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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言)들의 향연

The Book | 2009. 6. 11. 23:49 | Posted by 맥거핀.

지혜의 숲에서 고전을 만나다 - 8점
모리야 히로시 지음, 지세현 옮김/시아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여러가지 새로운 방식으로 이른바 '고전(古典)'들이 그 힘을 얻고 있는 듯 하다. 학교에서 고전을 다룬 강의도 많고, 그 외 여러 고전을 강독하는 강좌들도 많으며, 출판사들에서도 앞을 다투어 여러 고전들을 새롭게 소개하고, 조명하는 책들을 발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고전은 여전히, 어떠한 의미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경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전은 고루하고 당연한 말만 가득한 지루한 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고전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애써 외면하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이것은 고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고전을 이어받은 후세 사람들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는 그간 고전을 탐독하고, 이야기해 온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 혹은 어떤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종종 고전을 인용하며 '한 말씀' 하시기도 하고, 고전 중의 한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자랑스레 소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들이 가끔 보여주는 자신의 말들과 너무도 다른 행동들, 자신의 좌우명과 완전히 배치되는 행동들은 그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이 고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자님 말씀 하고 있네, 흥."하고 냉소적으로 내뱉을 때, 우리는 은연중 그 고전들까지도 냉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소개할 <지혜의 숲에서 고전을 만나다>의 저자 모리야 히로시는 다음과 같은 그렇게 '입만 살은 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나는 이 책을 30대 이상의 이 사회를 열심히 지탱해나가고 있는 사람들, 특히 40대 이상의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중국고전은 단순히 지식과 교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이는 어디까지나 실학實學으로,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했을 때 의미가 있으며 비로소 그 값어치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p. 5)



따라서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실용서다. 이 책은 <채근담>, <논어>, <맹자>, <삼국지>, <역경> 등 30여 개에 달하는 중국 고전 중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몇몇 구절들을 뽑아 소개하고, 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읽는 이가 실제로 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각 고전 별로 구절을 뽑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전들을 섞어 다시 재배열 하고 있다. 즉 이 책의 큰 챕터들은 다음과 같다. 인간관계의 지혜, 사람을 쓰는 지혜, 소박한 일상의 지혜,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 인생을 위한 지혜,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지혜. 

이러한 실용서들은 처음부터 독파하는 것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부분을 읽으면 그만이다.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별로 재미없다 혹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된다. 그래서 나도 고백하건대, 책을 다 읽지 못했다. 굳이 분량을 이야기하자면 한 3분의 2 가량 읽었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후, 책장 멀리에 꽂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한 번 덮은 후 다시 읽지 않아도 되는 그런 류의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까이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혹은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혹은 답답할 때마다 가끔씩 꺼내어 조금씩 읽는 것이 좋은 그런 류의 책이다. 그래서 나도 책장 가까이에 대학 때 선물로 받은 <논어> 옆에 꽂아두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당연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 당연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혹은 과거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 중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부분은 최근의 정치상황과 맞물려서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사람을 책망할 때는 함축이 필요하다
                                   責人要含蓄 <신음어呻吟語>

'함축含蓄'이란 하고 싶은 것을 전부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긴다는 뜻이다. 사람을 책망할 때는 이러한 '함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일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비록 상대방에게 100퍼센트 잘못이 있다고 해도 마구잡이로 몰아붙이면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반드시 불만과 반발이 생겨난다. 잘못하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후략) (p.80)



이 책에는 이러한 당연한 말들이 가득 들어 있다. 아마도 이러한 당연한 말들은, 당연한 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가 이러한 삶의 원칙들을 중시하는 사회라면, 이러한 말들이 더 이상 무슨 의미,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의 현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상식적인 것들이 출몰하는 시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기이다. 당연한 말을 하면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은 너무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읽히기도 했고, 파란 기와집 사시는 분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아마도 어떻게 보면, 처음에 이야기하였듯이 고전이 강조되고, 고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이런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은 일종의 위기의식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는 일종의 위기감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더 이상 이런 책이 출판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고, "뭐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나." 이러면서 사람들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이 당연한 말들의 향연이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곳, 그곳은 아득히 멀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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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Ending Credit | 2009. 6. 9. 23:42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에는 명백하게도 그 뒷부분이 숨어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을 하세요?) 그래서 이 말은 영화 속 고순(고현정)의 대사와 사실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라고 했던 그 대사 말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한다....간단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려면, 우리 자신이 어느만큼 아는지를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매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자주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잘 아는 것들이라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은 대체로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기준에 따르게 된다. 어떤 새로운 것, 혹은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을 때, 과거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때 이렇게 말한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거 본 적 있어." 그것은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즉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반복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슷하다'라는 것에 있다. 즉 비슷한 것이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상황이란 실험실이 아닌, 실제의 경우에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로 이 반복은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예전의 어떤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는 않은 상황. 이 상황에서 과거 행동의 반복은 성공할 때도 있으나, 실패할 때도 많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기는 왜 나서. 

그래서 이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제,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는 그간 감독의 전작들이 가진 공통의 형식적 특징, '반복과 차이'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즉 주인공에게 어떤 상황을 반복해서 만나게 하며, 그 반복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비슷한, 그러나 또 약간은 다른 행동을 살펴보면서, 소위 '인간성'을 탐구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전작 <극장전>이나 <생활의 발견>과 유사하게,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1, 2부로 나뉘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작들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주인공은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사태와 유사한 사람에 직면하며, 비슷한 패턴으로, 그러나 또 동시에 약간은 다른 패턴으로 행동한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영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진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은 이 영화는 왠지 주인공들에게만 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를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관객들에게도 '너는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사실 니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지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의 상당수의 사건들이 상당히 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사건인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이 제천에서 후배 부부 부상용(공형진)과 유신(정유미)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만 해도 그러하다. 과연, 구경남은 왜 부상용에게 그렇게 인간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거기서 도망쳐야 했을까. 과연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길래 말이다. 이는 비단 이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경우, 예를 들어 제천에서 공현희(엄지원)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며, 구경남에게 화를 내는 장면. 과연 실제로 이 사건은 일어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도 의심스럽다. 더구나 공현희 자신도 본인이 술에 매우 취했었다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일은 이 영화에서 비일비재하다. 또다른 경우로 구경남은 아침에 여배우가 흥행감독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것이 구경남이 생각하는 그런 일일까.  

이 영화에는 이러한 이른바 '모호한 상황과 모호한 사건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구경하는 남자인 구경남은, 아니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판단은 따라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당신은 어느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말이 뒤따를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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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 마디 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다. 이번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의 숨겨진 뒷부분인 (왜 아는 척을 하세요?)에 살짝 주목해서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상 그렇듯이 '찌질남'이 등장한다. 물론 '찌질녀'도 나온다. 그러나 대체로 이 '찌질남'들의 포쓰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찌질녀'들은 묻히는 경우가 많다. 이 찌질남들은 왜 이렇게도 찌질해 보이는 걸까. 글쎄. 내 생각에는 그 포인트가 이 '아는 척'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척'에 있다. 사람이 가장 찌질해 보일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무언가 '척'을 하고자 할 때, 그러나 이 '척'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그 의도가 빤히 보일 때일 것이다. 이 '척'은 '아는 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센 척, 고상한 척, 깨끗한 척, 배려심 많은 척, 여자 안 밝히는 척, 모르는 척, 안 졸리는 척, 재미있는 척....여기 영화를 통한 몇 개의 경우를 보자.

