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 돌아보기

The Book | 2009. 5. 9. 22:33 | Posted by 맥거핀.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6점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가벼운 여행기다. 글쎄. 가볍다는 말이 조금 부정적인 느낌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다. 가볍고 깔끔한 여행기다. 이 책에는 모두 18개의 소위 '문화도시'가 소개되어 있다. 각 도시마다의 소개글은 천천히 읽는다해도 약 5-7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짤막한 분량. TV에서 하는 짤막한 스팟 형식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다. 도시의 주요 관광 장소 몇 군데 소개하고, "와우~정말 멋있네요~"하는 성우의 기분좋은 감탄사 몇 개 붙이고, 거리 먹거리 한두 가지 소개한 후, 야경을 배경으로 끝맺는 '~따라 세계여행'같은 프로그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이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 책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나, 유재현의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와 같은 인문학적인 또는 역사서술적인 글쓰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저자는 가끔 도시의 역사적인, 혹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잘 모를 용어들에 대해 친절한 주석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문화도시를 잠깐 둘러 본다는 가벼운 느낌으로 보면, 또는 가벼운 교양서적을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어느 정도 기대감은 충족시켜 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도 저자의 능력이다. 가벼운 교양서적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도 꽤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중해라는 '문명의 호수'를 끼고 인류가 일구어 낸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크레타 섬은, 그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Ceasar Augustus, 기원전 63-14)는 로마의 대권을 장악하고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그 뒤 로마가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리자 크레타 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곳에는 초기 바실리카가 많이 세워졌다. 그런가 하면 9세기에는 아랍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 모스크가 난립하기도 했다. 결국 크레타 섬은 1670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뒤이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침략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인지 크레타 섬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오스만 제국 시대의 성채와 유적은 물론 고대와 현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마치 '문명의 종합 전시장'에라도 온 느낌이다. (p.91-92)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꽤나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느낌의 도시들을 엮어서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책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체코 프라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등 그간 다른 여행기나 매체에서 자주 소개된 도시들도 있는가 하면, 파키스탄 라호르, 러시아 이르쿠츠크,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접하기 어려운, 잘 소개되지 않았던 도시들도 있다. 이 외에도 알제리의 알제나 이집트 룩소르 같은 여러 다양한 문화들의 다양한 도시들을 폭넓게 소개하려고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러시아 이르쿠츠크가 러시아 혁명가들의 유배지로서 시작되어 발전된 도시임을, 파키스탄 라호르가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로 번성했던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하기사 어느 여행기가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까지 그 발길이 가 닿겠는가. 저자의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다문화적이고 잡식적인 발걸음이 빛나는 순간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여러 다양한 도시들이 조금 더 체계를 가지고, 혹은 주제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시작해, 미국 시애틀에 다다르는 이 책의 구성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넘나들며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어떤 역사적인 흐름이라던가, 각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을 따라 이동한다던가 하는 유기적인 흐름을 이 책의 구성에 도입하였으면 조금 더 체계적이고 독자들도 덜 혼란스러운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하나는 어떠한 문화권의 어떤 도시이건, 도시의 문화(즉, 음식이나 건축물 등)는 그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여러 두오모(대성당)들과 거리, 그리고 도서관과 극장 등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르네상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즉 이 건축물들 각각이 별개로서 여겨지지 않고, 그 전체가 거대한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여겨질 때 그 가치는 위대한 것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문화들, 혹은 그 문화를 구축시켜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종교'라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구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당과 신전 혹은 오벨리스크 같은 명백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건축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일반건물 벽면의 벽화에서부터 크노소스 유적지의 뱀 모양의 대형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의 문화유산들은 종교적 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도시들의 문화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즉 하나의 폐쇄된 체제로서 구축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건, 혹은 무역이건 간에 대부분의 문화는 주변의 영향을 받고, 이러한 주변으로부터 도래된 문화와 그들 자신의 문화가 섞여 또다른 제3의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제3의 문화는 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것이 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역사이다.

카르나크 신전과 열주의 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1000년이나 앞서 세워진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로마와 그리스에 두고 검은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명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유럽 인들의 오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에 준 영향은 단순히 형태나 양식에 그치지 않는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 부활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하였다. 그러나 흰 것만이 선이고 최고라고 믿었던 유럽 인들은 자신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이집트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p.134-135)


글쎄. 누군가는 '뭐 또 이런 당연한 소리를...'이라고 할 것 같다. 문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느니,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너무나도 '교과서스러운' 말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다,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 그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교과서에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소위 '문화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문화란 어떻게 구축되고, 발전하는가를 아주 살짝 생각해보게 하지만, 결코 그 이상, 깊숙한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
..........................................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한 가지 생각은 들었다. 이러한 문화도시들에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백제시대로부터 이어진 '문화도시'로서의 고도(古都) 서울은 어떤가하고 말이다. 글쎄. 엔고 현상으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일본인들이 '명동' 이외에는 갈 곳이 없어서 한 번 방문한 후 발길을 끊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다. 명동에서 화장품 사고, 쇼핑하고, 명동칼국수 먹고 청계천 살짝 보는 것 이외에는 그들이 할 일은 정말 별로 없는 건지, 몇 천년을 이어온 거대한 문화의 총합으로서의 서울은 어디에 숨어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밀라노 또는 라호르인가, 계획된 성채로서의 두바이인가. 있는 남대문마저 홀랑 태워드신 분들, 그리고 멀쩡한 4대강 파헤쳐 운하 만드신다는 분들께 묻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