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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4. 30. 01:23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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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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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eureka),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4. 17. 01:56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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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막바지, 사와이 아저씨(야쿠쇼 코지)는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외친다. “돌아가자!” 그리고 코즈에의 밝은 웃음이 비치고, 지금까지 잿빛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칼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둘은 버스에 올라타고, 화면에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의미심장한 말이 떠오른다. ‘EUREKA' (참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엔딩이다).............. eureka.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그 말. 깨달음의 언어. 왜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가. 누가 잿빛으로 세상을 보던 코즈에에게 총천연색 세상을 선물했는가.

이 엔딩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헬프리스’의 마지막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야스오는 스스로에게 총알을 선물하고, 켄지는 야스오의 동생 유리를 데리고, 돌아올 기약이 없는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 역시 집에 돌아가지만, 다시 길을 떠나게 되고, 고의와 실수가 뒤엉켜 수형 생활이라는 또 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된다. 이런 아이들이 그 중간 ‘유레카’에서는 집에 돌아간다. 그래서 사와이 아저씨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 영화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반갑다. “돌아가자!” 무엇이 이들을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가. ‘헬프리스’와 ‘새드 배케이션’의 외전(外傳) 격이나, 어떻게 보면 ‘헬프리스’의 켄지와 지극히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 소녀는 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가.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부모를 잃는다. ‘헬프리스’의 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는 병실에서 목을 매며, 코즈에와 코즈에의 오빠 나오키의 부모 역시 버스 납치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라져 버리며, ‘새드 배케이션’의 중국인 소년 ‘아춘’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아버지가 죽어 버린다. 그러나 ‘헬프리스’의 켄지와 ‘유레카’의 코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켄지는 아버지를 잃고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지만, 코즈에는 곧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를 가지게 된다. 이는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조금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아춘은 친아버지를 잃고, 곧 켄지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타의에 의해서 그 유사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 친아버지를 잃어버린 켄지는 ‘마미야’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그 유사 아버지의 친아들을 죽임으로써 유사 아버지를 다시 잃는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새드 배케이션’은 ‘유레카’ 그 이후의 이야기이므로 논외로 하자면, ‘헬프리스’의 켄지가 먼 길을 떠나고, ‘유레카’의 코즈에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가 있고, 없음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어떤 고비를 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른, 그것도 제대로 된 어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던져준다. 이 사회에는 과연 그런 어른이란 존재하고 있는가. 그런 어른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좁게 보자면 일본이라는 사회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라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은 영화 중반부터 시작되는 사와이 아저씨의 기침이 계속 반복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름 아닌 그 기침이란 사와이 아저씨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즈에라는 한 생명을 살린 이 사와이 아저씨라는 인물은 과연 이 현대의 일본 사회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이런 사와이 아저씨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은 아키히코나 시게오 정도. 그러나 아키히코는 이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이고, 사와이를 체포한 형사는 사와이에게 당신이 싫다고, 이유없이 싫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형사, 혹은 사와이의 형의 시선이 현대의 일본 사회, 혹은 넓게 보자면 현대 사회의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더욱 증폭된다. 극 중 아춘을 납치해 간 중국인은 켄지에게 말한다. “일본 사람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습니다.”이 말은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사와이와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마미야도 자신의 친아들은 결코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켄지도 자신의 아들인 아춘을 잃는다. 즉 아오야마 신지가 ‘헬프리스’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내고, ‘유레카’에서 그 해답을 제시했다면, 다시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그렇다면 그 유사 아버지들은 이 현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던지며, 다음을 예고했듯이, ‘새드 배케이션’에서 역시 막연한 실마리를 던진다. ‘치요코’라는 강한 어머니의 등장. 이 뺨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고 켄지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이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와이라는 유사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코즈에라는 이 여자는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레카’에서 남자아이인 ‘나오키’는 아버지를 잃고 야스오와 같은 길을 걷지만, 코즈에는 끝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헬프리스’의 해답편인 ‘유레카’를 보고, ‘새드 배케이션’의 해답편인 그 다음의 어떤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그 해답이 제시되면, 아마도 이를 허문영 평론가가 이 3부작 영화를 보고 말한 ‘전후 일본 세대의 정신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 해답은 영원히 제시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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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The Mist), 프랭크 다라본트

