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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BOBBY),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Ending Credit | 2010. 2. 13. 17:30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 영화다. 글쎄.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노골적인 정치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여러 리뷰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영화의 제작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들. 이 영화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마틴 쉰,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피쉬번, 헬렌 헌트, 샤론 스톤, 데미 무어, 크리스찬 슬레이터, 샤이어 라보프, 린제이 로한, 애쉬튼 커처, 헤더 그레이엄, 프레디 로드리게스 등 -역시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로서 거의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작되고 개봉한 시기는 2006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참고 견뎌야 했던 시기였던 부시의 시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정치색은 거의 명백해진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는 모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이 영화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당시의 자료화면과 실제 연설목소리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로버트 케네디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도 연기자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카메라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을 피해서 지나간다. 이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가짜의 사건이 아님을, 즉 만들어내거나 모사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건임을,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이나, 행동이 각색된 것이 아니라, 그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총격 사건에서 계속 울려퍼지는 그의 육성 연설문. 명 연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연설은 영화 속 마지막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도 상업영화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치인의 연설을 십여분 이상 직접적으로 들려주며 영화를 끝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영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의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조금은 산만하고도,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던 그날, 앰배서더 호텔에 있던 여러 인간 군상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돈 드라이스데일의 6경기 연속 완봉 투구를 보러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멕시코인 호텔 직원, 호텔의 지배인으로서 다른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남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나이든 여가수, 옛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호텔 직원, 마약에 빠져 할 일을 제쳐두고 마는 철없는 선거운동본부의 운동원들, 고압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호텔의 또다른 직원,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상류층 여자, 스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여자,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는 흑인 조리장, 베트남에 남자를 가지 않게 하려고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 로버트 케네디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따내려고 하는 체코인 여기자....이 모든 인간 군상들은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모두 별개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개로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런 얘기다. 즉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조금은 얽혀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말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들 각각의 생활은 분명히 서로서로 그다지 직접적이고 큰 관계는 없고, 직업적 관계로 얽혀있는 않는 한 대부분 앞으로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이 서로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 즉 마지막 총격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총격 세례를 받고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별개처럼 보였던 삶이 사실은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공동의 재난에 같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많은 재난 영화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인 재난에 빠져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을 묻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 그러나 이 방식은 엄밀히 따져 볼 때 여기에서는 가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총격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의, 즉 총격 이후의 그 재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총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들은 그저 시각화된 상징에 불과한 것. 

그보다 궁극적인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결국 정치란 우리 삶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의외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케네디의 연설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 연설의 주된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제 폭력을 중단시키자는 것, 미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적인 폭력, 베트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이제는 중단시키고, 이제 평화의 메시지를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그 연설에서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던 주체는 이제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라진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킹 목사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일어난 또하나의 비슷한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이 절망은 분명히 당 시대의 인간 군상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굳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일상은 이 이후에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인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 삶들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불륜이니, 직장동료니 하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당대의 시대분위기, 시대흐름이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의해서 결국 얽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양쪽에 있어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흐름을 긍정하는 것, 혹은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구조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 삶의 어떤 부분에서 심각한 불편함을 야기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사족)

1968년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았고, 그 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글쎄. 그 때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예를 들어서 그 이후에 이라크전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튼 2006년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했고, 그 이후에 2009년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에서 이 영화는 개봉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대통령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MB 정부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글쎄.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었으면 미국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다른 어떤 것은 몰라도 적어도 던지는 메시지 하나는 천지차이라는 점.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나라면 후자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2010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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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AVATAR), 제임스 카메론

Ending Credit | 2010. 1. 1. 18:03 | Posted by 맥거핀.



(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 2009년 1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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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우니 르콩트

Ending Credit | 2009. 11. 23. 22:04 | Posted by 맥거핀.



