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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허종호

Ending Credit | 2011. 9. 26. 15: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꽤 힘들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이 영화가 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생각을 해보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요즘의 많은 한국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상당한 '기획물'의 냄새가 난다. 물론 기획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명작으로 추앙받는 많은 영화들도 상당수는 철저한 기획의 산물이고, 감독의 힘이라기 보다는 제작자의 힘으로 탄생한 명작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한국영화들을 보면, 조금 이상한 기획들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영화들은 일단 그럴듯해 보이는 한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을 잃은 냉혹한 채권추심원이 암선고를 받고 장기이식을 받기 위해 사기꾼 여자를 만난다..아마 이 영화도 이런 그럴듯하고, 뭔가 물씬물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자 이거 돈이 될 거 같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일단 명확한 캐릭터들은 이런 기획에 필수적이다. 주조연할 것 없이 캐릭터들의 성격은 과장에 가까울정도로 선명해지고, 그들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영화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맥락을 알 수 없게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고, 붙은 이야기들은 처음의 플롯과 조금씩 겉돌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깔끔하고 차근차근히 뼈대를 만들지 않고, 일단 큰 줄기만 세운 다음에 가지를 붙여나가는 식이니까. 동시에 뭔가 새로운 입김이 여기에 계속적으로 붙는다. 액션도 붙어야 하고, 감동도 붙어야 하고, 유머도 붙어야 하고, 잔재미도 붙어야 한다. 그러므로 난데없이 신파의 코드가 등장하고, 카체이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처음에 필요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게도 뭔가를 만들어주려다 보니, 이상한 잔개그들이 붙는다. 영화는 점점 뭔가 어리둥절해진다.

이 영화 <카운트다운>이 딱 그런 식이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이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 다음이다. 어차피 이런 기획류의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게 마련이고, 그 어지럽게 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이런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매끄러운 봉합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인상적으로 보이는 씬들도 많다. 그런데 그 씬과 씬들이 이상하게도 잘 붙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인상적인 영화들의 모자이크인 것도 같다. 각 씬들은 때로는 날카로운 유머를 발휘하고, 다른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시원한 액션을 보여주고,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을 만들면서 어떤 인상들을 심지만, 그 인상들이 뚝뚝 분절되다 보니, 그 인상의 힘마저도 조금은 의심하게 만든다. 즉 각각의 씬들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와 다른 어떤 좋은 영화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어떤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 혹은 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를 놓고서는 당연히 영화에서 진작 해결되어야 할 필요없는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화의 주인공 태건호(정재영)는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일종의 생존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외면적인 차가운 냉혹함은 겉과는 다르게 속에서의 부글부글 끓는듯한 살고자 하는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살고자 하는 욕구로 차하연(전도연)과 또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건 동행을 하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의 화신이 되었을까. 단지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억울해서? 아니면, 아들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아들이 이 냉혹한 세계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신만이라도 강해지려고? 냉혹해지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회에 어떤 복수를 행하려고? 이 중 어떤 것도 답일 수 있고, 몇 가지를 조합한 것이 답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 태건호가 영화의 거의 마지막까지 아들이 죽은 진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이 답변만으로는 뭔가 군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떤 답에도 모호한 입장을 내비친다. 아니, 어떻게 보면 뭔가 입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므로, 어떤 중요한 메시지처럼 보이는 '아이러니(irony)'라는 것에 그 답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뜻풀이까지 보여지듯이, 아이러니는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 '황당하다'는 말은 결국 그 이유나 의미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황당한 것은 황당한 것이지, 그 황당한 것에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저 우연이 빚은 결과일 뿐이며,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의 이야기로 가져와본다면 태건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일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다른 수많은 것에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차하연의 딸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그저 설명될 필요 없이 아이러니에 가까워질 뿐이다. (마지막 감동 코드를 넣으려면 필요해!) 영화 속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뭔가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개연성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 역시 아이러니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마지막 태건호는 조명석(이경영)과의 만남에서 차하연을 스와이(오만석)에게 인질로 맡기고, 뭔가 승부수를 띄우는 듯 하지만, 스와이가 차하연을 데리고 그 장소에 나타남으로써, 멋진 대결은 김상진씩 떼싸움이 되어버리고, 사건은 결국 태건호가 부른 경찰에 의해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이유로 스와이에게 나타나 담판을 짓는 듯한 액션을 취하는지?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 '아이러니'라는 것으로 가려진 의미를 관객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건다. 그것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가끔 숏의 빠른 분절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차하연의 사기행각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숏의 빠른 분절과 타이트한 리듬과 인상적인 대사들로 나타내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굳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을까. 차하연의 사기행각은 사실 훨씬 간단한 방식이니까. 차하연의 말대로 그런 남자들이란 이쁘고, 돈 좀 가지고 그럴듯하게 말해주면 넘어오는 단순한 존재들일 뿐이니까. 차하연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굳이 그런 다른 몇몇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설명들이 필요했을까 의문이다. 숏의 잦은 분절로 빠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복잡한 이야기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이지,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게 현혹시킬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이 영화가 캐릭터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인상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나름 중요한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장면을 소화해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고는 다시 바로 사라질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와 비슷하게 등장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캐릭터를 영화에 불러들일 때는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스크린에서 소비될 때는 어떤가.) 이들은 단지 관객에게 눈물샘을 자극할 요량으로 이 스크린에 불려나와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기획물의 맥락에서 이들은 단지 다른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 앞으로 소환된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태건호에게 추궁당한 장애를 가진 늙은 부모는 그렇게 소환된 후 곧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태건호의 부모가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인물로 표현될 이유가 있을까. 태건호의 아들이 또 장애를 가진 인물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캐릭터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비슷한 것을 차하연의 딸에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10억을 그렇게 쉽게 뿌리치는, 친부모에게 버려진 채 어렵게 살아온 10대 소녀가 단지 '쿨한 것'으로만 느껴질 수 없는 이유. 웃으면서도 어리둥절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 <카운트다운>을 보고 나오니 결국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강한 캐릭터도 있고, 재치있는 대사도 있고, 인상적인 씬들도 있다. 그 인상적인 씬들은 액션 장면에서는 충분히 쾌감을 느끼게도 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씬에서는 충분히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대중영화로서의 전부일까, 혹은 대중영화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극대치일까. 요즘의 어떤 한국영화들을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매끄러움이 유달리 눈에 띈다. 예전의 한국영화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던, 할리우드적인 매끄러움이 점점 대세가 되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영화들은 어떤 할리우드 영화들의 일부 특징들도 같이 흡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질문을 하기는 하되, 그 답을 극도로 빠른 시간에 관객들에게 되돌려줘 일종의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 따위는 하지마라, 생각은 내가 대신해준다는 식이다. 당신은 재치있는 대사 나올 때 적당히 웃어주고, 액션씬 나올 때 적당히 쾌감을 느껴주고, 감동씬 나올 때 적당히 따뜻해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 <카운트다운>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뭔가 질문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 답변은 이거다. 그건 그냥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것, 즉 황당한 일일 뿐이니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일까...생각해본다.




