 있는 그 환상의 빛, 유미코가 앉아있던 어두운 방 바깥에 있던 그 환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시사회를 보게 해주신 시사회 주관 출판사와 알라딘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10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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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

Ending Credit | 2010. 7. 13. 00:55 | Posted by 맥거핀.


(이 글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의 모든 예측을 뒤집어 놓을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 문구가 조금은 의아하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의아함은 그 카피 문구의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나머지의 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예측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어떤 반전에 가까운가? 영화를 보고 나면, 반전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도리어, 영화는 약간 의아하게도, 그 결말 이면의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약간은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을 학교 선생의 술회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을 학교 선생은 시작부에 의미심장한 말들을 한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풀리지 않은 비밀을 담고 있으나, 마을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이 나라(독일)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연이은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을 의사는 누군가가 몰래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고, 마을 지주(남작)의 아들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오며, 또 누군가는 사고로 죽고, 누군가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급기야는 한 장애 소년의 눈이 도려내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끼고, 남작은 마을 주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며, 범인을 찾으려 애쓴다. 즉 이 영화는 한편으로 추리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 일련의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화자인 선생은 마침내 범인을 밝혀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체 틀이다.

그러나 왠지 이 영화는 그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가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유사 추리물에서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예. 영화의 초반 시퀀스에 사건을 보여준 후, 감독은 마을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화자에 의해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클라라의 옆에 모여서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화자는 술회한다. 이것이 범인 찾기라면, 이 시퀀스야 말로 의심스러운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화자에 의해 지목되는 범인은 범인이 아니며 이러한 시퀀스는 관객의 의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 하나의 이상함.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마을 선생에 의해 서술되는 1인칭 화자의 시점(視點)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이 영화에는 마을 선생이 결코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이 1인칭 시점의 구성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짐짓 아이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화자의 입으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즉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의 장면들을 꾸준히 보여주면서도, 화자의 1인칭 시점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믿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 1인칭 시점을 의심하게 한다. 그 시점 구성의 기이함.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추리물이라면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화자에 대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우리는 그가 내놓은 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니,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화자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독은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당신이 답을 못찾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모두 일을 벌였다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도리어 간단하고, 간명하다. 그러나 영화를 그것으로만 단정짓고 영화관을 나서는 것은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 안에서 제시된 사실로만 보자면, 아이들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을 선생의 의심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추리, 혹은 불충분한 추리 쪽에 가깝다. 아이들이 그곳에 나타났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도리어, 몇몇 씬들이 더욱 모호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에바는 왜 그토록 호수로 가는 것을 꺼렸던가. 산파와 의사는 왜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가...등등.

...................................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길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 보다는, 아마도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곱씹어 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노린 점처럼 보인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해보이는 이 마을은 이중의 지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지배와 목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지배. 그러나 이 지배 구조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남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만들려고 한다. 목사는 종교적인 엄숙주의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을에 역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낙마했던 의사는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그보다 더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위선은 폭력의 지배에 의해, 그 하위로 조금씩 번져나간다. 물론 그 지배 구조의 가장 하위에 있는 인물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지배가 불안하고 기이한 틈새를 펼쳐 보일 때, 오스트리아에서 황태자는 살해당했다. 이제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파시즘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일까. 글쎄. 다른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인다고 해도, 적어도 파시즘이 일반 대중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동요를 그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폭력적인 지배가 공고한 이러한 구조에서 불만이 극도로 응축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불신들이 커져간다. 이때에, 그 폭력적인 지배의 정점들이 갑자기 해체되고 나면, 사람들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을 걸러내고, 허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론 사실 파시즘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이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 여기에 결합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 파시즘이 하필이면, 이곳 독일에서 출현하여,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것의 뿌리의 일부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이 묵직한 질문들을 추리극의 외피를 두른 후, 조금씩 조금씩 슬며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차곡차곡 쌓인 질문들은 종내에는 관객을 어디에도, 그 어느 인물에도 마음을 둘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화자인 마을 선생마저도, 관객이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추리극의 구성으로 보자면, 그가 내놓은 해답을 관객이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그가 불충분한 추리를 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영화의 구조도 한 몫을 한다), 한편으로 보자면, 그 역시 모자란, 혹은 사려깊지 못한 어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꿈을 꾸었다고 항변하는 제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선생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 역시 목사와 남작의 이중의 지배구조에 갇힌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를 더욱 묵직하게 하는 것은 음악 없이 진행되는 이 이야기의 서술 방식과 흑백의 하얀 화면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그 소년과 소녀에게 하얀 리본을 둘렀을 뿐만 아니라, 흑백의 화면을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하얀 리본을 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덧붙인다. 그 하얀 리본은 순수를 상징한다고. 파시즘의 광풍에 섰던 자들이 순수한 혈통을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어느 곳에서도 순수함을 그 주무기로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덧.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인데, 글쎄, 좋은 영화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황금종려상 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유럽 애들의 파시즘에 대한 어떤 공포, 그것에 대한 일종의 위약효과가 작용한 것인가.




- 2010년 7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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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길, 정재훈

Ending Credit | 2010. 7. 2. 00:44 | Posted by 맥거핀.