가끔씩 리뷰를 쓰기가 난감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구성의 특이점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내가 잘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탐구해보는 내용을 적어도 되고, 그 부분에 담긴 숨은 의미를 읽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영화의 어떤 사적인, 공적인 의미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가 난감해진다.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영화, 그렇다고 복잡하거나 난해한 구성도 아닌 영화, 거의 심심할 정도로, 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에 있어서는, 내가 그런 류의 리뷰들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틸컷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스틸컷만을 줄줄이 늘어놓고, 그 밑에 그
스틸컷 장면의 간단한 설명을 적는 것을 리뷰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리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에서 또 어떤 영화들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가기란 여간해서는 힘들다. 의외로 드물지 않은 경우지만, 그런 영화들에서 도리어 어떤 '진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하게도, 영화들에게서 읽혀지는 진정성이란 그 영화적인 기교와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때로는 현란한 기교가 적시에 터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도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여행자>가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적인 기교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트'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일부러 배제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거의 평면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들어오는 소녀 '진희'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그 소녀 진희가 입양되어,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끝난다. 그 안의 이야기들도 그리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건들은 거의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다.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녀, 그 안에서 싹트는 우정, 그리고 소녀들간의 다툼,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소녀, 반복되는 이별, 입양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어디론가를 한없이 건드린다. 수차례의 반복되는 이별을 경험하고, 진희가 드디어 새로운 곳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단호하지만, 불안한 발걸음을 보여줄 때, 상당수의 관객들은 그 소녀의 앞날을, 앞날에 계속될 여행을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슷한 무게의 무거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우리는 또 저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게 했는가. 그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이 영화의 어떤 영화적인 기교, 혹은 낯설은 문법이 드러나는 순간은 영화의 처음 부분이 거의 유일하다. 영화의 처음, 이 영화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케익을 사들고 보육원에 들어가, 보육원에 진희를 두고 나오기까지 영화는 대부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감추며 세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얼굴이 영원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두 장면, 영화는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비춘다. 아마, 그것이 성장한 후에도 진희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처음 장면들은 결국 진희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처음이다. 실제로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자주 그 상황동안 진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얼굴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진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겨우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적 기교는 마지막에,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플래시백 장면으로 등장한다. 공항에 내딛기 직전에 끼워넣어져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며 뒷좌석에서 꼭 껴안았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 말이다. 즉 이 영화의 영화적인 어떤 기교(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그저 영화적인 문법)는 오로지 진희의 기억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보여지는 셈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희의 기억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와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을 보면, 이 영화는 진희, 즉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르콩트 감독 자신이 입양아였고, 영화 속 진희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들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때의 모두의 기억이 결합된 결과라고 감독은 밝히고 있다. 즉 스트레이트하게 아무 기교도 없이 전달되는 이 가슴아픈 만남과 이별의 반복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가슴 아픈 케이스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이고, 공적 기억임을 이 영화는 들려준다. 그래서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전달되는 듯 했던 이 영화는 개인의 사적 기억을 넘어서, 모두의 공공의 기억, 우리 역사 속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 놓았던 은밀하고 부끄러운 역사적 기억에까지 그 발걸음이 전달된다. 그것을 영화는 타자화된 시선을 통해, 객관적이고, 무덤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은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Best 3을 꼽자면, 이 영화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진희가 공항을 벗어나 새로운 부모에게 걸어가는 그 마지막 장면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이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삶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본 여행자.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아이에게는 결국 하나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라는 것 말이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라는 말이 가진 하나의 비극적인(혹은 무한한) 속성이다. 결국 '여행자'라는 것의 말의 안에는 '영원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여행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여행자로 불리는 그 동안은 그(녀)는 결국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영원히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로 계속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 즉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Camel의 노래대로 'stationary traveller'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마지막 노래인 '작별'과 '고향의 봄'은 참 서글프고, 인상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단 한 곳, 고향에서만은 아마도 불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오로지 타향에서만이 그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부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상당히 잔인해보이기도 한다.

그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의 여행자일까. 이 영화의 영문제목이 <A Brand New Life>던가. 거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 2009년 11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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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박찬옥

Ending Credit | 2009. 11. 16. 21: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미리니름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그 중 한 대의 자동차 안에는 은모(서우)가 앉아 있다. 그녀는 7년 전에 죽은 언니와 같이 살았던 곳, 그리고 3년 전 같이 살던 형부 중식(이선균)을 떠나 인도로 떠났기전 살았던 그 곳, 파주로 가는 중이다. 그녀의 언니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지금 그 형부 중식이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를 이끌고 있다. 물론 아직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 필시 얼마 후에 그녀는 형부를 만나게 될 터이니, 그것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무심하게 파주를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며 영화는 시작한다.

시작부의 이 이미지들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지배한다.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나타나는 은모 얼굴의 클로즈업 숏. 흐릿한 안개들 만큼이나 모든것은 명확하지 않다. 왜 3년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이 이곳을 떠났는가, 그리고 왜 그녀는 다시 파주로 돌아가는가, 그리고 그녀의 언니는 어떻게 죽었을까, 중식은 왜 아직 거기에 남아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가, 그리고 중식은 왜 굳이 언니의 보험금을 그녀 앞으로 돌려 놓았을까,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클로즈업된 그녀의 혹은 그의 얼굴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처음에는 그 얼굴들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 얼굴들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고난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듯이, 어딘가에서 표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자비 뿐이다. 어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주기를-.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은모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잡으면서 마치는 이 영화는, 도리어 중간에는 은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상당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모는 중식이 서울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왔는지 모르고(여자 선배와도 어느 정도의 관계였는지 잘 알지 못하고),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중식이 왜 그녀 앞으로 보험금을 돌려 놓았는지도 모르고, 중식이 어쩌다가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관객들은 그 중 몇몇의 이야기를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 은모가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것)의 차이, 이것이 은모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몇 개는 명확하지만, 또 몇 개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리고 감독은 시점을 흩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현재-8년 전-다시 현재-7년 전-3년 전-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기이한 방식의 연결로 이 흐릿함을 가중시킨다(더구나 시점을 과거로 이동시킨 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은 명확하지 않다). 이 흐릿함은 인물들의 묘사에도 여전히 이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중식은 선하고,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몇몇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가 은모를 위해서 모든 책임을 떠맡고, 철대위를 이끌고 하는 것들이 단지 어떤 고귀한 희생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그 이면에는 왠지 다른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하나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한 나약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밑에서 화염병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위에서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표정, 혹은 주차장에서 자동차에 틀어박혀 차를 팔고 있는 그런 모습, 가게에서 혼자 소주병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는 모습, 아니 그런 사소한 것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시작 부분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는 수배된 상태로,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간 선배의 부인(이자 또다른 선배)에게 얹혀 살고 있다. 아마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들로만 그를 비난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그는 몇 개의 이질적인 것들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그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것을 운동권 지식인의 일반적인 나약함으로만 연결시키는 것 역시 또한 부당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반대편에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은모에게 짓는 그 미소는 거의 악의 화신에 가까운 미소로 보인다. 그리고 그 미소는 종교적인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본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교회에서의 그 날의 말씀의 소재는 창세기에서 하와(이브)가 뱀에게 유혹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알고, 그녀는 알지 못했던 몇몇 일들 때문에, 그녀는 결국 악마의 화신과 손을 잡은 셈이었다. 박찬옥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아마도 이는 '배덕(背德)'일 것이다. 그리고 박찬옥 감독의 좋은 표현대로, 마지막에 그녀는 그녀 안의 괴물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배덕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그녀가 배덕한 것이 아니라, 배덕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꺼이 파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상처를 안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며.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실마리는 은모(서우)가 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국 중요한 질문은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가-이다. 은모는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아한다. 그녀와 언니의 사이에 중식이 나타나자, 그녀는 둘 사이를 떠나버렸고, 다시 언니가 죽자 중식에게 돌아왔고, 다시 그들 사이에 중식의 여자선배가 끼어들자, 다시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파주로 돌아왔지만, 결국에는 그를 놓아버렸다. 그녀가 중식에게 한 마지막 질문에 대해, 그녀가 원했던 답은 무엇일까.