덧.
요즘에 개봉 전주 주말에 유료시사회를 하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말이 유료시사회지, 그저 미리 땡겨서 하는 주말개봉일 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빠른 입소문으로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 사이에서 대세를 선점하려는 배급사들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체로 입소문으로 선전할 것 같은 영화들 -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자신이 있는' 영화들 - 이 이런 전략을 쓰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 <카운트다운>은 조금 호불호가 팽팽하게 갈릴 것 같은 영화다. 이런 '불호'에 가까운 나같은 관객의 이런 리뷰가 먼저라서 죄송합니다. 컥.


- 2011년 9월, CGV 왕십리.
:

북촌방향, 홍상수

Ending Credit | 2011. 9. 19. 23:4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북촌방향>이라는 제목은 절묘하다. 그 제목은 북촌이라는 마법의 공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방향이라는 시간성을 담고 있다.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이동한다는 것이며, 이동이란 그 안에 시간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에서 '이동하는 행위'가 보여지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어디론가의 공간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다시 어디론가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그 이동하는 행위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 이동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이동은 번번이 지연된다. 다만 영화의 처음 부분에 그가 북촌의 밖인 고덕동으로 향할 때에는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이 보인다. 북촌 안에서의 이동과 북촌 밖의 이동의 이 차이. 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싶다. 그는 북촌 밖으로 정말 나갔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의 시간이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부분이므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연속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시간은 가끔 이상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성준(유준상)이 중간에 술집여주인 예전(김보경) - '예전'이라니! 이 유머는 도대체. -  과 키스를 하며 나누는 대화를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도 있지만, 마치 과거로 돌아가 경진(김보경)과 하는 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에는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 영화의 시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밤씬 다음에 낮씬이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히 하루(혹은 며칠)가 흘렀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러한 짐작이 의미가 없어진다. 아니, 어떤 부분에 이르면, 낮씬과 밤씬을 구별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홍상수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 그것이 또 한몫을 한다). 이들은 도대체 낮술을 먹고 있을까, 아니면 밤술을 먹고 있을까. 왜 이 영화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파괴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많은 영화에서 독특한 시간들이 보여지는 것은 그렇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결국 시간의 예술이므로, 그 시간들은 대개의 영화 속에서 나름 의미를 가지고 변주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은 대체로 정방향으로 흐른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시간이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았다. 거꾸로 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몸이었지, 그것을 결코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일종의 착시와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영화에서 시간은 앞으로도 당겨지고, 뒤로도 보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보내진 공간에서 그 시간은 다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북촌방향>과 시간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비교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도 시간은 감겨지기는 했지만, 감겨진 상태에서는 정확히 다시 24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레이는 매번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주인공을 깨우기 위해 울려대는 알람이라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북촌방향>에서 성준이 잠을 자는 장면은 없다. 일반적으로 말했을 때 '잠을 잔다'는 의미는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북촌방향>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 모호한 의미만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그것의 이유가 있을까. 시간을 제거해버리면, 같이 제거되는 것, 혹은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디어 보이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영화의 독특한 예고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이 영화의 예고편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예고편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눈발 날리는 거리에 나와 서 있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예고편이 독특해 지는 것은 음악과 음성을 그대로 두되, 화면을 거꾸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떤 별 의미없는 동작들의 합인 것처럼도 느껴지며, 일종의 약간 우스꽝스러운 무용인 듯도 느껴진다. 즉 그들의 동작은 처음 의도인 '택시 잡기'를 의미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여기에 뭔가 생각할 부분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보람(송선미)이 길을 건너 뛰어가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뒤이어 영호(김상중)가 그 뒤를 따라가 프레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영호가 보람을 바래다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어떤 '맥락'에 따라, 영호가 보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의도'와 이 장면을 연결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우리는 그 장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저 조금 우스꽝스러운 프레임으로의 뛰어듬(거꾸로 돌렸으므로)일 뿐이다.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곧 그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즉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은, 곧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점.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의도가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기억나는 홍상수의 전작 <옥희의 영화> 진구(이선균)의 대사.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던 말. 그러나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을 것이고, 그 이유, 즉 우연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어 우유곽이 거기에 날려왔다고 해도, 그 바람이 분 것에는 결국 어떤 이유가 있다. 과학적 이유라고 해도 좋고, 신의 어떤 커다란 계획이라고 해도 좋다. 어찌되었던 간에 뭔가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진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일종의 신이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복잡한 메커니즘의 이유를 아는 자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자는 아마 신일 것이고, 신은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미리 커다란 '의도'를 가지고 계획했을 것이므로. (저번에도 이야기했던 박성원의 단편 <하루>. 누군가의 하루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북촌방향>의 변주인 것도 같다. 성준의 하루를 알면 아마 모든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홍상수는 그 의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보람은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영화 관계자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성준은 그것은 우연이며, 우리는 그 우연에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일종의 필연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연의 중첩은 그 우연이 일어난 후 사후적으로만 어떤 의미망으로 들어온다. 어떤 일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 이유에 대해 바로 깊이 생각하는 것(<옥희의 영화>의 진구처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우연들에 담겼던 의미에 대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될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결코 그 전체를 볼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아주 일부의 이유만 나중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는 그조차도 알지 못한다. '필연'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 우연에 일종의 통제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며,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우리는 툭하면, 영화의 의도가 어떻고, 작품의 의도가 어떻고를 이야기하니까. 그러나 사실 그 우리가 말했던 '의도'가 그 '의도'였던가.)

그러므로 시간을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의도를 무너뜨린 홍상수는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 우연들(어쩌면 신의 '의도'들)의 오묘한 조화에 겸손할 것. 신이 되려고 하지말고, 찰나를 겸손하게 잡아나갈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찰나적 순간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어찌되었던 전체를 영원히(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볼 수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찰나적 순간을 잡아챌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 속 성준이 제시한대로 '일기쓰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 일기쓰기는 분명 보통의 일기쓰기는 아니다. 홍상수는 말한다. (<씨네21> 819호 김혜리에 의해 이루어진 홍상수 인터뷰. 질문(김혜리):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답변(홍상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는 것이 아닌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매일 쳐다보는 것. 그것이 홍상수가 말한 찰나적 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채는 일기쓰기이다. 

