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Ending Credit | 2009.06.09 23:42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에는 명백하게도 그 뒷부분이 숨어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을 하세요?) 그래서 이 말은 영화 속 고순(고현정)의 대사와 사실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라고 했던 그 대사 말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한다....간단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려면, 우리 자신이 어느만큼 아는지를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매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자주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잘 아는 것들이라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은 대체로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기준에 따르게 된다. 어떤 새로운 것, 혹은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을 때, 과거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때 이렇게 말한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거 본 적 있어." 그것은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즉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반복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슷하다'라는 것에 있다. 즉 비슷한 것이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상황이란 실험실이 아닌, 실제의 경우에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로 이 반복은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예전의 어떤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는 않은 상황. 이 상황에서 과거 행동의 반복은 성공할 때도 있으나, 실패할 때도 많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기는 왜 나서. 

그래서 이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제,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는 그간 감독의 전작들이 가진 공통의 형식적 특징, '반복과 차이'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즉 주인공에게 어떤 상황을 반복해서 만나게 하며, 그 반복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비슷한, 그러나 또 약간은 다른 행동을 살펴보면서, 소위 '인간성'을 탐구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전작 <극장전>이나 <생활의 발견>과 유사하게,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1, 2부로 나뉘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작들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주인공은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사태와 유사한 사람에 직면하며, 비슷한 패턴으로, 그러나 또 동시에 약간은 다른 패턴으로 행동한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영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진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은 이 영화는 왠지 주인공들에게만 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를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관객들에게도 '너는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사실 니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지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의 상당수의 사건들이 상당히 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사건인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이 제천에서 후배 부부 부상용(공형진)과 유신(정유미)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만 해도 그러하다. 과연, 구경남은 왜 부상용에게 그렇게 인간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거기서 도망쳐야 했을까. 과연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길래 말이다. 이는 비단 이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경우, 예를 들어 제천에서 공현희(엄지원)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며, 구경남에게 화를 내는 장면. 과연 실제로 이 사건은 일어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도 의심스럽다. 더구나 공현희 자신도 본인이 술에 매우 취했었다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일은 이 영화에서 비일비재하다. 또다른 경우로 구경남은 아침에 여배우가 흥행감독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것이 구경남이 생각하는 그런 일일까.  

이 영화에는 이러한 이른바 '모호한 상황과 모호한 사건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구경하는 남자인 구경남은, 아니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판단은 따라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당신은 어느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말이 뒤따를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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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 마디 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다. 이번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의 숨겨진 뒷부분인 (왜 아는 척을 하세요?)에 살짝 주목해서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상 그렇듯이 '찌질남'이 등장한다. 물론 '찌질녀'도 나온다. 그러나 대체로 이 '찌질남'들의 포쓰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찌질녀'들은 묻히는 경우가 많다. 이 찌질남들은 왜 이렇게도 찌질해 보이는 걸까. 글쎄. 내 생각에는 그 포인트가 이 '아는 척'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척'에 있다. 사람이 가장 찌질해 보일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무언가 '척'을 하고자 할 때, 그러나 이 '척'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그 의도가 빤히 보일 때일 것이다. 이 '척'은 '아는 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센 척, 고상한 척, 깨끗한 척, 배려심 많은 척, 여자 안 밝히는 척, 모르는 척, 안 졸리는 척, 재미있는 척....여기 영화를 통한 몇 개의 경우를 보자.

[경우 1] 센 척

제주에서 선배(유준상)의 학생들과 만난 구경남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학생 하나가 다가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구경남은 자유가 어떻고 하는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이 학생은 그에게 팔씨름을 청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센 척).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경남이 양천수에게도 나중에 이 팔씨름을 청하는 것을 그대로 써먹는다는 점이다. 양천수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양천수의 성 기능을 운운하는 것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려 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경쟁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를 다른 방식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장면.

[경우 2] 고상한 척 또는 여자 안 밝히는 척

제주에서 만난 구경남의 선배(유준상)는 밤의 술자리에서 여학생과 양천수와의 어떤 불확실한 관계가 일어난(났다고 추측되는) 다음날, 구경남에게 전화로 그 여학생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는 그 여학생의 평소의 부도덕한 행실을 말하며 선배를 걱정하는 방식이지만, 아마도 이의 내면에는 자신은 왜 그 여학생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구경남은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으로 대응하지만, 사실 이에도 구경남 역시 그 여학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구경남이 그 전날 술자리에서 떠나온 방식은 그 전 제천의 술자리에서 흥행감독이 사용한 방식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잘께.")

[경우 3] 깨끗한 척

제주에서 조씨(하정우)는 구경남과 고순의 관계를 적발한 후, 양천수에게 전화로 울면서 말한다. 더럽습니다, 억울합니다...글쎄. 더러운 건 그렇다치고, 억울하다는 것은 도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는 예술계의 위대한 선배에 대한 애정심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나, 아마도 그보다는 조씨의 욕망과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씨는 아마도 고순에 대한 어떤 욕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혹은 권위에 짓눌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고순은 저렇게 처음 만난 남자와도 자는 그런 여자였다니(조씨는 구경남과 고순의 예전의 관계를 모르므로). 지금까지 괜히 참고 살아왔지 않은가...나도 한 번 자달라고 할 것을, 그깟 선배가 뭐라고. 혹 이런 억울함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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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위의 3 경우 모두 참 찌질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척' 하지 말자. 그게 조금이나마 덜 찌질해 보이는 길이다. (왜 '덜' 찌질해 보이는 거냐고?  아예 찌질하지 않는 법은 없냐고? 어차피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찌질해 보이기 마련이다.)





- 2009년 6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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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0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6.10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홍상수 감독은 왠지 점점 유머가 늘어가는 듯 해요.
      사람이 유머가 늘어간다는 건 여유가 생긴다는 건데 말이죠.
      아직 안 보셨다면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이 영화는 기분이 야리까리할 때(?)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낄낄 웃으면서 말이죠.
      (근데 홍상수 감독 영화들은 대체로 남자들이 더 웃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2. 2009.06.11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6.12 0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러고보니 홍상수 감독 영화에 늘 빠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죠.
      술 마시는 장면 말입니다.
      근데 그 술의 끝이 안 좋기는 합니다만.^^
      암튼 이 영화 꽤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3. 2009.06.12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09.06.13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다가 오래전에 본 <생활의 발견>을 떠올려봤습니다. 거기서도 김상경이 추상미랑 예지원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던 것 같은데 세세한 건 기억이 안나네요. 이런 비슷한 대사가 나왔던 건 기억나요. "우리 괴물은 되지 맙시다" ㅎㅎ

    * 얼마전부터 '스포일러' 대신 '미리니름' 이라고 쓰시네요. 궁금하여 찾아보니 스포일러의 한국어순화어라고 나와있네요. '영화헤살꾼'이라는 재밌는 말도 있구요. 덕분에 우릿말 하나 배웠습니다.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6.17 0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러고보니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와요.
      "자기경멸하지 않고, 사람이었다 동물이었다 하지 않고, 쭉 사람으로 사는 거."
      구경남이 했던 대사인지 누가 한 대사인지는 기억이 안납니다만..

      그리고 미리니름이라는 말은 저도 어느 블로그 갔다가 보고 쓰는 겁니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되도록이면 순화하여
      쓰는 것이 좋겠지요. 외래어 쓰기 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