참 이상하게 진행되는 다큐멘터리라 생각했다.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늘어선 연립들을, 양 옆에 펼쳐진 집들 사이에 난 길을 고정된 카메라는 몇 분간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 전환. 길 아래로 어떤 할머니가 힘겹게 내려간다. 카메라는 그 뒷모습을 무리한 줌으로 당겨서 찍는다. 너무 당기다 못해,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다시 거칠게 화면 전환. 다시 아까 그 연립. 이번에는 밤이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연립의 5층에는 유일하게 불켜진 창문이 보인다. 카메라는 다시 말없이 그 불켜진 창문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불켜진 창문에서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화면 전환. 이번에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주 오래, 지치지 않고 뛰어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카메라는 그 아이들을 비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일이 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도 불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경사진 길을 아이들은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리고 웃으면서 쫓고 쫓긴다. 쫓겼던 아이들이, 쫓기 시작하고, 쫓았던 아이들이, 쫓기기 시작한다. 계속 웃으면서. 여전히 줌은 반복된다.


그리고, 영화는 급속히 후반부로 넘어가 버린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몇몇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 결정적인 몇몇의 차이점. 영화 후반부에는 예의 그 줌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기는 한다. 바로 조금 전의 장면에서만 해도 사람을 경계하며 움직이던 고양이의 사체. 그 줌 된 화면속에 사체 위로 날파리들만 어지럽게 움직인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양이 뿐만이 아니다.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할머니와 아이들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장면. 다시 어둠 속이다. 이제 더 이상 불켜진 창문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암흑 속에서 오로지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나 이 개 짖는 소리마저도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아니, 나의 착각인가. 암흑 속에서 개 짖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리니까 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에서 문이 쾅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일까. 그리고 계속 모든 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아니. 움직이는 것은 있다. 더 이상 줌 하지 않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계. 물론 이것은 잘못된 진술이다. 기계 같은 것이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지붕을 무너뜨리고, 건물벽을 부수는 저 기계는 실제로 이 마지막에서 '마치 산 것처럼' 움직이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질문이 생긴다. 저 기계 외에, 살아 움직이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까지가 이 영화 <호수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괴이하게 느껴졌던 이 처음의 장면들이 마지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줌들을 보고나서야 마지막에 질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다시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아마도 그 줌들은 '이 아이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아이들을, 노인들을,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감독의 필사적인 외침을, 그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이는 줌은 담고 있다. 그리고 물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

처음에는 거의 기교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을 마지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켜켜이 장면들을 쌓는 영화다. 그 줌의 활용은 물론이거니와, 사운드의 활용 역시 심상치 않다.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점을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후반부에 들어서 사운드와 화면과의 불일치가 심해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암흑 속에서 개의 짖음과 같이 특정의 사운드가 증폭되기도 하고, 화면과 전혀 상관없는 효과음이 느닷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불꽃의 이미지를 슬며시 끼워넣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에 묘한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그 공간을 매우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고, 아주머니들이 잡담을 나누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 그 공간들은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거대한 유령처럼 변하여 관객들을 습격한다. 공간은 순식간에 곧 무엇이라도 나타날 듯한 이상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 유일하게 기계는 살아 꿈틀대며, 조금씩 폐허를 확장해 나간다.

평론가 허문영은 지아장커 감독의 말을 빌려, 다큐멘터리를 두 종류로 나눈 바 있다. 그 하나는 기다림(wa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리고 지아장커가 구축의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문영은 덧붙인다. "이 말은 적어도 지아장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 <호수길> 역시 굳이 나누자면 구축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줌들의 활용이나, 사운드와 화면의 불일치, 혹은 끼어든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픽셀이 무너질 정도의 줌으로 아이들을 잡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화면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진다. 놀이터의 노는 아이들을 잡는 장면들에서 아이들을 잡는 크기는 그대로인데, 화면은 깨끗해졌다. 좋은 카메라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카메라가 훨씬 더 대상 가까이로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카메라로 다가와서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것의 의도는 사실 명백하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의 대상이 처음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심리적으로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분명히 영화 처음의, 멀리 줌으로 잡은 장면들보다 관객들을 그 아이들에 더욱 가깝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그 다음 장면들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에 관객들이 가지게 될 감정은 거의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의 대상보다 기록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시 지아장커의 말을 상기하자.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즉,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기록하는 자의 태도, 혹은 위치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몇 번이나 '우리 동네'라는 말을 썼다. 감독은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그 동네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감독은 그 동네의 주민이었다. 은평구 응암 2동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동네. 다른 어떤 설명을 가타부타 붙일 필요 없이 이 영화는 우리 동네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동네의 모든 집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은평구 응암 2동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호수길'도 존재할 것이고, 어쩌면, 그 길 옆에는 진짜 인공호수라도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 동네를 더 이상 '호수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더 이상 '우리 동네'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밀하게 축조된 마지막의 SF적인 공포는 아마도 감독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덧붙였다. 그 마지막의 불꽃 이미지는 그냥 '악!'같은 거라고. 그 비명. 악, 악, 아악.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말했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를 찍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 우리는 어쩌면 이 기이한 낯선 다큐멘터리를 이런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한 가운데에 거대한 기계를 던져 놓고 그것을 조종해 집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서 어디론가로 보내졌고 기이한 표정없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난 집들을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곧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 좋은 영화를 보게 해주신 인디포럼 및 알라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 2010년 6월, 시네코드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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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Ghost Writer), 로만 폴란스키