[경우 1] 센 척

제주에서 선배(유준상)의 학생들과 만난 구경남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학생 하나가 다가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구경남은 자유가 어떻고 하는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이 학생은 그에게 팔씨름을 청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센 척).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경남이 양천수에게도 나중에 이 팔씨름을 청하는 것을 그대로 써먹는다는 점이다. 양천수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양천수의 성 기능을 운운하는 것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려 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경쟁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를 다른 방식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장면.

[경우 2] 고상한 척 또는 여자 안 밝히는 척

제주에서 만난 구경남의 선배(유준상)는 밤의 술자리에서 여학생과 양천수와의 어떤 불확실한 관계가 일어난(났다고 추측되는) 다음날, 구경남에게 전화로 그 여학생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는 그 여학생의 평소의 부도덕한 행실을 말하며 선배를 걱정하는 방식이지만, 아마도 이의 내면에는 자신은 왜 그 여학생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구경남은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으로 대응하지만, 사실 이에도 구경남 역시 그 여학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구경남이 그 전날 술자리에서 떠나온 방식은 그 전 제천의 술자리에서 흥행감독이 사용한 방식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잘께.")

[경우 3] 깨끗한 척

제주에서 조씨(하정우)는 구경남과 고순의 관계를 적발한 후, 양천수에게 전화로 울면서 말한다. 더럽습니다, 억울합니다...글쎄. 더러운 건 그렇다치고, 억울하다는 것은 도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는 예술계의 위대한 선배에 대한 애정심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나, 아마도 그보다는 조씨의 욕망과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씨는 아마도 고순에 대한 어떤 욕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혹은 권위에 짓눌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고순은 저렇게 처음 만난 남자와도 자는 그런 여자였다니(조씨는 구경남과 고순의 예전의 관계를 모르므로). 지금까지 괜히 참고 살아왔지 않은가...나도 한 번 자달라고 할 것을, 그깟 선배가 뭐라고. 혹 이런 억울함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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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위의 3 경우 모두 참 찌질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척' 하지 말자. 그게 조금이나마 덜 찌질해 보이는 길이다. (왜 '덜' 찌질해 보이는 거냐고?  아예 찌질하지 않는 법은 없냐고? 어차피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찌질해 보이기 마련이다.)





- 2009년 6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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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McG

Ending Credit | 2009. 6. 6. 01:45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절대 있음)





시작부터 어쩔 수 없이 니름질을 상당히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미리 내용을 알고 보았을 때의 느낄 수 있는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허나,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다른 재미'를 별로 원하지 않을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되도록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영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T4로 지칭)'을 비롯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는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그러하고, 각 편의 이야기를 따로 떼놓고 보아도, 각각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결정론적 세계관, 즉 '이미 정해진 미래(혹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 3'의 경우에도 결국 존 코너는 스카이넷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 못한다. 존 코너는 마지막에야 벙커 안에서 깨닫는다. 터미네이터의 임무는 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는 점을. 전쟁을 막는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영화 T4는 어떠한가. T4에서는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가 아니라 마커스(샘 워싱턴)가 마지막에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그가 카일 리스를 만나고, 저항군 본부에 찾아가며, 탈출하고, 존 코너를 스카이넷 본부에 오도록 만드는 이 모든 것이 사실 이미 스카이넷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점, 그는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침투형 로봇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대로 안 된다면, 그건 일종의 프로그래밍 오류인 셈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의 반대편에 존 코너를 비롯한 저항군 세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존 코너와 저항군 세력은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의 존 코너의 마지막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설명해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 중간에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예를 들어 존 코너가 다른 저항군 세력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명령에 불복종하라는 것, 우리가 정해진 명령에만 무조건 따른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것 말이다. 존 코너의 이 말들은 비정결론적인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 그것은 기계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보일 때는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일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 실수가 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는 거야, 거참 얼마나 인간적이니.

그러나 이 존 코너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점이 있다. 그것이 내가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한 이유다. 시리즈 전체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존 코너를 살리려고 하는 인간들과 죽이려고 하는 기계들간의 대결이다. 그래서 기계들은 존 코너를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어머니 새라 코너를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그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새라 코너와 만나기 이전에 죽이려고 하며, 어린 존 코너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서 2018년 현재의 존 코너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을 태어나도록 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 새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내야 한다[각주:1]. 이렇게 보면, 앞의 이야기들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기계들은 현재의 존 코너가 있는 이 저항군의 세력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뒤바꾸어야 하며, 존 코너는 결정되어 있는 과거를 확고히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카일 리스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새라 코너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과거, 결정되어 있는 이 과거가 있어야 결정되어 있는 이 미래의 저항군 세력 및 자신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존 코너가 존재하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인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오도록 하기 위해(존 코너를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기계들이 미래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반해 인간들이 정해진 미래를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기계와 인간은 뒤섞이고 역전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이 시리즈의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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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이와 연관지어 재미있던 것은 기계가 인간을 닮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T4의 현재 시점(2018년 시점)에서 가장 발달된 터미네이터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맡았던)은 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할까. 그것도 근육이 아주 우락부락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형상으로 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T-800의 이전 모델인 T-600은 마치 골격이 전부 드러난(인체해부도에 등장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더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전의 모델들은 더욱 인간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스카이넷과 기계들이 그렇게 인간을 잡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용해서 더욱 인간에 가까운 터미네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또, T4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을 공격하는 기계들의 형상을 보면 왠지 이것이 인류의 어떤 진화과정, 혹은 자연세계를 연상시킨다. 마커스 일행을 공격했던 거대한 기계(아마도 '하베스터'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는 과거의 시기에 있었던 거대한 맘모스나 공룡들을 연상시키고, 물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그 기계는 큰 벌레나 피라니아를 연상시킨다. 즉 이것들은 자연의 어떤 세계와 그 형태와 발달 모습이 비슷하게 조응한다. 왜 이것들은 기계이면서도 인간이 존재하는 이 자연세계와 그 형태와 기능을 닮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단지 그 형태와 간단한 기능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스카이넷 본부의 그 구조. 밑에는 총을 든 T-600 감시병들이 포로들을 지키고, 위에는 작전실과 실험실(?) 등이 존재하는 그 구조 말이다. T-800이 생산되는 그 밑의 공장의 검고, 뜨겁고, 약간은 더럽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이미지와 그 위의 작전실의 깨끗하고 하얗고 샤프한 이미지의 대립. 이것이 보통의 인간 사회의 이미지와 거의 같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스카이넷의 본부가 꼭 이렇게 생겨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음이 생긴다. 왜 이렇게 그 형태나 기능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마저 인간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우문(愚問)일지도 모르겠다. 기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 따라서 그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믿는 인간들이, 한편으로는 신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각주:2].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인간들을 아무리 닮으려고 애써도, 하나 결코 닮을 수 없는 게 있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커다란 실패가 될지라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기계들이 존 코너를 결국 죽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기계들은 존 코너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게 성공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를 결코 고려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마커스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 궁금해졌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그 인간이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점이란 어떤 걸까. 