Ending Credit | 2008. 4. 12. 21:2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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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정성일 평론가가 <씨네21>에 실은 무지무지하게 긴 이 영화의 리뷰를 읽고, 그 아우라에 압도되어 뭔가를 적어보려는 것을 포기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그 좋은 리뷰는 아래의 링크에) 그러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이 영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기는 뭐, 평론가야 그걸로 먹고 사는 분이고, 나야 재미로 적는 것 뿐 이니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4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5

이 영화 <미스트>는 위에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드러난 이야기와 함께, 동시에 숨겨진 이야기와 맥락을 담고 있는 영화다. 괴물들이 나오는 B급 공포물의 외양을 두르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내부를 한 꺼풀 들어내 보면 평론가들이 한 번 쯤 글을 쓰고 싶어 죽겠어할 많은 숨은 이야기거리들을 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무려 7가지의 판본을 이 긴 글에 담으셨을 것이다.) 괴물들이 출몰하는 B급 공포물, 생태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 영화, 좀비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하나의 기묘한 드라마 등 여러 다양한 판본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영화를 또한 하나의 심리실험극으로도 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의 재미있는(?) 심리실험이 있다. 내가 이것을 심리 ‘실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영화의 슈퍼마켓이라는 공간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험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 주위와의 완전한 고립, 외부에서 제공되는 여러 독립변인들(괴물들의 출몰), 피실험집단 내부를 여러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이렇게 다양한 나이와 인종, 경제력, 사회적 계급을 갖춘 실험집단을 구성하기에 최적의 공간으로서 슈퍼마켓 이상 가는 것이 있겠는가?) - 을 갖춘 이 공간은 마치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준다. 과연 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주위의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실험은 ‘믿음’의 문제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데이빗은 괴물의 존재를 믿으며, 슈퍼마켓 뒷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데이빗을 믿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들은 데이빗을 믿게 되고, 문을 닫고 돌아온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나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을 당한다. 하나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며, 어떤 식으로 불신되는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현실의 하나의 작은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를 하나의 종교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 종교적 신앙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의 데이빗을 믿지 못하던, 함께 슈퍼마켓 뒤로 갔던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일의 해결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보다는 절대 부정하는 사람들이 절대 긍정도 가능하다.’

두 번째 실험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 카모디 부인과 관련지어서 발생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 <미스트>를 읽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안개를 가스로 보며, 이를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보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파시즘 사회의 탄생을 본다. 파시즘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를 그 자양분으로 삼아 기능하는 체제이며, 권력에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또는 내부의 희생양으로 돌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이마르 정권 하에서의 비참한 독일 민중의 막연한 절망과 공포를 이용하여 탄생이 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외부의 적과 체제 내외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그 동력원으로 삼아 유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외부의 괴물들이 출몰하는 고립된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카모디 부인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작은 파시즘 사회가 탄생한다. 카모디 부인은 외부의 괴물들의 공격을 예언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감을 점점 교묘하게 이용하여 증폭시키며,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체제 내부의 적, 즉 데이빗 일행들에게 돌림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시켜 나간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카모디 부인의 광기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광기를 느슨하게 연상시키며, 카모디 부인이 데이빗 일행과 맞설 때 두 남자가 각각 칼을 빼들고 나서는 것은 마치 SS친위대를 연상시킨다. (물론 두 남자의 직업이 요리사(아마도?)와 정비공임은 파시즘에 열광한 주력 세력이 소상인이나 숙련공 등의 당시 독일 민중의 중하층 계급이었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이에 맞서는 리더인 데이빗의 직업이 예술가(화가)임은 또 은근히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서 파시즘 시대의 광기와 이성의 마비를 보며, 사회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가 한 사회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묻는다. 처음에 모두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 아이 엄마가 살아남은 것을 보며, 과연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고. 이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론 이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슈퍼마켓을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보고, 안개를 가스로 하는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이를 읽을 때 가능하겠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녀의 생존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모두가 절망과 공포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아이를 살리러 그 슈퍼마켓 문을 열고 떠난 그 아이 엄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현재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절망과 공포는 점점 그 지형을 넓혀가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가 파시즘의 무서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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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코(Sicko), 마이클 무어

