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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 정성일

Ending Credit | 2011. 1. 11. 22:36 | Posted by 맥거핀.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들어있지만, 스포일러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중의 하나지만, 이 장면은 낯설어 보인다. 낯설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공간과 시간, 그 자체이다. 먼저 공간의 문제. 이 장면은 피사체를 아주 가깝게 당겨 찍고 있으며, 렌즈의 사용으로 소녀와 소녀 뒤의 공간은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은, 소녀 뒤의 배경이다. 아무도 없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으세요? 소녀가 앉은 햄버거집에는 아무도 손님이 없다. 그리고 저 뒤에서 종업원들만 바쁘게 움직인다. 글쎄. 십년을 넘게 패스트푸드점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이지만, 낯설게 왜곡되어 있는 이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시간. 당신이 소녀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용을 영화에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소녀가 햄버거를 물어뜯는 단 하나의 컷만 집어넣을 수 있다. 또는 햄버거집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부감숏으로 보여주는 컷 뒤에, 바로 소녀가 휴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즉 굳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또는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6개의 쇼트로 나누어- 정성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6개의 쇼트를 나눈 어떤 영화를 말하며, 왜 아무도 그 장면의 이상함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장면의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일은 소녀가 햄버거의 종이껍데기를 벗기고, 햄버거를 꾸역꾸역 다 먹기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있다. 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시간. 이 장면의 의미는 아마도, 소녀는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고 긴 시간들을.


그러므로 이 영화 <카페 느와르>의 시작부분에 관객과 맞닥뜨리는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일종의 정성일 식 선전포고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 두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공간의 문제부터. 이 영화는 많이 알려진 대로,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일단 먼저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서울은 사대문 안의 공간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옛날 지도를 삽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도 하고, 굳이 그 지도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몇 년간 살아온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빌딩숲으로 도배되어 버린 강남의 복제된 세계는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영화 속 남산타워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남산타워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디서나 우리를 굽어보는 남산타워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한 장면. 영수(신하균)와 관계를 맺은 미연(문정희)의 남편(이성민)은 차창 밖으로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본 후 조금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고는 운전대를 꺾는다. 여기에 첨언할 수 있는 것. 남산타워는 1969년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굳건하던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다는 사소한 사실.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방법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청계천 - 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고 썼던데,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화 속 청계천은 위험한 공간으로 보여짐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다리 아래의 청계천은 선화(정유미)가 이상한 남자에게 쫓김을 당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복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등불을 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에 흐르는 청계천의 트래킹 숏으로도 말해진다. 이것은 통상적인 청계천의 역방향 트래킹이기도 하려니와, 이 장면에서 청계천 다리 아래로 끝끝내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청계천 위의 여러 오래된 상점과 건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이 때의 카메라는 청계천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된다면,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영화 속에서 청계천이 등장할 때 내뱉어지는 첫 대사는 무려 "나쁜 새끼"이다. (물론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다른 미연(김혜나)이 영수에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욱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시간은 상당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장면은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장면일 것이다. 영수가 망치를 내려치려 할 때 멈춰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층계참에 멈춰선 아이들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동시에 TV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멈춰버린 것 같으나, 사실은 멈추지 않은 시간,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영수의 주관적인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속에서 미연(문정희)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영수에게 전하는 또다른 미연(김혜나). 그러나 우리는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미연이 멀쩡하게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글쎄.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여러 개월이 지난 것으로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라져 버린 여러 개월의 시간들 - 그것 역시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장면은 어떨까. 청계천의 24시간을 빠르게 돌려서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날림으로 지어진 청계천.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물론 영화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시간들은 영수가 사경을 헤매는 며칠이다. 이 며칠은 다시 현실의 시간들과 대응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이다(이 시작은 흑백으로 시작하여, 칼라로 돌아왔다가 다시 흑백으로 끝난다). 영수는 사경 속에서 크리스마스날 선화를 만나고(그는 거기에서 동방박사들을 본다), 동지(冬至)에 선화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하며(밤이 가장 긴 날), 그것을 이룬 후에 결국 숨을 거둔다. 그리고 2009년이 오고, 보신각에서 KBS가 숨긴 사운드를 이 영화는 복원하여 보여준다. 즉 2009년을 상징하는 이 장면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이것은 현실의 시간이라는 말이며,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시간과 이 시간을 대응하여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 시간들을 현실의 시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정성일은 다른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영수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즉 그는 아마도 가능했다면, 이 며칠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관객은 3시간 18분을 앉아있는 것조차 거의 임사체험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현실의 시간과 그대로 대응함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동진 씨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다른 어떤 것들로 물화(物化)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들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숨어들어가 있지 않고, 앞에 툭 튀어 나와 자꾸만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자주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거의 시간과 공간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때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백야>에서 나온 대사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19세기에 쓰여진 말들을 21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내뱉을 때의 이 시간의 교호작용들. 이것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리듬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리듬은 때로 영화의 장면들이 거의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런 영화의 리듬은 이 영화가 다른 수많은 영화들의 일종의 메타 텍스트가 되어버린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에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올드보이> 등등의 여러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격자처럼 수놓아져 있다(정성일 감독은 시네마톡에서 혹시 이 영화의 DVD를 발매하게 되면, 영화의 중간에 영향을 받은 장면들의 본래의 영화 제목과 그 장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부가기능을 넣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많은 영화들의 특정의 장면들, 혹은 특정의 느낌을 이 영화에서 살려내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리듬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나름의 리듬이 있고, 리듬을 제거한 그 장면이란 이미 '그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만이 강조되고, 스토리와 리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대신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간과 공간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장면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햄버거를 먹게 하는가. 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고 있는가. 해답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녀 뱃속의 아기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신하균의 죽음을 어떻게든 유예시키려는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은 정성일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예를 들어 다음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할 때 실제 죽이지는 않지만, 피 대신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와인, 혹은 미연의 얼굴에 뿌려지는 붉은 피와 같은 것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영수의 죽음이 유예되어야 하지만, 그가 끝내 죽어야 하는 이유. 청계천에서 영수를 극도로 증오한 후, 차에 치일 뻔한 다른 미연(김혜나)의 모습.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를 예수의 수난극에서 묻는 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대하는 정성일의 태도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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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잡설, 또는 의문을 덧붙인다.