이러한 말은 영화 처음의 성준의 대사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깨끗하게 통과해가는 것.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미세한 구멍들이 몇 개 뚫린 커다란 구를 하나의 직선의 화살표가 관통하는 그림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그 직선을 따라 그 커다란 구를 조심스레 통과하고 있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통과하다가 그 뚫린 구멍으로 구의 바깥을 찰나적 순간에 들여다 볼 수 있다(홍상수식 일기를 오래 쓰다 보면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 바깥에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하지만, 우리는 그 바깥의 전체 메커니즘을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들여다본 것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일 뿐이니까. 구의 바깥은 결국 완전히 그 구를 빠져나왔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여러가지를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다가, 때로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순간 귀 뒤가 서늘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우리는 그 구멍을 찰나적으로 지나쳐갈 뿐이므로 곧 잊어버린다. 그 전체를 보는 것은 그것을 다 통과한 마지막 이후이다. 삶이라는 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통과한다는 것, 관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성준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통과해나간다고 했지만, 곧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경진을 만났다. 어쩌면 그에게 처음부터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북촌이라는 공간안에서 붙들렸다. 그가 붙들린 것은 사람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고, 바로 시간이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관통하려는 자가 시간에 붙들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영화 속에서 마지막 찬스를 만났다. 바로 사진 찍히기. 이것이 찬스인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진 찍히기란 다른 말로 하자면, 찰나적 시간을 잡아채는 것, 즉 찰나적 시간을 순간적으로 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일그러지거나, 나쁘게 보이는 얼굴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찬스에서 그는 탈출의 기회를 잡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고 어두운 기운을 남긴다. 그것 역시 두 가지의 이유. 하나는 그가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 저승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저승의 물건을 먹으면 안된다는 신화 속 경고. 비슷하게 말하자면, 그는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진 속에서 북촌 안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준의 표정. 그는 그 찰나적 순간에 무엇을 보았을까. 구의 바깥을 작은 구멍을 통해 운좋게 들여다본 자가 짓는 두려워하는, 혹은 놀란 듯한 표정. 그는 구의 바깥에 있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가 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물론 대부분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인간들이란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지연시키려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로는 깨끗하게 통과하여 집으로 슝슝 가겠다고 하지만, 우리도 그것을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소설'로 달려가 술을 마신다.

덧.
홍상수의 영화는 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3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북촌방향>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써보라고 하면 가능할까. 아마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가깝게는 어떤 평자들(대표적으로 <씨네21>의 정한석)이 영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자꾸 뭔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멀게는 홍상수의 영화를 '영화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어떤 영화가 글로 쉽게 설명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 영화가 영화라는 고유의 속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글은 분명히 영화와는 다른 나름의 고유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 이루어지는 영화 비평이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어떤 영화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비평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방법은 영화로 비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김혜리 씨의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음악이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는 말, 모든 예술은 결국 음악을 닮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음악은 결코 글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말할 때 결국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홍상수의 영화들은 결국 그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를 가지고 화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글쓰기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덧2.
<북촌방향> 트레일러.



- 2011년 9월, 씨네큐브.
: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

Ending Credit | 2011. 9. 1. 16:29 | Posted by 맥거핀.


 


(작품의 내용을 꽤 담고 있습니다.)



지난 G20 전후에 이루어진 일명 '쥐그림' 공판을 보면서, 뱅크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공판에서 검사는 쥐그림이 뱅크시의 작품에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작가이자 피고의 항변에, 뱅크시의 권위에 기대지 말라며 일갈한다. 한국 검사님이 '뱅크시의 권위' 운운해 주시는 뱅크시는 어떤 사람인가. 뱅크시는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자신의 작품을 게릴라 전시했고, 체포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쌓은 거대한 장벽에 평화의 염원을 담은 벽화를 그리는 등 저항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는 세계적인 그래피티(거리미술) 아티스트(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 뱅크시가 직접 감독한 영화가 개봉되었다길래 시간을 내어 보러 갔다왔다. 제목은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와중에 여러 생각해볼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다. 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뱅크시가 얼굴을 숨긴 채로(그래피티 작업이 일종의 불법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뱅크시의 얼굴은 끝내 가려진다) 이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뱅크시는 먼저 티에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티에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이유로 주위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있는 괴짜로 그는 자신의 사촌의 작업을 계기로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여러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담았던 티에리는 그래피티계의 거목 뱅크시에게 집착하고 결국 그의 작업에도 참여하며,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상업화되는 그래피티에 불편함을 느끼던 뱅크시는 티에리에게 그래피티의 진실함을 보여줄 다큐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만, 티에리가 가져온 것은 참담한 수준의 결과물. 결국 뱅크시는 생각을 바꿔 그동안 간간이 그래피티 작업도 했던 티에리에게 그의 그래피티를 전시해 볼 것을 권유하고, 그것을 도리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결국 티에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MBW(Mr.BrainWash -세뇌)가 되어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사실 이렇게 줄거리를 적으면, 조금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뱅크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영화를 시작했는데, 줄거리를 보니까 온통 티에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얘기잖아. 사실 그렇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상당수가 조금은 의문을 가졌을 법도 하다.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티에리의 지난 배경이나, 그의 기록벽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영화는 결국 티에리의 전시와 그 전시의 예기치못한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뱅크시의 영화라고 했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티에리의 영화에 가깝다. 왜 그럴까. 왜 뱅크시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시작했던 이 영화는 티에리의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뱅크시에 대해서는 거의 지나가는 조연 수준으로만 다루고 영화를 끝맺는 것일까. 의문과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티에리의 위치의 시작은 '기록하는 자'이다. 기록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기록은 보존의 욕구이며, 수집의 욕구이다. 동시에 일종의 감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의 복합적인 의미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티에리를 대하는 복합적인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티에리를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래피티는 감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기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몰래 그림을 그리거나, 붙이는 그래피티의 특성상 그래피티는 여러 불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감시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그래피티라는 것 자체가 권위의 감시에 저항하며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래피티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작업이 기록될 필요가 있다. 그래피티는 언젠가는, 혹은 빠른 시간안에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제거된다. 따라서 그래피티 예술가들은 티에리를 조금은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그의 기록을 반기기도 하고, 때로는 작업에 깊숙이 동참시키기도 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티에리의 기록으로 작업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입장의 반대로, 티에리의 입장은 어떨까. 티에리의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티에리의 욕구가 기록을 넘어서서 일종의 수집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듯이 티에리의 기록은 그것의 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티에리는 수많은 테이프에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창고 어딘가로 깊숙이 던져 버린다. 즉 이것은 일종의 수집벽에 가까워진다. 수집은 어느 순간, 오로지 창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어떤 수집가들은 한 번 수집한 이후에는 그것을 결코 쳐다보지 않는다. 그가 쾌락을 느끼는 것은, 수집의 순간이다. 이미 손에 들어온 수집품은 더 이상 그에게 쾌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집은 '희소'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수집가들이 가장 쾌감을 느낄 때에는 아마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일 것이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예를 들어 명품에 대한 일종의 집착에도 관련이 있다. 명품이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의 희소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하듯이, 개나 소나 매고 다니는 것은 더이상 명품이 아니다. 즉 명품은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가지되, 희소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는 티에리의 뱅크시를 향한 집착으로 설명이 된다. 티에리가 뱅크시를 찍을 것을 열망하고, 그의 연락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은 이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뱅크시는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면서(확실히 그의 작업은 영화 속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업보다 작업의 퀄리티나 전달하는 메시지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 그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대상이다. 티에리에게는 즉, 명품이다.