Ending Credit | 2008. 4. 9. 15:1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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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 영화는 계몽영화다. 그것도 상당히 편파적이고 선동적인 계몽영화다. 물론 ‘계몽’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편파와 선동을 담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하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의료보험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영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상당히 중요한 정보처럼 부각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말해주어야 할 것들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도 한다. 일례로 영국과 프랑스의 무상 의료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는 막대한 세금 부과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넘어가기도 하며, 미국의 사례는 지나치게 나쁜 쪽으로 집중되어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는 지나치게 좋은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급기야 마이클 무어는 ‘그라운드 제로’의 영웅들을 이끌고 쿠바를 방문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너무 좋은 쪽으로 포장되어 있다. 즉 마이클 무어는 관타나모 기지에서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쿠바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아마 쿠바로의 방문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며, 쿠바는 체제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좋은 쪽으로만 그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어떤 체제나 외부의 방문자들에게는 체제의 밝은 면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러듯이 말이다. 물론 북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 또한 마이클 무어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균형한 선동 영화를 기꺼이 관람해줄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의 기본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느 낯선 사람에게 심하게 맞아서 생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다행히도 경찰이 지나간다. 우리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경찰이 이렇게 말한다. “폭력에서 당신을 구해주는 것은 100만원을 내시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미국에서는 의료의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암이 온 몸으로 퍼지고, 잘려나간 손가락을 접합하지 못하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누구나 길거리에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과 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최소한 (적어도) 살 권리는 있다. 이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며,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일이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평등은 결코 이뤄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스웨터가 내 스웨터보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 모두가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를 이 영화에 빗대어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프면 1인 특등실에 입원하고, 내가 아프면 6인 공동실에 입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둘 다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이클 무어는 묻는다. 우리가 도서관도 공짜로 이용하고, 소방서나 경찰서도 공짜로 이용하는데, 왜 의료서비스는 안되냐고.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으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병원이 없어지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도), 왜 의료서비스만 공공복지의 영역이 아닌, 경쟁의 영역에 들어가 있어야 하느냐고.

 

하기는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어쩌면 이 영화를 그저 아주 재미있게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저저 미국넘들이란 말이지 ...하고 조소를 보내면서 말이다. (모든 메시지를 제외하고 그저 영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마이클 무어는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랬듯이 상당히 귀여운 구석이 많다. 그는 적어도 농담을 할 줄 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농담들을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을 가지고 상당히 장난을 많이 치는데, - 난데없이 스타워즈 음악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 내용은 아주 심각하지만, 그러한 몇몇 귀여운 구석 때문에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교묘한 편집 능력도 여전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이런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하나 있어서 MB를 다뤄주면 상당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 때 MB의 BBK 의혹 같은 거 말이다. 그가 자신의 안티 사이트 운영자에게 수표를 보냈다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나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마냥 웃기만은 힘들어진다. 정말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런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10시간을 기다려도 치료를 받게 된다면 행복한 거라고. 앞으로 병원에서 마냥 기다리라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다고.)

(솔직히 조선이나 중앙이나 동아일보 쪽 기사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네이버에서 이들 3개 신문의 뉴스 내용을 ‘의료산업화 이명박’ 혹은 ‘의료보험 민영화 이명박’으로 검색하면 단 1개의 뉴스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편향된 한겨레 기사를.)