Ending Credit | 2010. 6. 15. 16:2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감상을 방해할, 심각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유령 작가(Ghost Writer)란, 유명인의 뒤에서 유명인의 이름으로 글을 써주는 대필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활용한 영국식 유머가 등장한다. 영화 내내 본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본인을 유령이라고 소개하는 장면. 이 유령작가는 전 영국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전임 유령작가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려 고용되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유령작가는 이중의 유령인 셈이다. 전면에 나온 아담 랭의 유령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임 작가의 유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유령작가가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미지의 장면을 찾아가는 장면은 꽤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보였다. 죽은 자의 지시를 받는 죽은 자의 유령이라. 그래서 어쩌면, 이 유령작가의 운명은 거의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전임 유령작가를 대신하여,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결심하던 때부터 이 유령작가의 마지막 운명은 아마도 거의 정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렇게 사람 쉽게 믿고, 쉽게 말하는 유령작가라면 말이다.
(아니, 그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진실을 밝혔는데, 입다물고 도망가지 않고, 그 쪽지질은 뭐람. 아무리 정치를 모른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유령작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거의 히치콕식 맥거핀을 쫓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히치콕식 스릴러에 비교하는 리뷰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자동차 추격씬이나, 주인공의 성격과 같은 몇몇 부분들을 짚어야 하겠지만, 이 맥거핀들의 활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범인찾기와 같은 것들. 전임작가를 죽인 것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답이 나와있는 쉬운 질문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담 랭은 범인이 아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그를 죽일만한 개연성이 높은 인물은, 거의 대부분 답이 아니다. 뭐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그리고 거의 늘상 그렇듯이, 그 단서는 매우 가까운 것에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그것에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의 성패는 그 마지막 진실이 얼마나 무게 있는 펀치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영국이 거의 미국의 2중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뉴스거리인가. 전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의 얼굴을 한 개가 부시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은 이미 더 이상 조롱거리도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보다 약간 반 걸음 정도 더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렇게 묵직한 펀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는 이미 있다. 유령작가가 구글링을 통해 몇몇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는 장면들. 구글링만 해도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펀치? 그리고, 솔직히 나는 약간 실소가 나왔다. 고용된지 며칠되지도 않은 유령작가는 구글링을 통해 중요한 단서들을 잘도 찾아내는 데, 그의 오래된 정적(政敵)들은 도대체 그 오랜 시간, 무얼하고 있던걸까.
 
아마도 이 영화의 의미는 그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튼 그 모든 진실이 결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는 사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알아볼 수 있는 유령작가는 결코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거의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령 작가라는 의미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유령 작가는 뒤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령 작가가 전면에 나서려고 한다면, 그 유령 작가의 운명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진짜 유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가장 큰 맥거핀은 이 영화의 제목일 것이다. 과연 진정한 유령 작가는 누구인가? 아담 랭의 뒤에서 그의 삶을 써내려가던 거대한 유령 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를 히치콕식 정치 스릴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아마도 영국식 블랙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에 의해 반복되는 몇몇 말장난들도 그렇고, 몇몇 정치적인 유머들도 그렇다. 예를 들어,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연상시키는 배우를 미국 국무장관 역에 배치시키는 것이나, 국제사법재판소를 따르지 않는 몇몇 나라들이란 오로지 미국과 그 적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이는 로만 폴란스키의 미국에 대한 영화적인 소심한 항변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2010년 6월, 씨너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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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ng Credit | 2010. 6. 5. 02:40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이창동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늘 그렇듯이 영화관에 앉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약간은 놀라운 것은, 일단 앉고 나면, 이창동의 영화는 늘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비한 체험을 이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그 무아지경은 사라지고, 다시 모든 것들을 무섭게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시작해서, 모든 DVD를 가지고 있지만, 그 DVD들에 손이 가는 적은 거의 없다. 이창동의 DVD를 집어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최소 며칠간 머리를 헤집어 놓을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 노는 아이들 옆으로 무심하게 강물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강물에 한 소녀의 시체가 조용히 밀려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평온한 세상, 그 평온한 세상에 밀려오는 무거운 질문들. 이 시작은 마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을 연상시킨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황금들녘. 아이들이 뛰노는 그 한가운데에서, 박형사(송강호)는 찌푸린 얼굴로 배수로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다시 어떤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약간은 놀랍게도, 이 영화 <시>의 마지막 역시, 조금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박형사는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혹자의 말처럼 범인은 지금 어디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일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던지는 어떤 경고의 메시지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소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소녀를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소녀가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질문이 무엇인가.