자,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뱅크시가 티에리에게만 명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뱅크시는 그의 희소한 가치로 미술계의 주목을 끌게 되고, 그의 작품들은 점차 미술 경매 시장에서 고가의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거리에 재빨리 그려지고, 사라졌던 그의 작품들은 이제 어느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 비유가 용서된다면) 뱅크시는 아주 맛있으나 거의 파는 곳을 찾아보기 어려운 불량식품이 되었다. 뱅크시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거리미술이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거리미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미술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거기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했던 낙원(휴양지)의 그림은 그것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격리한 장벽에 그려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대저택의 벽면에 그려진 휴양지의 그림이 가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관타나모 구금자의 모형이 바로 디즈니랜드에 세워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미국의 대표적인 꿈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디즈니랜드에 세워진 주황색 옷을 입은 구금자를 수많은 관광객이 볼 때의 그 이질감.

그러므로 여기에서 뱅크시에게 티에리라는 상(象)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티에리의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모방과 조잡한 아이디어와 수많은 다른 예술가들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 티에리의 전시가 여러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좋은 비평을 받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여주는 것. 즉 당신들의 소비하는 수준이 딱 이 정도라는 것. 당신들은 어떠한 것이 왜 가치가 있는지를 깊숙이 따져보기도 전에 그것이 단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티에리의 전시는 이를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티에리는 자신의 전시를 성공시킬 아이디어 중의 하나로 선착순 관객명 200명에게 각각의 다른 '하나밖에 없는' 포스터를 나눠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열광할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는 티에리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뱅크시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티에리는 결국 뱅크시의 일종의 왜곡된 허상을 일부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티에리의 작업이란 잡지를 넘겨다보다가 괜찮은 이미지가 있으면, 여러가지를 적당히 조합하는 것이다. 물론, 그 조합도 자신의 손이 아니라 다른 장인의 손을 빌려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티에리는 자신이 대단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소위 예술가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물론 뱅크시의 작업은 이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래피티는 다른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거리예술의 특성상, 동시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빠르게 얻으려면 알려진 이미지들을 -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 버락 오바마, 스페이스 인베이더(게임), 혹은 쥐 - 활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티에리는 뱅크시의 왜곡된 일부분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희소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일부분(수집에 가까운 기록벽)도 동시에 담고 있다.

티에리는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뱅크시가 딱 활용하기 좋은 대상이다. 그의 수집벽과 얼토당토 않은 작업과 그것의 성공을 보여주면서, 뱅크시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즉 영화 속에서 티에리의 작업이 상찬을 받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뱅크시 자신이 놓여진 상황과 같지만, 그 상업적 성공 속에는 결국 무엇이 놓여져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희소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점을 티에리를 통해서 보여준다(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속에서 뱅크시는 티에리의 작업에 엄청난 칭찬을 보탠다. 즉 칭찬 속에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 이상의 수준이 된다). 따라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의 만들어진 허상을 반영하고, 뱅크시는 그런 티에리를 조롱함으로써 이 상황을 풍자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뱅크시의 조롱은 자신을 향해 있지만, 그는 그 조롱을 통해 자신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영화를 일종의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티에리를 실재하는 인물이라 생각한다면, 그가 뱅크시가 활용하기에 너무도 딱 맞춘 사람임이 의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티에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일종의 거리예술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를 면밀히 따지는 것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뱅크시가 어떤 인물인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씨네21>에 나온 이야기를 보니, 뱅크시는 한 번도 그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뱅크시는 한 명이 아닐수도 있고, 일종의 창작집단의 대명사일수도 있으며, 어쩌면, 여기나온 티에리일지도 모른다(즉 그가 티에리 역할을 연기했을 것이라는)...고 하니까.)

그러므로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사실 마지막에는 거의 웃지 못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인디밴드 팬들의 딜레마. 일부 팬들의 경우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밴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아는 가수가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일종의 수집벽과 닮았다. 그 수집이 가치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조금은 그 수집과 다른 점은 음악은 결국 일종의 공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팬이 적은 것은 좋지만, 그 음악을 정말 나혼자 밖에 모른다면, 그 음악의 향유로서의 가치는 반감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종의 딜레마가 생긴다. 이 인디밴드는 어느 정도 알려질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것. 웃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를 잘 보지 않고, 작은 영화들, 때로는 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나의 심리도 결국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아이스 커피는 다 마시고 없는데,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며, 한 입 깨문 남은 얼음이 쓰다.

미술관을 나오게 되면, 출입구 앞에는 늘 선물가게가 있다. 그 선물가게를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들르게 되는 것에도 결국 이 수집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내 휴대폰 고리에 걸려있는 나만의 미술작품을 가지고 싶은 욕구. 이 제목은 그 욕구를 버릴 것을 충고한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다. 그 출구를 벗어나면, 아마도 다른 예술을 보는 새로운 입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나는 그래피티가.



- 2011년 8월,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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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민망한)능력자들, 그랜트 헤스로브

Ending Credit | 2011. 7. 11.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칭 초능력 제다이인 빌 장고(제프 브리지스)와 린 캐서디(조지 클루니), 그리고 이들을 취재하는 기자인 밥 월튼(이완 맥그리거)이 낭창낭창한 배경음악과 함께 벌이는 일련의 바보짓(?)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동들을 보니, 영화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들과 별개로 슬며시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나, 살육, 학살, 고문, 테러 등의 단어들의 반대편에 이성이라는 단어를 놓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에 전쟁이나 학살이 존재하고 있다는 흔한 믿음이다. 그 흔한 믿음의 범주 안에서 전쟁이나 학살은 광기, 반이성과 같은 단어들과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전쟁영화들을 보면, 그러한 믿음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대체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희번덕이며,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욕구로 적에게 그리고 때로는 아군에게도 총알을 날린다. 그러나 어쩌면 이 믿음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혹은 누군가가 주입한 믿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하나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성으로 가득찬 문명의 미로 끝의 숨겨진 방에 어쩌면 전쟁이라는 괴물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나 학살과 고문 같은 것은 사실 우리의 차가운 이성으로 깔끔하게 수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린이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고, 빌이 심리고문을 당하고 있던 이라크인들을 풀어주고, 병사들이 마약에 취해 동네에서 자전거 끌고 마실가는 것처럼 신나게 탱크를 몰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갈 때 그런 생각들이 든다. 인간의 이성이란 때로는 얼마나 차갑고, 무자비한 것인가. 그 이성이 무장해제될 때 작동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뿐인가.