 

그래서 계몽이란 건 엿이나 먹으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편파적인 계몽 영화를 보고 이런 계몽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작 계몽을 당해야 할 사람들은 이런 계몽적인 것을 안보는 경향이 있다. (성에 대해서는 지 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아는 친구들이 성교육 시간에 눈을 더 많이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단성사 7관에도 딱 10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런 편파적인 계몽 영화는 돈 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어차피 그거 봐봤자 마이클 무어의 배나 불러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하긴 이미 배가 많이 부르긴 했다), 댓글 올리다가 지쳐 잠시 쉬고 싶은 나라당 알바들이나..그 외 누구라도 원한다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주면 방금 다운 받은 따끈따끈한 ‘식코’ 무비를 기꺼이 보내드리겠다. 물론 자막의 질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저도 파일은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5/4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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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리스(helpless),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4. 5. 00:34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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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드 배케이션>을 보고,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에 흥미를 가지고, 감독이 직접 집필한 동명의 소설 <새드 베케이션>을 읽고(이 소설은 영화 내용과 거의 같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만한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소설이다 보니 등장인물 캐릭터가 영화보다는 훨씬 디테일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소설을 읽으니 장면장면마다 영화 장면이 떠올라 소설을 읽을 때의 특유의 상상력이 제한을 받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10년 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아오야마 신지의 1996년도 작 <헬프리스(helpless)>를 다운받아 보았다(그러나 아무래도 모든 영화는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보아야 제격이다. 다운 받아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 나홀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분명히 이 영화도 스크린으로 보았더라면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다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은 방법이 없었다-라고 변명 중).

 

이 영화에서는 여전히(사실 이와 반대로 말해야겠지만) 아사노 타다노부가 주인공 켄지 역을 맡고 있고, 야스오의 동생인 유리 역도 여전히 츠지 카오리가 맡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연속성을 가지는 동시에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와 <헬프리스>의 켄지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비교 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켄지는 여전하다.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 그래서 전혀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물론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러한 선과 악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 일부분을 슬그머니 꺼내 보인다. 그러나 이 켄지라는 인물은 정제되지 않은 선과 정제되지 않은 악이랄까. 때를 타기 이전의 선과 악이랄까). 아사노 타다노부의 속을 알 수 없게 하는 연기는 여전하다.

 

이 영화는 서늘하고 무섭다. 이 영화는 결코 폭력과 살인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차가우며, 날카롭다. 이 영화에서 결말은 사실 이미 예정되어 있다. 감독은 이 차가운 결말을 이미 예정지어 놓고, 그 결말을 피해보려 미친 듯이 애쓰는 주인공들을 지극히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한다. 아니나다를까, 주인공들은 예정된 비극적인 결말 속으로 조용히 달려간다(이 영화는 많은 폭력 장면을 담고 있지만, 이상스럽게도 조용하다. 그것이 더욱 무섭게 만든다). 그리고 켄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응시하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보인다.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시나요? 당신은 이렇게 될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야스오(마츠이시 켄)가 보스가 죽어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미친 듯이 보스를 찾는 것이나, 켄지가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자주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켄지가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켄지가 아버지를 잃어버린 순간, 그는 보스를 잃어버린 야스오와 똑같은 인물이 된다. 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야스오의 유사 아버지, 그리고 이제 그 모두의 부재(不在). 야스오는 이 부재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길을 택하지만, 켄지는 다시 유리라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새드 배케이션>에 이르는 긴 길을. (아마도 <새드 배케이션>의 시작부분에도 Johnny Thunders의 노래와 함께, 거리의 풍경을 위에서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헬프리스)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도 길이 나온다.)

 

이 <헬프리스>의 아버지의 부재와 <새드 배케이션>의 치요코-사에코-코즈에라는 강한 여성들의 등장(한편으로는 모계사회를 연상시키는)과 ‘마미야 월드’의 기묘한 유사가족이 묘하게 접점을 이루지만, 아직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은 모호하다. 아마도 이는 그의 3부작 중의 하나인 <유레카>를 보아야 뭔가 잡을 수 있을 듯. (이건 여담이지만 이 영화 <헬프리스>는 약 1시간 20분 남짓,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은 2시간 20분 정도, 그리고 <유레카>는 3시간이 넘어간다. 영화를 개봉하고자 하는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절대 반기지 않을 감독이다. 하긴 궁금해서 찾아본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얼굴이 왠지 강단있어 보여서 픽 웃음이 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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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홍상수

Ending Credit | 2008. 4. 1. 01:49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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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또는 민망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한 켠에 숨겨 놓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구석을 홍상수는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부끄러워하는, 혹은 민망해하는 그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을 피우며, 짐짓 부러 괴이한 이미지를 살짝 끼워 넣고는 다시 우리를 의식의 이편으로 이끌고 나온다.