이 영화는 이창동의 전작들과 약간은 맥이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오아시스>나 <밀양>같은 것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오아시스>에서는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밀양>에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다시 <시>에서는 가해자와 연루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연루되었다는 것.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지만, 가해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 글쎄. 이창동은 이를 단순히 주인공 미자(윤정희)로 한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좀 더 말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거의 공범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는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이며, 그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이다. 이 시라는 것의 의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 영화의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을 이야기한다. 즉 시의 도덕과 시의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 예를 들어 그 진동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미자가 거의 무의미한 아름다움을 늘어놓은 다음, 뒤돌아 나오다가 아프게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시의 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 그리고 도덕이라는 속성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시가 곧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곧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들은, 이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시는 존재하고 있다고, 그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먼저 하나. 이 말들은 약간은 신기하게도, 도덕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위의 김용탁 시인의 말들에서 '시'라는 말을 '도덕' 혹은 '양심'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보라. 거의 의미가 그대로 통한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도덕은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약자를 배려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여학생을 성폭행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끄집어내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수업의 어떤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영화 속 미자가 듣는 김용탁 시인의 시 강의 형태를 보면서이다. 처음에 나는 약간 웃었다. 참 시 강의라는 게 거저 먹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저 강의라는 것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사과를 들고 잘 보라고 한다음, 수강생 한 명씩 불러내어 '가장 아름다웠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면 되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 다음, 조금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시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 기법이나, 운율을 맞추는 법 등등에 대해서는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것으로 쓸 수 있는 것인가. 시가 그것으로 가능한 것인가. 글쎄.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도리어, 어떤 배움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천재성의 문제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학과 조금 비슷한 성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수학의 천재성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발현되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간다. 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젊은 시절에 빛을 발하고 요절한 수많은 시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소설과의 차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설은 시와 달리, 나이가 들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시와 달리, 소설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옛날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이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부분에서 상당히 내 흥미를 끌었던 주제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을 내린다.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신의 시여(施與)에 의해서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꽤나 복잡한 문제라, 이야기를 하려면, 비트겐슈타인까지 끌고 들어와야 하며, 잘 얘기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덕을 (시와 마찬가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는 어떤 의문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발휘하는가, 혹은 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전혀 그것을 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튼 이 논의 속에는 '일러주는 것'과 '보도록 하는 것'을 구분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이창동의 <시>의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보는 것'으로 가능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덕은, 혹은 양심은 도대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써서? 영화 속 시 동호회의 일원인 박 형사는 미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미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운다. 이 질문은 마치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도덕 때문에 우세요? 도덕을 지킬 수 없어서? 도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은 울어야 한다. 그것이 이창동의 하나의 태도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시인은 술자리에서 한탄하듯 내뱉는다. 시는 죽었어. 그래도 싸. 그것 역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도덕은 죽었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시는 정말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덕도 거의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도덕이란, 이창동이 말하듯이,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여학생을 성폭행해서는 안된다, 는 식의 어떠한 것, 즉 규범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몇 개의 힌트가 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속들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 미자가 찾아간 병원의 텔레비전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둔감하다. 그리고 이 둔감함은 병원 밖으로 나오며 그대로 이어진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이를 어떤 하나의 구경거리로 바라볼 뿐이다. 이 장면에 조금은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미자 뿐이다. 미자는 심지어 손자에게 그 소녀에 대해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자도 겨우 그 정도 뿐이다. 그 정도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미자는 시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여전히 미자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있기를 계속 갈망한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 미자는 시를 써내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클래스의 다른 사람들은 같이 시 수업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시를 써내지 못했다. 그 차이.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미자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손자의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기범 아버지(안내상)는 조소하며 되물을 뿐이다. "시를 왜 배워요?"

시를 쓰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그 반대가 더욱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도덕적인 인간이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이해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시가 왜 좋은지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창동은 거의 용감하게, 무모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덕적인 인간만이, 시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일단 '잘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잘 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대로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도 보고, 먹어도 보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이창동은 말한다. '어떤' 도덕이 유지되는 것(혹은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의 하나의 모습은 시라고 말이다. 가장 도덕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창동의 이 영화 <시>가 거의 중세의 도덕극을 연상시킨다고 말하였으나, 이쯤되면 거의 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어떤 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 즉 완성된 미(美)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 충일한 것, 그들은 그제서야 그것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의 덕(arete)은 이창동의 '덕'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거의 숨을 쉴 수 없게 한다. 미자의 목소리는 어느틈에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때 소녀는 관객에게 거의 정면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놀라운 체험. 그렇게 영화 속 관객들은 미자가 가해자와 연루된 것과 같이, 다시 미자에게 연루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현대사회에서 공범이 된다. 세상 모든 약자들에 가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말이다. 소녀는 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 나는 노트에 반복하여 쓴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언젠가는 노력을 해봐야겠지요. 명사를 잃고, 그 다음에 동사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 2010년 6월,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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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임상수가 만든 이 서늘한 그림에는 출구가 없다. 마치 이 마지막은 복수가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을 복수로 본다면 말이다. 임상수는 설명을 시도한다(<씨네 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은이(전도연)의 마지막 시도는 나미를 괴물로 만드려는 시도였다고 말이다. 그리고 임상수는 싸늘하게 덧붙인다. 이를 봄으로써, 아마 나미는 후에 괴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이런 친절한 설명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면 좀 좋으련만.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 냉소하는 임상수의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말을 그대로 믿기도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아니, 임상수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나미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무슨 복수가 된다는 말인가.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 괴물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훈이(이정재)와 해라(서우)는 나미가 괴물이 되는 편이 더 좋을는지도 모른다. 훈이와 해라는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괴물인 편이, 이 세상에서 더 살아남기가 쉽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미는 알아서 괴물이 되줄 터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자각하고, 자기를 위치에 맞게(혹은 그 위치에서 살아남도록)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던 이 아이가 괴물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어쩌면 은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이가 마지막 선택을 행함으로써, 나미가 괴물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은이가 행한 복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지만, 그것은 복수였을까. 

은이가 행하는 이 방식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은이는 말한다. 찍 소리라도 내보고 싶다고 말이다. 군부독재 시절,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찍 소리를 내보려고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인해 이 정권들이 어떤 반성에 이르렀는가라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죽음들이 의미없는 죽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혹은 그것을 바보같은 시도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아무튼 간에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의미있는 어떤 시도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시도의 한 가지 부분은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독재정권의 신민으로 살지 않겠다는,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바보같은 인간으로 남지 않겠다는, 혹은 기계부품과 같이 취급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그런 선언.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그런 선언. 그래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신문에 한줄짜리 기사로라도 취급되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그었다.