.....................................

자꾸 이야기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이야기보다도 훨씬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중요해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인 불의 이미지, 들끓어오르는 이미지이다. 이 끓어넘치는 것,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불은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이에게 쏟아넘쳐 상처를 입히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 그리고 죽은 언니의 등의 화상 자국, 가스 폭발 사고, 불타오르는 화염병...계속 물들은 끓어오르고 넘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음에 가깝게 그들을 데리고 간다. 이 끓어넘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간단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의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향한 그들의 욕망은 그들, 혹은 그들 주위의 어떤 것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다. 그 욕망들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 끓어오르는 욕망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차(茶)를 팔던 중식에게 뜨거운 물이 떨어지던(팔 물이 동나던) 장면은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보이기도 한다. 아내도 죽고, 은모도 떠나버린 상태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고 차나 팔며 살아가는 중식에게, 차를 탈 뜨거운 물이 떨어져 버리는 이 장면은 왠지 중식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화염병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서 또다른 죽음의 사신들은 그들에게 또 죽음의 물줄기들을 쏟아 붓는다. 그 욕망이 꺼지게 하려고, 그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을 멈추게 하려고 말이다. 

그 물들이 끓어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상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개다. 결국 안개라는 것은 수증기. 즉 물이 끓어오르다 못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破)괴되어 가는 도시이자 흐릿한 안개로 낮게 깔린 도시 파주(坡州)는 끓다가 넘쳐버린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도시이다. 그 도시에서의 욕망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주 저열한 수준에서는 번쩍거리는 나이트 불빛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땅을 독점하고 그곳에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거대한 이익을 남기려는 욕망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너져내리는 건물에 들어가 포크레인에 맞서야 하는 피맺힌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 욕망의 중심의 한 가운데에, 중식과 은모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혹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들을 뛰어 넘어야 하는 그런 욕망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들의 운명의 길이란 그저 들끓는 것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들끓다가 못해, 자욱한 안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야기가 안개가 자욱한 파주에 은모가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은모가 중식과 아닌 미애와 함께 이곳을 떠나는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 안개가 있었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 2009년 11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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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허진호

Ending Credit | 2009. 10. 14. 01:26 | Posted by 맥거핀.



허진호 감독의 장점은 그의 어떤 디테일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디테일하다'라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처럼, 영화적인 디테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표현할 마땅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디테일함', 즉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아련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정,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리는 설레임..이런 것들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나 대사들을 이용하여 잘 형상화하여 우리 눈에 드러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 지닌 장점들이었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아있어야만할 아버지를 위하여 비디오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내려가던 남자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면 먹고 갈래요?"와 같은 대사들, 혹은 <행복>에서의 산길을 걸어오다 슬며시 손을 잡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 좋은 장면들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장면의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는지 싶다. 즉, 아..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었지, 혹은 저런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라고 어느 틈에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한편의 이유는 그것이 전체적인 드라마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쪽에서 무언가(아마도 '사랑'이) 얻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한쪽에서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상실되고 있는 것을 그려내보이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그만 발걸음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봄날은 간다>에서 다가가는 한편, 동시에 멀어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서 어떤 것(순수?)을 잃어버리는 남자의 모습(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렇고), <외출>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의 집약판이라고 느껴지는 <행복>. 즉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어 내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그러나 사실 한편으로 보면 허진호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은 이 방해요소에는 왠지 상당히 초연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그렇다)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실들, 그리고 한편으로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을 잘 버무려내어 보여주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고, 그것 자체가 감독의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아마도 한국 감독 중에, 사랑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의 감정과 진행양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면 가장 잘 써낼 수 있을 듯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이라고나 할까.


근데 왠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 허진호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취하는 듯 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에 관계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면서, 즉 이야기를 초반부터 만들면서 시작하는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개인사를 보여주는 별다른 장면을 할애하지 않고, 대뜸 두보초당에서 남녀주인공을 대면시킨다. 청두로 출장차 온 동하(정우성)와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고원원). 그리고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어떤 밀고당기기(?)를 통해 관객은 조금씩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동하의 유학시절, 이미 이들은 만났던 사이라는 것, 서로 간에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여차저차첫차막차하다보니, 이들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간의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어야 했다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거의 추억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질 뿐, 정작 중요한 현재의 이야기는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감정의 파고를 급속하게 보여준 후, 다시 중간을 생략해버리고, 마무리를 제시한다.