1.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에서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하는 대로, 누구보다도 가장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인 것처럼 보여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대비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남성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지 못하다. 남성들은 청계천에서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따라가거나, 동물원에서 쓸데없이 말을 걸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거나(이 장면은 또한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은근슬쩍 담고 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나간 사건을 한탄하거나, 아니면..딸을 욕망한다. 반면, 여성들은 대체로 긍정적인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연대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미연의 딸과 친구의 대화, 그리고 은하(요조)와 미연(김혜나)의 멋진 오토바이 터널 씬,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소녀들의 연대.

2.
이 영화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연의 남편이 한 때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장면. 변절한 사회주의자, 또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거세된 사회주의자는 때로 어떤 것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박쥐>를 오마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박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영화니까.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신하균 때문이다. <박쥐>에서 수장된 후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하균은 이 영화에서도 물에 빠지고 나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신하균이 물에 젖은 몸으로 서점을 돌아다닐때 나오는 그 음악과 그 장면의 숨막히는 공포감, 그리고 '카페느와르'라는 제목이 나타날 때의 그 압박감은 압도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견뎌야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3시간 18분의 물리성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정말 무섭다. 

4.
이 영화의 텍스트의 활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종종 소설의 텍스트가 손글씨로 등장하는데, 이 때 지속적으로 사운드가 텍스트와 불일치한다. 즉, 목소리는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음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유일하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은 마지막 한 번 뿐이다). 동시에 텍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은 그저 이해 없이,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는 안된다. 마치 이는 이 텍스트를 절대 읽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글씨를 그저 모양만으로만, 고유의 느낌으로만 이해하라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미연(김혜나)이 다른 미연(문정희)의 남편에게 보내는 육성 편지는 화면을 암전해버림으로써 주목하여 들으라는 듯이 느껴지는 반면에, 이를 이렇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좋은 반응들과 함께, 예상대로 개봉 후 몇몇 신랄한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가 물론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편으로 정성일의 위치에서 비롯된 문제가 개입된 것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정성일이 잘나가는 영화평론가이자, 이미 일종의 권력이 된 것도 그 하나의 이유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말실수 때문인가. 그는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영화에 별점 5개 만점 중 몇 개를 주겠는가라는 질문에 5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것이 왜 공격받아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리어 자신의 영화에 3개나 4개를 주는 감독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그것을 잘 알면서 5개 짜리 영화를 만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가장 좋다(물론 나도 그렇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일기조차 스스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빈정을 담아 말했다. 정성일 씨가 어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고. 글쎄. 자신만의 방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굳이 그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을까. 방의 보호벽이 없는 그 세계에 굳이 나와 이전투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정성일은 시네마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 것이 뻔하지만, 이 영화는 나와 영화적 피를 나눈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방에 들어오라고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만의 영화들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영화에는 있다. 선화가 택한 그 남자는 바로 앞에서 영수와 미연이 본 영화 속의 남자, <극장전>의 김상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성일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네마톡에서 말했다. "통상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는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극장전>을 삽입할 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즉,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 2011년 1월,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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