- 2009년 6월, 씨너스 단성사.

 
  1. 이와 관련하여 영화 속에서는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다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 코너가 그 자신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과거로 보내야 하는 것 말이다. [본문으로]
  2.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가 흥미롭다. T-800의 다음 모델인 T-1000이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3편의 T-X가 처음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도 재미있다. 신은 아마도 여자?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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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Mother), 봉준호

Ending Credit | 2009. 6. 1. 00:29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상당히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옛날 어느 도시에서 한 마술사가 우물에 묘한 약을 넣어 버렸다. 마술사는 말하기를, 만약 그 우물물을 마신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것이라 하였다. 그 도시에는 우물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평민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온 도시 사람들이 미쳐갔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면 미쳐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물이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포기했고, 저녁때가 되자 온 도시가 미쳐갔다.
왕은 무척 행복했다. 왕은 궁전 테라스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개의 우물을 갖고 있지. 신에게 감사한다. 온 도시가 미쳐버렸군 그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날뛰고 깔깔거리며 웃고, 울며 난리들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요, 악몽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결코 해본 적도 없었던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행복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으로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역시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 있었다. 다만 몇몇의 호위병들과 요리사, 하인들, 대신들 그리고 왕 자신과 여왕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해 있었다. 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상당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 곳은 열려 있으나 실상은 폐쇄된 공간, 예를 들어 한강을 둘러싼 서울의 일부지역이거나,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상한 일들은 벌어졌다. 이상한 약품을 먹고 자라난 물고기는 괴물이 되어 고수부지를 덮쳤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비오는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강간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괴물은 한강을 따라 폐쇄된 공간을 활주하며 그 위용을 뽐냈고, 살인마는 작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지방의 작은 소읍. 한 여고생이 밤길에 살해되어 옥상에 버려졌고, 한 어리숙한 청년은 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실을 찾고자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미친 세계. 목격자의 불확실한 진술과 작은 골프공 하나를 단서로 범인을 지목한 경찰,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만 받아 챙기려는 변호사, 아들과 어머니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웃들, 도와주기는 하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친구, 그리고 죽은 여고생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은폐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어머니는 묻는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그 전작들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을 살펴보면, 감독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 혹은 <괴물>에서 괴물이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는 것은, 그저 미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맥거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맥거핀으로 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숨은 것들, 이러한 틀을 만든 폭력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감독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 가는 개인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더불어, 경찰들에게 끌려와 폭행당하고 군화발로 짓밟히는 무고한 시민들, <괴물>에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물보다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계속 공격당하는 현서네 가족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변형된 물고기와 살인마)과 그 괴물을 만들어내고,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한강에 약품을 뿌린 자들 또는 경찰들, 국가기관)이 은폐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했고, 현서네 가족과 경찰서 지하에서 폭행당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마더>도 그러한 면에서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는 지방의 어느 소읍. 이곳은 상당히 폐쇄된 사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작은 사회에서, 공동체의 무참한 폭력이 한 소녀에게 가해진다. 이는 폐쇄된 사회, 폐쇄된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알려진,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는 그런 폭력. 그러나 이 폭력은 실제로 이러한 폭력을 가한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별로 공들여 수사할 마음이 없는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와 병원장이 젋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중첩된 이곳에서 이 구조가 온전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 도준(원빈)이나 기도원 종팔이와 같은 어리숙한, 사회적인 약자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틈을 가장 약한 곳을 부러뜨려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영화가 현재의 이야기임을 여러번 상기시킨다. 언뜻 배경이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80년대를 다루고 있는 듯 하나, CSI를 언급하거나, 2006년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임을, 이 폭력의 구조가 여전히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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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꽤나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세세한 설명과 주석을 덧붙인다. 흥행감독으로써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지만, 그런 면에서 박찬욱 감독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 약간 고약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놓고 "이 추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지 않니..이 이면의 것들을 보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잘 짜여진 풍경화를 그려내놓고, "자 여기에서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거야...그게 뭐냐면 말이지.."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작은 복선들과 작은 디테일들이 중첩되어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봉 감독의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굳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그림들에서 풍기는, 이상한 미스테리와 괴기(怪氣)들. 그것 또한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미스테리한 질문이 가능하다. 도준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엄마의 생각대로, 혹은 우리 모두의 생각대로, 정말 '바보'인가. 이 엄마(김혜자)는 도준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를 전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도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 엄마야말로 수상쩍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숨겨진 돈들이 나오고, 군에서 최고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갈 줄도 알며, 이상한 침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또 형사 제문(윤제문)이나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와의 관계도 어딘지모르게 약간 이상한 점이 있어...아니야..그건 단지 김혜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떤 아우라에 내가 너무 깊숙히 빠져든 탓일꺼야...그래도 그 춤은 좀 이상하잖아...그래...그 춤. 맞아, 그 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엄마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딘지모르게 슬퍼보이는 그 춤에서, 엄마가 약재를 썰다가 밖을 내다보고 거기에 아들 도준이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한다면 마지막에서는, 엄마가 산자락에 서 있는(처음의 그 춤 장면은 아마도 시간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장면에서, 다시 약재를 썰고 그 밖을 내다보면 형사가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버스에 올라타 침을 찌르고 버스 안의 아주머니들과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엄마는 약한 존재였다. 시작 부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약재를 썰며 좁은 문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그 아들이 차에 치여도,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잡혀가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작은 프레임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도준과 구치소에서 대면하는 장면과 겹친다. 역시 사각의 틀 안에서 작은 틈으로만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러나 이 엄마의 모습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누구와도 만나고 어디든 나타나면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아들 도준 대신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를 보면서 "엄마가 없어?"라고 묻는 그 순간, 엄마는 다시 작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더 작은 틀들로 끊임없이 분열된다. (이를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엄마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부위를 침으로 찌르고, 아주머니들과 섞여서 춤을 춘다. 이로써 엄마는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인 어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과 아프게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수많은 모성(母性)들 틈에 섞여서. 내 아들 대신 다른 아들을 밀어넣고, 작은 엄마로 돌아가며.