즉 이 영화 <호우시절>이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밀도있게 쌓아나가며, 관객들에게 그 감정선을 서서히 따라오도록 했던 전작들에 비해, 중반을 넘어 갈 때까지 일종의 로맨스코미디 식으로(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녀주인공의 일종의 '사랑만들기(혹은 밀고당기기)'를 보여준 후, 정작 드라마는 후반 짧은 시간에 몰아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초중반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후반부의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동하 역의 정우성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로 감정선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정우성에게 관객을 그 감정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들이 후반부에 짧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설혹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것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이 말은 정우성의 연기 '자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의 몇몇 씬들이 - 예를 들어 정우성의 급정색 씬 같은 - 조금은 이해되지 않으며, 혹은 약간은 우스워보인다면, 그것은 감독에게 더 책임을 물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뭔가 좀 어정쩡해진 감이 있다. 어떤 잘 짜인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들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귀여운 대사들을 내뱉는, 풋풋하고 상큼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그것도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중국 청두에 대한 관광홍보물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남녀주인공의 좋은 비주얼을 감상할 그냥 눈만 즐거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이 영화에 대한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한 큰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그저 중국 청두의 멋진 풍광이나, 정우성, 고원원 그 자체의 청두라는 공간에 못지 않은 비주얼을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포스터에 박힌 '허진호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와, 그의 필모그래피들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의 그 좋은 감성들은 다 어디에 던져두고...허진호 감독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그의 필모의 정점은 여전히 <봄날은 간다>다.

(비주얼이 좋은 영화니 사진이나 많이 넣자..;)



- 2009년 10월, 씨너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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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Ending Credit | 2009. 9. 29. 02:26 | Posted by 맥거핀.



<씨네 21>에 소개된 이 영화의 소개 중 일부분은 이렇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메시지 또한 담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세련미있게 가공되지 않은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 세상의 순정함에 대한 믿음, 영화적 스타일보다는 배우 연기의 극대화 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야 할 것 같다. 박진표 감독의 작품들은 그간 직설적이지만 약간 촌스러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노년 부부의 사랑이야기, 농촌 총각과 다방 처녀의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 유괴된 아이를 구출하기 위한 부모의 사투...이러한 약간은 신파가 섞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건 캐릭터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그 묘사를 완성시켜주는 배우들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이야기 역시 스트레이트하지만, 역시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루게릭병 환자와 그를 사랑하는 아내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정도 이야기이고 보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 영화의 요건은 어떻게 하면 신파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야말로 캐릭터에 대한 개연성 있는 구축이 어느 정도는 필수적이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래야만 눈물이 흘러도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남기지 않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박진표 감독의 이번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시작 부분의 몇몇 장면들은 당황스러웠다.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드는 이지수(하지원)와 백종우(김명민)는 몇몇 물음들을 제기할 틈도 없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물음들. 이지수는 백종우를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여기에 박진표 감독은 대답한다. "종우가 지수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해주잖나. 나는 지수가 거기서 확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이겠지.(웃음)-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글쎄. 영화를 본 한 관객의 대답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이 영화를 직접 만든 입장에서의 대답으로는 불충분(불성실)하다. 아니 단지 이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의 영향도 있지만, 이지수 캐릭터는 평면적으로, 지나칠정도로 착하게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여성 캐릭터가 감독의 입장에서는 보고 싶었는지 몰라도, 이야기의 측면에서라면 매력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평면적으로 그려진다면 말이다. 

물론 이 이지수라는 사람이 원래 천성 자체가 착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천사 같은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 캐릭터를 어느정도 그렇게 '보이도록' 설명하는 장면들이 있어야 한다. 설명 없이 시작하는 초반부부터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 이지수 캐릭터는 답답하게 정해진 동선으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틀 속에서 끝내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화는 마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이라면 이지수가 굳이 장례지도사로 나와야 했던 이유 또한 잘 알지 못하겠다. 삶과 죽음과의 대비, 타인을 고이 떠나보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백종우가 이지수에게 느껴야하는 감정들...아마도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라면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 훨씬 맛깔스럽게 잘 풀어냈다. 주인공 캐릭터를 아주 잘 성장시키면서 말이다. 성장하고 변화하지 않는 캐릭터가 그려내는 이지수의 장례지도사라는 설정은 단지 어떤 생계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예를 들어 중간에 이지수가 노인들에게 얻어맞는 장면 같은 것들. 이 장면에서도 생계를 꾸려나가려는 억척스러움만 느껴질뿐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은 말한다.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내 영화에선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 된다. (중략)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니까. 안락사나 존엄사에 관한 문제를 애초엔 좀더 하려고 했다. 시나리오에도 있고 찍기도 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방해되는 느낌이 있었다. 편집과정에서 들어낸 것이다. -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몇몇 이야기들이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두 캐릭터를 조금 더 구체화시키는 좋은 계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두 캐릭터의 사랑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두 캐릭터의 조금 더 명확한 형상화가 필요했다. 왠지 박진표 감독은 오로지 '사랑'만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웃긴 말이지만,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두 캐릭터가 '사랑'을 하는거지. 사랑하는 과정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왜 서로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이겨내고, 혹은 무엇을 극복하고 이들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 주구장창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관객들이 그 사랑에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이렇게 곁가지를 쳐내는 와중에서 잘려 나갔을 몇몇 이야기들이 그래서 아쉽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았을 때 중반 이후로는 오로지 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 김명민이 몸으로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 그렇다. 6인 병실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이지수의 아버지(강신일)와 관련된 이야기들에 조금 더 살이 붙었으면, 김명민의 점점 쇠약해져가는 몸만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몇몇 빛나는 장면들도 있지만, 덕분에 조연들 캐릭터도 조금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병문안 온 친구들에게 침을 뱉는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즉 돌변한다고 느껴지는) 착해지는 젊은 여자 환자(가인)도 그렇거니와, 왠지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담아 놓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저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한, 장애가 있는 다리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지수의 아버지('지뢰마을'을 언급하는 감독의 인터뷰로 볼 때 아마도 이 다리는 지뢰사고로 인해서일 것이다. 이 부분이 잘 설명되었으면 초반부 마을에 들어가는 장면에 나왔던 시위대의 풍경이나, 법 공부에 집착하는 백종우의 모습이 조금은 더 잘 이해되었을 것이다) 같은 캐릭터들은 그저 고정된 주변의 풍경에 머물고 만다.