아니, 나는 은이가 노동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그런 마지막을 택했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임상수가 파놓은 이 출구없는 마지막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와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중이다. 여러 리뷰들에서 지적하였듯이 임상수의 오프닝 씬은 인상적이다. 떨어지는 여자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시선들. 그들의 무표정한 시선들에는 이유가 있다. 일을 해야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 여자가 비워놓은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갈테니 말이다. 그리고 은이는 유아교육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곧 대저택의 하녀로 채용되고, 다시 그 자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보면, 그 자리 역시 다시 누군가가 채우고 있다. 마지막에 주목해봐야 할 것은 아이의 시선이나, 훈이나 해라의 우스꽝스럽고도, 그로테스크한 행동들이 아니라, 은이와 병식(윤여정)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또다른 하녀들이다. 그 하녀들의 그 무표정한 시선들. 그리고 임상수는 훈이의 입을 빌어, 해라마저도 거의 하녀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한다. 훈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이나 병식은 집안일을 해주는 하녀이고, 해라는 아이를 낳아주는 하녀이다. 훈이는 선심쓰듯 말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애를 낳게 해줄께. 그리고 해라와 해라의 어머니(박지영)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참이다. 애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낳아야 한다고 되뇌면서.



이 타의로 빚어진 하녀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래서 어떤 하녀가 곧 다른 하녀로 대체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은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저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하녀로 남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 말이다. 그 선언과 조금은 비슷하지만, 또 무엇인가 달라보이는 것에 하녀 병식의 행동들이 있다. 경멸하는 것. 겉으로는 정중하게 행동하지만, 돌아서서 경멸하고 욕하는 것. 이른바 '아더메치'. 그리고 이 방법으로 병식은 아마도 그 긴 세월의 모욕을 버텨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마도 이 방법은 이 세상에서 은이처럼 선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텨내는 방식일 것이다. 경멸하는 것. 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 

그리고 이 경멸은 왠지 최근의 어떤 사건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한 대학에서 여학생이 나이든 청소부를 모욕했고, 네티즌들은 그녀에게 경멸을 퍼붓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며, 급기야는 그녀의 '신상을 털었다'. 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거기에 스며있는 계급성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이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것에 담겨 있는 계급의 문제가 한 몫을 했다. 예를 들어 만약 이것이 나이 어린 청소부와 나이 든 청소부 사이의 문제였다면, 이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경멸은 또 한편으로 보면 위험한 부분이 있다. 경멸은 그 자체에 일종의 계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녀 병식의 경우. 병식은 영화 초반부에 훈과 해라를 노골적으로 경멸하지만, 동시에 은이도 경멸한다. 즉 병식은 훈과 해라보다는 자신이 낮은 위치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동시에 은이보다는 자신이 높은 위치라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것의 위험, 즉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인간을 경멸한다는 것에 내재된 무언가의 위험성.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여학생에 대한 경멸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도덕이라는 것의 형태로 포장되지만, 그것이 어쩌면 현대 사회의 어떤 부분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때로는 그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이 무서워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멸을 경멸하는 나도 무서워진다.

아무튼 임상수가 그려낸 출구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우리는 은이처럼 할 수 없어서, 그저 경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임상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한도 내에서 고결한 삶을 산다.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생겼을 때조차 죽음으로써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고자 한다. <하녀>는 고결함에 관한 영화다."(<씨네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중) (그래서 어쩌면 임상수는 은이를 거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니 어린아이도 아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캐릭터로 그려냈는지도 모르겠다. 해라의 어머니가 전도연을 떨어뜨릴 때, 쟤들은 당연히 저러겠지, 왜 은이는 일부러 저러는 것도 모를까라고 생각한 나는, 이미 고결해지긴 틀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은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결함을 지키거나, 병식처럼 경멸하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저  출구없는 그림의 서늘함이 선뜩하게 느껴질 뿐이다.



덧. 이 영화는 나름 괜찮지만, 괜히 서스펜스니, 에로틱 스릴러니 하는 말을 갖다붙여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영화는 원작 <하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괜히 리메이크 어쩌구 해서는 또 불필요한 욕을 먹고 있다. 이건 그냥 임상수의 새로운 <하녀>다.




- 2010년 5월. 씨너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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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홍상수

Ending Credit | 2010. 5. 12. 01:53 | Posted by 맥거핀.


간만에 웃었다.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의 인장들이 물씬 드러나는 영화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사용한 몇몇 장치들. 등장인물들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나, 다르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일종의 '반복과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밤과 낮>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여 그것에 논평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렇다. 또 꿈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도 예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독특한 꿈 씬이 등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장면들은 예전 영화에서처럼 꿈인지 아닌지 약간 모호한 면도 있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홍상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소위 '홍상수 사단'임을 하나의 인장 요소로서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것이다. 즉 구조든 내용이든 간에 아무튼 이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관객들의 웃음'을 여전히 유발한다는 점. 그런데 그 웃음이 예전과는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예전의 웃음들이 관객들을 계면쩍게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 영화의 웃음은 조금 더 귀여운 웃음이랄까, 상쾌한 웃음이랄까.


그리고 <하하하>는 여름의 이야기이다. 夏夏夏. 여름여름여름. 그 세 번의 여름이야기. 첫 번째 여름은 문경(김상경)의 회상. 어머니를 만나러 간 통영에서 관광 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여름은 중식(유준상)의 회상. 통영에서 그의 애인 연주(예지원)와 밀회를 즐기며, 후배 정호(김강우)와도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여름은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서 추론하여 만들어내는 이야기. 우리는 이 둘의 회상을 통해, 이들 각자가 알지 못하는 몇몇 중요한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사실. 문경은 성옥과 그녀의 애인에 대해 알지만, 그녀의 애인이 바로 중식이 말하는 후배 정호라는 사실은 모른다. 즉 우리는 두 사람이 하는 몇몇 얘기들을 통해서, 두 사람보다 이 이야기 전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 두 사람의 얘기를 본다('듣는다'가 아니라 '본다') 어쩌면 이 유머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많이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왠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전작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 21>에서 정한석이 말한 것처럼 좋은 것, 나쁜 것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한석은 말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도덕은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계 되지만,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질적 차이에 관계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좋음과 나쁨! 좋은 것만 보아라! 그러면서 들뢰즈는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윤리학이 해야 하는 삼중의 실천 중 첫 번째로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설명해주는 장면으로 문경이 성웅 이순신과 만나는 장면을 들었다. 그 장면이 이 철학적 내용에 대한 홍상수 식의 설명이라고 말이다. 