어쩌면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최대한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더 미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신이 말했다.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그래서 그 왕은 그 우물물을 마셨고, 잠시 후에는 그도 미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기뻐하며 소리쳐 외쳤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왕의 마음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오쇼 라즈니쉬, <배꼽> 중에서







- 2009년 5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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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지만, 알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인디스페이스의 월례비행에 다녀왔다. 이달의 영화는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記述)>. 일종의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제목은 <파산의 '기술'>이나 '기술'보다는 '이미지' 또는 '파편들'에 가깝다. 화면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떠돈다.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흐릿하게 잡은 CCTV 화면, 대한뉴스, 타이거우즈가 빙그레 웃음짓는 카드회사의 광고, 어느 담벼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 어느 시위 현장, 386들의 축제, 세계 경제 포럼....많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비정규직 노동자 몇몇의 인터뷰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와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나레이션과 조세희의 <난쏘공>, <시간여행>의 몇몇 구절이 끼어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계속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가라앉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일부러 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자가 파산한 사람의 집의 물건들을 압류하러 찾아가는 장면들, 혹은 카드회사에서 돈을 빨리 갚으라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아주 흐릿한 화면으로 제시되거나, 아예 암전된다. 그리고 그나마 음성도 조금 나오다가 말아버린다. 인터뷰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뷰 중 극적인 장면들, 예를 들어, 한 파산한 아주머니가 카드빚을 갚기위해 한 노래방 도우미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조금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금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한 사람의 인터뷰를 차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짜깁기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갑자기 끼어드는 여러 이미지들과 자막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갑자기 제시되는 조세희 소설들의 구절들, 그리고 감독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했던 상당히 문학적인 수식을 가진 나레이션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마도, 몰입은 공감과 분노, 또는 공포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파산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갖거나, 혹은 이 사회가 파산한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구조를 보고 분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파산의 구조, 이 구조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렇게 보아야만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산 그 이후(TV의 사회고발물들이 대체로 다루는 부분인)보다는 '파산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꽤나 친절하지 않다. 파산의 '기술'이라고 해서 그 파산의 구조 자체를 줄줄이 설명하기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 파산의 구조는 매우 흐릿하고 상당히 희미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파산의 구조라는 것이 그토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을 조금씩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것이 파산의 늪이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 파산의 구조라는 것은 드러나 있는 층과 그 이면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대출들과 카드회사의 친절한 광고들,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불친절한, 아니 폭력적인 전화목소리와 압류딱지를 붙이는 손길과 파산자들의 눈물과 의료보험 해지와 목소리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드러나 있는 층이라면, 그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실은 훨씬 더 폭력적인 층이 있다.

이 드러나 있지 않은 층은 이 영화에서 '집행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이다. IMF 이후 시작된 외국자본의 침공과 무너진 국내경제, 서민들의 손에 친절히 쥐어진 '카드'라는 함정 속에 숨은 카드회사를 살찌우던 정책들,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언제라도 이런 파산의 늪에 들어설 수 있는 비정규직들과 이 비정규직을 탄생시킨 사람들과 법률과 정책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온 3가지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세계 경제 포럼(혹은 그 비슷한 것)이 열리는 장면. 이 장면의 사운드는, 그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연상될 정도로, 웅얼웅얼 소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 손에 들린 와인잔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 '회사들보다는 가계에서 훨씬 상환이 잘 되니까요. 그쪽으로 자금이 몰리는 거죠.'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커다란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가끔 구제금융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지만, 개인이 무너질 때는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파산해가는 사람들과 교차되어 편집된 386들의 모습들, 그들이 축제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손을 흔드는 장면들. IMF 이후 소위 '진보정권' 10년의 시대에 양산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카드회사들과 제2금융권과 파산자들, 그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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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송희일 감독의 사회로 이강현 감독과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리고 파산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나오신 분(단체명 및 성함이 기억이 안난다...-_-)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월례비행 상영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감독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파산의 구조 그 이면의 것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든 것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위 '진보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2006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386세대에 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감독은 여러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감독 그 자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박노자 선생이 쓴 글과 같이,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혹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확실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 섞여들어가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담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질문한 다음의 부분이다. 영화 중간 파산한 분들의 인터뷰에서 한 아주머니가 돈을 어떻게해서든 꼭 다 갚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아주머니는 돈 몇 푼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에 신음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의료보험비를 못내도 카드빚은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야만 할까. 이에 시민단체에서 계신 분이 날카로운 대답을 해줬다. 이들에게 파산한 것은 하나의 '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즉, 돈을 못갚고 파산한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죄인처럼 이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산한 사람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과 폭언은 어느정도 정당화되며, 그들이 마치 신앙간증을 하는 것처럼, TV 앞에 나와 눈물로 돈을 다 갚을 것을 호소하는 사회, 그리고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결국 돈을 다 갚은 것이 미담처럼 다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이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빚을 갚는 것'이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레임'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같은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






- 2009년 5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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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글방] 지식인의 "태생적 비겁함?"

생각거리 | 2009. 5. 22. 22:57 | Posted by 맥거핀.
박노자 님의 글입니다.
'박노자' 글방에서 가져왔습니다.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1038)
(허락을 받지 않아 죄송합니다. 문제가 된다면 자삭합니다.)



요즘 "황석영 개그"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듯한데,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조금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 논의는 자꾸 황석영 선생의 개인 "욕망"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그 분의 "개인"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분과 같은 "급"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분과 같은 류의 행동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멸종위기에 처해진 희귀 종류입니다. 즉,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급"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 칼 만하임 선생의 말대로 지식인을 free-wheeling, 즉 자율적 존재로 보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 정도입니다. 상사의 말을 그냥 그대로 따라야 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나 재벌의 머슴들에 비해서야 연구실에 앉아서 제 생각을 거의 여과없이 이렇게 써낼 수 있는 저 같은 인간이야 좀 free-wheeling 하겠지요.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지식계야말로 눈에 보이는, 또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외부자들에게는 당장 파악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부자 입장에세는 거의 지식인마다 딱지처럼 그 "급"이 붙어 있지요. 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급"이 꼭 지명도에 따라 정해지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문단의 경우에는 그런 측면이 강하다 해도,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등단한 잡지, 수상항 상, 내부적으로 "키워준" 후견자, 같은 "계통"에 속하는 문인들이 누구냐는 그 "줄세우기"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제가 비교적으로 잘 아는 국내 사학계 같으면 대체로 출신대학, 은사, 연령, 직장, 업적 순일 것입니다. 즉 서울대 국사학과의 유력한 분에게 배운 40-50대의 수도권대/지방거점대 교수는 어느 정도의 업적이 쌓이면 "권위"가 되기에 비교적으로 쉬운 입장에 있다는 것이지요. 출신대학/은사를 물신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국내/일본의 분위기는 좀 특이하지만 학계 안에서의 위계 질서는 구미권에서도 엄밀히 존재하지요. 예컨대 학술지 게재하기 위해 논문을 심사에 맡길 때에 "급"이 같거나 더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교수 채용 때의 심사와 같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면 그 "급"이란 더욱더 분명해지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의 "급"에 도달한 이상 또 하나의 권력, 즉 국가권력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예컨대 본인과 본인의 "문하생"들을 위해 연구비라도 따내야 하지 않습니까? 연구비, 출판보조비, 학회 보조비 등은 그나마 국가와의 "괜찮은"/"건전한" 관계일 수도 있지만, 특히 국내에서는 많은 교수들이 각종 "국책 사업" (국가 위원회들 등등)에 참여하도록 학교 측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수도 있지요. 학교로서는 이게 학교 사이에서의 "무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도이기도 합니다.  사실, "무한의 경쟁"이란 결국 경쟁 주체의 국가권력에 대한 "무한의 구애"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이 치사한 부분을 잘 이야기해주지 않더랍니다. 또 국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연구비를 받고, "국책 사업"에 자주 참여하고, 그 덕으로 많은 박사과정생들이나 젊은 박사들에게 용역을 많이 주고 그러다 보면 그게 어느덧 관습화되어서 국가와의 관계는 뗄레애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면 그 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생기는데, 일단 국가 정책 등에 대한 대외적 발언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게 기본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좀 참자"라고 하면서 이렇게 함구하면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비겁함은 어느덧 현명함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교에 옭매여 있는 교수보다 작가가 더 자유롭다고 보시는 분도 계시는데, 착각일 뿐입니다. 잘 안팔릴 소설들을 영어나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 출판케 지원해줄 주체는 과연 누구이고, 각종 작가포럼 등을 지원할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여간 "정상적인" 지식인이란 "보신", "자기 보존" 본능이 대단히 잘 발전된, 자신의 "급"이 높은 만큼 국가 관료들의 "급"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체제에 일단 순응한 지식인에게는 체제에 대한 의미 있는 "반대"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하라사막에서 물을 찾는 일과 똑같은 것이지요. 물론 각자 취향에 따라 "표현"의 순위는 다를 것이고, 적어도 "반대하는 시늉"이라도 해줄 소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오십보백보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욕심이 조금 더 크면 국가와의 "통상적" 협력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즉, 국가 정책을 명시적으로 찬양하거나, 국가에 의해서 돌연히 크게 기용되거나... 이러한 "특별한 유착"은 세인들에게 - 특히 해당 지식인은 "반대자"로서 알려졌을 경우에는 - 좀 괴이하게 보이겠지만 지식인 사회의 "통상적 협력"의 정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이상하게 안보일 것에요. 사실, "통상적 협력"보다 단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면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요.
 
