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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들의 땅, 노경태

Ending Credit | 2009. 5. 6. 17:37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그 몇 분의 장면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한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절뚝거리며(그리고는..) 걸어나가던 케빈 스페이시의 뒷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했던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를 들어, <쇼생크 탈출> 같은 이야기는 어떠한가. 더러운 시궁창 속을 기어나와 두 팔을 벌리며 쏟아지는 비를 만끽하는 앤디(팀 로빈스)의 감정이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그 나머지 장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얘기할 <허수아비들의 땅>에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절대 만나서는 안될 것 같은 이들은 이 마지막에 마주친다. 한 때 남자였으나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는 장지영, 그리고 그가 남자로 살 무렵 필리핀에서 입양했던 로이탄, 그리고 현재 로이탄과 사랑하는 사이이자, 한 때 장지영이 장지석이었을 때, 필리핀에서 결혼하려고 데려왔던 여자 레인. 이들은 마주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 장면은 극적인 파토스로 점철된, 즉 사랑과 복수와 애정과 원망과 동정과 안타까움이 어지러이 얽힌 복잡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사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장면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이 장면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감돌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속이 빈 허수아비와 같다. 이 비어있는 모든 것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암흑의 동공들만 남은 이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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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풍요와 수확의 상징으로서의 허수아비. 허수아비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새나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가장하여 수확을 앞둔 들녘에 세워놓는 허수아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수아비라는 것은 또 실체가 없는 어떤 것, 속이 비어있는 어떤 것, 껍데기, 죽음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수확이 다 끝난 들판에 기울어지고 망가진 채로 내버려진 허수아비들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러운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넓은 들판에서 이상한 표정의 허수아비 옆에서 죽어가던 공포영화의 주인공 친구들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또 허수아비들은 없었지만, 수확이 끝나 짚단을 세워놓은 밤의 들녘은 <살인의 추억>에서 또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쳐졌던가.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서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빈 들녘의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후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이미지들은 상당히 강조되어있다. 왜냐하면 이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오염되고, 망가져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채 검은 때로 얼룩진 이 허수아비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염된 것은 허수아비들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모든 것들은 오염되어 있다. 머리가 둘 달린 개,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인면어), 오염된 검은 흙을 잔뜩 머금은 조개, 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할아버지 등 상징적인 오염으로 인한 변형의 이미지들은 물론이고, 그 나머지 것들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들고 오염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인공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공들이 가장 오염되고 변형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오염이고 변형이란, 주인공들의 외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지영의 경우에는 외면적인 변형을 먼저 이야기할 수는 있다. 장지영의 몸은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다. 그는 이것이 어렸을 때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성호르몬이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라고 알고(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장지영의 진짜 문제는 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그 자신 스스로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지, 남성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즉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이다. 장지영은 본인이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남자라며, 결혼하기 위해 레인을 필리핀에서 데려오는가 하면, 여성이 되고 싶다고, 임신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적 혼란스러움은 비단 장지영의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대우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로이탄이나, 장지영이 여자인 것을 알고 그에게서 나와 거리를 떠도는 레인 역시,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과 변형이 오로지 그들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오염된 주변의 모든 것들에 있다. 이는 물리적인 오염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들어 있는 사회, 병들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오염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오염되고 망가지는 환경은 우리의 정신도 오염시키고 망가뜨린다. 아내를 구하러 필리핀에 간 사람들이 필리핀의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이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여자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결혼을 해본 적이 있는가.""병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리적인 가치(몸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계량화하는 이 질문들은 망가진 정신, 병든 마음들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오염된 환경, 병든 사회에서 조금씩 물들며 오염되어 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마지막은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무리로 느껴진다. 레인이 가져온 돌에는 희망의 싹이 움트지만("이 돌에 꽃이 피면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이를 희망적인 마무리로 볼 수 있을까. 이 현실의 지옥도에서(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둘 달린 개,케르베로스가 상징하듯) 이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런지. 마지막에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장지영의 옆에 한 소녀가 다가와 뭐라고 속삭인다. 이 소녀는 혹 장지영의 딸일까. 그녀는 임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것일까. 그 소녀는 뭐라고 속삭였을까. 이 마지막은 신비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살짝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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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가지는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몸이 중성화되어 가는,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는 장지영(장지석)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떤 환경적인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질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적소수자들을 다룰 때, 이들이 어떤 오염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 신의 섭리를 벗어난 어떤 비정상적인 것, 혹은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인식될 때에 비롯될 수 있는 위험들이 이 영화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한 번 해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이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무속(巫俗)의 이미지들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제시되는 두 여인의 성황당 나무 앞에서의 무속적인 춤사위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이 어떤 고민에 빠졌을 때 무속인들을 찾아가는 것들이 그렇다. 왜냐하면 무속이라는 것은 과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오염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염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의 반대되는 지점으로서의 무속의 설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병든 사회, 병든 환경을 보듬는 하나의 치유계로서 무속이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2009년 5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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