그저 몇 가지 잡설을 여기에 덧붙여 보자면, 이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작의 제목을 연상시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전체를 온전하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분의 문제이며, 동시에 선악, 즉 도덕의 문제 또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전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기도 한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일 수 있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에게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만의 윤리의 관점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에게 누군가가 '이 전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의 섣부른 도덕적 혹은 윤리적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마'와 거의 비슷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고, (도덕이 아닌) 너 자신만의 윤리적 관점을 만들어갈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사람의 윤리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볼 것. 그것을 실천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방법은 간단하기는 하나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내가 전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만 보려 한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홍상수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를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순신에게 문경은 묻는다. '아 그러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거...뭐 그런 겁니까?' 이순신은 답한다.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딨냐?')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쩍게 생각했던 부분은 이 영화의 구조였다. 즉 두 사람의 여행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형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후, 술자리에서 만나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 그리고 그 형식도 좀 수상쩍은 것이, 굳이 현재의 술자리를 스틸사진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야기를 회상하는 형식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기를 도입하거나, 씬의 번호를 매겨서 장면을 나누는 형식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스틸사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를 '좋은 것만 보라'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것이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던 것. 즉,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 실제 그들이 그곳에서 행한 행동과 그 후의 논평과의 불일치 - 예를 들어, 문경이 정호에게 맞았을 때도 문경은 그것을 '의연하게 대처해서 좋았다'고 회상한다. 사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맞은 것에 불과했으면서도 말이다 - 에서 생겨나는 솔직함이자, 예의 그 홍상수 식의 유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이 술자리의 대화의 주제는 몇 번 반복되어 제시되듯이, '여름에 좋았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논평들은 '응, 좋았겠구나' '어, 좋았어'로 마무리되고 있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인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성웅 이순신의 말로써 직접 전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의 아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틸사진들. 사진들이란 결국 무엇인가. 사진들은 결국 '좋았던 것'을 담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 그 차이. 동영상과 달리 사진은 철저하게 좋았던 내용만이 담겨있다. 물론 동영상 역시 일정 부분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은 거의 철저하게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우리에게 좋았던 것만 담기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면서 보여지는 스틸 컷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이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히고, 웃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이 사진만을 놓고 이 술자리를 판단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 사진들을 놓고서는 이 술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좋았다'라고 밖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 스틸사진들을 통해서 이 술자리의 '좋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자인 이 스틸사진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틸 사진들과 회상 장면의 동영상들과의 대비, 그 놀라운 형식과 주제와의 결합.

즉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를 주인공들의 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통영에서와 달리, 서울 근교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이 술자리는 주인공들의 '좋은 것만 보라'의 실천적 체험 현장이다. 좋은 것만 말하고, 좋은 것(사진)만 남기는 자리. 그리고 심지어는 이 술자리는 깔끔하게 끝나기조차 한다. '이제 마지막 잔하고 일어설까' 이런 류의 대사가 맨 마지막에 나오다니, 이게 홍상수 영화에서 가능했던가. 아무튼 망가져서야 끝장을 보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술자리가 아니던가. 아니, 그것은 어쩌면 통영에서부터 미리 예고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식은 비록 불륜이기는 하나, 연주에게 청혼을 하고, 문경도 성옥에게 같이 캐나다로 가자며, 청혼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다른 영화에서도 있었던가. 그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빨리 넘어뜨리고 보자는 쪽이었지, 청혼을 하자는 쪽은 아니었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남자들, 그 성장의 표식들은 상당히 놀랍기까지 하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이 표식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긍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부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전자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아무튼 긍정의 의미에서 하하하.

p.s. 이 영화의 문소리의 연기는 압권이다!

- 2010년 5월,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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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박동훈

Ending Credit | 2010. 5. 8. 02:36 | Posted by 맥거핀.
(포스터만 봐서는 호러물이지만, 호러물은 아닙니다.-_-)