지식인들을 좀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거나 특별한 후광을 부여한다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식인 본인들도 대체로 매우 냉소적으로 처신하기에 그들을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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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인간들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라

The Book | 2009. 5. 22. 17:23 | Posted by 맥거핀.

고민하는 힘 - 10점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책이려니 싶었다. 무게도 가볍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도 가벼운 그런 책, 비슷한 어조로 비슷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많은 자기계발서 류의 하나. 더구나 표지의 그 커다란 저자사진이라니. 저자사진이 앞면에 커다랗게 박힌 책들은 왠지 신뢰하기가 어렵다. 이 책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쓴 책들이 그렇다. 책의 내용보다는 유명인사의 인기도의 덕을 보려는 책들. 그런 책들은 대체로 실망감을 주고 끝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책의 무게는 가볍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진중하고, 무거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무겁다는 것은 우울하거나,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거운 울림으로 머리와 마음을 때리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저자의 어떤 필사적인 자세가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필사적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 전반적 위기는 '근대'의 붕괴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근대'가 만들어 낸 수많은 화려한 유산 - 자유와 시장경제의 풍요로움,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인류사적 유산 - 이 지금 위태로운 시련의 때를 맞이했고, 그 와중에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담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p.8-9)

저자가 느끼고 있는 우리의 세계는 붕괴되어 가고 있는 세계다. 어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관이 점점 사라지고, 전도된 가치관과 특이한 방식의 배금주의와 '유사 종교'와 상대방을 소멸시키고 싶어하는 사랑이 존재하는 사회. 이 사회에서는 점점 '가짜 인간', 혹은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양성된다. 이 '껍데기 인간'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겉으로 보았을 때는 사리판별을 잘하고, 여러가지 일을 잘 해내는 기술도 가지고 있고, 말도 잘하고 여러가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그 말이라는 것,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을 곱씹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람들, 자기나름의 가치관도 있으나, 이 가치관이라는 것이 실로 모호하며, 본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 각기 여러개의 모순된 가치관을 스스로 안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어떻게 충돌되는지 잘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껍데기 인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보았던 '수미'의 경우가 떠오른다. 좀 길지만 인용한다.

수미가 그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도 아니고 수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 나에게 불쾌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수미의 말대로 그 영화는 수미에게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비록 수미가 극장 안에서는 그것을 즐겼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 때문에 수미가 비난받는다면 부당한 일이리라. 수미는 자신의 일상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천성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마음껏 영양을 섭취하면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와 같았다.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수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수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식이건 스타일이건 수미는 환경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학교나 단체나 집회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미는 건강하고 확고하며 공명정대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수미는 어떤 의미로든 매스미디어의 각광을 받지 않거나 시각적인 쾌감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었다. 아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친절했으나 냉담했다. 수미가 알거나 믿고 있는 것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각종 미디어에서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미가 사랑하는 것은 비극적이고 이타적으로 보이는 종류의 화제 그 자체였다. 수미는 인간이 가장 비속하게 오감에 충실할 때 사랑하게 되는 것들을 스타일리시하게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지나치다 싶은 해석과 변명과 명분과 휴머니즘과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욕구를 발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수미는 혁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이면서도 그것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고 도리어 쾌감을 느끼는 21세기의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수미는 그런 식으로 그 안에서 마음껏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로 명명될 수 있었다. 영상의 언더그라운드, 은둔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대중친화적인 파괴자로 말이다. 수미는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냈으며 마음에 드는 것들에게 명분과 이름을 부여했다. 수미 자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으로 수미는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해서 싸웠으나 역시 그 중요한 동기는 불특정 다수인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드는 것, 타인의 마음을 빼앗는 존재가 되는 것, 혹은 그런 존재를 추종하는 것,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형 무형의 정서적인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수미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인 무리로 존재하는 캐릭터 상품과 같은 어떤 유형이었다. 


저자가 이러한 껍데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찾은 실마리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이다. 이 두 사람에게서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먼저,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이 살았던 시대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소설가, 막스 베버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언뜻 보아서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살았던 시기가 겹친다. 막스 베버는 나쓰메 소세키보다 3년 이른 1864년에 태어났고, 나쓰메 소세키보다 4년을 더 살았다. 즉 근대가 폭발하던 시기, 독일은 프로이센 제국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하던 시기로 이행하는 단계이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시기. 저자의 말대로 이 시기는 자유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문물과 사회계급이 출현하고, 과거의 종교라든가, 신분 체제같은 사회적,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 개인이 처음으로 어떠한 가치관에도 휘둘리지 않고, 개인으로서 그 자신을 마주하던 시기. 이 시기에 처음으로 사람들은 넘쳐나는 자유 속에서 개인의 고독감, 사회적 소외를 겪었으며,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을 잃어버렸다. 저자는 현재의 시기를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시기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즉 나쓰메 소세키나 막스 베버가 살았던 시기가 중세가 붕괴되고 근대가 도래하는 시기였다면, 현재의 시대는 근대가 붕괴하고, 근대 이후가 도래하는 시기라는 것이다(물론 근대가 붕괴된 시점이 어디인가의 문제는 훨씬 복잡한 문제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이후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껍데기 인간들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현재 시기에도 가치관의 전도와 사회적 소외 속에서 이런 껍데기 인간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각주:1].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의 다른 공통점이다. 이들은 모두 신경쇠약을 겪었다. 막스 베버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내내 신경증과 우울증을 겪었으며, 나쓰메 소세키 역시 본인이 신경쇠약을 겪었을 뿐 아니라, 그의 소설에서는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빈번하게 나온다. 이들에게는 왜 이러한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이를 근대 이후 망가져가는 가치관에 대한, 일종의 그들 나름대로의 저항의 산물로서 보는 듯 하다. 하기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먼 곳에서 각기 다른 일에 몰두했지만, 그들이 해온 생각의 파편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가치관에 동조하지 못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막스 베버 역시 인간이 만든 근대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서 고민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소멸해가는 중세, 잃어버리는 가치관들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국가라는 것, 유사 종교 혹은 제국주의에 그들 자신들을 다시 소속시키는 것으로 (고민을 버리고) 삶을 이어나가고자 했다면, 이들은 이 시기에 맞서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 인간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경쇠약은 이들이 이러한 세상에 필사적으로 맞선 하나의 산물로서 이들에게 남았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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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대로 '고민하는 힘', 고민 그 자체가 가진 파괴력에 대해서이다. 저자는, 나는 누구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청춘은 아름다운가,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등등 여러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 모두를 몰라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다만 한 가지, 그래 나도 가끔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아도 괜찮겠지, 또는 적어도 뭔가 껍데기 인간은 안 되었으면 좋겠는데, 혹은 나도 껍데기만 있는 인간은 아닐까(바로 나의 고민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 시스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심한 차이. 젊은이들이 견뎌야 할 현실은 너무나도 혹독합니다. 따라서 잔혹하고 박정한 취급을 받는 그들, 그녀들에게 세련된 정신론을 제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바에야 살아남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의 경우처럼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루바삐 자기방어책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p.172-173)