아무튼 중반 이후로는 영화가 전체적으로 힘이 떨어진 와중에 김명민의 몸과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만이 영화를 지탱해 나간다. 여러 매체들에서 언급되었지만, 김명민의 몸은 형상 그 자체로서 연기를 하고 있고, 그랬기 때문에 몇몇 가능한 감정들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김명민이 알몸으로 수술대에 눕혀지고 나서 이어지는 "불편한 데 없으시죠?"와 같은 대사들. 그 짧은 장면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김명민이 만든 '몸으로서의 형상화'의 힘이다. 그 밖에도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짧은 순간에 깨어난 아내의 모습을 놓치고, 망연자실하게 복도 구석에 쭈그려앉은 남자(임하룡)의 모습이라든가 백종우의 뺨에 붙은 모기씬 같은 것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에서 다시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로 돌아오는 이 장면은,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보는 사람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 결국 영화가 할 일이라는 것과 그 만큼의 무게로 반대쪽에서 다시 저울을 가라앉히는 절망감의 무거움. 그 환상과 잔인함의 대비- 그것을 제공하는 영화라는 것의 이 아름다운 잔인성.

..............................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는 몇몇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중 가장 큰 질문은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 걸까'다. 삶과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루게릭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초점이 아니라, 그 속에서의 남녀 주인공이 벌이는 사랑, 그나마도 설명도 제대로 안해주는 사랑이 그 초점이라면 이 영화의 주무대가 굳이 병실일 이유가 있을까. 단지 어쩌면 그 무대가 병실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 곳에서의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에...가 아니었을까. 다큐멘터리 <사랑>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울렸던 이야기가 병실에서의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더불어, 영화의 어떤 윤리성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미치게 한다. 예를 들어 루게릭 환자는 이 영화를 좋아할까, 우리가 우는 사이에 그들도 울었을까, 우리의 울음들의 어떤 부분은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들.

아니 바보 같은 질문들은 하지 말자. 박진표 감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으므로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에 몇 번 '헌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헌신적이라면, 그 반대편에서는 이기적인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왠지 이 영화에서의 백종우의 모습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에서의 황정민 캐릭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정민 캐릭터를 박진표 식대로 해석한 것이 이 백종우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예전에 <행복>에 대해 별로 안 좋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행복>이 땡긴다. 그 영화가 왠지 상당히 괜찮았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 2009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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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홍기선

Ending Credit | 2009. 9. 12. 02:08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여러 미리니름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나는 이 영화는 뭐가 어찌되었건, 그 내용에만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의 사건이 가진 주는 아이러니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에 '영화적'인 다른 어떤 것에 주목할 틈이 없다. 이 영화가 사건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떻게 전달하는가라는 방법론적인 측면을 떠나서 이 사건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 또는 무거움이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른다. 따라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영화인가, 혹은 나쁜 영화인가를 따질 틈이 없이, 사건이 가지는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 내용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은 실제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즉 ,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영화 시작부 자막에서 밝히고 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의 사건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튼 이 영화는 상당수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드리라는 생각이다. <씨네 21>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관객들은 어떤 명확한 결론을 선호한다. 이 영화처럼, 명확한 어떤 것도 내려주지 않은채, 관객에게 그 해답을 맡기는 결론은 아마도 어떤 좋은 소리를 듣기는 꽤나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정해진 도덕률에 의해 명확한 결론이 나오는 결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다. 오랜 예전부터 관객들이 선호하는 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지, 모호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다루는 이 사건이 실제로도 그렇게 결말이 났다는 사실이다. 1997년, 한 남자가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칼에 여러 군데를 찔려 죽었다. 사건 장소에는 친구 관계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범행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러 증언 및 정황증거에 따라 알렉스는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피어슨은 증거은닉 및 무기소지로 1년여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짧은 징역살이 후 출국금지가 잠시 정지된 틈을 타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다 되가는 오늘에 이르렀다.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도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명확하나, 둘 다 풀려난 사건, 그 실제 일어난 사건이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의 사건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사건에서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혐의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는 채집되지 않았다. 즉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알렉스가 범인일 수도, 혹은 피어슨이 범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범인일 수도 있다. 즉 알렉스와 피어슨이 같이 범행을 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 부분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맡은 영화 속 박대식 검사(정진영)은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라는 (즉, 누가 주범이든, 종범이든 간에) 의견을 묵살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100%의 진실을 버리고 50%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둘 다 기소한다면, 무고한 한 사람을 범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그것이 박대식 검사가 가진 생각이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인 것일까. 두 사람이 같이 범행을 했을 가능성은 어떠한 이유에서 제거되었는가. 실제의 사건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즉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이다'라는 전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일까. 성립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

처음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미국과 우리나라 간의 수사권의 문제, 그의 어떤 부당한 측면을 강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러한 부분이 아니다. 물론 영화 중간에, 미국의 수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을 박대식 검사가 토로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당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그 부분은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에서 포인트를 두고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의 어떤 아이러니한,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둘 중 어느 누구도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혹은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상황. 영화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알렉스 쪽에 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했을 때 여전히 몇몇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과연 그 둘 중에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답답함은 내내 박대식 검사를 짓누르며, 동시에 관객들도 짓누른다. 