계몽영화. 아마 보통의 영화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 이런 제목이 붙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거의 사어(死語)에 가까울 뿐더러, 혹여 쓰인다고 해도 요즘에 들어서는 '계몽'이라는 말은 거의 조소나 모욕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말이다. 내가 너를 계몽해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아마 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이거나 드시죠, 라고 말할 것이다. 계몽..아니, 굳이 계몽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즘에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니까 말이다. 인터넷 시대에 게시판에서 가장 분란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어디 나에게 가르치려 들어?"인 것은 거의 주지의 사실. 그래서, 어쩌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감독의 시대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삼대(三代)는 조금씩, 조금씩 비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쌓은 1대, 그리고 군부독재의 시대에 독재에 빌붙어 폭력적이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2대, 개인주의의 시대에 이기적으로 성장한 3대. 그들이 보여주는 비틀어진 가족극의 굴레. 그러나 그들에게는 몇 번인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비틀어진 것들을 조금씩 바로잡아나갈 기회들이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들은 그 때마다 '자신을 위하는' 선택을 해나갔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신들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러한 선택들을 말이다. (이 영화의 팜플렛에는 이 영화는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사실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선택들이 단순히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에는 한국 사회의 어떤 대물림에 대한 처절한 욕구가 담겨 있다. 때때로 수많은 선택들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자신들이 가진 부, 지위, 명예...등등을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하려는 욕구, 그것들은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의 반복되는 행위들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주류사회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앨범 사진촬영에서조차 중심에 서야 한다는, 주류사회에 대한 그 처절한 발버둥질. 그러나 그 처절한 발버둥질은 주류사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하는 것과 동시에, 몇몇 대물림되지 말아야 할 것 - 폭력, 이기심, 탐욕 등등 - 까지 동시에 대물림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 아마도 그것들 역시 대물림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대물림되는 그것의 결과물들이 결국 무엇을 초래하는지 영화는 밀도 있는 서사 속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흥미롭게 읽힌다. 이 3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주류 사회의 모습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으로 말해서 한 두가지 장면들을 제외한다면, 이 가정의 모습은 60-70년대 '대한뉴우스'에 실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권장할 만한 가정의 모습이다. 즉 이 모습들은 한국의 나머지 비주류들이 그토록 원하는 부와 지위와 권력을 약간이나마 소유하고 있는 모습이며, 나머지 비주류들에게 이상적인 형태로서 '계몽의 표본이 될' 만한 가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게 계몽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이 '계몽의 표본으로서 내세울만한 가정'이 실상 그 내부적으로 전혀 '계몽의 표본'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이 정도 수준'이 계몽, 혹은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한국 사회의 수준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을 통해 물으며 조소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난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3대의 각 인물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이것이 단지 한 가정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나간 모습들과 그 때의 선택의 결과들이 초래한 현재의 모습임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그간 역사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왔는가? (예를 들자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반민특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선택에 당신은 자유로운가? 아마도...아마도, 그것에 거의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류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그 주류 사회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매달려보고자 이들과 같이 발버둥을 쳐왔으니 말이다. 즉 이 영화의 3대는 타자화된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저 '우리 사회 그 자체'일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가 묵직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다.  
............................................

마지막으로 2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한 가지 의문은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작은 기업체의 사장이자, 집안의 독재적인 가장이며, 카라얀을 사랑하는 예술 애호가이면서(이 카라얀 역시도 아내가 권해준 것) 동시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2대 정학송의 불안한 모습과 그와 대비되는 아내의 모습은 어떠한가. 뒤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라도 이 불안한 남성 캐릭터는 독재적인 군사정권에서 가정과 학교, 군대라는 폭압적인 체제 하에서의 뒤틀린 한국의 남성들을 묘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태선과 그의 남편, 김성호의 관계는 어떨까. 이를 단순하게 태선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성의 잔영으로만 이해하여야 할까. 이 영화의 주된 화자(話者)인 태선과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축인 태선의 어머니(학송의 아내)의 병실에서의 모습 등은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의문은 이 영화의 결론과 관련된 것이다. 문을 전부 뜯어고치겠다는 태선의 태도를 우리는 긍정의 예후로 읽어야 할까. 글쎄. 그러면서도 태선은 여전히 대물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예전의 세대가 직접적으로 부와 지위와 권력을 자식들에게 넘겨 주는 방식을 택했다면, 현재의 세대는 간접적으로 이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자식을 비싼 돈을 들여서 과외를 시키고, 8학군에 보내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이 방식이 더욱 효과가 크다. 그러한 교육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사회구조가 이미 공고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남들 보란듯이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는 이 세련된 방식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점점 주류사회는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선이 자식을 공항에서 홀로 보내는 이 마무리 장면은 꽤나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제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 제목 <계몽영화>를 되새겨보자. 현재의 변질된 의미와는 다르게 본래 계몽이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주체적 현실을 구축해 나감을 의미하였다. 즉 신의 거대한 치마폭에 둘러쌓여 있던 중세의 어두운 시기를 밝게 하는 것(enlightenment), 그것이 바로 계몽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이제 어쩌면 지금의 시기가 새로운 의미의 '계몽', 그리고 그에 바탕한 '계몽영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 2010년 4월, 씨네코드 선재.



* 인디포럼 4월 월례비행으로 본 영화인데, 게으름 덕택으로 이제야 어렵게 기억력을 되살려가며 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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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Viewfinder, 김 정

Ending Credit | 2010. 4. 30. 01:27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는 제목 <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치의 경景, 경계의 경境, 거울의 경鏡,... 그리고 세상이란 창을 통해, 타인이란 거울을 통해, 마침내 자신을 찾게 되는 우리, 주인공의 이름이다'라고. 영화 <경>의 영문 제목인 'Viewfinder'는 카메라를 통해서 피사체를 내다보는 작은 창을 말한다. 용어 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상 이 Viewfinder라는 말은 위의 세 가지 한자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카메라의 작은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치,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경치는 한정되고 가공된, 즉 경계를 가진 경치다. 어떤 성능좋은 카메라라도 모든 경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프레임 안의 경치와 프레임 밖의 경치로 나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치에 대한 가공 및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카메라를 든 주체의 의지가 그 한정된 Viewfinder에  반드시 반영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주체의 거울상이다. 즉 이 작은 네모창은 동시에 경치가 되고, 어떤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경은 주인공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집을 나가버린 동생 후경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그 '검색'은 남강휴게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그 와중에 남자 혹은 인간 검색엔진인 창을 만나기도 하고, 온아라는 휴게소에서 일하는 직원이자, 유명 파워블로거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아니 더 이상의 스토리를 쓰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씨네 21> 리뷰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어느 순간, 그저 죽 따라서 보게된다. 어떤 전체적인 줄거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한장면 한장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관조하게 된다. 어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나, 작가의 이력, 또는 미술 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작품의 순수한 미美에 빠져들어 보게 되는 순간,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온다. 영상의 형식으로 된, 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을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본다. 그러고보니 이 스크린 역시 어떤 하나의 Viewfinder. 