그것이 흔히들 말해지는 위선이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진다는 것에서 위선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것보다 더욱 지독한 위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물들의 행동들을 스크린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관객들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부러 웃음을 터뜨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2.

그러나 이번의 홍상수의 이 영화 <밤과 낮>은 그리 부러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도리어 말 그대로 상당히 재미있어서, 상당히 웃겨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웃음들이 많은 편이다. 그것은 상당부분 남자주인공 이성남(김영호)의 애 같은 행동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예전 홍상수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을 맡았던 유지태나 문성근, 혹은 김태우 등의 배우들이 어떤 지적인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면, 이 영화의 김영호는 몸만 자랐지, 표정이나 행동은 그야말로 애 다운 행동을 해보이고 있기 때문에, 귀엽다고 할까, 혹은 백치미가 풀풀 풍긴다고 해야 하나. 예전 <극장전>의 김상경보다 조금 더 퇴화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막바지 아내 성인(황수정)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사실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아들같은 느낌이 상당히 풍겨난다.)

또한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상당히 유머를 친다. 이성남의 꿈 부분에서 목욕탕 창문에 코를 들이박는 돼지라든가(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영화관에서 가장 폭소가 터진 순간이다), 도빌 해변이 연상시키는 전작 <해변의 여인>이라든가, 꿈에서 유정(박은혜)의 발가락을 빠는 성남이라든가...상당히 여러 군데, 홍상수의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묘하게 뒤틀린 재미있는 이미지들과 대사들이 많다.

 

3.

이 영화를 보기 전, 그리고 보고 난 후에 <씨네21>등의 매체라던가, 인터넷을 통해서 이 영화 <밤과 낮>을 소개한, 그리고 분석한 여러 많은 글들을 보았다. 그러한 많은 글들에서 홍상수의 이 영화는 장면 장면 조각되고, 낱낱이 해체되어 새롭게 구조화된다. 그리고 조각된 장면들과 해체된 구조물은 다시 일일이 새로운 의미의 이름표를 달아, 새로운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대구와 반복(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성남의 중요한 화법이다. 이름하여 반복화법. 상대방의 말을 받아 그대로 되뇌기)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서 이 영화의 일기체 형식을 논하는 것(밤과 낮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리고 이성남의 마음 속에서 흐르지 않는 시간들(그에게 파리에 있는 시간은 도피의 시간들이기 때문에)이 실제로는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와 이성남의 독백을 통해),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과 <세상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보다도 훨씬 자세하고 풍부하게 잘 할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 두기로 하자. 단지 나는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나의 예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는 것, 그의 전작들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물론 이 재미있는 영화의 관객들은 나를 포함해서 4명뿐이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여러 많은 평들이 지적한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절망적일 수 있다. 죽어있는 구름 그림이 상징하는 대로, 처음부터 아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남자는 아기를 살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유정과 함께 파리에 남아서 유정이 낳은 아기를 같이 키워나가는 것이 훨씬 희망적인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홍상수의 농담들은 다른 한편에서 조금은 희망적이게 만든다. 농담이라는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공간에서도 존재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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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3. 21. 14:10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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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낮의 명동 거리는 시끄럽고 복잡했다.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와 반면 시끄러움을 피해 들어간 한 낮의 중앙시네마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이 지나친 시끄러움과 지나친 조용함은 나를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안 맞으면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3시 20분. 영화는 136분짜리. 약속 시간은 저녁 6시. 이 보다 더 시간이 잘 맞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5000원짜리 티켓을 사고(스폰지데이라고 하더군, 이런 고마울 데가), 1000원짜리 콜라를 사고(메가박스나 롯데시네마의 1500원짜리 콜라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다.