그것이 관객들을 짓누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박대식 검사(정진영)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영화 중간중간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예를 들어 피어슨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 혹은 알렉스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과 같은 내용들이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박대식 검사의 시점에서 들은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즉 박대식 검사가 피어슨이나 알렉스를 심문하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나열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둘 중 어느 것에 진실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박대식 검사가 가지는 이 답답함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박대식 검사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코믹해보이는 장면마저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장면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보기는 조금 특이해 보이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지만, 전체적으로 여러 시점을 중간에 삽입하며 관객의 이해와 영화에의 몰입을 높인다. 그러나 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박대식 검사의 시선으로만 관객을 이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어떤 정황을 마치 우리가 수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가 느낀 절망과 한계를 우리에게도 같이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이 영화가 사건의 어떤 충실한 재현에만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듣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이로써 얻는 소득도 있다. 그것은 관객을 어리둥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사실 정작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에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범인이 피어슨인가, 혹은 알렉스인가 라는 부분이지, 그 둘 모두가 풀려나게 된 그 결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해서는 애써 입을 다문다. 즉 이 둘 모두 거의 무죄와 다름없는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 이 법의 허점, 혹은 커다란 구멍에 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이길 수는 없으나, 지지는 않게 해드리죠.") 지나가고 만다. 이것은 불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죠?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죠? 그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불친절해 보이는 마지막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러나, 찝찝한 한 마디를 더 덧붙이자면, 이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렉스를 향해? 혹은, 피어슨은 향해? 아니면 법원을 향해? 이 영화의 가장 무거운 점은 어쩌면 이것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제시된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무엇일까.)





- 2009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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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 10명의 감독과 10개의 이야기

Ending Credit | 2009. 9. 9. 00:12 | Posted by 맥거핀.



조금 특이한 영화를 보았다. 10명의 감독들이 10개의 이야기를 하는, 10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 <황금시대>. 그리고 그 10명의 감독들에는 꽤나 만만치 않은 이름들이 포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이송희일 감독, <은하해방전선>으로 귀엽고 유쾌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윤성호 감독,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가난한 청춘의 감수성을 보여줬던(그러나 그 이후로 <보트>로 약간은 말아먹은) 김영남 감독,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로 꽤나 스트레이트한 묵직함을 보여준 양해훈 감독, 그리고 <여고괴담4>의 최익환 감독, <거울속으로>의 김성호 감독, <새드 무비>의 권종관 감독 등등..지난 몇 년간 큰 대박은 터뜨리지 못하였으나, 어느 정도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 감독들 10명이 각각 10여분 내외의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 <황금시대>의 가장 큰 장점은 10개의 단편들이 어느 정도 고른 결과물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놀랍다 정도의 작품들은 없지만, 꽤나 인상깊은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럿 있으며,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그렇게 또 아주 떨어진다 싶은 작품들도 없다.

이 10개의 작품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는 '돈'이다. 그러나 흐름을 관통한다고 해서, 이야기들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10개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의 흐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단 이 10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짧은 순간 집약되는 공포를 보여주는 김은경 감독의 <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 <담뱃값>(남다정 감독), 음악을 이용해 감수성을 잘 이끌어내는 김성호 감독의 멜로 <페니러버>, 현재 사회 이슈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미친듯이 웃어제낄 수 있는 사회 패러디물 <신자유청년>(윤성호 감독), 묘한 분위기로 관객의 마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각 10개의 이야기들은 코믹반전, 생활스릴러, 공포특급, 슬로우액션 등 비슷한 소재를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장르 속에서 각 감독들의 전작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색다르게 이 이야기들을 즐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성호 감독의 독특한 공포 스릴러 <거울 속으로>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약간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감성 멜로 <페니러버>가 흥미로울 것이고,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고 의도적으로 어설픔을 강조하고있지만, 전작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직구를 이번작 <시트콤>에서도 살짝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이라는 소재를 내세웠다는 것은 연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소재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돈 빠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있던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돈을 소재로 한 10편의 단편을 보는 것은, 젊은 영화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간은 불행하게도, 이들이 보는 우리 사회는 뭔가 망가져가는 상당히 어둡고 불안한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자살하기 위해 유언을 작성하며(<유언>), 부부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고(<불안>), 소녀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서는 안될 일들을 저지르며(<동전 모으는 소년>), 노숙자는 지금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달린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보지도 않는다(<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농담을 표방하고 있는데도, 별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청년> 같은 것들. 이 이야기는 임경업(임원희)이라는 청년이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패러디로 계속 농담을 던지는 영화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건드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것들이 농담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중권 씨도 진중권 씨 본인에 의해 희화화된다. 그쯤 되다 보니,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묘한 물음이 생긴다. 이게 농담일까. 어쩌면, 실제로 혹시 만약 그런 일이, 즉 누군가가 50주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계속 웃게 만들긴 하지만, 이 웃음은 언젠가 영화 속 어떤 사건과 꽤나 비슷한 신문기사를 보고 웃었던 웃음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아..50주가 넘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구요? 무슨 소리. 이 사회가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트콤>에서 끊임없이 깔리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시트콤은 전혀 웃기지 않기(혹은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의 방청객의 녹음된 가짜 웃음소리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것이 있던가. 그리고 하나 더. 어떤 시트콤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중간중간 꽤나 코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떤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버텨나가기 어려운 일만 있을까.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버텨낼 수 있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백 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지나간 후에야, 마지막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김영남 감독의 <백개의 못, 사슴의 뿔>. 모질지 못한 공장노동자 미숙(조은지)과 빈틈이 많아 보이는 사장(오달수)과의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한판 대담은 유쾌한 속에서, 꽤나 명징한 해답을 남긴다. 결국 돈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 없다는 것. 인간이 살기 위해서 돈이 만들어졌지, 돈이 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명징하고도 당연한 대답을 하기 위해 영화는 꽤나 긴 시간을 달려온다. 달려온 긴 시간만큼 이 마지막은 꽤나 안도하게 만든다. 사슴의 뿔을 싣고 어디론가로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비추는 이 엔딩은 그래서 안도의 엔딩이다.



- 2009년 9월, CGV 압구정 



덧.