저자가 말한 대로 이는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가짜 인간', 껍데기만 있는 인간들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인간들의 가장 무섭고도 커다란 특징은 본인만 가짜 인간이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즉 가짜 인간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가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지금의 우리 사회도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TV를 틀면 "고민고민하지마, Girl~"(물론 이건 반농담이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비비디 바비디 부"(참 반(反) 나쓰메 소세키적인 말이다.)와 같은 말들이 넘쳐나고, 이 사회의 시스템의 상층부에는 엄청난 가짜 인간들이 버티고 있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들을 가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각주:2]. 그렇게 해야만 본인들이 가짜 인간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쉰의 유명한 책 <광인일기>의 마지막 구절 '사람을 잡아먹어 본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몰라. 아이들을 구하라......'를 패러디한 다음의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고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가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몰라. (가짜 인간들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라...... 




  1. 책에도 잠깐 언급되는,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이 여기와 좀 겹치는 듯 하다. 가라타니 고진도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역사와 반복>에서 이러한 반복되는 역사에 대해,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체제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세계의 체제, 자본주의의 체제가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자체만 보아도 그러하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가라타니 고진 역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막스 베버나 나쓰메 소세키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예종의 통섭교육과 황지우 총장의 사퇴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그렇다. 유인촌 장관과 문화부 친구들은 한예종의 통섭 교육과 관련하여 여러 의문을 제기하며 황지우 총장을 사퇴시켰다. 인문학과 예술, 기술을 결합시키는 통섭 교육, 어떻게 보면 예술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이것이 어떻게 좌파적 인간을 양성시키는 문제와 연결되는지..그야말로 놀라운 발상이다. 전형적인 가짜 인간들의 가짜적인 공세. 관심있는 분은 대표적인 가짜 인간 변희재의 동아일보의 이 칼럼(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4030102) 부터 다른 기사들을 읽어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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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법관들이 보고 싶다

The Book | 2009. 5. 20. 02:27 | Posted by 맥거핀.
불멸의 신성가족 - 8점
김두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불멸의 신성가족들의 이야기. 그곳에도 어떤 일종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오가는 정(情)과 다툼과 욕망이 있으며, 흥미롭고도, 약간은 황당한 사건의 뒷이야기가 있고, 이상한 음모와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마무리들이 있었다. 무슨 암흑가 이야기냐고? 음..그게 아니라면, 정계(政界)의 이야기냐고?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이렇다.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그래서 흥미롭게, 재미를 느끼며 읽기를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요즘 '패밀리'가 유행이지만, 한편으로 '패밀리'는 위험하다. '패밀리'는 '우리가 남이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패밀리 안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보호막으로 다가오지만, 그 패밀리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 때에는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장벽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말하는 사법 패밀리이다. 이 책에서 차근차근히 논증하는대로, 그 패밀리가 되는 것은 실로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로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이다. 그러나 그 장벽을 넘어 그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결혼과 도제식 선후배 관계와 술자리와 오고가는 돈을 통해 그들은 강력한 패밀리가 되어 외부를 향해 보호막을 둘러친다. 그래서 이들을 이 책에서는 신성가족(神聖家族)이라고 묘사한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신성가족은 맑스와 엥겔스의 공동저작인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맑스는 "불경스러운 대중과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투쟁을 겪어온 비판적 비판주의는 마침내 고독하고 신을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되는 데 성공했다"고 그들을 묘사합니다. (p.146)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의 신성가족인 사법 패밀리들을 이 책에서 잘게 해부하고 있다. 이 사법패밀리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만 포함되지 않는다. 변호사 사무실 실장 및 직원들 (또는 사실상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법무법인의 직원, 법원의 일반직원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경찰, 국회의원, 법과대학 교수들, 검찰이나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결혼소개업자(일명 마담뚜)들이 있다. 그리고 그 외면에 우리같은 '일반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일반인'들을 제외하고 이들 중 어디까지가 진정한 사법 패밀리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법 패밀리의 범위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 사법 패밀리가 만들어진 시스템, 작동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들 사법 패밀리는 일반 국민들과 유리되어, 그들만의 작동방식으로 작동하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리(遊離)는 완전한 유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삶의 어느 순간에서 이들 사법 패밀리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이들 사법 패밀리와 일반인들 사이에는 오해와 불신만이 가득차 있다. 특히 일반인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심각하다. 책에 나온 통계를 빌리자면, 사법 서비스에 만족하는 국민이 전체의 약 34%밖에 되지 않는다(2003년 1000명 조사).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쓰여진 이유다. 일반인들은 왜 사법부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법부의 구조 안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그런 사법부를 해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질적인 연구방법론이다. 즉, 판사에서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위에 얘기한 기자나 경찰, 마담뚜, 그리고 여러 사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총 23명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해서 이 사법부라는 시스템, 그리고 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해부하고자 하였다.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질적인 연구방법은 위험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과연 이들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즉 이들만 그런 것 아닌가, 혹은 이들이 일부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말이다. 저자도 이를 우려해서인지 시작부분에 연구방법과 과정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 연구에 어느정도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도 각 구술자들의 이야기가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우리가 '사과'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과의 겉을 살피는 것이 양적인 연구방법이라면, 질적인 연구방법은 그 사과를 바늘로 찔러 그 안의 과육을 아주 살짝이나마 맛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바늘이 여러개 꽂혀 바늘과 바늘의 끝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랄까. 질적인 연구방법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은 사법 시스템이라는 구조와 작동 방식을 어느 정도 해체하여 드러내보이기에 근접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에는 구술자들의 성실하고도 현장감 넘치는 구술과 저자의 그 구술들을 다시 해체하여 쉬운 언어로 엮어내는 글솜씨가 큰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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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나가는 글: 억지로 찾아본 희망'이다. '억지로 찾아본'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나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이 구조에, 이 작동방식에 희망은 있을까..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말하는 사법 패밀리 구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패밀리 내에서의 그리고 외부와의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불러오는 구조의 폐해(이른바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판검사를 증원하고, 변호사의 숫자를 늘리고, 로스쿨 제도를 통한 선발방법의 변화나 법조일원화 같은 현실적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최종의 해결책은 다름아닌 '시민만이 희망이다'. 즉 일반인들의 인식과 사법을 대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책에서 말하는대로 사법부 불신을 낳게 한 데에는 사법부만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례로 판사 출신 변호사나 브로커가 돈만 밝힌다고 욕하면서도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것은 판사 출신 변호사(전관 변호사)가 판사와 더 잘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시민 의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보다 더 훨씬 적극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는 행위 모두를 포괄한다.