물론 이러한 '흔한 믿음에 대한 반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큰 반문화, 반문명 운동이 일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한 반문명의 기원은 여러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전쟁과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던 베트남전 등으로부터 촉발된 문명에 대한 회의(懷疑)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단적으로 말해서, 한나 아렌트 등이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의 건설과 그것의 작동에는 아주 차가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 그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던 배경에는 단지 히틀러의 광기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한 많은 이성적인 두뇌들의 의사와 행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놀랍게도, 아니 그간의 믿음에 반하게도, 악은 광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악은 도리어 차갑고 매끈한 이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반작용으로 이성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행동을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바보같은 옷을 입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LSD에 취해 바보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고, 그에 더 나아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우거진 수풀 속에서 아주 이성적인 방법으로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영화 <초(민망한)능력자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빌 장고의 각성은 베트남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에서 신병이 조준사격을 하는 비율은 생각 이상으로 낮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에 그들은 거의 일부러 적을 맞추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으로 총알을 날려 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전쟁터에서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그들은 살인기계가 된다. 베트남전에서 환상을 본 빌 장고는 그 이후 히피 문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신지구군, 혹은 제다이 기사들을 양성할 계획을 꿈꾼다. 영화 속에 반복하여 외쳐지는 신지구군의 강령은 히피들의 강령을 닮았다. 생명의 존중, 연대, 감성의 공유를 외치는 그것은 반이성적이고, 반문명적이며, 동시에 초(超)이성적이다. 따라서 그 신지구군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초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단지 농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빌과 린 등의 어설픈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바보스럽지만,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밑바탕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질문, 또는 조롱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의 하나는 린과 마흐무드(무하마드?)가 서로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린이 자신이 차로 칠 뻔했던 것과 미국이 이라크에 벌인 행동들에 대해 사과하자, 마흐무드는 린이 이라크인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 (여기에 린의 대답이 압권이다. 뭐 미국에도 납치범은 있으니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학살과 고문에는 몇 십년 전 베트남에서 그런 것처럼 가장 깔끔한 이성과 필요들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9-11 테러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를 내세웠지만, 그 전쟁의 내부에는 이성에 의한, 석유 자원에 대한 계산적인 필요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만, 초능력자이자 자칭 제다이 기사인, (우리가 볼 때에 바보같은) 린은 그것을 사과한다. 그 사과는 그 코믹스러움과 별개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린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납득한다. 그것은 어쩌면 암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래리(케빈 스페이시)에게 당한 이른바 '죽음의 터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은 염소에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한 업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린은 마지막에 갇힌 염소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나의 작은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린의 생각에는 진정한 무도인의 길, 아니 진정한 초능력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수입사의 제목 테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원제는 그 원제에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아마도 그 함의 중에 하나는 '염소'라는 것이 가지는 이 영화(소설)에서의 상징성일 것이다. 그러나 <초(민망한)능력자들>이라는 이 제목은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 제목을 지은 분이시야말로 일단 본인부터 좀 민망해하셔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영화의 관객들과 함께) 그들의 초능력을 계속 반신반의하던 밥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초능력을 긍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갇혀 있던 심리고문당하는 이라크인을 풀어주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염소들을 풀어주는 그 행동이야말로, 바로 파괴적인 이성에 반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들이 결국 자신의 초능력을 확인하는 이 결말은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유쾌하다.


- 2011년 7월, CGV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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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어 베러 월드, 수잔 비에르

Ending Credit | 2011. 6. 29. 01:1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그 성찰의 질문은 이 제목이 담고 있는대로 "과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질문이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게 보복(복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이다. 인간은 결국 본성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의 한 가지에는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어떤 공격이나 위해를 당하고, 그것에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당한대로 되갚아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것은 오랜기간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고래(古來)의 법전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곧 그러한 사적 복수에 의해 발생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방식의 제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른바 공권력에 의한 제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권력에 의한 제재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며, 그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혹은, 현재의 공권력에도 여전히 보복(복수)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공권력에 의해서 거대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이 바로 그러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안톤(엘리아스의 아버지)이 봉사활동을 벌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은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혹은 공권력이 해체되어,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이 작은 사투를 벌이는 학교는 공권력이 있지만, 그 공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또한 안톤이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공권력이 개입할 틈이 없는, 혹은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독이 인간사에서 그러한 공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권력으로의 해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영화로 행하는 '정의론' 혹은 '도덕교과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힘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드러나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문명 체계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는 것은 힘의 법칙이며, 그것은 학교짱이 오로지 힘의 법칙으로 군림하는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엮음은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른들의 싸움이건, 종족간의 싸움이건, 국가간의 싸움이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롱말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크리스티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른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보복에 기초한 공격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영화가 나아가는 것은 공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다른 방향의 모색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공권력은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악수를 시키는 교장의 태도(전혀 효과도 없는)와 같은 것이며, 안톤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안톤이 말했듯이 안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한 라스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그 폭력에 의한 방법 외에는 작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 폭력의 힘으로만 겨우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폭력의 힘이라는 가치가 사라지자, 곧 부하들에게도 버려진다. 즉 이 폭력이라는 것으로 유지되는 지배력은 아주 위태로운 것이며(학교에서 '학교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은 단한번의 '맞짱'의 패배로도 바로 승리자에게 모두 넘겨진다), 일정 정도의 자장을 벗어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시의 다음은 그런 폭력의 순환, 보복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는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가. 내가 보복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러한 폭력이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큐식의 '정신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의 몇몇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대장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이제 사라질 것인가. 다시 누군가는 그러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안톤의 경우 라스 앞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보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라스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는지. 또 만약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속임수가 아닐는지. 예를 들어 자동차 정비공인 라스와 의사라는 안톤의 지위가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판단하는 관객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 영화는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가. "공권력도 없고, 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용서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힘의 어느 정도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찰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뷰의 서두에 말했듯이 복수는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사회 역시 상당 부분, 복수의 원칙, 보복의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복수>이다.) 인류사의 상당수의 전쟁이 결국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만 보아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강한 복수심의 유령들이 곳곳을 떠돌고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노들을 때로는 그 당사자에게, 혹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것을 겨우 잠재운다. 최근 화제가 된, 소위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그에 으레 따라붙는 신상털기와 여러 맹렬한 비난들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떤 교육의 문제, 혹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 풍토, 혹은 정책의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어떠한 부분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겨우 그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잠재울 줄 아는 안톤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 가정을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은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이다. 타인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이건, 혹은 다른 욕구이건.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즉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한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시점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지구적인 문제에까지 폭력과 분노와 보복은 왜 그렇게 만연했는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명 사회를 건설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문명 사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문명 이전 처럼 보이는 사회(아프리카)와 문명 이후의 사회(덴마크)가 사실은 거의 같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다른 방식의 해결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성찰 말이다.