시사회에서 본 영화인데, 중간에 일어나는 관객이 조금 보였다. 아마 단편들의 옴니버스라는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몰랐던 관객들이 아니었나 싶다. 단편들은 시간의 제약상 아무래도, 완결된 이야기나 잘 얼개가 짜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닐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보면, 역으로 이 단편들의 재미가 그런데서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얼개를 스스로 짜맞추고, 어떤 상상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은경 감독의 <톱> 같은 작품. 톱을 사간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어쩌면 진짜 공포는 그가 꾼 악몽이 아니라, 그녀가 톱을 사가고, 그 후에 다시 찾아온 그 아침 사이에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이 아니었을지. 그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단편도 단편 나름. 잘 짜인 얼개와 짧은 이야기에서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전 영화들에 지나치게 호의적인 평가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들의 배열을 좀 달리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있다. 작품들의 수준은 고른 편이지만,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도 있고, 한편으로는 조금 실험적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초반과 마지막에 조금 친절한 작품, 중간에 조금 덜 친절한 작품들을 배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을 번갈아 배치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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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트(loft), 구로사와 기요시

Ending Credit | 2009. 9. 5. 00: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상당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영화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레이코(나카타니 미키)와 고고학자 요시오카(토요카와 에츠시)가 소녀의 시체가 물 속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뭔가 밋밋한, 약간 기이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기계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소녀의 참혹한 시체는 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요시오카 교수는 반대로 물에 빠진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강한 시각적 충격이 생각을 정지시킨다. 그랬다. 이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며 끝나는 마무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반복을 통한 영원한 순환. 이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마무리 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다. 관객을 절망을 통한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 그의 영화다. 아마, 이 마무리 장면이 없었다면, 뭔가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마무리 장면은 그 전의 장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편집장 기지마가 레이코를 습격해, 이상한 형태의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나무를 통해 양쪽에서 목을 매는 기이한 형태. 반대쪽에서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끌어올려지는(즉, 목이 매달리는) 구조. 이것은 이 마지막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는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땅을 파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그 전의 장면의 반복이기도 하다). 죽은 소녀가 끌어올려짐으로써 요시오카는 물에 빠진다. 한 쪽이 끌어올려지면, 다른 쪽은 반대로 하강한다. 이 끌어올려진다는 것, 끌어올려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단, 미이라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발굴 행위부터가 그렇다.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미이라를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행위. 그리고 사실 이마저도 반복이다. 사실 이 미이라의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1920년대 처음의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이 미이라를 다시 진흙 속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 미이라를 감시하는 기묘한 기록필름을 남겼다. 즉 이 미이라의 발굴 역시도 일종의 반복인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기록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총 4번의 끌어올려짐이 나오는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진흙을 토하는 레이코의 모습. 그런 것마저도 왠지 일종의 '끌어올림'을 연상시킨다. 뱃 속에 가득찬 진흙들이 식도를 타고 끌어올려진다...아니, 이것은 끌어올려짐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뭔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프트(loft). 사전을 찾아보면, 다락방, 창고 같은 의미이다. 영화 팜플렛에 소개된 대로, 이는 레이코가 요양을 하기 위해 간 시골의 창고와 같은 집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로프트'라는 말은 '리프트(lift)'를 연상시킨다. 끌어올린다는 의미의 리프트. 이 '로프트'라는 말이 '다락' 혹은 '집의 가장 높은 층'을 의미함도 생각해 볼 때, 어원학적으로도 '리프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은 로프트 혹은 리프트다. 이 반복되는 끌어올려지는 행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늘상 그랬듯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불확실한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 이는 왠지 어떤 욕구(욕망)와 관계되어 있는 것인 듯 싶다. 일단 욕구라는 것 자체가 가진, 끌어올려지는 어떤 속성. 우리는 흔히 욕구를 발산한다, 혹은 분출한다고 이야기한다. 발산한다, 분출한다는 것은 밑바닥에서 위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내 속의 아주 깊은 진흙과도 같은 늪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들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위는 어떤 욕구(욕망)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물들은 파멸의 길에 다다른다. 1000년 전에 아름다움을 유지하고자는 하는 욕구로 진흙을 먹었던 어떤 여인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었다. 그리고 편집장 기지마는 소녀를 범하려는 욕구를 채우려다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요시오카는 천년된 미이라를 자신의 학문적(그리고 학문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어이 늪에서 다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역시 소녀에 대해 어떤 욕구를 품고 있다가, 소녀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파멸에 이르렀다. 그리고 레이코는...레이코의 파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소녀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멋대로 출판했다. 그녀가 그 소설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는 그 장면은 왠지 그녀의 어떤 파멸을 예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오카가 물에 빠지고 사라진 후,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멀지 않은 그녀의 파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빠져나갈 공간이란 없다. 그녀는 또 어딘가에 가라앉을 것이고, 그 순간 또 누군가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