우선 시민들 입장에서는 판검사들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습관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 장벽이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용기를 내 판검사들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일단 용감하게 "판사님,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 "검사님, 제 얘기도 좀 들어주시죠"라고 말을 붙이면 의외로 판검사들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발견할 겁니다. 그렇게 했더니 판검사들이 자꾸 말을 끊고 무시한다고요? 그럴 때는 편지를 쓰십시오. (p.322)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나도 책을 덮고 나서 위와 같은 '억지로 찾아본 희망'같은 이야기보다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사법 패밀리에 전화 한 통 걸어 부탁할 수 있는 인맥이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 국민 중 14.2%'라는 책 속 통계를 떠올리며, 나는 그 14.2%에 들어가나..대학 때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인맥이라고 봐야하나..그래도 뭔 일 생기면 그 사람들에게 전화라도 해봐야 되겠지...그러고보면 나는 나쁘지 않은 편인가..등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사실 그 14.2%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립서비스나 받는 수준이니 아무 것도 아닐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구조고, 그 구조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책 속 표현대로, 선배들이 돈을 건네고, 청탁전화를 하고,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거절하고, 사법 패밀리가 되기를 거부하는 '또라이' 법관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또라이'들에게 바보같은 질문도 하고, 중언부언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하는 당찬 일반인들도 보고 싶다. 물론 (그럴 일이 없으면야 더 좋겠지만)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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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Thirst), 박찬욱

Ending Credit | 2009. 5. 16. 20:45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말 많은 영화 <박쥐>를 이제서야 보았다. 여러 논쟁적이며, 동시에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과 평론가들의 상찬과 혹평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촉발시키던 영화, 그리고 네티즌 평점 0점과 10점을 오락가락하는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영화다. 처음에는 다들 왜 이럴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관객들에게, 혹은 평론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한편의 원형이자, 아주 흐릿한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문(碑紋)과도 같은 영화다. 그 비문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모호하다. 그들의 '모호필름'이라는 이름처럼.

물론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문이 새겨진 앞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새겨지지 않은 뒷부분에도, 혹은 그 비문이 새겨진 재질에도 살짝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뭐 어찌되었던 간에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는 자신의 몫이며, 자신의 즐거움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몇 줄의 글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누구들처럼, 그 오독(誤讀)을 누군가에게 강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여기 하나의 오독을 살짝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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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중앙에 나타난다. 박쥐, Thirst. '박쥐'라는 잘 알려진 제목보다, 이 영화의 영문명인 'thirst'에 더 흥미가 가며, 내내 그 제목이 머릿 속을 맴돈다. 목마름이라,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물론 여기서의 목마름은 여러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 대한 갈망, 항상 굶주려하는 뱀파이어의 운명과도 같은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태주(김옥빈)의 다른 세상,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의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현(송강호)의 신부로서의 거세되고, 억압된 삶,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건, 목마름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일종의 마이너스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목마름을 푸는 행위, 즉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플러스가 되고자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마이너스 상태에서 벗어나 0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이다.

이 갈증을 푸는 행위는 영화에서 수차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일단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누군가의 피를 빠는 행위도 그러하고, 상현과 태주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행위도 그러하고, 혹은 서로의 발가락을 빨거나, 젖가슴을 탐하는 행위도 그러하다. 물론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영화의 중간,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끈다. 죽은 태주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상현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 상현은 태주의 피를 계속 받아 마심으로써 태주를 죽음에 가깝게 인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리고 있다. 반대로 태주는 자신의 피를 잃어가며, 점점 상현의 피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그녀를 더욱 뱀파이어화하여 상현의 피를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즉 상현과 태주는 완벽히 돌고돈다. 상현이 플러스가 되는 순간 그녀는 마이너스가 되며, 동시에 0을 향한 그녀의 갈구가 시작된다. 왜 그는(혹 그녀는) 끝없이 결핍되며, 끝없이 목말라하는가.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 혹은 물질적인 욕망 앞에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늙은 노신부(박인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평생을 사제로 살아온, 모든 것 앞에서 초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던 이 사내도, 세상을 보기 위해 뱀파이어의 피를 갈망한다. 즉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한다. 예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집을 완전하게 하얗게 칠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 완벽하고 순수함에의 욕망. 그러나 태주의 입에서 토해져 하얀 바닥위에 번져 나가던 붉은 색의 피처럼, 완전하게 흰 것이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완전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해 질 수 있을까. 글쎄. 만약 인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야하지 않을까. 신, 혹은 사탄, 어쩌면 뱀파이어.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의 뱀파이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가 흥미롭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느낌은 영화속 태주의 말마따나 꽤나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간 다른 영화들에서 그려졌던 창백한 얼굴을 한 나약한 모습의(마늘에도 놀라는), 괴상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도 박쥐로 변하고 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마치 슈퍼맨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쿨하고 강한 모습의 뱀파이어로 말이다. 왠지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의 모습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도 쿨하고 멋진 뱀파이어의 모습에 별 고민 없이 여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던가. 영화 속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며, 도리어 예전보다 훨씬 생기를 되찾는다. 영화 처음 병든 남편(신하균) 옆에서 남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보이던 다크써클 태주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 태주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상현과 태주가 쿨해 보이는 이유는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민을 아예 안한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인 고민을 안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고민 말이다. (생각대로 송에 맞춰) 피 먹고 싶으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거 받아 마시면 되고, 그도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사람거 먹으면 되고, 그것 마저도 다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모집하면 되고~. 생각대로 꿀꺽 아..얼마나 쿨한가. 그래서 그런가. 왠지 그런 상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배신이라는 인간의 오만 감정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쿨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고, 벌레로 변신시키고, 나무로 변신시키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가르며 날기도 하고,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상현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난무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신화가 연상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는 왠지 신화의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신화의 효용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불완전함,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신과 대결하려 한, 혹은 신을 모방하려 한 인간들은 모두 예외없이 파멸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려 하고, 신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려고, 욕망을 향해 목말라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부의 설정이 머리를 스친다. 백인과 아시아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신 남자만 걸리는 병. 반쪽의 존재로서의 인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브'라는 치료제를 투여하는 방법뿐이다. 이브? 태초에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도, 이브의 존재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익히 잘 알듯이, 뱀에게 유혹당한 이브는 선악과를 아담과 나누어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아..이야말로 <박쥐>의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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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야 알겠다.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이건, 창세기이건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뿌리를 두고 흘러나와 수만가지의 갈래가 되어 우리 옆에서 머무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여러 다양한 해석들과, 여러 논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맴돈다.