영화 중간에도 그렇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인간이 없는, 너른 자연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은 이다지도 평화로운데, 인간은 왜 그렇게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가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결국 100년도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는 점. (안톤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겨우 장막 하나로 가리워져 있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보다는 그 넓은 대지가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분노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해봐요.



- 2011년 6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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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윤성현

Ending Credit | 2011. 4. 4. 22:28 | Posted by 맥거핀.




이 영화 <파수꾼>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영화 그 자체의 어떤 것 보다는,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다른 것을 환기하게 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들, 낡고 끊어지고, 바래져 가는 기억들, 혹은 무의식적으로 밑바닥에 밀어넣어 두었던 기억들의 일부를 아주 조심스레 끄집어내게 만든다. 물론 그것들의 거의 대다수는 영화 속의 어떤 일들처럼 저런 극적인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비슷한 기억들이 있다. 다른 어떤 것들에 밀려 잊고 있었던 것들, 이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옛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과의 좋았던 시간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지금 기준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옛날의 (친구와 멀어지게 된) 사건들. 예를 들어 영화 속 기태(이제훈)의 모습은 옛날 학교 가던 길에 나에게 갑자기 이단옆차기를 날렸던 어떤 친구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이 어떤 것 때문이었는지는 세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몇몇 부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상당수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어떤 것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또 어떤 것은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그리고 동시에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잊으면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어떤 심리학적인 디테일한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의미가 있다해도, 그것을 또 애써 설명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지 않을까. 기태는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설명해 보라는 동윤(서준영)의 요구에 항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잖아. 이 부분은 상황을 무마하려 넘어가려는 기태의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설명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그것 자체가 정당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기태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기본 구조가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아들이 왜 죽었을까. 반복되는 질문들 속에 답은 없다. 아니, 답은 있지만, 그 답이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동윤이나 희준(박정민)이나 알고 있다. 애써 설명한다고 해도, 그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설명과 그 설명이 결국 말해주는 것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 그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는 그것만이 가능한 관계의 전부였으니까. 그 관계들만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중요해져 버린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아니,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어도,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청소년들의 어떤 미성숙성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기태와 동윤과 희준의 이러한 관계는 청소년기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언제 어느 때에나 누구에게나 이루어질 수 있으며, 지금도 우리 주위에 살짝 가로놓여져 있다. 다만, 그것이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다른 중요해진 것들이,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파국에 이르지 못한다. 단단해져야만 깨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청소년기의 비극이란, 그러한 관계들이 필연적으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아무 것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 시기에 우리는 대부분 한두 가지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단단하게 만들려고 한다(타인이 보기에는 약해보여도, 자신들은 단단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 때의 우리에게는 '파수꾼'이 필요하다. 그것이 깨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파수꾼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벼랑 너머로 누군가 떨어지려고 하면, 붙잡아주려고 했던 것처럼. 혹은 기차가 지나가려고 할 때 지켜보며, 종소리를 울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처럼. 마지막 기차길에서의 동윤의 회한은 그래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다른 파수꾼들이란 없었으니까.
.............................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 이 어려운 작업을 가능케 하고, 이것에 힘이 느껴지는 원동력 중에 하나는 독특한 서사구조와 그것을 화면에 구현하는 방식에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져놓고, 그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이야기에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대과거와 과거, 현재를 독특하게 붙이는 리듬이 훌륭하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 동윤이 울다가 나와서 기태를 만나고, 기태와 대화를 하고(이 장면에서 기태와 동윤은 분절되어 있다. 거울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지되, 감정은 분리시킨다.), 다시 기태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잇는 것을 보거나, 기태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과 기태 아버지가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을 비슷한 구도로 만들어내는 장면 등을 보면, 이는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여기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결합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 영화 <파수꾼>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아는 영화다.



- 2011년 4월,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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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Ending Credit | 2011. 3. 9. 17:59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가끔씩,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마다, 어떤 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주인공의 대사에 맞장구만 쳐주던 조연들, 인상적인 한 장면을 보여줬던 엑스트라, 악인이 죽고난 후, 그 악인의 나름 충성스러웠던 부하들. 이른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증후군. 영화 <블랙스완>을 본 후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이야기를 찾아보고서 정작 궁금해진 것은 백조 오데트보다는 흑조 오딜이다. 비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호수에 뛰어들어 죽고난 후, 그리고 희극적인 결말에서라면 오데트와 왕자가 하늘로 승천한 이후, 오딜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오딜의 그 뒷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오데트와 오딜을 한 무용수가 공연한다는 이유가 그것. 마지막에 오데트의 장엄한 최후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오딜 같은 것을 보여줄 틈이 있겠나.