자리는 약간 비좁고, 앞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앞사람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어디선가에서 “누가 중앙 아니랠까봐.”라는 투정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관객층은 막 대학생이 된 듯한 소년에 가까운 청년에서부터, 나란히 앉은 젊은 여성관객 몇 그룹, 머리가 백발이 된 어느 노신사, 중년의 아주머니와 딸로 보이는 듯한 젊은 여성, 그리고 띄엄띄엄, 그러나 균형을 이루고 앉아 있는 남자 몇 명, 그리고 나. 생각보다 관객은 많다. 한 30명 정도 될라나? 이상한 음색의, 마치 학교종을 연상시키는 차임벨과 함께 갑자기 광고도 하나 없이 마이클 무어의 <식코> 예고편이 흘러나온다(암튼 마이클 무어의 교묘한 편집능력은 이 짧은 예고편에서부터 드러난다. “미국의 복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라는 부시의 연설에 곧 이어, “내 남편은 의료혜택도 못 받고 죽어갔어요.”라는 한 아주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그리고 곧 이 영화가 시작한다. <새드 배케이션>.

2.

이 남자, 켄지(아사노 타다노부).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돈을 위해 사람을 팔아넘기는 극단의 악과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는 구해서 도망치는 극단의 선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줄곧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떠돈다. 그것은 영화 속 고토(오다기리 조)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요.” (아마도 고토는 무서운 것들을 판별하는 능력을 누구보다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도망쳐야 하니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의 이런 불안한 기운이 예전의 어떤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임이, 그리고 이런 불안하고 기묘한 동거가 사실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복수의 하나로서 이어지고 있음이 거의 모든 영화관의 관객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단지 복수인가, 그는 정말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영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내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에 너무 빠져버린 탓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러나 결코 평온하지 않은 그의 얼굴,)

사실 그가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으면 되었던 것이다(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계속 ‘미안해, 미안해’가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 무서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실상 켄지는 약한 사람이었고,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부서지지 않는 존재, 그는 그의 어머니였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욱 아득히 멀어지는 어머니라는 존재. <헬프리스>, <유레카>에 이어지는 이 3부작 <새드 베케이션>에서도 그래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켄지의 복수 아닌 복수는 도리어 그를 다치게 만들었을 뿐이며, 그는 아직 많은 것들 사이에 놓여 있다.

3.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이른바 ‘마미야 월드’에 대한 것이다. 일견 따뜻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로도 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고 기묘한 공동체이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동시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들의 집합. 서로가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그러한 일정한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런 집합. (비누 방울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퐁’하고 터지는 것처럼, 아주 불안한 그런 공동체 말이다.)

그런 공동체가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사는 회사나 학교의 많은 부분들이 그런 사람들의 조합이며, 그런 식의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어쩌면, 우리 학교나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도 카메라를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 식대로 가져다댄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는지.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함에도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중국인 소년 아춘을 납치해가고, 사람을 칼로 찔러대는 그런 무서운 세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외부에도 그보다도 몇 배는 훨씬 더 무서운 세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안한 기운을 증폭시키던, 뭔가 불안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흘러나오던 기묘하게 삐걱거리는 듯한 음악이 생각난다.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4.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한참 올라가는데도 누구하나 일어서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주연배우들의 이름이 지나가고, 스탭들의 이름이 올라갈 참이면 나도 일어설 텐데,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아 이런 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네,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영화가 끝나고 앞으로 이런 짓을 가끔 해봐야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엔딩크레딧 송을 들으며, 이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불안하고도 기묘하고도 복잡한 세계를 매끄러운 솜씨로,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려낼 줄 아는 감독이라면, 분명히 다른 영화들도 녹록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헬프리스>와 <유레카>를 구해야 할 때.








                                

Johnny Thunders- Sad Va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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