어느 것이 끌어올려지고, 그의 반대편에서 또 어느 것이 가라앉는 것, 그 순환성과 영원한 반복, 그것에서 비롯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로 이 영화를 잠깐 생각해 봤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해석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모호한 얼개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물론 이야기의 얼개를 전혀 짜맞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면들이 현실과 꿈, 혹은 상상의 경계 속에서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화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상당히 자주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깨어나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혹은 빙의된 상태인가. 예를 들어 요시오카가 기계를 돌리며 무언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있고, 뒤에서 레이코는 그만두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몽환적인 장면. 그 후에 바로 레이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이 장면을, 통상적인 영화 문법에 의해 관객들은 이를 꿈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장면은 꿈일까. 레이코는 실제로 이 장면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레이코는 혹시 누군가가(미이라가, 혹은 소녀가) 빙의되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이미 레이코도 죽은 상태가 아닐까. 진흙을 토한다는 장면도 그렇게 보면 심상치 않다. 이미 레이코는 죽어서 몸 속에 진흙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닐까...아무래도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렇듯 꿈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그 경계선 속에서 보는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악몽의 가장 희망적인 요소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언젠가 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가 지속된다면,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을 담아내기를 노린다." 그가 이 영화에서 그런 경계선을 그려내기 위해 활용한 방식은 독특한 카메라의 시점이다. 등장인물을 상당히 이상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은, 마치 어떤 유령의 시점을 연상시킨다. 즉 등장인물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각도,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장면 어딘가에 있는 유령, 혹은 환영 밖에는 없다. 그 유령이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순간, 그 바라보는 세계는 도리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음침하게 보인다. 마치 도리어 그 곳이 비현실이라는 것처럼. 그 경계선에 카메라는 서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건물에 난 창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지켜보는 장면(포스터에 있는 장면). 레이코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바라보는 건물 안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요시오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레이코의 모습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 경계선에 화면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거기에 같이 위치하여 그 절망을 바라본다. 창 이쪽인가, 바깥인가. 어디로 나가도 당신은 피할 곳이 없다. 경계선 이쪽이나 바깥쪽이나 다를 것은 없다.

공포감은 거기에서 밀려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한 몫을 한다. 음악의 사용을 배제하고, 사물들이 발생하는 소리, 주위의 환경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증폭시켜서, 공포감을 창출하는 방식은 영화 <불신지옥>과 조금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때로 이 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한 속에 그녀가 서 있다.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악몽을 꾼다. 아마 오늘 밤에도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다. 꾸는 것은 무섭지 않다. 문제는 깨어난 다음이다.




- 2009년 9월, 스폰지하우스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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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이용주

Ending Credit | 2009. 8. 24. 00:2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과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불신지옥>이 꽤나 무서운 공포영화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음산한 스코어나 과도한 효과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효과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나, 공간이나 사물을 잘 활용하여- 예를 들어, 아파트 지하실 씬 같은 것 - 말 그대로, '일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여러 좋은 리뷰들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또 영화의 여러 설명되지 않는 점들을 다시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리뷰들에 보면 재미있고, 기발한 설명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설명을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몇 가지를 이 영화는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소진의 엄마(김보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아파트 현관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 주잠금장치와 몇 개의 보조잠금장치가 달려있는 현관. 엄마는 그 몇 개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열리지 않고, 도리어 잠긴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문을 당겼다가,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고, 가지고 온 물건을 떨어뜨리며 잠시 패닉에 빠질 즈음, 스르르 열리는 현관. 어떤 다른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장면은 '그들'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급하게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반대로 잠그는 것이었다는 작은 아이러니,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엄마의 작은 패닉은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주로서 읽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그 몇 개의 잠금장치들이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은 어떤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현관의 팻말 이면의 감추어진 많은 자물쇠들. 종교라는 굳건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엄마,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는 엄마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면, 그 아파트의 다른 집들도 거의 비슷한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을 달고 있으며, 대부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범창들을 설치해놓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영화의 시작 부분이 생각이 난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는 언니 희진(남상미)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알바를 꾸준히 해야하는,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 그런 희진이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어느 지방 중소도시로 내려와 거대하고, 허름하면서도,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설 때, 어떤 느껴지는 공포감. 아마도 이 공포감은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공포감일 것이다. 특별히 어떤 요행이 있지 않고서는 앞으로 그저그런 '88만원 세대'로 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그녀의 지친 삶과 그녀가 한 때 몸담았던 낡은 서민 아파트와의 조합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연민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무너지는 중산층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추락하고 있는 것, 이를 영화는 희진의 삶에 대한 몇 개의 컷과 아파트와 집안의 가재도구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빨간 전자렌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 전자렌지는 적어도 15년은 된 저가제품. 왜 아냐면 우리집도 아직 그 전자렌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무너진 중산층들은 두렵다. 무엇이? 삶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조금씩 변해가고 망가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들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진이 신들렸다고 말하는 무당(문희경)과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장영남)와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오지은)와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이창직).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왠지 이들은 각각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그 시대의 무섭고도 기이한 자화상들 말이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무속' 자체가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무당이 그렇다는 말이다)과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의 상징이라고 이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의 고통을, 그 고통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믿는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종교이든 무속 신앙이든)도 망쳐 버린다. 일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람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인 중세시대, 그 중세시대는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만이 존재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지나친 믿음은 종교의 타락을 낳았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명백하게도,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이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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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이의 극복을 위해, 즉 무너져가는 중산층이 탐욕이나 방관이나 혹은 맹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떤 가족주의, 그 수많은 가족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공동체의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던 엄마의 팔, 아버지를 잃은 소진,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만 늘상 바쁘기만한, 병상에 누운 아이의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아빠..아빠 언제 데릴러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속 학의 존재를 통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을 소진의 영혼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은 옛부터 어떤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무리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영화가 마지막에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가족주의, 공동체의 회복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또다른 물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이다. 이제는 제2의 소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의 딸을 (소진처럼) 잃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가능할까.

맹신(盲信)의 반대말은 불신(不信)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종교이든 무속이든 코웃음을 쳤던, 엄마에 의해서 사탄이라고 불렸던 형사 역시 이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만 해도 형사 역시 단순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종교이든 무속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다우트>에서 찾고 싶다. 올해의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고 싶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의심이 들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마지막 장면.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는 그것을 '회의(懷疑)'라고 불렀다. 아마도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p.s. <불신지옥>...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이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소 오십만은 더 들었을 듯 싶다.




- 2009년 8월, 씨너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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