사실 여기에는, 묘한 모순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는 오딜과 오데트가 겹쳐서 등장하는 장면이 없다. 물론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 무용수가 두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일종의 거울상이다. 한쪽이 선하다면, 한쪽은 악하다. 한쪽이 욕망을 제어당한다면, 한쪽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한다. 거울 이편과 거울 저편의 존재. 그러므로 두 존재가 한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 둘이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상정하려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거울을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관례적인지 아니면 특정의 공연에서만 그러는지는 발레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오데트와 오딜을 한 명의 무용수가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분열, 혹은 일종의 착란 증세는 거의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거울 속 이편의 존재와 저편의 존재를 모두 완벽하게 담아내려고 하는 거울은, 아니 자아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가 왜곡을 피하는 방법은, 그 둘을 느슨하게 병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필요에 따라 그 둘 중의 한 가지를 적당하게 억압하는 것이다. 혹은 강제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다. 영화 속 니나의 경우라면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작동한다기 보다는, 어머니(바바라 허쉬)에 의해 수행된다. 어머니는 니나의 욕망하는 자아를 억압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니나를 어린아이로 묶어두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백조 안에 묶어둔다는 <백조의 호수>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로 니나의 욕망은 제어되어, 니나는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어린아이에 머문다. 니나의 방안에는 인형이 가득하고, 방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니나의 그림 속에 니나 자신은 박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니나가 그림을 찢고, 인형을 내버리는 것으로 그 억압을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감시의 체제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니나에게는 이미 내면화되어 있으며,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것으로 추동된다. 예를 들어, 니나가 자신의 몸(어깨)을 긁어대는 것도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체 변형 서사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려는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날개(욕망)가 자라나는 것을 막는 것, 어른이 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의 종착점과도 관련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전작 <더 레슬러>에서도 그러했듯이 나이들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발레단에서 스타는 한 명 뿐이고, 그 스타는 나이가 들고, 아름다움의 강도가 덜해지면, 다른 스타로 대체된다. 발레단의 외부에서 보여지는 공연은 화려하지만, 그 내부에는 위험하고 필사적인 사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한편으로는 백조를 닮았다. 물 위에서는 화려하지만, 물 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려야 하는 백조의 숙명.) 이것은 물론 권력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투라고 볼 수도 있다. 발레단의 스타였던, 이제는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병실에 찾아간 니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다"라는 베스의 고백을 듣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러므로 니나는 완벽해지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완벽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며, 완벽의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다시는 복제되지 않을, 단 한 번의 최고의 공연. 그러므로 마지막에 니나는 "완벽함을 느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니나가 마지막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가들은 죽어가는 순간에 최고로 아름다운,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는 어떤 '결여'를 그들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점들이 그 이야기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어떤 얼굴이 매혹적이라고 말할 때, 그 얼굴은 완벽한 좌우 대칭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아니, 인간의 얼굴에 완벽한 좌우대칭이 있을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완벽한 좌우대칭에 가까운' 얼굴이다. 도리어 우리는 완벽한 대칭(로봇의 얼굴)에 때로는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완벽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때로 그것에 매혹당하기 보다는 거부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우리가 매혹당하는 것은 도리어 결여의 순간이다.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결여가 내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의 미스테리한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레슬러>에서 랜디 램(미키 루크)이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지고 날아오를 때, 그 결여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혹당한다. 그리고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죽어가면서 공연을 펼칠 때 그 공연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 된다. 더구나 이제 그 공연은 다시는 재생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이상 완벽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덧.
이 영화 <블랙스완>이 꿈꾸는 것은, 영화에서 니나가 꿈꾸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영화로서 완벽해지는 것.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조탁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영화의 관점을 완전히 흩뜨려 놓고, 관객에게 니나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사실 이 영화에서 니나가 실제로 본 것과 그녀의 환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력은 독보적인 것이다. 예전에 <레퀴엠>을 보러갔다가, 영화를 도저히 끝까지 견뎌서 보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못 본 부분이 궁금하여 나머지를 찾아서, 참아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꽤나 무시무시하다. 다만, 나는 이 영화 <블랙스완>을 보다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심리적 타격의 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아니 오히려 이번이 더 강력해진 것 같은데, 나는 견딜만해졌다. 견딜만해졌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졌다는 뜻일게다.



- 2011년 3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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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김태용

Ending Credit | 2011. 3. 2. 16:33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스포 있음)



<만추>라는 제목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과 시간에 배인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만추. 늦가을. 모든 것의 수확이 끝나버린 때.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겨울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시간. 어떻게든 유예하여야 하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이제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훈(현빈)의 시간. 애나(탕웨이)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

영화 속 애나의 시간과 훈의 시간은 다르다. 애나의 시간은 그녀 자신 안에서 최대한 늦춰지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7년간의 수감 이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72시간만의 귀향을 허락받은 애나에게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잡아두어 천천히 흐르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시간들. 어떻게든 유예시키고 싶은 72시간 후의 막내림. 반면 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훈에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오늘은 이 여자를 만나, 이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고, 내일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다른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애나에게 돈을 빌렸을 때, 훈은 그 대신 기꺼이 시계를 내민다. 그에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 그것은 훈에게는 시계이며, 애나에게는 돈이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다른 시간을 공명시키기 위해 영화적 판타지를 은밀하게 작동시킨다. 서사적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연의 힘을 빌어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난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한 남녀를 만나고, 그 남녀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이 환상은 언뜻 이 두 사람의 시간을 비유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공간 안에서 두 남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앞으로 당겨지고, 다시 시작되고,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형상화되어 차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 장면을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기도 하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훈과 애나에게 반복되며, 그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간을 다시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에 따른 이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안개만큼이나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유령 투어'를 하는 사람들. 이 때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이 시간들이 환기되는 것(물론 흐릿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환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이다. 애나에게는 그녀의 예정된 귀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훈에게는 그에게 이 시간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것(빠른 시간 안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가 더 할 수 없이 흥미로워지는 것, 혹은 더 할 데 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 그 마지막에 있다. 안개 때문에 버스는 정차하고,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훈과 애나의 시간은 역전된다.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였던 훈의 시간은 급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남은 아주 짧은 시간은 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진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훈의 시간 흐름은 지금까지의 애나의 시간 흐름이 된다. 그리고 훈은 그제서야 애나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하는 시간의 의미. 그 일분 일초가 소중한 시간의 의미.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애나에게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애나에게 이번에는 훈의 시간이 전이된다. 애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되었다. 다시 훈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보내야 하는, 아니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애나는 허둥대며, 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은 잠든 애나에게 훈이 둘러주고간 시계 뿐이다. 물론 같은 행동이지만, 이 때의 시계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처음의 시계가 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애나가 훈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견뎌야할 그 많은 시간들을 이해하고 이제 나를 그 시간들에 공명한다는 것. 영화의 그 마지막은 판타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 2011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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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 대니 보일

Ending Credit | 2011. 2. 14. 21:30 | Posted by 맥거핀.



사실 이 '127시간'이라는 제목은 결말을 어느 정도 담지하고 있다. (물론, 그 결말의 설명을 원치 않으시는 분도 계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은 미리 읽지 않으실 것을 부탁드린다.) 그 제목은 어찌되었건 127시간 후에 그가 살아서 다시 귀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극히 제한된 자원들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살아돌아올 것인가. 그는 물론 요행으로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를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처절한 노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이란 그렇게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런 영화이고 보면, 화면 구성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직선적이고, 결말이 거의 예상가능한 영화라면, 그 안의 이야기들을,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니 보일은 그런 부분에서 그의 장기를 적절히 구사한다. 그가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하곤 했던 화면분할이나 급속한 줌인, 줌아웃, 플래시백으로 연결 등의 잔재주들이 영화에서 적절히 스피디있게 구사됨으로써 영화의 이런 약점들을 적절히 커버한다. 다만, 나는 대니 보일의 이런 감각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은 독이 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아론(제임스 프랭코)의 고통이 더욱 처절히 묘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잔재주들이 너무 많이 구사되기 때문에 때때로 아론에게 연결된 감정의 선들을 끊어버리기도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상상을 해본다. 잔재주에도 능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것을 배제하고, 조금 더 정공법을 택하는 감독 - 예를 들어, 대런 아로노프스키 - 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연출을 맡았더라면, 관객을 조금 더 미치게 만들었겠지만, 감정은 극한으로 끌어올려졌을 것이다. 예전에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던 <레퀴엠>의 어떤 장면들을 돌이켜보면, 몸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아론의 변화는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아론은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나만을 믿고 따라오라고. 그리고 그는 계속 자신만을 찍는다. 그가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은 주위의 풍경이 아니다. 그 풍경 안에 있는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그 틈바구니에 갇혀서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두 개로 나뉘어 모의 방송을 연출하며 찍고(물론 이 때까지도 그는 자신을 완전히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이 때부터 캠코더 안의 다른 사람들만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며, 다른 이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헤어진 여자친구(그는 여자친구가 농구장에서 자신을 버리고 갈 때 결코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동생, 가족,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절정은 그가 거의 환각상태에서 결단하며 일을 실행할 때, 그를 계속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오로지 주위의 도움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어린아이. 그는 그 어린아이가 되어 그 자신을 본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캠코더 식으로 말하자면, 그 캠코더에 담겨 있는 화면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볼 때 뿐이라는 것. '찍는 것'으로만은 어떠한 의미도 담기지 못한다는 것.