이야기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 같다. 어쩌면, 자매를 둔 여성이라면, 조금은 더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경과 후경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 사이버 추도 페이지에서 경이 되뇌는 독백같은 것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중간중간에 놓인 영화들의 상징에 더욱 마음이 갔다. 물론 이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들이 있다. 중간중간에 살짝 삽입되는 에니메이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정경, 후경, 창, 온아....그러나 그 중에서도 디지털 시대의 어떤 은유들에 대해서 관심 간다. 단지 그것은 작품 곳곳에서 카메라, 네비게이션, 노트북, 휴대폰, PMP 등 디지털 기기들이 출몰하고, 그들이 그것을 켜고, 동영상을 띄우고, 찍고, 바라보고, 충전하고, 로드하고, 끄고 하는 장면들이 반복되어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전체는 어떤 사이버 세계, 디지털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영화들이 가지는 음울한 디스토피아들은 묘하게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묘하게 제거된 디스토피아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불안을 야기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기이한 장면은 사진기자 김박이 창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일 것이다. 현실에 창은 존재하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서 보면 창은 보이지 않는다. 김박은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이럴 때 무엇을 믿어야 할까. 옛날 사람들은 카메라를 믿는 대신, 자신의 눈을 믿었을 것이고, 카메라를 가리키며 귀신들린 기계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보다는 카메라를 믿는다. 예를 들어, TV나 영화에서 활용하는 몇 가지 장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해 놓는 것, 또는 귀신의 형체가 찍혔다고 하는 몇몇의 사진들. 그러므로 현대적인 디지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사진기자 김박은 카메라를 들고 날쌔게 도망가거나,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보여요...' 그러나 사진기자 김박은 약간 갸우뚱거리다가 태연하게 창에게 다가간다. 왜냐하면 그는 검색엔진이니까. 검색엔진은 귀신 따위가 아니니까. 자신의 눈보다 디지털 기기를 더 믿는 거의 디지털화된 인간이 검색엔진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남자 창은 검색엔진일수도, 아닐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군대를 통해서 남자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디지털과 하나가 된, 그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장면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내뱉는 여러 독백들은 마치 어떤 연관성이 없는, 혹은 논리가 없는 검색결과들을 줄줄이 내뱉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상한 모양의 파형들. 그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물론 창(window)이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어쩌면 이 남강휴게소는 거대한 어떤 포털사이트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상주하는 검색엔진 창. 경은 말한다. 이 남강휴게소는 하나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라고. 후경이라는 정보를 찾아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내달리는, 아니 검색하는 여자 경도 휴식을 취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을 끊임없이 검색하며 내달리는 많은 디지털 유목민들에게도 휴식을 취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른바 블로그 혹은 홈페이지 혹은 트위터 같은 것들. 현실 세계에서 인간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평생을 헤메이는 것처럼, 현실의 반영인 사이버 세계에서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수많은 블로그와 홈페이지와 트위터들은 모여서 다시 어떤 거대한 네트워크, 혹은 포털사이트를 구축한다. 영화에는 그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가 또 하나 나온다. 여자 온아(On-我).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은 이름이 알려진 블로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디지털 분신 새아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일하는 곳은 휴게소 정보센터. 고속도로의 지도들을 가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정보의 중심이자 검색엔진이 충전을 하는 곳. 사이버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고, 동시에 현실은 사이버 세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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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검색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검색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세계에서는 동시에 누군가의 존재를 알기(찾아내기) 위해서는 아이디가 필요하다. 아이디를 모르고서는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다. 경은 그녀의 동생 후경을 찾기 위해 아이디를 말한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이버 세계 어디에서도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그녀는 실종된 것일까. 창은 말한다. '실종자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그들을 실종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단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말은, 왠지 사이버 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사이버 상에서 친절하게 댓글을 달고, 방명록을 남기고,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좋은 사람들은 다 실종된 것일까. 아니 단지 그들은 가버린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뿐이다. 아이디를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여 아이디를 안다해도,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수 있다. 경과 후경의 경우를 창이 검색했을 때처럼, 어떤 검색결과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검색 결과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네티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네티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검색 결과도 찾지 못한 경 역시 사이버 추모 페이지에 엄마를 그리며 쓴다. 엄마가 죽은 후, 정말 모르겠다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도 아마도 자신들의 블로그에 이런 말들을 적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것을 검색하여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유영하는 인간들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서정적인 디스토피아.

어떤 검색결과도 찾아내지 못하고,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망연하게 서 있는 경의 반대편에 후경이 있다. 그녀는 이제 온아가 있던 그 자리, 즉 남강휴게소의 정보센터 혹은 포털사이트의 정보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정보의 중심에서, 온아와 비슷하게 어디론가로 떠날 꿈을 꾸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나는 마지막에 궁금해질 뿐이다. 지금 후경이 있는 그곳에 있던, 꿈을 찾아 어디론가로 떠나기를 원하던, 온아와 그녀의 아바타 새아는 어디로갔을까. 그녀는 정말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갔을까. 그녀는 갑자기 어디로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 시사회의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 감사드리며.

 

- 2010년 4월,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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