하나는, 태주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남편(신하균)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강아지처럼 다루는') 라여사(김해숙)는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신화라는 것에 너무 꽂혀버려서 그렇겠지만, 왠지 이 영화 속 라여사는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연상케한다.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 그것을 몸짓과 불가해한 언어로써 전달하는 것처럼, 라여사는 마비된 몸 안에서 눈동자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코자 한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신화 속에서 대체로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예언한 세상의 몰락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마치 라여사가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들이다. 이 영화는 카톨릭영화인가, 반카톨릭영화인가. 글쎄. 나로서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왜 반카톨릭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하고 나약함으로 죄를 저질렀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면, 이 영화는 걸작인가, 아닌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참 모호하다. 모호한 상징과 모호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을 혼미에 빠뜨리는 이 영화가 과연 '영화적으로' 걸작인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보기의 쾌감, 혹은 영화보기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가. 글쎄. 이 영화가 원형적인 텍스트로서 철학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것인가. 과연 '영화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이 영화 <박쥐>는 다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쉽게 말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나요? 영화사의 걸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들을 보고 싶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한 두어달 후에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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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주 세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장면들과 괴이한 이야기로 관객을 불편함에 빠뜨리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못지않게, 박찬욱 감독들의 영화도 그러한데, 왜 누구의 영화는 한국영화 최저관객 신기록을 향해가고, 누구의 영화는 영화관을 가득 메인 관객들을 어리둥절함에 빠뜨리는가. 김기덕과 박찬욱의 차이는 뭘까. 이것은 단순히 배급력과 홍보의 차이인가. 아니면 영화의 문법적으로, 혹은 내러티브, 혹은 만듦새로서, 이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올해의 새로운 주제. 이 영화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보러 왔을까.




- 2009년 5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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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 돌아보기

The Book | 2009. 5. 9. 22:33 | Posted by 맥거핀.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6점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가벼운 여행기다. 글쎄. 가볍다는 말이 조금 부정적인 느낌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다. 가볍고 깔끔한 여행기다. 이 책에는 모두 18개의 소위 '문화도시'가 소개되어 있다. 각 도시마다의 소개글은 천천히 읽는다해도 약 5-7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짤막한 분량. TV에서 하는 짤막한 스팟 형식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다. 도시의 주요 관광 장소 몇 군데 소개하고, "와우~정말 멋있네요~"하는 성우의 기분좋은 감탄사 몇 개 붙이고, 거리 먹거리 한두 가지 소개한 후, 야경을 배경으로 끝맺는 '~따라 세계여행'같은 프로그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이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 책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나, 유재현의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와 같은 인문학적인 또는 역사서술적인 글쓰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저자는 가끔 도시의 역사적인, 혹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잘 모를 용어들에 대해 친절한 주석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문화도시를 잠깐 둘러 본다는 가벼운 느낌으로 보면, 또는 가벼운 교양서적을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어느 정도 기대감은 충족시켜 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도 저자의 능력이다. 가벼운 교양서적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도 꽤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중해라는 '문명의 호수'를 끼고 인류가 일구어 낸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크레타 섬은, 그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Ceasar Augustus, 기원전 63-14)는 로마의 대권을 장악하고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그 뒤 로마가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리자 크레타 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곳에는 초기 바실리카가 많이 세워졌다. 그런가 하면 9세기에는 아랍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 모스크가 난립하기도 했다. 결국 크레타 섬은 1670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뒤이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침략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인지 크레타 섬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오스만 제국 시대의 성채와 유적은 물론 고대와 현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마치 '문명의 종합 전시장'에라도 온 느낌이다. (p.91-92)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꽤나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느낌의 도시들을 엮어서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책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체코 프라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등 그간 다른 여행기나 매체에서 자주 소개된 도시들도 있는가 하면, 파키스탄 라호르, 러시아 이르쿠츠크,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접하기 어려운, 잘 소개되지 않았던 도시들도 있다. 이 외에도 알제리의 알제나 이집트 룩소르 같은 여러 다양한 문화들의 다양한 도시들을 폭넓게 소개하려고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러시아 이르쿠츠크가 러시아 혁명가들의 유배지로서 시작되어 발전된 도시임을, 파키스탄 라호르가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로 번성했던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하기사 어느 여행기가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까지 그 발길이 가 닿겠는가. 저자의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다문화적이고 잡식적인 발걸음이 빛나는 순간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여러 다양한 도시들이 조금 더 체계를 가지고, 혹은 주제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시작해, 미국 시애틀에 다다르는 이 책의 구성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넘나들며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어떤 역사적인 흐름이라던가, 각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을 따라 이동한다던가 하는 유기적인 흐름을 이 책의 구성에 도입하였으면 조금 더 체계적이고 독자들도 덜 혼란스러운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하나는 어떠한 문화권의 어떤 도시이건, 도시의 문화(즉, 음식이나 건축물 등)는 그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여러 두오모(대성당)들과 거리, 그리고 도서관과 극장 등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르네상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즉 이 건축물들 각각이 별개로서 여겨지지 않고, 그 전체가 거대한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여겨질 때 그 가치는 위대한 것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문화들, 혹은 그 문화를 구축시켜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종교'라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구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당과 신전 혹은 오벨리스크 같은 명백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건축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일반건물 벽면의 벽화에서부터 크노소스 유적지의 뱀 모양의 대형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의 문화유산들은 종교적 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도시들의 문화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즉 하나의 폐쇄된 체제로서 구축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건, 혹은 무역이건 간에 대부분의 문화는 주변의 영향을 받고, 이러한 주변으로부터 도래된 문화와 그들 자신의 문화가 섞여 또다른 제3의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제3의 문화는 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것이 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역사이다.

카르나크 신전과 열주의 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1000년이나 앞서 세워진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로마와 그리스에 두고 검은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명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유럽 인들의 오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에 준 영향은 단순히 형태나 양식에 그치지 않는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 부활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하였다. 그러나 흰 것만이 선이고 최고라고 믿었던 유럽 인들은 자신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이집트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p.134-135)


글쎄. 누군가는 '뭐 또 이런 당연한 소리를...'이라고 할 것 같다. 문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느니,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너무나도 '교과서스러운' 말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다,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 그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교과서에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소위 '문화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문화란 어떻게 구축되고, 발전하는가를 아주 살짝 생각해보게 하지만, 결코 그 이상, 깊숙한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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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한 가지 생각은 들었다. 이러한 문화도시들에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백제시대로부터 이어진 '문화도시'로서의 고도(古都) 서울은 어떤가하고 말이다. 글쎄. 엔고 현상으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일본인들이 '명동' 이외에는 갈 곳이 없어서 한 번 방문한 후 발길을 끊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다. 명동에서 화장품 사고, 쇼핑하고, 명동칼국수 먹고 청계천 살짝 보는 것 이외에는 그들이 할 일은 정말 별로 없는 건지, 몇 천년을 이어온 거대한 문화의 총합으로서의 서울은 어디에 숨어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밀라노 또는 라호르인가, 계획된 성채로서의 두바이인가. 있는 남대문마저 홀랑 태워드신 분들, 그리고 멀쩡한 4대강 파헤쳐 운하 만드신다는 분들께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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