이를 보여주는 대니 보일의 시작과 끝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시작 부분에 도시의 많은 사람들, 어딘가에 운집한 사람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차들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의 아론에게는,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짜증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며, 지겨운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대니 보일은 아론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127시간의 무간지옥을 압축하여 선사한 후에, 처음의 장면들을 거의 비슷하게 다시 마지막에 갖다 붙인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장면이란 이제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물결,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것은 처음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한다는 것.

누군가의 평대로 이것은 확실히 미국적인, 서양적인 인간관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제 그가 더 이상 위험한 모험은 즐기지 않기를 바랬다. 행선지를 남기건, 남기지 않건 말이다. 아니, 그런 일을 겪고 난 후에도,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지 않고, 계속 자연을 정복하러, 혹은 괴롭히러 갈 이유가 있는가. 이 모든 일은 아마도 자연이 그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계획한 것일텐데 말이다. 나는 철저히 동양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영화를 본 후 다른 교훈을 얻었다. 위험한 데는 가지 말자, 자연은 멀리서 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無爲自然이니라.



- 2011년 2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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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강우석

Ending Credit | 2011. 2. 6. 22:22 | Posted by 맥거핀.



(스포 조금)



이 영화 <글러브>에 대해서는 <씨네 21> 789호 '전영객잔'에 실린 안시환의 평에 대체로 동의한다. 안시환의 평은 이 영화가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려는 혐의가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간의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적인 감동 강조류 스포츠 영화들에 나왔던 거의 모든 클리셰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단 하나만은 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 빠져있는 것은 선수들 개개인의 개인사를 의식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선수들 개인의 여러가지 힘든 개인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에서 감동의 눈물을 짜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인사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은 투수인 명재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야수들은 그 흔한 아버지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편집과정에서의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간에 팀을 떠나는 선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이 어린 선수에게 카메라는 비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공동체를 버렸을 뿐이고, 공동체도 그를 버렸을 뿐이다. 이것에는 안시환의 평대로 확실히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우석의 최근의 다른 영화들도 (익히 분석되었듯이) 비슷한 혐의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미도>, <공공의 적> 시리즈, 최근작 <이끼>까지도.


안시환 평론가가 '전영객잔'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해버렸으므로,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그저 나름의 생각을 조금  더 붙여본다. <글러브>는 따뜻한 감동스토리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걸까..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위의 공동체주의 같은 부분들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강우석이 그려왔던 세계들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무서운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물어뜯는 무서운 사회이다. <실미도>나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의 적>의 아주 차갑거나, 아주 뜨거운 지옥의 세계, 그리고 <이끼>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글러브>는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선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의 분신같은 캐릭터인 김상남(정재영)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에게 주자가 무릎을 아작내겠다(?)라는 기세로 달려들라고 가르치는 부분 같은 것. 김상남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김상남에게 야구는 이겨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기는가는 그에게 그렇게 크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하게도, 왜 이겨야하는가, 혹은 이기는 것이 왜 필요한가는 아주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못된다(즉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는 사실). 아니면 다른 부분,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성심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라고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음악과 편집의 효과로 김상남이 매우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처리되지만, 나는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저것이 옳은 것인가. 약자를 동정하는 것, 약자를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될 일인가.

물론 이 장면은 여러 효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마치 이들을 놀리듯이 성의없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이 장면이 처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배제하고 보면, 이 장면은 확실히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지만, 약자를 조금이나마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심의 선수들은 청각장애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를 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점이라고 말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고.

강우석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손을 든다. 김상남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비장애인의 세계, 이들에게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라는 나교사(유선)의 시각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혀서 가슴 속 울분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기도 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의 무릎을 날려버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김상남은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석 감독의 태도는 다른 몇몇 곁가지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상남 본인과 관련된 부분들. 김상남이 야구계를 떠나게 된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러 사고를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야구계에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즉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한국야구의 엄청난 스타였다면 그가 버려졌을까. 어떻게든, 그는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김상남의 매니저는 항변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우석의 항변이기도 하면서 그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퇴물이 되면 버려지는 것,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길러야 한다. 마찬가지.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 세계에 뛰어들어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강우석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인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그런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야. 이 세계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 그러니 그저 중요한 것은 네가 강해지는 것 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것 뿐이야.

그러므로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일종의 '희망'에 의문이 생긴다. 그 희망은 어떻게든 이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투에 의해서밖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인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시스템으로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에 의지해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각 개인의 처절한 고투와 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안시환의 지적대로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이다. 대표적인 장면. 투수인 명재의 어머니는 명재가 성심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장애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재에게 항변한다. 너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 수 있어. 걔네들과 달라. 이렇게 말하는 명재의 어머니와 강우석 감독의 논리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장애인을 점차 비장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영화는 이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는다. 즉 이상하게도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 어머니에게는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그것은 강우석 감독이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만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강우석의 '희망'에 대한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을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의 세계는 여전하구나. 그 세계는 가장 아이러니컬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가 주어지는 세계다. 혹은 승리했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여전한 '그 세계'다.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예를 들어 <실미도>의 그들에게는 어떠한 마지막이 결국 주어졌는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끼>의 류해국은 어떤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세계에서 최소한(이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한다. 그들이 힘을 길렀을 때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의 박수는 결코 그들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궁금해진다. 시스템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스템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채 벌어지는 별개의 사투들, 유리된 희망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덧.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글이 (조금은) 길어졌다. 그러나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아무튼 강우석 감독은 스트레이트하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른 부분들까지 너무 스트레이트한 것이 (꽤나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트레이트한 것은 때로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은 거의 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야기에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즉,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던진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의 단점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2011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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